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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의 자오곡 계책?

작성자우주대장군 太史慈|작성시간10.08.21|조회수983 목록 댓글 15




위연의 자오곡 계책은 자오곡을 10일내로 주파하면 하후무는 놀라서 도망할것이다. 그럼 내가 장안성을 함락시키겠다라는게 그 요체다. 

근데 저 계책을 채용하려면 작전을 처음부터 다시 짜야한다... (...);;; 

뭐 그건 그렇고 위연의 자오곡 계책의 성공률을 한번 따져보자.


① 포중에서 진령, 자오곡으로 이어지는 거리는 대략 660리정도로 알고 있는데(위나라의 도량형이 어떤지 잘 몰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뇌입원에 나와있는 정보를 빌리면 약 234Km) 하후연전을 보면 하후연은 3일에 5백리, 6일에 천리를 간다고 하였으므로 행군에 상당히 능한 부대가 평지를 행군하는 속도가 저 정도... 행군에 대해서는 하후연전에 보이므로 하후연은 행군에 대해선 삼국시대 내에서는 1인자로 봐도 무방할듯 싶지만 위연도 사졸양성에 능하다고 했으므로 하후연과 같진 않더라도 상당한 능력은 보여줄수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위연이 행군할 자오곡은 험지이므로 아무래도 평지의 행군거리와 비교하기는 무리일듯 싶고 자신이 말한 10일에 거의 근접하게 행군할수 있으리라 보여진다. 

② 자오곡에서 장안 라인까지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가야한다. 하지만 위연의 부대는 힘들게 행군한 상태이고 만약 위나라측에서 정보를 입수해 관련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면 지친 부대를 맞닥뜨린 위연의 부대는 이일대로의 병법대로 전멸할 가능성이 높다. 

③ 장안에 도착했을때 깜짝놀란 하후무가 성을 버려야한다. 자오도는 왕망때 건설한 곳으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 아니다. 

장로전에 관서의 주민 수만명이 자오곡으로 장로에게 달려왔다는 기사와 조진전에 장안에서 출발하여 자오도로 들어갔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장안같은 대성에 하후무같은 문관스타일의 장군이 배치된건 그만큼 관중의 민심이 안정되고 치적이 좋았다고 볼수 있다. 

안서장군이면 대략적으로 서방을 안무하고 위무하는 장군직으로 볼수 있을것인데, 그런면에서 전쟁에 더 중요성을 두는 정서장군과 진서장군과는 차이를 보인다. 

하후무는 종실이니까 퇴각하여 도망할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하후무는 안서장군이지 실질적으로 성을 지키는건 경조태수와 어사이다.

위나라의 항복규정과 법은 매우 엄격하여 90일이내에 항복하면 연좌되어 멸족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하후무는 종실이므로 그정도 처분까지는 받지않겠지만 상당한 처벌은 각오해야할것이다. 종실인 하후씨라 할지라도 죄를 지어 저멀리 변방인 낙랑군에 유배되었다는 기사도 있다. 그리고 장안성은 대성으로 공략하기 어려운 성이다. 10만의 병력으로도 공략하기 어려운 성을 5천명의 병력으로 공략한다고 호언장담한다고 하여 쉽게 믿을수 있겠는가? 

④ 사마의나 장합의 경우를 보면 위나라의 증원도 상당히 신속하게 이뤄진다. 위연의 정보만을 믿고 있다가 위나라군대가 신속하게 진군하면 위연이 지키는 장안성은 말라죽을 것이다. 장안에 대한 치안이 이뤄지지않았고 민심도 안정되지 않았는데 위연이 민심이 안정된 장안성을 함락하는 것은 말처럼 쉽게 되고 민심이 안정되지않고 치안도 이뤄지지않은 장안을 지키는게 말처럼 쉽겠는가? 

⑤ 좋다. 위연의 말대로 장안성을 함락하고 제갈량과 합류했다고 하자. 

제갈량의 전략은 농우를 평정하여 보급을 원활히 한다는데에 있다. 하지만 위연의 계책은 한중에서 진격하여 장안을 함락하는 것이기때문에 잘못하면 적으로 둘러쌓이는 형국이 될수 있다. 그리고 둔전을 통한 식량의 자급과 군수품을 자급자족해야한다. 

위나라가 장안을 잃었다면 위나라로서는 코앞에 적이 있는 격이기?문에 전면전을 벌일 것이다. 

위나라는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만 촉나라는 기나긴 보급로를 통해 한중으로부터 떨렁 장안을 점령한건데 보급이 될수 있겠는가? 한중으로부터 코앞인 오장원 등지에 보급하는것도 힘들었던 촉나라였는데 말이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100% 실패한다고 할순 없다.

하지만 제갈량의 정공보다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훨씬 위험한건 사실이다. 제갈량의 북벌이 과소평가를 받는건 결과적으로 실패했기때문이지 과정에선 더없이 훌륭했다. 대국인 위나라를 상대로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할 엄두를 못내게 만들었다. 

전쟁과 흡사한 축구에 비유하면, 한국이 브라질을 상대로 게임을 주도하여 문전에서 슛을 계속 때린 격이다. 비록 골은 넣지 못했어도. 

