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강의 06 국민정부 불안한 통일, 첫 소비에트와 공산당토벌
3 한 알의 불꽃이 들판을 불태우다
**3-1 난징 국민정부의 불안한 통일
이른바 ‘국민혁명’이 완수되고 명목상 중국을 대표하는 통일정권이 수립됐지만, 이는 지극히 불안한 ‘통일’에 불과했다. 안후이파와 즈리파 계열의 군벌들은 제압됐지만, 그들 대신에 구 ‘국민군’을 대표하는 펑위샹 제2집단군총사령第二集團軍總司令과 구 ‘산시군벌’ 옌시산 제3 집단군총사령第三集團軍總司令, 그리고 구 ‘광시군벌’ 제4집단군총사령第四集團軍總司令 리쭝런 등이 각자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국민당 내에서도 후한민과 쑨커 등의 국민당우파와 왕자오밍, 천궁보, 쑹칭링 등의 파벌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쟝졔스에게 주어진 과제는 각각의 군벌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중앙정부의 통일적인 권력 체계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1928년 8월 국민당은 난징에서 제2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5중전회)를 열고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첫째 ‘훈정개시訓政開始, 오원입안 五院立案’과 둘째 ‘군사정리안軍事整理案’이었다. 이른바 ‘훈정’이라는 것은 일찍이 쑨원이 혁명완수를 위해 구상한 군정기軍政期, 훈정기訓政期, 헌정기憲政期의 3단계 중 두 번째 단계인 ‘훈정기’를 가리킨다. 신해혁명의 실패를 맛본 쑨원은 무력에 의해 반혁명세력을 타도하고 헌법을 반포하더라도 각성한 인민이 그것을 뒷받침해야하기 때문에, 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민들을 가르치고 계도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쟝졔스는 쑨원의 생각을 계승해 난징정부의 수립으로 무력을 통한 중국통일기간인 군정기가 끝나고 이제 바야흐로 인민들을 교육시켜 자치로 이끌 수 있는 훈정기가 도래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 10월에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훈정강령 6조’를 통과시켰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중화민국은 훈정시기의 개시에 있어 중국국민당대표대회가 국민대회를 대표하며 국민을 영도해 정권을 행사한다.
제2조, 중국국민당 전국대표대회의 폐회 중에는 정권을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위탁해 집행한다.
제3조, 쑨원이 ‘건국대강’에서 밝힌 선거, 파면, 창제, 복결復決 등 4종의 정치권리에 의거해 국민을 훈련시켜 국민들이 점차적으로 이를 향유하게 하여 헌정을 세우는 기초를 세운다.
제4조, 통치권은 행정, 입법, 사법, 고시, 감찰 등 5개 항으로 나누며 국민정부가 이의 집행을 총괄해, 헌정시기 민선정부의 기초를 세운다.
제5조, 국민정부가 중대한 국무를 시행하는 것을 지도 감독하는 것은 중국국민당 중앙 집행위원회 정치회의에서 맡는다.
제6조, 중화민국국민정부 조직법의 수정 및 해석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정치회의가 의결하고 집행한다.
1928년 10월6일 <중외일보>
이 ‘훈정강령’은 국민당 훈정지배의 기본법이 됐다. 그 의의는 국회 등의 입법기관이 제정한 법률에 의해 합법성을 획득한 게 아니라 ‘북벌’전쟁이라는 무력에 의해 수립된 혁명정당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력을 기초로 통치기구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했다는데 있다. ‘훈정강령’과 동시에 반포된 ‘국민정부조직법’에서는 중화민국의 통치권을 국민정부가 총람하고, 구체적인 집행은 ‘입법’, ‘사법’, ‘행정’, ‘고시’, ‘감찰’의 오원五院이 나눠한다고 규정했다. 쟝졔스는 국민정부 주석 겸 육해공 총사령관이 됐고 탄옌카이가 행정원장, 후한민이 입법원장, 왕충후이가 사법원장, 차이위안페이가 감찰원장, 그리고 다이지타오戴季陶가 고시원장에 각각 임명됐다. 10월10일에는 쟝졔스 등이 난징 국민당 중앙당부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26일에는 군정시기가 끝나고 훈정시기가 개시됐음을 공식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에서는 또 훈정시기의 3대 주요역점사업으로 ‘정치건설’, ‘경제건설’, 그리고 ‘교육건설’을 제시했다. 아울러 이러한 사업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기위해 경제발전계획을 추진하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적 안정이며 경제건설의 2대 선결과제는 ‘군비절감’과 ‘재정안정화’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여기서 ‘오원’이라는 건 서구의 ‘삼권분립’에 기초한 입법, 사법, 행정에 ‘관리 선발시험’인 ‘고시’와 ‘관리의 탄핵과 재정의 감사’를 맡아보는 ‘감찰’을 추가한 것인데, 이 역시 쑨원이 구상한 것이었다. 쑨원은 중국의 과거시험이라는 전통적인 관료선발제도와 그 관리감독제도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런 전통의 필요성을 중시해 서구의 삼권 분립과 연결시켰다. 외양만을 보자면, 적절하게 균형이 잡혀있어 별로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이것은 유능한 현인(국민당)이 무능한 우민(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도맡아 대행하는 것에 불과했다. 6년으로 규정된 훈정기간동안 국민당 전국대표대회가 국민대회를 대신해 국민의 주권행사를 지도하고 대표대회가 폐회 중에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가 그걸 대행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훈정’지배는 소련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의 정치적 효율을 학습한 결과이기도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왕도’정치를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른바 훈정시기의 실질적 내용은 국민당 일당독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1929년 3월에 열린 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좀 더 구체화되는데, 필요할 때는 국민당이 인민의 집회와 결사, 언론, 출판의 자유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게 했다. 1931년 5월에 열린 국민회의에서 통과된 ‘중화민국 훈정시기 약법’은 그 정점을 달렸다. 이건 ‘강령’서 확인한 기본원칙들을 실제효력이 발휘되는 법률로 격상한 것이었다. 동시에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주석 1명과 약간 명의 위원을 선임하기로 규정하고, 쟝졔스를 국민정부 주석으로 추대했다. 하여 쟝졔스는 군사와 재정 등의 실권을 모두 장악했다. 이후로 이러한 체제는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니 쟝졔스가 타이완으로 쫓겨나 죽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그렇다 해도 당내에 쟝졔스를 견제하는 세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왕자오밍과 천궁보 등의 좌파는 국민혁명전개의 원점이 됐던 국민당개조 때의 방침을 지속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이들을 ‘개조파’라 부른다) 자기들 뜻을 담은 <혁명평론>이라는 잡지도 펴내 청년당원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한편으론 이들 ‘개조파’와 정면으로 대립한 구 ‘시산회의파西山會議派’나 후한민, 쑨커 등의 광둥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쟝졔스는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엮인 국민당 내 여러 세력들을 아우르고 조정해야했다. 