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4.1. 시의 샘

김수영-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세 가지 외침

작성자77송태한|작성시간16.03.19|조회수381 목록 댓글 0

김수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세 가지 외침 

 

 

 

  * '갑'에 대한 표현의 자유 : “나는 박창진이다

 

  소위 땅콩 리턴은 기물이나 땅콩에 불과한 부하직원이 감히 말대꾸를 했기 때문이라는 '말대꾸 리턴'으로 밝혀지고 있다. 여전히 우리의 삶은 자기 말만 하는 왕들과 자기 말을 할 수 없는 신하들의 세상 언저리에 있는 것 같다.

 

  사회적 갑질은 대기업과 하청기업, 고객과 주차 요원 등 계급, 계층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 일상화된 고질병인 것 같다. 회사 조직에서 사장은 부장의 말대꾸에 갑질을 하고, 부장은 사원의 말대꾸에 갑질을 한다. 학교 조직에서도 교장은 교사의 말대꾸에 갑질을 하고, 교사는 학생의 말대꾸에 갑질을 한다. 상명하복을 외치는 조직에서는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가 오직 한 사람뿐이다.

 

  하지만 자기 말을 찾기 위한 땅콩들의 노력은 언제든 어디서든 멈춘 적이 없다. 김수영은 헬리콥터(1955)에서 너무도 오랫동안 자기의 말을 잊고 / 남의 말을 하여왔으며 / 그것도 간신히 떠듬는 목소리로밖에는 못해 왔다고 비판하면서, 자기의 말을 찾는 것이 어두운 대지를 차고 이륙하는 헬리콥터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물론 헬리콥터처럼 대지를 차고 이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김수영은 4·19 혁명 직후에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4.26)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타성같이 습관같이 /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 할말도 다 못했던 자신을 비판하면서, “오늘은 서슴지 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이라고 선언한다

 

  김수영이죄와 벌(1963)에서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 살인을 한다.”라고 한 카뮈적인 말도 갑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을만이 저항을 한다로 바꿔 볼 수 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서의 ''이 별다른 희생 없이도 자기의 말을 할 수 있는 체제, 갑의 횡포를 보장하는 수직적, 수목적 구조를 수평적, 리좀적 체제로 바꾸는 힘은 '갑의 반성과 양심'이 아니라 '을의 탈주적 실천'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사회적 권위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이자,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하다. '갑'에 대한 용기 있는 말대꾸. “나는 박창진이다

 

 

  * 종교에 대한 표현의 자유 : “나는 샤를리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참혹한 테러를 당한 샤를르 에브도. 이들이 만평을 통해 풍자하는 것은 "우리에겐 신도 군주도 없다"라는 말처럼 반이슬람주의가 아니라, 정치와 종교로부터의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 그동안 48번이나 되는 소송의 대상은 주로 극우정당 국민전선이나 극우 카톨릭 교단이고, 이슬람교단에 대한 소송은 1차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집단이 적대시하는 타 종교를 풍자한다면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도발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적대시하는 세력에 대한 도발 행위에 불과한 것처럼.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교에 적대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교도만 조롱하는 인종주의 집단이 아니라면 여전히 "나는 샤를리다"  

 

  과도한 표현의 자유가 테러를 유발한다는 시각은 과도한 노출이 성폭력을 유발한다는 논리와 유사하다. 특히 절대 권력자인 왕과 종교에 대한 과도한 표현의 자유조차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권력의 존엄성을 명분으로 개인에 대해 테러와 폭력을 가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백인들의 반이슬람주의와 판매 부수의 자본주의 등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에 숨어 있는 부당한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 자칫 테러에 대한 비판을 약화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 부당성을 이유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테러까지 저지르는 것은 수호하려는 정당성과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식민지 시대에 너무도 부당한 지배자들에 대해 간디가 비폭력, 불살생 원칙을 견지한 것은 소극적 무저항이 아니라, 진리를 파지하고 있는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적극적인 태도로 이해된다. 폭력이나 테러는 진리에 대한 확신의 부족과 불안을 반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수영이 광야(1957)에서 스스로를 '간디의 모방자'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카뮈도 반항하는 인간(1951)에서 한 인간이 살아 있는 자들의 사회로부터 단 하나의 존재를 제거하기만 해도 그 자신 또한 사회로부터 배제될 이유가 충분히 된다.”라고 하면서 폭력과 살인에 반대한다. 김수영이 4월 혁명 직후의 시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에서도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 차례차례로 / 다소곳이 / 조용하게 / 미소를 띄우면서를 반복하면서 악독한 '그놈'에 대한 폭력조차 거부하던 것이나, 이후 <사랑의 변주곡>(1967)에서 신념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프랑스 혁명과 4·19혁명에서 배운 "눈을 떴다 감는" 사랑의 기술을 제시한 것도 간디와 카뮈의 철저한 비폭력주의로 이해된다.

