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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대원군, 고종 경술국치 아관파천 동학혁명 동영상 등 자료 모음

작성자천사의섬|작성시간12.06.29|조회수778 목록 댓글 0

 

.흥선대원군의 탄생과 성장배경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이다.

2.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세도정치 타파_안동김씨 세력 축출

·서원정리_600여개를 47개소로 줄임

·양전, 호포제,사창제실시_ 삼정의 문란 시정노력

·대정회통 편찬_통치질서 재확인

·경복궁 중건_왕권회복

·통상수교를 거부

3시대적 배경

국내상황-세도정치로 왕권약화,정치기강 문란,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봉기 동학과 천주교의 확산

국외상황-이양선 출몰,서양 세력의 베이징 함락,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됨

4.흥선대원군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

정책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인생릉 안정시키으로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와 호초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고 경복궁 중건으로 원성을 샀다. 그리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계기가 됬다.

5.후세의 역사에 미친 영향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쇄국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에 근대화를 저지시켰다.

6.정리

·왕권 강화, 백성 생활 안정에 기여

·서원 철폐 등으로 인한 양반의 반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고조, 국가 경제곤란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하였다.

1820년에 태어났고 1898년에 돌아가셨습니다

 

 

 

 

 

 

 

1820년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43년 24세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 김 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에 나타난 술기운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한 생활을 함.


1863년 44세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이 병이 들자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양반들에게도 세금, 수수료 따위를 거두어들이게 하여 나라 살림이 좋아지고 부패의 보온 설비를 갖추고 인공적으로 흙의 온도를 높여서 식물을 촉성 재배하는 묘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였다.


1865년 46세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 공사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바친 돈을 발행하였다.


1866년 47세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천주교도를 더욱 어떤 행위나 사회적 활동을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1867년 48세
경복궁에서 불이나자 경복궁 복구 작업을 시행함. 공사비용이 많이 들자 다시
조선 고종 때 발행한, 한 푼이 엽전 백 푼과 맞먹던 돈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1868년 49세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1871년 52세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1873년 54세
명성황후가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하게함.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85년 67세
청나라에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895년 77세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후 스스로 물러났다.


1898년 79세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 ( 1820 - 1898 ) 생애와 업적

 


흥선 대원군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로서, 이름은 이하응이다.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철종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족인 자신의 아들(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대원군의 자리에 올라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다. 그 후 부정부패를 일삼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그의 개혁 정책은 한 때 성공을 거두었으나 경복궁재건 등의 무리한 재정 지출로 백성들의 신임을 잃었다. 또한 쇄국 정책을 고집하여 두 차례의 양요를 치르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천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천주교를 박해하다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

 


대원군의 개혁 정책

 


1863년 흔히들 강화 도령으로 부르는 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뒤를 이을 왕자도 없이 35세에 숨졌다. 세자가 없으니 왕실의 종친 가운데서 다음 임금 감을 물색하다가 겨우 12세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26대 고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로써 60여년 간 권력을 쥐고 흔들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력은 무너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시대가 온 것이다.

왕실의 종친이기는 했지만 드센 안동 김씨의 세력 밑에서 거짓으로 미친 거렁뱅이처럼 위장하여 목숨을 이어 오던 그였다. '상가집 개'라는 치욕적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때를 기다리던 그였다. 가난과 멸시 속에서 안으로 칼을 갈면서 지내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그였다. 대원군이란 원래 다른 집 자손들이 들어와서 왕이 될 때 그 임금의 아버지에게 주는 벼슬이다. 흥선 대원군은 나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나라를 과감하게 개혁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세도를 부려 온 안동 김씨 일파를 대부분 몰아내고, 파벌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능력에 따라 인재를 가려 썼다. 그리고 왕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정부 기구를 대폭 개선했다. 또한, 나라의 법질서를 바로잡고, 양반들에겐 세금을 내도록 하고, 백성들의 세금은 크게 줄였다. 사원도 전국에서 뛰어난 인재를 양성하던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등 47개만 두고 6백여개를 철폐시켰다. 이에 지방 유생 (공자의 학문인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샀다.

" 공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를 꾸짖는다 해도 이 정책은 밀고 나가겠다. "

대원군은 또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던 도포자락도 짧게 자르도록 했다.

" 긴 도포 자락에 뇌물을 숨겨 가지고 다닐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리고 공연히 거들먹거리면서 물고 다니

는 긴 담뱃대를 짧게 하고, 큰 갓도 적당히 줄이도록 하라. "

이른바 의식 개혁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경복궁 복원 운동과 천주교 신도를 비롯해 외국 신부 9명을 죽인 병인박해, 그리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갈등을 거치다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뒤 그는 좋아하던 난초 그림만 그리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1898년에 숨을 거두었다.

<흥선대원군의 연대표>

 

1820년: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31년: 민씨집안의 딸과 결혼함

1843년: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됨 방탕 생활을함

1863년: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없이 병에들어 죽자 흥선군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름(고종) 대원군이 되어 섭정을 시작함 공평하게 인재등급,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징수함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함 공사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원납전"을 발행

1866년: 민치록의 딸을 고종의 비로 맞아들임 프랑스신부를 처형한것을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프랑스 군을 무찌름(병인양요) 쇄국정책을 강화함

1867년: 경복궁에 불이남 다시 "원납전"을 발행

 

1868년: 경복궁을 완성함

1871년: 미국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하자 미국군들을 무찌름(신미양요) 전국에 척화비를

세움

1873년: 11월 고종이 직접정치를 하겠다고해 정치에 물러남

1882년: "임오군란"으로 다시 정권을 잡음 민비의 모함으로 청나라에감

1885년: 조선으로 돌아옴

1895년: 민비가 일본인에 피살되어 고종의 요청으로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후

스스로 물러남

1898년: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남

 

 

흥선대원군 일대기

 

1820년 왕족인 남연군의 아들로 태어남
1831년 12살.여흥 민씨와 결혼, 어머니가 돌아가심
1836년 17세.아버지가 돌아가심
1840년 21세.흥선정이 됨
1843년 24세.흥선군이 됨
1846년 27세.능을 이장하는 부서의 감독관이 된 뒤 여러가지 한가한 직책을 밭아 봄
1863년 44세.그동안 세력다툼에 끼지 않기위해 피폐하게 살다가 철종이 죽자,
조 대비와 손을 잡고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고종)에 오르게 하고,
대원군이 되어 어린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함.
1865년 46세.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경복궁 재건 공사 시작.
1866년 47세.천주교 박해령 내림.프랑스 신부 처형,이대부터 6년동안 8000여명의 천주교도를 학살함
1868년 49세.경복궁을 완성함
1871년 52세.왕으로부터 인정받은 47개 서원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을 모두 철폐함.
강화도의 미국 군함을 물리침.
1873년 54세.명성황후의 세력에 밀려 권력을 잃고 양주의 곧은골로 내려감
1882년 63세.임오군란으로 민비가 도망가자 다시 실권을 쥠.
그러나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아 청나라군대에 납치되어 귀양살이를 함.
1885년 66세.청나라에서 풀려나 위안스카이와 귀국함
1887년 68세.큰아들 재면을 내세워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함.
1895년 76세.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을 정하여 유폐생활을 강요당함.
1898년 79세.세상을 떠남

 

명성황후 일대기

 

여흥부원군 민치록의 딸로서,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집안의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해 정권이 장악된 순조·헌종·철종의 3대 60여 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간택하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총명했기 때문에 왕비가 되고 몇 년 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서 흥선대원군과 정적의 관계에 놓이게 되어 결국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이 벌어진 원인은 궁녀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완화군을 흥선대원군이 세자로 책봉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벌어지자 대원군의 정적인 안동 김씨 및 대왕대비 조씨의 세력 및 유림과 규합하고 유림의 거두 최익현에게서 흥선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1873년의 이 상소로 인해 흥선대원군은 실각하고 명성황후는 일족인 민씨들을 등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1882년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은 서로 협력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켜 명성황후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으나 명성황후는 궁에서 빠져나와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그에 응하여 출동한 청군은 대원군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여 명성황후는 위기를 넘겼다.

그 후 명성황후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개혁이 늦추어지자 개화파의 불만이 증가하여 급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급진 개화파는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다시 청군이 개입하여 정권은 명성황후가 지원하는 온건 개화파에게로 넘어갔다.

이후로 계속되는 외교문제가 명성황후의 주도로 해결되고,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내정이 혼란해지자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청에서 돌아와 은거하던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명성황후를 견제하려 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친러파를 중용하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1894년에 동학교도가 중심이 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하게 되자 조선에서의 세력확장을 노리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조선의 재정에 간섭하려 하였고 명성황후는 이에 대항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친라파를 제거하고 조선에서의 우위를 얻기 위하여 친러파를 후원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으며 (을미사변) , 고종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폐서인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1895년 10월 10일에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어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대되었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붕어하자 2월에 미금시로 이장되었다. 명성황후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

 

 

2.

1800년대.. 19세기말... 조선말.// 

서양 열강이... 개방, 개항을 요구하던 시기였죠..

 

 

3.

 

 

명성황후는 나라를 개방하여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국력을 키워 강대국들을 방어하자는 정책인 반면

흥선대원군은 현재 이 시점에선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며

나라의 문을 굳게 닫는 폐쇄정치를 하였습니다

 

이둘은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죠

그럼 아들인 왕은 뭐할까요?