모험을 했던 경우인 관우의 북진, 유비의 이릉대전, 마속의 가정방어를 한번 생각해보자. 

관우의 북진은 위나라로부터의 형주침공을 적극적으로 방어한거다. 관우는 번성을 점령하여 위나라가 형주를 넘보지 못하게하려고 한것으로 보이는데 관우가 크게 성공하면서 위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게되고 원래부터 형주문제에 첨예하게 대립했고 동맹국의 성공으로 시기했던 오나라의 배반이 크게 작용하여 형주상실로 이어진 것이다. 

냉정하게 봤을땐 이건 관우가 매우 잘못했다기보단 관우의 북진이 지나치게 성공하여 위나라를 자극함으로써 전면전으로 이어져 전선의 확대를 불러 실패했다고 봐야한다. 위나라는 주도적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이 연계하고 외교적으로 오나라와 손을 잡았지만 관우는 형주지방으로부터의 재원만 활용했을뿐 중앙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없었다. 

순수한 무장인 관우로서는 전략적으로 의논할 참모가 없었던게 한계라고 볼수 있다. 

지키는게 답이었겠지만 자존심이 강한 관우로서는 그럴수가 없었겠지. 

형주상실로 분노한 유비는 이릉대전을 일으킨다. 위나라와 오나라에선 형주를 잃은 유비가 여력이 없어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내내 의협집단의 수장으로 지냈던 유비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의협집단인 장비, 아마도 관우생존시 주전력이었을거라 생각되는 풍습 등의 형주 인사들, 그리고 익주파와 창업2세대에게는 힘을 빌리지않고 전쟁을 준비한 것으로 생각한다. 순간적인 분노로만 전쟁을 일으킨게 아닌게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전쟁을 일으켰기때문. 

사실 촉나라의 공식적인 슬로건은 위나라를 격멸하는 것이지만 평생을 관우/장비와 의협집단으로 살아온 유비로서는 그것이 더이상 중요하지않았겠지. 유씨란 명분은 모든 유씨가 사라지고 유비가 크면서 사용한 것이니까. 물론 소의로 볼순 있는데 유비로서는 그것이 전부였을터다. 관우의 북진과 유비의 이릉대전은 한번씩 모처에 썰을 풀어놓긴 했는데 위연의 자오곡 계책을 설명하려다보니 삼천포로 빠진게 좀 길긴하다. (...);;;

마속의 가정방어는 별거없고 전략적으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거라 제갈량이 지키라고 명했음에도 마속의 호승심으로 인해 지 딴엔 기책을 쓴답시고 산위에 올라가 대국적인 전략을 다 망쳤다. 

눈앞에서 관우와 유비, 마속의 실패를 뻔히 지켜본 사람인 제갈량이 위의 것들보다 훨씬더 무모한 요행수를 둘 생각이 참으로 들었겠습니다그려.  

촉군의 전병력을 대략 10만정도로 볼수 있는데 1만이라는 병력이면 참으로 쉽게 볼수 있는 병력이네요. 그죠? 

전쟁에선 사기도 매우 중요해서 어느 전선이 붕괴되면 다른 전선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수 있다. 

촉이 소국이라 도박이 필요하다는건 어느정도 수긍하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성공하면 얻어지는게 많겠지만 반대로 실패하면 촉이라는 나라의 명맥마저 흔들릴수도 있다. 

제갈량이 실패해도 후임들이 적절한 때를 노려 북벌을 성공시킬수도 있는거다. 전략도 중요하지만 시의는 그이상으로 중요하다. 


이길려면 모험이 필수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건 성공할 확률이 상당부분 있을때의 얘기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쉽게 갈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대패하여 전멸할수도 있는 작전을 채용할수 있는가? 

조사가 조괄을 평가할때 조괄은 전쟁을 함부로 얘기하고 생각하기때문에 양장이 못된다고 평가한건 못들어보았는가? 

잘못하면 무수수 죽어나가는 전쟁을 로또와 비교한건 실수라고 생각해서 더이상 언급하지않겠다. 

위연의 자오곡 계책에 대해선 본삼국지에 나오는 '자오곡의 기이한 꾀' 부분도 참조하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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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순욱(문약) | 작성시간 10.08.22 멍청한 것은 항우한테 한것이구요.. 위나라수도가 업이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적다 보니 멍청한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네요..
  • 작성자顧邵 | 작성시간 10.08.22 우주대장군 太史慈님께: 위나라가 처음에 업현에 서울을 둔 것은 위나라의 초기 봉지 때문에 그런 것 같고, 황조 수립 후에는 서울을 허창, 낙양에 둔 것을 보면 조위에게는 업에 서울을 둘 이유가 별로 없던 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우주대장군 太史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8.22 ..... 갑자기 이런글을 왜 쓰셨는지? ... ;;;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우주대장군 太史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8.22 1번의 그림파일은 모처에 계신 고수분께서 직접 만드신 거구요, 2번의 그림파일은 본삼국지에 나오는 그림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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