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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학번]94 조현홍 - 오버 더 레인보우 3 (소설)

작성자85임승미|작성시간23.01.19|조회수9 목록 댓글 0

결혼 생활 30년 동안 과연 내가 연속극이나 영화에서, 혹은 소설에서처럼 가슴 찡한 사랑을 남편과 얼마나 했을까요?

누워서 침 뱉기 격인 답인지라 답하기가 무안하네요. 사랑다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사랑은 이런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예전에 우리 집 막내 애가 '사랑은 이런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애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쯤일 거에요. 그때는 가희도 박서방과 사이가 좋았고. 지금 생각하니 그때만 해도 꿈같이 느껴지네요. 하여간 가희네 애들이 지 형부 생일이라고 다 찾아와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였죠. 우리는 그당 시 한참 인기 있는 김수현의 연속극을 보고 있었지요. '불꽃'이란 연속극이었는데 연속극이 다 그렇지만 결국엔 사랑 타령하는 연속극이었어요. 우리 애들도 다 보고 조카들도 과일을 먹으며 T.V 앞에 앉아 있었지요. 연속극에선 불륜을 저지르던 남녀 주인공들이 애절하게 사랑을 다시 고백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갈 한참 어린 가희의 막내 애가 물었어요.

사랑이 뭐냐구요.

우린 너무나 재밌어 한참을 웃었지요. 한참을 웃고 있는데 우리 집 큰 딸애가 그러더군요.

지금 한창 사랑에 빠져있는 작은 형한테 물어보라구요. 저는 그때서야 우리 막내 애가 연애를 하고 있단 걸 알았습니다. 막내 애는 한참 어린 지 사촌 막내 동생에게 사랑을 말해주었습니다. '사랑은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고 가슴이 짜릿한 거야', 라고.

또다시 거실은 웃음이 넘쳤지요. 꼬맹이는 다시 막 사랑에 빠진 초보 연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형도 형 애인하고도 그래?', 라고.

그랬더니 막내 애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입가에 웃음이 나오는군요. 막내 애는 덧붙여 교양과목 교수에게도 사랑을 그렇게 정의해 답변을 했더니 칭찬을 받았다고 자랑까지 했습니다. 유명한 영문과 교수라나요. 자신 있게 '보고 또 봐도 지 애인이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우리 막내 애가 괜히 괘씸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서 저도 물었죠.

'넌 그럼, 사랑하는 엄마도 보고 또 봐도 또 보고 싶겠네?',라고요.

그랬더니 막내 애는 겸연쩍어 하더니 그건 틀리다나요.

이성과의 사랑과 부모자식 간의 사랑은 비교할 수 없다면서 그래도 지 엄마인 저를 제일 사랑한다고 얼버무리더라구요. 그 대답에 다시 한참을 웃고 있는데 꼬맹이가 다시 지 엄마인 가희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엄마도 아빠 보면 그래?', 라고.

그때는 정신없이 웃기 바빠 가희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하지만 그때 전 약간은 당혹스러웠습니다. 보고 또 봐도 그래도 보고 싶다니요. 남편이.

 

남편을 보며 가슴 설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요. 저는 예전에 이미 그런 환상을 접었지요. 하지만 가희는 아직도 그런 환상을 조금은 남겨둔 듯해요. 그러니 이혼하겠다고 저렇게 난리 통을 치겠지요. 다시 생각해보니 가희가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껴 이성을 잃을 만큼 자제력을 상실한 이유는 조금이나마 남았던 결혼에 대한 환상이 물거품 사라지듯 자취를 감춰버린 것에 관한 회의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역시 남편과 살아오면서 가희 시절 때엔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를 완전히 버리진 못했지요. 그래서 그때는 남편이 변하겠지, 라고 많이 위안을 삼고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드리기 정말 창피하지만 꼼생원 노인네로 왜소하게 전락해 버린 보잘것없는 남편이 다름 아닌 제 남편이란 사실이 정말 싫어요. 그것도 싫고, 취향이 너무 틀린 것도 싫고, 이젠 지쳐 아닌 건, 틀린 건 체념하고 저와 말 한마디 없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괘씸하죠.

여러모로 남편이 저와 사고방식에서 많이 틀려 있음을 연애 시절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 남편이 변할 줄 알았습니다. 같이 평생을 살다 보면 바뀔 줄 알았지요. 그러나 지금 보면 하나도 변한 게 없었어요. 또 눈물이 나네요. 남편과의 연애 시절이 떠오릅니다. 남편은 당시 제 마음을 돌리려 많이 노력했지요. 수많은 핑크빛 구애의 말들 중에서, 끝내자는 나의 통화 중에서, 마지막 한마디로 남편은 결국 절 설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너무 틀리다는 저의 말에 남편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사람들 중에 과연 당신과 딱 맞는사람이 있겠느냐, 라고, 살아가면서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살아가면서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사랑이 아니겠냐고 말이죠.

저는 그 말에 현혹이 되어 남편과 결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막상 결혼해 보니 연애 시절의 시 자락 같은 황홀한 서약들은 당장 살기 바쁜 신혼부부에겐 정말 사치였지요. 그리고 남편도 그때는 많이 노력하고 이해하려 들었지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며 젖먹이였던 애들도 학교에 입학하고 시부모와의 갈등도 사라져 살만해지니 그 때서야 다시 퀘퀘 묵은 핑크빛 서약이 남편과 저에게 떠올려지더군요. 하지만 저와 남편에겐 그 서약을 이행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신혼 시절, 남편과 제가 서로에게 보여주었던 것들은 지금 생각해보니 바뀐 것이 아니라 참고 노력했던 것일 뿐이었어요. 헉헉대면서도, 의무감이라고나 할까요? 살기 바빠 그저 감추려 노력했던 거지요.

 

그 상황에 관해 선 갑자기 엉뚱한 비유를 들고 싶군요.

흡사 현실이라는 장신의 체격으로 맞서는 중공에 경기 내내 밀리던 우리나라의 농구 선수들이 느낀 절망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경기 내내 힘이 들면서도, 힘에 부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겨야 한다는 애국심으로 몸을 상해가며 경기에 임하다가, 막상 끝날 즈음 맛보는 패배감 같은 그런 허망한 기분, 이해 안 되나요? 그래서 예전에 그렇게 우리 남편과 농구 중계를 보며 흥분을 했을까요? 전에 우리나라가 중공에 한, 두 번은 이겼었지요? 남편과 저는 맥주를 마시며 새벽까지 손에 힘이 빠질 정도로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했었지요. 정말 통쾌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선수들이 중국을 이겼어도 미국에게는 여실히 실력 차, 체력 차를 보이며 지더군요. 그래도 저와 남편은 중국전의 결과를 기대하며 미국 전을 보았지요.혹시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까, 기대하면서요.

 

갑자기 난데없이 농구까지 들먹이며 말을 꺼내 죄송하지만 이상하게 그 이야길 꼭 하고 싶군요. 그때 이후로 저와 남편은 체념이라기엔 좀 그런 순응을 하며 살아온 것 같아요. 그 순응이 결국은 연애 시절 남편이 읊조리던 구애의 청사진과는 거리가 상당했지만 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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