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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이야기

호군공(護軍公) 휘 정수번(鄭守藩) 유사(遺事)

작성자마당지945|작성시간17.08.03|조회수138 목록 댓글 1

                                호군공(護軍)  휘 정수번(鄭守藩) 유사(遺事)

 

호수공의 4남이신 호군공께서는 성품과 체격이 武人다워 그 길을 택하여 內禁衛將

까지 지냈으나 혼탁한 官界를 솔선하여 바로잡을 노력을 하다

病患으로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찍 작고하심은 한탄스럽다.

父公이신 호수공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으셨기에

군무를 맡아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 칭송이 자자하셨다.

다음은 호군공의 家狀年譜, 墓表, 墓誌銘, 護軍公事蹟誌

참고하여 하신 일을 정리해 보았다.


노항 마을은 선무랑공께서 무오사화를 피해 처가 곳에 은입 아여 3대가 이어 산곳이다,

사진의 중간에 있는 산은 백암산줄기이고, 먼 산은 진경산이다.

두 산의 사이에 노항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수몰되었다. 호군공은 그 마을에서 호수공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성장하였고, 아버지 따라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임란이 일어나자 왜적의 약탈을 피해 호수공은 온가족을 대리고 기룡산

성혈암에 피란하였다.

그때 창대공이 찾아와서 나라 정세를 논의 한 후 창의할 결심을 하신

곳이며, 그 성혈암에서 남은 가족들이 피란을 하였다.

위 사진은 성혈암의 앞모습과 석굴 안의 모습이다.



위의 사진은 대구황금동의 청호서원(靑湖書院)이다.

이 서원에 모당과 양계공 그리고 류시번이 배향되어 있다.

대구의 황천동(지금은 황금동)은 외가 곳으로 임란중에 숙형 만호공과 같이

영천서 100리 길을 와 쌀을 지고 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또한 

공께서는 1600112일 임란을 피해 자양 집에 임시봉안 하여 피란하였던

외조부 내외분의 祠版을 외사촌 모당과 같이 대구의 외가 집 까지 봉안하고,

위안제에 부공 호수공의 제문을 올렸다.



임진왜란 때 영천, 경주 복성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호수공(湖叟公)의 장손인 해남 현감

요산(樂山) 휘 호례(好禮)1613년에 건립한 호수선생 종택이다.

호군공이 이 집에서 성장하여 결혼 후 이웃마을인 석동으로 살림 났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그해 721일 방어사 곽재우(郭再祐)가 주축이 된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18세 나이로 아버지 호수공을 모시고

叔兄 만호공과 같이 참가했던 화왕산의 오늘의 모습이다.


종택이 있는 대전마을에서 멀지 않는 영천 명산리(鳴山里) 석동(石洞)은 호군공께서

살림나 사시던 곳으로, 지금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2000722에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을 추모하기 위해

위사재(衛社齋)를 창건하였다.



하천묘역은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으며, 기룡산 아래이다. 노촌공의 효행 덕으로 雪鶴大師가 명당인 묘 터를 점지 했고, 공의 증조부이신 선무랑공, 조부이신 노촌공,

부공이신 호수공과 백형이신 백암공의 묘소 등 모두 80여분의 묘소가 있다.

    

제일 위에 부공이신 호수공의 묘소가 있고

그 계하에 호군공의 묘소가 보인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해 찍은 묘역의 모습인데, 오른쪽의 묘소가 호군공 묘소이며

그 아래 중앙에 백암공의 시총이 보인다.



4월 셋째 일요일은 하천묘역의 묘사 날이다. 윗대부터 묘사를 지내고

호수공 묘사 후에 호군공 묘사행사를 한다.

동옥(東玉) 주손이 초헌관으로 묘사를 지내고 있다.


대구망우공원에 있는 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아버지 호수공과 백형 백암공,숙형 만호공,

그리고 호군공 4부자의 위패가 봉안되어있다.

올해 5파의 정종섭국회의원이 초헌관으로 헌작하고 있다.





경주황성공원에 있는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

호수공과 백암공, 만호공, 호군공 4부자의 휘자가 기록되어있다.

호군공의 東玉 주손과 여러 후손들이 헌화하고 묵념을 올리고 있다.