 

  김수영의 시에서 신神에 대한 사유는 웃음(1948)에서부터 「풀(1968)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의 시에서는 예수나 부처, 공자 등이 별다른 구별 없이 함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신이 특정한 종교를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958)에서 현대(現代)의 종교(宗敎)출발(出發)에서 죽는 영예(榮譽)”, "오늘은 비가 너 대신 움직이고 있다 / 무수한 너의 종교를 보라", 우리들의 웃음(1963)에서 종교도 종교 이전에 있다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적막이 없으면 들리지 않는 것처럼등에는 제도화된 종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현대적인 종교"에 대한 탐색이 나타나 있다. 

 

  특히 반주곡(1959)에서 "종교의 획득은 종교를 잃었을 때 시작되었고 / 그때부터 나는 차차 늙어가는 탈을 썼다"라고 하는 것이나, <반시론>(1968)에서 시미인을 릴케의 "신의 안을 불고 가는 입김"으로 설명하면서 "지구를 고발하는 우주인의 시"를 제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제도화된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 노자(老子)적 자연(自然)이나 우주에서 부정적인 현실의 대안으로서의 '신적인 것'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권위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이자, 제도화된 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우주적이고 신적인 가치를 실질적으로 인간 사회에 구현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용기 있는 풍자. “나는 샤를리다

 

 

  * 정치 권력에 대한 표현의 자유 : “나는 시인이다

 

  최근 정부에서는 토크 콘서트 테러 사건 이후 2013년 우수문학도서로 선정했던 신은미 씨의 책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의 선정을 취소하고, 새로운 선정 기준으로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은 순수문학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다이빙벨' 파문 이후 정부 비판 영화를 차단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 이후 벌어진 표현의 자유 '논란'이 한국에서는 문학과 영화 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구체적인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과거 순수문학은 모든 이념을 배제함으로써 특정 이념을 강요했던 사실상 이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을 배제한다던 순수문학이 오히려 특정 이념에 충실한 이념문학으로 전락했던 것으로, 문학에서 이념을 배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역사적 반증으로도 볼 수 있다.

 

  김수영은 진정한 순수문학이란 모든 이념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문학, 새로운 이념을 탐색하는 자유문학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러한 사유는 산문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1968)에서 무서운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같은 글에서 김수영은 순수문학도, 참여문학도 아닌 '새로운 문학'을 강조한다. 그는 '새로운 문학'이 "내향적인 것이 될 때는 기존의 문학 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에는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이 된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불가능이라는 말은 김수영의 시에서 주로 나타나는 우주(宇宙)와 신()의 이미지로 이해된다. 김수영이 <일기초2>(1960)에서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현대에 있어서 혁명을 방조 혹은 동조하는 시는 상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혁명을 절대적 완전에까지 승화시키는 혹은 승화시켜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하거나, <반시론>(1968)에서 브레히트와 릴케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해야 하는 곡예사적인 문학의 숙명을 말한 이유도 부정적인 현실의 대안을 우주와 신적인 자연에서 찾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학의 본질인 꿈과 불가능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브레히트와 릴케 사이에서 자유롭게 사유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 새로운 문학을 창조해낼 수 있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말하는 순수문학이 이념으로 배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특정 이념을 강요했던 과거 순수문학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불가능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이념을 추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진정한 순수문학, 자유문학으로 전진하길 기대한다. 김수영이 <창작 자유의 조건>(1962)에서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트가 결한 언론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이만하면 언론자유가 있다>고 본다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 자신이 시인도 문학자도 아니라는 말밖에는 아니 된다.라고 하면서 강조했던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길 기대한다.