고종은 어릴때 왕에 올라

20살 까지만 흥선대원군이 대신 정치를 해주죠

그런데 고종이 명성황후와 결혼하고나서 명성황후의 매력에 푹 빠져

20살이 되어도 정치 할 생각도 안하고

흥선대원군은 20살이 되어도 정치권을 넘겨줄 생각을 안했습니다

그러자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을 내몰고

고종에게 정치권을 넘겨

은근슬쩍 명성황후가 정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명성황후의 정책 장단점은

서양문물을 받아드리면 외교마찰을 줄이고 국력을 키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립이 생기겠죠

진보와 보수

대표적인데 구식군대와 별기군인데

명성황후가 정치권을 잡고 나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듭니다

그런데 별기군과 구식군대를 차별하기 시작했고

결국 이를 못참은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명성황후는 피신합니다

대신 다시 흥선대원군이 정치권을 잡게되죠

어째뜬 서양문물을 받아드리는 취지는 좋았으나 받아드린 후에

일까지 체계적으로 생각하지 못한점이 아쉽죠

 

흥선대원군의 정책 장단점은

일단 문을 닫아 중립을 표하며

다른나라와 통상을 안하겠다는 것은

청나라를 모방한 것입니다

독자적이지 못했죠

하지만 청나라는 동서문화를 교류하는 중요한 역활이다 보니

나라의 문을 완전히 닫을수도 없고 완전히 열수도 없어서

제한적으로 무역을 허용했죠

 

흥선대원군이 폐쇄정책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일제시대가 없었을지도 모르죠

 

 

 

<명성왕후>1851-1895(철종2-고종32)

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왕비로 간택되어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하였다.
명성황후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외척에 의하여 국정이 농단된 3대(순조·헌종·철종) 60여 년간의 세도정치의 폐단에 비추어 외척이 적은 민부대부인(閔府大夫人)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한 흥선대원군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민비)는 우리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현재에 텔레비 드라마와 오페라 또는 책으로 이들을 재평가하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서울 또는 경기도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으며 죽어서도 흥선대원군의 묘소는 남양주 화도면, 민비의 능은 미금읍(홍릉)에 있어 구리 문화권에 있다. 이 둘이 벌인 갈등과 이야기를 알아보자.
흥선대원군은 척족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에게 핍박을 받으며 진저리를 쳤다. 60여년 동안 이들 척족세력이 모든 정치권력과 재물을 손아귀에 넣고 임금의 자리까지 마음대로 주무른 행태를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을 꺾지 않고는 이씨 왕조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파락호 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노린 끝에 그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런 뒤에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풍양 조씨의 세력을 꺾었다. 다시는 척족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 조처를 이룩하였다. 일단 왕가의 위엄이 바로 서는 듯하였다. 10여년 동안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은 강력하게 추진되었고 때로는 쇄국정책과 동학 천주교의 탄압 등 무리한 조치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비 곧 며느리를 고르면서 여러 모로 고심하였다. 척족의 등장을 막고 어딘지 어리숙한 고종을 내조할 현숙한 여인을 고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뼈대있는 집안의 딸이면서 가문의 세력이 크지 않는 처녀를 골랐다. 그의 처가는 여흥 민씨였는데 이 집안을 주목하였다.



2) 민비와의 첫 갈등
흥선대원군은 사도세자의 증손자가 된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 아들이 없자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삼았다.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대원군이었으니 은신군과 흥선대원군과는 직계 혈통으로 따져서는 15촌의 족조(族祖)가 된다. 한편 양가의 촌수로 보아도 철종과는 6촌 사이가 된다. 영조의 아들은 사도 세자 하나만 장성하였고 사도세자는 정실에서 아들로 정조 하나, 후궁에게서 아들 셋을 두었으나 후궁에서 난 두 아들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이런 연유로 영조 혈통의 왕손이 귀한 탓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앉게 되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여흥 민씨들은 경기 여주 일대에 살았다. 이 민씨들은 숙종의 비 인현왕후를 배출하기도 하고 민진원 등 정승 판서를 대대로 배출한 집안이었다. 그러다가 안동 김씨 세도아래에서는 숨을 크게 쉬지 못하고 살면서 몰락을 거듭하였다. 민비는 여주 섬락리에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민치록은 아들을 두지 못해 민치구의 아들 곧 11촌 조카인 민승호를 양자로 들였다. 흥선대원군은 민치구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의 처남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갔으니 민비의 사람됨과 처지를 잘 알았다. 민비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어 고아나 진배없이 자랐다.
흥선대원군은 이런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처럼 왕비간택에 빈틈이 없다고 여겼으나 그가 일생일대에 실수를 저지른 결과를 빚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민비는 15세에 궁중에 들어왔다. 외로운 사춘기 소녀인 민비는 시부모로부터 귀여움을 받고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왕은 후궁 이씨만을 가까이하였고 끝내 그녀가 입궐한 지 2년 뒤 이씨에게서 왕자가 탄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 왕자를 완화군으로 부르게 하고 아주 귀여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정사를 돌보려 궁궐에 들어오면 궁인 이씨와 완화군을 만나보고 완화군을 어르면서 민비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흥선대원군도 여인의 질투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이런 속에 민비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왕자를 낳았다. 흥선대원군도 기뻐 건강하게 자라라고 산삼을 보내 달여 먹이게 하였다. 산삼을 달여먹은 이 왕자는 태어난 지 5일만에 죽었다. 민비는 자신을 미워하여 새 왕자를 죽이려 산삼을 달여먹이게 하였다는 의구심을 가져 앙심을 품었다.
민비는 영리하고 두뇌 회전이 빨랐으나 질투심이 강하고 독점욕이 많았다. 흥선대원군은 치밀하고 용기와 결단력을 지니고 있으나 작은 일에 소홀히 하는 성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때 민비의 마음을 읽지 못하였다. 민비는 은밀히 작전을 개시하였다. 고종의 마음을 휘어잡고 양오라비 민승호를 불러들여 세상 동정을 얻어듣고 흥선대원군의 반대세력을 규합하였다.



3) 민비의 공작으로 흥선대원군 실각
흥선대원군의 반대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정계에서 몰락을 거듭하며 기득권을 박탈당한 문벌들이었다. 둘째는 서원에서 기생하던 유생들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려 유생들을 서원에서 몰아내자 유생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들 기득권 세력은 기회만 오면 흥선대원군을 타도하려 하였다.
민씨들은 유생의 대표격인 최익현을 내세웠다. 1873년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규탄하고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하였다. 물론 그 명분은 왕의 나이 20세가 되었으니 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소가 들어오자 민비는 왕에게 온갖 책략을 구사해 아버지의 턱짓에 놀아나지 말고 스스로 정사를 재단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사리로는 당연한 권고였다.
고종은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복종하기는 했으나 아버지의 강력한 힘에 가려 자신의 무능과 위축이 드러난다고 여겼다. 일종의 열등감이었다. 고종은 용단을 내려 아버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아버지의 전용 출입문인 연추문을 닫아걸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 사실에 망연자실하였으나 어찌해 볼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대비 조씨의 지원을 얻으려 하였으나 조씨도 흥선대원군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처지였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지 10년이 되던 해였다.
민비는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새로운 세력 판도를 짰다. 그녀의 오라비 민승호와 안동 김씨의 김병기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맡아들인 이재면까지 단계적으로 끌어들여 요직에 앉혔다. 무엇보다 흥선대원군이 벌인 정책을 뒤집어 놓았다. 쇄국정책을 철폐하고 서원을 복설하였다.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었고 전국에서는 다시 서원을 짓느라 소란을 피웠다.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이나 양주의 농장을 드나들면서 분을 삭히고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때로 분노를 난초를 치며 삭였다.
민비는 무능한 왕을 손아귀에 넣고 권력을 농단하였다. 여주의 민씨 족속들은 이권과 세력을 잡기 위해 날뛰었다. 민씨들은 예전 척족정치 때보다 더욱 권력을 틀어쥐고 이권을 낚았다. 10여년 동안 민씨들은 요직을 거의 다 차지하고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철저한 척족정치를 단행하였다. 외국에 광산 개발권 등 이권을 팔아먹고 차관의 돈마저 떼먹기까지 하였다. 이들 민씨들은 너나없이 벼슬을 팔아먹었다.



4) 두 사람의 반격과 반전
흥선대원군은 참으로 통분해마지 않았다. 이에 구식 군인들이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지르고 민겸호를 죽였으며 이어 궁궐에 쳐들어갔다. 흥선대원군은 군인들이 궁궐에 쳐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궁궐로 들어가 대전의 대청에 앉아 있었다. 군인들이 민비를 찾아 헤맬 적에도 흥선대원군은 말리지도 않고 바라보았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조종하여 정변을 도모한 것이다. 이 사건을 임오군란이 부른다.
민비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그녀는 궁녀의 복색을 하고 가마 속에 앉아 있었다. 군인들이 민비를 끌어내려 하자 별감 홍재희는 "궁녀인 내 누이동생"이라고 속였다. 홍재희가 인도하는 가마는 나는 듯이 충주 장호원으로 내달았다. 민비는 천행으로 살아 장호원의 먼 일가붙이 집에 숨었다.
흥선대원군은 민씨들을 몰아내고 시체도 확인치 않고 민비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앞 뒤 가릴 이성이 없었다. 민비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밀사를 고종에게 보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그 대비책도 일러주었다. 고종은 이에 힘입어 청 나라에의 도움을 받으려 임오군란의 조종자는 흥선대원군이라고 일러바쳤다.
이에 청 나라는 조선에서 일본에 밀리고 있는 현실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서울에 주둔해 있는 군대를 풀어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중국으로 데려가 천진에 유폐시켰다. 사태가 반전되자 민비는 떳떳이 나타나 철저하게 흥선대원군 세력 제거에 나섰다. 피의 보복이 반복되었다.
민비는 가위 미쳐 날뛰었다. 민씨들을 더욱 끌어들이고 그녀를 피신시키거나 도와준 자들에게 후한 상과 벼슬을 내렸다. 홍재희는 무식한 인물이었으나 경복궁 경호의 책임을 맡기도 하고 군사 지휘권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더욱이 복을 빌려고 무당을 궁중에 끌어들여 푸닥거리를 일삼고 그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작호를 내려주기도 하였다. 또 며느리로 9촌 조카뻘이 되는 민영익의 딸을 들였다.
흥선대원군은 4년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그가 서울에 돌아와서는 더욱 운신의 폭이 좁았다. 자기 세력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아들과 며느리와 원수사이가 되어 있으면서 시기를 엿보았다. 마침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민비는 청 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농민군의 관군토벌사령관으로 심복인 홍계훈(홍재희의 바꾼 이름)를 보냈다. 홍계훈이 일단 타협을 모색하고 전주에서 후퇴하였다.
하지만 청 나라 군대가 상륙하자 일본 군대도 천진조약을 핑계대고 출동하여 청일전쟁이 유발되었다. 이때 일본군이 승리를 거둔 뒤 개화정권을 수립하고 흥선대원군을 집정으로 추대하였다 그 동안 흥선대원군은 농민군 지도자들과 은밀하게 내통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와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그가 가장 미워하던 일본군의 등에 업혀서 집권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이 궁궐로 나오자 개화파인 안경수가 "민씨들이 나라를 망쳤으니 모두 죽이자"고 건의하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지금 죽이고 살리는 것은 제군 손에 달렸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민비는 "흥 대감께서 후덕후구려"라고 앙칼지게 말하였다. 어쨌든 민씨들은 죽거나 유배를 가거나 도망치거나 하였다. 그런 속에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잡지 못하고 나날을 보냈다.
민비는 다시 수완을 발휘하였다. 자신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일본세력을 꺾으려 하였다. 이 일을 일본측이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관의 지휘를 받은 낭인패들이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민비를 찾아내 칼로 죽이고 시체를 불에 태워버렸다. 민비는 45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것이 국모시해사건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민비가 죽은 뒤 3년을 더 살았으나 오욕의 나날을 보냈다.