여기에 당시 국민당의 대중적 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지역적으로는 광둥이나 난징, 상하이 등 남부지역에 편중돼있는데다 국민당을 이끌어갈 당원들 역시 50만 명 정도에 그쳐 당시 4억 인구를 대표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국민당은 일당독재를 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 역량이 아직 많이 부족했다. 쟝졔스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위해 동원한 것이 ‘남의사藍衣社’와 ‘C, C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해 반대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외에도 쟝졔스에게 가장 위협적이었던 건 그를 도와 북벌을 완수했던 지방의 군벌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지역을 지배하고 있으면서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다. 앞서의 두 번째 결정이라는 ‘군사정리안’은 바로 이렇게 실제 위협이 되는 군대의 감축과 군사부분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기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이들 지방군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재정도 문제였다. 당시 전국의 군대는 약 200만 정도로 이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데 1928년 당시 정부재정 가운데 약 48%에 달하는 2억 위안 정도가 필요했다. 해서 ‘군대삭감’을 의미하는 ‘재병裁兵’문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시급한 현안이었다. 문제는 서로가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선뜻 그걸 실행하는 데에는 극히 인색했다는데 있었다. 1929년 1월 난징에서 중앙위원회를 통과한 ‘군사정리안’을 시행하고자 군벌들을 모은 제1차 ‘편견회의編遣會議’가 소집됐다. ‘편’은 ‘편성’을 뜻하고, ‘견’은 ‘흩어버린다(遣散)’는 뜻으로 결국 기왕의 군대를 정리하고 새롭게 중앙군으로 재편하는 걸 의미한다. 이 회의에서 산시山西군벌 옌시산은 이렇게 제안했다. 곧 장졔스의 직속군인 제1집단군과 펑위샹의 제2집단군은 10사師씩, 옌시산의 제3집단군과 광시계 리쭝런의 제4집단군은 8사씩, 그리고 나머지 잡군은 6 또는 8사로 한다. 아울러 전국을 8개의 편견구로 나누고 각각의 편견구와 중앙 직할부대는 각기 11사를 넘지 못하게 하고 1년 군비는 1억9천만 위안으로 제한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총 2백만의 군사를 80만으로 줄이고, 병기와 군비는 모두 중앙에서 지급받으며, 무기의 제조 및 사유私有를 금하는 것 등이 결정됐다. 하지만 이건 누가 봐도 지방군벌 세력을 약화시켜 쟝졔스의 권력을 강화하고자하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회의도중 펑위샹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이런 군벌들의 불만은 결국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반쟝反蔣’세력에 의한 최초의 내전은 1차 회의가 끝난 지 한 달 만인 1929년 2월에 광시파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이것은 충분한 계획 없이 광시파의 부장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반란이었기에 준비부족과 행동 통일의 결여로 이내 진압됐고, 리쭝런 등 광시파 군벌들은 즉시 꼬리를 내리고 하야를 선언했다. 그러나 전쟁을 관망하던 펑위샹이 일본군철수 후의 산둥성을 접수하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다 쟝졔스 토벌을 선언했다. 그러나 펑위샹 휘하의 부장인 한푸쥐韓復榘와 스유싼石友三이 쟝졔스에 매수돼 투항하고 펑위샹은 계략에 말려 연금됐다. 펑위샹의 다른 부하들이 전쟁을 계속했으나 내부분열로 패해 11월에 산시陝西로 퇴각했다. 이어 12월에는 장파쿠이張發奎가 광시군과 연합해 광둥으로 침입하고, 후난군벌 탕성즈가 이에 동조했으나 모두 진압됐다.
최대의 결전은 1930년 5월부터 10월 사이에 치러진 이른바 ‘중원中原대전’이었다. 같은 해 3월 쟝졔스 이외의 제2, 3, 4집단군의 주요지휘관 57명이 모여 쟝졔스의 하야를 주장했고, 4월에는 산시와 서북, 광시를 대표하는 옌시산과 펑위샹, 리쭝런이 독자적으로 중화민국 육, 해, 공군 총부사령에 취임하면서 전군 50만 명에 동원령을 내렸다. 국민당내부에서도 이에 동조해 왕자오밍 등 개조파 일부가 베이핑에 지방정권을 수립했다. 이는 쟝졔스에게 커다란 충격이자 위기였다. 남북대전이라고도 불린 이 전쟁은 5월에 개시돼 9월까지 계속 됐다. 초기에는 쟝졔스 군이 불리했다. 아무래도 병력 등에서 쟝졔스 군이 밀린 것이다. 하지만 9월이 되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동북의 장쉐량이 돌연 쟝졔스 지지를 선언하고 연합군의 배후를 공격한 것이다. 장쉐량의 군대가 톈진과 베이핑을 점령하니, 옌시산은 재빨리 군대를 수습해 자신의 근거지인 산시로 퇴각하고, 펑위샹은 끝까지 저항하다 궤멸적 패배를 당하고 하야했다. 이리해서 펑위샹의 군대는 거의 소멸되고 옌시산의 군대는 세력이 약화해 장쉐량의 동북군으로 개편됐다. 그래도 장쉐량의 군대 역시 쟝졔스의 군대에 맞설만한 힘이 없기에 쟝졔스의 군대는 비로소 다른 군벌들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단 군벌들의 준동을 저지하고 진압은 했지만, 난징의 국민정부가 나갈 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내우외환’이란 말처럼 쟝졔스정권을 둘러싼 국내외의 여건은 결코 녹록치 않았는데,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쟝졔스가 내세운 정치적 이념은 ‘국내 안정을 도모하고 외부의 적을 몰아낸다(安內攘外)’는 것이었다. 국내를 안정시키는데 가장 급선무는 재정적자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재정적자의 가장 큰 원인은 비정상적으로 큰 군사비지출이었다.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쟝졔스가 ‘군사정리안’을 내놓은 건 지방 군벌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군사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책이기도 했다. 신해혁명직후 쑨원을 몰아내고 총통이 됐던 위안스카이 역시 자신의 군사력을 유지하기위한 자금조달에 애를 먹었는데, 당시 그는 외국의 차관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다 결국 외세에 코가 꿰여 몰락했다. 난징정부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세수증가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불평등 조약에 의해 열강들의 손에 넘어간 관세자주권을 회복했다. 서구열강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위해서는 중국이 통일될 필요가 있었기에 난징정부의 요구대로 1928년 7월에는 미국이, 12월에는 영국이, 그리고 1930년 3월에는 일본이 관세자주권을 승인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의 승인일 뿐 관세는 외국에 친 채무 중 외채상환에 대한 유일한 보증이기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자주권회복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건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외국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한편 이를 바탕으로 각종 산업 진흥정책을 펴나갔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국내의 각 성간에 오가는 물품에 붙여졌던 일종의 국내관세인 ‘이금세’가 폐지되니, 더욱 활발한 물품교역이 이뤄질 수 있었다. 여기에 면사나 담배, 시멘트 같은 공업제품에 대한 통일소비세(統稅)를 부과해 안정된 세수확보가 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난징정부는 여전히 재정적자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건 징세상의 어려움 탓에 1936년까지 소득세를 부과하지 못했고, 국가차원의 토지세 역시 부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토지세는 군벌들이 장악한 각각의 성 정부에 귀속됐다.
