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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관 30주년을 맞이하면서 - 한상천

작성자문경수|작성시간26.06.06|조회수60 목록 댓글 1
임관 30주년을 맞이하면서 - 한상천  


1.  회  고

오늘 임관 3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선 저 혼자만이 아니라, 동기생 모두가 30년전의 꿈많은 순수한 청년시절에 함께 동고동락하며 갖가지의 희비애락의 추억들과, 그리고 전.후방 임지에서 또 사회 각계 각층에서 부지런히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생각하면, 많은 감회가 교차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60년대말, 70년대초, 이 때에는 빈번한 무장공비의 침투 등으로 분단된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태였으며, 국가안보를 위한 국군의 전력증강과 군의 전투력 향상이 그 어느때 보다도 절실히 요청되었던 때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육군3사관학교는 전군 최강의 초급장교를 육성 배출한다는 국가적 시책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1년여의 교육기간으로 전군 최강의 초급장교를 육성 배출하기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안으로, 여기에는 특수한 교육기법과 훈련시설 그리고 수반되는 제반여건이 동시에 충족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라 하겠습니다.
때문에 초대 교장이신 정봉욱 장군님을 핵심으로, 학교 창설을 위해 준비한 당시의 기간장병들은, 투철한 사명감과 정신 무장은 물론,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저희들이 입교후, 임관하기까지 불철주야 함께 뛰면서, 계속되는 위험한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도들에게 부여된 훈련과정은 조금의 틈도없는 매 과정마다 적자생존의 원칙하에 기필코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강인하고 혹독한 훈련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임관후 전.후방 임지에서 장교단의 일원으로 근무를 함에 있어, 별 어려움없이 생활하였는가 하면, 특히 상관으로부터는 총애를, 부하로부터는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그리고 동료장교들과는 헌신적 협력의 자세로, 여타 장교의 많은 귀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현역에서 물러나 각계각층에서 제2의 인생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언제 어느때든 국가와 민족의 부름앞에는 하시라도 이 한목숨 바쳐, 불사할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저희들에게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남아있는 현역 동기생들에게는 학교의 명예와 자라나는 후배들의 귀감을 위해서라도 더더욱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영광이 있었으면 하고, 또 후배들에게는 선배들이 못다한 일들 그리고 잘못된 모습은 본인과 학교발전의 계기로 승화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타 장교양성기관을 비롯 육군3사관학교에도 국민의 사랑속에 각별한 애정으로 끊임없는 성원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2. 몇가지 생각나는 추억들

