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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나는 효봉 스님의 사리탑 기단 바위 이야기

작성자정대재|작성시간22.10.07|조회수365 목록 댓글 0

 

◆3년만에 개최된 제64회 밀양아리랑대축제의 <출향인 고향의 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재경밀양향우회의 전세 버스를 타고 밀양을 다녀 온 것은 지난 9월 23일이었다.

전세버스는 28인승으로서 당일 코스 1대와 1박 2일 코스 1대 등 2대로 편성되어 있었지만, 애통하게도 당일 코스에 편성된 나는 <출향인 고향의 밤> 행사를 끝으로 서둘러 귀경 전세버스에 승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며칠 후, 재경밀양향우회의 카톡방에 올린 총무의 표충사 방문 사진들을 보고 나는 가슴을 치면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수백 장이나 되는 행사 사진 중에서 내가 포함된 당일 코스 방문단의 사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이 1박 2일 코스 고향 방문단의 사진으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카톡방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었지만, 꿈에도 그립던 밀양까지 갔다가 표충사 인근의 내 고향 마을에 가 보지 못한 나는 다른 향우들처럼 내년을 기약하며 그대로 순순히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결코 아니었다.
총무가 카톡방에 올려놓은 호국성지 표충사를 찾은 향우인들의 온갖 사진들을 보면서 내 유년 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을 반추해 보면서 남의 사진들을 통해서나마 길고도 깊은 시름을 애써 달래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 재악산 표충사(載岳山 表忠寺)!






◆예전에는 이 삼청석탑은 만일루 앞의 고색창연한 연못 가에게 서 있었지요. 그런데 그 일본식 연못은 일제잔재 청산운동 때 없어지고 말았는데. 표충사를 품어안은 배산인 재악산(載岳山)의 이름은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이 그대로 공식적인 명칭의 지위를 누리며 버젓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하기야 재약산(載岳山)의 제2봉에다 갖다붙인 재약산(載藥山)이란 이름도 원래대로 재악산(載岳山)의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바른편 능선 너머에 있는 내원임을 끼고 금강폭포 앞의 한계암과 일직손씨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서상암을 거쳐서
재악산(載嶽山)의 최고봉인 사자봉으로 가는 길!


   ◆어린 시절, 소를 먹이러 다니던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곤 했던 '벼락나무 돌껄'의 '북암' 바위- 
       효봉 대선사의 사리탑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바위 앞에는 어른의 몇 아름이나 되는, 그러나 벼락을 맞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이 바위 앞의 상석 자리에 부부처럼 나란히 서 있었지요.



                                        ◆두드리면 과연 목탁소리가 나는지 확인 중입니다.








                           ◆멀리 해발 1,189m의 재악산(載岳山)의 정상 사자봉(獅子峰)이 보입니다.

  ◆대나무숲 위료 소뿔처럼 솟아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 중 왼쪽 것이 재악산의 제2봉인 수미봉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별도의 산인 양, 재약산(載藥山)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충사 배산의 이름은 본래의 재악산(載岳山)과 천황산(天皇山), 재약산(載藥山 등으로 세개나 되는 셈이니까 말입니다.



   ◆예전에는 사천왕문이 이 자리에 있지 않고, 가람 남쪽의 옥류동천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지요.  
                          


                                 ◆멀리 바라다보이는 산봉우리가 붓끝 모양의 필봉(筆峰)입니다. 



 ◆사진 전면에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을 섰던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기허대사 등 삼대 호국 의승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유림과 불교계가 연합하여 춘추로 향사를 올리고 있는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보입니다.
 다른 사찰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현상이지만, 호국충심에는 서로 배타적이던 불교계와 유림계가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사찰의 이름이 신라왕자의 난치병을 고친 신령스러운 샘물이 있는 영정사(靈井寺)에서 애국충정의 재악산 표충사(載嶽山 表忠寺)로 바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그러니 이 재악산 표충사야말로 전국 유일의 호국성지(護國聖地)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사찰의 이름이 신라왕자의 난치병을 고친 신령스러운 샘물이 있는 영정사(靈井寺)에서 애국충정의 재악산 표충사(載嶽山 表忠寺)로 바뀌게 된 것도 그때문이지요!  
그러니 이 재악산 표충사야말로 전국 유일의 호국성지(護國聖地)임이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사명대사의 금란가사를 비롯하여 선조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지휘봉 등이 전시된 유물관 










다음에 소개한 여러 향우들의 글과 사진들은 위와 같은 사정으로 재경밀양향우외의 카톡방을 뜨겁게 달구었다가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흔적들이기에 그 내용들을 원문 그대로 소개해 보기로 합니다.    

