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려 일 송의 무역/일본 시대변천, 막부 /동복사 국수 승천사 정원 신안선 2

작성자천사의섬|작성시간12.07.15|조회수819 목록 댓글 0

 

고려와 일본의 교역 home > 고려거상 > 교역양식 > 국내외 교역
고려시대
고려와 일본간의 교역 관계 설명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는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자연적 조건에 의해 원시, 고대 시기부터 이어져왔다. 특히 백제와 신라와 일본의 대화(大和 : 야마토) 정권과의 관계는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밀접했다고 할 수 있다.
663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대패한 백촌강의 전투와 삼국통일을 계기로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는 험악해지고, 교류의 창구였던 대재부(大宰府 : 다자이후)는 대 신라용 군사기지화하는 등 공식적으로 단교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양국간의 관계악화 속에서도 신라의 상인들은 꾸준히 무역을 위해 일본을 찾아왔고, 일본의 정권도 실리를 위해 이를 방임함으로서 민간무역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고려 건국 후는 점차 양국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회복되어 상인의 왕래도 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등원(藤原 : 후지와라) 섭관정치(攝關政治)에서 원정(院政)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귀족계급의 영주들과 박다(博多 : 하카다)의 호상들이 송, 고려의 상선의 내항을 통해 이루어지던 수동적 무역에는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무역선을 건조하여 이를 해외에 파견해 적극적으로 해외무역을 행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특히 11세기 중엽부터 지리적으로 가까운 고려방면으로의 도항이 급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상인의 고려 도항은 『고려사』를 비롯한 한일양국의 문헌, 기록상으로는 1073년(문종 27) 7월 일본상인 왕칙정(王則貞)・송생년(松永年) 등 42명이 고려를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문종(文宗) 시기에 14회, 선종(宣宗) 시기에 6회, 의종(毅宗) 시기에 2회, 총 23회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기록에 남지 않은 수많은 대소 일본상인들이 고려에 왔다고 전해진다. 이들 일본상인들은 일본의 특산품을 고려왕에게 헌납하고, 그에 대한 회사(回賜)를 얻어 무역을 허가 받았다. 이러한 무역은 일본상인 개인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사헌무역(私獻貿易)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의 상선들이 고려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고려의 상선도 일본에 나타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아하게도 고려의 상선에 관한 기술은 사료 상에 등장하지 않는다. 관계가 악화되었던 통일신라기의 기록은 남아 있는데도 오히려 우호적 관계가 회복된 고려기의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양국간의 무역, 교류 상황에 대해서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그리고 고려에서 건너온, 혹은 그 영향을 받은 고고자료에서부터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세의 박다(博多)에서는 대륙과의 교역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 중국의 송나라와의 사이에서 행해진 무역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박다(博多) 주변의 유적을 발굴조사하면 농촌의 집락에서도 송에서 수입된 도자기나 동전이 출토되는 등 일-송 무역의 영향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어 고려를 포함한 3개국 간에 무역이 전개되었지만, 일-송 무역의 상황에 비하면 고려와의 무역에 대한 실태는 상기한 바와 같이 아직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은 실정이다.
고려와 일본사이의 무역은 대재부(大宰府) 관인이 송나라 상인을 끼고 중앙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전개된 것이었다. 고려로부터의 수입품은 송나라의 경우와 같이 풍부한 물량이 광범위에 걸려 유통된 것이 아닌, 일부 계층에게 한정된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구주(九州 : 큐슈)의 박다(博多)에서 출토된 수입 도자기 중 중국산이 점하는 비율은 95%를 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품질로 앞서지만 소량인 고려자기는 대량으로 양산된 값싼 중국도기에 밀려 교역품으로서의 평가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수입품은 아니지만, 이시기의 기와 중에는 고려문화의 영향을 받은 문양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고 있다.
고려의 청자는 동시대 중국의 송나라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일본으로 수출된 용천요청자(龍泉窯靑磁) 등과 비교하면 자기의 투명도가 높고 단순한 청색이 아닌 비취색으로 빛나는 고급자기였다. 이러한 고려자기는 11세기 후반에서부터 12세기 전반에 걸쳐 대재부(大宰府)와 박다(博多)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청자의 대부분은 문양이 없는 형태로, 중국에서도 자주 눈에 띄는 형식의 것이다. 11세기 후반에는 전라남도 강진의 정제품(精製品)이 소수 출토되는데 그쳤지만, 12세기 후반에 들어가면 이번엔 조제품(粗製品)의 출토가 급증하게 된다. 그 대부분은 제대로 구워지지 않은 낮은 품질의 자기로 불투명하고 발색도 좋지 않은, 어느 정도 양산되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와 함께 고려도기도 같은 시기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청자와 같이 그 자체가 상품이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용기로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대재부(大宰府)에서는 이 시기의 고려도기의 90%가 대재부 정청(政廳), 학교원(學校院 : 가큐교잉), 관세음사(觀世音寺 : 칸제오지)와 그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 점에서부터 미루어 봐도 대재부의 관인이 일본과 고려 간의 무역에 크게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광역에서 유통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고려청자 중 대표적인 것은 상감청자인데, 원래 상감은 금속공예의 기법이었으나 이를 도자기에 응용한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방법이었다. 이러한 상감기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12세기 후반 이후로, 이시기가 되면 박다(博多)에서는 송나라 자기의 출토량이 약간 감소하고, 고려청자의 출토는 급감하게 된다. 거꾸로 경도(京都 : 교토)나 겸창(鎌倉 : 카마쿠라)에서 고급 청자의 출토가 증가하게 된다. 북부 구주에서 다시 그 출토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부터가 된다.
도자기, 기와 등 외에 고려와 일본의 교류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금속공예품을 들 수 있다. 그 중 동종(銅鐘)은 복강(福岡 : 후쿠오카)현에 7개가 전해지고 있으며, 동 현은 전국에서도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종이 가장 많은 곳이다. 그 대부분은 16세기 이전에 왜구, 임진왜란 등에 의한 약탈품, 혹은 공식적인 교섭에 의해 증여되어 전해진 것들이라고 한다. 복강(福岡)시 박다(博多)구 승천사(承天寺 : 죠텐지) 종에는 중국 요나라의 청녕(淸寧) 11년(문종 19 : 1065)에 제작한 기년명이 주출되어 있으며, 1498년(연산군 4) 일본에 도래했다는 설명이 추가로 새겨져 있다. 종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연화문(蓮華文) 양식을 답습하고 있다.
동종 외에 고려에서 건너온 금속공예품으로 박다(博多) 유적군의 조사에서 출토된 동으로 된 금속제 그릇(공기)가 있는데, 이와 같은 형태, 주조법의 그릇이 한국 충북 청주시 운천동 사뇌사(思惱寺) 터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한 동경(銅鏡)도 복강(福岡)현 대재부(太宰府)시 반야사(般若寺 : 반냐지) 터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이 시기 일본에 도래한 동경도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송나라에서 온 것이 많지만, 도자기의 경우와는 반대로 고려의 동경은 중국의 것을 모방한 독자성이 떨어지는 품질이 낮은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같은 형태의 파주선팔능경(波濤船八稜鏡)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고려의 동전인 동국통보(東國通寶)도 송나라 동전에 섞여 박다(博多) 유적군에서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나가사키 발급 신표
다카시마 지도
다카시마의 고려불상
다카시마항의 현재 모습

 

 

 

 


여몽연합군의 배에 실려있던 유물
여몽연합군의 배에 실려있던 작열
일본 태재부와 다카시마에 남은 고려의 흔적
고려와일본의교역로

 

 

 

 


 

 큐슈 하카다(博多)의 이모저모

 

하카다 역 앞의 이상한 일본 스님

 

하카다의 작은 식당

 

하카다 묘락사

 

경내에 묘지를 조성한 묘락사

 

묘락사 목조 건물

 

하카다 동장사(東長寺)

 

승천사(承天寺) 경내

 

오가하치방(若八幡) 궁(神社)

 

먹을만 했던 하카다 소바(국수)

 

 

 

일본여행 14= 우동과 소바와 만두의 고향 Foto

2012/03/06 14:55

복사 http://blog.naver.com/jmc24/100152883190

























 

우리 일행은 상큼하게 신사 리투르기아에 참례하고 많은 은혜를 받은 뒤 호토케의 가피도 받고 싶어서

후쿠오카 시내의 유서깊은 절들을 순행했습니다.

친절하게 諺文으로 설명해 준 간판들을 보며 우리는 이 영험한 절들의 유래와 어떤 분야에 특화가 되어 있는지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친절한 설명에 절로 찬불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승천사와 동장사에 특별배관했는데 이 사찰은 notre 일본 우동과 소바와 만두의 고향으로 승정께서

친히 지나에서 이런 문명을 받아들이시와 선남선녀들에게 보급해 준 유서 깊은 곳입니다.

깔끔한 경내에는 참배객들도 없어서 우리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친견하고 우미한 조형미를 감상했습니다.

직각으로 뻗은 처마는 언제 봐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후쿠오카 묘락사(妙樂寺) 

후쿠오카 승천사(承天寺)

도쿄 신주쿠어원(東京 新宿御苑 

도쿄 히비야공원(東京 日比谷公園) 

교토 키요미즈데라(京都 淸水寺)

교토 니조조(京都 二條城) 

교토 산주산겐도(京都 三十三間堂) 

나라 도다이지(奈良 東大寺)의 사슴

 

나라 도다이지(奈良 東大寺) 입구 

나라 고후쿠지(奈良 興福寺)의 고주노토(五重 塔)

 

 

 

후쿠오카 마지막 머믄날 - 3월 12일

 

 

후쿠오카 여행 계획 중에는  후쿠오카 근방의 몇개의 자전거 전용도로를 달려 보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 중에 하나는 간몬 터넬(시모노세키와 모지를 관통하는 지하 터널)을 걸어서 건너서 자전거로 시모노세키 국제 터미널에 가 보는 것이 있었다.   내 어렸을 때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취소하고 걸어서 후쿠오카시내의 절(일본절) 구경을 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의 일정을 마감하기로 했다.  

 

마지막 날인 월요일은 바람이세고 서울에서 온 소식에도 서울이 꽃샘추위를  한다고 했는데 후쿠오카도 만만치 않게 추웠다.   모두들 겨울 옷을 다시 꺼내 입은 듯한 차림이었다.

 

셔틀 버스를 타고 나와 하카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쵸지(東長寺) 쇼텐지(承天寺) 등 절 몇군데 순례를 하고 걷기를 실어 하는 코니가 일본 떡집에서 쉬고 가자고 해서 들어 가 떡 두어개와 말차를 시켜 마시고 쉬었다. 

 

일찍감치 저녁거리 도시락을 사가지고 돌아 왔다.

 

 

 

 

호텔 주차장 진입로

 

 

 

일본은 절이 동네에 섞여 있다.

 

 

 

시내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경내는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준다ㅈ

 

 

 

일본 절의 뜰

 

 

 

불단

 

 

 

동네 한 가운데 있으니 주위의 조금만 높은 건물도 눈에 띈다.

 

 

 

승천사의 유래

 

 

 

 

멀리 가지 않아도 예불도 하고 참선도 할 수 있는 것이 일본 절의 특징

 

 

 

우동과 만두의 발상지

중국에 갔다 온 승려가 만두와 우동을 전수받아 시작했다는 전설

 

 

 

만두의 발상지 비석

 

 

 

절간의 정적

 

 

 

절간 정원

 

 

 

모래 정원

 

 

 

동장사의 절간은 모래 정원을 다니게 했다.

 

 

 

눈에 확 들어 오는 오층탑

 

 

 

만든지 얼마 안되는 오층탑

 

 

 

 오중탑의 유래

 

 

 

우연히 들어 간 한 선원의 건물이 신식과 구식을 조화시킨 건축물이라 인상적이었다.

 

 

 

 

 

비오는 날의 오후는...

그리움이 흘러서 좋고 그리움 속에 설레임이 있어서 좋고

설레임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가 있어서 좋은

비오는 오후는..

음악이 아름답고 조명이 화려하고 사람들이 싱싱해서 좋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어도 기다림이 있어서 좋은 날 입니다

미워했던 사람도 보고싶어 져서 좋고

기억 저 편으로 밀려난 사람도 생각이 나서 좋고

힘들게 했던 사람도 토라져 간 사람도 예뻐보여서 좋은 날 입니다

슬픔이 없어도 눈물 흘릴수 있어서 좋고

기쁨이 없어도 즐거워 할 수 있어서 좋은 날 입니다비오는 날의 오후는....

 

 

 

 

일기일회(一期一會)

 

일생에 단 한 번, 딱 한 차례의 만남을 일기일회(一期一會)라 한다.

일기(一期)란 일차(一次)이니, 단 한 차례다. 일회(一會)란 딱 한 번의 만남이다.

 

만세일기(萬歲一期)요, 천재일우(千載一遇)는 진(西晉,265-317, 東晋,317-420)의

원언백(袁彦伯,원굉袁宏,328-376,자는 彦伯)의 말이다.

 

1만년에 단 한 번, 1천년에 단 한 차례뿐인 귀한 만남이다.

이 한 번,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몇 겁의 생을 기다려왔다.

단 한 번의 일별(一瞥)에 우리는 불붙는다.

스쳐가는 매 순간순간을 어찌 뜻없이 보낼 수 있겠는가?

이치고 이치에는 일본 다도의 개념이기도 하다.

 

 “일기(一期)”는 사람의 一生을 표시한다: “일회(一會)”는 한 차례 만남을 의미한다.

“차회(茶會)도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의 연(缘)이라 할 수 있다.

