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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중국의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려의 선비 정몽주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4.06.20|조회수68 목록 댓글 2

 

                                                                                                                             포은 사랑방에서 옮김

 

중국의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려의 선비 정몽주

 

 
发布日期:2014-01-25 15:29:02

 

글/진아이화(金愛華, 베이징대학교 한반도 역사문화전공 박사과정)
2009년 8월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 세워진 포은 정몽주 선생의 동상

 

중국 산둥(山東)성 펑라이(蓬莱)시 덩저우(登州)박물관에는 고려인의 동상이 있다. 바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 선생. 중한교류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기념하여 한국포은학회, 한국포은종약원, 연타이(煙台)대학 동아연구소가 공동 기증한 것이다.
경상도 영천(永川)에서 난 정몽주는 이방원 즉 훗날 조선 제3대 임금 태종의 회유에 <단심가(丹心歌)>로 거절의 뜻을 밝히고 암살당한 고려의 충신으로 유명하다. 그는 뛰어난 유학자였으며 당시 중원의 새 왕조 명(明)나라에 6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되어 양국간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외교가이기도 하다.
원(元)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시기 고려에서는 친원, 친명파의 극렬한 대립이 이어졌다. 정몽주는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지 말 것을 탄원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를 가게 되었고 친명노선을 걷던 공민왕이 시해되는가 하면 친원파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중원의 새로운 패자 명나라와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고려의 중신들은 하나같이 명나라행을 꺼렸다. 그 와중에 친원파들의 음모에 떠밀려 정몽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372년 명나라 홍무(洪武) 5년 고려의 사절 홍사범(洪師範)과 정몽주는 고려로 돌아가던 중 바다위에서 조난을 당했고 정몽주만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난징(南京)에 되돌아온 정몽주는 고려조정이 명조에 전하는 문서를 재작성해서 올렸고 그의 문장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아낌없는 찬사를 받게 된다. “문맥이 조리있고 유창하며 고전인용도 적절하다.” 감동한 명 태조는 고려에서 보내온 모든 공물을 되돌려 보내는 한편 고려인들의 명나라 태학 입학을 흔쾌히 윤허했다.
중국을 찾는 한반도 사절단의 바닷길에 조난이 자주 발생하자 1374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전통적인 덩저우(현재의 펑라이) 해로를 회복시켜 달라는 글을 올린다. 이에 해상방위가 강화되고 덩저우는 부(府)로 승격되면서 산둥반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정몽주는 여러차례 덩저우를 오가며 <등주과해(登州過海)>, <봉래역(蓬萊驛)>,<시한서장(示韓書狀)>, <봉래각(蓬萊閣)>,<登州仙祠>등 많은 시편을 남겼다. 특히 <봉래각(蓬萊閣)>은 이 건축물을 노래한 고려인 최초의 작품이고 <등주선사>에는 오늘날 한국 한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정몽주의 시재(詩才)와 중국문인과의 교감이 잘 드러난다. “어느 곳에 올라 마음을 달래볼까, 지부성 아래에 신선사당이 있네.급히 남쪽으로 돌아가느라, 소동파의 명시에 화답을 못하네(何處登臨慰我思 芝罘城下古仙祠 只嫌汲汲南歸疾 未和坡翁海市詩 <등주선사>).”
정몽주는 르자오(日照)시에 있는 신라촌(新羅村)과 신라사(新羅寺)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나라 시대 산둥반도 연해에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비로 팔려온 신라인이 많았다. 765년 당나라 제1대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青節度使) 고구려인 이정기(李正己)가 덩저우, 제주(齊州), 해주(海州), 밀주(密州) 등 연해지역에서 할거하며 노비매매를 감행했다. 819년 당나라 조정이 이 지역을 평정한 후 신라인의 귀국조치를 명했으나 실질적으로 귀국이 여의치 않아 당나라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이 모여살게 된 곳이 바로 신라촌이다. 이곳을 방문한 그는 서원을 지어주고 신라인 젊은 후손들을 고려로 데려가기도 했다.
이 신라촌 동쪽 봉황산(鳳凰山) 정상에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신라인이 은행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름드리가 된 은행나무는 바닷길 어민들의 길잡이가 되었고 그 아래 정몽주의 시 <르자오현(日照縣)>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오늘날 나무도 비석도 사라졌지만 기록과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정몽주 선생의 후손들은 선생의 족적을 되밟으며 한중 우호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출처 http://www.chinacorea.com/new.php?class=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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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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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희야 | 작성시간 14.06.20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신 분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 작성자정재문 | 작성시간 14.06.23 방선조 행적에 관한 소중한 자료를 접하게 되어 기쁩니다.
    약관 35세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셔서 조난으로 분실된 문서를
    새로 작성해서 주원장에게 올리셨다고 하니 명불허전 그대로입니다.
    지금도 산동성 청도, 위해, 연대 등에는 한국기업이 많이
    진출해 있고 항공편이나 선편으로 가는 교통이 편리하지요.
    지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펑라이시는 산동성 최북단에 있는 항구도시이고 르짜오시는 산동성
    남단에 있는 항구도시로 우리나라 서울과 대구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당시 불편한 교통편으로 너무나 먼 길을 오가시느라 고생하신 포은할배를
    생각해 보게 하는군요.
    언젠가는 중국 여행길에 들러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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