  

                                  호군공의 남긴 자취

             公의 휘는 수번(守藩 17)이고 는 정보(貞甫)이며 그 本貫迎日이다.

                    관직은 용양위부호군겸내금위장(龍驤衛副護軍兼內禁衛將)이다.

 

1.가장(家狀) : 시조는 고려(高麗)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휘 습명(襲明)이니 의종(

)의 스승으로서 바른 말로 충간(忠諫)한 사적(史蹟)들이 국사에 나타난다. 6대 후에 판

도판서(版圖判書) 휘는 임(7)의 두 자제가 있는데 장남 휘 인수(仁壽 8)는 포은선생

의 증조이며, 차남 휘 인언(仁彦 8)은 전공판서(典工判書)로 공의 선계(先系)이다. 휘 광

(光厚 9)는 고려조에서는 상주목사를 지냈고, 조선조(朝鮮朝)에 공조판서(工曹判書)

 하였으며, 휘 위(10)는 사정(司正)이고, 휘 문예(文裔 11)는 생원(生員)이며, 아래에

 司成인 휘 종소(從韶 12)가 문장과 節行이 뚜렷하여 세상에 모범이 되었으니 점필재(

畢齋) 金宗直이 항상 烏川 鄭先生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 아랫대의 휘가 이휘(以揮 13)

이니 長水道察訪牧使를 역임하였고, 그 아랫대가 공의 증조 휘 차근(次謹 14)이 자양

入鄕祖 이다.

조부 노촌공 휘 윤양(允良 15)은 퇴계 문도(門徒), 昌陵參奉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호수

휘 세아(世雅 16)黃山道察訪을 역임하였으며, 그 후에는 공의 錄勳으로 인하여

曹參判贈職되었다가 임란 때 의병장으로 영천, 경주 복성에 유공하여 증직으로 병조판

서와 강의공(剛義公)의 시호가 내렸다.

 어머니는 貞夫人 孫氏比安縣監 致雲의 따님이며 靖平公 洪亮의 후손이다. 모당 손처

공은 외사촌이 된다.

 

2.생몰(生沒) : 께서는 1580년 421일에 永川 紫陽 노항에서 출생하여 1621727

에 등창을 앓아서 達成兵營에서 돌아가시니 춘추가 겨우 42세였다.

그 해 104일에 영천군 북쪽 기룡산 아래 하천묘역의 부공이신 호수공의 階下 임좌에

장사지냈다. 이는 선대의 계하를 쫓은 것이다.

 

3.() : 淑夫人 曺氏1572년에 나서 1608년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37세였다. 묘소는

과 한 곳이나 은 다르다.

成均生員 希益의 따님이며 芝山先生 好益의 형의 따님이다. 夫人詩禮의 가문에서 성장

면서 책이나 경계하는 글을 눈으로 익히면서 자라나 시집가서 군자를 섬기는데 그 행

지에 어긋남이 없었고 노복을 거느리는데 법으로써 다스려서 中門 안에는 언제나 질서가

 정연하고 자리가 반듯하였다.

 

4.효성(孝誠) : 공이 13세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니 그의 父公 호수공께서는 가산

(家産)을 기울여서 자본(資本)으로 하여 거의(擧義)를 해서 의진(義陣)을 이끌고 구국항쟁

(救國抗爭)의 길에 나가고 나니 이에 따라 가정도 어려워져서 기아(飢餓)에 허덕이게 되어

 선부인(先夫人)께서는 당상(堂上)에 계시면서 능히 일어나시지를 못하니 공은 그 형 휘

안번(安藩)과 같이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100리 밖에까지 내왕하면서 쌀을 지고 와서 모

친을 봉양하며 생계를 맡았으므로 世人들은 모두 그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였다.

  그 후 왜란이 평정되자 湖叟公께서는 을 사양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재물을 털

어서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혀 날마다 수십 명 씩을 겪어내었다.

