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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삼휴공(三休公) 셋 아드님 유사(遺事)-사과공(司果公)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7.08.18|조회수86 목록 댓글 1

                 삼휴공(三休公셋 아드님 유사(遺事)-사과공(司果公)

 

삼휴공이 조부 호수공께서 자호정사를 지어 사우(士友)들과 교유했던 자양의 인구마을에 살림나 살았던 선고장(先故庄)에서 아들 삼형제와 딸 한분을 낳아 기르셨다. 장남 사과공(휘 시우), 차남에 귀연공(휘 시희), 삼남에 무재공(휘 시찬)이다. 아버지 삼휴공께서 돌아가실 때 삼형제분의 나이는 사과공이 20, 귀연공은 11, 무재공은 4세로 어렸다. 그러나 조상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유가(儒家)의 후예로 정진하여 무관 또는 유생으로 훌륭히 빛이 났다.

다음은 셋 분의 유사를 묘갈명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았다.

 

사과공(司果公)휘 정시우(鄭時羽) 유사(遺事)

사과공께서는 문무를 겸하였고, 무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나갔으나 그 시대 관리들의 나약한 국가관과 오염된 관계(官界)를 떠나 낙향하여 산수간에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셨다.

아들을 6형제 두어 모두가 유가의 후예로 잘 성장하였다.


인구마을이 수몰 후 나타난 모습이다.

삼휴공께서 살림을 자양(紫陽)의 인구마을에 난 것은 조부 호수공(湖叟公)께서

자호정사를 지어 은거(隱居)하신 땅이기에 호계가에 삼휴정을 짓고,

아들 장남 사과공, 차남 귀연공, 삼남 무재공을 성장시킨 곳이다.


위 사진은 수몰 직전의 언덕에 자리한 귀미마을의 모습이다.

이곳은 사과공이 관계(官界)를 떠나 인구마을에서 귀미마을로 옮겨 귀연공과 무재공

 두 아우와 더불어 학문(學問)을 토론(討論)하고 담락(談樂)하게 냈으며,

증조부 호수공께서 강학하시던 강호정이 건너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귀미마을에는 삼휴고택과 삼휴정이 있었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백 년간 살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중간에 보이는 둥근관은 영천댐 건설공사의 자재들임)

 


삼휴공 후손들이 귀미마을에서 살다 1970년대에 댐건설로 산지사방으로 이주하고 난

옛터전이 물이 줄어 들어나 보인다.

이 삼휴고택은 삼휴공께서 인구마을에 살림나 살았는데, 아들인 사과공이 관직에서

 퇴임하여 1655년에 인구마을에서 귀미마을로 옮겨 집을 지어

대를 이어 수백 년 간 주손(冑孫)이 살았던 집이다.

지금은 하천에 이건 되어 유형문화재 72호로 보전되고 있다.


삼휴정은 삼휴공이 학문연구와 당대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635년에 인구마을에 삼휴공께서 건립한 삼휴정을 훗날 후손들이

귀미마을로 옮겨 오늘의 정자를 건립하였다.

1970년대에 유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되어 하천으로 이건 되었다.

 


하천묘역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으며 노촌공의 효행 덕으로

雪鶴大師가 선무랑공의 묘 터를 점지 하였고,

그 후 대를 이어 그 명당에 80여분의 묘가 모셔져 있다. 사과공의 묘소도 이 묘역에 있다.

 



                                      



                                                                              사과공의 묘소는 하절묘역(夏節墓域)의 큰 바위 아래해좌(亥坐)에 모셨고.

배위                                                                                    배위 의인(宜人) 능주구씨(綾州具氏)는 공의 묘소 위쪽에 있다.

4월 셋째 일요일에 조부이신 호군공위 다음으로 묘사행사를 한다.


                                            o사과공(司果公) 유사(遺事)를 정리하면

 

()의 휘()는 시우(時羽 19), ()는 수경(修卿)

                                     관직은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이다.

1.가계(家系) : 迎日人으로 고려시대 명신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휘 습명(襲明)이 시조이다.  판서(判書) 휘 인언(仁彦 8)께서 처음 永川에 사셨고, 판서(判書) 휘 광후(光厚 9)와 사성(司成) 휘 종소(從韶 12)는 벼슬을 하셨고, 노촌(魯村) 휘 윤양(允良 15)께서는 퇴계선생(退溪先生)의 문하생이다.

증조부(曾祖父) 호수(湖叟) 휘 세아(世雅 16)께서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되셨고, 강의공(剛義公)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조부(祖父) 휘 수번(守藩 17), 벼슬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아버지는 휘 호신(好信 18)는 호()가 삼휴정(三休亭)이며, 승훈랑(承訓郞)이요, 손모당(孫慕堂)과 장여헌문(張旅軒門)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어머니 성()씨는 관향이 창녕(昌寧)이고 도원도찰방(桃源道察訪) 휘 이직(以直)의 따님이며 립()의 손녀이다. 사과공은 삼휴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생몰(生沒) : 삼휴공(三休公)의 삼남(三男) 일녀(一女) ()에서 장자(長子)이며, 창녕(昌寧)성씨(成氏) 찰방(察訪) 이직(以直)의 외손(外孫)으로 1630820일에 영천군 자양(永川郡 紫陽) 본댁(本宅)에서 출생(出生)하였다.

