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이라 하기도 한다. [2]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新, 고잇신)' 등으로 불리었다.[4]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를 서구식으로 완전히 뒤바꿔 놓은 개혁
19세기말 일본의 에도 막부가 서양의 개항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쿠로후네 사건으로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막부 타도 세력과 왕정 복고 세력에 의해 막부가 무너지고(1867년의 대정봉환) 덴노 중심의 국가로 복고된 대 사건을 말한다. 대개 개시 시기는 메이지 연호가 시작 된 1868년으로 본다.
한자음 그대로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그냥 유신이라 하기도 한다. [2] 일본어로는 '메이지 이신(めいじいしん)'이라고 발음하며 영어권에서는 Meiji Restoration이라고 쓴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라는 말은 현대에서 쓰이는 역사 용어[3]로, 당시에는 '어일신(御一新, 고잇신)' 등으로 불리었다.[4]
유신 3걸(사이고 타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로 대표되는 신흥 세력에 의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와쿠라 토모미는 그 중에서 최강의 흑막.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 번의 요시다 쇼인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5]
분명히 당초 목표는 존왕양이를 하면서 문자 그대로 막부를 타도하고 고메이 덴노를 중심으로 쇄국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는데, 왜일까 도중에 방향이 바뀌더니 사쓰마의 코마츠 타테와키의 삿쵸 동맹 → 삿토 맹약 → 사카모토 료마의 신정부강령팔책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한 직후에 전면 개국을 해버린다는 괴이한 결론이 나와버렸다.
다만 이렇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변을 주도한 것은 사츠마와 조슈 두 번인데, 막부와의 공무합체(公武合体)파로 잔류하고 있었던 사쓰마는 번 소속의 무사가 사소한 무례[6]를 이유로 영국 상인을 살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하였다.(그 이후로는 반막부 세력(신정부군)과 영국 상인들만으로의 무구(武具), 조선(造船) 통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개군(改軍) 현상을 돋보였다.) (사쓰마와 달리) 조슈는 도막(막부 토벌) 정신으로만 일관. 존왕양이 의식을 일으키고 1864년에는 아예 시모노세키를 항해하는 4개 외국 양선(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에 발포하기까지 했으나, 곧 열강의 보복으로 국력의 격차를 실감하고 도막 정책으로 항거하는 개국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전면 개항을 한 것도 이 때의 경험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일본도 막부 체제 하에서 어느 정도 서양화가 이뤄졌지만, 화혼양재라는 명목 하에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서양에 이와쿠라 토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여 직접 견학하고 많은 걸 배웠다. 이들이 내린 결론은 전면 개방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고, 결국 일본은 폐번치현, 신분제 폐지, 국민개병제 등 전면적인 서양화에 착수했는데 이 판단이 옳았다. 구 체제 하에서 개방을 추진했던 청나라와 조선은 모두 개혁에 실패하였는데 그로 인해 청은 반 식민지 종속국이 되었고, 조선은 일본에 강제 합병을 당하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사가 번 → 히고(구마모토) 번 → 아키쓰키 번 → 조슈 번 순으로의 사족 반란이 들이닥쳤다. 그 이후로도 정한론 무산 결과와 산발탈도령(단발령+폐도령)에 항거한 사쓰마 번 무사들은 특권 계급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뭉쳤고, 이들이 일으킨 반란이 바로 서남전쟁(현재까지로의 일본 열도의 마지막 내전)이다.
2. 한국에 미친 영향[편집]
이 때 국서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덴노(천황)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미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서양 열강에 얻어 맞고 있었다. 중국은 개항한 이후였기 때문에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춰 조약을 체결하여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아직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있던 흥선대원군 집권기의 조선에선 '천황'이라는 호칭에 심히 불쾌해 하며 국서의 접수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이미 조선 통신사가 50년 간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 관계가 막장화된 시점이었던지라, 이에 더욱 격노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힘을 얻게 되고, 그 이후 조선침략이 본격화 된다.
