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표는 병세가 위독했으므로 나라를 유비에게 의탁하고 그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의 아들은 재능이 없고 의지하던 장수들은 모두 죽었소. 내가 죽은 후에는 그대가 형주를 통치하시오." 그러나 유비는 "자제분들은 각기 현명합니다. 그대는 병만을 걱정하십시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유표의 말대로 하기를 권하자, 유비는 "이 사람은 나를 후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지금 그의 말을 따른다면 사람들은 나를 박정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했다. - 촉서 선주전 주에 인용된 위서 中』
상기의 내용은 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진 내용이지만, 사서에도 이처럼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실화이다. 유비의 인의의 상징인 동시에, 실리를 택하지 않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대목이다. 근래에는 시대가 그래서인지 비난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대목이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는 것이다.
『"만일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라면 그를 보좌하고, 만일 그가 재능이 없다면 공(제갈량) 자신이 나라를 맡아도 좋다" - 촉서 제갈량전 中 』
『"만약 중모(손권의 자)가 국사를 맡기에 부족한 인물이라면 공(장소) 자신이 나라를 맡으라" - 오서 장소선 주에서 인용한 오력 中』
야마구치 히사카즈는 자신의 저서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에서 유비의 임종시의 유명한 "탁고"의 발언을 논하면서 이러한 탁고가 유비에게서만이 아닌 손책의 임종시에 장소에게도 일어난 점을 비추어 임종시에 "공이 스스로 이것을 맡으라" 하는 것은 신하의 분발과 거국일치의 협동을 독려하는 강력한 효과를 노린, 상대를 회유하는 말이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에 크게 공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비의 임종 오래 전에 유선이 태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있었고, 후계를 위해 유봉의 제거까지 이루어진 상황에서 제갈량에게 한 탁고가 진심이었을리는 없다. 이는 손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보아, 유표가 임종시에 유비에게 형주를 맡으라고 제의한 것에도 이와같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지 진심이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보다 앞서 도겸이란 인물은 유비에게 후사를 맡겼다. 하지만 그 경우와 이것에는 차이가 있다.
『도겸의 아들 도상(陶商)과 도응(陶應)은 모두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위서 도겸전의 주에사 인용된 오서 中』
『유표와 처는 아끼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후사로 세우려 하였고, 채모(蔡瑁)와 장윤(張允) 등이 당파를 만들어 큰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내니, 모두들 결국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삼국지 위서 유표전 中』
도겸의 아들에 대한 내용은 저 한 토막이 전해질 뿐인데,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형주의 경우는 상기의 내용과 같이 당시 유표는 유비에게 형주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유종을 후계로 삼고, 유종을 지지하는 당파까지 형성되어 있었으며, 후계의 안정적인 계승을 위해 유기를 내보내는 작업까지 완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유비에게 행한 제의가 진심이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유비나 손책이 임종시에 나타낸 태도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유표로 하여금 다소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유비에게 그러한 제의를 하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이것에는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유비와 유표와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유비는 미축·손건을 보내 유표와 소식을 서로 알리도록 했다. 유표는 직접 교외까지 마중 나와 상빈(上賓)의 예절로 대접하고 그의 병력을 늘려 신야(新野)에 주둔하도록 했다. 형주의 호걸들 중에서 유비에게 기탁하는 자가 나날이 많아졌으므로, 유표는 유비의 마음을 의심하고 몰래 방비하고, 하후돈과 우금 등을 박망(博望)에서 막도록 했다. - 촉서 선주전 中』
『건안 12년(207)에,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하러 갔으므로, 유비는 유표에게 허창을 습격하라고 말했지만 유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 촉서 선주전 中』
『유비는 형주에서 수년 간 거주했는데, 일찍이 유표가 베푼 주연에서 넓적다리에 군살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개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유표가 유비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유비는 "나는 항상 말안장에서 떨어져 있은 적이 없었으므로 넓적다리에 살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았으므로 넓적다리에 살이 있습니다. 세월은 이처럼 빨리 가고 자꾸 늙어만 가는데, 어떠한 공업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슬픕니다"라고 했다. - 촉서 선주전의 주에 인용된 구주춘추 中』
『유비는 유표에게로 도망쳐 왔으며, 유표는 그를 후하게 대접했으나 중용할 수는 없었다 - 위서 유표전 中』
위의 사료들에서 보면 유표는 유비를 환대했지만, 또 한편으론 세력이 급증하는 유비를 의심하여 박망에서 하후돈의 군세를 막는 총알받이로 사용했다. 그런가하면 함께 주연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고, 유비가 유표에게 전략적 제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유표는 그 제안을 거절했고 끝내 유비를 중용할 수 없었다. 믿는 듯 하면서 믿지 않고, 가까이하는 듯하면서 결국은 중용하지 않았다. 유표의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은 무엇에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207)조조가 원상 및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함으로써 조조를 칠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는데, 곽가가 말했다. (중략) 유표는 단지 앉아서 애기하는 세객(說客)일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략이 유비를 제어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지할 수 없을 것이고, 유비를 하찮은 직책에 임용하면 유비는 쓸모가 없으니, 공께서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떠났다. - 위서 곽가전 中』