 

우주가 한 번 시작되어 파괴되고 다시 천지개벽을 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1겁(劫,kalpa)이라 한다.

불가(佛家)의 숫자개념이다. 옷깃 한번 스침이 500겁의 인연이 축적된 결과라 한다.

 

《잡아함경》에서는 과학자들이나 수학자들이, 알아득기 쉽도록 설명하고 있다.

 

사방과 상하가 1유순(由旬)(약15km) 되는 거대한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채우고 100년만에

한 알씩을 꺼낸다. 이리하여 겨자씨를 다꺼내도 끝나지 않는 시간, 이것이 겁이다.

 

또는, 사방이 1유순이 되는 큰 바위가 있다. 100년에 한번씩 하늘에서 天人이 내려오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의무봉(天衣無縫), 잠자리 날개처럼 아주 가벼운 옷을 입엇다.

그 옷자락으로 슬쩍 한번씩 스쳐서 바위가 다 닳아서 없어질때까지의 시간, 그것이 버로 1겁이라 했다.

 

1천겁의 인연을 맺으면 같은 나라에 태어나고,

2천겁의 인연이 있 어야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고,

그대와 댓글을 주고 받으려면 3천겁,

하루 밤의 동숙은 3천 겁의 인연,

부부가 되려면 7천겁의 인연,

한 고을에서 태어남은 4천 겁의 인연,

한 마을에서 태어남은 5천 겁의 인연,

하루 밤의 동침은 6천 겁의 인연,

한 집에서 태어남은 7천 겁의 인연,

부부의 연은 8천 겁의 인연,

형제간의 연은 9천 겁의 인연,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가 되려면 무려 1만겁의 인연의 스침이 있어야 한다.

 

찰나 (ksana)를 스쳐가는 인연도 삼생 동안 이루어낸 결과이고 보면,

한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손을 맞잡음의 인연은 4천겁 이상 이여야 하며,

안부를 묻고 웃음을 나누는 사이는 5천겁의 인연이여야 한다.

   

오늘 내가 무심히 스쳐간 옷깃들, 지금껏 내 평생의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만난 인연은

도대체 몇겁의 인연이던가?

 

겁은 늘 곁에 있고 연은 늘 떠나 있다.

 

 

 

 

 

승천사의 밤 記承天寺夜遊..소동파(蘇東坡, 蘇軾,1037-1101)

 

 

元豊 6년 10월12일 밤이었다. 옷을 벗고 자려는데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기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함께 즐길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승천사로 가서 장희민을 찾았다.

희민 또한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서로 함께 뜰 가운데를 거닐었다.

뜰 아래는 마치 빈 허공에 물이 잠겼는데, 물속에 물풀이 엇갈려 있는 것만 같았다.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였다. 어느 날 밤이고 달이 없었으랴. 어덴들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겠는가?

다만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한 사람이 적었을 분이리라.

(元豊六年十月十二日夜, 解衣欲睡, 月色入戶, 欣然起行, 念無與樂者.

遠至承天寺尋張懷民. 懷民亦未寢, 相與步於中庭. 庭下如積水空明,

水中藻荇交橫. 蓋竹柏影也. 何夜無月.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달은 어느 밤이나 뜬다. 나무 그림자는 어디에도 있다. 하지만 그날밤 내 창문으로 엄오온 달빛,

그 달빛에 이끌려 벗을 찾은 발걸음, 마당에 어린 대나무 그림자,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이 있어

그 달빛 그 그림자가 일생에 하나뿐이요 단 한번뿐인 것이 되었다.

만남은 맛남이다. 모든 만남은 첫 만남이다.

매 순간은 최초의 순간이다. 우리는 경이로움 속에 있다.

 

 

*소식: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송대 명한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 그 아우도 소철(蘇轍), 이 세 부자를 사람들은 삼소(三蘇)라고 불렀는데, 모두 당송팔대가로 손꼽혔다.

 

당송8대가의 하나인 구양수 문하에서 배웠으며, 22세에 과거에 급제 일찌감치 문재를 알렸다.

 

당시 북송(北宋)은 왕안석 등이 주창한 신법을 둘러싸고 당쟁이 확산될 시기였는데, 소동파는 신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이를 구법당이라 하며, 구법당의 영수는 사마광), 이로 인해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했다.

 

말년에 신법당이 득세하면서 海南島까지 귀양을 갔으며, 신법당을 지지했던 철종이 죽고 복권되었으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는 도중 6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번 결혼하여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빙화(氷花), 알고 보니 빙화(氷禍)였다

 

매화꽃 졌다 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보내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을 차마 쓰기 어려워서

--- 이은상, 「개나리」

 

▶ 산행일시 : 2011년 3월 6일(일), 연무 짙게 낌

▶ 산행인원 : 2명(드류, 동산)

▶ 산행시간 : 10시간 42분(휴식과 점심시간 포함)

▶ 산행거리 : 도상 18.0㎞

 

▶ 갈       때 : 상봉역에서 전철 타고 가평역에 내려, 택시 타고 명지산 입구인 익근리로 감

                     (택시요금 26,200원)

▶ 올       때 : 마일리 국수당 아래 닷동골유원지에서 택시 불러 현리로(요금 9,900원), 버스 타고

                     청평터미널로(요금 1,700원), 택시 타고 청평역으로(요금 2,300원), 전철 타고 상봉역

                     으로 옴(청평터미널에서 청평역 간의 거리는 1.3㎞라고 함)

 

▶ 시간별 구간(산의 표고는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도 표시를 따랐음)

07 : 00 - 상봉역 출발

08 : 10 - 명지산 입구, 가평군 북면 도대리(道大里) 익근리(益根里)

08 : 53 - 649m봉

10 : 42 - 952m봉

11 : 39 - 백둔봉(柏屯峰, 962m)

 

11 : 50 - 안부

12 : 53 ~ 14 : 15 - 명지산2봉(明智山2峰, △1,249.9m), 후미 도착은 13 : 58, 점심식사

14 : 45 - 명지산3봉(1,212m), 삼거리

15 : 16 - ┼자 갈림길 안부, 아재비고개(애재비고개)

16 : 03 - 1,033m봉

 

16 : 26 - 연인산(戀人山, △1,068.2m)

17 : 02 - 헬기장(1,055m봉)

17 : 30 - 우정봉(전패봉, 916m)

18 : 10 - 우정고개(전패고개)

18 : 52 - 가평군 하면 마일리(馬日里) 국수당, 닷동골유원지, 산행종료

 

1. 개나리, 우리 집 방안에서 피었다

 

백둔봉(柏屯峰, 962m), 명지산2봉(明智山2峰, △1,249.9m)

익근리(益根里). 마을 이름대로 이 마을 부근 산에서 사람의 몸에 유익한 약초뿌리가 많이 채취되

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야생식물채취를 엄금한다는 안내문이 자주 눈에 뜨인다. 우리가 너무 이

른가. 너른 주차장은 텅 비었다. 야생식물채취 검사소(예전의 매표소)를 지나 왼쪽의 철판으로 놓

은 다리로 명지천을 건너고 산기슭 낙엽송 숲 사이로 소로의 길 흔적이 보여 냉큼 그리로 든다.

 

북사면에는 눈이 아직 녹지 않았다. 발자국 따라 사각사각 나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발걸음 헝클어진다. 길 흔적은 경사 가팔라지자 사면 돌아 골로 빠지고 우리는 울창한 잡목

숲 뚫어 위로만 향한다. 고약하다. 저간 오지산행에서 잡목에 두 번이나 눈을 다치는 영금을 본 동

산 님은 선글라스 낀다. 폼 난다.

 

시간이 산을 간다. 36분 허우적거려 능선에 진입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살살 부는 바람이

제법 차다. 오름 길 능선에 쌓인 눈은 녹다가 단단하게 얼었다. 숫제 빙판으로 미끄럽다. 두 발 등

산화로 꾹꾹 눌러 밟아가며 오르는데 처음에는 설사면 돌파력에 우쭐한 재미 붙였으나 이내 적이

힘이 들어 고역으로 변한다.

 

┤자 능선 분기봉을 연이어 넘는다. 오른쪽 교통호와 나란히 간다. 이정표 삼았던 등로의 거목의

신갈나무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죽었다. 조그만 돌탑 놓인 ┤자 능선 분기봉을 넘고 바위지대가 나

온다. 직등한다. 왼쪽 절벽 아래 내려다보며 아찔한 스릴 느낀다. 두 번째 바위지대. 손맛 다시며

달라붙는다. 앞이 허전하다. 선바위였다. 절벽에 막힌다.

 

왼쪽 사면 바위 밑으로 돌아 오른다. 승천사(昇天寺)의 염불소리가 골 타고 들려온다. 장중한 음성

으로 고저장단 일정한 것이 분명 테이프 틀어놓은 소리다. 그에 신경 쓰느라 힘들 줄 모르고 952m

봉을 올라와버렸다. 952m봉은 명지산3봉에서 명지산 주봉, 사향봉까지 펼쳐지는 웅장한 능선, 그

리고 명지계곡으로 모여드는 크고 작은 여러 골짜기를 훤히 조감할 수 있는 경점이다.

 

영남 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加智山, 1,241m)을 이처럼 볼 수 있는 데가 가지산 남쪽 숨은벽 능

선의 백운산(885m)인데 서로 영락없이 닮았다. 빙판길 오르내리며 몇 번 엎어지고 자빠지고 나서

야 아이젠 찬다. 요사이 유행하는 체인식 아이젠이다. 이제 빙폭인들 못 오를까. 발걸음 성큼성큼

내딛는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번째 헬기장 내렸다가 957m봉 오르는 암벽 오른쪽 사면은 그야말로 홀더 드문

빙벽이다. 아이젠 덕 본다. 전망바위에 올라서서 두 눈 홉뜨지만 사방 연무가 짙어 흐릿하다. 백둔

봉은 등산객들이 임의로 붙인 명칭인 듯하다. 나무숲 우거지고 그 정점에 ‘생터보전지역’이라 새긴

팻말을 통나무말뚝 박고 밧줄 둘러쳐 보호한다.

 

명지산 주릉에는 설화가 만발하였다. 저 설화 다 지기 전에 저기에 다다를 수 있을까. 다급하여 동

산 님에게 내 먼저 가노라 휴대전화로 알리고 발걸음 서둔다. 헬기장 지나고 등로는 급전직하로 떨

어지다가 한 차례 멈칫하고 다시 뚝 떨어진다. 바닥 친 안부. 긴 오름이 이어진다. 비스듬히 선 커

다란 바위가 있으나 그 오른쪽 밑을 돈다.

 

2. 앞은 백둔봉, 뒤 흐린 설산은 명지산2봉

 

3. 명지산2봉

 

4. 명지산2봉

 

5. 명지산2봉 가는 길

 

6. 명지산2봉 남쪽 사면

 

너덜 사면 오르고 암봉. 왼쪽 슬랩이 그럴 듯하다. 며칠 전 장가계 천문산 귀곡잔도도 갔는데 하며

절벽 테라스를 살금살금 지나고 바위턱 오르자 더 갈 수 없는 절벽으로 막힌다. 되돌아오는 것도

조심스럽다. 오른쪽 암릉 밑을 도는 것이 정수(正手)였다. 동산 님이 내 발자국 흉내낼까봐 그리 가

지 말라고 눈밭에 가야할 방향을 화살표로 진하게 표시하였다.

 

고도 1,000m는 넘었으리라. 좌우길 각각 양짓말과 명지폭포 쪽으로 내리는 ┼자 갈림길 나오고 명

지산2봉 정상까지 700m 남았다. 멀리서 보았던 설화는 빙화였다. 길 가리며 축축 늘어뜨린 가지마

다 수정 같은 얼음 꽃이 달렸다. 헤치느라 건들면 무수히 부딪쳐 작고 맑은 영롱한 소리가 난다. 햇

빛이 반사하는 프리즘이라니 색색이 눈부시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빙화는 식물 따위에 수분이 얼어붙어 흰 꽃처럼 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일

에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일본기행 프로그램 중 눈길 끄는 풍경이 있었다. 산골짝 호젓한 숲속에

가 한바탕 내리더니 바로 얼어붙었는데 장관이었다. 특이한 지형에서 생긴다는 빙화였다. 홀연

바람이 일자 서로 부딪쳐 내는 소리 또한 천상음악이었다.

 

바로 그 풍경을 여기서 본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떻게 이 보기 드문 정경을 마련했을

까? 상고대는 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를 말한다. 추측컨대 상고대가 녹다가 얼어붙은 것

이다. 명지산2봉 정상까지 700m 내내 빙화 만발한 꽃 터널을 지난다. 곳곳에서 빙화 무게 못 이겨

우지끈하고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명지산2봉. 근경 조망 좋다. 명지산3봉, 명지산 주봉에 이르는 능선도 빙화 또는 설핀 상고대로 화

려하다. 정상에 속속 도착하는 다른 등산객들도 가쁜 숨 고를 새 없이 전후좌우 보고 또 보고 카메

라 셔터 누르기 바쁘다. 정점 한가운데 정상 표지석 옆에 있는 삼각점은 2등 삼각점이다. 일동 28,

1983 재설.

 

7. 빙화

 

8. 지나온 능선, 명지산2봉에서

 

9. 오른쪽 뒤는 명지산 주봉(1,252m)

 

10. 지나온 능선, 명지산2봉에서

 

▶ 연인산(戀人山, △1,068.2m), 우정봉(전패봉, 916m)

동산 님은 어제 강화도 마니산에 다녀와서인지 제 속도를 내지 못한다. 정상 기준으로 1시간을 넘

게 뒤쳐진다. 나는 그 시간을 가만히 있었으니 한속 들어 달달 떨며 늦은 점심밥 먹는다. 명지산3

봉 가는 길도 꽃길이다. 고개 들어 하늘 우러르면 오색의 빛무리가 장관이다. 명지산3봉 정상 옆으

로 돌아서 들린 너른 암반은 천상화원의 한복판이다. 오래 머문다.