5) 역사의 심판 받아야
이렇게 권세를 놓고 치사스런 싸움을 벌인 이들은 도대체 역사에 무엇을 남겼는가? 적어도 두 인물은 전반기에는 그런 대로 재주껏 권력을 요리하며 판도를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노회한 정객과 간교한 여인이 왕과 외세를 업고 엎치락 뒤치락을 거듭하였다. 그런 끝에 나라를 망쳤다.
유교 윤리로 따져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천륜이다. 그러나 권력과 이해 앞에서 그런 천륜은 하잘 것 없는 걸레조각이었다. 이들은 질투와 보복과 술수와 살육을 반복하면서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씨 왕가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부자의 관계만을 흐려 놓은 것이 아니라 처남 시숙 손자 등 온 가족을 원수의 사이로 몰아넣었다. 그가 죽었을 때 아들 고종은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의 손을 뻗치는 시대에 온 역량을 모아 나라를 구하려 해도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텐데 치졸한 권력투쟁만을 벌였다. 우리는 두 사람의 일을 오늘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파란만장한 개화기의 보수주의자
근본은 양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해어진 도포, 떨어진 갓, 어느 모로 뜯어보든지 한 표랑객에 지나지 못했다. 개가 한 마리 따라오면서 짖었다. 마치 물고늘어지려는 듯이 그에게 달려들면서 짖었다. 그는 비틀거리던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초라한 옷, 작다란 몸, 어디로 보아도 시원치 못한 이 취객은 자기에게 달려드는 개를 굽어보았다.
-김동인, 『운현궁의 봄』

위의 대목은 소설로서는 사실에 너무 충실하리만큼 흥선대원군을 그리고 있는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에서 따온 것이다. 대원군이 낙백해 있던 시절의 모습이다. 때는 19세기 중엽, 20만 인구를 감싸고 있는 도성은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지만, 속으로는 곪아터지고 있던 때였다.

파락호로 전락한 어엿한 왕족
위의 대목은 물론 아직 대원군이 되지 않았던 시절의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모습이다. 어쨌든 그로 말하면 '군' 자가 붙은 어엿한 왕족이었다. 그것도 헌종과는 7촌 아저씨 사이였고, 그 뒤를 이은 철종과는 6촌간이었다. 철종이나 흥선군은 저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지만, 그들의 할아버지가 모두 서출이었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벽파에게 몰려 죽고 난 뒤, 그 주동자인 노론의 김귀주(金龜株) 등은 은언군(恩彦君 : 철종의 할아버지)을 강화도로, 은신군(恩信君 : 흥선군의 할아버지)을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로부터 순조와 철종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아래에서 이들 자손은 눈엣가시처럼 냉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헌종과 철종에게서 후사가 없자, 이들은 늘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세도를 잡은 안동 김씨들은 왕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는데, 예전에도 그러했듯 똑똑한 인물은 제거해버리고 자기들 손아귀에서 놀 수 있는 인물만을 골라 왕위에 앉혔다. 철종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런 처지에 똑똑한 체하며 함부로 왕위를 넘보다가는 목숨을 날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외면하고 제법 똑똑한 체하며 왕위를 넘보다가 안동 김씨에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하전(李夏銓)의 경우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 이다.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흥선군은 안동 김씨에게 붙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의지대로 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도 관례대로 가까운 왕족·종친에게 주는 종친부의 하찮은 벼슬도 해보았고, 또 아무 실권도 없는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 오위도총부도총관 따위를 얻어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안동 김씨에게 빌붙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허상의 껍질을 깨고 그는 파락호(破落戶)로 전락했다.
흥선군은 하찮은 벼슬을 하면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여 건물에 거미줄 하나 없도록 직무에 충실했고,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인술(用人術) 또한 인정을 받았다. 그 뒤 그가 파락호로 전락했을 적에,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동 김씨들의 주목에서 벗어나려는 위장술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위장술은 너무나 철저했다.
그는 일부러 안동 김씨들의 잔치에 불쑥불쑥 나타나서 차디찬 눈길을 모르는 체, 허겁지겁 술과 안주를 집어먹었다. 또 벼슬아치들의 놀이나 시회(詩會)가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남은 음식들을 해치웠다. 그럴 적에 안동 김씨들과 벼슬아치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여염의 상가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고, 목로주점에 앉아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셔댔다. 종친의 신분으로 대감의 품계를 지니고 있는 처지로는 이만저만한 탈선이 아니었다.
안동 김씨들은 현재의 왕인 철종에게까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는 판이라, 그에게도 처음에는 좀 점잖게 '궁도령'이라 부르다가, 뒤에는 '막걸리 대감', '상갓집 개'라 불렀다. 이런 수모에 한점 관심도 두지 않고 그의 난행은 더해갔다. 그는 종로의 장사치들이나 무뢰배(일종의 깡패)들과 어울려 투전판에도 뛰어들었고, 때로는 무뢰배들과 짜고 사기 투전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또 그는 돈이 떨어지면 제법 높은 솜씨로 난초를 그려 대가들에게 팔아달라고 구걸했다. 때로는 그럴 듯한 표구까지 곁들여 돈을 우려냈다. 그에게 녹봉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높은 품계의 종친인 그에게 쌀 두 섬, 콩 한 섬 정도를 주었지만, 이것은 몇 명의 청지기를 거느린 그의 식솔들의 땔감이나 밥거리도 못 되었다. 그러니 술값을 우려낼 방도가 따로 없었던 것이리라.

암중모색의 포석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술주정꾼이나 투전꾼만은 아니었다. '상갓집 개' 시늉을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동태를 예리하게 살펴보고 있었고, 정계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철종은 후사가 없었고, 또 병골로 언제 국상이 날지 몰랐다. 그는 국상이 날 적의 사태를 대비했다. 만약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한다면 왕위는 누가 이을까? 이 절대의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 헌종의 어머니요, 익종의 비인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궁중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자기 친정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에게 밀려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였다. 보잘것없는 남은 종친들이 모두 안동 김씨에게 빌붙어 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흥선군은 조대비의 친정 동생 조성하(趙成夏)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그리고 조대비에게 다리를 놓게 했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기는 안동 김씨에게 빌붙지 않았음을 알리고, 둘째 아들 개똥이가 영특함을 은근히 자랑했다. 한편, 어린 둘째 아둘에게는 제왕의 몸가짐과 학문을 끊임없이 연마하게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해서 술청이나 투전판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염탐하고 민심의 동태를 끊임없이 파악했다. 또 술친구요, 사기 투전패거리인 천·하·장·안을 풀어 많은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이들은 이속배(吏屬輩)이면서 궁녀의 오라비들로, 천히연·하청일·장순규·안필주 등의 무뢰배였다. 이들이 바로 흥선군의 오른팔로 흥선군이 두들겨맞으면 구해주고, 흥선군의 투전밑천이 떨어지면 어디서든 구해왔다. 또 안동 김씨 중에 김좌근(金佐根)·김병익(金炳翼) 부자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불만에 차 있는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과 사이를 두텁게 해두기도 했다.
때는 왔다. 철종이 죽은 것이다. 그는 적어도 철종의 죽음을 안동 김씨들보다 한발 먼저 알아냈다. 그는 조성하를 통해 조대비를 만나 각본을 짜주고, 한편 원로대신이면서 안동김씨가 아닌 정원용(鄭元容)·조두순(趙斗淳)에게 흥정을 했다. 개똥이, 아니 재황(載晃)의 대통논의에 반대하지 않는 대가를 제시한 것이다.
조대비는 옥새를 거두어 안동 김씨의 반대 기회를 봉쇄하고, 일사천리로 재황의 왕위계승을 공표했다. 자기 패라고 믿었던 정원용·조두순까지 찬성하는 모습을 안동 김씨들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온 나라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주름잡던 안동 김씨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상갓집 개'에게 물린 것이다.
'막걸리 대감'은 주정뱅이가 아니었다. 이제는 찬란한 조복을 차려입은 흥선대원군의 빛나는 눈빛, 당찬 걸음걸이, 위엄이 깃들인 목소리, 이 앞에서 안동 김씨들은 쩔쩔맸다. 목숨만이라도 살려주기만을 바랐다 섭정 이하응이요 국태공 이하응이었다. 시절도 봄이거니와 삼천리 강산이 놀아나게 되었다. 아니 그는 5백 년 왕권을 쥐고 흔들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원리' 대로 새 인물을 등장시켰다. 그는 이 나라의 고질인 당색을 떠나 인재를 고루고루 등용했다. 남인니건 북인이건 쓸 만한 인재면 경상도에서도 불러오고 충청도에서도 불어왔다. 그러면서 조두순을 영의정으로, 김병학을 좌의정으로 정원용의 아들은 판서로 기용했다. 쉽게 말해서 문벌과 지연과 당색을 고루 기용한 실로 거국내각이었다.
한편 안동 김씨들의 우두머리인 김좌근과 김홍근의 벼슬을 떼고 김병익·이유원(李裕元) 등 민원 대상자를 좌천시키고, 그들이 모은 재산을 복수에 불타는 조대비궁에 바치게 했다. 민원을 가라앉히고, 조대비이 복수심을 삭히고, 정치적 보복을 피하고, 불의의 재산을 몰수하는 몇 겹의 포석이었다.
노론계열, 그중의 안동 김씨들은 비록 세도가 무너지고 재산을 빼앗겼으나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천만다행으로 여겼고, 백성들은 이제야 살길이 생기나 보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랬다. 그는 천·하·장·안 들을 전국에 풀어 수탁을 일삼는 수령방백들을 가려내 처단했고, 여러 가지 명목의 세금을 균일세(均一稅)로 통일했으며, 관권 위에 군림하며 온갖 폐단을 저지르던 서원의 철폐를 단행했다. 실로 눈부신 업적이었다.
그는 또 시정의 잡배라도 일기일장만 있으면 그에 걸맞는 벼슬을 주었고, 떠도는 가객·역사라도 쓸 만한 재목이면 불러다가 부려먹었다. 운현궁에는 '내가 인재'라고 생각하는 놈팽이들이 들끓었다. 그 집 사랑채는 누구든 출입할 수 있게 문이 열려 있었다. 어느날은 서생 하나가 찾아들었다. 묵묵히 난초를 치고 있는 흥선대원군에게 공손히 절을 했으나 흥선대원군은 본체만체 하던 일에만 열중했다. 머쓱해진 서생은 또 한 번 절을 했다.
"내가 죽은 사람인가!"
"아니올시다. 먼젓 번 절은 문안인사옵고, 이번 절은 하직인사올 시다."
이렇게 사람을 다루어보는 것이다. 이 기지에 찬 대답으로 그 서생은 인물 테스트에 합격했다. 그는 도통 아부를 싫어했고, 흐물흐물한 호인형의 인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극도에 달한 서원의 횡포
서원은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의 교화를 맡은 사학기관의 하나로 만들어졌다. 고려 말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시초로 하여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곧 16세기 중엽,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백운동 서원에 내리고, 읽을 책과 부릴 노비와 경비에 쓸 토지를 내려주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뒤 각지에 서원이 설치되었고, 기부받는 일이 허락되었다.
또 서원의 면모를 갖추기 힘들면, 글을 익히는 재실(齋室), 제사만 지내는 향사(鄕祠) 따위가 생겨나 서원 구실을 했다. 여기에 딸린 토지는 면세되었고, 유생은 벼슬줄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에 따라 어떤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을 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서원을 제멋대로 세웠다.

