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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산 청평사와 이규보 - 죽어 이름 남기는것보다 살아 탁배기 한잔이 더 낫다.

작성자尋山|작성시간26.06.19|조회수64 목록 댓글 0

오봉산 청평사와 이규보 - 죽어 천추만대 이름이 전해지는것보다는 살아 생전 탁배기 한잔이 더 값지다.

지인이 화천 유촌리에 능이산 3만평이 있어서 삼도볼겸 능이도 딸겸해서 자주 가는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또 다른 지인이 오음리에서 산삼 등을 수집해서 도매로 판매하는 가게를 열었던 탓에 한동안 매주말마다 가서 살다시피했던 화천과 양구로 가는 길목인 오음리에 갈려면 춘천 북쪽 배후에 있는 아주 높은 고개로 한때는 산삼의 성지(지금도 산삼산지이긴 매한가지지만)였던 배후령을 넘어야만 한다.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서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로 46번 국도(춘양로)를 타고 가다보면 개통 당시부터 2016년까지는 국내 최장터널(5.1km)이였다가 동해고속도로의 문무대왕1터널 개통으로 1위 자리를 내어준 후 인제양양터널의 개통으로 또 밀려났고 그 뒤로도  재약산터널, 신불산터널, 
진해터널, 신월여의지하도로, 보령 해저터널, 
영산터널, 남한산성터널 등이 연이어 개통되어 5위권 밖으로 밀려났던 지리 지리하게 긴 배후령 터널을 지나면, 월남과 지형이 아주 흡사하다해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월남 파병전 훈련받았던 오음리가 나온다. 이 오음리 앞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 자락에 고려 차인(茶人) 이자현이 문수원(文殊院)을 세우고 고려정원을 가꾼 곳으로, 오늘날 아름다운 계곡과 소양강 유람선 코스로 유명한 문수원의 후신(後身)인 청평사가 나온다.

고려 고종(高宗) 시대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와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淸平寺. 문수원)는 고려 시대 문인과 사대부들이 불교 및 산수 자연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적 연결고리로 고려 시대 대표적인 '거사(居士: 세속에 살면서 불교를 깊이 수행하는 선비)불교'의 성지다.

청평사를 창건하고 은둔하며 수행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다인(茶人)으로 우리나라 차와 차문학의 지평을 열었던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과 대문호 이규보는 무신정권기라는 혼란한 현실 속에서 세속적인 벼슬길과 고고한 반세속적 문인 정신 사이에서 항상 갈등했는데, 이때 이규보는 이자현과 같은 선배 '거사'들의 청정한 삶과 정신세계를 깊이 연구하고 존경했다. 하여 청평산(현 오봉산) 문수원은 고려 지식인의 거점이 되었다.

현재의 청평사인 당시 '문수원(文殊院)'은 고려 문벌귀족과 왕족들이 자주 찾던 수행의 안식처이자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이규보를 비롯한 고려의 문인들은 이곳 청평산의 수려한 자연(구송폭포, 영지 등)과 사찰을 방문하거나 선배 거사들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산수시(山水詩)를 남기는 등 깊은 문학적 유대를 형성했다.

이들은 모두 자연을 사랑한 문학적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데, 이규보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불교와 도교를 폭넓게 포용하는 사상적 특징을 보였다.

청평사 일대의 고요하고 세속을 벗어난 산수 풍경은 이규보가 그의 시(예: 춘일방산사)에서 끊임없이 동경했던 '자연과 인간의 합일' 및 '태평스러운 분위기'와 완벽하게 맞닿아 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려있는 '춘일방산사(春日訪山寺)'를 보자.

"風和日暖鳥聲喧(풍화일난조성훤)
바람 부드럽고 햇볕 따뜻하여 새들은 시끌벅적 지저귀는데,

垂柳陰中半掩門(수류음중반엄문)
드리워진 버드나무 그늘 속에 문은 반쯤 닫혀 있네.

滿地落花僧醉臥(만지낙화승취와)
땅에 떨어진 꽃잎을 이불 삼아 스님은 취해 누워 있고,

山家猶帶太平痕(산가유대태평흔)
산속 절간에는 아직도 태평성대의 흔적이 남아 있구나."

이 시는 자연과의 조화가 뛰어난 시로 봄날의 따뜻한 풍경과 어우러지는 새소리, 버드나무, 그리고 흩날리는 꽃잎의 묘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롭게 묘사되어있다.

