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판서(戶曹判書)를 하신 송간공(松磵公)
고려말엽에 송간(松磵)(휘 仁彦 8世)공께서는 忠惠, 忠穆, 忠定, 恭愍王 4代의 重臣이시다. 그러나 典工判書를 하신 기록은 남아 있으나 戶曹判書를 하신 기록은 없다.
다행히 양산통도사(梁山通道寺)에 아드님이신 휘 광후(光厚 9世) 부자분이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垸)을 시주(施主)를 하신 그 향완에 명문으로 嘉善大夫戶曹로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그보다 더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래서 고려의 품계 와 조선의 품계를 찾아보니 가선대부 호조(嘉善大夫 戶曹) 는 이성계가 개국하자 시작된 품계이다. 그르니 송간공께서는 이성계의 소명에 가문의 향화를 이으시려고 부자분이 출사(出仕)하신 것으로 추론된다.
鄭仁彦(8世) * 호(號) : 송간(松磵)
* 생년도(生年度) : 고려 충숙왕 2년 (1315년)
*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 典工判書)
조선조(朝鮮朝) : 가선대부 호조(嘉善大夫 戶曹)
(항완에 명문으로 기록됨)
* 묘소(墓所) : 불명(不明)
* 형이신 1파 인수(仁壽)공의 문충공파(文忠公派)와 갈라졌다.
* 자녀(子) : 장자 광후(光厚)-典工判書, 차남 원후(元厚)-漢城尹
<世系圖 上 分派>
우리의 世系를 살펴보면 우리는 시조(휘 襲明)공으로 부터 내려와 7世 奉翊大夫版圖判書(휘 林)공의 두 아드님인 8世 奉翊大夫開城尹(휘 仁壽)과 奉翊大夫典工判書(휘 仁彦) 형제분에서 갈리었다. 즉 1파(휘 仁壽) 와 2파에서 6파의 파조(휘 仁彦)로 분파가 되었다.
<高麗朝 奉翊大夫 典工判書를 하시다.>
松磵공께서 각종 문헌과 족보에는 고려조의 典工判書를 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高麗의 奉翊大夫 典工判書 제도는 1362(공민왕)년-1369년 사이에 존속하였으니 47세부터 54세 사이에 얼마를 재직 하셨는지는 기록이 없다.
<鄭道傳를 批判하시다.>
화해사전(華海師全)에 성사재(成思齋)가 기록한 松磵先生遺文에 永川鄕 송간선생 정공 인언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변해가는 作態가 구렁찬이에 빠져 人倫의 道理가 沒落하였도다. 뜻밖에도 近間에 와서 權 近과 鄭道傳이 그 속마음이 비치는바가 복숭아와 살구처럼 빛이 같도다.
鄭道傳은 尹紹宗輩와 같이 不湲齋 : 申賢와 簡齎:申用羲 양선생을 排斥하였도다. 鄭道傳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傳統을 近似하게 模倣하여 世上事를 彌縫策으로 쓰려고 함에 이 害가 後人들에게 까지 미치게 되니 그 原因이 곧 이 사람들에게 있지 아니한가? ”라고 한데 대한 옛 고사를 인용 비판하셨다.
<永川 전촌(錢村)으로 은입(隱入) 하시다>
松磵公은 나라의 보전(保全)은 종증손(從曾孫) 포은(圃隱) 先生에게, 이 家門保全은 公께서 담당하니 당시 尙州牧使이던 아드님(휘 光厚)과 함께 포은공의 子弟 兄弟들을 비롯하여 門內 젊은이들을 어디론가에 은적(隱迹)시키고 자신들도 永川 전촌(錢村) <소부곡(所部曲)이다>으로 피신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 같던 우리 가문을 보전케 한 선조이시다.
만약 이때 피신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유신(遺臣)이고 또한 포은의 종증조부(從曾祖父) 가정이기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한 이성계, 이방원 부자와 그 도당(徒黨)에게 무참히 도륙(屠戮)당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嘉善大夫 戶曹를 하시다>
지금까지 각종 문헌에는 송간공께서 가선대부 호조를 하신 기록이 없다.
송간(松磵)공께서 양산통도사에 시주하신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垸)의 그 향왕(香垸)에 ‘시주가선대부호조정인언 자○○ 정광후 정방사 시납 통도사(施主嘉善大夫戶曹鄭仁彦 子○○ 鄭光厚 淨房寺 施納 通度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嘉善大夫 戶曹를 역임하심이 밝혀졌다.
