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이 그리는 위연의 얼굴은 잘 익은 대추와 같고,
눈은 낭성(朗星: 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다. 연의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관중은
이 이미지를 끝까지 관철하여, 마지막에는 반역을 기성(旣成)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위연은 어떤가? 정사 등의 사료를 보면,
그는 삼군의 우두머리인 촉의 맹장이며, 촉에 충성을 다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을 공략한 후에 유비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 수비의 대임을 위연에게 주었다. 제갈량이 제1차
북벌에서는 자오곡의 기습 작전을 헌상하였다.
그의 계책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시종 분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위연의 죽음에 대하여 기술한 정사의 <위연전(魏延傳)>을 보면,
양의가 마대를 보내 위연을 쫓고, 결국 붙잡아 죽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 이유가 연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역모
때문이었을까?
정사의 <후주전>과 <위연전>의 주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위연에게는 원래 촉에 반역할 의지는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 때문이었다.
또 연의에서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묘사되었고, 반역의 악명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 위연은
억울한가.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할까.
현재의 많은 학자는 위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므로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량소의 저작인
<삼국인물평전(三國人物評傳)>의 위연평정(魏延評傳)>과 성도 무후사
박물관에서 펴낸 <무후사대관>의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 등에서도
모두 위연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논자는 위연을 촉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늬 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오곡의 계책은 북벌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이 거병(擧兵)한 것은
양의 때문이었지 반역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왔다.
역사적 인물로서 위연은 확실히 행실이 나쁜점이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그는 풍운을 질타한 촉의 대장이었고,
촉한 정권을 위해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소한 못된짓을
꼬투리 잡아 꾸며진 문학적 이미지는 시종 악인이었지만,
이것은 역사상의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상의 이미지가
역사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역사상의 위연을 평가하는 경우라면 문학적 이미지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대해서는 역사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성공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위연의 평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제갈량의 사후에 양의와
싸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위연의 큰 잘못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위연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소동을 벌인 것은
위에 투항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소동의 성질과 결과는 분명히 촉에
대한 역모이며 적대 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며,
억울한 죄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판정을 뒤엎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위연은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정사의 <양의전(楊儀傳)>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蔣琬)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털댔다.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비의가 깜짝놀라 이것을 후주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후에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쪽의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기술에서 적어도 두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역모의 생각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근 이 문제에 관하여 <사천문물(四川文物)>(1989년 제4기)에
도유지(陶喩之)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현재의 한중 석마파(石馬坡)
유적을 고증함으로써,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장완과 비의에 의하여
이미 억울함이 풀렸던 것과 역사상의 위연이 언제까지라도 억울한 죄를
쓴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도씨의 논문은 현재의 한중 북문 밖의 석마파 유적이야말로 위연의
억울함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논문에서는 청의 건륭(乾隆) 연간에 왕행검(王行劍)이 펴낸
<남정현지(南鄭縣志)> 중의 <석마유적>이라는 대목을 인용하였다.
위연은 원래 노장(老將)으로 전공(戰功)이 있다.
말년에 함부로 날뛰어 자신도 죽고 가족도 몰살되었지만,
장완은 그 본의를 헤아려 양의를 죽이고자 하였을 뿐,
위연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에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여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석마의 유적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연은 억울하니 그 동안의 판결을 뒤엎어야만 할 것인가.
위연이 죽은 얼마후에 조정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그를 둘러싼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앞으로 확실한 증거만 확보된다면, 위연의 대한 평가는 다시 고쳐질
것이다.
위연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써 위연이 어서 억울한 누명을
벗기를 바란다.
눈은 낭성(朗星: 밝은별)과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후두부에
반골(反骨)이 돌출되어 있어 반역자의 관상이다. 연의에서는
손권의 입을 빌어 '용기는 충분하지만 심근이 바르지 않다. 공명이
죽은 후에는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관중은
이 이미지를 끝까지 관철하여, 마지막에는 반역을 기성(旣成)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위연은 어떤가? 정사 등의 사료를 보면,
그는 삼군의 우두머리인 촉의 맹장이며, 촉에 충성을 다하여
많은 전공을 올린 인물이다. 한중을 공략한 후에 유비는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중 수비의 대임을 위연에게 주었다. 제갈량이 제1차
북벌에서는 자오곡의 기습 작전을 헌상하였다.
그의 계책은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시종 분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위연의 죽음에 대하여 기술한 정사의 <위연전(魏延傳)>을 보면,
양의가 마대를 보내 위연을 쫓고, 결국 붙잡아 죽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게 구체적 이유가 연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역모
때문이었을까?
정사의 <후주전>과 <위연전>의 주에서 인용한 <위략>에 의하면,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연은 위에 투항하지
않고 남으로 돌아가 양의를 공격했지만, 실은 역모 따위는 없었다'고
쓰여 있다.