『부손이 말했다 (중략) 장군께서는 자신과 유비를 비교할 때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종은 말했다. "나는 그만 못하오" 부손이 말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유비가 조공에게 대항한다면 초나라를 보존할 수는 있을지라도 자군의 자력으로 보존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비가 조공에게 대항할 수 있다면, 유비는 장군보다 낮은 지위에 위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 위서 유표전 中
바로 여기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유비는 비록 유표의 객장의 신분으로 있었지만 결코 주종적인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비는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유표는 임종을 눈앞에두고 후계에 이르러 유비라는 인물은 더욱 부담스런 존재로 작용하여 자신의 후계를 해하지 말고 잘 도와달라는 의미로서 그러한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결국 현실에 이르러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만일, 유비가 유표의 뜻에 역행하여 형주를 취하고자 했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과연 유비의 대응은 그 자신에게 이롭게 작용했던 것일까? 아니면 어리석은 결정이었을까? 이점을 고려하기 위해선 첫째로 형주를 취할 수 있느냐, 둘째로 취한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만일 유비가 유표의 제의에 응했다면, 이는 유표의 뜻에 역행하는 것으로서 곧바로 내전을 의미한다. 과연 유비는 빠르게 내전을 종식하고 조조의 남진을 격퇴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점을 고려하려면 첫째로 유종, 둘째로 유기의 대응을 고려해야한다.
『유종이 있는 양양(襄陽)을 지날 때, 제갈양이 유비에게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오." 곧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불렀다. 유종은 두려워서 일어날 수 없었다. 유종의 측근과 형주 사람들 다수가 유비에게 귀의했다. 당양(當陽)에 도착할 무렵에는 병력이 10만여 명이나 되었고, 군수물자는 수천 대나 되어 하루에 10여 리밖에 가지 못했으므로 따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에 그들 중 일부를 태우도록 하고 강릉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 이가 유비에게 말했다. "응당 빨리 가서 강릉을 보존해야 합니다. 지금은 비록 사람들이 매우 많지만, 무장한 자는 적습니다. 만일 조조 군대가 도착한다면 그들을 어떻게 막겠습니까?" 유비가 말했다. "무릇 큰 일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인심을 근본으로 해야 하오. 지금 백성들은 나에게 돌아왔는데, 내가 어떻게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가겠소?" - 촉서 선주전 中』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오류에 빠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유종의 세력이 별볼일 없고 유비가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비를 따라 남하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유표의 정치가 무능했기 때문에? 유종이 무능해서? 유비가 정치를 잘했기에? 전부 아니다. 유표는 당대에 명성을 크게 떨쳤던 인물이고 유비는 작은 신야와 번에서 잇었을 뿐이다. 답은 조조에게 귀속되는 것을 꺼려했던 형주의 호족들이 유비를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지, 애초 유비의 세력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 이들 남방의 호족들은 조조에게 귀속되는 것을 꺼려했던 것일까?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만약 2백 년 이전이었다면 조조에 의한 중원의 통일은 동시에 중국 전체의 통일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의 오랜 통치는 중원의 문화를 남방에까지 전파시켰다. 남방 양자강 유역은 자원의 개발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하더라도 중원에 맞설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남방의 개발은 호족에 의한 것이고, 이것은 남방적인 새로운 호족의 발생을 뜻한다. 남방의 새로운 호족 무리는 커다란 잠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폐쇄적인 귀족 사회로부터 어떻든 경시되기 쉬운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북방 중원에서 군벌의 항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남방은 자연히 한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 사이 남방의 호족이 스스로 처리해야 했던 문제는 혼란스런 중원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작은 내란 정도이다. 손씨(孫氏) 일가의 힘으로 이 내란이 평정된 것을 보면, 그들은 새삼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에 눈을 뜬 것이다. 그들은 손씨를 중심으로 남방에 작은 조정을 만들 수 있고, 그들 자신이 그 조정의 귀족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남방의 호족 무리는 한나라의 통일을 저해하는 분열적인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조조가 중원의 대부분을 평정한 기세로 남하해서 적벽(赤壁)에 다다랐을 때도, 혹은 조조의 자손 대에 양자강의 북쪽 강변까지 군대를 진출시켰을 때도, 남방의 호족은 일치단결하여 손씨의 오(吳)나라를 계속 지켜나갔던 것이다. - 구품관인법의 연구』