*아이고. 1박2일의 여정이라
사진이 많습니다

*이 사진 안에 고향의 하늘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숲도 보입니다
잘하면 맑은 공기도 마실 수 있을거에요.

*어느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수옥아, 이제 다시 이런 여행을
할수 있을까?^^
그 만큼 이번 여헁이 좋으셨다구~^^♧
저희 1박팀은
손명석 특보님을 가이드로모시고
고향의 유명한 곳은 다 둘러본 거
같아요
손명석 특보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러게요.. 이번 밀양아리랑축제는 당일 차량 한 대, 일박 차량 한대, 이렇게 갔었는데, 주로 일박하신 분들 위주의 행사가 된 것 같습니다. 당일 차량에 함께 탑승하신 분들 과도 좋은 추억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다음번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당일 차량 봉사자 설상희 올림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나는 효봉 대선사 사리탑 기단 바위 이야기

*정말로 어느부위를 두드리니 진짜 목탁소리가 났습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 아닐까요??
산이 높고 풍수지리가 대단하던데 이곳의 기운을 받으면 휼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정말 인재가 많은 곳입니다
이언기회장님이 올려주신 영상입니다
목탁소리가 나는 바위입니다
표충사 경외에 있었습니다
혹 가신다면 체험 보셔요

혹 손명석특보님 이 영상 보시면 이 바위에 대해 알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두드리면 과연 목탁소리가 나는지 확인 중입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이 바위를 '北巖'이라 하였고,
그 주변 일대를 '벼락나무 돌껄'이라 하였지요.
바위 앞에 장승처럼 서 있던 천년 묵은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느 해 여름에 벼락을 맞았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북암에서 표충사 후미의 대나무 숲을 따라 사자평으로 가는
옛길 가의 풀밭은 어릴 때 우리가 소를 먹이러 다니던 주요 코스 중의 하나였지요.
그렇게 북암 일대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반면에,

여름철이면 고목나무의 그늘이 아주 좋은 관계로 나뭇군들과 사자평으로 가는 길손들이 낮잠을 자곤
했던 아주 좋은 쉼터이기도 하였답니다.

그런데 1958년에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던 효봉 스님이 표충사에서 말년을 보내던 효봉 스님이 1966년에 입적한 뒤
다비식에서 사리 여러 과가 수습되어 사리탑을 세우게 되면서
우리들의 추억 어린 옛 놀이터가 구산 스님과 법정 스님과 같은 기라성 같이 훌륭한 제자를 두신 대선사님 사리탑의 기단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효봉 스님은 1888년에 평안남도의 수안이씨(遂安李氏) 부잣집에서 태어난 신동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14년에 조선인 최초의 판사가 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근무하다가
10년이 되던 해에 조선인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일을 겪게 되면서

3년 동안이나 방황을 하다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으로 석두(石頭) 스님을 찾아가 중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38세가 되던 1925년의 일이었습니다.

효봉 스님은 1962년 한국불교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구산 스님과 법흥, 원명, 보성, 법정 스님 등의 제자들을 두게 되었지요.

그런데 위의 동영상을 보면 이언기 회장이 사리탑의 기단 역할을 하는 '북암' 바위를 돌로 두드릴 때 목탁 소리가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 바위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랍니다. 다시 말해서 원래부터 목탁소리가 나는 바위였으나 우리가 모르는 상태로 거기에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세워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는 그런 현상이 없다가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세워진 이후에 목탁소리가 나게 된 것인지, 그것은 저도 모르겠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전자에 속하든, 후자에 속하든 유년시절에 우리들이 소를 먹이러 다닐 때의 중요한 놀이터였던 바위에서 ㅈ금은 목탁 소리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린 시절에 표충사 경내에서 보았던, 손자승이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고 나녔던 그 효봉 스님이 표충사에서 입적한 뒤 다비식에서 현대사회에 와서는 보기 드물게도 진주 같은 사리들이 다수 수습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거니와,