물론 일본 내에서도 정한론은 찬반이 나뉘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의 차이(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가)일 뿐, 이미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정한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의 급격한 중앙집권화로 인한 몰락 사무라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해외 식민지 건설을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면서 '언젠가' 조선을 침략해야겠다는 게 대세였던 듯.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인 10월 유신의 유신을 메이지 유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3.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차이[편집]
21세기의 기준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분명한 명분과 방향을 가지고 과감하고 모든 범위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여 이를 단기간에 성공시켰느냐(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 아니면 오히려 나라 문을 걸어 잠갔다가(대원군 치하 조선) 뒤늦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설픈 개혁을 시도했느냐(개항~을사늑약까지의 조선)여부가 운명을 갈랐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이 가능했던 건 막부를 전복시키서, 어설픈 개방으로 서양의 침략을 부추겨 나라를 망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하급 무사와 관료가 중심이 된 사쓰마, 조슈 등 소위 네 개 번의 실력자들이 저지하는 데 성공하는, 즉 구체제 자체를 갈아 엎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꾸지 않은 것은 덴노 뿐이었고, 신격화만 시킨 뒤 실권은 다 빼앗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완벽한 서구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당장 보수로 알려진 사이고 다카모리만 해도 개방 자체는 동의하되 좀 더 천천히 하는 한편, 사무라이 주도 체제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을 정도다. 이는 조선 내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사들조차 동도서기론을 내세운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조선도 조사시찰단을 보내 내무성,대장성,외부성등 근대관료제를 조사했고 별도의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체제에 적응하려 했다. 무엇보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체제 그 자체를 논한게 아니라 제도를 분석하고 개화란 '허명개화'와 '실상개화'가 있으며 마구잡이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고 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수학했고 미국유학을 다녀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서양에 대한 인식은 '중용'이었다. 부족한 건 채우고 충분한 이어가자 조선이 일본처럼 전면적인 개혁을 하지 않은 것은 조선에서의 개혁은 말 그대로 '개화'였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은 세도정치 가문이 기득권 세력으로 건재했으며, 이들에 비해서 차라리 막부는 양반이다 싶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물론 안동 김씨가 조선에서 천주교에게 우호적인 집단이었던 점, 김조순 본인이 고증학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대체로 외부 세력의 통상 요구를 정중히 거절하여 돌려보내는 것('상국인 청이 허락하지 않으면 못한다')이 국가 정책이었다. 그나마 김옥균 등 일부만이 다소 깨어 있었다지만 이들은 스스로 개혁을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을 끌어들여 개혁을 하고자 한 점에서 한계가 명백했다. 만일 고종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승리로 잠시 조선의 이미지가 개선된 점을 이용해 대원군 실각 직후 일본식 개항을 전격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문물을 받아들여 전면 근대화에 나서 1870~80년대 아직 일본이 내부에서 부단히 정비하던 시기를 이용했다면 그나마 최악은 피했을 거라는 평가도 있지만 애초에 그게 가능했을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근대화를 이끌어나갈만한 이른바 개화파라 부를만한 인사는 당시 조정에는 박규수가 유일했다. 이른바 민영익, 김홍집, 김옥균 같은 이름 있는 개화파 인사들은 1870년대 이제 막 30대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단기적인 배경을 떠나 보아서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일본은 16세기인 전국시대 때부터 지방/중앙 정부 차원에서 유럽과 직접 교류를 해오며 가톨릭을 받아들이거나 조총과 같은 근대식 무기를 도입하였고(덕분에 임진왜란 때 신속한 점령이 가능했다), 에도 시대에는 비록 쇄국을 했으나 유일하게 교류가 허락된 네덜란드로부터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세계 정세에 관한 최신 정보(오란다 풍설서)와 난학[7]을 통해 지식인층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도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주입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사상적 변화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들에게 큰 위화감으로 작용했을 정도로 지대했다.## 일반적으로 막부가 서양화를 거부하고 4번이나 거부한 끝에 개방했다는 인상이 짙지만 실상 막부 역시 서양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단지 중국의 중체서용. 조선의 동도서기와 동의어인 화혼양재가 기준이었을 뿐이다. 아니, 애초에 그래도 수준이 넘사벽이었던 것이, 사츠마같은 일개 '지방'도 증기선을 20척 가까이 보유했던 데에 비해 조선은? 대한제국 시대에야 양무호와 광제호가 전부(...).[8]