 

데크계단 내리고 삼거리. 왼쪽은 아재비고개, 오른쪽은 귀목고개로 간다. 아재비고개 가는 길은 잘

다듬은 방화선 길이다. 연인산 넘어 우정고개까지 이렇다. 고도 400m 남짓 내리지만 전후 가경에

지루한 줄 모르고 어느새 다 내렸다. ┼자 갈림길 안부. 쉼터다. 일단의 등산객들이 연인산 쪽에서

우르르 내려오더니 오른쪽 백둔리로 내린다. 그네들이 조금은 부럽다.

 

아재비고개의 유래는 버전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통설은 이렇다. 옛날 어느 흉년에 굶주려 아사상

태에 빠진 아버지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 고개를 넘다가 문득 아이가 노루로 보이더란다. 하도

배가 고파서 노루를 잡으려고 달라 들었는데 순간 정신이 들었단다. 이후로 아이를 잡을 뻔했다하

여 아재비고개라 부른다.

 

바람 세게 불고 까마귀 울어댄다. 갈 길은 멀다. 아재비고개에서 연인산까지 3.3㎞. 거기서 마일리

국수당까지 5.9㎞. 우리 잡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859m봉 넘고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된다. 하얀 눈

길. 살짝 얼었다. 방금 내린 등산객들의 긴 미끄럼 자국에 신난 가가대소가 배어있다. 1,033m봉.

여기서부터 또 빙화 화려한 화원이다.

 

나뭇가지 꽃가지 흔들어보고 그 끝 사광(斜光)으로 바라보며 연인산 전위봉 넘고 연인산 정상이 가

까워 내쳐 간다. 이윽고 연인산 정상. 연인인 부부 등산객이 반기며 따뜻한 쌍화차 한 잔을 내준다.

고마운 일. 그들의 앞날에 복이 있을진저. 서로 산행정보 교환하고 그들은 연인능선으로 간다.

 

연인산은 월출산 또는 우목봉으로 불리어왔으나 가평군이 지명을 공모하여 1999년 3월 "사랑과 소

망이 이루어지는 곳"이란 뜻에서 연인산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6.25 동란 때 아군이 분전하였으나

전패하였다는 전패봉(916m), 전패고개는 우정봉과 우정고개로 바꾸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지형

도에는 연인산과 우정봉은 아무런 표기가 없고, 우정고개는 전패고개로 적고 있다.

 

연인산 내리는 길은 얼었던 흙이 풀려 진창이다. 하여 바지자락은 엉망이다. 길섶이나 풀숲으로 애

써 비켜가지만 미끄럽기는 마찬가지다. 헬기장인 1,033m봉 가는 길과 그 주변은 빙화(氷花)가 아

니라 빙화(氷禍)다. 웃다가 운다. 얼음 무게 못 이겨 가지 부러지는 것은 가지치기로 치부할 수 있

겠지만(금강산 들어가는 주변의 쭉쭉 뻗은 금강송은 쌓인 눈으로 저절로 가지치기가 된다고 한다),

주간(主幹)이 부러지는 것은 재앙이다. 그 악명 떨친 태풍 루사와 콤파스도 버텼는데 빙화로 죽어

난다.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移動: 案内, 検索
東福寺
TofukujiHondo.jpg
本堂(仏殿)
所在地 京都府京都市東山区本町十五丁目778番地
位置 北緯34度58分37.38秒
東経135度46分26.74秒
山号 慧日山(えにちさん)
宗派 臨済宗東福寺派
寺格 大本山、京都五山四位
本尊 釈迦如来
創建年 嘉禎2年(1236年
開基 九条道家
正式名 慧日山 東福禅寺
文化財 <国宝>
三門、宋版太平御覧、
絹本著色無準師範像 他
<重要文化財>
常楽庵、禅堂、偃月橋、
絹本著色釈迦三尊像、
木造地蔵菩薩坐像 他多数
テンプレートを表示
京都名所之内 通天橋紅楓(歌川広重
通天橋

東福寺(とうふくじ)は、京都市東山区本町十五丁目にある臨済宗東福寺派大本山の寺院。山号を慧日山(えにちさん)と号する。本尊釈迦如来、開基(創立者)は、九条道家開山(初代住職)は円爾ある。京都五山の第四位の禅寺として中世、近世を通じて栄えた。明治廃仏毀釈で規模が縮小されたとはいえ、今なお25か寺の塔頭(山内寺院)を有する大寺院である。

目次

 [非表示

歴史 [編集]

東福寺は京都市東山区の東南端、伏見区と境を接するあたりにある。この地には延長2年(924年)に藤原忠平によって建てられた藤原氏の氏寺・法性寺の巨大な伽藍があった(法性寺は、JR京阪東福寺駅近くに小寺院として存続している)。嘉禎2年(1236年)、九条道家摂政)は、この地に高さ5丈(約15メートル)の釈迦像を安置する大寺院を建立することを発願、寺名は奈良東大寺興福寺の二大寺から1字ずつ取って「東福寺」とした。5丈の釈迦像を安置する仏殿の建設工事は延応元年(1239年)から始めて、完成したのは建長7年(1255年)であった。高さ5丈の本尊釈迦像は元応元年(1319年)の火災で焼失、14世紀半ば頃に再興されるが、明治14年(1881年)の火災で再び焼失している。なお、東福寺には巨大な「仏手」(現存部分の長さ2メートル)が保管されており、旧本尊像の左手部分のみが明治の火災の際に救い出されたものと推定されている[1]。これは創建時の本尊ではなく、14世紀に再興された本尊像の遺物であるが、本尊の「高さ5丈」というのはあながち誇張ではなかったことがわかる。

九条道家は開山(初代住職)として、当時宋での修行を終えて帰国していた禅僧・円爾を迎えた。円爾は駿河国栃沢(現静岡市葵区)の人で、嘉禎元年(1235年)、宋に渡って径山(きんざん)興聖万寿禅寺の高僧・無準師範に入門。印可(師匠の法を受け継いだというお墨付き)を得て仁治2年(1241年)、日本へ帰国した。円爾ははじめ九州博多の承天寺に住したが、同寺が天台宗徒の迫害を受けて焼き討ちされたため、九条道家の援助で上洛、東福寺の開山に迎えられた。

東福寺の建設工事は30年以上に亘って続き、法堂(顕教寺院の「講堂」にあたる)が完成したのは文永10年(1273年)であった。その後、元応元年(1319年)の火災をはじめたびたび焼失するが、九条家鎌倉幕府足利家徳川家などの援助で再建されてきた。昭和51年(1976年)韓国全羅南道新安郡智島邑道徳島沖の海底から、大量の荷を積んだジャンク船が発見、引き揚げられた(新安沈船)が、積荷木簡の中には「東福寺」「十貫公用」などの字が見られることから、この船は焼失した東福寺の造営料を名目として、鎌倉幕府公認で派遣された唐船(寺社造営料唐船)であることが推測されている。近代に入って明治14年(1881年)にも大火があり、仏殿、法堂、方丈、庫裏などがこの時焼失した。現在の本堂、方丈、庫裏などは明治以降の再建だが、国宝の三門をはじめ、東司(便所)、浴室、禅堂などは焼け残り、中世の建物が現存している。

東福寺からは歴代多くの名僧を輩出しており、『元亨釈書』の著者である虎関師錬室町時代に画僧として活躍し、その後の仏画水墨画に多大な影響を及ぼした吉山明兆などが著名である。

境内 [編集]

三門(国宝)
方丈
開山堂(重要文化財)
禅堂(重要文化財)
東司(重要文化財)
偃月橋(重要文化財)

三門本堂方丈庫裏などからなる主要伽藍を中心に25の塔頭寺院がある。主要伽藍の北には洗玉澗(せんぎょくかん)という渓谷があり、西から東へ臥雲橋、通天橋、偃月橋という3本の橋(東福寺三名橋)が架かる。通天橋は、本堂から通じる廊下がそのまま屋根付きの橋となったもので、この付近は特に紅葉の名所として知られる。橋を渡ると、開山円爾を祀る常楽庵がある。応仁の乱の戦火を免れた貴重な文化財が数多く存在する。

三門
応永32年(1425年)に足利義持が再建し、現存する禅寺の三門としては日本最古のものである。上層に釈迦如来と十六羅漢を安置する折衷様の五間三戸二重門である(「五間三戸」とは正面の柱間が5つ、うち中央3間が通路になっているという意味、「二重門」は2階建ての門だが、「楼門」と違い、1階と2階の境目にも軒の出を作るものを言う)。
本堂(仏殿兼法堂)
明治14年(1881年)に仏殿と法堂が焼けた後、大正6年(1917年)から再建工事にかかり、昭和9年(1934年)に完成した。入母屋造裳階(もこし)付き。高さ25.5メートル、間口41.4メートルの大規模な堂で、昭和期の木造建築としては最大級のもの。天井の竜の絵は堂本印象筆である。本尊釈迦三尊像(中尊は立像、脇侍は阿難と迦葉)は、明治14年の火災後に万寿寺から移されたもので、鎌倉時代の作である[2]
方丈
明治23年(1890年)の再建。正面前庭にある唐門は明治42年(1909年)に造営され、昭憲皇太后より下賜されたものである。庭園は近代の造園家、重森三玲によって昭和13年(1938年)に作庭され、方丈を囲んで四方に配される。釈迦成道を表現し、八相の庭と命名されている。鎌倉期庭園の質実剛健な風格を基本とし、これに近代芸術の抽象的構成をとり入れた枯山水庭園である。
  • 南庭 - 荒海の砂紋の中に蓬莱方丈瀛洲壺梁の四仙島を表現した配石で、右方には五山が築山として表現されている。
  • 北庭 - 南の恩賜門内にあった敷石を利用し、石と苔を幾何学的な市松模様に配している。
  • 西庭 - さつきの刈込みと砂地が大きく市松模様に入り、くず石を方形に組んで井田を意図している。
  • 東庭 - 東司の柱石の余材を利用して北斗七星を構成し、雲文様の地割に配している。
庫裏
明治43年(1910年)に再建。方丈唐門とともに昭憲皇太后の恩賜建築である。切妻を正面とする禅宗式寺院の典型。
常楽庵
主要伽藍の北側に位置する。開山円爾像を安置する開山堂とその手前の昭堂を中心とした一画。文政2年(1819年)焼失後、同9年(1826年)までに再建された。昭堂の中央部分は2階建の楼閣となっており、伝衣閣(でんねかく)と称する。金閣(鹿苑寺)、銀閣(慈照寺)、飛雲閣西本願寺)、呑湖閣(大徳寺塔頭芳春院)と並び「京の五閣」といわれている。
禅堂
貞和3年(1347年)に再建された豪壮な姿に往時の隆盛がしのばれる単層・裳階(もこし)付切妻造の建物で、中世期より現存する最大最古の禅堂である。
東司(とうす)
室町時代唯一、日本最大最古の禅宗式の東司(便所)の遺構で、多くの修行僧が一斉に用を足すことから百雪隠(ひゃくせっちん)とも呼ばれる。内部は中央通路をはさんで左右両側に円筒の壺を埋める。
浴室
前面を入母屋造、後方を切妻造にした単層本瓦葺の建物で、長禄3年(1459年)に建てられた京都最古の浴室建築の遺構として知られる。内部は正面板敷きの上に2つの蒸し風呂が並び、後方に釜と焚き口がある。
月下門(月華門)
板蟇股(かえるまた)など細部にわたり鎌倉時代の特色をよく残す切妻造・檜皮葺木の四脚門で、文永5年(1268年)に一条実経が常楽庵を建立した際に亀山天皇京都御所の月華門を下賜されたと伝えられる。
六波羅門
南正面に立つ本坊伽藍の最南端にある鎌倉時代前期の門で、もと北条氏六波羅政庁にあったものを移したことから、この名で呼ばれている。
偃月橋(えんげつきょう)
本坊より塔頭、龍吟・即宗両院に至る三ノ橋渓谷に架かる単層切妻造・桟瓦葺きの木造橋廊である。1603年に再建、1967年に重要文化財に指定され、日本百名橋にも選ばれている。
通天橋
仏殿から常楽庵に至る渓谷・洗玉澗(せんぎょくかん)に架けられた橋廊で、天授6年(1380年)に春屋妙葩(しゅんおくみょうは)が谷を渡る労苦から僧を救うため架けたと伝えられる。昭和34年(1959年)台風で崩壊したが2年後に再建、その際橋脚部分は鉄筋コンクリートとなった。
光明宝殿
本堂東側にある文化財収蔵施設で、昭和56年(1981年)に完成した。東福寺および塔頭寺院の文化財を収蔵するが非公開である。

境内にはから伝わった「通天モミジ」と呼ばれる三葉楓(葉先が3つにわかれている)などの木が多い。もとはの木が植わっていたが「後世に遊興の場になる」という理由で伐採され、楓の木が植えられたものである。

また、明治時代日露戦争の際には寺域が接収され、ロシア捕虜の収容施設となっていた。

 

 

토후쿠지 (Tofukuji Temple)




토후쿠지는 면적이 20만㎡나 되는 아주 큰 절로, 쿄토 단풍의 명소로 유명해요. 토후쿠지의 산몬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이에요. 일본 임제종(린자이슈) 토후쿠지파 총본산으로, 쿄토 고잔(五山, 쿄토의 5대 선종 사찰) 중 하나에요.