아울러 난징정부는 통화정책을 정비했다. 당시는 은화를 기본 축으로 하는 통화제도를 채택했는데, 여러 가지 은화를 비롯해 각종 동전이나 지폐가 멋대로 유통됐다. 또 국제적인 은 가격의 변동에 따라 외국환율이 크게 오르내렸기에 국내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난징정부는 1933년 3월 일정한 무게를 중심으로 값을 매기는 ‘칭량화폐稱量貨幣’로서의 ‘은냥銀兩’을 폐지했고[폐량개원廢兩改元], 1935년에는 당시 주요은행이던 중앙은행과 중국은행, 교통은행에 화폐발행권한을 줘 ‘법폐法幣’로 통일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하여 은화의 높은 환율과 은화유출에 따른 금융혼란으로 심각한 공황에 시달리던 중국 경제는 화폐개혁이후 급속히 경기를 회복하게 된다. 허나 통화발행권한을 정부와 세 은행이 장악함으로써, 만성적인 적자재정과 군사비 충당을 위해 통화를 마구 찍어내고 금융시장을 조작하는 등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고, 그 과정에서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폐단도 생겨났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난징국민정부는 그 이전의 어느 정권보다 안정적인 재정운용을 통해 정부의 지지기반을 다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난징정부가 무엇보다 역점을 두었던 것은 농촌지역에 대한 효율적인 행정관리를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아직 근대산업국가로 전환하지 못한 당시 중국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건 농촌이었다. 그렇기에 농촌지역에 대한 효율적인 행정관리를 재확립하는 게 매우 시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근대이전 어느 왕조도 실현 못했던 것으로 혼란 중에 자기앞가림도 급급한 국민정부라고 달리 뾰족한 묘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심지어 송대 개혁적인 정치가 왕안스王安石가 창안한 보갑제保甲制를 활용해 농촌을 관리하려했다. 보갑제란 본래 “용병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려고 민병제로 전환하는 것으로, 10가家를 1보로 하고 50가를 대보大保, 500가를 도보都保로 해 각 가에서 보정保丁을 내 공동으로 치안을 맡고 농한기에 군사교련을 하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당정부는 이를 보갑제가 시행되는 지역 내에서 토지개혁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구성원들이 상호공동책임을 지는 것으로 활용했다. 결국 국민당정부는 농촌지역을 장악하고 통제하는데 실패했고, 많은 농촌지역의 삶은 이전왕조인 청대와 다를 바 없었다. 그 와중에 일단의 지식인들이 ‘향촌건설운동’이나 ‘평민교육운동’ 등을 펼쳐나갔고, 국민정부 또한 농촌부흥위원회와 중국경제위원회를 두어 이들 사업을 지원했다. 사업의 내용은 주로 향촌에서의 자치나 교육보급을 통한 생활개선에 역점을 두었고, 여기에 ‘예의염치禮義廉恥’라는 유가의 윤리도덕이나 근대사회의 보건위생 관념을 도입해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을 확립했다. 이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운동이나 일본의 국민정신부흥운동 등과 유사한 것으로, 공산당지배에서 수복한 지역에 고유문화를 다시 살리려는 정치적인 의도 하에 수행된 것이었다. 그러나 구호뿐인 이런 일련의 ‘신생활 운동’으론 중국의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인 ‘토지소유의 불균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3-2 마오둔茅盾의 <새벽이 오는 깊은 밤(子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중국은 권력의 공백상태가 됐고 약 20년간 군벌들이 합종연횡하며 천하를 혼란에 빠뜨렸다. 신해혁명의 주역 쑨원이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뜨자 그의 유지를 받든 쟝졔스가 천하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위해 ‘북벌’에 나섰다. 1928년 10월 베이징에 입성한 쟝졔스는 북벌의 완수를 선언했지만, 그 이후에도 쟝졔스의 난징정부 앞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산적해있었다. 사실상 북벌완수는 명목적인 것이었을 뿐, 전국각지에는 크고 작은 군벌들이 여전히 할거했고, 방대한 군사력유지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으나 세금징수 등에 필요한 행정체계가 무너진 탓에 이를 조달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난징정부는 공채를 발행해 재정문제를 해결하려했는데, 1930년 5월 자신들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지방군벌들이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쟝졔스와 반反쟝졔스세력 간의 최후의 일전인 이른바 ‘남북대전’으로, 전황이 확대되자 기업가와 대지주, 자본가들이 모두 재산을 공채투기에 쏟아 부어 극심한 혼란이 일어난다.
