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成三問 (1418 ~ 1456)] 「할 말 다 하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
【현대어 풀이】
수양산을 바라보며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숙제를 오히려 지조가 없다고 꾸짖으며 한탄하게 된다.
차라리 굶주려 죽을지언정 (주나라의) 고사리를 뜯어 먹어서야 되겠는가?
비록 산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풀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구의 땅에서 났단 말인가?
➡️ 세조의 단종 폐위에 적극적으로 항거한 작가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절의가(絶義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 숙제’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주제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출처: https://gugeobucks.tistory.com/264#google_vignette [세상국어사전:티스토리]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조선시대 문인이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성삼문은 조선시대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사육신은 세조 때 상왕 단종의 복위운동을 펼치다 죽은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박팽년·유응부’ 등 여섯 명의 충신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함께 거사를 계획했던 김질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죽음을 당했지만, 숙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었다.)
1454년(단종 2) 아버지 성승,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두려움이 큰 김질의 밀고에 의해 발각되어 군기감 앞에서 온몸이 찢기는 최대의 형벌인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 세종의 총애를 받아 ※사가독서하다
성삼문(成三問)은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으로 조선시대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성삼문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 [역사] 조선 시대,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
1426(세종 8)년에 시작하여, 세조 때 없앴다가 1493(성종 24)년에 다시 실시하였으나, 병자호란을 계기로 없앴다.
성삼문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으려 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는 말이 3번 반복되어 들려서 세 번의 물음을 뜻하는‘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의 증조할아버지는 개성유후(開城留后)를 지낸 성석용(成石瑢)이고,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한 성달생(成達生)이다.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고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성삼문은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세종 20)에는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성삼문은 타고난 능력이 좋고 문명이 높아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앞서 세종은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을 설치한 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휴가를 주어 독서 및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교육제도를 사가독서라 부르며,
1442년(세종 24) 신숙주, 성삼문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는데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한다.
성삼문은 명과 요동을 왕래하면서 음운을 연구하여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성삼문은 조선 전기 홍문관수찬, 예조참의, 예방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가 발각되어 처형되다.
1453년(단종 1) 성삼문이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던 세력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았다.
그리고 성삼문에게는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으나
성삼문은 단종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 성삼문은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단종 3)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임금의 자리를 내놓으라는 의미의 선위(禪位)를 강요할 때,
성삼문이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이 일로 인해 성삼문은 세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이후 성삼문은 아버지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팽년·이개·허조(許慥)·유응부(兪應孚) 등을 포섭하여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성삼문은 거사일 전날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무신과 병조정랑에게 세조와 신하들을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하고,
중신들은 무사들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金礩)에게는 그의 장인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거사일 아침,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가 일단 중지되었다.
거사는 세조가 나들이하는 때로 미루어졌으나, 함께 복위 운동을 모의한 김질과 그의 장인의 밀고로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성삼문은 세조를 ‘나으리(進賜)’라 부르며 모의 사실을 시인하였다.
또한 세조에게 받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크게 화가 난 세조는 무사에게 불에 달군 쇠로 성삼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안색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모진 고문을 받았음에도 성삼문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거나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신숙주에게는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사건에 연루된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성삼문은 그달 8일 아버지와 단종 복위 운동을 모의한 사람들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리고 3명의 동생과 아들들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임당해 혈손이 끊겼다.
◆ 대의를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절의의 상징
성삼문이 끔찍한 형벌을 당해 세상을 떠난 후,
성삼문의 집에는 실제로 세조가 준 녹이 창고에 그대로 쌓여 있었으며 살림살이는 하나도 없었다.
이처럼 성삼문은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절개를 지킨 대표적인 신하로 오늘날까지 공경받고 있다.
훗날 남효온(南孝溫)은 대의를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성삼문의 높은 절의를『추강집(秋江集)』의 육신전에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이 된 성삼문은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성삼문의 묘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육신 묘역에 있지만, 성삼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있다.
그리고 단종 때 순절을 지킨 자들과 함께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과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홍주 노은서원, 연산 충곡서원 등에 함께 배향되었다.
인두로 지졌다.
그래도 세조에게 전하라 부르지 않았다.
왜 이런 짓을 했느냐?
나리, 법전 어디에 인두로 사람을 지지는 형벌이 있소.
