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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글]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두 얼굴

작성자이연|작성시간11.03.07|조회수125 목록 댓글 0

 일본 명치유신의 정신적인 지주로 알려진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시(萩市)에서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사설학교를 운영하며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다. 

제자들 중에는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명치 시절 일본의 총리를 역임하고

한일합방을 주도한 인물들이 나와서 쇼인의 정한론(征韓論)을 실천에 옮겨 성사시켰다. 

 

  그런데 이 요시다 쇼인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는 단연 긍정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그의 정한론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이 나올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아래에 요시다 쇼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한 극작가 신봉승씨의 글과

   부정적으로 본 한 재일평론가 정경모씨의 글을 옮겨왔다.

   요시다 쇼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에 도움을 드리고저 하는 의도에서다.(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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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당했지만 그의 제자들은 일본을 열었다    (데일리안)

 

<신봉승 칼럼>일본 명치유신을 낳은 선각자 요시타 쇼인의 가르침
"죽어서 불후가 되려거든..." 제자 8명이 총리-장관돼 근대일본 이끌어
신봉승 극작가 (2011.02.22 08: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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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타 쇼인 상. 요시타 가문 보관본. ⓒ인터넷 화면 캡처
부산 바로 건너편인 일본국 본주의 야마구치 현(山口縣) 서쪽 바닷가에 하기 시(萩市)라는 인구 4만 3천 명 정도의 작은 시골도시가 있다.

140년 전의 지도 한 장을 들고도 옛 거리를 산책할 수 있을 정도로 이른바 성밑 거리(城下町)가 잘 보존되어 있는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일본국 근대화의 상징인 <명치유신>이 태동되었고, 근현대 일본국 총리대신을 여덟 사람이나 배출한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 같은 하기 시의 영광은 130여 년 전, 28세의 선각자 요시타 쇼인(吉田松蔭)이 다타미 여덟 장(약 4평) 크기의 좁은 공간에 학숙(松下村塾)을 열고, 13명의 제자들에게 일본국의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 꿈은 도전정신이었으며, 호연지기를 일깨우는 일이었다. 그 당시의 공교육 기관인 명륜관에서의 교육내용이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젊은이들에게 번 주에게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공맹의 도리를 가르친데 반해 요시다 쇼인은 ‘번은 곧 없어질 것이며, 일본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 우리는 모든 힘과 정열을 일본이라는 새 나라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수구의 집단인 번이나 막부 쪽에서 본다면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닐 수가 없다. 그리하여 요시타 쇼인은 31세의 아까운 나이로 <안세이노 고쿠(安政の獄)>’에 연루되어 에토로 압송되었다가 사형을 당한다.

비록 스승은 불우한 삶을 마쳤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불타는 호연지기의 기세를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 ‘명치유신’이라는 대업을 이루어 내는 데 선봉을 섰고, 새로운 일본국 근대정부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면서 아시아 제패에 앞장서게 된다.

유신에 성공한 일본정부가 근대적인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13명의 제자들 중에서 총리대신이 3명, 대신(장관)이 6명이나 배출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1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또 다섯 사람의 총리대신이 이 지역에서 배출 되었다면 요시타 쇼인이라는 젊은 선각자가 생각한 국가의 미래, 다시 말하면 정신적 근대화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 달 말께 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인 정종섭 교수가 주도하는 거연학사(居然學社)의 멤버들과 함께 하기 시의 여러 유적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거연학사’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궁구(窮究)하는 젊은 법조인들의 일종의 학숙(學塾)과도 같은 연구모임이다.

학통이나 학연과 같은 굳건한 줄기가 사라진 오늘과 같은 메마른 현실에서 젊은 법조계의 엘리트들이 모여 조국의 미래를 토론하면서 그 진로를 모색하는 모임이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뜨거운 열기를 느꼈던 터이라 나는 그들의 가이드를 자원하였던 터이다.

요시타 쇼인이 세웠던 ‘송하촌숙’은 원형 그대로 남아있었고, 나는 그 현장에서 우리의 젊은 법조인들에게 선각의 불꽃 요시타 쇼인의 가르침을 가감없이 입에 담았다.

"죽어서 불후(不朽)가 되려거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라. 나라의 대업(大業)을 이루려거든 오래 살아서 뜻을 이루라!"

얼마나 멋진 가르침인가.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어야 하는 철학적 인생론은 지식만을 전하는 학문에 의하여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호연지기’를 심어 주는 데서 시작된다.

‘하늘 높이 솟아올라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큰 눈을 떠야 할 것이다(飛耳長目)’라는 말로 젊은 인재들의 열정과 이상을 꿈틀거리게 하였고,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미래의 일본을 위해 몸과 마음을 함께 내던지게 하는 진로를 제시하지를 않았던가.

지금도 하기 시에 있는 명륜소학교에서는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선창으로 ‘쇼인 선생님의 말씀’이라는 구호를 큰 소리로 외치면서 내일의 일본을 이끌어갈 소년들에게 호연지기의 꿈을 심어주고 있다는 내 설명에 <거연학사>의 젊은 판사, 검사, 변호사들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서리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으로 뜻 깊은 가이드를 한 셈이다.