전쟁양상은 초기에는 쟝졔스 군이 열세에 몰렸으나, 뒤에 동북지역의 패자 장쉐량이 돌연 쟝졔스 지지를 선언하고 반쟝졔스 군의 배후를 치자 전세가 역전돼 비로소 쟝졔스 군이 군사적 우위에 설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쟝졔스는 운이 없었다. 군벌들을 제거하고 막 숨을 돌리려는 차에 불어 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중국경제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이즈음 상하이는 외국조계지를 중심으로 서구문물이 들어와 번성했던 국제도시였으며, 외국기업과 매판 자본가들이 활발하게 기업 활동을 벌이고 있어 중국자본주의의 첨병노릇을 하고 있었다. 상하이는 외세기업가들의 가혹한 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 탓에 노동쟁의가 끊이지 않았고, 잦은 군벌전쟁과 기아, 질병 등을 피해 대도시로 몰려든 이농민들이 거대한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상하이야말로 당시 중국사회가 가진 갖가지 문제가 중첩해 있는 하나의 축도縮圖라 할 수 있었다. 중국현대문학계의 태두인 마오둔茅盾(1896~1981)의 <새벽이 오는 깊은 밤(子夜)>은 바로 이러한 시대배경을 토대로 쓰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애당초 1932년에 모 잡지에 연재될 예정이었으나, ‘상하이사변’ 때 출판사가 불타는 바람에 원고가 소실됐다. 다행히 작가가 한부 더 베껴놓은 원고가 남아있어 우여곡절 끝에 1933년 1월에 발표됐다. 초판본에는 ‘The Twilight: A Romance of China in 1930’라는 부제가 붙어있었다. 본래 ‘Twilight’은 저녁어둠이 짙어지기 전의 ‘박명薄明’을 가리키나, 초판본의 서평을 썼던 주쯔칭朱自淸은 이를 “여명직전의 캄캄한 어둠상태”를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제목그대로 이 작품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중국현실을 묘사한다. 작품이 나온 한참 뒤 1939년에 마오둔은 “<새벽이 오는 깊은 밤>은 어떻게 창작됐는가.”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창작동기를 밝힌바 있다. “내가 병이 나았을 때는 바로 중국혁명이 새로운 단계로 전향하고 있었고, 중국사회 성질논쟁이 격렬히 진행되던 때였다. 그때 나는 소설의 형식으로 다음 세 가지 면을 쓰고자했다. 첫째, 민족공업이 제국주의 경제침략의 압박 하에서, 세계경제공황의 영향 하에서, 농촌파산의 환경 하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더욱 가혹한 수단을 가하여 노동자계급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 둘째, 이런 까닭에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 정치적 투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셋째, 당시 남북대전으로 농촌경제가 파산하고 농민폭동이 민족공업의 공황을 더더욱 심화시켰던 사실 등이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약 70여 명에 달하는데, 우쑨푸吳蓀甫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본계급과 자오보타오趙伯韜를 중심으로 한 금융매판자본계급의 대결이 큰 축을 이룬다. 우쑨푸는 민족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과 모험정신, 또한 뛰어난 수완을 지녔지만, 자오보타오의 압력과 경제위기, 군벌내전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하고, 동시에 공채투기를 통해 자신의 자본을 축적하고자하는 등 냉혹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당시와 같은 반半식민지상황 하에서 민족자본계급은 제국주의세력에도 반대하고, 혁명적 상황 또는 혁명도 두려워하는 이중성을 지닌 극히 취약하고 동요하는 계급이다. 결국 우쑨푸를 주축으로 한 중국의 민족자본계급은 외세를 등에 업은 매판자본가 세력에 의해 패배하고 몰락하고 만다. 작품의 제목이 뜻하는 ‘한밤중’이란 바로 이와 같이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중국 현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깊은 어둠은 동시에 새 아침을 예비하는 것이기도 한데, 작품 속에서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살아나는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역량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로 표출된다. 이들은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고, 여전히 그들 앞에는 또 다른 패배가 예비 돼있지만, 점차 주체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역사의 주역으로 나설 것이라는 한줄기 희망의 빛이 드리워져있는 것이다. 당시 상하이는 1925년의 ‘5·30운동’이나 1927년의 총파업 등으로 알 수 있듯이 중국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후에 마오쩌둥 주도하에 펼쳐지는 중국혁명의 주된 방향이 농민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지향점은 다소간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결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하는바 노동자중심의 혁명수행은 이미 당시 중국공산당을 이끌었던 리리싼李立三의 모험주의적 노선의 처절한 실패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그리 큰 결점이 되지 못하는 건 이 소설에는 당시사회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복잡한 성격을 가진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형상화만큼이나 성공적으로 수행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3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수립과 국민당군의 포위토벌
우한정부와 결별한 공산당의 간부들은 1927년 7월말을 전후로 난창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곳은 우한과 난징의 중간지점으로 난징정부수립 전에 쟝졔스의 근거지였다. 당시 난창엔 주더朱德(1886~1976)가 소수의 사관교육연대를 지도하고 있었다. 주더는 한때 아편중독에 빠지기도 했으나, 36세 때 과감히 벗어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나 중국공산당의 비밀당원이 된 인물이다. 그리고 난창의 인근도시인 쥬쟝에는 장파쿠이 張發奎의 제2방면군 산하 제20군단장 허룽賀龍(1897~1969)과 제11군 24사단장 예팅葉挺 (1896~1946)이 지휘하는 공산당계 군대 약 3만 명이 주둔해있었다. 잔존세력을 그러모은 공산당 측은 그해 8월1일 류보청劉伯承(1900~1986), 저우언라이, 탄핑산, 리리싼李立三, 장궈타오, 주더 등의 지도하에 국민혁명군을 동원, 국민당 반공정책에 대항하는 무장폭동을 일으켰다[난창봉기南昌蜂起]. 하지만 봉기군은 국민당군의 역습에 불과 사흘 만에 난창을 포기하고 혁명의 근거지 광저우를 향해 남하했다. 이 와중에 8월7일 쥬쟝에서 보로딘과 로이를 대신해 새로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로미나제가 출석한 가운데 취츄바이, 덩중샤 鄧中夏, 왕뤄페이王若飛, 마오쩌둥 등 22명이 중앙긴급회의를 열었다(8·7긴급회의). 여기서 이제까지의 천두슈의 지도를 ‘우익기회주의’로 규탄하고, 그를 대신해 1920년대 초반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모스크바에 유학한 적이 있던 당시 28세의 취츄바이를 총서기로 선출했다. 아울러 ‘난창봉기’이후의 대책을 숙의한 가운데 무장폭동의 총노선을 확인하고 비교적 농민운동이 활발한 후난과 후베이, 쟝시, 광둥지역에서 가을추수기를 맞아 농민들의 무장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추수폭동). 이때 후난의 책임자는 마오쩌둥이었는데 훗날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1927년 8월1일 허룽과 예팅이 지휘하는 제24군 사단은 주더와 제휴해 역사적인 난창 봉기를 일으켰고, 이때부터 장차 홍군이 될 군대가 편성돼나갔다. 그 1주일 후인 8월7일, 당중앙위원회의 비상회의에서 천두슈의 당서기직 해임이 결정됐다. 나는 1923년 광둥에서 개최된 제3차 대표대회이래 당정치국위원이었기에 이 결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당은 새로운 노선을 채택했고, 당분간 국민당과 제휴할 가능성을 전적으로 포기했다.··· 나는 뒤에 추수폭동으로 알려진 운동을 조직하기위해 창사長沙로 파견됐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32~133쪽]