우선 몇가지 생각나는 이야기를 함에 앞서, 저가 체험한 이 내용이, 극히 제한된 일부분에 불과함을 먼저 이해하여 주었으면 합니다.
이것은 짧은 1년여의 학교생활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학교생활 모두를 제가 알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백명의 동기생들이 제각기 체험한 갖가지의 사연들을 저가 대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개인의 체험이긴 하나, 동기생 모두가 이와 유사한 사연과 체험이 있었음을 생각하면서, 당시 생도들의 생활상황 전체를 조명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총걸이 찾기"에 얽힌 사연
하루의 일과중 생도들의 훈련과정 시간표는 한치의 숨돌린 겨를도 없이 계속되고 있는 어느날 하루였습니다.
사실 하루의 고된일과를 마친 생도들에게, 밤 10시 정각의 취침나팔 소리는 마치 어머님의 자장가처럼 포근하며 편안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안한 밤도, 호랑이 같은 구대장이 그냥 편안하게 지내도록 놓아 두지는 않았답니다.
그날 밤 역시, 깊은 꿈나라로 빠져 있는 생도들에게 구대장은 "취침상태의 모습이 생도답지 않다"는 이유로 "비상훈련"을 실시 하였습니다.
갖가지의 "얼차려"와 함께 1시간여의 시간이 지나서야 "명언" 같은 훈시를 끝으로, 막 해산하려 할 때, 최종적으로 개인의 복장과 휴대장비를 점검토록 하였습니다.
잠시후 구대장은 "이상이 있는 생도는 보고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MI 소총의 총걸이가 없기에 양심 바르게 자진신고를 하였습니다. 신고를 받은 구대장은 나 개인에 대한 질책보다는 "생명과 같은 병기의 부품을 필히 찾아야 한다"면서 전 중대원을 다시, 깜깜한 밤, 조명도 없는 광활한 연병장, 이곳저곳을 "총걸이 찾자"라는 구호와 함께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의 쪼그려뛰기, 오리걸음, 낮은포복 ,선착순달리기, 팔굽혀펴기 등으로 시간이 흐르고,어느덧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익일날 생도들의 정신상태는 비몽사몽간 속에 하루를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일로 인해서 동기생들의 미움을 사지 않을까 염려하였지만, 어느 누구하나도 저에게 원망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분실물에 대한 벌점부과로 퇴교의 대상이 될까봐 염려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답니다.
정말이지 저는 그 때, 부모 형제 이상의 뜨거운 전우애를 실감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때 저 때문에 꿀맛같은 단잠을 맛보지 못한 동기생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각개전투 훈련장에서의 '혼비백산'
저희 생도 10중대는 차후 공병과 통신병과의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서 별도로 편성된 중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도 중대들 보다도, 모든 훈련과정이 패키지한 교육으로 학교의 교과 전과정을 조기에 받은 후, 육군 공병학교와 통신학교등 특수학교에서 전문 병과교육을 추가로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학교의 모든 훈련장은 저희 생도10중대가 항상 먼저 이용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고충 또한 많았던게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훈련의 진행상태, 적합성등 제반여건이 학교의 교육목표와 부합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학교장님과 기간장병 모두, 높은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야외 각개전투 교육시간이었습니다.
대위급 교관으로부터 50분간의 강의 교육을 받고 10분간 휴식이란 구호복창과 함께 막 해산하려 하는데 어디선가 호랑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깐"하는 소리에 뒤돌아 보니, 교장님께서 생도들 앞으로 걸어 나오시고 계셨습니다.
교장님께서는 "교관, 저 뒤편에 있는 생도들과 함께 앉아 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후 교장님 자신이 보인느냐고 물었습니다.
교관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실대로 대답했고, 이어서 중령급 전술학처장에게도 같은 지시를 하였습니다.
역시 전술학처장도 같은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교장님께서는 학처장과 교관을 야단치시며 교육여건이 미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이를 확인도 않고 교육을 하였다는 질책을, 매우 심하게 하였습니다.
순간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하고 조용했습니다.
이윽고 생도들에게도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교육여건속에서, 생도들이 멍하게 교육을 받고 있었다는 질책이었습니다. 이어서 인접 고지군에 대한 선착순 달리기의 비상훈련이 실시되었습니다.
모두들 처음에는 비호같이 날으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교장님은 선착순으로 돌아온 생도들에게, 계속 반복되는 비상훈련을 시켰습니다. 이렇게 수회의 선착순 달리기를 실시한 생도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또 눈동자의 초점도 잃었습니다.
급기야 생도들은 누구하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중대원 스스로 오와열이 정돈된 대열을 갖추어서 단체로 교장님앞에 질서정연하게 도착함으로써 비로소 비상훈련이 종료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얼차려 속에서도 교장남께서는 저희에게 무언의 가르침으로 협동심과 단결심, 그리고 강인한 체력을 알게 모르게 심어 주신, 깊은 지혜가 있었음을, 뒤늦게 저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주간훈련을 마치고 이어서 같은날 저녁, 야간 각개전투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장님은 모든 교과과정을 반드시 참관하시기 때문에 틀림없이 야간훈련에도 오실 것으로 예견한 생도들은, 그 어느때 보다도, 교리와 원칙에 입각한, 만반의 야간 각개전투 훈련 준비로 교육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밤이 깊어 가자 저 멀리서 장군의 짚차 전조등인 황금색 불빛이 보이면서 교장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몇몇 생도의 야간 각개전투 복장을 점검한 교장님은 또한번 무척 실망한듯한 표정이었습니다.
특히나 야간에는 각 가지의 위장과 함께 나풀거려서 인적의 소리를 낼수 있는 바지와 소매자락은 모두 끈으로 단단히 동여메어야 하는 야간 각개전투 복장이 실전적 훈련준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야전에서 그것도 야간전투 상황하에 언제 '끈' 같은 양호한 준비물을 사전에 획득할 수 있기에 끈이나 고무줄 등을 이용했는냐는 것이었습니다.
야전에서 획득 가능한 소재로 복장을 다시 갖추어서 실전적 훈련을 하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도들은 시정한 복장으로 야간 각재전투 훈련을 마치고 새벽동이 틀 무렵 주위를 돌아보니, 아카시아 나무껍질이 홀랑 벗겨져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생도들 모두가 아카시아 줄기를 벗겨서 끈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물론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아카시아 나무에게는 무척 미안한 행위였지만, 적과 싸워 기필코 이겨야만 하는 전투적 상황하에서 불가피한 사안으로, 당시 실전적 전술기법을 암시해준 교장님의 탁월한 용병술에 생도들은 아직도 감탄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 도하훈련장에서의 동기생 잃음