러다보니 이 가문에도 땔나무와 식량이 바닥이 나서 종종 불을 지피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공은 더욱 힘을 써서 좌우에 한결같이 처리하고 어버이의 뜻을 순순히 복종하고 받드는데

 힘썼다. 때로는 공이 손수 죽을 묽게 끓여서 먼저 아버님께 드리니 아버지께서는 빽빽하

게 둘러선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오늘 저녁을 먹는데는 저가 여기 와 있어야

먹겠다고 하고 호수공께서 그제야 그를 마시게 되었다.

 

5.무인(武人)의 길 선택(選擇) :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수의 재목으로 타고나서 보통 아이들

과 달랐다. 점점 장성하면서 힘이 세고 용기가 남달랐으며 그 체격은 능히 큰 호랑이와 같

으면서도 일찍부터 한 번도 얼굴에 怒氣를 띄는 것을 못 보았고 벗들과 놀 때에는 번번이

 손을 모아잡고 모습을 바로잡으니 보는 이들이 자못 敬重하게 여겼다.

성인이 된 후부터는 강걔(慷慨)하는 마음으로써 책을 읽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詩經

 書經을 궁구하다가 때로는 갑자기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大丈夫라면 당연

히 임금이 하사한 도끼를 들고 단에 올라 백만 군을 지휘하는 곰이나 사나운 짐승 같은

장군을 즐겨 본받아야지 선비 무리에 국한되어 글이나 읽고 글씨나 쓰는 데에만 머리를

움츠릴 수 있으랴?" 하고는 드디어 선비의 길을 다 버리고 孫子兵法이나 黃石公의 병법에

 대한 책을 취하여 머리를 숙이고 六機諸說을 열심히 읽어 요긴한 병법을 암송하여 해득

하니 비록 군대에서 늙은 사람이라도 모두가 여기에는 미치지를 못했다.

 

6.관계경력(官界經歷)

  1)무과 장원(武科 壯元) : 1603년에 別科로써 보인 殿試에 나아가 壯元에 올랐는데 이때의

나이가 24세로 宣祖께서 들으시고 손수 공의 성명을 써서 벽에 걸고 또 그 활을 멀리 쏜

보수(걸음수)까지를 기록하고 말씀하시기를 "奇才로다! 기재로다!"를 연발하시니 듣는 사

람마다 축하하며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 하였다.

 

  2)1605년에 甘浦萬戶1)를 제수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바야흐

나라 변방의 수비가 대단히 소홀한데 여러 武士들 중에서 鄭某가 날쌔고 건장하고 또

奇略이 있으므로 만약 지금 다시 轉補를 시켜서 북쪽 변방으로 부임하게 한다면 이 한

사람으로능히 백 명의 무사를 당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임금께서 허락해서 다시

의논이 진행되으나 또 말하기를 "그의 형 安藩이 지금 북변 수자리에 갔으니 형제가 같

이 북변에서 수고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결론이 내려져서 이 일로 말미암아 북변행을 면

하게 되었다.

 

o1) 만호(萬戶) : 조선시대 각도(各道)의 진()에 딸린 종사품(從四品) 무관직(武官職)이다  만호만은 무장(武將)

 따로 파견하여 일선을 지키는 전담 무장이 되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수군만호는 경기도 5, 충청도 3, 경상도 19

, 전라도 15, 황해도 6, 강원도 4, 함경도 3원과 평안도에는 병마만호 4원을 두었다.
임기는 부임지에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을 때 900일이며, 대개 무예를 시험해 임명했으나 무과 합격자나 겸사복

·내금위는 시험에 관계없이 임명했다.

 

  3)薺浦萬戶에 제수되어 부임하니 여러 성에 무기들이 허물어지고 헤졌으나 공께서 부임

하자 일률적으로 補修해서 완벽하게 비치했으며 戰艦도 파손된 것은 다시 보수하도록 영

을 내려 매양 元帥에 점검하게 하니 薺浦가 가장 군비가 완비되었다. 무릇 수선에 있어서

는 병졸들에게는 수고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능한 솜씨로 모두 이루어졌다.


  4)1612년에는 撫夷萬戶에 제수되었으나 즐겨 부임하지 않고 말하기를 "부모님께서 집에

 계시는데 어찌 차마 한 薄俸官吏로 어버이 곁을 멀리 떠나서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드디어 당국에 轉補해 줄 것을 요청했더니 이해 겨울에 호수공께서 별세하셔서 공은 슬퍼

하면서 조석로 상식을 올리면서 몸에 병이 나지 않는 한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는

본 성품이 그러하였다.