 

효봉 스님의 사리탑 기단 역할을 하게 된 예의 그 우리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던 <북암>이란 바위를 두드리면 청랑한 목탁소리가 난다는 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설과 겹치면서 절로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 필자의 생각-

 

*위이 글은 정대재 선배님의 답변이었습니다. ㅎㅎ

 

*정말로 어느 부위를 두드리니 진짜 목탁소리가 났습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 아닐까요?? 산이 높고 풍수지리가 대단하던데 이곳의 기운을 받으면 훌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정말 인재가 많은 곳입니다. 

*네
갑시다
찐짜 종소리
나는 바위가 다는 아니고
소리나는 바위가 따로 있어요

*그렇습니다.
만어사는 종소리,
표충사는 목탁소리,
우연일까요?

 

*만어사 종소리는 6시 내고향에서 시청 한 듯...신기했슴다.
다음 고향 방문엔 솔밭과만어사에 가고 싶군요^^

*네
맞아요
저 국민하교 소풍을 만어사
절에 갔어요
나무하러가고 봄에 쑥떤어로
가고 초팔월이면 꼭 만어사
절에 가고했어요
친척분 돌아가시면 49제
지내고 했어요

 

◆제 글에 입력 불찰로 문맥이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서 있는 북암 바위의 어느 부분에 목탁 소리가 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의 因然說을 감안한다면 더욱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랑진 만어사 주변의
종소리가 나는 경석처럼 말입니다.

 

*정대재님
좋은 정보 잘읽었습니다
계속 좋은글 올려주세요.

*이 좋은 말씀을 현장에서 생동감 있게 듣지 못 한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내년에는 꼭 함께 하시지오^^

 

◆당일 코스에 배정되어 표충사에 함께 못 간 것이 한이로군요!
사라호 태풍 이전의 표충사와 지금의 표충사는 너무도 너무도 많이 변해 있어서 옛 모습을 생생하게 반추해 볼 수도 있었는데!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가람의 출입구가 남쪽의 옥류동천 쪽으로 나 있었고,
따라서 비각을 포함한
碑林과 산문도 그쪽에 위치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삼층석탑 가에는 고색창연한 연못이 있었고,
그 둘레엔 잘 자란 배롱나무들과 아름드리 염주나무(보리수)와 호두나무들이 서 있었지요.

그때는 아랫마을에 살림집을 둔 대처승들이 수도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초에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조계종 산하의 비구승들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 이후에 판사 출신의 큰스님이 조실 스님으로 들어왔다며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했는데,
그때, 孫僧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와 망중한을 즐기던 노스님이 바로 그 유명한 효봉대선사였지요.

지금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있는 北巖 큰바위 앞에는 천년 거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한 그루가 큰 가지는 벼락을 맞은 채로 부부처럼 서 있었지요.

그곳 북암 왼쪽으로는
내원암과 한계암, 서상암 쪽에서 흘러온
금강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의 봉삼터 위쪽에 붓끝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나에게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과도 같았던 筆峰이지요.

아직도 일제식 이름인 천황산으로 통용되고 있는 재악산(載岳山)의 제1봉은 해발 1,108m인 獅子峰이며,
그 아래에 있는 암자가 바로 서상암인데,

그곳이 일직 손씨들의 중시조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의 초상화를 모셨던
성지나 다름 없는 곳이지요.

손홍량 선생은 고려 말에 복천부원군으로 봉해졌던 인물로서 정계를 은퇴한 후 고향 복주(안동)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
10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을 때, 그곳으로 피난을 온 고려 공민왕을 맞아 모시면서 난을 평정하는데 충심을 다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공민왕이 그의 충절을 기려 직접 그린 초상화와 궤장을 하사하였던 것이지요.

그 후,
손홍량 선생의 후손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안동 일직면의 타양서원에 봉안 되어 있던 손홍량 선생의 영정을
산세가 험한 이곳 載岳山의 서상암으로 옮겨와 난이 평정될 때까지 봉안하곤 했던 것이지요!

