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유달산 표지판 전문입니다>
흥법대사, 부동명왕상은 우리지방의 전통문화나 우리나라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외래문물의 표상이다
일본승려 흥법(공해 774-835)은 일본불교 진언종의
개조이며,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사자로서 밀교의 5대 명왕중 하나이다.
일본불교는 개항후 7개 종파가 목포지역에 침투하였으며, 진언종파는 1920년 유달산에 흥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조각하고 일본 불교를 우리 지역에 전파 하고자 했다.
목포개항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문화를 바르게 인식하고 민족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이 표지판을 세운다.
1997.9.30 미래를 여는 공동체
五岳山자락에 자리한 젠쓰지. 경내의 5층목탑은 젠쓰지의 심볼.
젠쓰지(善通寺)는 진언종(眞言宗)의 총본산입니다. 홍법대사(弘法大師=空海)의 탄생지이다.중국에서 귀국한 홍법대사가 807년에서 6년에 걸쳐 창건하였습니다. 진언종 최초의 근본도장입니다. 기슈(紀州) 의 다카노산(高野山), 교토의 토우지(東寺)와 더불어 대사의 3대 영지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 시코쿠영지88개절(四国霊場八十八ヶ所)의 제75번째 순례지로 매년 많은 사람이 참배하러 옵니다. 동원과 서원으로 이루어진 경내의 총면적은 약 45,000㎡. 넓은 경내에는 여기저기 홍법대사를 기리는 사적과 보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젠쓰지(善通寺)]란 이름은 대사의 부친인 [요시미치쿄(善通卿)]에서 붙여진 것입니다.
2007년은 창건 1200년입니다.
홍법대사는 774년 사누키국(讃岐国=가가와현(香川県)의 옛이름)의 호족이었던 좌백 요시노미치쿄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이름은 마오(眞魚・まお)로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하기로 이름이 낫습니다. [매일밤 부처와 담화를 했다, 내 몸의 가치를 묻길래 절벽에서 뛰어내리자 선녀가 떨어지는 나를 안았다, 수행중 명성이 입으로 날아들어온 후 깨달음을 얻었다] 등의 신비적인 전설이 전해옵니다. 고행시절을 거쳐 31세에 당으로 건너간 홍법대사는 거기서 청룡사(靑龍寺)의 혜과화상(惠果和尙)의 정식 후계자로서 밀교를 전수받았습니다. 귀국후 젠쓰지를 창건하고 다카노산에 대가람을 건립하는 등 일본에 널리 밀교를 전파합니다. 또 일본에서 처음으로 서민을 위한 학교인 슈게이슈치인(綜藝種智院)의 토목공사를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종교세계만 아니라 건축, 광업, 자연과학, 의학, 문학 등 여러분야에서 활약하며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불법전파에 온 힘을 쏟은 후 835년 3월 21일 다카노산에서 조용히 입적합니다.
젠쓰지 정문
금당
고목나무(녹나무)
홍법대사가 꼿은 지팡이를 녹나무로 변했다고 합니다. 1200년의 수령...엄청나게 큽니다.
어영당
오층목탑(150년전에 재건)
인왕문
가이단 메구리(계단순례)
어영당 지하에 굴을 파서 만들었는데 들어가면 캄캄절벽이다.10분여 걸리는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벽을 더듬으면서 걷는다. 벽을 부처와 불교수호신 그림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불법을 몸으로 체험한다고 해서 인기가 매우 높다. 입장료는 500엔.
동원과 서원 사이에는 젠쓰지 명물과자점이 있다. 가타빵(堅パン, 딱딱한 과자)을 만들어 판매하는데, 상당히 딱딱하다. 1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젠쓰지는 예전부터 전략의 요충지인 일본군사도시이다. 장기보관이 필요했던 군인들을 상대로 만들어 팔던 딱딱한 과자이다. 처음 문을 연 할머니의 옛날 사진이 가게 내에 걸려있는데, 상당히 미인이었다. 지금은 그 며느리와 함께 과자를 팔고 있다.
가타빵 구마오카(熊岡)
가타빵 봉지
가타빵(1)
가타빵(2)
여러 가타빵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가타빵이 제일 유명하다. 한국사람은 그저 빨리 씹어먹으려 하는데, 무식하게 씹어먹으려고 하다가는 이빨 다 부러진다. 딱딱한 것이 거의 돌덩이 수준이기 때문이다. 먹는 방법은 알사탕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여 천천히 먹는다. 달짝지근한 맛과 계피향이 나는데, 그 맛이 오묘하게 끌린다. 처음에는 다들 먹기를 거부하지만, 한 번 맛들이면 그 맛에 매료가 되어 사족을 못 쓴다. 가끔씩 젠쓰지에 가면 꼭 들러 2-3봉지 가타빵을 사왔다.
습기많은 일본에서 먹다남은 과자 등의 보관이 어려운데 이건 습기 먹을 일도 없고 해서 오랫동안 두고 두고 먹을 수 있어 좋다. 한국에도 가져와 선물을 해 준 적이 있는데, 성질 급한 한국인이 아닐까봐, 이게 뭐야~ 이런 걸 먹어? 하는 통에 내가 다시 받아와 다 먹었다. 역시 고기도 먹어 본 놈이 그 맛을 안다는 속담이라 할까.
많은 순례객들이 젠쓰지에 와서 다음 순례지로 떠나기 전에 이 가타빵을 사서 가는 동안에 먹는다.
가격은 종류별로 저울에 달아 파는데, 100g에 80~100엔 정도로 1000엔정도면 푸짐하게 오랫동안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젠쓰지 가는 길
젠쓰지시 지도
젠쓰지 전경
홍법대사는 처음으로 우동을 일본에 전파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동명왕이란
대일여래 즉 마하비로자나불이
명왕(明王)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밀교에서 5대명왕 가운데
중앙에 위치해 있고
한 쪽 손은 검을 들고 있고
한 쪽 손은 견삭을 들고 있으며
눈은 부릅떠 있고 한 쪽 눈은 흘겨보는 형상이라 한다
모든 밀교 수행자들을 옹호하며
일체의 악마와 번뇌를 멸(滅)한다
또한 부동이란 이름은
보리심이 동요하지 않아 불퇴전(不退轉)함을 상징한다고 한다
거기다 다른 명왕들과 마찬가지로
부동명왕 역시 이비상(二臂象) 사비상(四臂象) 육비상(六臂象)의 형상이 있다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화신, 혹은 대일여래를 지키는 사자이고, 수행자들을 보호하며
일본에서는 부동명왕에 대한
신앙이 뿌리 깊어요.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는 굵은 노끈(索)을 쥐고, 눈은 부릅뜨고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엄청난 힘으로 악마를 쳐부순다네요.