 

  5)1615년 봄에 을 벗자 忠佐衛 後部將을 제수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정에서 공

훈을 기록하는 일이 있어서 공이 原從一等勳에 올라서 龍驤衛2) 副司果3)에 승진되었다.


o2) 용양위(龍驤衛) : 조선 초·중기에 군사조직의 근간을 이루었던 오위(五衛)의 하나.

경국대전에 의하면 용양위의 소속 병종(兵種)은 별시위(別侍衛)와 대졸(隊卒)이었고, 또한 관할지역으로는 경

동부(京東部)와 경상도 대구진관(大丘鎭管)의 군사가 중부(中部), 경주진관의 군사가 좌부에, 진주진관의 군사가

우부에, 김해진관의 군사가 전부에, 안동진관의 군사가 후부에 속하는 등 경성의 동부 및 경상도의 군사가 진관별로

 그 예하의 오부(五部)에 분속되도록 되었다. 

o3) 부사과(副司果) : 5위체계가 갖추어지면서 1466(세조) 관제개혁 때 종6품 부사과로 개칭되어 법제화하였다.

경국대전당시의 정원은 176명이었으나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자 그 수가 183명으로 늘어났다. 녹봉(祿

)을 주기 위한 기관으로 바뀜에 따라, 부사과에도 친공신(親功臣) ·승습군(承襲君) 공신적장(功臣嫡長) ·군관 금군

(禁軍) 등 보직이 없는 문관 ·무관 ·음관(蔭官) 잡직(雜職) 등이 등용되었다.

 

  6)1616년에 咸鏡道 鹿島萬戶를 제수 받아 공이 부임하자 한결같이 먹줄처럼 법을 시행

하여 士卒들이나 도민들의 곤궁하고 어려운 처지를 곧 구제하여 힘과 위안을 주니 그들

은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좋아했다. 兵器備置를 정미롭게 정비하여 폐기된 모든

병기들을 수선하고 보수해서 복구시켜 놓으니 그 곳 함경도의 觀察使가 표창하고 또

조정에 알리어 승진을 품의하였다.


  7)1619년의 봄에 鹿島萬戶의 공로로 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서 副護軍4)에 올라 신무기

를 만들고, 新兵法을 보급하여 연마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內禁衛將5)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비록 射擊術로써 拔身했으나 일찍부터 권력의 문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한 번 조정으

로 들어가서 궁전에 있은 후로는 항상 고요하게 지내며 말하기를 "지금과 같이 三綱

무너진 때에 내가 어찌 벼슬길을 원하겠는가. 다만 문을 닫고 부모를 봉양할 수 있는 것

으로써 만족하게 여긴다."하더니 드디어 관직을 버리고 가정으로 돌아왔다.


o4) 부호군(副護軍)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속해 있던 종4품의 무관직.

정원 69. 태종 초에는 섭호군(攝護軍)이라 하였다. 1467(세조 13) 관제개혁 때 부호군으로 개칭하고 법제화하였다.

 당시의 정원은 54명이었으나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화하면서 69명으로 늘어났다. 호군(護軍)의 아래, 사직(司直)

윗 벼슬로, 실직(實職)은 주지 않고, 다만 타직(他職)에서 거관(去官)된 자에게 녹봉(祿俸)만 주기 위하여 둔 벼슬이다 


o5) 내금위장(內禁衛將) : 조선시대 종2품의 무관직. 왕의 호위와 대궐의 숙직을 맡아본 금군청(禁軍廳:龍虎營)

내금위를 통솔하였으며, 정원은 3명이었다. 영조 때 정3품으로 품계를 낮추었으며, 고종 때는 1명을 감해서 2명으

로 하였다.


  8)달성병영(達城兵營)에서 작고(作故) : 이 해 겨울에도 본도 巡察使가 공이 兵務에 능

통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을 본도 병영에 와서 도와주도록 청원서를 조정에 올려서

마침내 발령장이 당도했으나 공은 을 핑계해서 가지 않으려 했더니 순찰사가 장차 이

를 군법에 부쳐 부임하도록 강청하니 마침 어머님(貞夫人)께서 순찰사의 말을 들어 부임

하도록 명함으로써 부임하였지마는 공의 본뜻은 아니었다. 매양 하는 말이 "일은 무엇이

든지 可否가 없다. 오직 다만 대답할 따름이니라." 하였다.