손홍량 선생의 시호는
정평(靖平)이며,

안동 일직면에 있는 타양서원과 밀양 산외면 다죽리의 혜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지요.

표충사에는 임진왜란 때의 3대 의승장인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그리고 기허대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변란이 있을 때 손홍량 선생의 영정 피난처로 활용된 연고 로 인하여

단장면 안법리 출신으로 만주 환인현의 교민회장인 손경헌 선생의 주선으로

부북면 출신의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 선생이 창설한 만주 무송현의 <흥업단>에서 파견한
군관 양성자금 모집책들의 활동 거점으로 이용했던 곳도 바로 이곳 서상암이었지요.

또한, 밀양 출신의 의열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의열단>을 결성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峰) 선생이 <광복단>으로 활약하고 있던 고모부인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중앙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독립운동 지도자의 길을 꿈꾸면서

1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각종 병법서를 섭렵하며 체력단련과 무술을 익혔던 곳도 바로 표충사였으니,
이곳이야말로 호국의 성지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

◆그런데 표충사를 방문한 향우들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호국의 성지인 표충사의 배산의 이름은 분명히 載嶽山입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이름은 아직도 일제가 자기네 명치천황의 호징을 보다서 갖다 붙인 천황산으로 버젓이 사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얘기가 나온 김에 <호국성지 표충사 배산 재악산(載嶽山) 이름(표지석) 바로세우기 추진위원회(위원장 민경우)>를 지원하기 위해 제작한 우리 가곡 <載嶽山)아>를 소개합니다. 

 

재악산(載嶽山)아 / 작시 장우익 / 작곡 정덕기 / 바리톤 박흥우 / 피아노 금혜승 / (사)종합문예유성 가곡 5집 앨범/영상 서미영

서미영 경기성남추천 1조회 1422.05.13 17:06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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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듣고 싶으면 아래의 영문 주소를 클릭해 주세요.
https://youtu.be/1MdC_sE5vPw


재악산(載嶽山)아

  장우익


三南의 金剛이요 嶺南의 알프스라
능선따라 이어지는 억새평원 장관이요
이어온 무한세월 미리벌의 상징인데
사자평 칡밭재에 고사목의 한탄인가

빼앗겼던 그 이름 다시찾아 불러보자
미리벌은 부른다 재악산아 재악산아

저높은 사자봉은 산봉에 으뜸이라
호국성지 표충사는 재악산의 사찰이요
산들늪 갈대숲에 울부짖는 바람소리
성불의 사명대사 어리석음 꾸짖는가

동영상

  •  
*네
갑시다
찐짜 종소리
나는 바위가 다는 아니고
소리나는 바위가 따로 있어요

*그렇습니다.
만어사는 종소리,
표충사는 목탁소리,
우연일까요?

 

*만어사 종소리는 6시 내고향에서 시청 한 듯...신기했슴다.
다음 고향 방문엔 솔밭과만어사에 가고 싶군요^^

*네
맞아요
저 국민하교 소풍을 만어사
절에 갔어요
나무하러가고 봄에 쑥떤어로
가고 초팔월이면 꼭 만어사
절에 가고했어요
친척분 돌아가시면 49제
지내고 했어요

 

◆제 글에 입력 미숙으로 문맥이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지라도,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서 있는 북암 바위의 어느 부분에 목탁 소리가 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의 因然說을 감안한다면 더욱 불가사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랑진 만어사 주변의
종소리가 나는 경석처럼 말입니다.

 

*정말로 어느부위를 두드리니 진짜 목탁소리가 났습니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 아닐까요??
산이 높고 풍수지리가 대단하던데 이곳의 기운을 받으면 휼륭한 사람이 많이 나온다고 하셨는데 정말 인재가 많은곳입니다
*정대재님
좋은 정보 잘읽었습니다
계속 좋은글 올려주세요.

