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의 유배문학관을 찾아서
유배문학관을 탐방하니 그곳에 본관이 같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정치가이신 포은선생과 송강선생의 유배 시의 작품이 게시되어있었다.
그래서 이 기회에 영일정씨(迎日鄭氏)의 득성(得姓)과 영일(迎日)로 관향(貫鄕)을 갖게 된 유래 및
본관은 같으나 파(派)가 다른 이유 등을 알아보기로 한다.
1.영일정씨(迎日鄭氏)의 득성(得姓) 유래
1) 정씨(鄭氏)로 사성(賜姓) 받음
* 삼한시대(三韓時代) 진한(辰韓)에 6부촌장(部村長)이 있었다. 그 중 제3부 취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
이 지백호(智伯虎)인데 다른 5부 촌장과 더불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삼아 신라(新羅)를 건국
하였다.
* 서기 32년(儒理王 9년 壬辰) 봄에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개칭(改稱)하고 지백
호(智伯虎)는 낙랑후(樂浪候)로 봉훈(封勳)과 아울러 성(姓)을 정씨(鄭氏)로 하사(下賜)받았다.
* 우리나라 정씨는 대부분 이 지백호가 시조이다. 본관을 달리한 慶州, 迎日, 東萊, 溫陽, 草溪, 咸平,
河東, 羅州, 奉化, 晉州, 晉陽 등 무려 120여 관(貫)있다.
2) 영일(迎日)로 관향(貫鄕)을 갖게 된 유래
관향 또는 본관은 고려 태조 왕건 때 정해졌는데 우리 영일정씨는 신라의 간관(諫官) 정종은(鄭宗殷)
이 설화사건으로 조정에서 인동약목현(仁同若木縣)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손 정의경(鄭宜卿)이 고려
건국 공신으로 봉해 졌어 영일호장(迎日戶長)이 됨으로써 영일정씨가 되었다고 한다.
3)본관은 같으나 파가 다른 이유
같은 영일정씨인데 파가 다른 이유는 각 파마다 그 시조 이상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가문은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로 고려 명신 정습명(鄭襲明)을 1대로 하고 있으며, 감무공파
(監務公派)는 고려 명신 정극유(鄭克儒)를 중조(中祖)로 모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은 지주사공파인 우리 파시고, 송강 정철(松江 鄭澈)은 감무공파
이시다.
2.남해유배문학관
남해유배문학관은 국내 최대 문학관으로 유배문학을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11월 1일 개관되었다.
권력도 부귀영화도 모두 빼앗긴 채 '유배'라는 백척간두에 선 절망적인 삶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불멸의 혼을 기리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은 세월 속에 이쳐져 가는 유배객들을 기리는 문학의 진한 향기가 피어나는 공간이다.
주제별 전시관을 통해 유배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와, 다양한 체험 전시 외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객이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하여 이 문학관을 찾는 분을 위해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1)옥외에 조성된 유배관련 자료들
서포 감만중상
유배되어 가는 모습과 형틀
유배지에 도착하여
2)주제별로 전시된 자료들
송강가사
포은선생은 1976년(우왕 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인임, 자윤 등이 주장하는 친원배명 정책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되었다.
지금 울산의 반구대가 있는 반구서원(盤龜書院)에 고려 말의 포은 정몽주(圃隱鄭夢周, 1337~1392), 조선 초기의 회재 이언적(晦齋李彦迪, 1491~1553), 한강 정구(寒岡鄭逑, 1543~1620)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있는데 반구대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삼현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가 세워져 있다,
3)유배문학자료 들
4)여러자료실 들
죽방렴 멸치 잡기 영상 체험실
해협에 죽방염을 설치할 때 사용한 기구들
고사한 고목을 잘 손질하여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