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山南義陣)과 영천출신 의병(義兵)
-호수공 후손 중심으로-
1905년 고종의 구국의 밀지(密旨)를 받아 산남의진을 조직한 의병대장(義兵大將) 동엄공(東广公) 휘 환직(煥直)은 호수공(湖叟公)의 10세손이며, 삼휴공(三休公)의 8세손이다.
그리고 산남의진에 참여한 많은 의병 중에는 의병대장을 비롯하여 호수공(湖叟公)의 후손이 21명이며, 그 중 삼휴공(三休公) 후손이 17명이나 되니 중추적(中樞的) 역할을 삼휴공 후손들이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산남의진에 관여(關與)는 했지만 후환(後患)이 두러 워서 함구(緘口)를 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특히 삼휴공의 후손들이 주축(主軸)이 되어 산남의진에서 참여한 것은 호수공(휘 世雅), 호군공(휘 守藩), 삼휴공(휘 好信) 3대 선조의 국란 (國亂)에 창의(倡義)하신 구국정신(救國精神)을 이어 받은 후손(後孫)으로서 본분(本分)을 지킨 일로 우리는 긍지(矜持)를 가질 것이 며 그 얼을 이어 받아야 할 것이다.
고종황제의 밀조비
<포항시 죽장면에 있는 산남의진 발상지 비>
영천시 조양각에 있는 산남의진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 있는 충효재
一.산남의진의 활동상황
1. 제1기 :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고, 그해 1905년 12월 30일 고종황제(高
宗皇帝)가 동엄공(東广公) 휘 정환직(鄭煥直)에게 창의(倡義)하라는 밀지(密旨)를 내리
었다.
2. 동엄공은 관직(官職)을 사퇴하고 창의를 계획했다. 아들 단오공(丹吾公) 휘 정용기(鄭
鏞基)를 영천으로 보내어 영천, 영일, 청송, 영덕, 군위 등지에서 소모활동(召慕活動)을
하여 각 고을의 포수(砲手)와 민병(民兵)으로 산남의진을 조직케 하였다.
3. 1906년 3월 1.000여 명의 의병을 규합(糾合)해 단오공이 의병대장으로 추대(推戴)됐으
며 군호(軍號)는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초기의 목표는 서울 진공(進攻)에 두었
다. 강원도 오대산 (五臺山)을 향해 영천, 청송을 거처 북상(北上)하고 있던 중에 영덕의
신돌석(申乭石)이 일본의 토벌군(討伐軍)에게 패하여 그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의병들은
영해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 참령(參領) 신석호의 간계(奸計)로 1906년 4월 28일 영일군 신광(神光)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중위장(中衛將) 이한구(李韓久)는 강구, 청하, 청송 등지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
대로 전투를 버렸다. 다행히 단오공은 부친 동엄공이 주선하여 황제(皇帝)의 특명으로 대
구경무청(大邱警務廳)에서 석방되었다.
4. 제2기 : 1907년 4월에 석방되어 다시 영천으로 돌아온 단오공은 의병진을 재편성하였
다. 그 때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군대가 해산된 뒤라 많은 군인들이 참여하였다.
산남의진은 산간지방 중심으로 유격전(遊擊戰)을 감행하여 영해, 청하, 청송, 포항 등지
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 때문에 관동(關東)으로 진출은 지연(遲延)되고 있었다.
5. 1907년 10월6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迎日郡 竹長面 立岩里) 주막에서 식사하는 일병
들을 급습 했다가 주변에 매복(埋伏)해 있던 일군영천수비대에 포위돼 단오공 등 많은 의
병이 전사했다. 이날의 비극은 민가(民家) 수십 채를 방화하고, 수십 명의 양민(良民)들을
학살(虐殺)한 침탈(侵奪)로 이어져 의병전쟁사에서 최초의 민간인 참화(慘禍)로 기록되고
있다. 입암전투의 참패로 산남의진의 지휘부(指揮部)는 무너지고 말랐다.
6. 제3기 : 1907년 10월 9일 산남의진은 동엄공을 제2대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각오로
군사를 모집하여 진영을 재편성 하였다.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많은 군인들이 입진(入陣)하였고 각지에 흩어진 의병을
다시 모아서 진용(陣容)을 강화했다.