*이 좋은 말씀을 현장에서 생동감 있게 듣지 못 한 게 매우 안타깝습니다
내년에는 꼭 함께 하시지오^^

 

◆당일 코스에 배정되어 표충사에 함께 못 간 것이 한이로군요!
사라호 태풍 이전의 표충사와 지금의 표충사는 너무도 너무도 많이 변해 있어서 옛 모습을 생생하게 반추해 볼 수도 있었는데!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은 가람의 출입구가 남쪽의 옥류동천 쪽으로 나 있었고,
따라서 비각을 포함한
碑林과 산문도 그쪽에 위치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삼층석탑 가에는 고색창연한 연못이 있었고,
그 둘레엔 잘 자란 배롱나무들과 아름드리 염주나무(보리수)와 호두나무들이 서 있었지요.

그때는 아랫마을에 살림집을 둔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초에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조계종 산하의 비구승들이 들어오게 되었지요.
그 이후에 판사 출신의 큰스님이 조실 스님으로 들어왔다며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했는데,
그때, 孫僧이 미는 휠체어를 타고 바람을 쐬러 나와 망중한을 즐기던 노스님이 바로 그 유명한 효봉대선사였지요.

지금 효봉 스님의 사리탑이 있는 北巖 큰바위 앞에는 천년 거목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팽나무 한 그루가 큰 가지는 벼락을 맞은 채로 부부처럼 서 있었지요.

그곳 북암 왼쪽으로는
내원암과 한계암, 서상암 쪽에서 흘러온
금강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의 봉삼터 위쪽에 붓끝처럼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가
바로 나에게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과도 같았던 筆峰이지요.

아직도 일제식 이름 인 천황산으로 통용되고 있는 載岳山의 제1봉은 해발 1,108m인 獅子峰이며,
그 아래에 있는 암자가 바로 서상암인데,

그곳이 일직 손씨들의 중시조인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의 초상화를 모셨던
성지나 다름 없는 곳이지요.

손홍량 선생은 고려 말에 복천부원군으로 봉해졌던 인물로서 정계를 은퇴한 후 고향 복주(안동)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가
10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
왔을 때, 그곳으로 피난을 온 고려 공민왕을 맞아 모시면서 난을 평정하는데 충심을 다하였는데,

이에, 감동한 공민왕이 그의 충절을 기려 직접 그린 초상화와 궤장을 하사하였던 것이지요.

그 후,
손홍량 선생의 후손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안동 일직면의 타양서원에 봉안 되어 있던 손홍량 선생의 영정을
산세가 험한 이곳 載岳山의 서상암으로 옮겨와 난이 평정될 때까지 봉안하곤 했던 것이지요!

손홍량 선생의 시호는
정평(靖平)이며,

안동 일직면에 있는 타양서원과 밀양 산외면 다죽리의 혜산서원에서 제향되고 있지요.

표충사에는 임진왜란 때의 3대 의승장인 사명대사와 서산대사, 그리고 기허대사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변란이 있을 때 손홍량 선생의 영정 피난처로 활용된 연고 로 인하여

단장면 안법리 출신으로 만주 환인현의 교민회장인 손경헌 선생의 주선으로

부북면 출신의 단애(檀崖) 윤세복(尹世復) 선생이 창설한 만주 무송현의 <흥업단>에서 파견한
군관 양성자금 모집책들의 활동 거점으로 이용했던 곳도 바로 이곳 서상암이었지요.

또한, 밀양 출신의 의열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의열단>을 결성한 약산(若山) 김원봉(金元峰) 선생이 <광복단>으로 활약하고 있던 고모부인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중앙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독립운동 지도자의 길을 꿈꾸면서

1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각종 병법서를 섭렵하며 체력단련과 무술을 익혔던 곳도 바로 표충사였으니,
이곳이야말로 호국의 성지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일로 참석하신 분들의
사진이 별로 없고
일박 차량 위주의 사진만
많이 올라와서
아쉬웠네요 ~

다음번에는
다 함께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일 차량은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서. 고향에 머물 시간이 짧아서
저도 너무 아쉬웠습니다

다음기회에는 1박 차량 늘려서
더 많은 분들이 참가 하기를~^^
멋진 가을입니다.^^

*그러게요.. 이번 밀양아리랑축제는 당일차량 한대, 일박차량 한대, 이렇게 갔었는데, 주로 일박하신분들 위주의 행사가 된것 같습니다. 당일 차량에 함께 탑승하신 분들 과도 좋은 추억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다음번에 뵐때까지 건강하세요~ 당일차량봉사자 설상희올림
*아이고. 1박2일의 여정이라
사진이 많습니다

이사진안에 고향의 하늘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숲도 보입니다
잘하면 맑은 공기도 마실수 있을거에요.