외국어 통번역문화가 발달했다는 점도 상당히 중요한 점인데, 비록 막부가 쇄국 정책을 유지했을지언정 에도 시대 중후기에 이르면 수많은 난학숙(네덜란드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이 설립되어 일반 민중들이 네덜란드어 의학서를 완역하거나 네덜란드 상인들의 거류지인 데지마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통해 세상 물정을 대충 접할 정도였고, 또 대대로 네덜란드어를 통번역하는 가문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덤으로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할 때도 영어와 프랑스어를 네덜란드어를 거쳐 간단하게 의사소통할수도 있었다. 반면, 조선은 서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항상 청나라를 통해야만 했고 청나라에서 번역된 문서가 오기까지 엄청난 시일이 걸렸기 때문에 교류는커녕 의미 있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조차 힘들었다.[9]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바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표류이다. 조선은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조차 몰라서 그저 "남만인(南蠻人)"이라고만 부르고[10][11] 별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지만, 13년 뒤 하멜 일행이 조선을 탈출해 일본 나가사키에 이르렀을 때 나가사키의 '총독(부교)'은 네덜란드어->포르투갈어[12]->일본어 통역을 통해 그들을 심문한 결과 금방 그들의 정체 및 표류, 억류, 탈출 과정 전부와, 덤으로 당시 조선의 내부 사정(!)까지 상당히 세세한 수준으로 캐냈다(...).
결국 조선은 서양과의 교류를 직접 못하고 중국이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는 양상이 더 짙었다. 동시대 조선과 일본에 표류해 온 양인들의 수가 크게 차이 나며, 일본까지 가는 항로가 개척된 이후에도 조선은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직접적으로 양인들과 교류하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벨테브레와 헨드릭 하멜 일행의 표류와 같은 천우신조의 기회가 있었지만 같은 사례가 있던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그들로부터 서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다른 서양인들과의 대화 창구로 사용하지 못했고 그들로 인해 서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일도 없었다.[13]
그리고 무엇보다 일본과 조선의 국력차[14]도 명백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왜적이니 오랑캐니 하면서 무시했지만, 일본의 총 국력은 이르면 여말선초, 아무리 늦어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엄연히 조선을 뛰어넘은 상태였다. 메이지 유신 당시 시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경제력 차이는 최소한 4:1(극도까지 간 의견은 10:1)에 이르렀다. 애초에 인구도 일본이 조선의 1.5~2배가 넘었고, 영토의 차이도 대략 그 정도였던 데다가 농업 조건도 일본이 더 좋은 편이었다[15]. 상공업의 측면에서도 전국시대 이래 꾸준히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도시화율도 더 높았고, (쇄국정책에도) 대외 무역도 더 활발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른 지 오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 재정 규모를 볼 경우, 일본은 통상 35%[16], 조선은 10%[17][18]을 좀 넘기는 바 정부재정에서 상당한 차이가 발생했다. 조선은 대단히 빠듯하게 재정을 운용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잉여재정이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는 급작스러운 외부의 위협에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워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정부가 세금을 최대한 덜 걷어 운용한다는건 농민들에겐 더 좋았겠지만...[19]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근대화 (막부정치 붕괴)
메이지유신 이란 일본에서 메이지 천황 때에
막부정치를 무너뜨려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고 근대화가 추진되고 자본주의가
성립된 변혁의 과정을 말한답니다.
일본은 19세기 중반까지 봉건적인 막부정치가 이어졌으며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1853년 미국의페리 제독이 무력으로 개항을
요구하자 굴복하여 화친 조약을 맺고
1858년에는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답니다.
이어 영국,네덜란드.프랑스.러시아 등과도
잇따라 불평등한 통상 조약을 체결하게 된답니다.
