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과 우리 일족
우리문중은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신 호수공과 아드님이신 백암공, 만호공, 호군공의 충효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으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병으로 많이 참여 하셨다.
을사늑약 후 구국을 위해 동엄공(휘 환직) 부자분의 산남의진은 우리 일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의병은 정규병과 달이 그 모병의 관건이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에 있다하겠으나 특히 의병장의 인망과 활동에 큰 힘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영천의병이 동엄공(휘 환직) 중심으로 우리 일족의 촌수를 살펴보면 부자, 형제, 종질, 재종질, 4종 합계 10명이고 또 12촌에서 14촌 까지가 4명이다. 그르니 집안과 대소가에서 많은 분이 참여하셨다.
그때 추모정에다 서당이 있어 인월(仁月) 양촌의 젊은이들이 산남의진을 이해하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도움을 비밀히 주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일절 참여활동을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공적이 무쳐지고 말았다. 다행히 영천의 독립사에 아래와 같이 명단이 있어 소개한다.
영천출신 산남의진 의병 명단
성 명 | 출생 거주지 | 경력 및 활동 | 비 고 |
정환직(鄭煥直) | 자 양검단 | 산남의진 2대대장 | 피체 영천에서 왜군에 총살 순직 |
정용기(鄭鏞基) | 자 양검단 | 산남의진 창의장 | 입암 전투에서 전사 |
정석기(鄭晳基) | 자 양검단 | 산남의진 금릉지례 소모활동 | 참봉 정용기 3종제 |
정순기(鄭純基) | 자 양검단 | 일명 정진한. 산남의진 소모장 | 관동으로 피신 은거 |
정옥기(鄭鋈基) | 자 양검단 | 정환직의 2자. 1906년 입진. 입암전투 후 군감 | 정환직 순국후 패신종로 |
정완성(鄭完成) | 자 양검단 | 산남의진 우포장 | 포항장기에서 자양의거 피체 후 옥고 |
정진소(鄭鎭韶) | 자양용산 | 정용기 6종제 | 소모활동 |
정진영(鄭鎭英) | 자영용산 | 정용기의 족제 산남의진 정탐 | 대구에서 활동 조선국권회복단 단원 |
정진욱(鄭鎭郁) | 자 양검 단 | 정용기 4종제 | 연락담당, 정용기 가족 피신(입암거주) |
정진학(鄭鎭鶴) | 자양검단 | 1906년 산남의진 | 영천지평에서 전사 |
정치석(鄭致錫) | 자양용산 | 정치우의 백형 | 소모활동. 후방지원 |
정치우(鄭致宇) | 자양용산 | 정환직 5종제 산남의진 좌익장 | 패전 후 피신 |
정치화(鄭致化) | 자양용산 | 정환직의 5종제 | 연락담당 및 물자지원 |
정치훈(鄭致壎) | 자 양검 단 | 정환직의 종제 사재로 의진을 도움 | 영락담당 및 물자지원 |
정환봉(鄭煥鳳) | 자 양검 단 | 정환직의 아우 동해에서 피체됨 | 통역 정홍석의 도움으로 무사 귀가 |
정환집(鄭煥集) | 자 양검 단 | 산남의진 서울 및 영남연락담당 | 정환직의 재종제 |
<산남창의지, 산남의진유사에 의거 작성돰. 47명중 정씨 16명만 기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