카마쿠라 바쿠후의 관료였던 구조 미치이에(九条道家)가 나라의 거대 사찰인 토다이지와 코후쿠지에 대적하는 쿄토 최대의 절을 짓기로 원을 세우고 1236년부터 1255년까지 19년에 걸쳐 지은 절이에요. '다이지'와 '코쿠지'에서 한 글자씩 따서 토후쿠지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토후쿠지 | 토후쿠지 지도

[토다이지]

토다이지(동대사, 도다이지)는 나라의 핵심적 관광지로, 높이 15m에 달하는 아주 큰 청동 불상이 일본에서 두번째로 큰 목조 건물인 대불전(다이부츠덴)에 안치되어 있어요. 일본 화엄종 본산으로, 법상종 본산인 코후쿠지와 함께 일본 불교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토다이지(동대사)는 동쪽의 큰 절이라는 뜻이에요.

[코후쿠지]

고후쿠지(코후쿠지, 흥복사)는 나라 현청 맞은 편에 있어요. 코후쿠지는 일본 법상종 본산으로, 건물이 175채나 되는 거대한 절이었지만 수차례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어요. 코후쿠지의 5층탑은 일본에서 2번째로 높은 나무탑이며, 국보급을 비롯하여 주요문화재 2만여점이 소장되어 있어요. 카스가타이샤도 코후쿠지에 속해 있었지만 메이지 유신이후 신불분리정책에 의해 분리되었어요. 나라 시대의 권력가였던 후지와라 가문에서 710년 가문의 절로 건립했어요.






정문을 통해 본당(혼도)쪽으로 들어가세요.




토후쿠지 경내도



본당 주변




본당(혼도, 本堂). 들어갈 수는 없어요. 천장의 용그림이 유명해요. 용의 몸길이가 53m나 된다고 해요.




본당(혼도)과 산몬.




산몬(三門). 일본 국보에요. 일본에 현존하는 산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해요. 2층 누각에 불당이 있는데 석가여래좌상, 16나한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고 해요. 1년에 3일간, 매년 3월 14일에서 16일까지만 개방한다고 하네요.




본당(혼도)과 젠도. 젠도는 참선을 하는 건물을 뜻해요.




젠도는 무로마치시대(14세기) 때부터 내려오던 건물이에요.



호조의 핫소 정원




토후쿠지 경내도




쿠리. 절의 부엌, 식당 및 숙소를 쿠리라고 해요. 이 건물을 통해 호조로 들어가세요. 호조는 1890년에 재건했어요.




입장료 400엔. 토후쿠지의 호조는 동서남북 사방이 모두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유일한 것이라 해요. 호조 정원의 이름은 핫소 정원이에요. 부처님의 삶에서 일어난 여덟가지 중요한 사건(八相成道)에 따라 지은 이름이에요.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가 1939년에 만들었다고 해요.




동쪽 정원.




동쪽 정원의 7개의 돌은 북두칠성을 상징해요. 돌은 다른 건물의 기둥과 주춧돌을 이용하여 원기둥으로 만들었다고 해요. 관광객들은 동전 던지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마 절에서도 좋아할 것 같아요. ^^




남쪽 정원.




호라이, 호조, 에이쥬, 코료는 4개의 신선들의 섬을 상징해요. 고잔(五山)은 다섯 개의 산, 소용돌이 모양의 모래무늬는 여덟 바다(八海, 학카이)를 나타내요.




서쪽 정원.




철쭉과 모래로 만든 정원이에요. 세이덴이치마츠(井田市松)의 정원이라고 불러요.




북쪽 정원.




북쪽 정원.



류긴안




토후쿠지 경내도




류긴안. 류긴안의 호조는 국보이에요.




류긴안 입장료 400엔. 가을 단풍철(11월~12월 초)에만 특별 공개한다고 해요. 류긴안의 호조 정원도 시게모리 미레이의 작품(1964년)이에요.



츠텐쿄, 카이산도



츠텐쿄와 표 파는 곳이 보이네요. 단풍철에는 관광객이 많아 표 파는곳을 따로 설치한 듯해요.




입장료 400엔.




츠텐쿄. 츠텐쿄에서 세교쿠칸의 단풍을 구경하는 것이 토후쿠지의 관광의 핵심이죠.




츠텐쿄에서 본 와운교(臥雲僑). 단풍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가운데로 흐르는 계곡을 세교쿠칸이라고 해요.




와운교(臥雲僑).




츠텐쿄를 건너 회랑을 따라 카이산도로 가세요.




카이산도. 카이산도란 절을 처음 세운 개산 조사의 인물 그림이나 조각상, 위패를 모신 건물을 말해요. 개산 조사는 엔지벤엔(円爾弁円, えんじべんえん)스님이세요. 엔지벤엔 스님(1202~1280)은 일본 최초로 '쇼이치 국사'시호를 받은 고승이에요.




카이산도의 정원.




카이산도에서 나와서 계곡쪽에서 본 츠텐쿄.



토후쿠지 가는 길




토후쿠지 부근 지도



토후쿠지로 기차로 가는 법




케이한, JR 토후쿠지역에 내리세요. 입구를 같이 사용해요.




역에서 나와 오른쪽(남쪽)으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똑바로 가세요.




조금 가면 토후쿠지 파출소(코반)가 나와요. 옆길로 들어가세요. 똑바로 계속가서 중앙대문(나카다이몬)으로 들어가 본당(혼도)으로 바로 갈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쪽으로 가요.




파출소(코반) 옆길로 꺾어들면 북쪽 대문(키타다이몬)이 나와요.




북쪽 대문(키타다이몬)을 지나 이 길 끝에서 남쪽(오른쪽)으로 가세요. 토후쿠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이 길로 들어오시게 되요.



토후쿠지로 버스로 가는 법




시버스 202번, 207번, 208번. 토후쿠지 버스 정류장에 내리세요. 쿄토역에서 가는 버스는 208번인데 쿄토 국립 박물관과 산쥬산겐도를 거쳐 조금 둘러서 가요. 쿄토역에서 남5번 버스로 토후쿠지 미치 버스 정류장에 내려도 되요. 쿄토역에서 전철로는 한 정거장이에요.




고가도로가 보이시죠. 이 고가도로가 조금 전에 설명한 토후쿠지역에서 갈 때 지나가는 고가도로이에요.




남쪽 길로 들어가세요.




토후쿠지. 가시다가 왼쪽으로 꺽으세요.




왼쪽으로 꺾으면 이 길이 나와요. 다시 오른쪽으로 가세요.






경내도




타이코안을 지나서...




靈源院 앞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靈源院에 있는 재미있는 동자승 조각.




다시 왼쪽으로 꺾은 다음, 안내판을 따라 오른쪽(남쪽)으로 가세요.




안내판.




길 오른쪽에 있는 도쥬인을 지나 가세요.




도쥬인 옆 골목 안쪽에 레이운인이 있어요. 레이운인은 다음에 포스팅 할께요.




레이운인 가는 골목.




가운쿄가 보이네요.




가운쿄 왼쪽(동쪽)에 겍카몬(月下門)이 있어요. 평소에는 닫혀 있으나, 가을 단풍철에는 관광객을 위해 임시로 열어두었어요.




토후쿠지 전체가 일본 국보이에요.




가운쿄(臥雲僑).




가운쿄에서 본 츠텐쿄. 가운쿄를 지나면 정문이 나와요.



[입장료] 경내는 무료 / 츠텐쿄,카이산도 : 400엔 / 호조 핫소정원 : 400엔 | [여는 시간 (입장 마감 시간)] 09:00~16:00 (15:30) / 11월(단풍철) 》08:30~16:30 (16:00) | [닫는 날] 없음

 

[가는 길]

202, 207, 208번 시버스 : 토후쿠지 버스 정류장에 내린다. (쿄토역 : 208번 - 국립박물관을 지나 둘러서 간다)

JR 나라선 / 케이한 본선 : 토후쿠지역에 내린다. 쿄토역 바로 다음 역이다. 걸리는 시간은 2분, 요금은 140엔이므로 기차가 싸고 빠르다.





식당 : 타카자와(京料理 高澤,きょうりょうり たかさわ) | 타카자와

토후쿠지 주변의 쇼카도 도시락집이에요. 토후쿠지 주변에 특별한 맛집이 없어, 비싸지만 정보 차원에서 올려드려요. 식사는 하셔야죠.

11:30~19:00. 수요일 휴무. 점심 3800엔. 저녁 5300엔이상.



식당 : 탄바야(丹波屋) | 탄바야 | 탄바야

토후쿠지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꺽어 고가도로 가기 직전에 있어요. 일본 전통 간식인 당고는, 나무 꼬치에 끼운 경단을 구워 소스를 발라 다시 굽어요.

70엔 정도.





토후쿠지후시미이나리타이샤센뉴지


토후쿠지는 일본 임제종(린자이슈) 토후쿠지파 총본산이에요. 절 전체가 일본 국보이고, 가을철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에요. 센뉴지는 신곤슈(진언종) 센뉴지파 총본산이에요. 일본 왕실의 위패가 있는 절이며, 주변에 일본왕들의 무덤이 있어요. 따라서 미테라(왕실의 절이란 뜻)센뉴지라고도 불러요. 양귀비 관음상이 있어요. 후시미 이나리 타이샤는 전국 3만여개의 이나리 진쟈의 본궁이에요. 쌀의 신을 모시는 곳으로, 여우가 신의 전령이에요.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서 여우의 조각상이 있는 이 진쟈들을 볼 수 있어요. 산꼭대기까지 이어진 토리이들로 유명한 곳이죠.


 

 

 

 

 

 

 

 

 

 

 

 

 

 

kbs에서 누들로드라는 방송을 톻하여 자세히 나온적있어여

kbs홈피로 가보세여~

패스트푸드로서의 국수의 역사는 400년 전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의 가장 인기 있었던 메뉴는 메밀로 만든 국수, 소바였다.
저렴하고 먹기 쉬우며 영양가 있는 소바.
게다가 빨리 먹을 수 있어 상인들과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매년 가을, 일본 교토 동복사에서 국수를 바치는 제사가 열린다.
이날은 송나라 때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쇼이치 국사의 기일이다.
그는 소면을 일본에 최초로 전했다고 한다.
쇼이치 국사가 유학했던 송대는 국수문화가 한창 꽃피우던 때이다.
과연 일본의 최초의 국수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일까?

중국 송나라가 국수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도시의 탄생이었다.
당나라가 몰락하면서 성곽이 무너지고 각종 규제가 풀리면서 상공업이 자유로워졌다.
당시 개봉에만 대형 음식점이 73개, 작은 음식점은 수도 없이 많았다.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바탕으로 송나라의 일상을 특수영상으로 재현한다.
12세기 송나라 국수가게의 하루는 어땠을까?
도시가 발달하면서 국수가 급속도록 발전했다.
거대한 도시로 탈바꿈 한 일본의 에도.
전국에서 모인 건설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에도는 집 떠나 혼자 사는 남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빨리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 국수는 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에도 전문가 오쿠보 히로코와, 켄 홈이 에도시대 이동식 소바가게를 드라마 재연과
함께 설명한다.

1958년 일본에서 즉석라면이 처음 출현한다.
라면의 탄생은 국수가 원래 갖고 있는 특성에 새로운 식품제조기술이 결합하여 완성된 세계 음식문화사의 혁명이었다.
라면 개발의 주역 일본 닛신식품을 찾아가 라면 개발의 비화와 세계 라면시장의
미래를 들어본다.
2008년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의 식탁에도 오른 국수.
국수의 변신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1976년 발견, 인양돼 조사되기 시작한 목포 신안선 출토 유물 중 목패(木牌). 목간(木簡)이라고도 하는 이들 목패는 신안선에 선적한 무역품의 화물표로서 앞뒷면에 항해시기와 목적지, 적재연월일, 소유주 이름, 물품내용과 수량 등이 정확히 기재돼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목패에는 동복사(東福寺)라는 일본 교토 소재 사찰 이름이 있어 물품 목적지를 알려준다./김태식/문화/ 2006.9.24 (서울=연합뉴스)

 

 

 

 

토후쿠지...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했던...

여름에는 가지마세요~~~



토후쿠지 3대다리중 하나입니다.

중요문화재이기도 합니다.





다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통천교.

역시 3대다리중 하나이며 저기서 보는 단풍이 유명합니다.

아직 여름이라 푸릇 푸릇하지만...^^



다리를 지나서도 한참을 올라가야하는...
겨우 본당으로 가는 길에 도착.


 토후쿠지는 삼문, 본당, 方丈, 禅堂등 로 이루어지는 주요가람을 중심으로 25의 탑두사원이 있습니다. 주요가람의 북쪽에는 洗玉澗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臥雲橋,通天橋、偃月橋 라는 3개의 다리-도후쿠지 3대 다리가 있습니다..

通天橋는, 본당에서부터 통하는 복도가 그대로 지붕이 있는 다리가 된 것으로, 단풍으로 유명합니다..

다리를 건너면, 開山円爾를 모시는 조라쿠(常樂) 암자가 있습니다.

 

庫裡

1881년의 화재로 소실, 1906년 기공, 1909년 준공했습니다. 切妻를 정면으로 하는 선종식 사원이 전형적인 형으로, 흰 벽에 배치된 종횡의 構架재료가 인상적입니다.
내부에서는 일절의 절의 업무가 거행되어져, 행사의 때의 식사 준비도 여기에서 하고 있습니다.



국보인 삼문입니다.

