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삼국지지식

[《통합》]장료의 처세와 죽음의 진실

작성자삼조[潤荷]|작성시간12.04.22|조회수1,477 목록 댓글 1

「삼국지연의」제 19회와 제 20회에선 조조가 여포를 비롯하여 그 부하인 진궁과 장료 등을 생포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진궁은 굳게 정조를 지키면서 비굴하지 않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반면, 구차히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한 여포는 조조가 유비의 의견을 물어본 뒤에 목매달아 죽고 만다. 장료는 또 달랐다. 조조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 크게 꾸짖으니, 이에 노한 조조가 검을 뽑아서 죽이려고 한다. 이에 유비는 조조의 팔을 잡고, 관우는 조조의 면전에 무릎을 꿇으며 장료의 정상을 참작해 주도록 부탁한다. 즉 장료는 붉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충성과 의리의 사나이니 마땅히 살려서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조조는 검을 내던지고 손수 결박을 풀어 주면서 상좌에 앉기를 청하니, 조조의 진심에 감동된 장료는 마침내 항복하고 만다.

 

나관중이 묘사한 이상의 내용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삼국지 장료전」에 의하면 '태조가 하비에서 여포를 격파함에 장료가 그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항복하니, 조조가 그를 중랑장에 앉히고 관내후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고 되어 있다. 따라서 장료가 조조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생포된 게 아니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항복을 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중랑장에 임명되고 관내후의 봉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중랑장을 배수하고, 관내후 작위를 하사했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방금 항복한 입장에서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한 인물을 어찌 곧바로 중랑장에 배수하고, 관내후 작위를 하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사리에 어긋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사서의 기록대로라면 장료가 조조를 향해 크게 욕지거리를 하고서도 풀려난 일이나, 유비와 관우가 나서서 전후 상황을 설명한 따위의 일은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묘사는 장료와 여포의 인품을 적절히 대비하여,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여포는 구해 주는 사람 없는데, 조조를 꾸중한 장료가 도리어 살아났다는 식으로 표현해서 적심충의(赤心忠義)의 선비는 결국 의리가 반복무상한 소인배를 이긴다는 이치를 가미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효과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제 86회에서는 위 문제 조비가 황초 5년에 군대를 거느리고 오나라를 치다가 오나라 장수 서성의 화공에 크게 패배하는 내용이 펼쳐진다. 조비가 목숨을 구해 창황히 달아나는 가운데 또 다시 쇄도해 들어오는 정봉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장료가 급히 말을 달려와 대적하는데, 정봉이 쏜 화살이 허리에 적중한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서황의 구원을 얻어 함께 조비를 보호하여 달아난다. 그리하여 장료는 허창으로 돌아왔지만 화살 맞은 상처가 도져 죽게 된다. 이에 조비가 후히 장사지내 준다.

 

그러나 장료의 죽음에 대한 나관중의 묘사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삼국지 장료전」등의 기술에 의하면, 장료의 사망 시기는 황초 3년이지 황초 5년이 아니다. 그리고 장료가 병든 기간 역시 매우 길었는데, 병든 몸을 불구하고 전투에 임하는 바람에 손권이 크게 두려워 한 일도 있었다. 게다가 화살에 맞은 상처로 죽은 것도 아니다. 죽은 장소도 강도이지, 광릉에서 화살에 맞고 허창으로 돌아와 죽은 게 아니다.

 

「삼국지 장료전」에는 '손권이 다시 위나라에 신하로 복종하겠다는 뜻으로 번신(藩臣)을 자칭했다. 당시 장료는 옹구에 주둔하고 있다가 질병을 얻었다. 황제는 시중 유엽으로 하여금 태의를 대동하고 가서 병을 치료토록 했으며, 근위병들이 소식을 물어가며 길을 이었다. 질병이 완쾌되지 않자 황제가 장료를 맞이하러 그가 있는 곳으로 나아갔는데, 수레로 몸소 가서 그의 손을 잡고 어의(御衣)를 하사했고, 태관은 날마다 어식(御食)을 날라주었다. 질병이 조금 나아지자 여전히 그곳에 주둔했다. 손권이 다시 반기를 들자 황제는 장료에게 배를 타고 가서 조휴와 함께 해릉에 이르도록 하니 장강을 굽어보게 되었다. 손권은 매우 두려워서 여러 장수에게 칙령을 내렸다. "장료는 비록 병중이지만 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자를 조심하라!" 이 해에 장료는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손권의 장수 여범을 격파했다. 장료는 병이 위독해져서 마침내 강도에서 죽었다. 황제는 눈물을 뿌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장료가 조조에게 항복한 뒤로 반평생 넘게 펼친 사업의 중요 부분은 남방에 주둔하면서 오나라를 견제하는 일이었다. 존유폄조(尊劉貶曹)를 지상 이념으로 삼고 있는 나관중이었지만 조조 진영에서 장료만큼은 비교적 호감을 가졌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유비와 관우가 장료의 목숨을 구해주고, 이후에 장료가 다시 관우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항복하도록 권했으며, 나중에는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정상 참작을 요구하는 복선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나라 정벌 중에 위 문제를 구하려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지용을 겸전한 장수가 나라를 위한 사업에 반평생이나 분투하다가 최후에는 생명까지 바치도록 묘사했으니, 그 형상이 기본적인 면에서 역사적 인물과 부합하고 있다고 하겠다.

 

출처 -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지 상식 백가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우리동네 제갈량 | 작성시간 14.12.17 태조가 여포을 격파함에 장료가 부하들과 투항했다. 관내후에 봉했다에서 연의의 상황도 이글에 맞습니다.
    여포을 격파중에도 아니고 격파함이니 격파중일수도 격파후일수도 있고...확실히 알수없으므로 격파중이라는 해석은 틀립니다. 연의처럼 장료가 항복했다면 그의 부장이나 부하들도 항복할수있고.. 관내후에 봉했다는건 당장이 아닌 나중에 봉했는데 짧은 글쓰기에서 그리 적을수 있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