 

 

 

 

 

 



운현궁의 가을

고종황제 -

한때 무능하고 나약한

임금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열강의 야욕에 맞서

처절히 항거한 수 많은 증거가

발굴되고 있다.

선조 -

우리는 대부분

겁많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알고 있지만

그의 높은 경륜과

적절한 인재 기용이 있었기에

전대미문의 병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지킬 수 있었슴이 증명되고 있다.

민비 -

여우사냥으로 희생된 그녀가

시아버지인 대원이 대감에

맞서지 말고 合心했다면

대한제국이 일본제국보다도 훨씬

빨리 근대화되고 자주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포악한 승냥이들이 조선에 몰려들었을지라도

일국의 국모를 감히

건드릴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곰곰 생각해 본다.

어쨌든

왕권을 지키려 맞서 싸웠던 민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적수인

시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간택되어

한동안 한 울타리에서 기거하면서

왕가의 윤리를 학습받고

혼례식을 치뤘던 운현궁.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그 혼례 재현 행사가

해마다 펼쳐진다 한다.

아내 동행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

차례로 둘러보다.

운현궁의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운현궁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사적 257호인 운현궁(雲峴宮)은

파란만장한 기울어져 가는 조선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살았던 역사적인 곳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작은 사가였던 이곳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사가를 증축하여 제법 규모가 컸었는데

일부가 덕성여자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고 전 동양방송에도 일부가 팔려나가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이노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

등만 남아 있어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내정(內庭)에는 아직도 고종이 오르던 노송이 있어

정2품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리우고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 창덕궁에 거처가 있던 시기에는

고종의 전용 출입문인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인 공근문(恭勤門)이 있었고

아재당(我在堂)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규모가 작아

운현궁을 찾는데도 쉽지가 않게 되어있는데 나중에 예산이 허용하면

주변 건물을 매입하여 모두 복원해서 역사의 현장을 살려야 하고

장기적으로 서울의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종이 나이가 어려 섭정(1863~1874년)의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고뇌의 삶을 살았던 풍운아 대원군!

세계 제국주의 열강이 동양을 침탈해오던(西勢東占) 조선 말기,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발전을 크게 지체시켰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힘이 빠져가는 청나라 상황를 면밀히 분석하며

비록 약소국이었지만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는 치열한 자주정신,

북경의 자금성에 80%가 넘는 우람한(?) 규모로 중건한 경복궁 공사

(당시 주변 속국들은 자금성 규모의 70%가 넘는 궁궐건축은

불허되었다 한다.)등을 추진하였으며

안동김씨를 비롯한 몇몇 권세가문의 세도정치에 맞서

당시 전국적으로 서원에서 공부하던 양반들에 의한 폐해가 심각하자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한 한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속에서 불운한 젊은시절을 보냈다.

1933년에 김동인님이 발표한 '운현궁의 봄'이라는 장편소설은

흥선 대원군의 일생과 조선 말기의 복잡한 내외정세와

당시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김씨를 비롯한 권세가의 폐해를 적시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고 씌여졌다.

여기에는 지배계급이었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과 그럼에도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음에 대한 좌절,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경험과 장부의 기개가 살아있던

이하응이 호령을 하면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대장부 흥선대원군의 기개 등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담백한 문장으로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였는데

최근 10년을 전후한 대원군이나 고종

또는 명성왕후를 소재로 한 TV드라마나 영화는

이 '운현궁의 봄'에서 많은 영감을 얻거나

작품내용을 참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본다.

1820년에 태어나 12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때엔 아버지 남연군마저 여의고 종친의 양자로 들어간 이하응은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왕의 종친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를 뼈져리게 깨달으면서

허허롭게 세상을 관조하였고

추사 김정희선생으로 부터 배운 난(蘭)과 그림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였으나 너무 많은 같은 그림을 팔아

시중에 가격이 떨어져 춥고 배고푼 생활을 하면서 젊은 날을 견디어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깨닫게 되고

안동김씨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건달 또는 파락호들과 어울려 놀다가

양반들에게 따귀를 맞거나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그 집 하인에게 얻어 맞은 사건도 발생하게 되는 등

그의 젊은 날은 파란만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젊은 날의 다양한 경험 덕분에 왕의 섭정자리에 올라서는

세상을 낮은 곳에서 부터 높은 곳까지 통찰하면서

당시 시대정신에 맞는 정채글 펼쳐

시민들의 박수를 받은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다.

하지만 고종의 성장과 자기가 직접 간택하여 믿었던

명성왕후와 명성왕후 외척인 민씨일가,

청나라에 빌붙는 사대주의에 발목이 잡힌

조정 대신들의 면종복배로 인해 퇴위하게 되었고

1898년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78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으나

아직도 풍운아 대원군의 이름은 인기리에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줄거리>

이 작품은 전 25장으로 된 장편 소설이다.

1장에서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기 전으로

이하응의 권력 지향과 영웅성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며,

2장에서는 명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는

300년 간의 조선조 정치사가 요약되었고,

3장에서는 해가 바뀐 신유년의 사건으로 전개된다.

4장에서는 흥선이 조 대비와의 만남으로 인해

장래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고,

5장은 김병기로부터의 수모,

6장은 민숭호의의 인연 구축,

7장은 영의정 김좌근의 애첩 양씨의 권력 행패,

8장은 동궁 책립에 대한 조 대비의 의향 타진,

9장은 김병국 일파로부터의 망신과 조롱,

10장은 양씨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12장은 김문 일파의 음모로 터진 이하전 역모 사건,

13장은 흥선과 심복들이 투전에서 포교와의 금전거래,

14∼20장까지는 현 제도의 모순과 위정자들의 타락상이 표출되며,

25장에서는 계해년이 지나 갑자년 정월에

26대 조선 국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등장 인물의 성격>

▷이하응 - 흥선 대원군. 야인으로 추락하여 갖은 천대을 견디어 대권을 잡는 인물.

▷조성하 - 조 대비의 조카. 승후관.

▷김병국 - 안동 김씨 세도 김문근의 일족으로서 이하응에게 호의적인 인물.

<핵심 사항>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조선 왕조 말기 철종 등극 직후부터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까지의 격변기.

▷주제 : 격변기의 민족 현실과 민족 정신.

<감상의 길잡이>

<1>

<운현궁의 봄>은 1933년 4월 26일에서 다음해 2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상승적 구조'를 보인다는 것과 남의 천대에 대한 분노,

즉 인격적 모독에 대한 반발의 원리 등이 역사적 도정의 과정을 통하여 응축되어 있는 데 있다.

