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가(戀歌)/ 박정만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녁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 시집『박정만 시선집』(외길사,1990)
박정만 시인은 출판사 고려원 편집장 시절에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밤낮을 몸뚱이 찜질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그후로 일상생활을 거의 하지 못하는 폐인이 되어 술어 젖어 살다 아내는 도망가고 삶은 파탄의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미친듯이 시를 썼다고 한다. 어느 땐 3분에 한 편씩을 써 갈길 정도의 광기로 집념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봉화불이 환하게 타오를 무렵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렇듯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떠났다. 진정 시인으로 살다 간 한 시인의 노래이다. 어제 작가 최인호가 문학인생 50년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작가와 시인이 서둘러 세상을 떠나는 일은 언제나 우울하다.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녁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쓸쓸한 봄날 / 박정만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노방(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 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이제 날 저물고
팔이 짧아 내 품에 드는 것도
부피 없고 무게 없고 다 지친 것뿐.
가슴도 애도 제물에 삭고
긴 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도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분홍빛 속으로 / 박정만(1946~1988)
너의 분홍빛 젖가슴 속으로
철저하게 무너져간 홀엄씨 마음,
사실은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임신한 네 아랫배도 볼 수 없었어.
입덧은 크게 산울림으로 밀어닥치고.
‘슬픈 일만 나에게’
사랑이여,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
바람도 조금 불고
하얀 대추꽃도 맘대로 떨어져도
이제는 그리운 꽃바람으로 정처定處를 정해다오
세상에 무슨 수로
열매도 맺고 저승꽃으로 어우러져
서러운 한 세상을 건너다 볼 것인가.
오기로는 살지 말자.
봄이 오면 봄이 오는 대로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는 대로
새 울고 꽃 피는 역사도 보고
한 겨울 신설新雪이 내리는 골목길도 보자.
참으로 두려웠다.
육신이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며
그 하늘을 믿었기로 山川도 보며
산빛깔 하나로 大國도 보았다.
빌어먹을, 꿈은 아직 살아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역에 자고
그 꿈자리마다 잠만 곤하여
녹두꽃빛으로 세월만 다 저물어 갔다.
사랑이여, 정작 슬픈 일만 내게 있어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