그러나 이후 값싼 외국 상품들이 들어와 경제적 혼란이
생기고 물가가 치솟자 국민들이
불만을 쌓이기도 시작하였답니다.
게다가 천황의 허가 없이 막부가 독단적으로 외국과
조약들을 처리하여 반막부 세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리하여 1867년 반막부 세력은 들고 일어나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부활하여
메이지 천황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답니다.
이에 메이저 정부는 1868년에 낡은 제도를
개혁하는 유신을 단행하였습니다.
신분제 철폐, 토지와 조세 제도 개혁, 상공업등을
장려 했으며 수도를 도쿄로 옮기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갖추게 되었답니다
* 메이지유신으로 약 700년간 계속된 막부청지가 막을 내리게 된답니다.
* 메이지 정부는 부국강병이라는 이름 아래 자본주의의
육성과 침략을 위한 군사력 강화에 전력을 기울였답니다.
[출처]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근대화 (막부정치 붕괴)|작성자 퍼스트 레이디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
http://blog.naver.com/l2l3l5/220023714396
아편 전쟁 소식은 일본에도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에 통상 수교를 거부하던 에도 막부는 물론 일본 전역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853년 미국이 페리 함대를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막부는 미국과 미·일 화친 조약(1854)과 통상 조약(1858)을 맺어 개항하였고,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이묘(영주)와 천황(天皇) 측은 막부의 나약한 외교를 비판하였습니다. 외국 상품이 들어와 물가가 상승하자 막부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도 높아졌습니다. 이에 다이묘와 하급 무사는 천황을 받들어 외세를 몰아내려 하였습니다(존왕양이). 그러나 곧 서양의 위력을 느낀 무사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을 시도하고 막부를 타도하려 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를 세웠습니다(1868).

(페리(위)와 페리의 내항 모습(아래): 미국은 태평양에서 조업하던 고래잡이 선박과 중국으로 가는 선박의 중간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을 개항하려 하였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를 세우려 하였습니다(메이지 유신). 정부는 봉건 제도를 폐지하여 중앙 집권화를 꾀하고, 신분제를 폐지하였으며, 조세 제도도 개혁하였습니다.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근대 산업을 발전시키고 징병제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서양의 상황을 파악하고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하여 유럽과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사절단은 조약 개정에는 실패하였지만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근대화에 더욱 앞장섰습니다.
반면, 메이지 정부는 민중의 생활 개선과 민주주의 제도의 도입에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이에 헌법 제정과 국회 개설 등을 요구하는 자유 민권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한편, 천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일본 제국 헌법을 제정하여 근대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1889).
대외 침략에 나선 일본은 오키나와를 영토로 편입시켰고, 윤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개항하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자유 민권 집회 모습: 청중들이 연사의 연설을 방해하는 경찰에 항의하고 있습니다.)

(유럽식 복장을 한 천황: 천황은 유럽식 군복을 입어 문명개화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출처] 찬이의 세계사 이야기 - 56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작성자 찬
일본에서 19세기의 후반에 발생한 대규모의 정치적ㆍ사회적 변혁이다. 서양 국제체계의 수용, 다원적 정치체제의 일원화, 신분제의 대폭적인 간략화, 중국에서 서양으로의 문명의 전환 등을 핵심으로 한다. ‘유신’이라는 호칭은 막부말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사용된 ‘일신(一新)’을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고상한 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주수구방(周雖舊邦), 기명유신(其命維新)’과 갈이 원전에서의 ‘유신’은 ‘혁명’, 즉 왕조교체와 동의였지만 근대 일본에서는 고전에 의거한 의미로 사용된 예가 거의 없다.
