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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및 응답

[한산 김윤수] 경전과 수행법에 대한 법담

작성자satima|작성시간26.01.29|조회수38 목록 댓글 1

 

 

 

Q. 선사들이 흔히 ‘깨쳤다’고 말하는데, 간화선을 포함해 그러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수행법이 대승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법사님께서 공부하신 대승경전 가운데, 그런 수행법이 제시된 부분이 있습니까?

 

 

A. 저는 대승경전에서 그런 걸 찾지는 못했어요. 대승경전에서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 하고 이렇게 수행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능엄경 정도의 경전에 좀 기이한 수행법이 있긴 한데, 그것도 표방하는 정도이지 구체적인 수행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저는 대승경전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Q. 그렇다면 대승경전에서도 ‘팔정도’라는 용어는 사용되는데,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팔정도는 초기경전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로 설명되어 있습니까?

 

 

A. 화엄경 같은 데는 다 이런 게 모여가지고 있기 때문에 초기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거하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Q. 그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실제 수행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A.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팔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초기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게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서 수행의 기초로 할 수 있을 정도의 가르침은 아닌 것으로 보이고 표방만 하는 거 아닐까 합니다.

 

 

Q. 이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팔정도 가운데 ‘정념(사띠)’의 경우, 초기경전에서는 『대념처경』에서 구체적인 수행법이 제시되고, 그 내용은 아함경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에는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경전이 있습니까?

 

 

A. 전혀 없습니다

 

 

 

 

 

 

Q. 하나의 사상이나 수행 체계가 다른 문화권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혼란과 변형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의 현실을 보더라도, 수행에 대해 질문하면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가 반복되어 왔습니다.

 

만약 수행에 대한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수행자가 그 체계를 체득해 가는 과정에서 기준이 될 틀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염오·이욕·해탈로 이어지는 수행의 구조는 부처님 가르침 안에 분명히 제시된 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본 틀은 불교학자나 스님들이 제자와 신도를 지도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지침으로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A. 그렇죠. 현실적으로 지금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할 수 있는 수행 체계를 비교적 온전히 갖춘 전통은 사실상 테라와다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파들도 이론적인 논의는 남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결국 경전에 의지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다른 전통들 역시 완전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의지할 만한 기준이나 규준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테라와다 불교 역시 한국 불교 안에서 점차 정립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수행의 표준이 될 만한 체계로 잘 정리되고 자리 잡아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아함경은 산스크리트 원전 기준으로 보면 4부 니까야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지식인이나 수행자들은 아함경 외에 별도의 수행법이 거의 없던 상황에서, 그 경전을 어떻게 활용해 수행했을까요?

 

 

A. 제가 추측하기로는 아함경이 한문으로 번역될 무렵

예를 들면 4 - 6백년경 산스크리트 아함경이 들어왔다는 것은 다른 문헌들도 많이 들어왔을 거라는 건데, 아함경에 따라서 아함경 주석의 방법으로 수행법을 따로 기록한 자료는, 현재로서는 특별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Q. 그렇다면 번역 과정에서 많은 내용이 누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A. 아니요. 예를 들면 아까 말했듯 대념처경의 경우만 해도, 대념처경이라는 경만 있으면 상좌부의 주석으로 따로 설명이 뒤따르지 않으면 원칙은 알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그런 게 아함경에는 없다는 건데요.

아함경의 경우도 옛날 4~5세기 5~6세기경에는 산스크리트로 들어온 게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중국에서 수행하는 사람도, 그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불교 공부하면 갈증이 많이 느끼지 않습니까? 이게 어떻게 하는 걸까?

그러면 그때도 산스크리트본이라도 얻어서 자기네들이 참작을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 20년 전에 우리나라의 조계종 분위기처럼, 아함경이나 그 초기 경전을 천시하고 그걸 못하게 막는 분위기 속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번역이 되어 있는 걸 보면, 그런 뒤따르는 자료가 이렇게 잘 번역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제가 대승경전을 처음 공부할 때 금강경과 반야심경부터 접했습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음에도, 금강경의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라는 구절이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모든 현상이 실체적 상이 아님을 본다면 그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또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역시, 오온이 공함을 보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명확하게 다가왔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그 상태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 했지만 제가 가지고 있던 대승경전에서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제 주변에는 초기경전도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도 없었고, 능엄경에 수행과 관련된 언급이 일부 보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대승경전을 충분히 섭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애초에 대승경전에는 그러한 구체적 수행법이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까?