삼문은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무 작문(無作門)의 3해탈문의 줄임. 남도6종사원의 중문에 해당됩니다.. 도후쿠지(東福寺)는 남도2대사(大寺)의 영향을 받아, 이 삼문(三門)은 대불(大佛- 천축식), 선종님 (중국식), 일본 양식을 교묘하게 조합시킨 건물 제조 방식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입장료를 내고 아래에서 보이던 통천교를 지나갑니다.

이 다리도 길더군요..ㅜ.ㅜ

가을이라면 정말 멋질것 같았지만...

땡볕 더위에 아래에서부터 헉헉 거리고 도착하다보니..조금 힘이 들었던...








그래도 가을이면 꽤 멋있을 것 같죠?

 

 

 

누들로드 - 국수의 문명사

 

 

 

해마다 10월이면 일본의 동복사에서는 700년 된 낡은 영정에 기념촬영이 있습니다. 쇼이치 국사(1202~1280). 동복사를 창건한 그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소바국사 즉 메밀국수 국사라 불러왔습니다. 그런 흥미로운 별명을 얻게 된 것은 1241년 그가 송나라 유학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한 장의 설계도 때문입니다. 수마(水磨)도라도 하는 이 복잡한 그림은 수차와 톱니바퀴를 이용해 밀가루를 만드는 제분설계도였습니다. 그리고 신기술과 함께 들어온 신기한 음식. 밀가루로 만든 소면이었습니다. 이것은 국수라는 선진적인 음식이 중국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로부터 8백년 후 이 음식은 또 다른 여행을 떠납니다. 그것은 우주 라면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정도로 지구에서 먹던 라면 맛을 재현에서 감탄했습니다.”

 

7백여 년 전 사찰의 공양음식이었던 국수가 어떻게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간편식이 될 수 있었을까요.

 

진행자 켄 홈

“오늘은 국수가 어떻게 진화해 왔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보겠습니다.”

 

5편 인류 최초의 패스트푸드

 

영평사(일본 후쿠이현)는 선종의 중심 도량입니다. 대청소로 아침을 시작하는 수행자의 생활. 군대생활을 방불케 하는 절도 있는 일상생활은 그 자체가 수행의 중요한 일부입니다. 송나라 때 일본으로 전해진 선종의 규율은 엄하기로 유명합니다. 청소시간 만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식사 시간. 선종에서는 음식을 조리하고 먹는 과정을 수행의 중요한 일부로 여깁니다. 1년에 단 몇 차례, 고된 수행이 끝나는 특별한 날만 수행자들은 국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국수를 먹는 날엔 스님들에게 금기 하나를 깰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철저히 육식을 금하고 식사하는 동안 절대 소리를 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선종의 식사 예법이지만 국수를 먹을 때만큼은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평생 철저한 규율 속에서 살아야 하는 수행자들에겐 이때가 찰라 같은 해방의 시간입니다.

 

13C에 이르러 송나라와 일본의 교류가 빈번해집니다. 당시 중국을 다녀온 유학파 승려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일본으로 들어옵니다. 좌선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의 전통과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 불교의 식재료와 조리법이었습니다. 참깨와 이것을 양념절구에 넣고 갈고 으깨는 기술. 무를 갈아 즙을 내고 양념으로 쓰는 조리법도 이때 수입된 것입니다. 국수도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밀을 제분하여 면을 만들어 먹는 법은 사찰의 주방을 통해 처음으로 일본에 알려지게 됩니다. 지금도 일본의 절에선 당시의 전통에 따라 국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다시마와 표고버섯으로 국물을 내고 여기에 삶은 면을 한번 담갔다가 꺼냅니다. 절집 국수는 군더더기가 없고 맛과 상차림이 단순한 것이 특징입니다. 당시 중국의 송나라에는 국수가 이미 대중화 된 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일본 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는 국수는 승려와 상류층만 즐길 수 있는 별식이었습니다.

 

 

쿠마쿠라 이사오 에도 식문화 전문가

“원래 스님들은 하루 한 끼만 먹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이 없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때때로 약석이라고 해서 몸을 보전하기 위한 식사를 합니다. 그것이 점심입니다. 식사가 아니라 간단한 먹을 것을 의미했죠.”

 

 

비슷한 시기 유럽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보니파키우스 8세. 필립 4세와의 대립에서 패하고 유배를 당했던 아비뇽 유수의 주인공입니다. 교황은 또 한 가지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파스타를 매일 즐겨 먹었습니다. 그가 즐겼던 파스타는 핌발레. 즉 층층이 쌓아올린 국수 파스테테입니다. 높게는 10층까지 쌓아올린 이 요리는 파스타 사이사이에 닭의 간, 송로버섯 등을 포개 넣은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이름을 붙인 파스타가 남아 있을 정도로 교황은 파스타를 즐겼습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파스타는 교황과 같은 상류층만이 먹을 수 있는 고급 요리였습니다.

 

“파스타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가늘고 긴 형태의 스파게티가 가장 잘 알려져 있죠. 하지만 중세 유럽의 파스타는 오늘날의 것과 형태가 무척 달랐습니다.”

 

중세시대 파스타는 만들기 까다로운 요리였습니다. 손으로 바닥에 밀기도 하고 밀대로 넓게 핀 후에 칼로 썰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파스타가 고급요리였던 것은 밀이 귀했던 이유도 있지만 이렇게 모든 과정이 정교한 수작업에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대량생산이 어려웠죠. 압출기를 사용한 기계 제면법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파스타는 주로 귀족의 전유물로 오래 동안 머물게 됩니다. 이런 중세의 파스타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건조하지 않은 생 파스타였다는 것입니다. 생파스타 반죽엔 건파스타에는 넣지 않는 계란이 들어갑니다. 밀가루로 듀럽밀이 아닌 빵을 만드는 일반 밀가루를 사용합니다. 이런 생파스타의 전통은 부유했던 이탈리아 중북부에 가장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 제노바의 명물인 도장 파스타 코르체니. 이건 역시 일일이 절편 틀을 사용해 찍어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생파스타입니다. 16C중반까지도 국수의 가격은 빵의 세배나 됐습니다. 사치품이었고 미식가의 단골메뉴였던 생파스타는 중세 귀족의 식탁에 고기와 함께 올랐습니다.

 

여기 파스타가 얼마나 귀한 음식재료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제노바 고문서자료관에 보관된 총12개의 12C 문서. 그중에 사망한 군인이 남긴 재산목록이 남아 있습니다. 1279년에 사망한 군인은 군복, 칼, 방패와 함께 ‘마케로니’가 가득 찬 나무통을 재산으로 남겼습니다. 마케로니는 말린 파스타의 일종입니다.

 

맛시모 몬타나리 볼로냐 대학교

“1500년대 나폴리에서 법령 공고가 있었는데 기근에는 파스타 생산을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스타가 사치식품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필품이 부족할 때는 생산을 적게 해야 하는 식품이었던 거죠.”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에 가장 빨리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나라입니다. 때문에 근대화 과정에서 국수의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은 바로 조닌들이었습니다. 조닌은 에도시대에 상공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을 일컫는 말이죠. 그들은 부지런하고 현세적인 17C 아시아의 신인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국수의 문화를 뒤바꾸어 놓게 됩니다.

 

전성기 에도의 인구는 백만. 비슷한 시기 중국 베이징의 인구가 60만. 파리가 55만이었던 것과 비교했을 때 에도는 18C 무렵 세계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에도의 인구가 이렇게 급증했던 이유는 도쿠가와 막부가 권력 강화를 위해 실시한 참근교대제 때문입니다. 지방 영주인 다이묘들을 1년 동안 에도에 볼모로 머물게 하는 이 제도로 인해 지방영주에 딸린 수천 명의 사무라이와 식솔들이 이주해 왔습니다. 허허 벌판에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건설노동자와 목수, 상인들이 집결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조닌들이었습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에도는 한때 남성 인구가 전체의 70%에 육박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남자들은 목조 연립주택인 나가야에서 모여 살았습니다. 나가야는 마당에 상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일어난 인구 덕분에 주거 공간은 가구 당 5평 남짓으로 비좁았습니다. 부엌이 한쪽 구석에 있긴 했지만 화재의 위험이 높아 매 끼니를 해먹기는 불편하고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간이식당이 야다이. 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포장마차입니다. 야다이의 대표음식은 에도만에서 잡은 신선한 해산물과 야채를 튀긴 덴뿌라입니다. 덴뿌라는 바로 집어 먹을 수 있게 꼬치에 꽂아 팔았는데 한 개의 가격은 지금 물가로 100엔 정도였습니다. 장어구이로 이때 등장한 인기메뉴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쟁관계에 있는 관서지방과 달리 장어를 배가 아닌 등부터 갈랐습니다. 배를 가르는 것이 무사들의 할복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꺼려한 것이죠. 스시를 만들 때도 이런 관서와의 라이벌 의식이 작용했습니다. 초기에는 관서지방에 하코즈시가 많았습니다. 생선에 소금 간을 하고 나무틀에 밥이랑 같이 눌려 이삼일 묵인 후 잘라 먹는 것이죠. 이에 반해서 에도의 스시는 초밥을 쥐어 뭉친 뒤 그 위에 생선을 올려 바로 먹는 니기리즈시 바로 오늘날의 스시입니다. 바쁘고 성질 급한 에도사람들에겐 제격인 요리거리였죠.

 

 

지금도 축제인 마츠리가 있으면 도쿄 곳곳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합니다. 약지소바. 철판에 볶은 국수요리는 마츠리 포장마차의 최고 인기 메뉴죠. 소바. 메밀국수는 3백 년 전 에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패스트푸드였습니다. 메밀로 만든 소바가 유행했던 이유는 에도 인근에는 메밀밭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밀은 관서지방에서 수입해 와야 하지만 메밀은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에도 국수의 주재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쿄에는 백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명 소바집이 유난히 많습니다.

 

4대째 소바집이 운영하고 있는 127년의 소바집. 어떻게 소바가 만들어지는지 잠깐 볼까요. 메밀국수를 만드는데 제일 중요한 공정은 물과 가루를 섞는 첫 번째 공정입니다. 메밀은 찰기가 없기 때문에 반죽이 갈라지거나 트지 않도록 신속하고 리드미컬하게 섞어줘야 합니다. 그래서 소바집에선 적어도 삼년 이상의 경력자만이 반죽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홍두깨로 얇게 펴는 일도 중요한 두 번째 공정입니다. 특히 공간이 좁은 에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네모난 모양으로 밀반죽을 폅니다. 다음은 썰기. 소바의 굵기는 약 1.6mm. 기계로 균일하게 써는 것보다 나무자와 전용칼을 이용해서 손으로 써는 게 메밀의 풍미를 더한다고 합니다.

 

 

 

에도시대 전에는 메밀로 국수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메밀은 주로 삶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바 조리법이 개발되어 국수가 대중화 될 수 있었습니다. 메밀은 밀에 비해 찰기가 부족해 이런 장인들의 노련한 기술과 노력이 있어야만 양질의 국수를 만들 수 있습니다. 30초 동안 빠르게 미지근한 물에 국수를 씻어낸 뒤엔 이렇게 채에 걸려 물을 빼내야 국수의 쫄깃함이 살아납니다. 자 이렇게 120년 전통에 소바 국수가 완성됐습니다.

 

 

에도시대 소바가 다른 포장마차의 음식들과 차별화 된 점이 있습니다. 밀대에 메고 다니는 이동식 포장마차에서 팔았다는 것입니다. 에도에는 이런 소바장사의 수가 수천이 넘었습니다. 후리후리라고 불렸던 이런 이동식 소바 장사 덕분에 에도의 서민들은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죠. 바퀴도 달려 있지 않은 무거운 포장마차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국수를 파는 패스트푸드의 문화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 건장한 청년이 어떻게 소바를 팔았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진행자 켄 홈

“이것이 소바 야다이입니다. 일종의 이동식 국수집이죠. 가게 주인은 이것을 메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곳으로 갑니다. 종이 울리면 사람들은 소바 가게가 왔다는 걸 알게 되죠. 일단 멈추면 ‘니하치’라고 주인은 소리를 칩니다. 일본어로 2대8을 의미하는 말인데요. 소바국수에 밀과 메밀을 2대 8로 섞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300년 전에 국수를 어떻게 팔았는지 보겠습니다. 마침 저기 손님이 오는군요. 손님이 오면 미리 삶아놓은 소바를 소쿠리에 넣고 다시 데웁니다. 간장과 생선으로 맛을 낸 장국인 츠유를 그릇에 붓네요. 일본 소바는 카키 소바라고도 부르는데요. 카키는 일본어로 ‘쏟아 붓다’라는 뜻이지요. 보시다시피 먹는데 불과 3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패스트푸드 아닐까요?”

 

쿠마쿠라 이사오 에도 식문화 전문가

“면을 국물과 함께 먹는다는 점이 패스트푸드로서 중요한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의 그릇 안에 먹을 것과 국물이 함께 들어있어 다른 것 없이도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점이 패스트푸드로서의 면의 보급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C에 들어서면서 소바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 맛있는 소바집 백 곳에 등수를 매긴 순위표까지 발표됐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소바는 상류층의 음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거리에 음식에 손을 데지 않던 사무라이들까지 소바를 즐겨 소바를 담는 고급 식기세트와 양념통, 면을 담가 먹는 장국, 츠유를 담는 자기까지 등장합니다. 이런 소바 열풍에는 숨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츠오부시’입니다.