 

  정치 권력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권이자, 우주적이고 신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국가,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기도 하다. 왕에 대한 용기 있는 발언. “나는 시인이다

  

  요컨대 사회적 갑, 제도화된 종교, 정치 권력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 ‘종교’의 말씀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 인권이자, 김수영이 강조한 것처럼 꿈과 불가능을 인간 세계에 현실화할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현대 세계를 향해 김수영은 외친다. “권력에 의해 표현의 자유가 1퍼센트라도 제한되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 이건주(교사, 2015.1.) http://blog.daum.net/lkjwin/91




시인 김수영과 '겸손'의 의미

아마 현대시인 중에서 겸손을 빈번히 언급하고 또 매우 강조한 시인이 김수영일 것이다. 한 군데의 예만 들어보면, "헬리콥터"라는 시에서

 

"오늘에 네가 傳하는 自由의 마지막 破片에

스스로 謙遜의 沈默을 지켜가며 울고 있는 것이다."

 

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늘로 비상하는 헬리콥터를 통해 현대인의 교만함을 풍자한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김수영은 그런 헬리콥터 같은 교만 대신 겸손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현대시인의 90프로가 김수영의 아류인 것처럼 내가 알기론 사실 김수영 이전에는 겸손이라는 단어는 시어로 사용된 적이 없다. 이것은 물론 겸손이란 말이 시어로서 그렇게 멋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매우 대담하게 이 말을 썼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미덕 중의 하나가 겸손이다. 겸손의 반대가 교만이며, 교만은 사망의 선봉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만큼 겸손은 하나님의 강한 명령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시다.

김수영의 시를 읽으면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언급하는 것이 좀 생뚱맞기는 하다. 그러나 성경이 김수영 시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밝히는 것 또한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야고보서 4장 4절을 읽어보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라"

 

간음하는 여자들이란 반드시 여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세상에 물들고 세상을 더 좋아하는 겉모양만 기독교인처럼 보이는 사이비 기독교인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김수영의 시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의 일부분을 보자.

 

"음탕할만치 잘 보이는 유리창

그러나 나는 너를 통하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려운 세상과 같이 배를 대고 있는

너의 대담성-"

 

'간음하는 여자'(성경)와 '음탕할만치'(김수영 시), '세상과 벗된 것'(성경)과 '세상과 배를 대고'(김수영 시).. 두 가지가 놀라울 정도로 정학하게 대응한다. 또한 세상과 배를 대고 있는 그 대담성이란 바로 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재미있지 않은가?

지금 성경을 시와 견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김수영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성경을 비교적 깊이 있게 읽었고, 그 말씀이 그의 심령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점을 밝힘과 아울러 우리가 삶 가운데 견지해야 할 겸손한 마음가짐의 소중함을 일깨우고자 할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면, 그의  "시골선물"이라는 시 중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神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가 어디있느냐고 나를 고루하다고 비웃은 어제저녁의 술친구의 천박한 머리를 생각한다."

 

진리, 영원, 신... 이런 것들이 김수영의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이자 과제였다. 김수영이 초월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 시인 중의 하나였다는 점에서는 놀랄 것이 없지만, 기독교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사실 내게도 충격적이다.

윤동주나 박두진 같은 시인들은 너무나 명확하게 기독교적인 가치를 추구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파격적인 행동들과 불온한 언어들을 토해냈던 김수영에게서 기독교적인 가치는 이제까지 간과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영원과 진리를 추구하였는데, 항상 그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인식된다.

그것은 마치 "백여리나 떨어진 광산촌에 두고온 잃어버린 겨울모자"와 같은 것이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저편세계를 모르고 이 세상과 벗하여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의 대담성(교만함)에 놀라면서 그것의 천박함을 질책하고 스스로 겸손해 할 수 밖에 없는 김수영의 양심적인 모습이다.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 2015.12.22

시로 이끄는 리듬 / 김수영,「꽃잎 2」 강 정 | 날개를 단 어린 시인들 / 김수영,「헬리콥터」 고두현 | 나를 키운 건 바람 / 서정주,「자화상」 고 영 | 직업을 바꿨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