나리였다. 전하가 아니었다.
내 손자가 어리다. 잘 부탁한다.
저승에 가면 단종대왕을 뵐 수 있겠구나!
그는 약속을 지킨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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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成三問 (1418 ~ 1456)】「할 말 다 하였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조선시대 문인이다.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뽑혀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성삼문은 조선시대 충절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1454년(단종 2) 아버지 성승, 박팽년, 하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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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삼문(1418~1456)
어제 저녁, 한 송이 꽃이 떨어 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꽃이 피어서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 내 너를 대하니 기분좋게 한잔 하리라.
성삼문(1418~1456)이 좋아한 백일홍, 배롱나무꽃,
"단종"(조선시대 제6대왕 16세)이 청령포로 귀양 가고 난 뒤에,
배롱나무 꽃을 바라 보며 술을 들면서"단종"을 그리워 하는 마음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성삼문"은 고려말 "최영 장군"이 출생한 충청도 홍주 지금의 홍성군 흥북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삼문"이라고 지은 이름은 성삼문 어머니가, 삼문을 낳았을때
하늘에서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세번의 소리가 들려서 삼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17세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했으니, 천재적인 재능(才能)을 타고 났다.
그뒤,식년문과(式年文課) 에 급제 하고, 문과중시(文科重試) 에 장원급제 하면서 벼슬길에 오른다.
수양대군의 조카 "단종"을 귀양 보내고 용상에 올랐으니,
그 용상의 자리를 본래 주인에게 찾아 주고자 계획한 일이 "김질"의 배반으로 무산되고,
아버지"성승"과,세 동생 네 아들과 서자(庶子)모두 참형(목을 짜름)을 당했다.
"성삼문"은 사지가 갈기 갈기 찢겨 지는
"거열형"(머리와 양쪽 팔과 다리에 묶인 밧줄을 다섯마리의 소나 말이
각 다른 방향으로 당겨 찢어 죽임)"으로 38세에 생을 마감했고, 그의 일족(一族)중의 남자는 모두 죽였다.
함게 죽은 사육신(死六臣)중에
"박팽년" 후손이 살아 남아, 숙종(조선19대) 때 신원이 회복 되어 사육신의 제사를 지금도 모신다고 한다.
세종 대왕이 아들 "문종"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생각에 금지옥엽(金枝玉葉) 어린손자"단종"을 걱정하면서
집현전 엘리트(elite)학사들에게, "단종"을 도우라고 부탁했는데
그들이 육신이 처참하게 망가져 죽으면서 까지 세종대왕과 약속을 지킨 사육신(死六臣),
☞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이개,
☞ 유성원,
☞ 유응부,
그 이름 만고(萬古)의 충신(忠臣)으로 천추 (千秋)에 이어가고 있다.
"성삼문"은 형장(刑場) 으로 가면서 절명시(切命詩)한수를 남긴다.
"둥~둥~둥, 울리는 북(鼓)소리가
내 목숨 재촉 하는구나.
머리 돌려 바라보니,
서산으로 해가 지는데 황천길(黃泉道)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누구집에 묵어 갈까"
"성삼문"이 처형장 (處刑場)으로 끌려 갈때 어린딸 "호옥"이 수레를 따라 오면서 울자,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너는 딸이니까 살것이다"라며 달래고는,
집안의 종(奴)이 울면서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 마신후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고 한다.
앞선 시(詩)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시(詩)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樂樂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 할제,
독야청청(獨夜靑靑)하리라]
죽음을 앞두고 꺾이지 않은 절의(節義)가 듣는 이의 마음을 절로 숙연(肅然)하게 한다.
이 시(詩)는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역의 "성삼문" 각비(刻碑) 에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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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權力)이 도대체 뭔지?
동물의 영장(靈長) 이라는,인간 사회 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일념(一念)으로
막가파와 무엇하나 다를바 없는, 정치인(政治人)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정의로운 사명감은 팽겨치듯 하고,
오로지, 권력 쟁취 야욕(野慾) 에만 몰두(沒頭)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나라의 현실 이다.
"정말 안타까움이 내 좁은 뇌리(腦裏)를, 스친다.
네델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말했다.
"내일에 세상이 멸망 할지라도 한 그루 사과 나무를 심어라"고 했다.
많은 위안(慰安)이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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