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팔진도에 관한 이야기는 연의에서 여러 곳에 걸쳐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전기적(傳奇的) 색체가 농추하다. 나관중이 그리는 제갈량은 신선같은 인물이며, 팔진도는 그가 가진 이상한 보물 중의 하나로 묘사된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는 영감으로써 미리 어복포(魚腹浦)에 팔진도를 설치하였고, 오의 대장 육손을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뿐 아니라 나중에 북벌에 나섰을 때에도 팔진도로 사마의를 혼내 주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도 팔진도의 요체를 터득한 강유가 또한 팔진도를 설치하여 등애(鄧艾)를 혼내 주었다.
역사학적 시각으로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예는 근거도 없다. 그러나 신비적 색채를 없애고 정사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역사상 제갈량이 어딘가 색다른 병법의 진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진수가 말하듯 제갈량은 병법을 깊이 연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인가? 진(晉)의 이흥(李興)은 자신이 지은 <촉기(蜀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갈량의 팔진도를 고찰하여 그의 팔진도법을 미루어 보면, 손자, 오자의 병법에는 없는 것이다.>
곧 손자, 오자의 병법에서 팔진의 방법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것은 제갈량의 독창이라는 것이다. 나관중은 아마도 이러한 기술을 근거로, 제갈량이 교묘하게 팔진을 친 모습을 신선과 같이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창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팔진도의 원류는 분명히 존재하며, 결코 제갈량의 독창은 아니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언제쯤 고안되었을까? 아직 단정지어 말할수는 없다.
당대 독고급(獨孤及)의 <팔진도(八陣圖)>, 이전(李筌)의 <태백음경(太白陰經)>,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등에서도 모두 팔진도가 황제(黃帝)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황제 때에 만들어졌다는 설은 선진(先秦 : 진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한 고전들은 모두 팔진도가 중국 고대부터 전하는 특이하고 위력이 크며 복잡 다변한 군진의 법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강태공의 저작으로 알려진 병법서 <육도(六韜)>에도 팔진의 대략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칭은 팔진이 아닌 현익이다. 후한의 정현(鄭玄)이 주를 단 <주례(主禮)>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춘추 시대의 군사가 손무의 병법인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곡직진(曲直陣)이 팔진과 닮았다는 것이다.
또 1972년에 산동의 은작산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죽간의 <손빈병법> 속에 이미 <팔진편>이 있는데, 이것은 팔진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정사 <무제기>의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자료에는, 한은 진의 제도를 이어받아, 황제는 매년 시월에 장수(長水) 남문에서 오영사(五營士)를 모아 팔진을 만들어 훈련하였다고 하였다. 송의 왕응린(王應麟)이 지은 <옥해(玉海)>를 보면, 후한의 두헌(竇憲)은 항상 팔진으로써 흉노를 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늦어도 한대에 이미 팔진법은 군사에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이후 팔진법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서진 초년에 마릉은 삼천의 보병으로서 팔진법을 펼쳐 수기능의 이만 군사를 물리쳤다. 당대의 이정은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을 따라서 여러 해에 걸쳐 정벌하였는데, 팔진도법으로 싸워 많이 이겼다. 그래서 <통전>은 송 원일(阮逸)의 <이정문대>를 기록하고, 특히 팔진에서의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펼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 외에 당의 유우석이 지은 <가화록>이나 송의 악사가 지은 <노사(路史)>에서도 팔진도에 관한 논설을 싣고 있다.
그러므로 팔진도가 결코 제갈량의 독창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제갈량이 병법을 깊이 연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과 군사 활동에 있어서 창조적으로 이 고대 병법의 진영 형태를 발전시킨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후한서(後漢書)>의 이현(李賢) 주에는, 옛날에 팔진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그것을 따랐다고 쓰여 있다.
역사상 제갈량의 특기는 팔진도였다. <위략>에서는 사마의가 실제로 제갈량의 팔진을 시찰한 후에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재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쓰여 있다. 문헌중에는 제갈량이 팔진도로써 병사를 조련하여 적을 이겼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한보춘추>에는 제갈량이 팔진도로 맹획을 붙잡았다고 쓰여 있고, <옥해>에도 그가 팔진법으로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경주>에는 제갈량이 팔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쓰여 있고, <원화군현지>, <통지>, <원반구역지>, <촉중광기> 등에도 수많은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제갈량의 팔진도 유적은 모두 네 곳이다. 사천의 봉절, 신도, 쌍류와 섬서의 한중 면현의 정군산이다. 성도 부근의 두 곳이 가장 복잡하고, 한중은 국경의 전선이었던 까닭에 포진이 조금 복잡하고 엄밀하다. 그리고 동쪽의 봉절에 있는 진의 형태가 가장 간단하다. 이들 유적은 제갈량이 팔진으로써 군사를 훈련하고 전쟁을 일으켰던 역사적 증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동기상(董其祥)은 <사천대석문화연구(四川大石文化硏究)>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파촉 영내의 열석(列石) 유적은 속설에 제갈량이 돌을 나열해 진을 구축하고 군사 훈련에 이용한 것이라고 전해졌다.. 그러나 사방 일이리 사이에서 군사가 진퇴하거나 충돌하기에는 공간의 여지가 없으므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은 이것들이 고대 대석(大石) 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출처:이삼
역사학적 시각으로 보면, 이러한 이야기들은 모두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 사실 위의 세 가지 예는 근거도 없다. 그러나 신비적 색채를 없애고 정사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역사상 제갈량이 어딘가 색다른 병법의 진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즉 진수가 말하듯 제갈량은 병법을 깊이 연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인가? 진(晉)의 이흥(李興)은 자신이 지은 <촉기(蜀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갈량의 팔진도를 고찰하여 그의 팔진도법을 미루어 보면, 손자, 오자의 병법에는 없는 것이다.>
곧 손자, 오자의 병법에서 팔진의 방법은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것은 제갈량의 독창이라는 것이다. 나관중은 아마도 이러한 기술을 근거로, 제갈량이 교묘하게 팔진을 친 모습을 신선과 같이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창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팔진도의 원류는 분명히 존재하며, 결코 제갈량의 독창은 아니다. 그렇다면 팔진도는 언제쯤 고안되었을까? 아직 단정지어 말할수는 없다.