부동명왕(不動明王) 삼밀(三密) (1) 공법 설명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비로쟈나부처님의 다른 모습으로 교령륜신(敎令輪身)이라 하며, 그 형상은 매우 무서운 모습으로 양눈을 크게 뜨고 두 송곳니를 밑으로 행하여 드러내고 분노의 상을 나타내고 있다. 머리 위는 연꽃으로 장식하고 오른 손은 금강검(金剛劍)을 들고 왼손은 견색( 索)을 들고 중생들 중 업장이 두꺼워 자비의 부드러운 형상으로는 제도되지 않는 광폭한 중생도 남김 없이 제도하여 번뇌의 괴로움으로부터 구제하여 안락한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 주기 위해 왼손의 견색으로 번뇌를 묶고 무서운 번뇌의 집착을 오른손의 예리한 금강검을 휘둘러 끊어 한순간에 번뇌의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겠다는 대원(大願)을 가지고 돌로 만든 의자에 앉아 계신다. 부동(不動)이란 모든 유혹으로부터 추호도 움직이지 않는 굳은 마음을 지켜 중생들이 악도(惡道;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무여 열반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깊은 뜻이 있다. (2) 수련 방법 정좌하여 앉은 후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왼손의 혜6, 방7, 원8 와 오른손의 인3, 계4, 시5의 손가락을 안으로 깍지를 끼어 모우고 지0, 선1, 진2, 력9는 옆으로 나란히 붙여서 세운다. 이렇게 수인을 결한 후 진언을 외우며 깊은 선정에 든다. 진언; 나모 사만따 바즈라남 짠다 마하 로사나 스파따야 훔 뜨라까 함맘. 이렇게 몸으로는 수인을 통해 부동명왕의 몸이 되고 진언을 외움으로 해서 모든 업이 청정해져 뜻이 부동명왕과 하나가 되어 나간다. 자신이 부동명왕이라고 생각하여 탐, 진, 치의 삼 독에 물든 광폭한 중생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구제하여 열반에 들게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외고 스스로가 부동명왕의 무서운 형상을 갖추고 시방세계를 불국토로 모두 만들겠다고 관한다. 이렇게 하루 1시간 이상 수련하여 3 - 6 개월이 지나면 마음이 혼란하지 않고 맑게 정화되어 자비심이 일어나고 더욱더 수련하여 일정한 과위에 오르면 능히 혼탁한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갖추게 되어 마음이 항상 자유로운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성불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부동명왕(不動明王):
밀교의 대표적인 明王(명왕). 힌두교의 쉬바신의 異名(이명)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5大尊明王(대존명왕) 중의 하나로서 阿 那阿奢羅那他(아리나아사라나타)라 음역하고 不動尊(부동존)·無動尊(무동존)이라 번역한다.
不動如來使者(부동여래사자)라고도 하며, 불교에서는 이 명왕에게 사자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대일여래의 사자로써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의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대일여래가 일체 악마를 항복받기 위하여 몸이 변하여 분노한 모양을 나타낸 형상으로, 그 형상에는 2비상·4비상·6비상 등의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통으로는 2비상으로 오른손에 칼을 들고, 이마에 머리카락을 왼쪽 어깨에 드리우고 왼쪽 눈은 홀겨 보는 모양이다.
불꽃 가운데서 반석 위에 앉았다. 몸의 모양이 童子形(동자형)을 하고 있는 것은 여래의 童僕(동복)이 되어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가가 되려는 서원에 의거한 것이다.
造像(조상)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들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明王部(명왕부)의 대표적인 것으로, 7세기 후반 大日經(대일경)이 성립되자 밀교 五大明王(오대명왕)의 王尊(왕존)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蓮玉 - 시대물 - 금채부동명왕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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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작 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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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기 |
높이 9.7 가로 1.3~5 세로 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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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품 요 약 |
금채 부동명왕상 입상입니다 시대에 따른 흔적 몇 군데 보입니다만 섬세한 조각과 금채가 살아있는 예술품입니다. |
부동명왕 문신===========================
<불교> 팔대 명왕(八大明王)의 하나.
중앙을 지키며 일체의 악마를 굴복시키는 왕으로, 보리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여 이렇게 이른다. 오른손에 칼, 왼손에 오라를 잡고 불꽃을 등진 채 돌로 된 대좌에 앉아 성난 모양을 하고 있다. 제개장보살의 변화신으로 오대존명왕의 하나이기도 하다. ≒부동(不動)·부동존·아차(阿遮).
부동여래사자(不動如來使者)라고도 한다. 원명은 아시알라(Ac?la)라하는데, 힌두교 시바신의 이명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명왕에게 사자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써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고, 동자형(童子形)의 몸의 모양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되어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따른 것이다. 조상(造像)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명왕부(明王部)의 대표격으로서, 7세기 후반 《대일경(大日經)》이 성립되자 밀교 오대명왕(五大明王)의 주존(主尊)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부동명왕은 밀교의 주불인 대일여래가 모두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의 하나입니다.
불교에서 명왕들은 인도의 토착 종교의 신들로 불교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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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명왕은 밀교의 하나인 진언종의 주불인 대일여래의 화신입니다.
또한, 부동명왕은 대일여래의 사자로서 밀교의 5대 명왕 중 하나이므로,
많은 밀교도인들의 숭앙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일본 진언종의 개조자인 홍법대사의 사후 그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들이 숭배해야할 부동명왕을 홍법대사를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격하
시켜버렸습니다.
일본 불교는 개항 후 7개 종파가 목포 지역에 침투하였으며, 그 중 진언종
파는 1920년 경 유달산에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조각하고, 일본 불교를
우리 지역에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홍법대사, 부동명왕은 우리 지방의 전통문화나 우리나라 불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일본의 고유한 불교형태의 하나입니다.
1920년대 말 일본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목포 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만등었는데, 현재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암각상들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바위에 암각된 것에는 '홍법대사'라는 한자가 새겨 있고, 철퇴를 들고 있는
부동명왕상 옆에 '부동명왕'이라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을 참조하세요.
* 부동명왕(不動明王)
힌두교에서 시바신의 다른 이름. 아찰라나타(Acalanta)라고 하고, 한음(漢音)으로 아자라낭타(阿遮羅囊他)라고 쓴다. 709년에 번역해 낸, 보리유지(菩提流支)의 《불공견삭신변진언경》 제 9 권에 의하면 오른손에 검을 잡고, 왼손에 줄[繩]을 가진 부동사자(不動使者)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부동명왕의 도상(圖像)의 원형(原型)은 725년의 선무외(善無畏) 번역 《대일경(大日經)》이 설명한 <부동여래사자는 혜도(慧刀)와 견삭을 거머쥐고 정수리의 머리 다발은 왼쪽 어깨에 늘어져 있으며 형형하게 빛나는 외눈에, 온 몸은 분노에 가득차 불꽃에 싸여 있다. 그는 반석 위에 안주하며 이마에는 물결주름이 잡혀 있는데, 한편으로는 앳된 동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표현에 따른다.