어느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수옥아 이제 다시 이런 여행을
할수 있을까?^^
그 만큼 이번 여헁이 좋으셨다구~^^♧
저희 1박팀은
손명석 특보님을 가이드로모시고
고향의 유명한곳은 다 둘러본거
같아요
손명석특보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3.13 밀양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을강 전홍표 선생의 휘하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형제 등은 먼저 망명하여
남경의 금릉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한 뒤,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던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창단의 주역이 되었고,
그해 4월 4일에 단장면의 용회동 장터에서 있었던 태룡리 만세운동과
4월 6일의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밀양의 청년들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윤세복 선생이 지휘하는 대종교(단군교) 계열의 <흥업단>에 가입하거나
황상규 선생과 김대지 선생, 손일민 선생이 후원하는 <의열단>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자-
-

*정대재선생님의 글을 보고 이제 답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일 다녀 오신분들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에 조용히 있으려 했는데...
평일날 하루, 고향을 방문한 고생을 보답하기 위해 많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코스를 정했습니다만 변경이 되어 실망하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다음 기회에는 멋진 고향방문이 될 수 있도록 건의 하겠습니다.

1박 하신 분들은 제가 최선을 다해 밀양 동북부 지역을 돌며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예를들어 표충사의 배산이
왜? 재악산인지,
왜? 재약산인지,
왜? 천황산인지...
'재악산표충사'란 현판 아래는 천황산, 재약산이란 안내판이 공존하고 있더군요.
'호국성지 표충사'의 전두환대통령의 치적, 거기에는 당시 주지 지은스님의 공덕 등.
그리고 안타깝게도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빼앗긴표충사의 유물까지.
유물관 문이 닫혀 반환 됐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네요.

여기서 각설하고,
효봉스님 사리탑은 돌로 두드린 흔적에 목탁 소리나는 곳이 많았습니다. 인기였지요. 바위 위에 사리탑이라...
그런데 언젠가 울타리로 못들어 가게 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정비를 해서 들어 갈 수 있도록 했더군요. 왜 울타리를 쳐서 못 두드리게 했는지는 저도 신문사를 물려 주고, 갈 기회가 없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주지스님도 몇번이나 바뀐지라.
하여간 효봉큰스님 사리탑의 목탁소리도 표충사의 신비의 소리였고, 보물이었으며, 관광객 및 시민들께 불심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거듭 당일 왕복하신 향우님들의 고생하신 고향사랑의 열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이 나는 신비로운 사명대사의 비석이 봉안된 비각 (밀양시 무안면 소재)  

<관련 신문 기사>


밀양 3대신비, 사명대사 표충비각 한출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에 18일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경까지

 1리터 가량 땀이 흘렀다.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남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표충비가의 땀흘린 역사를 되짚어 보면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무렵에 한출 기록이 있으며,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시, 한출한 바 있다.

사진=18일,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무안면 사명대사 표충비각이  1리터 가량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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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일로 참석하신 분들의
사진이 별로 없고
일박 차량 위주의 사진만
많이 올라와서
아쉬웠네요 ~

다음번에는
다 함께 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일 차량은 오고 가는 시간이
길어서. 고향에 머물 시간이 짧아서
저도 너무 아쉬웠습니다

다음기회에는 1박 차량 늘려서
더 많은 분들이 참가 하기를~^^
멋진 가을입니다.^^

*그러게요.. 이번 밀양아리랑축제는 당일차량 한대, 일박차량 한대, 이렇게 갔었는데, 주로 일박하신분들 위주의 행사가 된것 같습니다. 당일 차량에 함께 탑승하신 분들 과도 좋은 추억 만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다음번에 뵐때까지 건강하세요~ 당일차량봉사자 설상희올림
*아이고. 1박2일의 여정이라
사진이 많습니다

이사진안에 고향의 하늘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숲도 보입니다
잘하면 맑은 공기도 마실수 있을거에요.