도하훈련은 공격시 적진으로 전진함에 있어서 장애물인 하천이나 강을 전술적 행동으로 건너가는 일련의 도하작전 훈련입니다.
생도들은 지상에서, 제반이론과 다양한 전투기술을 숙달한 후, 유사한 지형인 하폭이 100m가량되는 수심깊은 곳에서 현지 실습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두들 제각기 자신의 완전군장 장비를 이용하여 도하장비를 구축한 후에, 강폭을 도하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교장님 또한 강상 중앙지점에서 보트를 타고 생도들의 도하 광경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계셨고 생도들은, 모두, 배운 전술적 기량을 발휘하면서 강을 건너 갔습니다.
그래서인지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생도들에게, 교장님께서 보트로 최초 출발한 지역으로 다시 태워주는 배려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보트에는 10명 1개조로 승선하였고, 수차례를 왕복하던중 다급한 목소리가 무전으로 들려 왔습니다. 내용인즉 출발할 때 분명 10명이 승선하였느냐는 확인이었습니다.
언제나 교장님께서는 저희 생도들을 보다 강인한 장교로 만들고자 기회만 있으면 실전적 고난도 훈련을 알게 모르게 적용시켰던 것으로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도 교장님께서는 완전군장 복장으로 보트에 승선한 생도들에게, 강변도착 20여m 전 지점에서 모두들 뛰어내리도록 한 후, 수단 껏 남은거리를 극복해 가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때 저희는 그 과정에서 한 동기생을 잃고 말았습니다.
순간 생도들의 분위기는 침울했고, 이를 지켜본 교장님도, 기간장병도 모두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모두들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꽃다운 어린나이에 생사고락을 갈이 했던 전우, 여태껏 온갖 고난과 역경을 다 극복하고 이제 얼마남지 않은 임관의 그날을 남겨두고 여기에서 그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한 전우,
정말 믿기기 않는 현실 속에서, 하늘도 땅도 슬퍼한 동기생의 비운을 생도10중대에게는 그날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 3.5" RKT 사격장에서 "아찔한 순간"

3.5" RKT포는 적전차를 파괴하는 대전차 화기입니다.
지금은 도태되고 없지만, 저희가 교육받고 임지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대전차 무기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화력의 위력도 포탄인 것 만큼 대단했습니다.
전차를 파괴하는 무기이니까 수십명의 인명을 동시에 살상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였습니다.
이 화기는 조준경이 포강옆에 고정나사로 조정해서 부착토록 되어 있었는데,
사격전 반드시 조준경을 통한 조준선 정열 그리고 포강과 목표물을 일치시키는 포강조준을 실시 한 후에 사격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모두 이상없이 마친 저는, 실제 포탄을 장전하여 발사 스위치를 눌러 격발하는 순간, 포탄은 제가 조준한 목표선이 아닌, 약 35°오른쪽 방향으로 비상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교관도, 생도들 모두 놀랐습니다.
천만 다행하게도 포탄 낙하지역에는, 아무런 피해 대상물이 없었던 것이였습니다.
정말 대형사고의 일보직전의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원인인즉 조준할 때 조준경의 나사가 유동이 있어 밀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조준경을 통한 조준선과 포강의 방향이 일치하지 않아서 야기된 일이었습니다.
이는, 장차 장교가 되어 이러한 경미한 실수까지 사전에 확인,감독해야 할 사관생도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벌점과 함께 큰 댓가를 치루기는 하였지만 훗날 야전에서의 실병지휘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잊지 못합니다.