 

“이것이 가츠오부시입니다. 건조된 생선인데 나무처럼 딱딱하죠. 소바 맛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중요한 식재료입니다. 먹기 위해서는 이 기계로 대패질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식재료 중에 가장 딱딱해서 대패로 갈아 먹어야 하는 가다랭이포. 이것의 개발로 에도시대 소바의 맛에 일대혁신이 일어납니다. 가츠오부시의 재료는 가다랭이입니다. 일본 시즈오카의 한 항구에 모이는 가다랭이는 요즘은 4천 킬로미터 떨어진 원양에서 잡힌 것들입니다. 영하 50도에서 급랭한 생선을 다듬고 찌는 것으로 지난한 가다랭이포 제조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훈증으로 건조하여 수분 량을 17%로 떨어뜨린 후 밀실에 넣고 곰팡이를 자연번식 시킵니다. 에도시대 때 개발된 이러한 가공법으로 특유의 감칠맛을 내는 가다랭이 포가 만들어집니다. 가다랭이포와 간장 제조법이 발전하면서 소바의 맛이 크게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메밀국수는 특별한 맛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것을 찍어 먹는 츠유의 맛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간장과 미림을 숙성시킨 국물에 가다랭이 포와 고등어 포를 넣어 하루 종일 달이는 이런 새로운 츠유 제조법이 에도시대 소바의 열풍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침내 소바의 인기는 과열현상으로 번지게 됩니다. 사무라이들이 비싼 소바 집에 출입하는가 하면 절에서도 스님들이 소바를 만들어 팔고 먹기에 정신이 팔리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도쿄의 한 사찰. 정문 앞에는 비석 하나 서 있습니다. 소바불허석비. 경내에 소바를 만들거나 먹는 것을 금한다는 비문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패스트푸드로 인기를 얻은 국수가 도를 닦는 승려들의 정신까지 흔들어 놓은 것이죠. 소바의 대한 열광은 지금도 식지 않았습니다. 혼슈모리오카 시에서 열리는 완꼬소바 먹기 대회. 완꼬라는 작은 그릇에 담긴 소바를 누가 더 많이 먹느냐를 겨루는 시합입니다. 원래 관동지방에선 연회에 마지막에 소바를 대접했는데 한꺼번에 많은 양을 만들 수가 없어 완꼬라는 작은 그릇에 담아 대접했던 것이 유래가 됐다고 합니다. 근대화와 함께 시작된 국수문화는 이렇게 현대에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의 우승자는 45세의 여성. 그녀는 15분 만에 383그릇의 소바를 해치웠습니다.

 

나폴리의 한 소극장. 전통극 공연이 한참입니다. 극의 주인공은 풀치넬라. 나폴리의 가난한 서민을 상징하는 어릿광대입니다. 17C때부터 시작된 광대극의 주인공에게는 죽고 못 살게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파스타입니다. 극중 풀치넬라는 마케로니라고 불리는 파스타 한 그릇을 먹기 위해 온갖 수모를 감수합니다. 17C 유럽에서 파스타는 더 이상 귀족의 고급요리가 아닌 풀치넬라가 같은 서민들의 음식이 된 것이죠.

 

카르미네 코폴라 풀치넬라 배우

“나폴리 사람들은 마케로니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주식이었던 셈입니다. 당시 마케로니 한 접시를 사먹기 위해서 셔츠 7장을 땀으로 적실만큼 일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파스타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그만큼 열심히 노동을 해야 했던 거죠.”

 

 

17C가 되면서 나폴리의 서민들은 거리의 솥을 걸고 국수를 삶았습니다. 그 위에 파마산 치즈를 뿌려 손으로 집어 먹었죠. 그런데 어떻게 귀족의 음식이 거리의 음식으로 바뀐 걸까요. 그 수수께끼의 답은 시칠리아 섬 산중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유난히 계곡이 많은 이탈리아 남부 곳곳에 있는 수차 제분소 중에 하나입니다. 철제 실린더를 사용한 신형 수차 제분기. 그 생산성은 과거 노새나 말이 끌던 제분기보다 무려 50배 이상 올라갔습니다.

 

쥬세페 뽈레나 수차방앗간 주인

“이 수차는 1946년까지 가동했습니다. 4명의 물레방아지기가 연중 6~8개월 동안 밤낮으로 돌아가면서 일했지요. 토르토강에서 유일한 물레방아였기 때문에 5만 명의 주민들이 이 수차에 의존했습니다. 이 지역의 생명과 노동의 원천이었고 르토평지 사람들을 먹여 살렸죠.”

 

10초에 80리터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1분의 60번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게 됐죠. 새로운 제분 기술의 발달로 밀가루의 가격은 점점 내려가 지난 세기보다 절반 이하로 떨어집니다. 양도 양이지만 이런 신형 제분기는 구형에 비해 밀을 2배 이상 곱게 빻아낼 수 있었습니다. 17C 제분 기술의 발달은 다단계식 제분 방식의 도입으로 이어집니다. 현대의 제분 공장은 모두 다단계식 제분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밀알을 부수고 밀기울을 거르고 가루를 내는 세단계의 공정을 거치며 부드러운 밀가루가 생산됩니다. 실로 제분 기술의 혁신은 음식의 문화를 바꿔놓았습니다.

 

 

“제분이 가능해지면서 밀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밀은 그대로 섭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매우 딱딱하고 껍질도 벗기기가 어렵죠. 쌀도 딱딱하긴 하지만 껍질 벗기는 것이 쉬운 편입니다. 그대로 찌거나 끓여서 먹기도 편하죠. 하지만 밀은 그냥 먹을 수 없죠. 처음에는 갈돌로 곡식을 가는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그리고 맷돌이 발명되죠. 맷돌에 가축을 활용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수차제분이 발명됩니다. 이렇게 제분 기술이 발전하면서 밀가루 음식이 발달합니다. 빵, 과자는 물론이고 국수와 같은 음식들 말이죠.”

 

 

19C초 이탈리아 남부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파스타 생산이 시작됩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나폴리 인근에만 2백가 넘는 공장에서 건조 파스타를 생산했습니다. 대량생산으로 파스타의 가격은 급속도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제 가난한 나폴리의 서민들에게 파스타는 쉽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패스트푸드가 됐습니다. 포크 대신 찬물에 손을 담갔다 뜨거운 국수를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거리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맛시모 몬타나리 볼로냐 대학교

“18~19세기의 이탈리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육류의 생산량도 아주 적어 가난한 사람들은 고기를 먹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의 경우 육류가 풍부했기 때문에 파스타와 같은 한 가지 음식만 먹을 필요가 없었죠. 파스타와 같은 단일한 식품에만 의존했던 이유는 가난과 굶주림 때문이었습니다.”

 

“아! 아름다운 것을 전 지금 꿈꿔요. 소시지 85개와 고기완자 40개 그리고 마케로니 한 가득을 꿈꿨어요. 마케로니, 마케로니, 마케로니! 하지만 난 잠에서 깨어났어요. 꿈에서 깨나 마케로니를 먹을 수 없게 됐어요. 그래서 전 울었어요, 아주 어린 아이처럼…….”

 

매일 천만 명의 인파가 오가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일본의 지하철. 시계 초침 위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21C 현대인은 8백 년 전 중세시대 사람들이 평생 여행한 것보다 더 먼 거리를 매주 이동합니다. 현대인은 4백 년 전 평생 생산한 것보다 많은 물건을 매년 생산합니다. 더 빨리 생산하고 더 빨리 소비하는 문명. 21C는 빠른 자가 살아남은 스피드의 시대입니다.

 

“스피드의 시대. 보다 빨리 차를 생산하고 고층건물도 올리면서 마감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습니다. 스피드의 시대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우리의 먹거리도 바구었습니다.”

 

 

하루 21만 여명이 이동하는 도쿄의 어느 한 역. 역 한 구석에는 아침에 제일 붐비는 간이식당이 있습니다. 서서 먹는 누들바입니다. 시간에 쫓겨 아침을 거르고 온 직장인들이 이곳에서 한 끼를 해결합니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메뉴는 400엔짜리 덴뿌라 소바입니다. 에도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미리 삶아둔 국수를 뜨거운 물에 데치고 그 위에 고명과 국물을 얹어주는데 걸리는 시간은 2분 남짓. 먹는 시간까지 다 합해봐야 모두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러시아워에 두 시간을 지켜본 결과 이 누들바에는 여자 손님이 단 한명도 없습니다. 여전히 남자들의 도시에 사는 이들 모두가 오늘 날의 조닌인이 아닐까요.

 

 

오사카 돔에서는 한 기업가의 49제 행사가 열렸습니다. 행사를 주관한 사람은 나카성의 전수상이었습니다. 향년 96세. 심장마비로 타계한 한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의 최고 권력자와 재력가가 그의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그의 이름은 안도 모모후쿠(1910~2007).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든 발명가였습니다. 그가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한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48이었습니다. 오사카에서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후 무일푼이 된 그는 집 창고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게 됩니다. 2차대전 패전 직후 사람들이 라면 노점 앞에 길게 줄 지어 서있는 것을 보고 간편한 라면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획기적인 기술을 발명하게 한 단서는 튀김요리였습니다. 국수를 튀길 때에는 국수 안에는 많은 구멍이 생기는데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구멍 속으로 물이 들어가 빨리 익게 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끓은 물에 2분이라는 캐치 프레이드를 걸고 발매한 치킨라면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습니다. 인스턴트라면은 1950년대 말 막 생겨난 슈퍼마켓 보다 빠르고 간편한 상품을 찾는 시대적 흐름과 맞아 떨어져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오사카에 자리한 라면 박물관. 연간 40만 명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습니다. 방문객들은 개발 당시 그대로의 공정에 따라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만들어 볼 수 있습니다. 한 식품회사를 연매출 27억 달러의 거대 기업으로 만들어 놓은 인스턴트 라면의 개발. 그것은 인류 식문화를 뒤흔든 일대혁신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50억 세계인은 연간 100억 개의 육박하는 인스턴트 라면을 먹습니다. 가공식품 중에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식품이고 보면 라면이 20C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이 과장인 것은 아닙니다. 인스턴트 라면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안에는 2500년 국수의 역사에서 인류가 고안해 내고 발견한 면제조 공정(배합→압연→제면→증숙→냉각→건조)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습니다. 간편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춰 개발된 라면은 수천 년 국수 역사에 압축파일인 셈입니다.

 

 

“일년 간 전세계에서 소비된 라면을 모아 에펠탑을 지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총 327개의 에펠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런던 시내의 어느 한 체인 레스토랑. 점심시간에 빈자리가 없습니다. 런던 사람들은 이런 식당을 흔히 누들빠라고 부릅니다. 이 식당의 주(Main)메뉴는 퓨전스타일의 아시아 국수입니다. 영국 내 체인이 65개. 해외 13개국 진출. 매주 팔리는 국수의 양 12톤. 이 체인 레스토랑은 창업 15년 만에 영국 식품업체 4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성공비결은 단10분 안에 나오는 저렴한 일품요리라는 컨셉입니다. 고열량의 서양 패스트푸드에 지친 이들은 건강한 패스트푸드로 아시아의 국수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앉아서 먹을 시간이 없을 때 빠르게 포장해 갈 수 있습니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먹을 수 있으니까 좋아요.”

“빨리 요리되는 점도 있고요. 여러 가지 고명과 다양한 소스, 채소를 얹어 함께 먹을 수 있는 점이 매력입니다. 국수는 훌륭한 음식이자 주식이 된다고 생각해요.”

 

일주일에 야끼소바만 1만 3천 그릇을 판다고 하니 기업의 입장에서도 국수는 꽤 수지가 좋은 외식사업 아이템입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곳의 주방. 자세히 보면 동양인 요리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국수는 조리과정의 표준화가 용이해서 숙련된 주방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국수의 장점은 다채로운 메뉴로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국물과 들어가는 몇 가지 고명에 따라 다종다양한 국수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죠. 이곳에서 판매되는 국수만 19가지. 종류가 많긴 하지만 요리사들은 재료만 바꿔서 매 시즌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성이 국수의 가장 큰 가능성입니다.

 

 

알랜 야우 와가마마 창업자

“국수는 다양한 결합이 가능한 음식입니다. 국물, 면, 고명 등 2~3가지 요소만 달리하면 말이죠. 그런 이유로 대량생산 하면서도 품질관리가 용이합니다.”

 

정읍 방사선과학연구소. 이곳에선 우주선에 실릴 우주식품을 위한 방사선 조사준비가 한창입니다. 우주 공간에서 우주인이 먹는 모든 식품은 완전멸균을 위해 방사선 처리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오늘 방사선 조상 대상 식품은 인스턴트라면. 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한국에서 자체 개발한 스페이스 라면입니다.

 

이주훈 박사 식품생명공학연구팀

“우리가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주공간에서는 향이라든가 맛의 강도가 지상보다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맛이나 향의 강도를 높여질 필요가 있고요. 그러다보니까 우리나라의 라면이 갖고 있는 매콤한 맛이라든가 독특한 냄새들을 더 많이 줄 수 있도록 개발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우주공간에서는 끓은 물을 공급받을 수 없기 때문에 70도씨 정도에서도 우리가 쉽게 야기하면 컵라면 같은 것이 제대로 만들어지고 또 먹을 수 있게 그런 조건을 갖는 것이 큰 특징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코리안 스페이스 라면은 이제 4개월 후 먼 길을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터키 남동쪽으로 흐르는 티그리스 강. 6천 년 전 이 강을 젖줄로 메소포타 문명이 태어났습니다. 바로 이곳(카이오뉴 유적지)에서 인류사를 뒤바꾸어 놓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농경의 시작이었습니다. 9천 년 전 인류가 여기서 최초로 경작한 작물은 밀이었습니다. 밀을 처음 손에 쥔 그들은 그것을 신의 선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로부터 6500년 후 신의 선물은 인간의 손에서 국수라는 기묘한 모양의 음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손에서 손으로 이어져 퍼져 나간 국수는 도시의 풍경을 바꾸고 인류의 삶의 방식까지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스타라는 이름으로 저 멀리 유럽의 식탁을 흔들게 됩니다. 장대한 시간이었고 먼 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천년의 마라톤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국제우주정거장 ISS. 세계 14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우주연구소입니다. 탑승자 중에는 한국 최초인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한국에서 개발한 10가지의 우주식품을 가져갔습니다. 밥, 국, 홍삼차, 김치 그리고 국수였습니다. 어느 선사가 말했습니다. 티끌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고. 선사는 한 그릇의 국수를 놓고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한 그릇의 국수 속에서 삼라만상을 보았노라고…….