난창을 포기하고 남하하던 허룽과 예팅의 군대는 9월24일 광둥성 북부 해안도시인 산터우 汕頭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곳은 일찍이 천즁밍이 쑨원과 전투를 치를 때의 거점이었던 부유한 도시였다. 여기서도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곧바로 출동한 국민당군에 밀려 불과 5일 만에 산터우를 포기하고 패주했다. 예팅과 녜룽전聶榮臻은 말라리아에 걸린 저우와 함께 홍콩으로 도피하고 잔여병력 1,000여 명은 광둥의 하이펑海豊과 루펑陸豊으로 향했다. 이곳은 펑파이彭湃가 일찍부터 급진적 농민소비에트를 건설해 유지했던 곳이다. 이들은 현지의 농민운동과 합류해 공농혁명군 제2사단을 편성하고 11월18일에 하이루펑 海陸豊 소비에트정권을 세웠다. 이게 ‘중국최초의 소비에트정권’으로, 국민당군의 빈틈을 이용해 약 5개월간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1928년 3월 국민당군의 총공격에 이곳 역시 붕괴됐다. 이들과 별도로 주더의 군대는 갈피를 못 잡고 한동안 국민당군과 좌충우돌하며 광둥과 광시, 후난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우한정부와의 결별이후에도 한동안 한커우의 프랑스조계지에 머물던 공산당중앙위원회는 1927년 9월경 상하이로 이전했고, 같은 해 11월9일과 10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임시정치 확대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새로 임명된 당총서기 취츄바이의 제1차 좌경노선이 결정됐다. 이는 당시 전 중국의 상황이 혁명 고조기에 있으며, 이런 혁명정세가 몇 년간 지속되리라는 판단 하에 전국적 승리에 선행해 성 하나 또는 몇 개의 성을 빼앗아 폭동을 일으킨 뒤 군대를 조직해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추수폭동’실패의 책임을 물어 후난의 마오쩌둥을 비롯한 각 지역의 폭동지도자들을 모두 해임했다. 그러나 이건 중대한 오판이었다. 당시는 ‘혁명의 고조기’가 아니라 ‘퇴조기’였으며, 폭동을 일으킬 당사자인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역시 그 숫자가 극히 미미했다. 당시 공산당에 충성하는 노동조합원은 전국적으로 3만여 명 정도에 불과했고, 공산당원 중 10%정도만이 도시 프롤레타리아였다. 그뿐 아니라 도시에는 국민당군이 잔뜩 몰려있었고,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무장폭동을 일으키더라도 제국주의 열강들의 군대가 급파돼 이들을 신속히 진압했다. 하지만 이건 먼 훗날 그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형세판단이다. 당시 공산당은 아직 혁명경험이 일천했고, 무엇보다 당을 운영하고 비전을 제시하는데 미숙했다. 여기에 소련공산당 내부문제까지 겹쳤는데, 당시 12월에 열릴 소련공산당 제15차 대회에 임박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는 최후의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일찍이 1927년 봄 ‘4·12쿠데타’ 등으로 인한 중국 내에서의 실패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받던 스탈린은 이들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울만한 결정적인 승리가 애타게 필요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 총서기 취츄바이에게 즉각 무장폭동을 통한 혁명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취츄바이는 이 지령을 받고 신속하게 폭동을 준비했다. 그 대상지로는 옛 혁명의 발원지로 노동자들에 대한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하고, 인접한 하이루펑 소비에트정권의 지원을 기대할만한 광저우가 선정됐다. 당시 광저우를 지배한 건 ‘난창봉기’를 진압했던 국민당군 장군과 우한에서 피난 온 왕자오밍이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상당한 내분이 있었다. 12월11일 광저우는 손쉽게 공산당군대와 광저우노동자들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스탈린과 취츄바이가 원했던 대로 권력이 노동자와 병사, 농민대표의 소비에트로 넘어갔다는 선언이 공표됐다(광둥 코뮌 성립). 당시 봉기를 지도했던 건 공산당중앙정치국원인 장타이레이張太雷와 산터우에서 홍콩으로 도피했던 예팅, 사관교육연대를 지휘하는 예졘잉葉劍英 그리고 당시 코민테른 대표였던 26세의 노이만이었다. 이 사실을 알리는 급전이 모스크바로 날아갔고, 스탈린을 비롯한 코민테른집행위원회는 고무됐다. 그러나 혁명군보다 5배나 더 많은 군대를 보유한 국민당군은 즉각 반격을 시작했고, 소비에트정권수립을 알리고 사흘째 되는 13일 오후 광둥 코뮌은 붕괴했다. 당시 무장봉기가 일어났던 사흘간 사망자가 600여 명에 불과했던데 반해 코뮌붕괴 후 다시 사흘간 이어진 혼란 속에 시내에서 대규모살육전이 벌어져 5,700여 명이 사망했다. 심지어 러시아영사관을 혁명기지로 사용하게 해줬던 영사관직원들까지도 모두 사살됐을 정도였고, 비싼 탄약을 쓰는 게 아깝다는 생각에 반란자들을 열 명 남짓하게 묶어 배에 태운 뒤 강물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인 12월15일 코민테른은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광둥성에서 소비에트권력이 5개 지역을 굳게 장악하고 있다.···· 부분적인 패배에도 운동은 발전해나간다. 부르주아적 반혁명분자는 타파될 것이다. 제국주의자 강도들은 내쫓길 게다. 그러나 현재시점에서 영웅적인 중국혁명, 곧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위에는 강도들의 도끼가 번득이고 있다.” - [사에키 유이치(佐伯有一), 노무라 고이치(野村浩一) 외 <중국현대사> 360쪽]
그럼에도 모든 실패는 취츄바이가 뒤집어썼고 코민테른은 그 책임을 묻기 위해 모스크바로 그를 소환했다. 결국 ‘광둥코뮌’이 무너진 뒤 도시와 농촌의 무장폭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고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 농촌지역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8·7 긴급회의’의 결정에 따라 후난에서의 ‘추수폭동’을 책임지게 된 마오쩌둥은 주변의 탄광노동자와 농민, 군벌군대출신으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했다. 제1연대는 우한정부시절 국민당 호위연대였으며, 장교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제2연대는 핑샹萍鄕과 리링醴陵의 농민들과 안위안安源의 탄광노동자들로 구성되고, 제3연대는 핑쟝平江과 류양瀏陽에서 온 노동자와 농민들, 그리고 후베이에서 온 농민의용군들로 구성됐다. 마지막으로 제4연대는 5월에 우한정부에 반란을 일으킨바 있던 샤더우인夏斗寅 장군휘하의 부대를 재조직한 것이었다. 마오는 봉기에 앞서 전적위원회前敵委員會의 서기로 임명됐다. 봉기는 9월9일에 시작됐다. 우측에 있던 제1, 제4연대는 북동쪽으로 창사로 진격하고 좌측의 제2연대는 창사 남쪽 안위안에서 진격해 핑샹과 리링을 함락한 뒤 류양에 집결키로 했다. 중앙의 제3연대는 창사의 동쪽에서 진격해와 제2연대와 류양을 합동으로 함락시키기로 했다. 창사로 통하는 대부분의 철도는 차단되고, 그로부터 1주일간 열차는 한대도 도착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국민당군이 반격해왔다. 봉기군은 참패하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으나 이미 부대는 상당한 손실을 입은 뒤였다. 여기에 국민당을 배반하고 참여했던 제4연대가 형세가 불리해지자 반란을 일으켜 제1연대의 배후를 공격해왔다. 봉기군은 혼란에 빠졌다. 마오쩌둥 역시 이 혼란 와중에 지주 측의 민병대에 사로잡혀 사살될 뻔했다가 겨우 탈출했다.
