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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스크랩] "제3회 산남의진순국선열추모제"거행하다~~★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5.06.01|조회수131 목록 댓글 2

항일의병

~~~"제3회 산남의진순국선열추모제" 거행하다~~~

언   제 ; 을미(2015)년 음;사월열사흘(양;5월30일)

어디서 ; 경북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1683

(거동사 경내)

 대한불교조계종제10교구(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

거동사가 주관 하고, 국가보훈처 경주지청,영천시,(사)산남의진기념사업회,

자양면,영천문화원,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보현자연수련원이 후원하는

 "제3회 산남의진순국선열추모제"가 거동사에서 거행함에 각계 귀빈과 신도들 해서 수백명의

 염원속에 식전공연과 추모식, 그리고 추모공연까지 성대하게 거행한 모습들을 담아 카페에 올려

봅니다.

사월초파일에 장식한 프랑카~드가 아직~~~

***거동사는***

개요

거동사(巨同寺)는 경북 영천시 자양면 보현산(普賢山) 남쪽에 자리한 천년 고찰이다.

영천시를 지나 안강 방면으로 나가 조교동 삼거리에서 임고를 따라가면 영천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산허리를 감고 굽이굽이 이어져있는 영천댐을 따라 보현산 쪽으로 약 20

올라가면 보현산 청소년 야영장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거동사로 오르는 길목~~~

일명 약초 마을이라 불리는 마을 안길을 따라 약 2더 가면 거동사가 보인다.

유난히 저수지가 많은 산길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길, 나무마다 주렁주렁 풍성한

 열매를 매달아 놓아 마음의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곳이다. 주변에 남아있는 암자의 유허지를

 보아 대찰(大刹)이 있었음이 추측이 되나, 애석하게도 지금은 대웅전과 승방, 요사채 하나와

 산신각만 남아있다. 신라 고찰이라고 보기에는 여느 절과 다름없는 평범한 절이지만, 한 때는

건물이 100여채가 자리한 대찰이었다고 마을 주민들에 의해 입으로만 전해올 뿐, 번창했던

시절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거동사 입 간판이~~~

거동사가 한참 융성할 당시에는 아침밥을 짓기 위해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 3아래인 영천댐 상류인 지금의 충효사까지

 내려올 정도로 신도가 많았다고 한다. 너무 많이 찾아드는 신도를 감당하기 어려워

 한번은 주지스님이 유명한 대사를 찾아가 신도의 발길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이 대사는 절에 있는 부도군의 위치를 옮기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천년 사찰 거동사 입구가~~~

다음날 스님은 부도탑을 지금의 거동사가 정면으로 보이는 산기슭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신도의 발길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사찰건물도 하나 둘 없어지고

쇠퇴해 지금의 거동사만 남아있게 됐다는 것이다.

중간 계단도~~~

최근 이곳으로 부임한 혜휴 주지스님은 그동안 찾지 못했던 부도탑을

수맥연구가의 도움으로 다시 찾았다고 한다.

행사의 팜프랫도~~~

절 맞은편에 있던 3기의 부도군을 거동사 인근에서 찾아내 지난 4월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전에 묻혀있던 부도탑에서 엄청난 기운을 느낄 수 있어 곧바로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신도의 발길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한 이곳에 신기하게도 부도군을 옮긴 후 이번

 초파일에는 마을 진입로가 막힐 정도로 많은 신도가 찾아들었다고 한다.

동우 주지스님의 인사 말씀이~~~

전 주지 혜휴스님과 거동사 신도님들은 부도군이 옮겨진 후 번창했던

 시절의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차있다.

각  처에서 보내온 화환이~~~

추모제 진설을~~~

산남창의진 [山南倡義陣]

**정 의**

1906년 경상북도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항일의병부대.

**내 용**

삼남창의진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고종이 정환직(鄭煥直)에게 의병운동의 전개를 밀명하였다.

영녕들의 휘자가 왼쪽 둘째줄 13번(휘;정진소)이 조부님~~~

12월 정환직은 관직을 사양하고 허위(許蔿)의 주선으로 군자금 2만냥을

구해 중국인 왕심정(王心正)을 상해(上海)로 보내어 신식무기를 구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들 용기(鏞基)를 고향 영천으로 파견해 의병을

소모(조부님도 이 부서에 가담)하게 하였다.

전체 분위기를~~~

용기는 영천에서 죽마고우인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과 함께

거사계획을 확정하고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유포하는 한편,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지어

의병운동의 확산을 도모하였다.

이쪽 부분도~~~

또한, 영천·신녕(新寧흥해(興海청하(淸河기계(杞溪죽장(竹長

영덕·영해 등지에 소모장을 파견, 의병규합에 힘썼다. 19063월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산남의진을 구성하였다.

기념사업회장의 추모사가~~~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구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泰彦) 등이다.

우측에서도 담고~~~

이들은 당시 영해 일대에서 활약하던 신돌석의진(申乭石義陣)

연락하면서 4월 말 청하읍을 공격할 목표로 진군하던 중 경주진위대 참령

신석호(申錫鎬)가 거짓으로 아버지 환직의 체포 소식을 전하였다.