위연에게는 원래 촉에 반역할 의지는 없었고, 그가 죽은 것은 오로지
양의 때문이었다.
또 연의에서 억센 기질의 소유자로 묘사되었고, 반역의 악명을
뒤집어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 위연은
억울한가. 그의 명예를 회복해야만 할까.
현재의 많은 학자는 위연의 죽음은 억울한 것이므로 명예를
회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담량소의 저작인
<삼국인물평전(三國人物評傳)>의 위연평정(魏延評傳)>과 성도 무후사
박물관에서 펴낸 <무후사대관>의 '억울하게 죽은 대장 위연' 등에서도
모두 위연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논자는 위연을 촉에 있어서 유일한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장군이며
얻기 힘든 인재였다고 말한다. 또 그의 촉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고, 머리에 반골(反骨)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터무늬 없는 말에 지나지 않으며, 자오곡의 계책은 북벌을
성공시켰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위연이 거병(擧兵)한 것은
양의 때문이었지 반역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한 것일까?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견해가 나왔다.
역사적 인물로서 위연은 확실히 행실이 나쁜점이 있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그는 풍운을 질타한 촉의 대장이었고,
촉한 정권을 위해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사소한 못된짓을
꼬투리 잡아 꾸며진 문학적 이미지는 시종 악인이었지만,
이것은 역사상의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상의 이미지가
역사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역사상의 위연을 평가하는 경우라면 문학적 이미지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대해서는 역사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성공했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위연의 평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제갈량의 사후에 양의와
싸운 것은 아무리 보아도 위연의 큰 잘못이다. 따라서 그것 때문에
위연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가 군사를 일으켜 소동을 벌인 것은
위에 투항할 목적은 아니었지만, 소동의 성질과 결과는 분명히 촉에
대한 역모이며 적대 행위이다. 따라서 그가 죽은 것은 자업자득이며,
억울한 죄 때문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은 판정을 뒤엎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위연은 억울한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학자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검토하였다.
정사의 <양의전(楊儀傳)>에 의하면, 양의는 승상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받은 데다 반역자 위연을 죽였기 때문에 스스로 공적이 아주 크고,
따라서 제갈량을 대신하여 정무를 맡게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승상의 직위는 장완(蔣琬)이 대신하게 되었다.
장완이 실권을 잡게되자, 양의의 직권은 크게 줄어들었다.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지만, 아무런 직무도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할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양의가 참을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비의가 방문했을 때 그는 이렇게 투털댔다.
"먼저 승상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만일 군사를 이끌고 위에 항복했다면
이렇게 영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비의가 깜짝놀라 이것을 후주에게 밀고했다.
양의는 옥에 갇혔고 얼마후에 자살했다.
양의는 위연과 대립한 한쪽의 주역이었다.
그러므로 위의 기술에서 적어도 두가지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위연과 양의의 다툼은 평소의 모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위연에게는 역모의 생각 따위는 없었고, 오히려 양의야말로
생각이 얕았다.
둘째, 후주 유선과 승상 장완이 양의의 직권을 줄이고 옥에 가둔 것은,
촉한 당국이 위연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을 의미한다.
양의를 처단한 것은 아마도 조정이 위연의 명예를 회복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생각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결론에 이르지는 못했다.
최근 이 문제에 관하여 <사천문물(四川文物)>(1989년 제4기)에
도유지(陶喩之)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현재의 한중 석마파(石馬坡)
유적을 고증함으로써, 위연이 죽은 얼마 후에 장완과 비의에 의하여
이미 억울함이 풀렸던 것과 역사상의 위연이 언제까지라도 억울한 죄를
쓴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도씨의 논문은 현재의 한중 북문 밖의 석마파 유적이야말로 위연의
억울함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역사적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논문에서는 청의 건륭(乾隆) 연간에 왕행검(王行劍)이 펴낸
<남정현지(南鄭縣志)> 중의 <석마유적>이라는 대목을 인용하였다.
위연은 원래 노장(老將)으로 전공(戰功)이 있다.
말년에 함부로 날뛰어 자신도 죽고 가족도 몰살되었지만,
장완은 그 본의를 헤아려 양의를 죽이고자 하였을 뿐,
위연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에 과거의 공로를 생각하여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는 않았지만,
석마의 유적이 후세에 전하는 것도 반드시 이유 없는 것은 아니다.
위연은 억울하니 그 동안의 판결을 뒤엎어야만 할 것인가.
위연이 죽은 얼마후에 조정이 그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그를 둘러싼 재판은 종결되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앞으로 확실한 증거만 확보된다면, 위연의 대한 평가는 다시 고쳐질
것이다.
위연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써 위연이 어서 억울한 누명을
벗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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