“내가 군대를 조직하느라 한예핑漢冶坪의 광부들과 농민민병대들을 방문했을 때 국민당의 앞잡이로 활동하던 민단요원에게 붙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의 테러행위가 자행되던 시기로 수백 명의 공산주의용의자가 현장에서 살해됐다. 그들은 나를 민단본부까지 연행할 작정이었고 거기가면 나는 죽을 게 뻔했다. 그래서 난 동료한테 수십 달러를 빌려 호송병을 매수하려했다. 일반적으로 병사들은 돈에 팔린 용병들이라 특별히 나를 죽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풀어주는데 동의했다. 허나 호송대 지휘를 맡은 병사가 이에 반대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민단본부까지 약 200야드 남은 곳에 올 때까지 도망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포승줄을 풀고 들로 달리기 시작했다.” - [에드거 스노 <마오쩌둥 자전> 135쪽]
마오쩌둥은 9월15일 창사에 대한 공격이 무망하다고 판단해 손을 떼고 남은 부대를 모아 농촌지역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당시는 허룽과 예팅의 군대가 산터우를 공격해 점령 직전에 있었고, 공산당중앙은 바야흐로 혁명의 고조기에 접어들었다고 오판하던 때였다. 9월19일 당 중앙은 후난위원회에 창사에 대한 공격을 즉각 수행하라고 명령했다. 패주하던 마오가 이 편지를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는 가운데 마오는 약 1개월 뒤 징강산井岡山으로 깊이 들어갔다. 본래 마오는 추수폭동을 조직하러 창사로 파견됐을 때 다음 5개 항을 실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첫째, 성省의 조직을 국민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킨다.
둘째, 농민과 노동자 혁명군을 조직한다.
셋째, 대지주는 물론 중소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한다.
넷째, 후난성에 국민당으로부터 독립된 공산당세력을 건설한다.
다섯째, 소비에트를 조직한다.
기이한 사실은 당 중앙이 창사에서의 마오의 ‘배반’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날(9월19일) 마오의 구상가운데 첫째와 셋째, 다섯째 사항들을 구체화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오의 생각이 옳았다는 사실이 11월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봉기의 실패에 대한 마오의 책임을 경감하지는 못했다. 마오는 농지혁명의 강행실패와 ‘군사적기회주의’란 이유로 중앙위원회와 후난성위원회에서의 그의 직위를 모두 박탈당했다. 헌데 정작 마오는 한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징강산은 쟝시성과 후난성의 접경지역으로 주위가 온통 산림으로 뒤덮여 고립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중앙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 토비土匪나 국민당군의 탈영병, 그리고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의 피신처노릇을 하고 있었다. 마오를 따라온 군대는 전 부대를 통틀어 1,000명이 채 안됐다. 당시 그곳은 왕쭤王佐와 위안원차이 袁文才라는 토비두목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마오는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마오가 거기 있는 동안에는 ‘충실한 공산당원’이었으나, 나중에 마오가 떠나자 다시 토비로 돌아갔다가 그곳 농민들에 의해 살해됐다. 아무튼 마오는 비적두목 둘에게 연대장 지위를 주고 그 휘하 600명의 비적들이 마오의 군대에 가세하도록 했다. 이리해서 잠시 휴식과 보급을 위한 거점을 마련한 마오는 주변마을을 접수해 소비에트정권을 세우고 인근지역에도 차례로 당 위원회를 세워갔다. 결정적으로 이듬해 1928년 4월, 산터우 패배이후 이곳저곳 떠돌던 주더의 군대가 합류했다. 이 부대엔 정치위원 천이陳毅와 젊은 대대장 린뱌오林彪가 있었다. 5월4일에는 5·4운동을 기념하는 동시에 양군이 재편돼 중국노농홍군中國勞農紅軍 제4군의 성립을 축하했다. 군장軍長에는 주더가, 당 대표는 마오가 각각 취임함으로써, 총 병력 1만의 이른바 ‘주마오군朱毛軍’이 결성됐다.