이는 촉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방 호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왕조의 건립으로 중앙귀족으로의 승격을 염원한 지방 호족들의 지지가 오와 촉을 지탱시킨 힘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종이 투항했음에도 불구하도 대다수의 호족들이 유비를 따라 남하했던 것에는 기존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지방호족들의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유비가 그들을 버리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천천히 남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조조에게 따라잡혀 패퇴하였지만, 결국 지방 호족들을 결집시킨 유비는 형주의 한 영역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조조라는 중앙의 세력으로부터 기득권을 위협당하는 상태가 아닌 단순한 유표의 후계를 놓고 벌어지는 내전의 상황에서도 호족 세력들이 유비에게 얼마나 가담할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것은 잠자코 있던 제갈량이 유비에게 유종을 제압하고 형주를 장악할 것을 진언한 시점이 조조의 남진과 유종의 투항으로 인해 다수의 형주 호족이 유비와 함께 한 시점이었다는 점을 보아도 그 이전의 유비는 유종을 쉽게 제압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문제는 유기에게서도 나타난다.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 또한 제갈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작은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항상 제갈양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제갈양은 항상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도모 하지 않았다 - 촉서 제갈량전 中』
『유표가 세상을 떠나자 채모와 장윤 등은 유종을 후계자로 세웠다. 유종이 열후의 인수를 유기에게 건네주자 유기가 분노하여 인수를 땅바닦에 집어던진 후 부상을 틈타 난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유기는 마침 조조의 군사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강남으로 급히 달려갔다. - 자치통감 中』
『 유표의 장남인 강하 태수 유기(劉琦)의 병력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했다. - 촉서 선주전 中』
『"유예주의 군대는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배했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병사 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쳐도 만 명 남짓 됩니다." - 촉서 제갈량전 中』
『유비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임명하는 한편, 또 남쪽의 사군(四郡)을 정벌하러 갔다 - 촉서 선주전 中』
자치통감에 따르면 제갈량이 유비에게 임용된 것이 207년이고, 유기가 제갈량에게 상의하여 강하로 내려간 것이 208년이다. 유기가 유비 휘하의 제갈량과 상의했다는 것은 유비를 형주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서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일 유비가 형주를 취하고자 한다면 유기는 유종 못지않은 유비의 적이 되었을 것이다. 유종이 행정력을 바탕으로 형주를 지배하려 했다면, 유기는 1만에 달하는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쿠테타를 기도했던 인물이다. 이 1만의 병력은 유비가 번성에서 거느리고 잇던 군사력에 버금가는 군사력이다. 유기를 적으로 돌릴경우, 조조의 군사에 대항할 2만의 병력 중 1만을 잃는 것이다. 더불어 유비가 적벽대전 직후, 유기를 형주자사로 임명함과 동시에 형주 4군을 손쉽게 장악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애초 유비가 형주를 차지할 명분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형주 4군의 장악에 유기라는 인물이 그 자체로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유기를 배척한 상태에서 과연 남방의 4군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을지 또한 의문이다.
형주 호족들의 절대적 지지를 기대하기 힘든 내전의 상황에서 자력으로 유종과 유기를 단숨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조조의 정벌군에 멸망할 수 밖에 없다. 설사 모든 것이 잘 풀려 형주를 차지하더라도 신의를 잃은 유비는 결코 익주를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장은 유비를 믿고 불렀다가 화를 당한 것인데, 만일 유비가 형주를 강제로 취한다면 유장이 유비를 믿고 부를 리 만무하다.
결론적으로 유표가 유비에게 형주를 부탁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유비 역시 이것을 알았기에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동들이 결국 남방 호족들을 연합시켜 조조를 격퇴하고 입촉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유비의 행동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형주를 취하도록 부추신 제갈량을 비롯한 측근들의 생각이 오히려 좋지 못한 견해였다고 확신한다.
참고 문헌 : 사상으로 읽는 삼국지(이학사), 구품관인법의 연구(조합공동체 소나무)
2005년 02월 12일
written by 무적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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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그네 작성시간 09.09.29 아니 이런 4년전 글을... [뭐 나도 그렇지만]... 역시 글은 우려야 제맛.... ㅋㅋㅋ.... 탁고는 이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보정장군'의 역사를 살펴보면 탁고의 예는 한무제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음. 따라서 이때의 탁고가 '진심'이니 '아니니'할 건덕지는 없음. '선양'이 진짜냐, 아니냐는 그 기원 무렵에서의 '진실'공방이 벌어져야지 1천년대 이후의 선양이 '진짜가짜'논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지. '탁고'도 그 기원에서 2-300년 후의 일이니 '진심'이나 '신하의 충성'의 의미보단 다른 포맷으로 촛점을 잡는게 재미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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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무적위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9.29 ㅋ 넹.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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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피닉스궁 작성시간 12.07.29 도겸.유표모두 죽을때까지 유비를 견재했다고 봐야합니다 .진심이 아니고 선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권력때문에 부모.형제 죽이고 왕이 된사람이 허다하죠 그런데 그걸 자식도아닌 남에게 주려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