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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목포진 (만호진)지도 확대 등 자세한 정보

작성자천사의섬|작성시간10.09.27|조회수353 목록 댓글 0

 

목포의 유래와 역사

목포시 연혁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1397(태조 6년) : 목포진 설치
1439년(세종 21년) : 목포에 있는 수군처치영을 해남 문내면으로 옮기고 목포만호진 설치
1502년(연산 8년) : 목포진성 축성
1647년(인조 25년) : 고하진을 땅고지로 옮긴 후에 당관창 됨
1897년 10월 01일
(광무1년)
: 목포항 개항
1910년 10월 01일 : 무안부를 목포부로 개칭하고 19면을 관할
1914년 01월 11일 : 호남선 철도 개통
1914년 04월 01일 : 무안군 부내면만 목포부로 편입
1930-60년대 1932년 10월 01일 : 무안군 이로면, 죽교리, 산정리, 용당리 등을 목포로 편입
1948년 04월 01일 : 정을 동으로 개칭
1949년 08월 15일 : 목포부를 목포시로 개칭
1963년 01월 01일 : 무안군 상리, 용당리, 달리,율도등을 목포시로 편입
1980년대 1987년 01일 01일 :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대양리 등을 목포시로 편입
1990년대 1994년 07월 06일 : 이로동을 용해 상동으로 분동
1997년 01월 01일 : 행정동 분합(29개동 => 26개동)
1998년 10월 05일 : 서해안고속도로 개통
1999년 09월 13일 : 신도심2단계 매립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면적 증가
  (46.02㎢ ⇒ 46.91㎢)
2000년대 2000년 03월 20일 : 동사무소 기능을 주민자치센터로 운영(26개동)
2001년 10월 18일 : 북항동 신안비치아파트 뒤편 공유수면 매립으로 면적증가
  (46.91㎢ ⇒ 47.08㎢)
2002년 03월 10일 : 소삼학도 호안축조공사 및 충무동 신항매립으로 면적증가
  (47.08㎢ ⇒ 47.92㎢)
2004년 04월 01일 : 고속열차(KTX) 개통(1일 8회 운행)
2006년 08월 07일

: 행정동 합병 축소(26개동 ⇒ 22개동)

 

 

 

 목포시유래

목포의 어원은 "길목이 좋은 포구" 라는 것에서 "목포"라고 불렸습니다...

일찍이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던 곳이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군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답니다...

그러니깐 이때까지는 목포가 독립적이지 않았구요...

그래서 지금의 무안군과 통합된 상태였다고 보면 될꺼예요...^^

 

목포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생겨났는데...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때 목포의 고하도에 수군기지를 설치한 적이 있어서...

그 전설에 관한 내용도 유명합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1897년, 우리나라 4번째로 개항을 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을 전담하게 되었고..

일제시대에는 꾀 손꼽히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죠...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일본과 중국등과으 무역이 끊기고...

전남의 수위도시에서 2등도시로 전락하게 됩니다...

또한 한국 군사정권때는 전라도라 하여 그 눈 밖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일제시대 당시의 인구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비운의 도시이기도 하죠...

 

21세기 들어서는 목포의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는데요...

J프로젝트나 서남해안 발전사업 등으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추세입니다...

또한 전남도청이 목포 부근으로 이전됨에 따라 더욱 기대가 높아지고 있구요...

 

목포의 유명한 유적, 유물로는 고하도의 강강술래, 삼학도, 갓바위 등이 있구요...

'목포의 눈물' 을 부른 가수 이난영과...유달산...

또한 영화 '사랑의 묵시록'의 배경이 되었던 공생원...

 

특히 학교나 교회들은 일제시대에 세워진 것들이 많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역사적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문헌에 기록된 목포 유래

 

역사문헌을 보면 '태조6년 (1397년) 목포진을 설치하고, 세종 14년 (1432년) 함평에 있던 전라수영을 목포로 옮겼으며 세종21년(1439년)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다' 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으로 목포가 서남해역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목포'라는 이름이 고정된 것은 이들 기록에서부터 확립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포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넘은 오래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도해와 영산강 길목을 지키는 목포진(木浦鎭)