형상에 대해서는 순우(淳祐)의 저서 《요존도장관(要尊道場觀)》에 따르면,
부동명왕상에는 십구관(十九觀;十九想觀)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1) 대일여래의 화신이다.
(2) 명(明;眞言) 속에 아(a), 로(ro), 함(hm), 맘(mm)의 4자가 있다.
(3) 화생삼매(火生三昧)에 주(住)한다.
(4) 동자형이며 비만하다.
(5) 정수리에 칠사계가 있다.
(6) 좌(左)에 변발이 있다.
(7) 이마에 추문(皺文)이 있다.
(8)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뜬다.
(9) 아랫니는 윗입술 오른쪽을 물고, 아랫입술 왼쪽을 밖으로 젖혀서 내민다.
(10) 그 입을 다문다.
(11) 오른손에 검을 쥔다.
(12) 왼손에 줄을 가진다.
(13) 행인이 남긴 음식을 먹는다.
(14) 큰 반석 위에 앉았다.
(15) 얼굴빛이 추하고 검푸르다.
(16) 분신분노(奮迅忿怒)한다.
(17) 온 몸에 가루라염(迦樓羅炎)이 있다.
(18) 변해서 구리가라(俱利迦羅)가 되어 검을 둘러싼다.
(19) 변해서 두 동자가 되어 행인에게 시중든다.
부동명왕(不動明王)
부동명왕은 대일여래가 일체 악마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이며, 색은 검고, 노한 눈을 하고 있으며, 왼쪽 눈을 가늘게 감고 오른 편의 윗입술을 물고, 이마의 머리카락을 왼쪽어깨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른 손에 항마(降魔)의 검을 가지고 왼손은 쇠줄을 쥐고 있음. 보통 큰 불꽃 속 반석위에 앉아 있습니다.
보통 부동존(不動尊).무동존(無動尊)으로 번역합니다.
원래 부동명왕은 후기 밀교의 챤다로샤나(Can aro a a) 또는 챤다마하로샤나(Ca amah ro a a)와 동일한 존격이나 십분노존(十忿怒尊) 중의 하나의 존격으로 나올때는 아챨라(Acala)로 불리워지는데 주로 일본에서 숭배되며 티벳 등에서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 오대 존명왕 ]
명왕의 明은 진언을 말합니다.
명왕은 대일여래의 명을 받아 악마를 항복교화 시키는 것이 그 임무입니다. 명왕은 분노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무서운 위세로, 악마나, 도리를 모르는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최종목적은 교화이기 때문에, 덕과 자비를 겸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죠.
명왕과 보살 부처는 한몸이며 여래가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합니다.
이것을 밀교에서는 삼륜신三輪身(부처, 보살, 명왕의 三部尊)이라고 하는데, 부처를 자성륜신(自性輪身), 보살을 정법륜신(正法輪身), 명왕을 교령륜신(敎令輪身)이라고 합니다.
또한 부처는 대일여래(大日如來), 아촉여래, 보생여래, 아미타여래, 불공성취여래의 다섯 분으로 포섭되며, 이 다섯 부처는 대일여래에 통합됩니다. 이것을 정리해 볼까요?
자성륜신(부처)----정법륜신(보살)------------교령륜신(명왕)
대일여래---------반야보살般若菩薩----------부동명왕
아촉여래---------금강살보살金剛薩菩薩-------항삼세명왕
보생여래---------금강장왕보살金剛藏王菩薩---군다리명왕
아미타여래-------문수보살文殊(觀音)菩薩------대덕위명왕
불공성취여래-----금강아보살金剛牙菩薩-------금강야차명왕
여기에서 오른쪽의 다섯 명왕을 오대존명왕(五大尊明王)이라고 한다
부동명왕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분들이 계셔서 걍 여기다 올리겠습니다 차후 타투 기초에 올리겠지만...^^ 잘 읽으시길...바랍니당^^
힌두교에서 시바신의 다른 이름. 아찰라나타(Acalanta)라고 하고, 한음(漢音)으로 아자라낭타(阿遮羅囊他)라고 쓴다. 709년에 번역해 낸, 보리유지(菩提流支)의 《불공견삭신변진언경》 제 9 권에 의하면 오른손에 검을 잡고, 왼손에 줄[繩]을 가진 부동사자(不動使者)로 묘사되어 있다.
부동명왕 은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악귀를 항복시키기 위해 몸을 변하여 분노한 모양을 나타낸 형상이다.
부동명왕의 도상(圖像)의 원형(原型)은 725년의 선무외(善無畏) 번역 《대일경(大日經)》이 설명한 <부동여래사자는 혜도(慧刀)와 견삭을 거머쥐고 정수리의 머리 다발은 왼쪽 어깨에 늘어져 있으며 형형하게 빛나는 외눈에, 온 몸은 분노에 가득차 불꽃에 싸여 있다.
그는 반석 위에 안주하며 이마에는 물결주름이 잡혀 있는데, 한편으로는 앳된 동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표현에 따른다.
형상에 대해서는 순우(淳祐)의 저서 《요존도장관(要尊道場觀)》에 따르면, 부동명왕상에는 십구관(十九觀;十九想觀)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1) 대일여래의 화신이다.
(2) 명(明;眞言) 속에 아(a), 로(ro), 함(hm), 맘(mm)의 4자가 있다.
(3) 화생삼매(火生三昧)에 주(住)한다.
(4) 동자형이며 비만하다.
(5) 정수리에 칠사계가 있다.
(6) 좌(左)에 변발이 있다.
(7) 이마에 추문(皺文)이 있다.
(8)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뜬다.
(9) 아랫니는 윗입술 오른쪽을 물고, 아랫입술 왼쪽을 밖으로 젖혀서 내민다.
(10) 그 입을 다문다.
(11) 오른손에 검을 쥔다.
(12) 왼손에 줄을 가진다.
(13) 행인이 남긴 음식을 먹는다.
(14) 큰 반석 위에 앉았다.
(15) 얼굴빛이 추하고 검푸르다.
(16) 분신분노(奮迅忿怒)한다.
(17) 온 몸에 가루라염(迦樓羅炎)이 있다.
(18) 변해서 구리가라(俱利迦羅)가 되어 검을 둘러싼다.
(19) 변해서 두 동자가 되어 행인에게 시중든다.