당대 독고급(獨孤及)의 <팔진도(八陣圖)>, 이전(李筌)의 <태백음경(太白陰經)>,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등에서도 모두 팔진도가 황제(黃帝)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황제 때에 만들어졌다는 설은 선진(先秦 : 진나라 이전)의 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믿기 어렵다. 그렇지만 위에 열거한 고전들은 모두 팔진도가 중국 고대부터 전하는 특이하고 위력이 크며 복잡 다변한 군진의 법칙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강태공의 저작으로 알려진 병법서 <육도(六韜)>에도 팔진의 대략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칭은 팔진이 아닌 현익이다. 후한의 정현(鄭玄)이 주를 단 <주례(主禮)>에도 비슷한 것이 있다. 춘추 시대의 군사가 손무의 병법인 <구지편(九地篇)>에 나오는 곡직진(曲直陣)이 팔진과 닮았다는 것이다.
또 1972년에 산동의 은작산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죽간의 <손빈병법> 속에 이미 <팔진편>이 있는데, 이것은 팔진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것이다.
정사 <무제기>의 배송지 주에서 인용한 자료에는, 한은 진의 제도를 이어받아, 황제는 매년 시월에 장수(長水) 남문에서 오영사(五營士)를 모아 팔진을 만들어 훈련하였다고 하였다. 송의 왕응린(王應麟)이 지은 <옥해(玉海)>를 보면, 후한의 두헌(竇憲)은 항상 팔진으로써 흉노를 쳤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늦어도 한대에 이미 팔진법은 군사에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갈량 이후 팔진법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서진 초년에 마릉은 삼천의 보병으로서 팔진법을 펼쳐 수기능의 이만 군사를 물리쳤다. 당대의 이정은 고조 이연과 태종 이세민을 따라서 여러 해에 걸쳐 정벌하였는데, 팔진도법으로 싸워 많이 이겼다. 그래서 <통전>은 송 원일(阮逸)의 <이정문대>를 기록하고, 특히 팔진에서의 군사를 움직이고 진을 펼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 외에 당의 유우석이 지은 <가화록>이나 송의 악사가 지은 <노사(路史)>에서도 팔진도에 관한 논설을 싣고 있다.
그러므로 팔진도가 결코 제갈량의 독창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제갈량이 병법을 깊이 연구하여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과 군사 활동에 있어서 창조적으로 이 고대 병법의 진영 형태를 발전시킨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후한서(後漢書)>의 이현(李賢) 주에는, 옛날에 팔진이 있었는데 제갈량은 그것을 따랐다고 쓰여 있다.
역사상 제갈량의 특기는 팔진도였다. <위략>에서는 사마의가 실제로 제갈량의 팔진을 시찰한 후에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재이다'라고 감탄했다고 쓰여 있다. 문헌중에는 제갈량이 팔진도로써 병사를 조련하여 적을 이겼다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한보춘추>에는 제갈량이 팔진도로 맹획을 붙잡았다고 쓰여 있고, <옥해>에도 그가 팔진법으로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수경주>에는 제갈량이 팔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고 쓰여 있고, <원화군현지>, <통지>, <원반구역지>, <촉중광기> 등에도 수많은 기록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제갈량의 팔진도 유적은 모두 네 곳이다. 사천의 봉절, 신도, 쌍류와 섬서의 한중 면현의 정군산이다. 성도 부근의 두 곳이 가장 복잡하고, 한중은 국경의 전선이었던 까닭에 포진이 조금 복잡하고 엄밀하다. 그리고 동쪽의 봉절에 있는 진의 형태가 가장 간단하다. 이들 유적은 제갈량이 팔진으로써 군사를 훈련하고 전쟁을 일으켰던 역사적 증거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그렇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동기상(董其祥)은 <사천대석문화연구(四川大石文化硏究)>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파촉 영내의 열석(列石) 유적은 속설에 제갈량이 돌을 나열해 진을 구축하고 군사 훈련에 이용한 것이라고 전해졌다.. 그러나 사방 일이리 사이에서 군사가 진퇴하거나 충돌하기에는 공간의 여지가 없으므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고고학자들은 이것들이 고대 대석(大石) 문화의 유적이라고 하였다.
출처: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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