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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지식

제갈량의 남만정벌

작성자영교아부|작성시간10.02.22|조회수318 목록 댓글 3

<한서-지리지>, <후한서-군국지>, <화양국지> 등의 사료에 의하면, 당시 남중에서는 필수품인 소금이나 철뿐만이 아니라 금.은.동.납.주석 등 광물 자원이 많이 산출되었다. 그 외에도 밭 가는 소.군용마.피혁 등이 풍부했던 것 같다. 후주의 촉나라 정권 말기에 등예가 이끄는 위나라 군이 촉나라의 수도를 압박했을 때, 후주 유선에게 남중 7군으로 천도를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다.(‘촉서-초주전’) 이것은 남중이 촉나라 경계의 일부분을 떠받칠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남중에서 돌아온 공명이 가지고 온 이들 물자로 “나라는 풍요해졌다”(‘촉서-제갈량전‘)라고 진수도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그것이 남중 백성의 원망하는 소리를 낳았다는 것은 “맹획, 공명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 주었다”라는 민화가 여실히 말해 주고 있다. 남중으로의 천도에 마음이 기운 후주에 대해서, 공명이 남정을 한 후에 남중의 백성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하고 병력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어서 촉나라를 원망하고 있으므로, 이 땅으로의 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충신인 초주가 반대한 것은 그것 때문이다. 제갈공명이 약탈자가 되어야 했을 정도의 경제 정책을 실행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촉나라의 국력이 핍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지리학의 권위자인 사념해는 공명의 남정에는 다른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하산집’) 당시 중국과 서방 세계의 교역은 일찍이 전한 장건에 의해 열린 육로인 서역길 대신에 해로가 빈번히 이용되고 있었다. 손권의 오나라는 일찍부터 여기에 주목하고, 교주(베트남령 하노이 이북)태수 사섭의 조공이라는 형태로 이 남해 교역의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공명이 이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당시 남해 교역의 주요한 길은 미얀마의 랑곤에 상륙하여, 그곳에서 이라와디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남중의 영창에 이르는 것이었다. <후한서-군국지>는 영창군의 인구를 189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변경의 군 지역으로서는 상당한 인구 수이다. 남해 교역이 초래한 번영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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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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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태사』고종 | 작성시간 10.02.22 잘 봤습니다.
  • 작성자『정서장군』삼국지만세!! | 작성시간 10.02.22 그만큼 위기였었군요...
  • 작성자『장작대부』벽계수 | 작성시간 10.02.22 교지는 삼국지에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하나의 주로써 손권의 보급창고였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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