국공합작초기만 해도 활기를 띠었던 공산당의 활동은 4·12쿠데타이후 이어지는 일련의 거듭된 탄압과 실패로 극도로 약화됐다. 1928년 2월25일 스탈린과 부하린, 샹중파向忠發, 리리싼 등이 기초한 코민테른테제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그간의 모든 시도가 ‘모험주의’였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준비’하는 걸 당의 임무로 보고, ‘폭동을 구상하는 것’에 단호히 반대하고 ‘대중의 획득과 조직화’에 전력을 기울여야한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아울러 농민의 게릴라운동은 프롤레타리아의 새로운 혁명적 고조와 서로 연결되는 한에서 전국적 폭동승리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소비에트화 된 농촌구역에서의 당의 주요임무는 토지혁명을 실행하고 홍군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해 ‘주마오군’의 징강산 할거를 일정부분 인정했다. 1928년은 침체했던 공산당세력이 일부 회복됐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하이루펑 소비에트정권 몰락 후 쉬샹쳰徐向前은 후베이와 허난, 안후이성 경계에 이르러 홍군 제1군을 조직했다. 이게 ‘어위완鄂豫皖근거지’다. 허룽은 후난서 홍군 제2군을 조직하고, 후난과 후베이 서쪽지역에서 ‘샹어시湘鄂西근거지’를 건설했다. 팡즈민方志敏이 이끄는 유격대는 푸졘과 저쟝, 안후이의 접경지역에서 ‘민저간閩浙贛근거지’를 마련했다. 또 덩샤오핑鄧小平은 광시에서 ‘좌우강左右江근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양상은 1930년 초에 이르면 마오와 주더의 쟝시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허난과 후베이로 점차 연결돼 전국적으로 13개성의 300여 현에 이르는 지역에 총병력 6만의 ‘홍군벨트’를 형성하게 됐다. 이는 실로 샘물이 스며나오 듯 자연발생적으로 진행된 것이며, 국민혁명이 시작된 이래 중국에 뿌려진 혁명의 씨앗이 그 싹을 틔운 것이라 할 수 있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회에선 코민테른 2월 테제를 근간으로 취츄바이의 노선이 ‘좌경맹동주의’였다고 비판하고 향후 전개될 소비에트혁명의 지도방침과 전략, 전술이 결정됐다. 취츄바이는 당 서기에서 물러나고 새롭게 샹중파가 임명됐다. 리리싼과 저우언라이, 펑파이 등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그 전해 11월에 추수폭동실패의 책임을 지고 해임됐던 마오쩌둥 역시 중앙위원의 지위를 회복했다. 명목상으로는 샹중파가 총서기에 임명됐지만, 실권은 선전부장인 리리싼이 쥐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2월에 결정된 코민테른의 이론에 따라 중국혁명에는 도시와 농촌이 불균형한 상태에 놓여있고, 나아가 각각의 성省들에서의 노동자 농민운동이 불균형하게 발전하고 있다는 현실인식하에, 이들 도시와 농촌, 그리고 각각의 성들 사이에 상호연합적이고 상호호응적인 활동을 준비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어디까지나 도시노동운동의 회복을 통해 도시와 농촌 간의 불평등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므로, 이후의 당 중앙의 관심도 도시노동운동의 회복을 위한 당 조직재건에 집중했다. 본래 리리싼은 애당초 농민운동에 거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견지했던 테제는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파업과 도시의 무장봉기로 한군데나 몇 개의 성에서 먼저 승리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 혁명의 열광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농촌은 손발이고 도시는 두뇌이자 심장이라는 비유를 끌어왔다. 손발은 잘라낸다고 죽지 않지만, 두뇌와 심장은 치명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그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 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마오쩌둥은 중국의 농민들이 가진 정치의식과 그에 근거한 거대한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1926년 5월 쟝졔스의 주도하에 열린 제2차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2차 회의에선 마오를 농민운동의 시찰요원으로 후난에 파견했다. 후난에서 마오는 리링醴陵과 창사, 샹탄 湘潭, 헝산衡山, 샹샹湘鄕 등 5개현의 농민조직과 정치상황을 점검하고 중앙위원회에 보낼 ‘후난 농민운동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마오는 14건의 큰 사건, 곧 농민협회의 조직과 지주들이 받은 정치적, 경제적 타격, 전통적인 봉건통치와 지주들 무장조직의 폐지, 지역 권력자와 가계, 종교 및 혼인의 권위타도, 사치와 폐습의 철저한 금지, 징세의 남용 및 각종수탈의 척결, 문화운동, 협동조합운동, 그리고 도로와 제방의 보수 등을 나열해, 가난한 농민들이 가진 투쟁정신을 높이 찬양했다. 심지어 마오는 “만일 1926~1927년의 ‘민주 혁명’에 10점을 준다면, ‘도시주민과 군대는 겨우 3점이고, 나머지 7점은 농촌혁명을 수행한 농민에게 주어야한다’”고까지 말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징강산에 코민테른의 ‘2월 테제’가 도착한 게 그해 11월이었고, 공산당 제6차 전국대회의 결의가 도착한 건 12월이었다. 뒤에 마오는 이 결의안에 대해 전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했지만, 사실상 이건 거짓말이었다. 이후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례들은 리리싼으로 대표되는 당 중앙과 마오 사이의 이견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더가 합류함에 따라 일시 세를 불린 ‘주마오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주변 지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이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분출되기도 했다. 주요한 것으로 향후 군사행동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는데, 당시 군 내에는 즉시 창사로 침공하자는 주장과 광둥성 경계의 남쪽으로 철수하자는 주장이 맞섰다. 마오는 전자는 모험주의로, 후자는 퇴각주의로 규정하면서, 당면한 과제는 토지분배와 소비에트 건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국민당군과의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통해 승리와 패배를 동시에 맛보았지만, 국민당군은 1929년 이후 군벌들과의 전쟁으로 잠시 공산당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접었다. 1928년 말에는 국민당군벌 내 허졘何健의 군대에서 봉기와 반란이 일어나 일단의 부대원들이 탈주해 징강산에 모여들자 이들을 규합해 제5군을 편성하고 펑더화이彭德懷가 군장이 됐다. 하지만 병력이 늘어나자 징강산의 상황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병사들에게 동복을 지급하지 못했고, 식량도 매우 부족했다. 결국 주마오군은 징강산을 떠나기로 했다.
1929년 1월14일 홍군은 마오와 주더의 지휘 하에 철수를 시작했고, 후위방어는 펑더화이가 맡았다. 그러나 다바이둬打白踱에서 참혹한 패배를 맛본 뒤 병력의 절반을 잃고 둥구東固 주변지역에 정착했다. 그동안 징강산은 국민당군에게 3면에서 공격을 받았다. 본래 비적 두목이었던 왕쭤는 자기부하들을 이끌고 산채에 머물며 비적으로 되돌아갔고, 펑더화이는 그해 4월에야 마오와 합류할 수 있었다. 이즈음 마오는 중앙위원회로부터 2월9일이라 적힌 전갈을 받았는데, 그의 군대를 더욱 작은 단위부대로 나눠 농촌지역에 분산시키라고 권유 받았다. 이에 대해 마오는 4월5일의 편지에서 “상황이 불리해질수록 군사력을 더 집중시킬 필요와 투쟁에서 지도자들이 더욱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고 답했다. 허나 리리싼은 마오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쟝시지역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도시프롤레타리아의 주도권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비정통적이고 비非마르크스주의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때 국민당군은 군벌군들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고,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전 세계는 혼란에 빠졌다. 실로 전후세계의 모순이 안팎으로 중첩된 형세였다. 이런 상황 속에 1929년 10월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새로운 혁명의 고조기’가 찾아왔다고 강조하면서, 새 지령을 몇 가지 하달했다. 이 무렵 리리싼은 6전대회 이래 장악한 당 중앙위원회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930년 리리싼은 코민테른의 테제에 대응해 ‘리리싼 노선’으로 알려진 “한 곳 또는 몇 개의 성에서의 우선적 승리”라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쟝졔스는 왕자오밍과 끝없이 갈등했고, 5월이 되자 본격적인 군벌들의 싸움(‘중원대전’)이 시작됐다. 리리싼과 당 중앙은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할 시점이 됐다고 판단했다(제2차 좌경노선).