가선대부는 조선조 태조 1년(1392년)부터 시행된 품계이므로 조선왕조의 이성계의 召命에 응하고 응하지 않는 데에서 禍福이 판가름 나기 때문에 부자분이 화를 면하기 위해 비롯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마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召命에 따른 것이라 추론이 된다.
<決論>
포은 정몽주선생의 종증조부로서 고려조의 혼란기에 포은선생과 같이 고려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애쓰시다가 포은선생이 고려조와 운명을 같이하고 순절하실 때라 우리 가문에 미칠 화를 피하느라 슬기롭게 처세하여 우리 가문을 오늘에 이어오게 하신 선조이시다.
이젠 족보에 嘉善大夫 戶曹로 추기함이 바를 뜻하다.
<參考資料>
*화해사전(華海師全)
고려 후기의 학자 신현(申賢:1298~1377)의 전기(傳記).
1935년 논산에서 간행하였다. 책머리의 강영식의 서문에 의하면, 신현은 우탁(禹倬)의 문하생으로 송대(宋代)의 유학을 정몽주(鄭夢周)와 이색(李穡)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신현의 문하생인 정몽주가 이 책을 원천석(元天錫)에게 전해주자 원천석은 범세동(范世東)과 함께 편집을 하고 나서 간행하려 하였으나 왕조가 바뀐 어려운 시대 상황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선 초에도 후손들이 몰락하여 책이 궤짝 속에 넣어져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229명의 이름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고려 말의 유학에 대한 깊이와 수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華海師全 松磵先生遺文
松磵先生諱仁彦與成思齋書, 華海師全
永川鄕 송간선생 정공 인언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의 변해가는 作態가 구렁찬이에 빠져 人倫의 道理가 沒落하였도다. 뜻밖에도 近間에 와서 權 近과 정도전이 그 속마음이 빛이는바가 복숭아와 살구처럼 빛이 같도다.
鄭道傳은 尹紹宗輩와 같이 不湲齋 : 申賢와 簡齎:申用羲 양선생을 排斥하였도다. 鄭道傳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傳統을 近似하게 模倣하여 世上事를 彌縫策으로 쓰려고 함에 이 害가 後人들에게 까지 미치게 되니 그 原因이 곧 이 사람들에게 있지 아니한가? 이를 極端的으로 말한다면 이 不湲齋와 簡齎 부자의 說 이 世上에 머물게 된다면 이 世上에는 가히 完全한 人間들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고 권근도 아니게 아니라 亦是 某를 陰으로 도우고 있도다.
옛 고사를 들은적이 없었던가. 中弓이 孔子를 怨望하고 염구(冉求)의 아들이 聖人을 嫌惡했다는 이야기를 至今의 學者들의 修身齋家 治國平天下의 道가 古人들과 다르다면 孔子道 가 오히려 過甚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글의 말미에 成思齋와 金革이 歎息하면서 말하기를 噫(희)라, 이 文主의 가문에 羽翼이 곧 達可인데 全門中 인사들의 의지가 이와 같도다 행여나 혹은 능히 壽를 할 수 있는 선생의 進路가 되겠는가.
세상이 되어가는 모습이 날이 갈수록 잘 못되어 가는데 眞情코 애닯고도 危險하도다. 達可여 그 행여나 능히 온전히 無事해야 되겠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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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8.01 1.의문을 갖는것이 맞다. 족보에 의하면 송간공께서는 生이 을묘(1315)년이 시고, 포은선생의 生이 정축(1337)년이시니 22세 차이 밖에 나지않다.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으나 처음 족보를 만들때에 여러 문증을 토대로 만들어서 오늘에 까지 내려오고 있다.
2.송간공께서 조선왕조가 건국한1392년 후에 호조를 하심이 족보에도 없는 기록이라 의문스러운데 향완에 기록이 확실하니, 아드님이신 판서공께서 신왕조의 부름에 응하신것은 마음에는 들지않지만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출사하셨다는 묘지문이 있으니 그때에 부자분이 같은 생각으로 출사 하신것이아닌가 하고 추측해 본다.
工曹判書光厚墓誌文를 보면 출사하신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