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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많은 선비를 배출한 길지 "귀미편"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4.02.14|조회수91 목록 댓글 0

많은 선비를 배출한 길지 “귀미”

 

                                                                                                영천화수회에서 옮김

  나의 고향은 영천시 자양면 삼귀리 604번지 이다. 현재 삼귀리는 상귀미와 중귀미는 남아있고 나의 고향 하귀미는 영천댐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지금 자양댐을 가로지르는 삼귀교에서 댐 하류쪽으로 보면 왼편에 큰 암벽바위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 하귀미가 있었다.

귀미리의 우리 일가 역사는 14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무오사화를 피해 선무랑공(차근)께서 대전동을 떠나 이곳 귀미리에서 조그만 고개너머에 있는 노항리에 은둔하신 것이 자양 입향의 시초이며, 그 아랫대 노촌공(윤량)은 퇴계문하에서 수학하시고 돌아와서는 자양서당에서 강도하시며 일생을 보내셨다. 공은 또 효성이 지극하였음인지 설학도사의 지감을 얻어서 기룡산하 하천의 대 명당을 잡게 되었다. 그 아랫대 호수공(세아)은 진사하여 자연대에 강호정사를 지어서 강도하시며 요승 보우를 몰아내도록 상소하시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책을 덮고 영천의병장에 추대 되시어 영천경주 양성을 복성하시니 증 병조판서 강의공으로 시호가 내려졌고, 장자 백암공(의번)은 경주전에서 순국하니 증 이조참판 충신효자의 정려가 내려졌다. 계자 호군공(수번)은 내금위장 하시고 장자 명계공(호의)지산(조호익) 문인이요, 차자 요산공(호례)은 백암지후로 양자가시고 계자 삼휴공(호신)은 나의 12대조로 지간을 소요하시다가 귀미의 산수를 절찬하고 언제나 자연을 벗 삼아 천석기지를 잡으셨다.

그후 분파종택이 어언 300여년 동안 환란을 겪은 일 없고 이중건(移重建)이 없었으니 세세여음(世世餘蔭)의 덕택이다. 이 고장은 은벽한 산고수장의 수려한 심곡이나 동북거산 보문양맥으로 발원한 진경산과 기룡산이 동서으로 상주하여 보암으로 에워싸니 노항, 구미, 인구, 장전, 월연, 일견, 충효 일대에 세거하는 후손들은 1,000호를 헤아리고 마을마다 고귀한 유물들은 선조들의 정취가 어려 있다. 향조 삼휴공은 여헌(장현광) 모당(손처눌)의 문도로서 승훈랑이시고 장자 사과공(시우)은 무과급제 하시고 차자 귀연공(시희)은 9세에 친상을 당하시고 성장하면서 우애돈목하며 학문에 힘쓰셨다. 삼휴공의 후손으로서 생원, 진사는 무재공 시찬(時贊), 월송재 석림(碩臨), 인재 중직(重稷) 부자분, 축와 일전(一銓), 운서 하준(夏濬), 운와 하원(夏源), 운암 하호(夏濩), 운담 진국(鎭國), 정산 연목(淵穆) 부자분 등 많은 석학을 배출한 고장이기에 풍수가들은 길지라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향기가 깃든 이 고장이 1974년 봉암을 가로막아 땜을 건설하게 되니 후손들은 일조에 선영고토를 잃고 이향민이 되여 4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수몰지구로 변하니 우리 삼휴공 후손들은 이주정착지와 선대묘소 이장과 누대로 이어온 정재이건복원(亭齋移建復元)등에 대하여 노심초사 하던중 당시 하천재장이던 만식씨를 중심으로 일가들이 더불어 상의하고 관계요로에 진정교섭한 결과 강호정 하천재를 비롯하여 삼휴정 삼휴종택 및 묘우 오회당과 사의당 수의헌 등이 모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하천서편에 집단 이건(移建) 되었다.

나의 배태고향(胚胎故鄕)이고 눈감으면 떠오르는 곳 귀미마을은 고향이란 이유만으로도 모이고 얽혀 멋진 추억들을 쌓아 가는 것이 우리의 정서이듯, 자양댐 건설이 시작되자 한 핏줄의 죽마고우들이, 다가올 수몰민의 애통함을 달래고, 각처로 분산될 타향살이 힘든 세파에 서로 의지하고 돈후(敦厚)해지기를 기대하고 1981년는 삼휴정화수회를 창립하였고 또 2006년에는 삼휴공 후손 50여명으로 청년회를 만들어 우의를 다지며 선조의 유업을 받들고 있으며 영천시청의 동찬, 해식, 명식, 창용 등이 삼휴공 후손들이다. 삼휴공의 묘는 고경면 초일리에 소재하고 매년 양력 4째 일요일이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향화를 받들고 있으며 또 진실로 자기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사람은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계신 조상 모시듯(事死如事生, 中庸 19章) 해야 한다 하듯이 우리 후손 모두가 보본(報本)하는 정신을 기르고 친족끼리 효우돈목(孝友敦睦)함으로서 숭조의 얼을 더욱 승화시키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08년 2월

 

영천시 야사동 154-84 삼휴공 12世孫 우용(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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