不動明王
시골집 부엌 흙벽에는 부동명왕(不動明王)의 부적이 붙어있게 마련이었다. 타오르는 화염 속에 칼을 든 부동명왕은 화마(火魔)로부터 집을 수호하는 가신(家神)이다. 불 속에서 불을 이겨낸다는 자체가 모순인 것 같지만 대형 화재 속에서 그 피해를 극소화하는 지혜가 내포되어 새삼스럽다. 불이나 공황(恐慌)에 휩쓸려 동분서주하면 자신이나 남에게 기하급수의 인신피해를 가중시킨다는 것은 상식이다. 부동명왕의 부동(不動)은 육신이 아니라 마음의 부동 곧 냉정을 어느만큼 유지하느냐로 피해는 정비례한다. 로스앤젤레스 대지진 때 공황에 말린 피재자(被災者)와 이성을 잃지 않은 부동성 피재자의 사상(死傷)비율은 8대1이었다.
수소와 산소는 그 자체가 가연성(可燃性)이거나 조연성(助燃性)으로 따로따로 작동하면 불을 키우지만 알맞게 결합하면 물이 되어 불을 끈다. 그러하듯이 재난이 발생했을 때 냉정히 대처하는 사람이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듯이 알맞게 조화되면 재난은 조기에 잡히고 피해도 격감한다. 재난현장의 구조를 알고 가스의 유출 경로를 헤아리는 등 소신있게 행동한 사람의 피재율(避災率)은 86%라는 조사도 있다. 이를테면 ‘플러시 오버’라 하여 불이 화재로 커나갈 때 한참 동안은 불길이 세지 않고 연기도 산술급수로 증가할 뿐인데 어느 시점을 넘으면 온도상승과 연기발생이 급가속, 폭발적 화재로 커 나가는 그 전환점을 말한다.이 플러시 오버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 대구 방화현장에 있었던들 이처럼 대형사고로 번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역시 부동명왕의 지혜랄 수 있다.
재난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발휘되는 역할인격(役割人格)이라는 것도 생명 피해를 줄인다. 30년 전 브라질 상파울루 초고층 빌딩에 불이 났을 때 15층에서 어린 아기를 안고 뛰어 내린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아기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었다. 기적이 아니라 본인도 모르게 작용한 어머니의 역할 인격이다. 수몰 위기에서 끝까지 교환대를 지킨 교환원, 추락하는 하이재킹 여객기 속에서 끝까지 여객을 안심시켰던 스튜어디스 등등 기적적 생존사례는 마음을 부동케한 역할 인격의 과학이다. 왜 부동명왕을 불 속에 부동케했는가 새삼스러워지는 대구 참사다.
◆ 밀교[密교]와 현교[顯敎]
밀교(密敎)는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이다. 비밀불교(祕密佛敎) 또는 밀의(密儀)종교의 약칭으로 진언(眞言)밀교라고도 하는데,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대칭어이다. 밀교는 7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사상.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인도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보통 밀교는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 성력(性力: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힌두교의 탄트라(tantra) 신앙과 결합되어 말기에 나타난 좌도밀교(左道密敎)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통적인 밀교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전신적(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의례(儀禮)의 체계를 갖는다.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바지라야나(vajra-yāna:金剛乘)인데, 이것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바지라야나, 즉 금강승은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통일원리는 공(空)과 자비(慈悲)의 일치[空悲無二], 즉 반야(般若:지혜)와 방편(方便)의 일치로 나타난다. 이러한 금강승에는 사크티적(的) 경향, 즉 성력적 성격은 없다. 그러나 이슬람[回敎] 침입(약 1027∼1087) 이후 성립된 구생승(俱生乘:Sahaja-yāna)과 시륜승(時輪乘:kālacakra-yāna), 그리고 금강승에서 갈라져 나온 탄트라승(Tantra-yāna), 길상승(吉祥乘:Bhadra-yāna) 등은 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밀교를 성력적인 뉘앙스를 갖는 탄트라 불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호칭은 아니라고 하겠다.
인도에서 티베트 ·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구생승 계통이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아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 일반적으로 밀교에 대한 관점은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 주술조직(呪術組織), 또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철학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잡밀(雜密, 또는 呪密)이라 하여, 금기(禁忌) ·부적(符籍) ·주법(呪法) 등으로 표현하는 데 반해, 후자는 순밀(純密, 또는 通密)이라 부르는데, 7세기 후반에 차례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7세기경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 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흐름은 교학(敎學)의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를 밝힌 ≪대일경(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 경전들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경전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 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잡밀 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 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 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중국에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 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베풀었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 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①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성덕왕대로 추정된다. 신라 오대산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다.
②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2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이 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 계통의 경으로,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을 봉안하였다.
고려는 건국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언으로 남긴 이유는 원래 연등회와 팔관회를 고려가 수용하고 전개하는 과정에서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으며,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사상으로 이해되어왔으나,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기 때문이다.
① 총지종(摠持宗)과 신인종(神印宗) : 우리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신라시대부터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과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신라시대의 총지암(摠持·)은 신문왕과 효소왕 때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에 와서 총지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이 개판되었고, 1186년(명종 16)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의 밀교의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신인종의 신인이란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으로, '문두루(門豆婁)'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인데,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賢聖寺)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령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② 밀교의식과 행사 :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인왕도량이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에서는 ≪인왕경≫을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는데,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이다. 인왕도량이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행하여졌다면, 금광명도량은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이다. 또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은 숭유배불정책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하고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으로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曺溪宗).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3월에는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태종은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세종도 종단 폐합을 단행하였지만,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 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밖에도 조선시대에는 많은 밀교 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 면에서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밀교에 있어서 더욱 두드러진 것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 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번을 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 그리고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 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은 1298년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특히, 1644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다.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 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說禪儀)≫를 지어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상원사. 강원 평창군 진부면.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심도량이다.
법광사사리호. '불정존승다라니´라는 명문이 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현교(顯敎)
밀교(密敎)에 대응되는 말이다. 밀종(密宗)인 진언종(眞言宗)에서는 모든 불교를 현교와 밀교로 구별하여 양교의 우열천심(優劣淺深)을 판정하고 있어, 이것을 현밀이교(顯密二敎)의 교판(敎判)이라고 한다. 이 경우 진언밀교 이외의 법상종·삼론종·천태종·화엄종 등의 여러 종과 성문(聲聞)·연각(緣覺)의 이승(二乘) 등을 모두 현교라고 한다. 천태밀교에서는 진언종뿐만 아니라 천태종·화엄종·반야종·열반종 등의 일승교(一乘敎)를 밀교라 하고, 법상종(法相宗) 등의 삼승교(三乘敎)를 현교 또는 현시교(顯示敎)라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를 일컬어 배화교(拜火敎), 즉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제례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조로아스터 신자들은 불이 타오르는 작은 제단 앞에서 제례를 치르는데, 이 때 신자들은 불 자체를 숭배한 것이 아니라, 동물이나 나무 막대기 헌주 등의 봉헌물에 불꽃과 냄새를 피워 경배를 표현했던 것이다.