 

 

 

 

이 메기 화분이 6000만원에 거래가 되었다고 하네요 매우 유명한 화분이라서

카피분이 많이 나왔다는데요 몇십년 전의 카피분조차 몇십만원 이상을 홋가한다고 합니다~

 

 

일본 평안 동복사 화분

 

 △  천광 블랑베진사 복주머니분  :  청,홍,백으로 이루어진 유약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요

 

 

  △ 천광 복주머니분 :  연두빛 유약과 붉은 진사가 자연스럽네요 붉은색은 청색과

잘 어울리는데 이렇게 연두빛과도 잘 어울리는 것은 왜일까요?

 

 △   천광 당초문 삼족 향로 이중투각분 

 

 

 

 

장소 : 동복사 (東福寺) 
날짜 : 7월 9일 일요일
비용 : 방장코스 400円, 다리코스 400円
위치 : 교토역에서 남쪽.. 걸어서 한 30분쯤 걸릴듯..
정보 : 정원이 유명하고 가을엔 단풍이 예쁘다함...

 

원래는 계획에 없던 곳인데 동사(東寺)랑 가깝고해서 찾은 곳..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서 내려도 걸어서 15분은 걸린듯..찾기 좀 애매했음...

 

 

 

 

입구가 인상적인...

 

 

 

 

방장(方丈)입구 모습.. 방장하고 다리구경 코스가 있는데 둘다 각각 400円씩

 

 

 

 

용안사(龍安寺)랑 비슷한 분위기의 정원.. 일본정원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3요소. 이끼.자갈.바위

 

 

 

 

마루에 앉아 쉬면서 느긋하게 관람...

 

 

 

 

역시 반대편엔 다른 분위기의 정원이..역시 용안사랑 비슷하다.

 

 
 
 
동복사의 심볼.. 뭐시기 다리..-_-; 가을에 단풍들면 무척 예쁘다고 함..(다리는 구경안했음.;;)
 

 

그럭저럭 볼만한 곳인데..

찾아가기고 좀 힘들다...-_-; 멀기도 멀고..

여기있는 사진만봐도 충분할듯...

 

 

 

 

 

 

 

 

 

 

 

 

 

 

 

   쉿, 바다 밑에 고려가 살아요

 

     김영숙 글 | 홍우리 그림
     역사 교양 | 초등 중학년 | 발행일 2010.7.15 
     183*243 | 무선 | 128쪽 | 값 8,900원
     ISBN  978-89-94258-05-8

 

 

 

물속 타임캡슐, 7백 년 전 보물선을 찾아라!
머구리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신안 앞바다 수중 발굴 체험동화

 

 

한국,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7백 년 해양 역사 이야기
《쉿, 바다 밑에 고려가 살아요》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발굴 현장인 ‘신안해저유물’ 발굴을 소재로 수중 고고학은 물론, 중세 동아시아의 무역 활동과 사회, 경제, 공예 미술, 배의 역사 등을 보여주는 역사 교양동화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지구는 70퍼센트가 물로 덮여 있지요. 길 위에 자동차가 다니듯,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다니듯, 전 세계 바다에는 끊임없이 배가 드나듭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대륙이 지구촌이라 불리게 된 것도 물길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물은 인류의 삶 속에 땅 못지않게 중요한 자원이자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땅속에 인류의 삶과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땅속 역사 이야기가 되었듯이, 물속에도 인류가 만들어 놓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지요.

‘신안 유적’은 우리나라 수중 고고학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발굴 경위와 출토 유물, 그것이 담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 수중 고고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좋은 소재입니다. 땅속 역사 이야기 《쉿, 우리 집 밑에 백제가 살아요》에 이어 ‘물속 역사 이야기’로 범위를 넓힘과 동시에 ‘신안해저유물’이 갖는 특성으로 우리 역사에서 이웃 나라 역사와 문화까지 넓혀 전개되지요. 또한 보물선이라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소재를 사용하여 수중 고고학의 세계를 재미있게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실크로드, 바닷길 등을 이용했던 이웃 나라와의 무역과 그와 관련된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러한 학습 과정은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중요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도 역사 속에 길이 남게 됨을 앎으로써, 돌 하나 나무 하나까지도 아끼는 마음은 물론 과거에 대한 본질적인 호기심과 탐구심을 증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야호, 우리 앞바다에 보물선이 나타났다!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머구리(잠수부) 할아버지는 바닷속에서 이상한 항아리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고려청자라지 뭐예요. 그 뒤 시작된 바닷속 발굴, 땅은 파면 되는데, 바다는 어떻게 발굴하는지 머구리 할아버지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수중 발굴, 그러나 발굴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지요. 우리나라는 수중 발굴 경험이 전혀 없었고, 바닷속에서 작업을 하는 데는 한계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러나 머구리 할아버지를 비롯한 발굴 단원들은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져 보자는 끈기 하나로 발굴을 이어갑니다. 덕분에 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굴은 계속 이어지지요. 그리고 결국 거대한 보물선을 발굴해 냅니다.

바닷속에 숨어 있던 거대한 배 속에는 중국의 값비싼 도자기와 동전, 고려청자가 가득했어요. 발굴 단원들은 보물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결정적인 ‘꼬리표’를 발견하지요. 배에 실린 물건을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적혀 있는 목간이 그것이었어요. 이로 인해 중국 영파 항에서 출발해 일본의 동복사로 향하던 배가 고려에 들러 가는 길에 침몰했다는 700년 전의 동아시아 역사가 되살아납니다. 신안선이 묻힌 바다에 살아 있는 고려의 이야기도 함께 말입니다.

고고학 놀이터에서 역사의 현장 속으로 고고고~
《쉿, 바다 밑에 고려가 살아요》는 《쉿, 우리 집 밑에 백제가 살아요》에 이은 어린이 고고학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가 땅속 고고학이라면 두 번째는 ‘물속 고고학’인 셈이지요. 바닷가 잠수부 머구리 할아버지와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 발굴 단원의 경험을 통해 역사를 풀어내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다채로운 정보면을 이용해 수중 고고학이란 무엇인지, 수중 발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나라 수중 발굴의 역사와 신안해저유물 이외의 중요한 수중 고고학 성과, 수중 유물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 그 속에 담긴 과학적인 원리를 단계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이해를 돕는 데는 재미있는 일러스트와 사진 자료들도 크게 한몫하지요.

마지막에는 ‘나도 고고학자가 될래요’라는 부록을 마련했습니다. 앞의 내용에서 익힌 수중 발굴과 고고학, 그리고 고려와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가로세로 낱말 퀴즈를 풀면서 점검해봅니다. 그리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유물 복원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놀이 방법도 제시해 놓았지요.
쉽지만 깊이 있게, 흥미롭지만 진지하게, 우리 역사를 살리는 신나는 고고학의 세계! 이 책을 덮을 때쯤이면 우리 역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이미지

 


 

 

 

 

 

차  례

글쓴이의 말 

7백 년 전 물속 타임캡슐을 찾아 떠나는 아주 특별한 여행
머구리 할아버지의 항아리
고물일까, 보물일까?
도굴꾼이 나타났다!
바닷속을 발굴한다고?
물귀신, 머구리 발굴단
보물선을 찾아라!
바닷가 보존 처리장
결정적 꼬리표
동복사(도후쿠사)의 계책
고려에서 사라진 보물선
되살아난 보물선
머구리 할아버지 만세! 머구리 발굴단 만세!

부록 
나도 고고학자가 될래요
하나 저요, 저요, 신나는 가로세로 퀴즈
둘 고고학 놀이터 유물 복원 놀이


글쓴이 및 그린이

김영숙

대학에서 고고인류학을, 대학원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원과 서울대학교 치의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일했다. 어린이 책 쓰는 일이 좋아, 지금은 책을 기획하고 집필하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금까지 《앉아서 지구의 크기를 재다》 《세계를 놀라게 한 겨레과학》 《더 편한 세상을 꿈꾼 겨레과학》 《지식은 힘-우주》 《미래의 눈으로 다시 읽는 과학신문》 《쉿, 우리 집 밑에 백제가 살아요》 《한민족을 빛낸 우리 왕 20》 등의 여러 단행본과 《웅진 북클럽 리딩 매거진》 《아이북랜드 콜로키움 매거진》 《글뿌리 세계사 전집》 《글뿌리 사회탐구 전집》 《박물관 놀이터 국립중앙박물관 활동매거진》 등을 기획?집필했고, 그중 《세계를 놀라게 한 겨레과학》은 2007년 과학기술부-과학문화재단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

홍우리 그림
이 책에 그림을 그리신 홍우리 선생님은 세종대학교 조형학부 회화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의 오방색을 기본으로 직접 물들인 한지를 콜라주하여 어린이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린 책으로는 《그림 그리는 새》 《피노키오》 《이랬다저랬다 할머니》 《누가 만두를 가져갔을까?》 《5000년 한국 여성 위인전》 《초등학교 선생님이 알려주는 교과서 속 화학》 《쉿, 우리 집 밑에 백제가 살아요》 등이 있다.
 

 

 

 

 

 

교토 문화 기행 5 - 동복사(東福寺, 도후쿠지) new

 

동복사는 1236년에 건립되었으며, 교토 히가시야마(東山)에 있다. 이름의 연원은 나라에 있는 두 고찰 동대사(도다이지)와 고복사(고후쿠지)에서 한자씩 따왔다. 교토의 가장 큰 5대 선종계열 사찰 중 하나이며, 가을이면 단풍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명소인 청수사(키요미즈테라)에 비교하여 규모는 훨씬 더 크다. 15세기에 불탔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삼문도 유명하며, 삼해탈문(三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선종계 사찰에는 삼문이 있으며, 각문은 탐(貪), 진(瞋), 치(癡)로부터 벗어나는 공문(空門), 무상문(無相門), 무원문(無願門)이라 불린다. 삼문의 2층에는 석가모니불이나 관음보살, 16나한상 등을 모시며, 법당으로 기능한다. 동복사의 삼문은 실제로 보면 거대한 2층 누각처럼 보인다. 선종계 삼문 중에서는 일본에서 두 번째 크기이다. 본당과 삼문의 크기는 교토의 동사(東寺, 토오지)에 비견할만하다.

  동복사는 예전에는 53개의 작은 부속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24개를 거느리고 있다. 13세기초의 불화들도 있지만, 2003년에 3일간 공개한 이후 일반에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단풍 구경으로 유명한 통천교(츠텐교)를 지나 보문원과 개산당(開山堂, 카이산도)으로 가려면 입장료를 내야한다. 본당과 삼문까지는 입장료가 없다. 개산당 천정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교토 내의 7개의 천정의 용그림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개산당 앞에는 일본식 모래정원이 만들어져 있다. 같은 방식의 방장 정원도 있다. 방장 정원은 소화 시대 - 즉, 근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불교의 '팔상(八相)'을 구현한다.

  교토에서 동복사를 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JR이나, 교토시영전철, 시내버스 등 접근이 쉽다. 한자를 기억해두고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교토역에서 JR을 이용하면 한 정거장이다. 참고로 (교토역 - 동복사 - 이나리 -(생략)- 우지 -(생략)- JR나라역)으로 이어지니 여행 계획 시 활용하면 좋다.

 (JR동복사역 나오면 작은 골목길과 마주친다. 오른쪽으로 가면 된다.)

 (중간에 다리 밑을 지나 잠시 가면 동복사쪽으로 가는 화살표가 보인다. 조금 더 가서 정문이 보이는 곳에서 올라가는 것이 무난하다.)

 

 

 (입구 아래쪽에 있는 와운교(臥雲橋)

 (와운교에서 본 통천교, 더 윗쪽에 언월교(偃月橋, 엔게츠교)도 있으나 보이지는 않는다. 모두 1603년에 건축된 목조 다리들이다.)

 

 

 

 (통천교)

 

 

 

 

 

 

 

 

 (개산당 천정화)

 

 

 (삼문)

 (삼문, 한글 설명도 있다.)

 

 

 

 

 

 

 

동복사-교토박물관-청수사-점심-니죠성-고려박물관-금각사(교토를 시계반대방향으로 한바퀴 도는

코스)-무지 땀을 흘렸다.

東福寺까지는 JR전철로 이동을 하였다. 전철역에서 내리니 동복사로 가는 안내판이 잘 표시가 되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았다 동복사로 가는 길엔 일본식 정원과 절에 딸린 요사채, 암자 등 계열사들이 많이 딸려  있었다. 절의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갔다. 절로 올라가면서 여러 암자들을 구경하였고, 어느 일본식 정원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대청마루가 시원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인상을 쓰고 있는 다르마도 걸려 있엇고 마당은 돌은 둥근 파문을 인공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게 물이 마른 연못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불교의 이상관을 마당에 표현하였다.