각 주지스님을 중심으로~~~

이에 용기는 중군장 이한구에게 의진을 맡기고 진위대에 출두해 붙잡혔다.

그 뒤 의진은 이한구의 지휘하에 청하·경주·청송·진보 일대를 횡행하던 중

덕성리(德星里)에서 적과 접전해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한편, 대구옥에 수감중인

주장(主將) 용기에게 화가 미칠까 우려되어 7월 하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의병장 정용기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9월에 석방되었다.

공연 준비하는 모습도~~~

19074월 중순 운주산(雲住山)에서 재기했으나,

죽장면 매현리에서 유진중 적의 기습을 받아 이틀간의 격전 끝에 의병장이

 9월초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하자 정환직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육군3사관학교 헌악단들도~~~

9월 말경 흥해·신녕·의흥에서 일본 군경과 접전해 총기 500여 자루를 노획하였다.

10월에는 흥해와 영덕을 공격해 일본 헌병을 내쫓고 분파소를 소각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겨울이 되자,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 의병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어 일단 의진을 해산한 뒤

청하의 촌락에 은거중이던 정환직이 190712월 붙잡혀 순국하였다.

전체 사회에 불교방송에서 박혜담 어나운서가~~~

그 뒤 산남의진의 유장들이 잔병을 모아 최세윤(崔世允)을 대장에 추대해 운문산,

청송·흥해 등 각처에서 활약하였다. 이처럼 산남의진은 경상도 지방을 총망라한 의진으로

 3년간에 걸친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수행하였다.

추모사를~~~

지휘부인 유생들은 근왕적 의식을 강하게 보여 주었으며,

병사층은 다양한 계층의 민중으로 구성되어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투쟁하였다.

영천시장 대행 부시장이~~~

사관학교장 대리도~~~

선양사업회에서도~~~

청혼문 낭송하시고~~~

합장하여~~~

양세 장군 주손(대영씨) 헌다 하시고~~~

絶命詩(절명시)

                                      ---의병대장 정환직---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

몸은 죽을망정 마음마져 변할소냐

義重死猶輕(의중사유경)

의는 무겁고 죽음은 오히려 가볍도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

나머지 뒷일을 누구에게 부탁할까

無言坐五更(무언자오경)

생각하고 생각하니 새벽이 되었구나.

헌화후 묵념을 올리고~~~

헌다, 헌화하는 동안 뒤에서 춤을~~~

돌아가는 모습을~~~

축원의 모습도~~~

헌악의 모습도~~~

열창을 하고~~~

축원문을 낭독하시고~~~

축원문의 내용도~~~

백성스님과 보조 여승의 학춤이~~~

순간 찰라를~~~

학의 날으는 모습을~~~

백성스님을 중심으로~~~

세사람을 기준 삼아~~~

나의 모습도 한컷~트~~~

***최세윤 시***

國破家亡已有年(국파가망이유년)

나라가 파하고 집이 망한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尙存一縷愧蒼天(상존일루괴찬천)

아직도 실날 같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하늘에 부끄럽도다

丈夫自此知歸所(장부자차지귀소)

대장부 이로부터 돌아갈 곳을 알았거니

殷有夷齊齊有田(은유이제제유전)

은나라에 백의숙제가 있고 제나라의 田橫(전횡)이 있었네.

==최세윤의병대장이 남긴 시==

환직,용기 장군의 주손(대영씨 부부) 모습도~~~

사홍서원을 하고~~~

이쪽도~~~

다음 준비를 이야기 하고~~~

김재선외 여러명의 가야금  연주도~~~

열창을 하고~~~

김인숙외 시조창에 교촌댁과 장서방댁(함;태한)아즈매도 있고~~~

아리랑 태권도에서 태권도 시연도 하고~~~

대웅전 경내도 담고~~~

거동사 대웅전의 설명문도~~~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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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迎日鄭氏四難契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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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마당지945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02 삼사관생도,선화여고,연불련회원,은해사합창단,영천지역 단체들,거동사,기기암 불자님들 많이 참석했는데,
    산남의진의사 자손들이 많이 참석치 못하여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제 3차 행사치루었는데 홍보가 잘되여 내년에는 많은 후손들이 참석 해주시것을 믿습니다,,,,
  • 작성자진우 | 작성시간 15.06.07 참 상세히도 기록하셨군요.
    늘 보기만 하니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동엄공 할배가 남기신 절명시는 볼 때마다
    가슴 뭉클함을 느낍니다.
    사실 며칠 전에 구미시 임은동에 위치해 있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에 갔습니다.
    직장과 지근거리에 있어 궁금하던 차 갔지요.
    왕산 선생은 김산의진(김천을 중심으로 한 의진)
    을 일으켰던 분인데
    기념관을 최신 건물로 잘 지어놓았고
    전시관에 전시한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산남의진을 창의하신 동엄공 할배 부자분을 배향한 충효사가
    있긴 하지만 우리 문중에서도 언젠가는 이런 기념관을 하나
    짓는 목표를 세우는 일도 있어야 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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