목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을 말합니다. 이 곳을 만호라는 무관이 통솔햇기 때문에 만호진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 동네의 이름이 만호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목포는 나라의 세금(쌀)을 거두어들이는 길목(조운로)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곳을 침략하는 왜적을 경계하기 위한 목포진의 역할을 매우 중요했습니다. 목포진의 설치가 명령된 것은

1439(세종21) 때이고, 성곽은 면모가 갖춰진 것은 1502년(연산군 8)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목포진의 성곽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만호진 언덕이 이곳이 목포역사의 출발이자, 목포 답사 1번지임을 상징하는 목포진비만 홀로 외롭게 서있습니다. 목포진지(木浦鎭址)는 1986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목포의 보물산    유    달    산

 유달산은 해발228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전남의 소금강이라 불릴만큼 다양한 형태의 기암괴석이 곳곳에 펼쳐져 있습니다.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목포의 명산이며, 목포를 상징하는 삼학도의 전설이 생겨난 곳이기도 합니다.

유달산 노적봉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군사의 숫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곳에 이엉을 엮어 바위를 덮어 군량미가 대량으로 비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노적봉 주위를 돌게 하여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였던 곳입니다.

일설에는 일제감정기 당시 일본인들이 지도나 문헌에 노적봉을 노인봉이나 노인암으로 표기하여 우리 고유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였다 합니다. 노적봉을 돌던 당시 전술은 훗날 문화에술로 승화되어, 강강술래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그 밖에의 문화유산...

☆목포시사☆오포대☆흥법대사와 부동명왕☆달성사☆이충무공유허비

☆도로원표☆목포역과 호남선개통

☆구 일본영사관☆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구 동본원사 목포 별원☆이훈동정원☆무안감리서

※삼학도의 전설※

유달산에 한 장사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세 처녀가 이 장사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세 처녀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게 된 장사는 수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세처녀를 불러 자신의 수도가 끝날 때까지 바다 건너 섬으로 건너가 살고 있으면 찾아 가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약속을 믿고 세처녀가 조각배를 타고 섬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이를 먼 산 에서 바라보는 장사는 이제야 자신도 세처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알게되고 다시 돌아와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화살이 꽂힌 배는 구멍이 뚫려서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이 때 세처녀가 학으로 변해 하늘로 솟아오르고, 다시 바다위로 내려와 세 개의 섬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어이없는 침략◎

일본은 1800년대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습니다.

 

 

종목 : 문화재자료 제137호 (전남)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35.5
지정일 : 1987.01.15
소재지 : 전남 목포시 만호동 1-56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목포시
관리자 : 목포시
연락처 : 전라남도 목포시 문예홍보과 061-270-8566

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른다.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을 황원(현재 해남)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원래 위치는 대략 현재의 목포시 만호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만호진의 성은 일본 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으며, 만호동 공터에는 목포진 유적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목포로 이동했습니다.

그걸 보고 일본 사람들이 목포로 쳐들어 와서 유달산의 반을 거의 쪼개다 시피 해서 반은 일본의 땅 반은 대한민국의 땅으로 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백성들은 돈이 없어서 아주 작은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고 일본 사람들은 떵떵 거리며 50~70평 정도의 집을 지어서 산다는 것입니다.

 

 

종목 : 문화재자료 제137호 (전남)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 : 135.5
지정일 : 1987.01.15
소재지 : 전남 목포시 만호동 1-56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목포시
관리자 : 목포시
연락처 : 전라남도 목포시 문예홍보과 061-270-8566

목포지역은 예부터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는데,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으로 목포영, 목포대라고 부른다.조선 왕조 때 각 도의 여러 진에 붙은 종 4품의 무관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영, 만호진, 만호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여러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세종 15년(1433)에 목포병선을 황원(현재 해남)으로 옮기고, 세종 21년(1439)에 현재의 자리에 목포 만호진을 설치하였으며, 개항과 함께 고종 21년(1895)에 폐진된 것으로 보인다.현재 목포 만호진의 성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원래 위치는 대략 현재의 목포시 만호동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며, 이 일대 민가의 담장이나 축대에서 당시의 돌을 확인할 수 있다.만호진의 성은 일본 영사관, 영국 영사관 기지로 사용되다가 민가로 전용되었으며, 만호동 공터에는 목포진 유적비라고 적힌 비석이 있다.

 

 

 

 

 

만호진 목포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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