또한 대원군이란 인물을 긍정하는 데서 오는 역사적인 사실 인식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일제 치하의 상황을 민족의 역사 의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민족적 울분을 부추기고 공동화(共同化)된 의식을 되찾으려고

노력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 하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역사 소설을 선택했으며,

이는 민족적인 의식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1930년대의 역사적 소재를 통한 민족의식 함양과

국민 문학파의 소설적 성과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붉은 산>, <태형> 등과 함께

그의 민족주의적 작가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2>

김동인의 대표작인 운현궁의 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쇄국정책의 상징적 인물이며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유일한 대원군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안동김씨의 감시권 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건달 노릇을 하던 시절부터

조대비와 연합해서 자신의 둘째아들(나중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섭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내가 보기엔 사실적이 아닌 사실 같다.)으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권력쟁탈전

(태종 이방원 : 다른 왕자들,

세조 : 단종(의 추종세력들 장희빈(을 위시한 그녀의 추종세력들) :

인현왕후(을 추종하는 세력들), 광해군(을 위시한 추종세력들:

영창대군(을 위시한 그의 추종세력들), 등)의 하나인 흥선대원군 :

안동김씨에 대해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권력 쟁탈전인 흥선대원군 :

민비의 시작인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첫 만남

(이때에는 민비가 아닌 민치록의 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온갖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타락한 흥선을 통해 안동김씨의 왕족에 대한 심한 견제을 통해

당시의 외척과 왕족의 갈등을 보여준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짧은 에피소드와

세간 청지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에 성행하던 매관매직과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나아가 당쟁의 폐해와 외척의 세도 정치의 극심한 폐해를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오른팔로 나오는 조성하와

한 늙은 선비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의 서원의 부패를 보여준다.·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고위관리들의 행차 모습과

흥선대원군이 조성하에게 대전통편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조선시대의 허례허식과 부패의 원인을 보여준다.·

김좌근의 첩 양씨의 시반선에서 던지는 밥을 줍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에 대한 이야기와 민란 이야기를 통해

그 당시의 피폐한 민중 생활을 보여준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흥선대원군이 골패점을 치는 장면을 통해 당시에는

화투가 아닌 골패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조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전기에는 무인들이 득세하였으나

후기에는 문인들이 득세하였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이 둘째 아들을 교육시키는 장면을 통해서

당시 궁궐에서 궁안에서만 쓰이는 궁화라는 특수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안동김씨와 김대비의 결탁과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을 통해서

왕의 후계자 결정권리를 왕 뿐만아니라 대비가 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집에 있는 사당과 왕족 이하전의 집에 있는 사당을 통해

당시 조상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조대비와 헌종의 에피소드와 철종을 통해서 왕족의 생활의 부자유성을 보여준다.·

김병기가 읽던 금병매를 통해 그 당시의 양반들에게도

지금의 베스트셀러처럼 유행하는 연애소설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종,민비 혼례식을 보고 느낀점 몇 마디...

김만중 | 조회 30 |추천 0 | 2001.04.25. 19:53

지난 토요일 퇴근길에 안국역을 향해 운현궁 앞을 지나가는데...

평소 인적이 없던 곳인데 사람들이 와글와글 하다.

나도 공짜구경은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지라 안에 들어가 보았다.

운현궁 마당무대에서 고종과 민비의 혼례식을 재현하는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마당에 넘쳐나는관중들 틈에서 까치발을 딛고서니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혼례의 절차와 복식은 철저하게 기록과 고증 따랐다고 하며

해설자가 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혼례식의 화사한 색채가 운현궁의 우중충한 건물과 대조를 이룬다.

이 혼례식의 Super Star는 단연 민비이고

조연은 고종과 이 운현궁의 주인인 대원군이다.

주욱 지켜보니 아무리 왕실의 혼례식이라지만 너무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대원군 부인이 대궐로 떠나는 민비에게 "부디 법도를 지키시며.." 하면서

덕담을 나누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때 고종이 15세, 민비가 16세이고 지금부터 130년 전이라고 한다.

특히 일반혼인과 다른점은 신랑신부 맞절 시 신랑인 왕은 절을 하지않는다.

해설자의 말 인즉 왕은 지존이므로 어느누구에게도 절을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례식의 High Light는 민비가 모든 신하들과 상궁 등 궁녀들로 부터

국모로서의 예로 절을 받는 장면이다.

여주에 살던 조실부모한 소녀가 국모 즉 무한권력의 중전이 되는 순간이다.

행사를 주최하는 팀에서 꼼곰하게 준비를 한것 같다.

대원군,신하들,상궁,궁녀,민비,고종 등의 인물은

당시의 나이에 맞는 세대를 선정했고,분장도 전혀 어설프지 않다.

복식과 동원된 각종 깃발도 사실감이 느껴졌다.

Performance를 하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행동했다.

혼례식장 경비를 하는 포졸들도 깃발든채

끝까지 근엄한표정을 유지하면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사전에 교육을 철저히 받았나 보다.

꼬마들이 옷을 잡아당기며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하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혼이란 인륜지대사라는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부모나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예날에도 그랬으며 왕실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당시 대원군은 왕실의 외척 안동김씨 세도에 치를 떨었던터라

부인(대원군 부인도 민씨)이 천거한 민비가 부모가 없는 것을

더욱 며느리로서 호조건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궁궐을 두고 사저인 운현궁에서 왕의 혼례식을 치르게 한것도

자기의 위상을 드 높일려는 책략이 아니겠는가.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민비시해 시 일본공사가 대원군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그뒤 민비는 어떠했나.

나라의 안위 보다는 민씨일파의 권력유지에 더 신경을 썻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을 때

영원히 귀국 못하도록 청나라에 청원도 넣었다.

성격이 표독스러워 고종이 다른궁녀와 가까이 지내는 걸 알면 그궁녀를 요절을 냈다.

왕은 여러 여자를 취할 수있는 특귄이 있었지만 이를 인정 안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아관파천등의 사건 배후에는 대원군과 민비가 있었다.

그러면 고종은 어떠했나.

민비와 결혼 당시 이미 장씨 성을 가진 궁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한다.

민비에게는 괸심을 두지않아 민비가 대부분의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보내게했다.

아버지 대원군과 여장부 민비 사이에서 소신없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민비가 죽고나니 자기도 죽을까 두려워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서(우리는 역사시간에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배웠다)

사는 모습을 어디 체통있는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중들의 감탄속에서 혼례식의 재현은 끝났다.

그러나 이 화려한 혼례식의 주인공 세 사람은 뒤에 권력다툼을 일삼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한편으로 씁슬한 기분을 느끼면서 궁을 나와 안국역으로 향했다.끝



2011/10/2(일)

영등포에서 자전거로

마포-서대문-종로를 거쳐 동대문역에서 아내를 만나

서울 낙산성곽을 돌아보다.

서울 성곽 전체 18km를 하루에 종주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지만 아직은 시간과 여유가

허락치를 읺는다.

태어나 처음 가 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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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1]1893년~1895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를 가리키며, 크게 1894년 음력 3월의 고부 봉기(제 1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 2차)로 나뉜다.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 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 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감국(섭정.[2])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초기에는 동학난으로 불리다가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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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원인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은 농민들을 괴롭혔다. 전라도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가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한 다음 물값을 받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씌어 벌금을 받아 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이에 분격한 농민은 한문교사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은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의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들은 동학도들 대로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흥선대원군은 동학도들이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3]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3]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하였다.[3]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그는 농민 운동 당시 북접 소속 동학군 부대 지휘관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893년 12월부터 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긴 했으나 이후 고관들은 농민들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해 죽게 한다.

[편집] 경과

[편집] 제1차 봉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사발통문(격문)

이리하여 농민들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양력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줄행랑을 놓았고, 그들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다음 농민들은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편집] 제2차 봉기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몰아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4]과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2.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3.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4.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도 농민들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도달했다. 동학군의 봉기는 이로부터 본격화하였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시작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양력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 (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양력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5],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4월 19일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6]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양력 6월 11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특히 김개남은 5~6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들을 살해하여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편집] 제2차 봉기의 성격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7]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 이에 전봉준, 김개남이 적극 호응하였음은 물론이다. 체포된 이후 전봉준은 이를 부정하고 있으나 김개남은 대원군의 지시에 의한 것임을 자백하고 있다.[8]'는 것이다.

[편집] 제3차 봉기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읍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음력 5월 6일(양력 6월 9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일본은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음력 6월 23일(양력 7월 25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음력 9월 14일(양력 10월 12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에게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9]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음력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공주 이인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금강 건너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홍성 농민군은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편집] 대원군의 접촉 시도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흥선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2]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2][10]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대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2]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2]

흥선대원군.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1890년부터 1892년 무렵 한때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다.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11]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11]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12]"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월,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까지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 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 하다가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11] 한편 흥선대원군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 척사파 계열 유학자들도 동의를 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편집] 대원군, 이준용의 음모 탄로

흥선대원군이준용 등은 동학 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13]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11]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13]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3]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13]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12],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12]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14]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12]"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12]다.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12]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년 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상남도 동래군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편집] 주요 전투

[편집] 황토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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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황룡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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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전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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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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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금구, 태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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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우금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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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서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음력 11월 14일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하였다.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교자에 포박되어 앉아있는 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 충청,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의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편집] 평가

동학 농민 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이다. 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이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과 동학인의 지도하에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에서 이전의 민란과 다르며,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도 처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조건하에서 동학농민전쟁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었다.[15]

첫째, 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넘어선 외세의 개입에 대하여 맞서 싸울 만한 효과적인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농민들 중심의 동학군에 대항하여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들의 민보단(民堡團)등을 통한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 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16]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였고, 온건파 중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동학군 내부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도 않았다는 단점도 있었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민중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민중주의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15]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들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층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함께 참여하는 성숙성을 보여주게 되었으며, 농민들의 내정개혁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반영된 내용으로는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15] 그러나 이 개혁에는 농민들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15] 김개남 등 일부 과격파의 국왕 참칭이라던가, 전봉준 등 일부는 흥선대원군 등과 내통했던 점 역시 대중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을수 없는 하나의 요인이 됐다.

[편집] 관련 인물

[편집]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17]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18]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17]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17]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17]

[편집]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세이토(清藤寺七郞)의 책 《천우협》(千佑俠)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19]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20]'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편집]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년 2월 21일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21]"라는 것이다.

[편집] 김구

이 부분의 본문은 김구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편집] 윤치소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22]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23]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의 아버지였다.