이때에 慶尙左道水使"병기 설비에 이제 결함이 생겼도다. 남방의 대비가 걱정이 되노

." 하였고 文武를 겸한 장수 재목을 천거하도록 의논에서 광해군은 벽면을 돌아보면서

"鄭某는 지금 어디 있는고. 이 글씨는 先王께서 일찍이 손수 쓴 것이로다. 즉시 특별히 발

탁하여 政院에 불러들이려고 했더니 그만 죽었다고 기별이 올라왔구나." 하며 광해군은

슬퍼하였다.

 

7.자손(子孫) : 슬하에 3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好義文詞는 여러 차례 首座에 올랐

으나 과거에서는 그 결과가 좋지 못하여 남들이 모두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次子 好

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백부의 뒤로 出繼하였다. 3好信이며 딸은 李鐵堅에게

시집갔다.

o 好義51녀를 두었으니 長子時欽이고, 다음은 時楷, 다음은 , 다음은 時炯,

        다음은 時垣이다. 딸은 孫鉉에게 시집갔다.

o 好禮는 백부의 뒤로 出繼하였다. 海南縣監을 지냈으며 3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時相, 다음은 時僑, 다음은 時諶이니 大護軍이요, 딸은 呂爾에게 시집갔다.

o 好信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장자는 時羽이니 副司果이고 다음은 時喜, 다음은

    時贊이고. 딸은 權凞에게 시집갔다.

o李鐵堅남을 두었으니 仁耉이다.

 

                                         연보(年譜)

1.1580420(宣祖 13年 庚辰) : 영천 자양 노항촌에서 출생하다.

2.1592413(宣祖 25年 壬辰 13) : 임진왜란 발발하다.

   父公(湖叟公)과 백숙형은 창의하고 대구 황청동(현 황금동) 외가에서 쌀을 짊어지고

 와서 노모와 식구들을 봉양하다.

3.1594115(宣祖 27年 甲午 15) : 義陣에 참가하여 彦陽에서 慶州로 들어오는

  길목인 楊川 성 밖을 지키다가 왜적과 전투를 하다.

4.1597721(宣祖 30年 丁酉 18) :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父公叔兄 安藩과 더

  불어 火旺山 會盟에 참가하다.

5.1600112일 임란을 피해 자양 집에 임시봉안 했던 외조부 내외분의 祠版을 외사

  촌 모당과 같이 대구의 외가 집 까지 봉안하였고, 위안제에 부공 호수공의 제문을 올

   렸다.

6.16011128일 대구황천동 외갓집에 일이 있어 다녀오다.

7.160217일 모당공과 함께 쌍봉 정극후 집에 가다. 안강에서 모당을 맞이하여 자양

   으로 모시고 오다.

8.1603(宣祖36癸卯 24) : 別科로 실시한 武科殿試壯元及第하다.

9.1605(宣祖 38年 乙巳 26) : 甘浦萬戶에 임명. 薺浦萬戶로 전임하다.

10.1611(光海 3年 辛亥 32) : 撫夷萬戶에 임명되었으나 부모님께서 노령이므로 부임

   하지 아니함.

11.1612113(光海 4年 壬子 33) : 父公 별세하다.

12.1615(光海 7年 乙卯 36) : 忠佐衛後部將에 임명되고 亨難原從功臣一等錄勳.

    驤衛副司果로 전임하다.

13.1616(光海 8年 丙辰 37) : 鹿島萬戶 임명되다.

14.1619(光海 11年 己未 40) : 봄에 포상으로 副護軍으로 특진하고, 여름에 內禁衛將

    로 천거. 겨울 慶尙左道 巡察使의 요청으로 慶尙左兵營으로 전임되다.

15.1621727(光海 13年 辛酉 42) : 達成兵營에서 등창으로 별세하여 104일에

    영천 자양 기룡산 하천묘역 壬坐에 장사지내다.