어느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수옥아 이제 다시 이런 여행을
할수 있을까?^^
그 만큼 이번 여헁이 좋으셨다구~^^♧
저희 1박팀은
손명석 특보님을 가이드로모시고
고향의 유명한곳은 다 둘러본거
같아요
손명석특보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3.13 밀양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을강 전홍표 선생의 휘하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한봉인 형제 등은 먼저 망명하여
남경의 금릉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한 뒤,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던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 창단의 주역이 되었고,
그해 4월 4일에 단장면의 용회동 장터에서 있었던 태룡리 만세운동과
4월 6일의 부북면 춘화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밀양의 청년들도

만주로 건너가 의열단원이 되고,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윤세복 선생이 지휘하는 대종교(단군교) 계열의 <흥업단>에 가입하거나
황상규 선생과 김대지 선생, 손일민 선생이 후원하는 <의열단>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땨마다 땀이 많게는 서 말 이상씩 글자와 글자 사이로 흐르는 신비로운 사명대사의 비석이 봉안된 비각

(밀양시 무안면 소재)  

<관련 신문 기사>


밀양 3대신비, 사명대사 표충비각 한출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 종소리가 나는 만어사 경석과 함께

밀양의 ‘3대 신비’ 로 알려진 사명대사 표충비각에 18일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경까지

 1리터 가량 땀이 흘렀다.

무안면 홍제사(무안리 903-5) 내에 소재한 표충비각은 경남 유형 문화제 제15호로

 이 비석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그 조짐을 미리 알려 준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이 지금까지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이 비를 신성시하고 있다.

 더욱이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받침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그 신비함을 더해주고 있다.

표충비가의 땀흘린 역사를 되짚어 보면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1945년 8.15 해방, 1950년 6.25 전쟁,

 1985년 남북고향 방문 무렵에 한출 기록이 있으며, 최근에는 2008년 FTA 소고기협상,

 2009년 김수환 추기경 선종, 2010년 천안함 침몰, 2017년 대통령 탄핵심판 시, 한출한 바 있다.

사진=18일,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무안면 사명대사 표충비각이  1리터 가량 땀을 흘렸다.

 

*22.7.23 헌법연구소(이사장 이종상)의 행사에 함께하여 밀양 표충사를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 경남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신 이종상 교수님께서 효봉스님과 사리탑에 관련된 일화를 알고 계셔서 이 교수님의 말씀을 참조하여 글을 올려봅니다.

표충사(表忠寺)는 사명, 서산, 기허 등 스님들이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의병활동을 했던 유명한 호국사찰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효봉스님은 조선인으로서는 최초의 판사로 법관생활 6년이 되는 해에 조선인(독립투사)에게 어쩔 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렸고, 이 일이 마음에 걸려 자책한 나머지 법원을 떠나 스님이 되었고, 수행을 거듭한 그는 1962년 한국불교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그가 바로 효봉스님이랍니다. 전국 사찰을 두루 순회하시다가 표충사에서 입적하셨답니다.

오늘 새삼 효봉스님의 일화를 들으며 표충사는 신라시대 이후로, 조선시대에도, 일제강점기에도 나라를 위해 일신의 영예를 버린 뛰어난 고승이 계셨던 호국사찰이라는 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이 길이 무척 좋았고, 힐링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 생각됩니다. 일주문을 바로 지나니 표충사 영사각(永思閣)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천황산 밀양 표충사 안내 :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호국정신이 깃든 절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인 654년에 원효대사가 지었는데 원래는 죽림사(竹林寺)라고 하였다.

이 절에서 829년에 인도 승려 황면선사(黃面禪師)가 다섯 색깔 구름을 본 뒤 3층석탑을 세우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마침 흥덕왕의 왕자가 나병을 치료하려고 신령스러운 산과 약수를 찾아다니다가 죽림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선사의 법력으로 약수를 마시고 완쾌됐다. 이때부터 '신령한 약수'가 있다고 하여 영정사(靈井寺)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국사(一然國師)가 승려 1000여 명을 모아 불교를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출처] 호국사찰 밀양 표충사, 효봉스님 일화 소개(22.7.23)|작성자 신경남 우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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