[편집] 박성빈

동학농민군 고령,성주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편집] 관련 사료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인용] 공초(供草)사료 중에서..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편집] 기타

갑오농민봉기 이후 어처구니 없는 점은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조선의 양반 및 부호층들이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농민들을 색출, 학살하였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농민군이 1차 봉기의 성공 이후에도 양반 및 부호층에 대해 특별한 처형이나 재산 몰수 등이 없이 그들을 인정해 주었다는 점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후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 부호들과의 연합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의 전략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민족분열정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편집] 관련 항목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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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주석

  1. 본 사건의 다른 명칭으로는 '동학 농민혁명'이 있음. 또 본 사건과 동학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1894(갑오) 농민전쟁(또는 혁명이나 운동)' 등이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음. 왕현종, 동학농민전쟁 용어 및 성격 토론: 1894 농민봉기 어떻게 부를 것인가, 1990년 8월, 가을호(통권 12호), 357-364면 참고
  2.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4. 농민군의 강령에 해당
  5. 사정을 하소연함 네이버 한자사전 2011년 6월 22일 확인
  6. 김광재,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2002년 2월, 동학연구 제11집, 99-126면 중 104면
  7. 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
  8. 이상백, 동학당과 대원군, 1962
  9. 제1차 봉기 때에는 최시형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 ISBN 89-7474-870-3.
  10. 주한일본공사관기록 8 58~60쪽
  11.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12.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1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
  14. 사람 대중이 하늘을 이긴다.
  1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동학혁명〉
  16.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중앙일보
  17. Daum백과사전 중 전봉준의 출신 및 배경
  18.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
  19.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23~24쪽쪽. ISBN 89-7199-036-8
  20. 한상일, 「동학과 일본 우익:천우협(天佑俠)과의 제휴에 관한 고찰
  21. 유영익, 「갑오농민봉기의 보수적 성격
  22. 동학농민운동 토벌군
  23.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天津]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7일에는 내정개혁 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회의총재(會議總裁)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사업은 일본의 간섭 정도와 개혁주체의 성격변화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약 210건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제1차 개혁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되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 30일의 의정부관제안과 8월 22일의 궁내부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고, 의정부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조선 후기 이래 유명무실화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잡았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되었으며, 관료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다음 사회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지막으로 경제부문의 개혁은 재정개혁과 화폐개혁 중심이었다. 재정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제도면에서는 12월에 신식화폐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화폐의 조선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제2차 개혁은 1894년 12월 17일 청일전쟁의 승리를 눈 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朴泳孝)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간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분장, 재정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洪範)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총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部)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部) 337군(郡)으로 개편하였다. 재정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 소의 관세사(管稅司)와 220개 소의 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군부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경무청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구성법·법관양성소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측과 고종, 왕비 민씨(명성황후)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태양력의 채택,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내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내재적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군국기무처 , 홍범14조

朴贊勝 글

 

 

 

 

 

 

 

 

1895년 10월 8일 저녁..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갑작스런 총성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순식간에 경복궁의 가장 최후방인 건청궁을 향해 총성이 이어졌고..

 

한여인이 끌려나와 처참하게 살해당하게되고...시신마저 불에 태워지고 버려진

 

최악의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을미사변..우리역사상 가장 큰 실수로 기록된..최악의 사건이였다..

 

살해당한 여인은 개혁을 통해 조선을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불행한 여인...민자영..

 

즉 ..명성황후 였다..

 

 

당시 청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대패하게되고 조선에대한 모든 권한을 잃어버리게된다.

 


 

그리고 전쟁에서의 전리품으로 일본은 요동지방을 획득하게되는 성과를 얻지만

일본의 대륙진출에 불만을 느낀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이면서 일본의 진출을 저지하게

되고 일본은 물러나게된다..

 

이모습을 지켜봤던 명성황후는 일본이 비록 청나라를 이겼지만 또다른 강국이였던 러시아에 대해

아무것도 못하고 물러나는것을 보면서 일본이 별거아니구나 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한다는 정책을 실행하게된다..


 

인아거일 이라는 정책을 실행하는 조선에 대해 급격하게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려는

자신들에게 장애가 되는것을 일순간에 치워버리기 위해 말도안돼는 작전을 계획하게되는데..

 


일본인들은 미우라 고로를 앞세워서 일명 여우사냥이라 기록되어진 명성황후 시해라는

작전을 실행하고 여러 사람들을 포섭하며 치밀하게 작전을 짜게된다.

 



이일에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이 일본군대 에의해서 포섭되어진다.





 

어찌하여 우범선은 자신의 직권을 무시하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국모를 향해 칼을 들이댈정도로 반감을 사게된것일까?



 

 

당시 갑오경장 때 만들어진 신식군대인 조선훈련대는 해체위기에 놓여있었고 민씨정권은

왕실직권의 신식군대를 만들고자했었다 .훈련대는 반발했고 이 당시 조선훈련대의 2대대장으로

있던 자가 바로 우범선이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하는데에 도움을 청하기엔 일본인입장에선 아주  적격인 인물이였다.

 

우범선과 마찬가지로 또한사람의 거물을 포섭을 하는데 성공을 하게되는데

그자가 바로 명성황후의 시아버지이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다.

 


미우라 고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몇 주전부터 사람을 보내 흥선대원군을 포섭하게되고

 

자신의 일에  태클을 걸며 길을 막아서는 며느리를 없애버리기위해  일본의 편을 들어주게된다...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정치개혁가이다.

 

대원군은 세정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종래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호포'라 개칭하여

양반에도 학대,부과했다. 이것은 국가 재정의 충실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 과감한 조치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경북궁이라는 조선의 심장부를 복원하기위해 결두전이라는 특별세를

부과하기도 하였고 도성문을 통과하는 문세라는 통과세까지 물렸다.

이른바 원납전 이라는 미명아래 금품을 강제 징수하였고 당백전이라는 악화주조도 서슴치 않았다.

 

그리고 서원철패를 통해 수많은 부당한 권리를 가진 서원을 모두 부셔버리며 서원이 가졌던

막강한 힘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바로 세울수가있는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체제 개혁이였다.

 

그러한 개혁을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이라는 큰화상으로 불타버린 경복궁이라는 조선의 심장을

지금도 대한민국의 자랑으로 서울에 유지되어오면서 우리의 과거의 왕족의 역사를 알수있게 해주는

좋은 개혁이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내부의 개혁을 다져가고있을때 주변강국의 정황변화를 제대로 파악할수없었고

대국인 청이 외국과의 물물교환으로 나라자체가 큰 위기에 처하게되자..

 

결국 수료를 포기하고 문을 걸어잠그는 정책을 펼쳐나가게된다.. 이른바 쇄국정책이였다..

 

이러한 과정속에 한때 동아시아의 작은나라이면서 강국이던 조선은 점차 약해져갔고...이때

대원군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난 고종과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몰아내며 조선의 개혁을 펴나가게된다.

 

이에따라 대원군은 사실상 유배상태에 있게되었고 자신은 언젠간 다시 정치개혁에 다시금

자신의 신념대로 밀고나고자 했던 야망을 가진자였기에 명성황후 시해에 협조하게된것이다..

 

흥선대원군도 포섭했겠다....우범선이라는 훈련대대장도 포섭했고...이제 남은건

명성황후 암살만이 남은 시점에 놓이게된다.



 

일본에 있는 어느 신사에 지금도 보관되어져 있는 칼에 적혀있는 글귀...저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오늘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명령에 따라 조선의 왕비를 암살할 것이다. 왕비는 본보기로 잔인하게

죽을것이고.."



"우리의 결행은 절대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된다!"


 

결국..

 

 

일본낭인들과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암살부대가 조선의 광화문을 통과하게된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이들앞에 나타나 진입을 저지하게된다..

 

명성황후를 위해 유일하게 한양에서 낭인과 싸운 외로운 장군 홍계훈은 여기서 낭인들과의

교전을 통해 전사하게된다...

 

홍계훈의 죽음을 각오한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광화문을 돌파당하고 경복궁은

이제 낭인들에 의해 무참한 학살극이 벌어지게된다..

 

 

그들중 일부의 자객들은 고종을 인질로 삼으며 조선의 힘을 순식간에 제압하게되고...









수많은 궁궐수비대를 격파하고 많은 궁의 관리와 궁녀를 죽이며 거침없이 경복궁의 최후방

건청궁까지 진입하게되고..

 

이당시 우범선은 홍계훈을 죽이고 조선궁궐의 수비력이 사라지자 궁궐을 포위하고 혹시모를

일에 대해 경계를 서게되고..

 





 

명성황후가 죽자...낭인자객들에게 명성황후의 얼굴을 확인시켜주는 일까지 직접나서서

하게된다...



그리고.. 명성황후는 처절하게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불에태워져 흔적조차 남지않게되었다..

 

한 나라의 국모로써 받아야할 최소한의 예우도없는..잔인한 사건이였다..

 

이당시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가 한줌의 재로 변해가는 것을 우범선은 유일하게 조선인으로써

보게 되는데...그는 그때 아래와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부분에서 살짝 미소를 머금은 우범선을 연기하는 모습에 나도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진짜 과거 실제 우범선도 저렇게 미소를 지으며 최후를 맞이한 명성황후를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를정도로 가슴깊이 와닿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어난 바로다음날 미우라 고로는 을미사변을 조선내부의 다툼으로 허위보고 하게되지만

 


이미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그날 그것을 직접 목격한 서양의 외교단들에 의해 세계각국에

언론이 떠들석했고 뒤늦게 이것을 시인한 일본은 그행동을 했던 정치범들을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하게되어 자체적으로 처리를 해버린다..


 

재판을 받는 사람도 일본사람, 재판을 하는사람도 일본사람, 관람하는 사람도 일본사람.....

 

재판의 내용은 불보듯뻔했다..

 

모든 진범에 대한 증거 불충분이라는 명분을 통해 모두 무죄를 받고 풀려나게된다..

 

참으로...기가막히고 어이없고 치가 떨린다..