 

 

A.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게 거기에 '구체적인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고요.

결론은 옳다. '약견재상비상하면 즉견여래' 라는 그 말은, 부처님이 수행하라고 하는 그걸 하라는 거다.

오온개공을 조견하라고 하는 것도 그걸 지금 하라고 하는 것이고요.

우리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의해서 수행하는 것도 제상이 비상이 아님을 보려는 것이고 오온이 공하다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 그게 우리 초기불교의 수행법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도 명확하게 나와 있고 그건 초기불교 가르침하고 전혀 어긋나지 않습니다.

 

 

Q. 그렇다면 어느 시점에서 교리와 수행 체계가 단절되거나 중첩된 것일까요?

화두 수행이 등장하면서 기존 교리가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A. 기존의 수행법으로는 성과가 잘 나지 않아서, 그 대안으로 간화선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Q. 불교 교리를 바탕으로 출가한 승려들이 기존 교리를 사실상 버리고 새로운 수행 체계를 세운다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 가능했을까요? 중국은 도교 등 다른 사상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A. 저 역시 그 점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이든 우리나라든,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 불교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했는지는 여전히 불가사의한 부분입니다.

 

 

 

 

Q. 제가 가장 안타깝게 느끼는 점은, 우리나라에는 전통과 체질에 맞는 수행 체계가 자생적으로 충분히 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상황을 보면 형식만 대승일 뿐, 많은 수행자들이 사실상 초기불교 수행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테라와다 전통을 온전히 계승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존의 화두 수행이나 전통적 수행 체계를 모두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아함경을 비롯한 전통 있는 경전과 그것을 바탕으로 수행을 다듬어 온 스님들의 노력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A. 현실적으로는 수행법이 상좌부 수행법 밖에 지금 남아 있는 게 없는 셈이니까요.

상좌부 테라와다 불교 수행법밖에 남아 있는 게 없으니까, 그나마 그건 또 실질적인 수행을 미얀마나 태국 이런 데서 지도도 하고 이러니까 지금 남아 있는 거에 의지할 수 있는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머지 자료는 참고 자료로 활용을 하고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Q. 저는 화두 수행 자체를 매우 의미 있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수행의 근본을 건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염오·이욕이라는 수행의 틀 안에서, 이를 사마타나 위빠사나의 관점으로 체계화해 안내한다면 화두 수행도 훨씬 효과적으로 전승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A. 간화선을 위빠사나 수행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겠습니까?

 

 

Q. 가능하다고 봅니다.

화두 수행에서 강조되는 ‘의심을 일으켜라’는 것은 개념적 탐구를 지속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 오온에 대한 관찰로 구체화한다면,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 (움직임, 감각, 반응)에 대해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념처 수행과 같은 방식의 관찰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국 위빠사나 수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화두를 버리지 않고도 이를 기존 수행 범주 안에서 재해석해 체계화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한 교육 체계가 형성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A. 그 점이 쉽지 않은 이유는, 사념처 수행은 우리한테 일어나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을 의도적으로 조정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쫓아가서 지금 알아차려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걸 끊임없이 계속 하라는 건데, 간화선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지금 화두를 중심으로 모아가지고 집중하는 거거든요.

그걸 사념처 수행쪽으로 풀어가는 것은 결국은 사념처 수행이라는 것이지 그거는 이미 간화선을 벗어나버리는 수행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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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아 | 작성시간 26.01.29 현실적으로 지금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할 수 있는 수행 체계를 비교적 온전히 갖춘 전통은 사실상 테라와다 불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파들도 이론적인 논의는 남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결국 경전에 의지해 해석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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