 
도피/탈출 훈련에서 "건빵"으로 인한 고통

도피/탈출 훈련은 전투중 적군에 포로가 되었을 경우, 생존해 올 수 있는 제반 전투기량과 강인한 인내력을 쌓게 하는 훈련과정입니다.
3일간 주.야 연속상황으로 전개되는 이 훈련은 규정된 군장물외에는 일체의 개인 소지품도 가질 수 없으며, 식사마저도 제공하지 않은 극기의 생존 훈련이라 하겠습니다.
5명 1개조로 편성하여 군사지도와 나침반만으로 주간에는 약30여km, 야간에는 약20여km의 목표지점을 주고, 이를 찾아가는 훈련으로 보통 성인이 양호한 도로를 따라서 부지런히 걸어도 약7∼8시간이 소요되는 강행군의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전술훈련의 상황이기 때문에 길목요소, 요소에 적군(대항군)을 배치하여 놓고 생도들이 목표지점에 쉽게 도달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체포/구금까지 하면서 마치 영화에서의 한 장면처럼 갖은 고초를 겪게 되기도 하는 훈련입니다.
각조는 나름대로 독특한 전술과 기량을 갖고 전진하게 되며,
저희조 역시 최초 출발시부터, 전진하려는 목표방향과 상이한 90°오른쪽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측방으로 일정한 거리를 이동한 후에, 다시 목표방향으로 전진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주간상황이였기 때문에 양호한 도로망은 이용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산으로 야지로 계곡으로, 때로는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상당한 거리를 전진해 갔습니다. 그때 누군가 제의를 했습니다. 용돈도 소지하지 않게 되어 있었지만, 누군가 갖고 있는 여분의 돈으로 인근 가게에서 건빵을 사서 먹자는 것이였습니다.
당시의 건빵은 지금과 같이 질 좋은 양호한 건빵도 아니고 보리겨로 만든 꺼칠꺼칠한 건빵이었습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당시의 꿀맛같은 느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껏 양을 채운 저희조 일행은 계속 물을 청하게 되었고 든든한 포만감으로 목적지까지 특별한 대항군의 저항없이 주어진 시간대 안에 무사히 도착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목적지에 도착한 저희조 모두가,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배, 게다가 잦은 용변, 설사까지 하는 등 그 휴유증으로 인한 고통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배고픈 탓에 부풀어 오를 건빵의 양을 의식하지 못한 철부지 같은 우둔한 행위였기에 지금도 그 때의 괴로움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저녁시간이 되면서, 주간처럼 야간 작전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역시 야간작전에도 저희조 일행은 주간과 같은 작전 계략으로 전진하기로 하였습니다.
작전개시 신호와 함께 인근주변 '은익지점'으로 피신해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후 좀 늦게 출발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사방에서 전쟁터를 연상케하는 요란한 폭음소리, 그리고 소화기의 공포탄 소리를 들어면서, 저희조는 약속한 출발시간까지 약간의 수면으로 피로를 풀기로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럴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야간에는 목표까지의 거리가 주간처럼 그렇게 원거리가 아니였고, 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표에 이르는 양호한 국도도 이용할 수 있기에, 4∼5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조는 밤1시경에 출발하였습니다. 예상했던대로 작전 초기에, 출발선 가까이에서 밀집,방어 하던 대항군은 목표지점 가까이로 이동해서, 생도들의 전진을 방해하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다소 늦게 출발한 저희조에게는 양호한 도로망을 이용하면서, 쉽게 목표방향으로 전진해 갈 수 있었습니다.
얼마쯤 갔을 때였습니다. 현위치를 확인해 보니 목표로부터 약 1.5km쯤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있었고 생도들과 대항군의 주고 받는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저희조는 모두들 가로수 하나하나를 은폐물로 삼고 몸을 숨기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생도들 2∼3명이 우리쪽을 향해 탈출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조 역시 덩달아 놀라서, 함께 사방팔방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혼자가 되었고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지역은 생소하고 캄캄한 밤중에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습니다. 지금까지 전진하면서 이용했던 양호한 도로망도 이용할 수도 없고, 부득이 어림으로 도로의 방향과 수목의 잎 등을 생각하면서, 목표방향을 향해 야지로 하천으로 전진해 가던중,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기생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모인 저희는 3명이 되었고 다행히도 지도가 있었습니다.
다시 목표지점과 현위치를 확인한 저희는 목표방향과는 상이한 측방으로 이동하면서 얼마쯤 왔을 때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대항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포로가 되고 다른 동기생들은 무사히 피신해 갔습니다.
양손이 묶이고 감금된 상태에서 탈출의 기회가 엿보이자, 순간 박차고 탈출을 하려는데 무언가 걸렸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감금장에 끌려 들어오면서 주변에 철조망을 쳐 놓은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허벅지와 바지는 찢어지고 치료 받을 겨를도 없이 연속되는 심문과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생도들의 목표지역 도착 종료시간이 다가오고, 새벽녘의 동이 터 오자, 적군은 나의 진술서를 끝으로 풀어 주었습니다.
피로 얼룩지고 찢어진 바지, 초췌한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저를 보고, 한 농부는 측은한 마음에서 "여보게 치료를 좀 받게나"하는 소리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전쟁터에서 패전의 결과가 얼마나 쓰라린 고통인가를 되새기면서 굳은 결심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하니,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고, 그나마 살아서 돌아오는 저에게 무한한 격려와 용기를 주었으며, 그때 그 상처가 지금은 흉터가 되어 저를 늘 생각나게 한답니다.
그리고 우린, 다시는 포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 집단권투장에서의 "쓰라림"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무장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기회가 있으면 생도들은 무장구보, 참호전투, 집단권투 등 다양한 전투체육 행사를 갖습니다.
유격훈련 과정도 저희 생도10중대가 동기생들중 가장 먼저 수료했다는 자긍심과 어떠한 극한 조건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동안 특별히 단련한 체력으로, 타 생도중대와 집단권투를 한다면, 능히 싸워 이길 것으로 생각하고 도전장을 냈던 적이 있습니다.
좁은 권투장 구역내에서, 양팀 모두 60명이 대각선으로 정열해서, 상호 인사를 나눈후 시작의 링 소리와 함게 난타전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순간 저의 머리 뒷통수가 멍하더니 연속 쏟아지는 펀치에 호흡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쓰러졌고 우리편 생도들 역시 우후죽순처럼 '다운'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과는 참패였고 눈이 부어 오른 생도, 입이 찢어진 생도, 코피터진 생도 등 얼굴이 많이 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운동경기이기에 그 정도지, 전쟁터에서 적군과의 싸움이였더라면 패배는 오직 죽음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 좋은 기회 였으며, 당시 체력건장한 상대편 생도중대에 무례한 도전장을 냈던 것이 우스울 뿐입니다.
 