아무튼 명성황후 시해에 일본인에게 영웅으로 기록된 우범선은 명성황후가 죽고 만들어진

친일내각이 아관파천으로 무너지자 일본으로 망명하게된다..


우범선은 일본에서 엄청날정도의 부귀영화를 누리며 20엔의 엄청난 금액도 매달정기적으로

받으며 엄청난 영웅처럼 떳떳하게 지내게되고...





조선에선 아관파천으로 철저하게 일본의 내각을 부셔버리는데 성공하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르고 을미사변의 주범을 찾아 없애라는 고종의 어명이 내려져있었다..

 

하지만 이미 을미사변의 주범들은 모두 일본인의 보호아래 일본으로 망명을 한후였다..

 

이에 따라 훗날 순종이되는 황태자는 매일매일 통곡하며  

 




황태자가 이러한 통곡의 세월을 지내자 그모습을 지켜보며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며 슬퍼했던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고영근이였다.

 

그는 자신이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아 황태자 전하의 고통을 씻어내고자 그길로 바로

일본으로 떠나게된다.

 

그리고 우여곡절끝에 찾아낸 우범선의 집에 머물면서 뛰어난 말을 통해 우범선의 경계를

풀어 그를 안심시켜줬고 함께 지내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그와동시에 고영근은 자신을 도와 거사를 진행할 또다른 조선인을 포섭하게되고

작전을 세우게된다.



한편 우범선은 고영근과 지내온 한달간의 시간동안 자신에게 해가 되지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마음을 놓게된다. 그리고 고영근의 부탁으로 집을 구해준뒤 그 집에서 이사턱을 내겠다는

고영근의 부탁에 거부감없이 참석하게된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흘렀을때... 고영근은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오는척 하며 자리를 일어나

우범선뒤로 걸어갔다..





이때 낌새가 이상하다는것을 느낀 우범선이였지만..



이미 우범선의 목으로 날카로운 금속물체가 깊숙히 들어온뒤였다..



 

두세번의 치명상을 입히고 머리를 향해 쇠망치를 수십차례 내려찍으며...

 

명성황후의 원수를 처절하게 복수하였다..

 

훈련대에 대한 민씨정권의 정치개혁에 불만을 품고 일본에게 명성황후를 팔아넘긴 반역자..

 

이완용이 정치인으로써 나라를 팔아넘겼다면 우범선은 당연히 지켜야할 최고의 관직인

군인이라는 신분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걸로 보면...

 

이완용보다 더 심하고...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반역자이다....

 

하지만 이완용은 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의사에 의해 치명상을 입게되지만...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재명의사는 암살미수범으로 처형당해...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게되었다...

이재명의사는 20살이였다..

 

그에비해 우범선은 처절하게 그자리에서 참수당했다..통쾌한 복수...

 

그리고 다음날 고영근은 일본경찰서에 자수를 했고 곧 재판을 하게된다.

 





모살죄라 말하는 일본인 재판관을 향해 고영근은 적괴참살복국모수

즉... 단순히 사람을 죽인것이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 라고 일본인 재판관앞에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리하여 고영근에겐 사형이라는 실형이 선고되었고.. 곧 투옥하게된다..

 

그러나 대한재국에선 고영근의 선처를 일본에게 요청하게되고 러일전쟁을 준비중이던

일본에게 조선의 협조를 필요로 해야했기에 일본은 고영근을 8년의 수감끝에 출옥하게된다.

 

고종은 고영근을 포기하지않았다...

 

누구도 나서지않았던 명성황후에 대한 복수를 해줬던 고영근에 대한 고종의 깊은 감사의

표시였다고 필자는 생각해본다..

 



그리나 고종은 헤이그 밀사 파견에 의해 일본에게 약점을 잡혀 강제 퇴위당한뒤...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자 고영근은 능창봉으로써 명성황후와 고종의 능을 지키며 남은여생을

살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앞에 놓여져있던 비석엔

 

대한제국에 대한 그어떠한 존칭도 기록되어지지않은채 땅에 뉘어져 처절하게 방치가 되어있었고..

 


이것을 고영근이 비밀리에 사람을 동원하여 대한제국에 걸맞는 호칭을 사용하여 세겨놓고

합장을 의미하는 부좌를 세겨넣어 이곳이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과 비운의 황후 명성황후의

묘임을 세상에 알리었다..



사태가 이렇게되자 조정에선 이일로 일본에게 반감을 살까 두려워 다시 비석의 빠진부분을

삭제시키고 뉘여놓자고 결론이 나온다..참으로..미친듯이 약해빠진 조정이 아닐수없었다..

 

하지만 이에 고영근은...


"내가 세우기는 격분한 마음으로 세웠으나!"

 

"고종 태황제의 능비를 세운 이상! 내손으로 다시 뉘인다는것은! 도저히 있을수없는일이요!"

 

유성룡처럼 나라가 파국으로 치달을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채 국정을 바로잡고자 했던

 

조선후기조정의 충신 고영근...그는 한때 고종의 밀명에 반역하는 행동도 하며 자신의 신념을

밀고가기도 했으나 자신을 믿어준 고종에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충성을 다했다..

 

 

 

세로 세워진 비석을 보기위해 연일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본은 철저하게 그것을 막았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대해 회유책을 피는중이였다..

 

그리하여 우리민족특유의 집결력과 단합력을 두려워한 일본은 능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한채

고영근을 능참봉직에서 해임시킨다..







그리고 고영근은 관직을 빼앗기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곁을 지켰고..그 이듬해 7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악의 군인 우범선을 단죄하고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였던 일본에게 외롭게 싸워나간..고영근..

 

을미사변은 일본인이 단순하게 경복궁에 처들어와 조선인을 모두 죽이고...명성황후를 시해했다고

역사를 아는사람들이 많다..

 

하지만...명성황후는 일본에 의해 살해된게 아니였다....시대의 급변을 읽지못하고 자신의 이윤을

채우려했던 소수의 조선인에 의해 살해되었던것이다...

 

이렇게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얼마뒤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일본은 러시아와 러일전쟁을 치룬후

어이없게도 편안한 승리를 하게되면서...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써..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한일강제합병이라는 치욕을 당하게된다..

 

명성황후는 약해진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던 조선의 비운의 황후였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며 조선에게 힘이되어주길 바랬지만 그 기대는 처절하게 꺽이고.

이제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을 도와줄나라는 존재하지 않게되었다.

 

그리고 정작 진범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처벌을 면한채 히로시마 법정은  그들에게

사면을 허락해준다...

 

비운의 역사를 순식간에 무마시켜버린 히로시마 형무소...명성황후의 가장큰 원망이

떠돌고있는 이곳에 그당시 조선은 명성황후의 복수에대한 어떠한 조치도 해결하지 못하였다..

 

조선 통한의 역사..을미사변..그리고..

 

1945년 8월1일 오전 8시 15분...한줄기 빛이 히로시마의 상공에서

떨어지게 되고.. 곧..7만명의 사망자와 수십만의 부상자...그리고

엄청날정도의 심한 휴유증을 내고 대제국을 향한 일본의 야망을

송두리째 날려버린...사건이 발생하게된다..

 

을미사변의 주범이 재판되어진 히로시마 법정..

그리고 조선을 지켜준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에 의해 사형선고가

내려진 히로시마 원폭..

 

필자는 이것을 명성황후가 50년간 기다려 조선을 구원하고자

했던 원혼이 이끌어낸 최고의 승전이라 생각한다..

 

또한 일본을 패망시키고 조선의 독립을 찾게해준 서양의 초강국 미국은..이후 60년이넘게

지나오면서 우리의 든든한 우방으로써 지켜주고있다..

 

 

 

 

 

 

1896년 2월 11일 친러세력과 러시아 공사의 공모하에 고종과 왕세자가 궁궐을 벗어나 지금의 서울특별시 정동(貞洞)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사건.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민비학살과 단발령은 조선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李範晋)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사진 설명 :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1년 동안 거처를 옮겨 지냈던 (구)러시아공사관. 고종은 이곳에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지만 러시아

                 의 부담스러운 정치적 요구와 국내 여론의 악화로 1년만에 다시 나오게 된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 방향으로 걷다보면 우리의 근대사와 관련하여 매우 뜻깊은 공간이 나온다. 그곳은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또 그 위쪽으로 유관순 열사가 학창시절 수학하며 다녔던 이화학당(지금은 '이화여고')이 있는 '정동'이다. 이곳은 현대의 세련된 문화 속으로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상처가 아로새겨져 있는 곳인데 3·1독립운동을 외쳤던 유관순의 교실 맞은 편에 있는 러시아공사관, 그러니까 고종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고자 숨어든 역사적 현장에서 그 상처를 더욱 강하게 느껴볼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설명 : 유관순이 다녔던 이화학당 안에는 그녀의 교실을 재현해놓은 공간이 이처럼 있다. 어두운 공간을 비추는 전등. 저 불빛처럼 학생 유관순도 민족

                과 국가에 대한 어두운 현실을 마음의 빛으로 비추었으리라.

 

 

 

 

 

 

 

나는 3·1절을 맞이하여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구)러시아공사관에서 특별 설명을 했다. 준비한 역사 보고서를 나눠주고 이곳이 어떤 곳이며, 고종이 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러시아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삼국간섭'이란 사건을 그 배경으로 설명하였고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연속적인 과정도 설명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으로부터 할양받기로 되어 있었던 랴오둥반도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포기하는 사건이 바로 삼국간섭입니다. 이러한 국제 정세를 보고 있던 조선정부는 일본의 영향력을 쇠퇴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러시아와 교류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죠. 삼국간섭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보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문제도 언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조선은 일본을 견제하는 좋은 외부 세력으로 러시아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죠. 당시 김홍집 내각 때문에 그 세력이 약해져 있던 명성황후가 친러정책을 적극 실행하면서 이들 친일내각을 밀어 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悟樓)가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국모를 시해한 것이죠. 이는 친러내각에 의해 그 세력이 약해지던 일본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 을미사변으로 다시 친일내각이 자리를 잡았는데요, 이러한 과정에서 친러내각이 위기를 느끼자 신변의 위협으로 불안해 하던 고종을 설득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게 한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그러니까 아관파천은 '삼국간섭', '을미사변'과 연결하여 생각해야 이해가 되는 사건인 것이죠."