글/신봉승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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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침탈 원흉 길러낸 ‘요시다 쇼인’ / 정경모   (한겨레)
한겨레
» 일본 우익들이 ‘메이지 일본의 설계자’로 추앙하는 요시다 쇼인(왼쪽)과 그가 19세기 중반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운영하던 사숙 ‘송하촌숙’(오른쪽)의 전경.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와 소네 아라스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등 조선 침탈자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일본은 태곳적부터 조선 땅을 지배해 왔노라고 주장하는 근거로서 일본 사람들이 곧잘 자기들의 신화를 내세운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얘기에서도 몇 차례 밝힌 바 있지 않았소이까.

그중에서도 일본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정벌군을 이끌고 삼한을 정복한 결과, 3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삼한 땅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고유의 속주였다는 오카쿠라 덴신의 주장(81회)은 특출한 것인데 그 신공황후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신공황후 신화는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이 품고 있는 메이지시대에 대한 향수나 집착과도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니만치, 지루하고 허황된 잠꼬대라고 일소에 부치지 말고 꼼꼼하게 들어주기 바라는 바이외다.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해당하는 사서가 <일본서기>(720년 편찬)인데, 신공황후에 대하여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소이다.

“신공황후가 하늘의 도움을 받아 군선을 거느리고 포구를 출발하니 풍신(風神)은 바람을 일게 하고 파신(波神)은 물결을 일으켜, 함대는 돛을 올리거나 노를 저을 필요조차 없이 신라 땅에 당도하니, 군선은 바다를 덮고 깃발은 일광에 빛나며 고적 소리는 산천을 울려, 신라 임금은 몸을 벌벌 떨면서 해가 서쪽에서 뜨고 알천 강물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한 봄과 가을 두 차례의 조공을 거르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는 신라가 일본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그 왕들이 진영 밖에서 머리를 숙여 일본을 섬기는 서쪽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여기서 메이지 일본의 설계도를 그린 선각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요시다 쇼인(1830~1859)을 소개하고자 하외다. 내가 앞 글(82호)에서 우상 중의 왕초 우상이라고 지적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인데, 이 사람은 메이지유신 이전에 바쿠후(막부)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지만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2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총독) 등등 조선을 침탈했던 역사상의 인물들 모두 그가 자기의 사숙(私塾)인 송하촌숙(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길러낸 제자였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그가 어떠한 사상으로 제자들을 훈육하였나, 이 짧은 글에서 그 전모를 밝힐 수는 없으되, 그가 남긴 다음 두 마디의 말은 꼭 기억해 두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러시아나 미국과 같은 강국에 대해서는 신의를 돈독히 하여 우호관계를 맺음으로써 국력을 기른 연후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조선과 만주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점령하여 강국과의 교역에서 잃은 것은 약자에 대한 착취로써 메우는 것이 상책이니라.”

“류큐(流球)를 손에 넣고 조선을 빼앗은 후에, 만주를 무찌르고 중국을 제압하며, 더 나아가 인도를 넘겨다보면서 공세를 취하여 본토의 방위를 굳힘으로써, 신공(神功)이 다하지 못했던 바를 이룩하며, 풍신(수길)의 유지를 이어받는 이외에 다른 길은 없을 것이니….”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지’는 알만하다손 치더라도, ‘신공이 다하지 못했던 바’가 운위되어 있어 이따위 황당무계한 신화가 메이지시대의 침략적 일본을 분기·격려시키는 수단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나 자신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이다.

 

메이지 일본의 설계자는 요시다 쇼인이었고,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자들에 의하여 요시다가 머리에 그렸던 설계도대로 메이지 이후의 일본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한-일 국교정상화 3년 뒤인 1968년 일본이 국력을 기울여가며 화려하게 거행하였던 ‘메이지 100년 기념제’ 때의 선언문을 음미해 보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오늘까지의 일본의 영광스러운 100년의 역사는 앞으로 올 100년의 새로운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오늘 거행되는 100년 기념식전은 일본의 제2의 비약을 약속하는 것임을 나는 믿어 마지않는 바이다.”


 
»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메이지 100년은 조선의 ‘굴욕과 비애’를 뜻하는 것이나, 아무튼 이상의 기념사를 낭독한 사람은 사토 에이사쿠였는바, 그는 한-일 수교 때의 총리였으며, ‘55년 체제’를 구축한 기시의 친동생이기도 하오이다.

한마디만 더 여기에 덧붙인다면, 메이지시대를 설계한 선각자 요시다 쇼인은 도쿄 구단자카에 자리잡고 있는 야스쿠니신사에 신위 제1호로 모셔져 있을 만큼 일본인들이 숭앙하는 인물이외다.

역대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에 가서 혀리를 굽혀 절을 할 때, 실상 누구에게 절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두기를 바라는 바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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