● 각종 행사와 훈련의 연속

천리길도 멀다 않고 단숨에 달려갈 수 있는 인간의 초능력을 함양하기 위한 생도들의 일상생활은 무장구보에서 시작해서 무장구보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무장구보는 생활화 되어 있었습니다.
특히나 오와열이 정돈된 대열이 흩어러지지 않는 상태로 10km의 거리를 45분대에 주파해야 하는 무장구보는 극한중 극한 훈련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무장구보의 코스를 어디 특정한 곳으로 지정해 둔곳은 없었지만, 매번 실시할 때면 마지막 10km지점 가까이 무려 500m 이상의 거리는, 필히 오르막 경사지였기 때문에, 마지막 이지점을 극복하는데는 여간 큰 고통이 아니였습니다. 많은 생도들이 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오와 열이 흩으러 지는 등 승패가 뒤 바뀌는 쓰라린 맛을 보게 되었답니다. 생도들은 당시 학교당국의 이러한 무장구보 코스 선정에 징크스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답니다.

약 3개월 기간의 전술훈련과정의 교육이 시작되면
매주 학교를 떠나 인근 고지군이나 야지를 일주일 내내 헤매게 됩니다.
즉 월요일 오전 8시에 학교를 출발하면 토요일 오후 3∼4경에나 귀대하게 됩니다.
일주일동안 생도들은 주.야 연속으로 산으로, 야지로, 계곡으로 그 어디론가 걷고 뛰고, 물속을 가로지르며 공격과 방어전술 훈련을 실시합니다. 연속되는 전술상황하에서 전투화를 벗을 겨를도 없거니와 벗을 수도 없기에 발바닥은 부풀었다, 말렸다 하는 동안, 무려 1cm이상의 무디한 층이 하나 더 생겨 곰 발바닥으로 변하고, 부족한 수면으로, 10분간 휴식을 이용, 졸다가 헬멧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의외의 고생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본대가 출발하는지도 몰라 왕왕 낙오되는 생도들도 많았습니다.
이렇듯 1주간의 고된 전술훈련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면 군악대가 마치 개선장군을 환영하듯 힘찬 연주소리에 얼마전 기진맥진한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풍도 당당한 모습으로 변모했던 당시의 추억이 아련합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17시이면 밥 먹듯이 빠지지 않았던 하기식과 열병 및 분열행사.
야생마 처럼 이나무, 저나무로 옮겨 다녔던 타잔훈련,
6·25 전쟁 당시 북괴군 1개대대 병력이, 지형의 악조건으로 패전한 험준한 지역으로, 그 유명한 화산 분지에서의 유격장 시설들,
또 전쟁터에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방호진지 즉 "참호"구축은 산의 7,8부 능선상에 위치를 선정하라는 등의 실전적 전술훈련의 식견은
오늘날 사회인이 된 지금에도 몸에 베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3.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분