 

 

나는 이렇게 설명을 하면서 우리 근대사의 아픔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왜 아픔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왜 아픔을 망각하지 않고 자꾸만 전달하려고 하는가?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이고, 또 우리가 알고 있어야만 이후로 반복하지 않을 과오이기 떄문이다.

 

어쨌든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의 역사가 이어진다. 이곳 정동에는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도 있으니 그야말로 정동은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라 할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 = 을미사변 ) ㅠㅜ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니네는 졌으니까, 이제 조선에서 손 떼고 땅이나 내놔라' 하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여기서 러시아가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는 게 아니꼬와서 독일,프랑스와 손을 잡고

 '청에게 요동반도를 돌려주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하는데 이게 삼국간섭입니다.

 

 일본은 빡쳤지만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 대신에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는데

 여기서 민비는 조선에서 일본을 몰아내려면 러시아와 손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하고

 3차 김홍집 내각을 세워 친러로 돌아섭니다.

 민비의 외교정책에 불만가득인 일본은 그녀를 여우냔 여우냔 하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다가

 결국 여우사냥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제거하는데 이게 을미사변입니다.

 

 만화로는 존나 웃기게 그려져서 좀 찜찜하네요 ㅠㅠ

 으허으헝흐어흐엏엏 하마 패러디 하지말껄 그랬서 ㅠ

 

 

 

 아관파천에 대한 짧은 만화 ㅋㅋ 옆에 해설도 달았는데 같이 찍으려니까 만화가 안보여서 패스.

 다들 아관파천 뭔지는 아시죠??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친일의 힘을 보여주겠다며 을미개혁을 추진하는데 여기에

 그 유명한 단발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양반 유생들은 안그래도 일본놈들이 국모를 시해한 것에 대해

 불만가득인 상태였는데, 머리까지 자르라고 하니 빡돌아서 '차라리 내 목을 치시지'하고 의병을 일으킵니다.(을미의병)

 

 고종은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들을 달래기 위해 단발령을 철회하며 의병들에게 해산하라고 합니다.

 근데 막상 이렇게 의병 정리하고 보니까 왠지 일본한테 개긴 것 같아서 목숨이 날아갈 것 같음.

 안그래도 지금 을미사변으로 뒤숭숭한데 멘붕 ㅠㅠ

 러시아 공사관이 그나마 안전해보여서 그리로 . 그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이 역시 만화로는 코믹하게 그려짐...

 이거 말고 다른 것들도 있는데 다 웃김

 

 만화는 웃겨야한다는 생각이 깔려있어서 그렇지

 다른 의도가 있어서 희화화한 거 아니에요. 절대로. 아님.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에 친러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사건. 일명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한다. 아관은 러시아공사관을 말하며 정동에 위치 하였다. 이로 인하여 친일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아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1. 배경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청으로부터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등지를 할양받아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나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열강, 즉 러시아가 주동하고 프랑스ㆍ독일이 연합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 동안 친일 세력에 눌려 있던 민비(閔妃)의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ㆍ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貞洞派)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공사 베베르(Weber, K. I.)도 미국공사와 재한미국인을 포섭하고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의 실시를 권유하였다. 이에 비해 친일세력은 급격히 세력을 상실하여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붕괴되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정상)는 매수정책을 이용하여 다시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으나 민비세력과 친미ㆍ친러파가 요직을 장악하였다. 내각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개혁사업을 폐지하고 친일파를 축출하였다. 마침내 일본에 의하여 육성된 훈련대마저 해산 당할 위기에 처하자,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悟樓)는 1895년 음력 8월 20일에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로써 세력을 만회한 일본은 친일내각을 성립시켜 단발령의 실시를 포함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국모시해로 인해 고조되었던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초래하였다. 김홍집내각은 지방의 진위대(?衛隊)만으로 의병을 진압할 수 없게 되자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동원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친러파들의 음모가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2. 경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키려는 음모는 1895년 음력 10월 12일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 때에도 있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그 당시 모의자로서 해외로 탈출하였던 친러파 이범진(李範晉)이 비밀리에 귀국하여 이완용(李完用)ㆍ이윤용(李允用) 및 러시아공사 베베르 등과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하게 되었다. 그들은 궁녀 김씨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상궁(후의 엄비(嚴妃))을 통하여 고종에게 접근,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2월 10일에 공사관보호를 구실로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군함으로부터 포 1문과 탄약을 갖춘 수병 120명이 서울에 진주하였다. 그리고 11일 새벽에 왕과 왕세자는 극비리에 궁녀의 교자에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에 의하여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을 비롯한 10여명의 고관은 일본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에 망명하였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도피중에 백성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그 동안 은신중이었던 친러ㆍ친미파 인물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 결과 법부대신과 경무사를 겸임하게 된 이범진을 비롯하여 이완용ㆍ이윤용ㆍ박정양(朴定陽)ㆍ조병직(趙秉稷)ㆍ윤용구(尹用求)ㆍ이재정(李在正)ㆍ안경수(安壽)ㆍ권재형(權在衡)ㆍ윤치호(尹致昊)ㆍ이상재(李商在)ㆍ고영희(高永喜) 등의 인사가 요직에 임명되었다. 친러내각은 친일파를 국적(國賊)으로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의 실시를 보류하고 의병을 회유하며 공세를 탕감하는 등 인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갑오ㆍ을미의 개혁사업을 폐지하였다.

그밖에 23부(府)의 지방제도는 한성부(漢城府)와 13도로 개편되었고, 호구조사도 재정비되었다.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권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또한 국내에 있던 일본인 고문관과 교관이 파면되고 대신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이 초청되었으며, 러시아학교가 설립되는 등 러시아의 영향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3. 결과

 

일본은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러시아와의 무력대결이 시기상조라고 판단, 그 대신 협상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먼저 아관파천에 대한 열강의 태도를 타진하였다. 그러나 열강은 조선의 내정에 대하여 불간섭을 표명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불리한 외교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외상대리 사이온지(西園寺公望)와 러시아공사 히트로보(Hitro Vo)는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원칙에 동의하였다. 5월 14일에는 제1차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ㆍ고무라(小村壽太?)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그리고 주한일본군병력의 감원ㆍ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등 러시아외교의 대승리였다. 이에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山縣有朋)를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Rovanov)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그들은 5월 28일부터 6월 9일에 걸쳐 비밀회담을 열고 조선문제에 대한 공동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ㆍ야마가타의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조관과 2개조의 비밀조관으로 구성된 이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8선 기준의 국토분할안을 후퇴시킨 대신, 장래 필요한 경우에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ㆍ종성광산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설치권, 압록강유역과 울릉도 삼림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 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Alexiev, K.)를 탁지부고문으로 삼아 조선의 재정을 요리하였고, 정식조인은 되지 않았으나 러시아황제 대관식 때 비밀리에 열린 로바노프ㆍ민영환(閔泳換)회담에서는 러시아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한 대신 조선에게는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균등을 요구하여 전차ㆍ철도부설권, 삼림채벌권, 금광ㆍ광산채굴권 등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도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쟁탈에 참가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의 국운은 다시금 크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러시아공사완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국가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당시에 수리중이었으므로 환궁 시기를 늦추고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의존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도 갑자기 환궁을 결심,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4. 의의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세력에 대한 친러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으로서 국왕의 무능ㆍ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지주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이와 같은 움직임도 왕실과 보수집권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음..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후에 생긴 사건인데..

 

참 안타까운면이...

 

이로 인해서 열강의 이권침탈이 심해졌다는 것..

 

그나마 독립협회가 조금이나마 지켰지만..

 

그 후에는 우리나라의 위엄을 넓혔지만..

 

그래도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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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란 예전엔 한일합방이라고 많이 표현했습니다.

말 그대로 경술년에 당한 국치를 말합니다.

경술년(1910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걸 경술국치라고 합니다.

 

한편 을사조약은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한 조약입니다. 경술국치를 야기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고 할 수 있져..유명한 을사5적..특히 이완용이란 이름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져?

 

정리하면 을사조약은 경술국치가 일어나기 위한 사전 작업중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중인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으며, 같은 해 4월과 다음 해인 1905년 11월 에 각기 1차, 2차의 한일 협약(1차는 한일 협정서, 2차는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강탈하였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통감정치 기간(1905년12월부터 1910년8월 까지)인 1910년6월 내정각서 교환으로 조선의 모든 사법 및 경찰권을 빼앗았으며,

1910.7,12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면서 한일병합후의 통치방침을 작성하여 부임하였으며,

다음 달인 8월16일에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조중응 등과 병합조약안을  비밀리에 협의한 후, 각의에 넘겨 합의 하였고,

엿새 후인 1910,8,22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순종황제의 어전회의를 형식적으로 거친 뒤,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이 조약에 조인하였으나, 일제는 조선민심이 두려워 7일 동안 조인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1910,8,29 순종황제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함으로서, 윤덕영이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하였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피탈로 문을 닫고 일제는 기존의 조선통감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치기관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함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을 당한 국가적인 치욕 사건으로서 1910년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이라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릅니다.

 

한일(韓日) 합방(合邦)을 경술 년에 당(當)한 나라의 수치(羞恥)라는 뜻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고종이란 인물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동시에 대한제국의 태조 황제입니다

고종이 물론 조선시대의 임금이엇을대에는 주로 홍룡포를 입었겠지만요

대한제국시대때에는 복장이 어떠했는지요?

대중매체에 나오는  제복입은 사진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시대 황제로서의 복장인가요?

떠도는 사진을 보면 주로 1910년 이후 경술국치일 이후의 제복을 입은 복장인데요

1897년 대한제국시대~1910 경술국치일 과 1910년 이후의 고종황제의 복장은 틀릴거라 생각합니다  정확한  답변 부탁 드립니다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고종황제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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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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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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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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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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