북동대산(北東大山)에 진을 친 산남의진은 신녕, 의흥, 청송, 흥해분파소 습격과 청하, 영
덕에서 활동하고, 한편으로는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관동(關東)으로 북상준비
北上準備)에 노력하고 있었다.
그르다 1907년 12월 11일 의병대장 동엄공은 영일군 죽장면 상옥리 각전(角田)에서 영천
수비대에 체포되어 청하로 호송 심문을 받았다.
그 해 12월 17일 대구로 이송되던 중 도주(逃走)를 기도(企圖)했다고 영천의 남쪽에서
총살(銃殺) 순절(殉節)하였다.
7. 제4기 : 1908년 3월 7일 3대대장이 된 최세윤(崔世允)은 산남의진의 잔병(殘兵)을 모아
분산적(分散的)이고 독립적(獨立的)인 활동으로 나아갔다. 경상도 하나만이라도 확보하
기 위해 지구전(持久戰)을 계획하고 24개 지역 79명으로 구성된 지역활동(地域活動) 책임
자를 선정하였다. 본대(本隊)는 남동대산(南東大山)에 진(陣)을 치고, 경주, 울산, 흥해,
포항에서 유격전(遊擊戰)을 대부대(大部隊)가 아닌 소부대(小部隊) 단위의 지형지물(地
形地物)을 이용한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였다.
최세윤대장은 영일군 장기면 용동에서 1908년 7월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8년 옥고
(獄苦) 끝에 단식(斷食)으로 1916년 8월 9일에 순국(殉國)하였다.
이처럼 산남의진은 경상도지방을 총망라(總網羅)한 의진으로 3년간에 걸친 장기적인 대
일항전(對日抗戰)을 수행하였다.
二. 일군(日軍) 14연대(聯隊) 전황보고서(抄)
< > 안의 글은 일군의 자료임
1. 단오공은 1907년 10월 입암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일군-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화적(火賊) 150명으로 부터 기습을 받아 정용기 등
19명을 사살하였다.>
2. 2대 의병대장 동엄공은 1907년 12월 7일 영일군 청하에서 사로잡혀 대구로 호송 도중
영천의 조양각(朝陽閣) 아래에서 영천군민들을 모아 위협(威脅)을 주기 위해 의병 두 사
람과 같이 총살 되었다.
<일군 - 1907년 12월 7일 그를 죽장면 상옥리(上玉里) 각전(角田-뿔밭)에서 체포하여 청
하에 압송(押送)하여 심문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아 대구로 호송 도중에 도주(逃走)를 기도
하여 그를 사살하였다.>
3.<일군 사상자 기록>
o수비대(전사-52명, 부상자-136명), o헌병(전사-4명, 부상자-8명),
o경무국(전사-39명, 부상자-42명),o경시청(전사-16명,부상자-13명),
o거류민(居留民)(사망-75명, 부상-86명) o폭도(의병) 13,445명
三. 영천출신 산남의진 참여자명단(호수공 후손 중심)
성 명 | 출생거주 | 경력 및 활동 | 비 고 |
정환직(鄭煥直) | 자 양 검단 | 산남의진 2대 의병대장 피체 영천에서 순국 | *대영 증조부 |
정용기(鄭鏞基) | 자 양 검단 | 산남의진 1대 의병대장 입암 전투에서 전사 | *정환직의 장자 *대영 조부 |
정석기(鄭晳基) | 자 양 검단 | 금릉 지례에서 소모활동
| *정용기의 3종제 |
정순기(鄭純基) | 자 양 검단 | 일명 정진한. 산남의진 소모장. 관동으로 피신 | *정환직의 종질 |
정옥기(鄭鋈基) | 자 양 검단 | 입암전투 후 군감(軍監) 정환직 순국후 廢身終老 | *정환직의 2자 |
정완성(鄭完成) | 자 양 검단 | 산남의진 우포장.피체 후 옥고. 만주로 망명 | *장기에서 검단으로 이거 |
정진소(鄭鎭韶) | 자양 용산 | 소모활동. 이한구의사장사(葬事)함. | *정용기 6종제 *동길 조부 |
정진영(鄭鎭英) | 자영 용산 | 산남의진정탐.대구에서 활동.조선국권회복단단원 | *정용기의 족제. *봉식 조부 |
