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의 湖叟公과 여러 賢人들의 우국충정(憂國衷情) 詩-3
(불국사(佛國寺) 영지루(影池樓)에서 지은 시)
3.불국사(佛國寺) 영지루(影池樓)에서
1590년 7월 16일에 류정(柳汀), 김광복(金光福), 김춘룡(金春龍), 정삼고(鄭三顧), 김인제(金仁濟), 정세아(鄭世雅), 조덕기(曺德驥), 금란수(琴蘭秀) 등 사우들이 송호정사에서 왜적의 침략의 대비책을 논의하고, 7월 17일에 단석산에 올라 김유신이 돌을 자른 흔적을 보고 감개에 젖어 시를 읊었고. 1590년 7월 28일 일행은 치술령에 올라가 대마도를 바라보며 절구(絶句) 한 수 씩을 읊었다.
그리고 1590년 8월 초하루에 불국사에 일행이 도착하니 동남지방의 선비들이 약속한 듯이 모였다. 김응하(琻應河), 이태립(李台立), 이눌(李訥), 견천지(堅川至), 이계수(李繼秀), 윤홍명(尹弘鳴), 장희춘(蔣希春), 김응생(金應生), 등 20여명의 친구들이 술을 들고 영지(影池)의 영지루(影池樓)에 올라서 각각 래(來)자 운(韻)을 가지고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다.
무영탑의 전설을 간직한 영지
불국사의 석가탑이 못에 비치기를 기다리다 아사녀가 빠져 죽은 영지.
저 멀리 토함산 불국사에는 석가탑이 자리하고 있다.
아사달이 아사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조각했다는 전설이 깃 들인 석불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석가탑(釋迦塔) 또는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다. 이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良友不期來 좋은 친구들이 약속한 듯이 와서
登樓笑把盃 누각에 올라 웃으며 술잔을 잡네
群賢次第坐 여러 훌륭한 분들 차례로 앉으니
摠是濟川才 모두 다 냇물을 건널 인재들이네
-위의 시는 정세아(鄭世雅)의 詩이다.-
群賢有意來 여러 현인이 뜻을 품고서 와서
抱瑟又傾盃 거문고 안고 또 술잔 기울였네
經國安民策 나라 경영하고 백성 편안케 할 계책
推枰更試才 혜아려 보면서 또 재능을 시험하세
-위 시는 류정(柳汀)의 詩이다.-
多士遠方來 선비들이 먼 곳에서 왔기에
携襟更勸盃 옷깃 끌며 다시 솔잔 권하네
韋編皆講術 책 끈이 닳도록 다 강론하였으니
笑問禦戒才 웃으며 적을 막을 인재를 묻노라.
-위는 조덕기(曺德驥)의 詩이다.-
多士自何來 많은 선비들 어디에서 왔던가
風雲影玉盃 풍운이 옥 술잔에 비쳐지네
聖朝培養澤 성스러운 조정에서 배양한 은택
最樂育英才 영재를 기르는 것이 가장 즐겁다네
-위 시는 琴蘭秀의 詩이다.
君子四方來 군자들이 사방에서 왔으니
豈無獻百盃 어찌 백잔의 술을 올리지 않으랴
詩書磨壯志 시서 공부하여 장대한 뜻 갈고닦은
文武必兼才 문무를 다 겸비한 인재들일세
-위는 김광복(金光福)의 詩이다.-
不遠海山來 산천 멀다하지 않고 왔으니
那無酒一盃 어찌 한 잔 술이 없을손가
新亭非此地 새 정자 이곳 때문이 아니고
憂國訪英才 나라 걱정에 영재를 찾아 왔다오
-위는 이눌(李訥)의 詩이다.-
o주(註)
o영지(影池)의 전설 : 경주시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연못이다.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불국사 석가탑을 지으려고 불러온 백제 장인 아사달(阿斯達)의 아내 아사녀(阿斯女)가 남편을 찾아 왔을 때 절의 스님이 탑의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며 탑이 완공되면 못에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하였다. 아사녀는 날마다 못을 들어다보며 그림자가 비치기를 기다렸으나 몇 달이 지나도 보이지 않으므로 마침내 아사녀는 아사달의 이름을 부르며 못에 빠져 죽었다. 공사를 마친 아사달은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영지로 달려갔으나 아사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슬퍼하던 이사달은 영지 주변에서 바위에 아사녀의 모습을 조각한 뒤 못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에 석가탑을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영탑이라고 하고 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o냇물을 건널 인재 :나라의 재상이나 장수를 비유하는 말이다. 은나라 고종이 부열을 재상으로 삼으면서 “내가 만일 큰 내를 건너게 되면 그대를 배와 노로 삼겠다”라고 한 말이다.
o부열(傅說)은 은나라 고종 때 토목공사 일꾼이 있었는데 재상(宰相)에 등용되어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었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고종이 백방으로 인재를 구하는데 부암이란 곳에서 죄수들과 성을 쌓고 있는 부열을 발견하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나에게 가르침을 말해주오 내가 내(川)을 건넌다면(濟) 그대를 배와 노(舟楫)로 삼으리다(書傳)>고 한 것에서 원용하여 성 쌓는 일꾼 중에도 부영과 같은 훌륭한 인재가 있는데. 오늘 불국사 시회 모임에 참석한 22인 賢人들은 모두 재상감이라고 말 하고자함.
o정세아(鄭世雅)(1535~1612)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시호는 강의(剛義),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여러 의병대장들과 합세하여 영천성과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증 병조판서
o유정(柳汀)(1537~1597) : 관향은 문화(文化), 자는 여원(汝元), 호 송호(松壕). 1592년(선조 25) 때 4월 18일부터 아들(영춘)과 조카(백춘, 득춘)를 데리고 의병장 윤홍명(尹弘鳴)· 이응춘(李應春)· 장희춘(蔣希春)과 함께 항전하다가 1597년 9월 61세로 전사하였다.
o조덕기(曺德驥) :관향은 창녕. 자는 여수(汝售) 또는 언성(彦成). 호는 풍계(楓溪), 임진왜란 때 창의하다.
o금란수(琴蘭秀)(1530~1606) : 관향은 봉화,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성재(惺惺齋) 퇴계문인, 생원, 정유재란 때 창의, 봉화 현감 역임, 증 좌승지.
o김광복(金光福)(1529~) : 자는 경원(景源), 호는 죽포(竹圃)이다. 우계당 김순(金洵)의 아들. 포항시기계면 출신. 임진왜란 때 부친의 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경주성, 서생포, 등 여러 전투에 참가선무원종공신 2등 책록 됨 뒤에 병조참판에 증직됨, 경주 학남사(鶴南祠)에 제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