이같은 연유로 청평사에는 이규보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바, 그의 발자취를 쫓아서 찾아간 청평사에서 본 이규보의 시(詩) 중에 '示子姪'이란 시가 있다.

고려의 대문호이자 대정치가인 이규보(李奎報)가 아들과 조카에게 준 詩 '示子姪'를 보면 죽은 후의 삶을 알수없으니 살아 생전 원하는거 먹고 마시다 가는게 더 낫다면서 늙어가는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도 힘이 있고 마실수있는 능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량은 점차 급격하게 떨어지다가 어느날 술이 있어도 마실수없는 즉 몸에서 받아드리지 못하여 그림의 떡(畵中之餠)이 되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死後千秋萬歲之名은 不如生時濁酒一杯라 (사후천추만세지명 불여생시탁주일배: 죽은 후 천추만세까지 전해지는 이름은 살아생전 탁배기 한잔만도 못하다)."

즉 대문호 이규보는 '사후의 세계보다 살아 생전(生前)이 더 소중하다'고 봤던 것이다.

이같이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1168 ~ 1241)가 아들과 조카에게 준 시 '示子姪'를 보면 늙어가는 노인의 간절하고도 애틋한 소망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죽은 후 자손들이 철따라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한들 죽은 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세월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 가묘(家墓)에서도 멀어지면 어느 후손이 찾아와 성묘하고 돌볼 것이냐고 반문했다.

찾아오는 후손 하나 없고 무덤이 황폐화되어 초목이 무성하니 산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 곰이 와서 울고 무덤 뒤에는 승냥이가 울부짖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고 했다.

산에는 고금(古今)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지만 넋이 있는 지 없는 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탄식하여 사후(死後) 세계를 연연하지 않았다.

이어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썼다.

"靜坐自思量(정좌자사량: 조용히 앉아서 혼자 생각해 보니)

不若生前一杯濡 (불약생전일배유: 살아생전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 것만 못하네)

我口爲向子姪噵(아구위향자질도: 내가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노니

吾老何嘗溷汝久(오노하상혼여구: 이 늙은이가 너희를 괴롭힐 날 얼마나 되겠는가)

不必繫鮮爲(불필계선위: 꼭 고기 안주 놓으려 말고)

但可勤置酒(단가근치주: 부지런히 술상이나 차려다 주려므냐)"

이와같이 만년의 이규보가 간절하게 바란 것은 쌀밥에 고기반찬이 있는 풍성한 진수성찬도 아니요 부귀공명도 아니며 불로장생도 아니다.

다만 자식들이 살아생전에 목이나 축이게 술상이나 차려다 주는 것뿐이었다.

이 얼마나 소박한 노인의 꿈인가?
비록 탁주일망정 떨어지지 않고 항시 마시고 싶다는 소망이 눈물겹지 않는가?

이 시가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것은 노인들의 한과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 있고 꾸밈없는 진솔한 소망이 가식없이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원(悲願)은 비단 대문호 이규보만의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노인들의 소망이기도 하다.

아! 요즘 세상에 어느 자식이 이 소망을 들어 줄 것인가?

사후(死後)의 효(孝)보다 생시(生時)의 효가 진정한 효도(孝道)인 것을 요즘의 자식들이 알기나 할까?

다들 생업에 바쁘다는 핑게로 고작 명절때나 찾아가는게 현실인데, 불행하게도 이같은 현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해질듯해보인다.

유교의 사서삼경 중 하나인 대학(大學) 정심장(正心章)에

"심부재언(心不在焉)하면 시이불견(視而不見)이요, 청이불문(聽而不聞)이며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니라!"는 말이 나온다.

즉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효(孝)를 행하고자 하는 이들은 깊이 새겨듣고 실행할 일이다.

해서, 우리세대에서는 자식들의 돌봄도 기대하지 말고, 자식들에게 짐도 되지 말며, 우리 살아있을 때 부지런히 경치 좋은 곳 찾아다니고 그 지방 특산으로 만든 맛난 음식 많이 맛보고, 시간 날때 주위 친구들 부지런히 만나서 웃고 떠들고 이규보의 말대로 딱배기 한 잔 기울이면서 남은 여생 마음껏 즐기다 가는게 쯔이하오(最好!) 즉 가장 좋은 일이 아닐까 한다. 🍺🥂🍻..
뭐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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