정진욱(鄭鎭郁) | 자 양 검단 | 연락담당, 정용기 가족 피신 (입암거주) | *정용기 4종제 |
정진학(鄭鎭鶴) | 자양 검단 | 1906년 산남의진 입진 영천 지평에서 전사 | *정환직의 종질 |
정치석(鄭致錫) | 자양용산 | 소모활동. 후방지원 | *정치우의 백형 *연체 종조부 |
정치우(鄭致宇) | 자양 용산 | 산남의진 좌익장 패전 후 은신 | *정환직 5종제 *연체 조부 |
정치화(鄭致化) | 자양 용산 | 연락담당 및 물자지원 | *정환직의 5종제 *동채 증조부 |
정치훈(鄭致壎) | 자 양 검단 | 연락담당 및 물자지원 사재로 의진을 도움 | *정환직의 종제 |
정환봉(鄭煥鳳) | 자 양 검단 | 동해에서 피체됨 통역 정홍석 도움 받음 | *정환직의 아우 *한영 조부 |
정환집(鄭煥集) | 자 양 검단 | 산남의진 서울 및 영남연락담당 | *정환직의 재종제 |
o 영천출신 47명 중 정씨 16명
四. 타문헌에 있으나 ‘영천의 독립운동사’에 누락 된 분.
(착오가 있을 수 있다.)
o 동명이인의 구분기준 : 족보에서 1906년 당시의 연령. 거주지
*정연호(鄭淵浩)(산남창의지下.향토경북-제7집) 자양용산-기옥 증조부
*정진구(鄭鎭久)(산남창의지下.향토경북-제7집) 자양용산-성식 조부
*정치훈(鄭致勳)(산남의진충효사적) - 군자금 - 선원 – 갑식 증조부
*정진도(鄭鎭燾) (산남의진충효사적) - 매곡 – 동호 조부
*정치렬(鄭致烈) (산남창의지 下.향토경북-제7-정치화(鄭致化)의 초명
<참고문헌>
o山南倡義誌 下, o山南義陣遺史, o山南義陣忠孝事績, o大邱慶北 抗日獨立運動史,
o鄕土慶北(제7집),
o永川의 獨立運動史
<자료정리> 정병극(鄭炳極)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정재문 작성시간 14.09.10 산남의진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엄공 할배가 순국 전야에 쓰신
시(신망심불변......)를 가까이에 두고 할배의
우국충정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충절가문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선조의 선업에 누가
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
작성자석죽화 작성시간 14.09.11 義와 충정으로 이루어진 가문...
가슴뿌듯한 의기를 새삼 느끼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인계님.
재문선배님...추석은 어떻게 잘 내셨습니까?
저는 추석당일날 중귀미 각골, 장구밭 조산,하낙골,비선등,
골안 건넝골, 신천 앞산...등 6개산 묘사를 하루에...ㅎ
일년 연중행사라...힘들게 다녀왔지만 보람되고
다녀오고 나면 오히려 피로가 풀리는 듯하니
자호천 맑은 물과 공기가 저의 체질과도 관계가 있는 듯하네요ㅎ
다가오는 가을 환절기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작성자정재문 작성시간 14.09.13 석죽화님-젊은 할배 부르기가 다소 어려워 석죽화로 부르는 거 이해 하십사-
부산에서 자양까지 다녀 왔군요.
전에 가끔 우리 묘사 때 내곡할배 뵌 적이 있는데
아직도 건강하실테지?
우리 집 식구가 나를 놀릴 때 쓰는 말인데
"자양産이니 무조건 최고이지 뭐!" 그렇다오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산도 좋고.....
고향은 언제 들어도 최고의 정감이 가는 단어랍니다. -
작성자sanday 작성시간 14.10.07 공은 화천지수를 아는가? 라는
황재의 밀명을 받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려한
부자분의 충절을 높이 기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