유신의 기간의 시점(始点) 은 천보(天保) 말년의 개혁(1840년 전후)이나 페리의 내항과 개국(1850년대), 종점(終点)은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이나 서남(西南) 내란(1877), 입헌정(入憲政)의 실현(일본제국헌법의 제정과 제국(帝國)의 회의 개회, 1889ㆍ1890) 등 시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지만 변혁은 근대 서양이 만들어 낸 주권국가 질서로의 강제 편입을 계기로 시작 되어 일련의 국제와 사회제도의 개혁을 거쳐 다음 시대로 이행하였다는 견해는 공통하고 있다.
유신 초기에 자주 사용되었던 정치 상징은 ‘양이(壤夷)’였다. 후기 수호학에서 유래하는 이 상징은 동시대의 한반도에서 실행되었던 ‘서쪽 오랑캐를 국토에서 몰아낸다’는 의미이다. 정신으로서는 ‘쇄국(鎖國)’으로의 자폐(自閉)와 반대의 극에 있으며 따라서 ‘개국’ 정책으로 쉽게 전화하여 혁명을 계속하기 위한 정한(征韓) 등이라는 변종도 발생하였다. 내정 면에서는 ‘공의(公議)’가 널리 사용되었다. 당초 친번(親藩) 외양(外樣)의 대대명(大大名)의 막부정치 참가 구상 중에 등장하였지만, 안정(安政) 5년(1859년) 정변으로 그들이 탄압을 받아, 조정이 조약 조인에 항의하기 위해 ‘천하지공론(天下之公論)’을 청취하도록 요구하여 전제(專制)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도 획득하였다. 정권 구상은 막부말에는 천왕 하에 주요 대명(大名)이 연합정권을 만든다는 형태로 수렴하였지만 왕정복이고 쿠데타에 의한 도쿠가와(德川)의 배제를 거쳐 전국에서의 관료 등용, 관사 내부에서의 공선(公選)으로 전개하고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접합하여 의회제의 구상에 이르렀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가 ‘여론공의(輿論公議)’를 정통성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다. 막부말에는 또한 ‘복고(復古)’라는 상징도 등장하였다. 이것은 ‘왕정복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62년에 도쿠가와(德川) 장군은 서양식의 군제개혁을 ‘관영(‘寬永) 이전’으로의 복고로서 정통화하였다. 왕정복이고 시에 내걸었던 것은 ‘신무창업(神武創業)’이었지만 의거해야 할 제도가 없는 신화(神話)세계의 참조는 천왕의 친정(親政)이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한 서양의 제도를 임의대로 섭취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막부말 10년간 원만하였던 정치체제의 변화는 왕정복고와 무진(戊辰)내란 후에 가속화되어 폐번치현, 미유럽에 대한 대규모 사절과 유학생의 파견, 에조치(蝦夷地 : 훗카이도의 옛 이름)ㆍ류큐(琉球 : 오키나와의 옛 이름)의 내국화(內國化)와 근린 제국과의 조약체결 등이 잇따라 단행되었다. 그리고 통치 신분이었던 무가의 녹봉도 해소되었다. 왕족(王族)ㆍ화족(華族)이 창설되는 한편, 기타의 신분이 피차별 신분이나 맹인을 포함하여 일률 평등의 신분으로 재편성된 사실은 개혁이 막부말의 정치과정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사회의 심부까지 미쳤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변혁은 몇 개의 무사반란을 일으켰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서유럽에 대한 굴욕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침략적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러일전쟁의 도발하고, 1910년에는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 합병하여 식민지배한 것이다. 계속해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1년에 미국의 진주만(眞珠灣)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1945년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 세례를 자초한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결과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일본의 근대화에 큰 도움을 준 나라
국가 자체가 도움을 준 것만 따지면 영국 이외에는 다 쩌리죠.
러일전쟁의 전비마련에서 1,000만 파운드가 필요했는데, 영국정부가 500만 파운드치의 일본국채를 사줬고, 나머지 500만 파운드는 제정러시아를 증오하던 미국은행가 제이컵 시프가 사줬습니다. 미국정부는 거부했음.
뭐, 미국은 포츠머스조약을 중개함으로써 이미 한계에 달한 일본이 승전으로 매듭지을 수 있게 도와줬으니 프랑스나 독일보다는 일본의 확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