● 저희 1기생 모두가 보고싶고 만나고 싶어하는 분은 초대 학교장 정봉욱 장군님

▲ 강인한 성품속의 자상함
교장님께서는 당시 학교를 창설하여 학교의 장이된다는 개인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 더 큰 뜻은
국가의 소명을 완수하고 이 나라, 이 민족의 시대적 요청인 국방의 주역, 즉 강인한 초급장교를, 혼신의 노력으로 꼭 성취해 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외 훈련장을 비롯 각종 훈련시설을 직접 답습하면서 점검하였는가 하면, 생도10중대 뿐만 아니라 재직간 각기별 생도들의 매 교육과정마다 참관하시는 등, 그 열정은 대단하셨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생도들에게 제공되는 식사까지도, 요리과정에서부터 맛까지 일일이 챙겨 보시고, 국거리인 감자는 반드시 껍질을 벗겨서 조리케 하는 등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70년대는, 국가적 어려운 경제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항상 영양가 높은 식사 제공으로 정말 강인한 훈련도 능히 극복할 수 있었음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마지막 "명강의"
임관전 교장님께서는 곧 전.후방 임지로 떠나 보내야 하는 저희 1기생들에게 하루종일 8시간 내내 꼿꼿이 선자세로 "장교의 5도"란 주제로 명강의를 하시면서 당부하고 또 당부하는 등 자상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지·신·인·용·의 - 이 5가지 요소 였습니다,
그러니까 장교는 우선 많이 알아야 하고, 또 믿음이 있어야 하며, 인자하면서도 불굴의 용기와 정의로움을 항상 간직하여야 한다는 것이였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교장님의 마지막 당부를 생각하면,아직도
못다한 실천으로, 교장님을 뵈올 용기마저 없어진답니다.
그리고 잊지않고 첨언한 3가지 금기사항은 주·색·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면서, 저희들을 임지로 떠나 보냈던 것입니다.
냉엄하면서도 자상하신 어버이의 따뜻한 교장님의 정감을 저희는 아직도 느끼고 있으며 이를, 늘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지주
유격훈련이 끝나는 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생도들은 학교로 복귀하려고 어느 하천의 징검다리를 건널 때였습니다.
언제나 교장님께서 불현 듯 나타났듯이
이번에도 생도들의 훈련철수 과정 역시 전술훈련의 연장으로 보시면서 징검다리 한곳에서, "또 점검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교장님 곁을 조심스럽게 건너는데,
빨갛게 잘 익은 주먹만한 사과 하나씩을 건네주면서 "수고들 했다"는 말씀과 함께 저희 생도10중대에 이어서 곧 유격훈련을 받기 위해, 그날 유격장에 도착한 7중대 생도들에게는 이야기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교장님의 자상하시고 정이 많으심은, 도하훈련장에서 동기생을 잃었을 때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진한 부모님 같은 큰 사랑을 잊을 수 없답니다.
정말 저희가 보는 교장님은 용장, 지장, 덕장 모두를 겸비하고 계신 분으로서 저희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생각합니다.
 
●생도대 대대장, 중(소)대장 그리고 모든 기간장병들
당시의 학교 기간장병 모두는 저희들 보다도 몇배의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한 과정, 한 과정 지나가는 훈련이었지만 하물며 이를 준비하고 계속되는 훈련과정을 반복, 되풀이 해야하는 기간장병들은 그 위험과 고달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저희가 있기까지, 또 학교가 날로 발전해 갈수 있도록 당시에 반석같은 기반을 다져 놓으신 그분들께 진심으로 모든 영광과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을 보고싶어 합니다.

                                                            한상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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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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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도태수 | 작성시간 26.06.07 永川벌 ~,
    - ‘우리/3士官 !’,
    ☞ “1期生 同期들 追憶이 바리바리 담겨진 !!”,

    한상천 !,
    - ‘同期生의 . . ’,
    ☞ “30周年을 맞아 !!”,

    <任官 懷古談> . . ,
    - ‘이 ~’,
    ☞ “너무 아기자기하게 다가옵니다 !!”,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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