이 종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본명은 스피타마 자라투스트라(Spitama Zarathustra)이며, ’조로아스터’는 자라투스트라의 그리스식 발음이다.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있는데, BC 660년 경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BC 1500년 경, 혹은 BC 6000년 경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출생지는 학자들의 추측과 자료에 따라 두 곳 정도로 예상되는데, 한 곳은 아프칸니스탄이며, 다른 한곳은 지금의 이란 동부 국경의 옥수스 강 유역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며 알려진 것도 거의 없다. 후대의 사람들이 전승하는 것으로 추측할 뿐으로, 대개 현명하고 선한 이상적인 인간으로 묘사된다.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출생 연도가 불확실한 만큼 이 종교가 창시된 시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열두 살에 집을 떠났고, 서른 살에 강력한 신비체험과 영감을 얻어 이후로 자신의 새롭고 독창적인 메시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에 따르면, 그는 서른살이 되던 해에 아후라 마즈다 신의 천사장으로부터 유일신에 대한 계시를 받게 되며, 그 후 8년 동안 아후라 마즈다의 나머지 다섯 천사들이 하나씩 나타나 그에게 진리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조로아스터가 계시받은 진리를 대중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으나, 모두 그를 광인(狂人)이라 생각하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사촌 중 하나가 그를 믿고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왕을 비롯한 많인 이들이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로, 고대 인도-이란 또는 인도-게르만의 종교적 공유재산에 근원을 둔 신들이나 제령(諸靈)을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 아래 통괄하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한다. 아후라는 ‘주(主)’를 의미하며, 마즈다는 ‘지혜’를 의미하므로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를 의미한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가 여러 신을 섬기는 다신론적 종교였음을 감안한다면, 아후라 마즈다 외의 다른 신을 모두 거짓으로 선언한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당시의 다신교적 종교관의 영향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후라 마즈다가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 직접 나타나지 않고, 여섯 가지 불사의 존재 혹은 천사장을 통해 나타나며, 여섯 중 셋은 남성적이고, 다른 셋은 여성적이다. 그리고 이 여섯 가지 존재는 각각 지혜·사랑·봉사·경건·완전·불멸을 상징하고,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아후라 마즈다의 속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존재를 아메샤 스펜타(amesha spentas)라고 부른다.
경전 《아베스타(Avesta)》에 의하면, 태초에 아후라 마즈다에서 두영이 나왔는데 하나는 선을 선택한 영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사인 스펜타 마이뉴(spentas mainyu)이고, 다른 하나는 악을 택한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 훗날의 아흐리만, ahriman)이다. 앙그라 마이뉴는 다른 이름들로도 불렸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샤이틴 혹은 사탄이다. 그의 주위에는 악마의 무리가 있어서 명령에 따라 사람을 시험하거나 괴롭히는 일을 수행한다. 이러한 교리를 통해서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최초로 악마에 대한 계보를 체계화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선과 악을 분명히 구분한 조로아스터교에 따르면, 세상은 선과 악이 싸우는 투쟁의 현장이며, 인간은 타고난 이성과 자유 의지를 활용하여 이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이 때 인간은 선을 선택하여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선택의 결과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 이 때 선과 악은 한쪽이 존재해야지만 다른 한쪽도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의 천사들이 원래의 자연종교적 ·물신숭배적(物神崇拜的)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고, 반대로 악의 천사들은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종말론은 2단계로 되어 있다. 신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3일 동안 몸에 그대로 남아서 한평생 행한 일을 돌이켜보고, 제 4일이 되면 심판대로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자(死者)의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사(葬事)법인 풍장(風葬) ·조장(鳥葬)에 의해 독수리와 들개들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천사 미드라가 죽은자의 삶의 행위를 저울에 올려놓고 심판을 한다. 저울이 악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지옥으로 가고, 약간이라도 선한 쪽으로 기울면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간다. 심판을 받은 영혼은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를 지나는데, 선한 영혼은 넓고 편안한 다리를 건너서 계곡 너머의 천국으로 가고, 악한 영혼은 칼날 같은 다리를 건너다가 결국 계곡 아래의 지옥으로 떨어진다.
한편 조로아스터교의 사후 세계에는 천국과 지옥 외에도 '하밍스타간 (Hamingstagan)'이라는 곳이 있다. 하밍스타간은 양쪽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중간 상태를 말하며 혼합된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저울질했을 때에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오늘날 천주교가 말하는 연옥설과 유사하지만, 연옥에서 용서받은 영혼은 죄를 씻고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다고 하는 천주교의 교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편 천국과 지옥에 간 영혼은 거기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아후라 마즈다가 예정해 놓은 종말에 이르러 구세주가 나타나면, 모든 영혼들이 부활하고, 악한 영혼은 순화되어 선한 영혼과 합류한다. 그러나 사탄과 악령들은 완전히 소멸된다.
1. 밀교의 성립과 역사
‘밀교(密敎)’는 ‘비밀불교(秘密佛敎)’를 줄여 부른 말인데, 깨달음을 위한 수행도로서의 밀교를 진언승(眞言乘),
또 는 진언문(眞言門)이라고도 한다. 또한 밀교를 표현하는 다른 용어로는 금강승(金剛乘), 구생승(俱生乘), 시륜승(時輪乘) 등이 있다. 서양에서는 밀교를 딴뜨릭부디즘(Tantric Buddhism), 또는 불교딴뜨라(Buddhsit Tantra) 등 으로 부르는데,
이것은 8, 9세기경 인도의 후기 밀교시대에 성립된 밀교경전을 딴뜨라(Tantra)라고 부른 데서 비 롯된 것이다.
흔히 불교딴뜨라를 좌도밀교(左道密敎)라고 오해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좌도는 힌두딴뜨리즘 가운데 샤끄따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불교의 범주인 밀교와 전혀 관련이 없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성립 이후 4, 5세기경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의 불공(不空)은 불교를 현교(顯敎)와 밀교로 나누 고, 밀교에 대해 부처님의 삼밀(三密)과 상응하는 수행문에 의지하여 많은 겁의 난행과 고행을 하지 않고 신속히 성 불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삼밀은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보이신 세 가지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신밀(身密), 구 밀(口密), 의밀(意密)을 뜻한다.
삼밀을 간략히 설명하면 신밀은 부처님의 신체적 비밀로 부처님의 상호(相好)인 32상 80종호와 함께 보살, 수호존 등의 형태와 색깔, 장신구, 수인(手印) 등을 말한다. 구밀, 또는 어밀(語密)은 부처님의 언어적 비밀로 진언, 다라니, 종자(種字) 등을 가리킨다. 의밀, 또는 심밀(心密)은 부처님의 마음의 비밀로 곧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 또는 삼 매를 말한다.