16.175110(英祖 27年 辛未) : 묘비 세웠고. 196610월 묘비를 고쳐 세우다.

17.1998421: 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 봉안(대구 망우공원)되다

18. 2000722: 영천 鳴山里 石洞을 추모하기 위한 衛社齋를 창건하다.

19.2001928: 호군공위계를 창설하다.

20. 20024: 護軍公事蹟誌를 발간하여 반질(頒帙)하다. 

21.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 봉안. 경주황성공원

  

                               o서강 전 삼 성(西岡 全三省) 호군공 묘지명 병서에서

오호(嗚呼)! 하늘이 공을 낳으실 제 체격(體格)이 빼어났고 효성이 지극하였고 여력(膂力)

이 절륜(絶倫)하였고 무예(武藝)가 탁월하였고, 병술(兵術)이 신기(神奇)하였으니 처음에는

이 세상에 뜻이 있어서 태어나게 하신 것 같사오나 그 뜻을 펼 연기(年紀)를 오래지 않아서

몰세(沒世)를 취()하게 하였으니, ! 슬프고도 서러운 일이로다.

()에 가로되,

태산을 물리칠 용력(勇力)이요 세상을 덮을 의기(義氣)로다. 사명(使命)과 도리를 갖춘 가정

에서 어버이의 뜻과 몸을 극진히 길렀도다. 원사(遠射)의 특출(特出)함이 상감(上監)에 인식

(認識)되어 성명과 자를 벽서(壁書)해 두고 짙게 하여 제포만호(薺浦萬戶)를 역임하고, 녹도

만호(鹿島萬戶)를 역임하며 병기(兵器)를 정비(整備)하고 병력을 훈련시켜 그 힘쓴 공로를

포상(褒賞)하여 높은 작위(爵位)까지 좇아 이르러 무릇 장성만리(長城萬里)를 힘차게 활보

(濶步)하더니,

! 하늘도 가()히 믿을 수 없도다. ()이 숨고 대호(大虎)가 숨을 거두었도다.

국가(國家)의 운수가 불행하노니 원통(寃痛)하고도 애석(哀惜)하오나 어찌 하리오. 그래도

이지러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는 법이 그 명성(名聲) 백 세 후에라도 전할진저!      

                           

                               o 종현손 지수(篪叟) 규양(葵陽)家狀에서

! 공의 英名이 조달하여 임금께서 들으시고 궁전의 벽에 그 이름을 써놓은 것은 아마

도 장차 인재를 골라낼 때에 공을 기억하려고 한 것인데 공의 人品을 다 시험해 보기도

 전에 옥황상제의 부름이 재촉하여서 가시고 말았도다. 때는 혼탁한 조정의 말기로써

음흉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서 무릇 크고 작은 관직에 등용되는 것이 御命이 아니고서

는 제수할 수 없는 직위까지 썩어버린 두엄풀 같은 아랫배에 살찐 사람들을 문득 내었

으니 이것이 모두 공이 부끄러워하는 바이고 갑자기 또 그 색을 들어서 돌아갔다면 마땅

히 공은 여기에서 그쳤을 것이리라. 세상에서 다만 공의 사적을 볼 때는 그 활과 칼의

실력은 적은 자랑거리가 아닌 공은 남쪽 고을의 무사로 그쳤다고 할 것이고 공을 아는

사람들은 오직 그렇게만 말하겠는가! 大丈夫立身할 때에는 節行을 우선으로 할 뿐 저

 勳業을 논한다는 것은 비루한 처사니라. 이 같은 丈夫에게 재주는 있었고 은 없었다는

 것은 하늘이 공에게 어찌 를 인색하게 하였는지!

이로써 줄거리로 잡아 대강을 기록해서 붓을 잡은 군자께서 바로잡아 주시기를 기대하노라.

 

 

                        <참고자료>

             o 護軍公事蹟誌 (家狀, 年譜, 墓表, 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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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당지945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8.03 훌륭하신 직계 선조님에 대한 후손들이 상세하게 읽어보고 선조님의 대한 업적을 다같이 되세겨야 합니다,
    7대 화수회장님 삼복더위에 자료수집 편집 하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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