16991113에 돌아가시니 향년(享年)70세이다.

 

3.배위(配位) : 의인(宜人) 능주구씨(綾州具氏)로 대구(大邱) 무태(無怠)가 고향인 인계(仁繼)의 따님이며 첨정(僉正) 회신(懷愼)의 손녀로 162795일 출생(出生)하여 170628일에 돌아가시니 향수(享壽) 80세으로 묘소(墓所)는 부군(夫君) 사과공 묘위 위에 있다.

 

4.성품(性稟) : 용자가 우뚝하고 뛰어나며, 또한 도량(度量)도 크고 넓고, 스스로 부친(父親)이신 삼휴공으로 부터 배움을 받았고, 삼휴공께서 항상 이르기를 고람(考覽)1)한 것은 기록(記錄)하고,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힘쓰고 또한 힘써 중단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진사(進士) 이성임(李聖任)의 만사(輓詞)에 이르되 태도가 강직하며 뜻이 크고 침착하며 정중하고 도량이 넓으며 의지가 굳세다하니 이것이 당시에 친구가보고 느낀 것을 말한 것이다


o註1) 考覽 : 자세히 살펴보거나 점검하면서 읽음.


5.효성(孝誠) : 기축(己丑 1649)년의 외간상(外艱喪)과 계사(癸巳 1653)년에 이은 내간상(內艱喪)의 집상(執喪)에는 슬픈 가운데에도 예()로서 다하였다.  


6.투철(透徹)한 국가관(國家觀) : 또한 일찍이 말하기를 자주국방(自主國防)강조하면서 다시는 임란(壬亂)과 같은 외침(外侵)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강토수호(疆土守護)에 중점(重點)을 두어야 하고, 문화(文化)나 학문(學問)도 국(國家)가 온전한 연후(然後)에 논()제이다. 따라서 문무(文武)는 그 귀()함이 동일(同一)하다. 하물며 조정(朝庭)에서는 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것이 어제 같은데 아직도 편당(偏黨)2)()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하였다.

 

 o2) : 편당(偏黨) : 한 당파에 치우침. 또는 한 편의 당파.

 

7.관직(官職) : 숙종(肅宗) 2년 병진(丙辰)(1676) 봄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내외(內外) 여러 직()을 거처서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3)로 재직(在職)하다가 당시(當時)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의 횡포(橫暴)을 보자 그날로 그 직을 버리고 고향인 자양으로 낙향(落鄕)하여 이르기를 지금 내가 양친(兩親)이 모두 돌아가셨으니 부모봉양(父母奉養)을 위해서도 아닌 이상 관직(官職)에 더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하고는 인구로부터 귀미로 거처를 옮겨 두 아우와 더불어 학문(學問)을 토론(討論)하고 담락(談樂)4)하게 지내셨으며, 모든 자질(子姪)들을 가르치고 기르며 모두 다 의방(義方)5)으로 이끄셨다.

 

o3)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 조선시대 중앙군사조직의 근간을 이루는 5위의 종6품직.

o4) 담락(湛樂) : 평화롭고 화락하게 즐김.

o5) 의방(義方 : 의를 지키고 외모를 단정히 함. 正道 


8.삼휴고택(三休古宅) 건립 : 조선조 광해군 6(1655)에 귀미에다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지금은 하천에 이건 되어 유형문화재 72호로 보전되고 있다.

 

9.교우(交友) : 한가(閑暇)로울 때에는 시우객인(詩友客人)들을 모아 자호(紫湖)의 산수간(山水間)에서 소요(逍遙)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10.종친간(宗親間) : 돈목(敦睦)하고 모든 이들의 교제의 원만함과 어린 아우들을 잘 이끌었고 형제(兄弟)간의 우애(友愛)가 돈독하였다.

 

11.자손(子孫) : 여섯 아들을 낳으니 장남에 석현(碩玄)이고 다음은 석함(碩咸)이며, 삼남에 석겸(碩謙), 사남에 석승(碩升) 통덕랑(通德郞)이며, 오남에 석림(碩臨)은 진사(進士)이며, 다음은 석철(碩哲)이며 딸은 권경지(權慶趾)에게 시집갔다.

  o 석현(碩玄)의 사자(嗣子)에 중주(重周)이며

  o 석함(碩咸)에 중규(重圭)이며

  o 석겸(碩謙)에 중망(重望)이며

  o 석승(碩升)에 중주(重周)는 백부후(伯父後)로 출계 하고 다음에 중태(),

                                  중교(重喬), 중강(重岡), 중여(重呂)이며

 o 석림(碩臨)에 중직(重稷)은 생원(生員)이며

 o 석철(碩哲)에 중후(重厚)이다.

 

                                         <參考資料>

             1.司果烏川鄭公時羽墓碣銘o

1) : 고람(考覽) :자세히 살펴보거나 점검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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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당지945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8.18 문집.묘갈명등 많은 자료 수집하셔서 삼휴공 아들 삼형제분 유사를 정리해 올려주셔서 삼휴공 후손들께 많은
    가르침이 되겠습니다,무더운 삼복더위에 고생많이 하셨습니다.
    화수회 7대 병극회장님께서 삼형제분의 유사편집 정리하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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