즉 밀교는 진언(眞言), 다라니(陀羅尼)를 비롯해 다양한 불ㆍ보살의 형태와 수인(手印), 그리고 만다 라(曼茶羅)와 대부분의 불교의식 등을 포함하면서 이것을 방편삼아 깨달음과 중생구제라는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 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경전의 경우 대승불교의 성립과 함께 경전의 수지, 독송을 돕기 위해 경전의 축약된 의미를 지닌 진언과 다라니 가 등장하고 이에 의지한 수행이 일찍이 등장하였다. 정토(淨土)계 경전에는 불상이나 불ㆍ보살의 정토를 관하는 수행이 존재하였으며, 3, 4세기 경에는 불교경전에 많은 주와 다라니, 그리고 점성술과 제의 등이 출현, 정비되었 다.
이것은 밀교가 불교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성장한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가 인도대륙의 종교환경에서 성장 하면서, 인도의 종교문화에 의지한 외형적 소재들을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을 통해 인도대중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 고, 또한 중생구호라는 불교의 본래적 정신을 구현하려 노력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성립한 밀교는 불교경전의 전래와 함께 중국에 전해졌는데, 처음에는 진언과 다라니 등의 밀교 적 소재가 대승경전에 섞인 채 전해졌으나, 정비된 의궤(儀軌)에 입각해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화된 중기밀교 는 8, 9세기경 당 시대에 전해져 한반도를 비롯한 일본에 전해졌다.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북방 대승불 교권에서 『대일경』과 『금강정경』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 교학과 수행체계가 유행되고, 정비된 반면 인도와 티베 트에서는 딴뜨라를 중심으로 한 인도 후기밀교가 크게 유행하였다.
한반도의 경우 불교가 전래될 때 밀교가 치병과 호국 등의 방편을 보임으로써 불교를 영험한 종교로 인정받는 데 기 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티베트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도 공통된 것으로 불교의 전 파에 밀교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2. 밀교의 중심 교리
석존의 입멸 후 불교경전에 나타난 붓다관은 부처님에 대해 역사적 인물인 석존(釋尊)에 국한하지 않고, 삼세에 걸 쳐 타방정토에 무수히 존재한다고 설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인연에 따른 생멸(生滅)의 존재가 아니라
시공(時空)을 초월한 절대세계에 변함없이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붓다의 절대성과 영원성은 대승불교에서는 법신(法身)불로 나타나 『화엄경』의 경우 법신인 비로자나불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 존재로서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위해 영 원히 설법한다고 설하여 법신불이 지닌 신앙적 의미를 함께 보여주고 있다.
한편 대승불교의 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중생구호를 위해 마지막 중생이 남을 때까지 자신은 영원히 성불치 않는다고 하여 대승정신의 구현자 로서 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밀교의 붓다관은 이러한 대승불교의 붓다관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 붓다와 대보살의 경계를 허물어 진언문의 수 행자가 성불하여 자신이 곧 절대 법신의 붓다로서 중생구호를 위해 영원히 노력해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밀교경전 인 『대일경』에서 비로자나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에 대해 ‘보리심이 원인이 되고, 자비심이 뿌리가 되고, 방편 을 구경으로 한다’고 정의하여 밀교의 궁극적 성불이 중생구호의 방편적 구현을 궁극적 목표로 정하고 있음을 설 명하고 있다.
밀교에는 수행의 이상적 성취자로서 금강살타(金剛薩豊)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지금강(持金剛)ㆍ집금강(執金剛)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 명칭이 의미하듯 절대법신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금강과 보리살타의 살타가 결합된 말로서 절대법신이면서 대보살의 중생구호이념을 실현하는 실천자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밀교는 대승불교의 반야사상과 열반관 등의 사상을 계승한다. 용수의 『대지도론』에서 ‘깊은 깨달음은 세간적 현 실과 열반을 다르지 않게 본다’라고 한 반야사상과 『열반경』에서 열반은 영원한 안락이며 청정한 자성임을 뜻하 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근본 이념을 계승하였다. 따라서 교리적으로 반야의 지혜에 의해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 지 않고 열반과 생사가 하나라는 깨달음에 입각해, 자신은 공성에 머물면서 중생구호를 위해 현실세계에서 노력하 는 성취자의 이상을 금강살타를 통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밀교경전인 『이취경』에는 ‘수승한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중생의 윤회 생사(生死)가 다하도록 언제나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열반을 취하지 않는다. 반야와 방편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제법과 일체의 존재는 모두 청정한 것이다.
탐욕으로 가득한 세간을 청정케 하며, 유정과 악취를 존재의 삶이 다하도록 조복시킨다.
마치 연꽃 의 줄기가 진흙에 묻더라도, 그 자체는 더러워지지 않는 것처럼 모든 탐욕인 번뇌의 성품도 그와 같이 오염되지 않 으며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큰 탐욕이 청정하기 때문에 크게 안락하고, 풍요로우며, 삼계에 자재함을 얻어 능히 견 고한 이익을 성취한다’라고 하여 대승불교의 붓다관과 반야와 열반 등의 제반 사상에 근거하여 현실 세간의 살아 있 는 실천자에 대한 교리적 기반을 이룩하고 있다.
3. 밀교의 수행이념
밀교수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대승적 이념의 실현에 있지만 밀교의 수행을 진언문(眞言門)으로 설정한 것과 같이 밀 교는 현교와 다른 독특한 수행방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수행자가 밀교를 구성하는 진언, 다라니와 수인, 불형(佛形) 등을 소연(所緣)으로 관(觀)하여 내면적인 심식(心識)의 변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성불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연의 대상인 여래의 불형에 대해 『대일경』에는 진언과 수인, 형상의 세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다. 같은 경전의 「무상염송문(無相念誦門)」에는 ‘진언행자가 성불의 마음을 결정할 때 먼저 한마음으로 본존을 관해야 한다.
진언 과 비밀한 수인을 수호함으로써 유가수행의 본존상을 짓는다. 본존의 색상과 위의(威儀)와 같이 진언행자의 마음도 그와 같다. 본지(本地)신과 상응하는 불신(佛身)에 머물러 비록 복이 적은 자라도 성불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여 기서 유가수행은 곧 수행자의 심식(心識)을 붓다의 의식으로 전환하려는 전식득지(轉識得智)의 수행이념에 근거한 것이다.