1930년 6월 리리싼은 창사와 우한, 난창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다. 펑더화이가 이끄는 제3군은 7월27일 창사에 입성했다. 사전에 우한, 난징, 상하이 등의 대도시에서 무장폭동을 계획하고 있던 리리싼은 홍군의 창사 점령소식을 듣자마자 8월1일과 3일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총파업과 전국무장폭동의 최고지휘기관인 총행동위원회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당시 모스크바에 머물던 취츄바이와 저우는 리리싼이 미쳤다고 생각했으며, 코민테른은 무장폭동계획의 즉각 철회를 요구하면서 취츄바이와 저우를 급거 귀국시켰다.
군벌들 간에 벌어진 건곤일척의 대전이 한참 진행 중일 때 이 소식을 들은 쟝졔스는 즉각 창사 탈환을 위해 병력을 투입했고, 미국과 영국, 일본의 군함 역시 창사에 급파돼 성안에 함포사격을 가했다. 겨우 열흘을 버틴 뒤 홍군은 류양瀏陽 지역으로 패퇴했다. 8월1일 난창을 공격했던 마오와 주더의 제1군은 만 하루 공격 끝에 많은 병사를 잃고 공격중지를 결정했다. 위험에 빠진 창사를 지원하라는 당 중앙의 명령을 받고 우한을 향해 서쪽으로 후퇴하던 제1군은 펑더화이의 군대와 합류했는데, 펑더화이가 이들에게 보여준 건 거듭해서 창사를 공격하라는 리리싼의 지시였다. 두 번째 공격은 9월1일에 시작됐는데, 13일 동안의 전투 끝에 군대가 전멸위기에 처하자 마오는 동지들을 설득해 공격중지를 결정했다. 그들은 당 중앙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전투에서 철수해 근거지인 루이진瑞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주더는 자신과 면담했던 미국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당 중앙의 명령에 공공연하게 복종하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이 처절한 패배를 리리싼 개인의 실패로 규정했다. 사태를 수습하기위해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저우와 취츄바이는 9월24일 중국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중앙정치국 위신을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중앙정치국 노선과 코민테른 노선사이에는 별다른 차이는 없고, 중앙정치국이 정세판단과 타이밍설정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식으로 리리싼에 대한 비판을 막았다. 코민테른은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해 리리싼을 모스크바로 소환하고, 서한을 보내 리리싼 노선을 비판했다. 이를 바탕으로 천사오위陳紹禹(일명 왕밍王明), 친방셴秦邦憲 (일명 보구博古), 장원톈張聞天(일명 뤄푸洛甫) 등 모스크바 유학생그룹이 이듬해인 1931년 1월에 열린 ‘4중전회四中全會’를 장악하고, 리리싼과 취츄바이를 중앙정치국에서 해임하는 한편, 자기비판을 수행한 총서기 샹중파와 군사부장 저우는 그대로 유임시켰다. 그리고 당권은 새롭게 부상한 모스크바 유학생들, 이른바 ‘28인의 볼셰비키’가 장악했다. 이들 가운데 천사오위나 친방셴 등은 리리싼의 ‘모험주의’를 비판했지만, 그들 역시 농민이 아닌 도시프롤레타리아가 혁명운동을 주도해야한다고 주장했다(제3차 좌경노선).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공산당세력은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창사공격은 실패했지만, 어쨌든 국민당군은 군벌과 대전을 벌이느라 잠시 공산당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공산당세력은 여러 곳에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쟝졔스는 이들 ‘공비共匪’들을 토벌하기위한 작전에 착수했다. 1930년 겨울 쟝졔스는 후베이, 후난, 쟝시의 성장省長들을 소집해 공산당토벌 제1차 작전계획을 지시했다[제1차 포위공격(圍剿)] 국민당군은 10만에 달했고 홍군은 4만에 불과했지만, 토벌군은 오합지졸 지방군이었고, 홍군지역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다. 주더가 이끄는 홍군은 국민당군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깊숙이 끌어들여 격파했다[유군심입(誘軍深入)]. 쟝졔스는 다시 1931년 2월 허잉친何應欽을 총사령으로 삼아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해 제2차 포위공격을 단행했지만 이 역시 홍군들의 게릴라전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홍군은 “적이 진격하면 우리는 후퇴하고, 적이 점령하면 우리는 그 후방을 교란하고,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進我退, 敵據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迫)”는 전술로 국민당군을 괴롭혔고, ‘물속의 고기’인 인민들은 어느 경우에서나 홍군들을 지원했다. 이에 쟝졔스는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1931년 6월에 10만 명을 동원해 제3차 포위공격에 나섰다. 과연 이번에는 홍군이 고전을 면치 못해 세 차례 교전에서 모두 국민당군이 승리했다. 진격을 계속한 국민당군은 9월에 홍군의 중심도시 루이진瑞金을 압박했다. 이제 바야흐로 국민당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눈앞에 뒀는데, 뜻밖에도 9월18일 동북지역에서 만저우사변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토벌전을 미루고 난징으로 돌아간 틈을 타 1931년 11월7일 소비에트 지역에서 임시중앙정부가 수립됐다. 이는 본래 1930년 5월5일~10일간에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 소비에트구 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사항인데,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계속 미뤄진 것이었다. 대회에는 390명의 대표가 출석해, 정부의 정강과 헌법, 토지법, 경제정책 등을 채택하고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했다. 이렇게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는 11월27일 제1차 회의를 열고 주석에 마오쩌둥, 부주석에 샹잉項英과 장궈타오를 선출한 뒤 중앙집행위원회 아래에 중앙 행정기관인 인민위원회를 두고, 인민위원회 아래에 국가정치보위국을 설치했다. 이리해서 최초의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건 사실상 도시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기반을 빼앗긴 당 중앙이 상하이를 탈출해 근거지를 좀 더 안정된 곳으로 옮겨야할 필요에서 결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건 그때까지 독자적으로 고군분투하며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해왔던 마오쩌둥 등을 어느 날 갑자기 당 중앙이 지배하러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거꾸로 말하면 천사오위 등이 마오에게서 실권을 탈취한 것이기도 했다. 마오는 명목상 정부주석을 맡았고, 당 노선결정과 수행은 천사오위 등의 손아귀에 있었다. 실제로 마오의 노선은 ‘부농노선’, ‘우경화’, ‘협소한 경험론’ 등으로 폄하되고 비판받았다. 1931년 말 또는 1932년 초 무렵에 천사오위가 모스크바로 떠나고 친방셴秦邦憲이 그의 지위를 대신하자 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