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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선술수련체험기仙術修練體險記 지감, 조식, 금촉의 삼법회통(止感, 調息, 禁觸의 三法會通)의 근본스승이신 김승도 총재님이 직접 쓰신 수행기

작성자나무|작성시간17.06.06|조회수631 목록 댓글 0

선술수련체험기

仙術修練體險記 


丹瀘단로

제1편

慈正 김승도 총재


내가 어머니의 胎中(태중)으로부터, 落地(낙지)-, 그 첫 呱呱(고고)의 聲(성)을 터트렸던 것은 1945년 陰6월9일 午時였다. 世上이란 곳에 처음 떨어진 嬰兒(영아)인 나로서는 캄캄한 混沌(혼돈)속에서, 무엇이 무엇인지를 분간할 才幹(재간)이 있을 턱이 없었고, 그러므로 아무런 記憶 하나인들 지닐 수 있을 까닭이 없었다. 다만 자라나면서 차차 들은 말로써 짐작이 되어, 내가 태어났던 곳이 바로 지금의 忠淸南道(충청남도) 公州(공주)에 있는 나의 生家(생가)였으며, 나는 아버지 金東勳(김동훈)과 어머니 劉仙粉(류선분)사이에 四남四녀중 三남으로 태어났던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本貴(본귀)이 三陟金氏(삼척김씨)의 제三十五世孫으로 그렇게 血統을 받은 나는 漢醫師를 하시고 계시던 아버지 슬하에서 유복하게 무럭무럭 자랐었다. 내가 그 "四男中 三男" 이었다는 家係上(가계상)의 次序(차서)를 생각하면, "我"라는 生命個體(생명개체)에 씌워진 굴레 같은 生來的運命(생래적운명)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三男인 나로 하여금 당신의 漢醫란 仁術의 天職(천직)을 무슨 귀중한 보배나 되는 것 처럼 나에게 오롯이 그 대물림을 하려고 作心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까닭은 그후 내가 상당히 성장했을 때 그 아버지의 슬하에 斫刀에 藥草를 썰곤 할때 얼핏 들려주신 아버지의 말씀에서 내가 태어난 명줄이 당신의 籤術(첨술)로써 당신의 모든 學術을 相讀 받을 수 있는 唯一한 適任者(적임자)였음을 判別斷定(판별단정)했던 結果(결과)였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漢學者(한학자) 뿐만 아니라 우리 古來(고래)의仙道(선도)에서 示演된 工術까지 이미 修練通學하고 계셨던 터였다. 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부터 손수 나에게 이른바 그 工修練法을 傳受해 주시며, 天字文으로부터 "童夢先習" "小學" "大學"을 學習토록 회초리를 잡으시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틈틈이 傳來의 民間療法인 "單方秘法"을 들려주시며 익혀가라고 하셨던 터였다. 그리하여 그럭저럭 나는 열네살에 접어들었었다. 어느날 밖에서 놀고 있다가 어머님의 부름을 받고, 집으로 갔더니 漢方診療室로 쓰시는 바깥사랑에 아버님은 웬 낯선 손님 한 분과 對坐하여 환담을 나누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붙들려 들어온 나를 보자 대끔 嚴重(엄중)한 말씀으로 <너 이녀석, 저 어른께 큰절 세 번을 정중하게 올리고 앞으로는 평생토록 사부님으로 깍듯이 뫼시도록 하거라!>라고 申飭(신칙)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아버지의 지시대로 그 낯선손님 앞에 너부죽이 무릎을 꿇으며 큰절 세 번을 정중하게 드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 나의 이 같은 "세계기네스북 기록보유자"로서 <쇠를 먹는 인간 불가사리>란 別稱(별칭)이 붙게 된 빌미를 준 첫 연줄이 바로 그날 그 낯선 어른께 올린 나의 큰절 세 번과 아버지의 말슴이셨던 "평생사부"라는 말 한다디 였으며 그리고 그것은 一生에 중요한 획을 그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분을 따라 "鷄龍山"에 入山을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나는 아버지로부터 일곱 살 나던 해부터 전수 받아 조금씩 익혀오던 "仙術"인 < 工法>을 그분 아래서 본격적으로 수련하기에 이른 터였다.

그분의 성함은 <柳東洙유동수>씨 이셨다. 그분은 30여년전 이미 他界하셨지만, 그분의 脈은 생생히 지금의 나를 통해 살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유동수" 師父아래서 8년간을 私塾 鍛練하면서 工術뿐만 아니라 <奇門遁甲藏身術기문둔갑장신술> 그리고 우리겨레의 始祖<檀君> 할아버지에 관한 上古歷史와 또 그 <檀君國祖>께서 내리셨다는 眞經<天符經><三一誥삼일신고><參佺戒經>에 걸쳐서 두루 工夫를 익혀왔던 것이다.

아스름한 새벽안개 자욱한 山谷間에 오직 들리는 것이라곤 바람소리 뿐인 나에게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그 매일 매일의 판에 박힌 天地의 運行幻術외에는 다른어느 變化나 그 변화에 따르는 새로운 外界들을 접할 수 없었던 노릇이었다. 그것은 한시도 猶豫(유례)가 없는 修練의 연속이 그 仁慈한 듯 엄한 스승의 監理下에서 다른 雜念에 빠져들 寸刻의 餘裕(여유)도 가질 수 없었던 노릇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새롭게 터득해 가는 오묘한 "仙術"의 怳惚境이 山中生活에서 특별히 눈길을 돌릴만한 꺼리도 있지를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었던 것이다.

다섯 근이 넘는 모래주머니를 양다리 발목에 달고 九折羊陽같은 산길을 달려 오르내리는가 하면 蓄를 위한 吐納(토납)의 調息과 밤 子時 그리고 낮 午時에 倦怠도 疲勞도 睡眠도 멀리해버리라는 人情머리라곤 한푼도 없으리 만치 冷嚴스런 그 師父의 指導아래 그 이른바 "火候"를 통한 "下丹田" 成丹의 긴 旅程은 어린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忍苦"와 "克己"를 諦念化시켜 갔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나는 當時 어린 가슴속이나마 묘하게도 엇갈려 차오르는 듯한 "傲" 때문에 그 뼈를 깍는 修練時間을 끝내 다 마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人生"이란 그러한 "傲"가 運命을 바꾸어 놓기도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1 篇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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