밀교의 유가수행은 중생의 의식변화를 통해 중생자신의 현실을 붓다의 절대적 현실로 실현하는 것으로 중생의 신어 심(身語心)은 곧 붓다의 신금강ㆍ어금강ㆍ심금강으로 전환되는데, 이러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의 수행이념은 인도 후기밀교의 수행으로까지 전개되어 생기차제(生起次第)와 구경차제(究竟次第)의 독특한 수행체계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
후기밀교의 수행이념은 중생의 신어심의 영역을 중생의 세 가지 존재인 삼유(三有), 즉 생유(生有)와 중유(中有)와 사유(死有)를 붓다의 화신과 보신, 그리고 법신으로 구현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밀집회딴뜨라』에는 ‘진언을 관연(觀緣)한 몸은 말과 마음에 의지하며, 마음은 안락하고 즐거워 수승한 실지 (悉地)를 성취할 것이다. 마음에 관연한 무아를 말과 몸에 대해서도 관할 것이니 평등한 공성을 삼밀에 상응하여 성 취한다. 신어의를 관연할 때 그 자성은 관연함이 없을 것이니 진언에 의해 몸을 상응함에 있어 보리도 없고 수행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밀교의 수행이 어떤 생리적이거나, 외적인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공사상이나 유식 사상, 여래장사상 등의 불교의 근본적 교리에 입각해 이것을 철저히 수행자의 내면세계에 반영하는 유가수행임을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밀교의 교리와 수행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중생의 현실세계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실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한 불교 교단의 경험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밀교는 어떻게 성립하였고 어떤 가르침인가
밀교(密敎)란 말 그대로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의미인데, 불교의 다른 교설들이 모두 드러내놓고 설해진 가르침 즉, 현교(顯敎)인데 반해 자신들의 가르침은 본래 부처님의 심중에 감춰져 있던 것으로서 스승과 제자 사이에만 은밀하게 전수되는 교의임을 표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세계의 본질을 가장 본격적으로 다루는 가르침이란 입장으로, 다른 의미에서는 대승불교의 최종단계라는 측면에서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합니다. 이와 같은 밀교는 본래 독자적인 불교의 한 흐름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도 불교수행의 실제적인 형태 속에 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음이 인정되는데, 특히 힌두교의 부흥에 자극을 받아 7세기 중엽부터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성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그 동안 불교의 융성 때문에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던 인도의 정통사상인 바라문교가 민간의 토속적인 신앙들을 흡수하여 힌두교로 재편되면서 상당한 민중적 호응을 얻게 되자 그에 대한 대응과 융합으로 나온 것이 밀교입니다. 그러므로 밀교의 본질은 대승불교의 심오한 사상들을 고도의 상징적인 의례나 수행법 안에 용해시켜들여 그 전승을 꾀하면서도 진언(眞言)이나 관상(觀想) 등 신비적 수행을 통해 종교적인 깨달음뿐 아니라 재앙의 소멸이나 기타의 세속적인 욕구까지도 충족시키고자 하는 다분히 대중적인데 있었습니다. 이 같은 밀교의 교의는 ≪대일경≫과 ≪금강정경≫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특히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부처님을 본존으로 모시며 삼밀가지(三密加持)의 수행에 의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최고의 목표로 합니다. 밀교는 특히 불교의 각종 의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그 잔재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려는 곳은 이마야마대사 절이라는 곳으로, 큐슈의 3대 축제 중 하나인 이마야마 대사 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본의 일본 헤이안 시대에 진언종을 일으킨 홍법대사(弘法大師) 또는 쿠카이(空海)로 불리는 스님의 거대한 불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마야마 대사 절에 가는 길 1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은 데 인적이 드문데다 묘지들이 있어 분위기는 조금 음산하다
이 계단을 오르면 절이 나온다
높기도 높다
이마야마 대사 절의 본당
여기서 노베오카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절에서 발견한 글
和敬清寂 (わけいせいじゃく), 다도의 정신을 표현하는데 쓰였던 말,
와케이(和敬)는 주객 상호간의 마음가짐, 세이자쿠(清寂)는 다구, 다실에 관한 이해와 마음가짐을 나타낸다.
위의 글을 한글로 옮겨보면,
조용하게 가는 자는 건강하게 하고, 건강하게 가는 자는 멀리까지 간다.
왠지 가슴을 울리는 의미 심장한 글이다.
길 가엔 이런 돌도 있었다
여러 회사의 이름이 적힌 도리이들
사진이 작아 잘 보이지 않지만 전부 홍법대사의 불상들이다
홍법대사 불상
그 옆에 있던 미륵불, 맞나?
홍법대사 동상이다
크기가 제법 크다.
절 안에 있는 만령탑
왠지 나 혼자 있는 절 안의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대충 둘러봤다 싶어서 얼른 내려왔다.
그런데 역으로 가려는 길에 왠 상가들이 보이는 게 아닌가?
공사 중이다
노베오카 시장인데, 현재는 현대식으로 공사를 하고 있다.
혹시 뭔가 있나 싶어서 들어가 봤는데, 뭐 그냥 작은 시장이더라.
시장 통로 끝에 나온 길
사진으론 잘 안보이지만, 저 끝에 있는 게 제일(다이이치) 호텔로, 만약 미야자키에서 묵지 않았다면 내가 묵었을지도 모를 호텔이다.
시장에서 발견한 낯익은 이름, 부산
곱창구이 전문점이었다. 이런 가게는 일본 사람들이 하는 걸까, 한국 사람이 하는 걸까?
또 다시 돌아온 노베오카 역
오늘 자주 들락날락 한다.
노베오카 역 앞에 있던 발과 손 프린팅이다
전부 역대 올림픽에 출전한 사람들이다.
다시 역으로 돌아오니 3시 45분 발의 니치린 시가이아 호가 곧 올 예정이다.
아직 10분 정도 남아있다.
역 주위를 둘러보다 내일과 모레 갈 예정인 유후인과 하우스텐보스의 자료를 하나씩 챙겼다.
JR에서 발급한 책자로, 크기는 좀 큰 편이지만 유후인 책은 현지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니치린 시가이아 호 내부
이 니치린 시가이아는 하카타까지 간다.
오늘 내가 묵을 호텔은 벳부에 있지만 벳부역에선 조금 멀다.
원래는 오이타에서 내려서 벳부대학에 내려 호텔까지 걸어서 가려고 했는데, 다리도 아프고 만사가 귀찮아서 그냥 벳부역에서 내리기로 했다. 다리 아플 땐 택시가 있지 않은가? 이번 여행에서 택시비만 5000엔 이상 쓴 것 같다. (그래봤자 거리는 얼마되지 않지만...)
벳부역
아직 6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역시 해가 지는 시간이 빠르다.
벳부역에 도착해 고민한 것이 밥을 먹고 가느냐, 아니면 호텔 근처에서 먹느냐였다.
물론 벳부역 주변이 넓고, 밥 먹을 때가 많지만 좀 씻고 싶기도 하고, 배낭도 영 걸리적거려서 망설였다.
하지만 호텔 근처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장담을 할 수 없어 역 안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저녁 밥을 먹은 곳
텐동 정식을 시켜 먹었다. 텐동에 미니 우동이 따라나왔다. 맛은? 물론 맛있었다.
이번에도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이런 느낌일까?
식당 앞에 있던 음식 모형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에서 식당은 한 번 간 곳은 다시 가지 않은 것 같다.
뭐 다양하게 먹어보려고 했던 거지만, 일정상 다시 갈만한 여유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탄 택시
벳부역 근처에서 호텔에서 나오는 마중 버스가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정확히 위치도 모르고 호텔까지 걸어가려니 너무 멀어서 이번에도 택시를 이용했다. 하지만 호텔까지 가는 거리는 진짜 멀었다. 이 길을 걸어서 간다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내가 묵을 호텔은 벳부 선벨리 호텔로, 야쿠르트사가 운영하는 호텔이다.
맞은 편엔 선벨리 아넥스라고 해서 두 개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야쿠르트사의 호텔답게 체크인할 때 야쿠르트 한 병을 주는 센스!
그리고 내부에 자판기도 전부 야쿠르트사의 음료 밖에 없다.
내가 묵은 방
방 문을 열고 놀랐다.
지금까지 묵었던 호텔들과는 넓이에서 그 차이를 달리했다.
물론 시설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트윈을 내게 배정한 것 같았다. 침대 크기고 크고, 하루만 묵기엔 조금 아쉬웠지만 어쨌든 럭키!
침대와 유카타
이 호텔의 장점으로 호텔 맨 꼭대기 층에 대욕장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
그것도 온천수다. 호텔 이용객이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야구를 보다가 좀 씻어야 겠다 싶어서 올라갔더니 전망도 좋고 온천수에 몸을 담궜더니 피부가 매끈매끈하다. 이래서 다들 온천, 온천하는거구나.
야식으로 뭔가를 먹을까해서 나갔다가 발견한 북오프 비슷한 가게.
그냥 흥미삼아 들어갔는데, 소설들과 만화를 잘 갖추어 놓았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싶으면서도 여행 중반인 시점에 엄청 사들인 가게.
이곳에서 산 책들을 공개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사온 책들
참고로 붉은 손가락과, 이름 없는 독은 미야자키 역 내 서점에서 새 책으로 샀고,
더 죠커와 크림존의 미궁, 맨 오른쪽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고본 2권은 하카타 역 앞에 있는 북오프에서 샀다.
책소개가 조금 하자면, 가장 왼쪽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문고본 2권.
그 다음이 기시 유스케의 크림존의 미궁, 하세 세이슈의 도쿄 바빌론, 오사와 아리마사의 더 조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 없는 독,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 미야베 미유키의 누군가, 그리고 신주쿠 사메 시리즈의 최신작 낭화 순이다.
이곳에서 산 건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 닌텐도DS를 하나 구매했는데, 게임이 없어서 여기서 중고로 4개를 구매했다. 나중에 나가사키에서도 엄청 사지만...
나가사키편에서 이번 여행의 노획물들을 또 공개하겠다. 기대해 주시길...
자비자학(自卑自虐)의 민족성에서 벗어나야
그렇지만 왜족은 모른다. 아, 요즘에 제 나라의 훌륭한 사람은 지워 버리고 그 역사를 덮어놓고 다른 나라 훌륭한 사람 역사를 떠드는 거이 현실이라. 일본놈 시절에
일본의 홍법대사(弘法大師)를 굉장히 추앙하는 승려가 많아요. 우리나라의 서산대사(西山大師)하고 갖다 놓으면 봉황 앞에 깨구래기[개구리]도 못돼, 병아리 아니라.
봉황 앞에 깨구래기도 안되는 이걸 가지고 추어싸니[추앙하니] 이거 어떻게 되느냐? 내가 그걸 보고 “저것도 중이구나. 저것도 이름이 불자(佛子)인데 부처님이 아들 똑똑한 아들 두었구나.” 거 어떻게 되나? 이름이 불자라고 하는 사람이
그 왜놈의 중, 서산대사나 우리나라의 그전에 훌륭한 양반들이 하도 많은데, 대선사가 수북한데 그런 분들 앞에 비하여선 안되는 양반, 그걸 가지고 추어싸니 거 마음이 좀 아프나 마주서면[맞서면 ; 대항하면]바로 가서 고발하면 나만 손해요. 묘향산에서 또 저 낭림산(狼林山)으로 도망해야 돼. 이런 세상을 살아왔는데.
그러면 우리 땅에는 역대로 내려오며 위대하나 우리는 위대하다는, 나타나는 인물이 없어. 건 뭐이냐? 뒤에 붓을 든 양반이 되놈을 잔뜩 추고[추앙하고]. 그 양반들 글엔 그게 있어요. 존중화(尊中華)하고 양이적(攘夷狄)하라.
내가 그런 놈의 글 쓴 양반 글의 문집(文集)을 일체 안 봐요. 거 정신병자들 쓴 거라. ‘중화’, 되놈만 존중하고 우리 같은 오랑캐는 아주 발바닥으로 밟아 버려라 이거야. ‘양이적’이라는 건 내쫓으란 말이요, 내칠 ‘양’(攘)자, 이러니.
우리가 우리를 그렇게 욕하는 학자라면 난 그 학자를 숭배 안해. 그러기 때문에 내가 세상의 글을 안 볼라고 하는 이유가 그거라. 학자들이 쓴 거라. 그래 이조의 문집을 내게 그전에 많은 사람이 가지고 와요. 좀 가르쳐 달라고. “이것 나 모르는 글이다. 가지고 가라. 이건 되놈이라면,
저 할아버질 오랑캐라고 하고 되놈이라고 하면 성자(聖者)라 하는 그 양반들이 쓴 거다. 내 곁엔 가지고 오지 마.” 그러면 다 날 욕해, 버릇없다고. 그 훌륭한 대현(大賢)의 문집을 그렇게 말한다고. 그래서 난 욕을 먹어요. 욕을 먹어도 그런덴 바른 소리해요.
왜놈의 땅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내가, 동지들이 만주에 피를 흘리고 대한 독립만세 부르고 죽는데, 그 뼈가지가 지금 풀 속에 묻혀 있어. 그런데 왜놈의 나라에 왜놈을 보러 가? 지금도 정 사정하면 갈 수 있을까는 모르는데 그건
내가 망령이 들 때만 있을 수 있어. 아직까지도 망령은 100%에서 70%도 안돼. 100%되는 망령객이 되면 똥오줌 모르는 때엔 갈 거요. 똥오줌을 아는 땐 안 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