절은 1239년에 건립되었고, 절은 포스가 느껴지는 사천왕이나, 칼을 들고 있는 힌두교 신들이 부처님과 같이 있었다. 물론 불교도 힌두교에서 나왔지만……. 通天橋를 지나 개산당으로 가는 길은 저 다리의 끝에 하늘로 통하는 것만 같았다. 저 끝 어딘가 이상향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마당의 자갈들을 바둑판으로 배열한 것으로 보면 불국토에 대한 일본인의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동복사를 나와서, 버스 정류장을 확인한 후 교토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서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프랑스 양식과 신전양식이 썩여 있었다. 교토박물관은 상설전시장은 공사관계로 2013년까지 관람이 중지되었다. 실크로드 관만 구경하였다. 실크로드에서 발견된 불교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불경번역으로 유명한 구마라즙의 글이다 서하나 티벳, 唐의 불교문서 등이 있었다. 한문이나 문자해독은 안 되지만, 볼만하였다.

박물관에서 나온 후, 교토를 소개하는 책자의 모델로 나오는 淸水寺로 갔다. 대충 높은 곳에 5중탑이 보이니 청수사로 향하는 길 같았다. 그 탑은 쇼토쿠 태자와 관련이 되어 있었다  청수사로 가는 오르막 골목길은 에도 시대로 타임머신을 탄 느낌을 주었다. 찻집, 기념품가게, 식당, 소규모 절과 신사등이 절묘하게 어울어져 있다. 빨간색의 컬러풀한 청수사의 모습은 동복사나 동사의 흑백적 느낌과는 다른 세련미가 있었다. 청수사는 778년에 창건되었다 적백흑의 컬러풀한 조화는 청수사의 화려함을 더해 주었다 본당의 건물양식은 산비탈을 이용하여 세운 무대조라는 양식이다. 그래서 무대처럼 보인다. 지주신사는 시간관계상 스킵했지만 토속신앙과 어울어진 일본에서 불교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게 해준다. 오쿠노인으로 이동하면 본당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성했다는 니죠성으로 이동하였다. 니죠성인 도쿠가와 이에약스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지은 성으로 이중 해자로 이뤄진 웅대한 평지성이다. 성은 전체적으로 해자와 어울려 아름답고 웅장하게 설계되었다 방어적 기능보다는 전시적 기능이 강하다고 했다. 성안의 건물들은 남성미가 넘칠 정도로 웅장하였다 고찌성이나 마쓰야마성은 여성적이고 섬세한 느낌이 강했다. 재료도 고령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여기는 도쿠가와 막부의 집무실로 사용되었으며, 실제 1867년 도카가와 막부의 해체를 통해 천왕에게 권력을 이양했던 곳이기도 하다. 니노마루는 밟으면 소리가 울리는 특수 설계로 인해 닌자들이 칩입에 대비하였으며, 무장해제하는 곳까지 두어 막부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 권력자의 무한 스트레스가 느껴진다.

성 관람을 끝내고, 고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여기는 일본을 소개하는 가이드 북에 나오지 않는다. 고의로 삭제된것 같은 느낌이다. 10분마다 한 대씩 오는 9번 버스를 타고 거의 종점에 가까운 그 곳으로 향했다. . 가미가와 중학교 정류장에 내렸다. 근처이다. 박물관의 시작은 무인상으로 시작되었다. 작은 정원에는 어슬픈 5층 탑도 있었다. 박물관은 재일 사업가 정조문 선생(1918-1989)이 평생에 걸쳐 수집한 일본에 산재되거나 수탈된 한국문화재를 중심으로 1998 10 25일에 개관하였다. 선생은 식민지 시기인 1925년에 부모와 같이 도일하여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살아 생전 그토록 바라던 고국을 밟지 못했다. 그는 힘든 생활을 하면서, 일본에 산재해 있는 한국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그러면서 白磁를 만나면서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물론 그는 박물관을 개관한지 4개월 만에 작고했지만, 세계인들에게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시킴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출발을 하게 하는 숭고한 뜻은 계속되고 있다.

고려 미술관은 조선과 고려의 문화재를 위주로 전시되어 있으며, 좁은 공간에서 한국적 미를 최대한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박물관에 들어가니 관리인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 구석진 곳까지 와서 그런지……. 추사 김정희의 그림과 청자, 조선의 나전칠기 등이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서 나와 금일의 마지막 코스로 예상되는 金閣寺로 향하였다. 금각사 근처에서 버스를 내려서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기사가 목적지에서 택시를 세우더니 빨리 뛰어가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귀뜸하였다.(17시마감) 여기 입장권은 부적처럼 생겼다. 매표소를 지나서 길 따라 올라가면 금각사가 있는 교꼬지로 향한다 석양과 금각사의 금빛이 절묘하게 조화가 되었다. 절의 규모는 소규모이지만, 금빛이 정말 아름다웠다

무로막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쯔가 귀족의 산장을 빼앗아 세운 것이 금각사이다. 금각사는 지붕 있는 황금 봉황과 후기신라와는 다른 스타일을 자랑한다. 금각사는 정말 금빛이며 세계문화유산중의 하나이다. 금각사를 지난 산책로에는 부적가게, 다방, 부동명왕신을 모신 부동당, 동전이 수북이 쌓여 있는 작은 석불, 안민타구(安民澤)이란 연못이 있다 그 다음 일정은 료안지(龍安寺)였으나 입장 시간(17:00)이 종료가 되어 가지 못했다.  

.



 

 

 

신안선(安船)은 중세 중국과 일본 간의 무역선이다.

 

14세기의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중국은 원(元)왕조, 일본은 가마쿠라막부시대(鎌倉幕府)로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는 시대였다.

1323년 여름, 신안선(新安船)은 당시 중국의 무역항 경원(慶元, 현재의 저장선 영보(寧波:닝파)에서

수 만점의 무역품을 싣고 중국에서 일본을 향해 출항하였다.

최종목적지는 일본의 히카다(博多)와 교토(京都)에 있는 사찰 동복사(東福寺)였다.

서남계절풍을 이용해 고려해역을 지나는 국제 교역항로인 남로(南路)를 따라 항해하였다.

그러나, 약 700년후 신안선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전남 신안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신안선이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표류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분석결과, 신안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중국인 선원과 일본인 무역품 주인 또는 그 대리인 등으로 추정된다.

침몰선은 발견지역을 따라 신안선이라 부르고 있으며, 700년간의 역사적 비밀은 배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밝혀졌다.

신안선(新安船)은 길이 약 34.8m, 너비 약 11m, 깊이 약 3.75m, 선수높이 약 7m, 200t 규모의 무역선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2전시실에서...)

 

 

 

 

 

 

 

 

 

 

 

 


75년 신안해저 유물 발굴 ()

겨울 바람 스산한 81년 2월 말

전남대 캠퍼스 한쪽에 자리잡은 농대 임학과 박상진(당시 41세·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교수의 연구실...
일단의 검정 신사복 차림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었다.

5·18학살의 공포가 광주를 짓누르고 있을 당시 안기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영문을 몰랐던 박 교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발단은 박 교수가 한국임학회에 발표한 한편의 논문 때문이었다.
박 교수는 2월 초 신안 해저유물선의 선박 재질에 일본에서만 자생하는 일본 삼나무가 포함됐다는 발표를 했었다.
박 교수의 논문을 눈여겨본 경향신문 기자가 이를 `신안유물선은 일본 선박이었다''고 1면에 대서특필했다.
국내외 언론, 특히 일본언론은 이를 일제히 인용, 보도했다.

지방대학의 전임강사에 불과(?)했던 박 교수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그러나 대가도 혹독했다.
안기부 직원들은 박 교수의 방을 뒤져 실험 표본 등 자료를 모두 압수해갔다.
박 교수의 성향, 출신 등에 대한 상세한 신상명세서도 작성됐다.
그들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광주를 벗어나지 말라”고 엄포를 놨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취약한 정통성으로 인해 국제적 따돌림의 대상이었다.
광주학살과 김대중 사형선고에 따라 일본과의 외교관계도 최악이었다.

박 교수의 발표는 `신안유물선은 일본제작선''이라는 등식을 가능케한 것으로 정권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천년이라더니 당시의 불안과 공포를 잊을 수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얻은 전임자리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었다.
10여일이 지나 일종의 연금이 해제됐다고 연락을 받고서야 한숨을 쉴수 있었다.

왜 무엇때문에 학자의 조그만 연구결과가 안기부의 조사대상이 됐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압수해간 표본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명의 지방대 소장 교수의 이름을 중앙무대에 알리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박 교수의 전공인 목재조직학이 무엇인지, 임산공학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문화재관련 학자들과 공무원들에게 이 새로운 학문의 효용성을 알려주었다.
특히 목전에 다가온 신안유물선의 인양과 분석에는 박 교수와 같은 전공자가 필수적이었다.
박 교수는 81년 6월 신안해저유물선 발굴단에 포함됐다.
박 교수는 “40대 초반의 전임강사로는 파격적이었다.
모두 이름만 들어도 전국민이 아는 유명인사였는데 내가 포함될지는 몰랐다”고 술회했다.

박 교수는 이후 4년여동안 발굴위원으로 활동한다.
신안유물선에서 나온 선박 파편조각을 추출해 무슨 나무가 재료인가를 추적하는 것이 그의 임무. 그러나 분석결과는 당초 박 교수가 추정했던 것과 달랐다.
신안유물선은 일본 삼나무가 아닌 중국 남부 양자강 일대에서 자생하는 넓은 잎 삼나무(광엽삼)와 마미송이 주종인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관리국은 1981년 7월 목포시 용해동 바닷가에 보존처리장을 세우고 유물선을 인양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유물 발굴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인양 방식은 선체를 조각조각 해체해 인양하는 `해체인양식''으로 결정됐다.
선체 조각을 하나씩 맞춰나가는 `퍼즐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신안유물선 복원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초대 목포해양보존처리소장을 맡았던 최광남. 그는 복원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1990년 8월 44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최씨는 1981년 임시기구로 만들어졌던 목포보존처리장의 소장으로 부임한 이후 9년동안 신안유물선 복원에 매달렸다.
1974년부터 80년까지 일본 동경예술대학원에서 보존과학 석사학위를 마친 그는 국내에서 거의 유일한 그 분야 전공학자였다.
최소장은 선박 인양·복원 경험이 있는 중국 등 국내외를 돌며 자문을 구했다.

고향이 신안군 지도읍인 김원창(현재 46세·목포해양박물관 학예연구사)씨는 군대를 제대한 직후인 81년부터 유물선 인양과 복원에 참여했다.
“2개의 선수 부분과 중앙부, 선미 등 4개 부분으로 나눠 구역별로 그리드를 설정했다.
선체 인양은 잠수부 2명이 1개조를 이뤄 이뤄졌다.
해군의 창원함과 구미함이 번갈아 가며 작업했으며, 해군 잠수부 30여명이 상주했었다.

선박 조각 마다 일련번호를 붙여 선편끼리의 간격, 높이 등을 기록했고, 그것을 근거로 원형에 최대한 가까운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안유물선의 한쪽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추상해서 모형을 만들수 밖에 없었다.”
최 소장 등 복원작업에 참가했던 복원팀에는 하나의 꿈이 있었다고 한다.
똑 같은 모형의 신안유물선을 만들어 옛 항로를 밟아가자는 꿈이었다.

김원창씨는 “신안유물선의 출발지점으로 추정되는 영파항으로의 귀향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항해는 실험고고학적 의미도 클 뿐 더러 민간외교적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거기가서 수몰당한 신안선 선원들의 진혼제라도 지내면 얼마나 멋진 이벤트가 되겠는가”라고 이쉬움을 토로했다.

인양작업이 진행되던 1983년 1월 25일 신안유물선과 유물을 둘러싼 중요한 미스테리 하나가 풀린다.
1982년 6월 신안 바다에서 건진 목간(木簡·소나무로 만든 꼬리표)을 세척하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의 한 연구원이 목간에 새겨진 글씨를 찾아낸 것이다.
목간은 물건을 받을 사람의 이름과 보내는 사람의 수결(手決·일종의 사인)을 새겨 물건을 포장할 때 매달아 놓는 표식이다.

至治三年六月一日(지치3년6월1일)이라는 글과 東福寺(동복사)라는 글이었다.
지치는 원나라 제 5대 영종(英宗)의 연호이므로 지치 3년이면 서기 1323년이다.
동복사란 일본 절 `도후쿠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배에 실은 물건을 사기로 한 하주(荷主)로 추정된다.
신안유물선은 1323년 6월 수출품을 싣고 항해에 나섰다가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것이다.

목포보존처리장은 1990년 1월 국립문화재연구소 목포해양유물보존처리소로 확대 개편된다.
유물과 유물선 발굴작업은 이미 84년 10월 공식적으로 마감됐다.
94년 12월에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개관돼 일반인들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신안 유물의 상당수는 이미 서울로 옮겨져 지역민들이 직접 이를 감상하는 기회가 박탈됐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문광부는 유물발굴작업이 끝난 86년 10월 거의 한달동안 신안 앞바다 일대에 대한 유물확인작업을 재차 벌인다.
생업의 터전을 잃은 어민들의 어로제한을 해제하기 위해서다.

그해 10월 4일부터 소형 선박 6척을 빌려 일주일동안 신안 앞바다를 이잡듯 뒤져 흑유 등 3~4점이 나왔으나 별로 가치있는 것은 없었다.
10월 20일께 해군의 거북선 탐사선까지 동원돼 5일동안 신안부터 영광 낙월도까지 수중을일일이촬영하는수색작업을폈지만 그릇 조각하나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사적지 지정이 해제되고 어민들의 어로작업이 자유롭게됐다.
발굴작업을 처음부터 지켜본 신안군청 남상율 계장(당시 공보실 근무)의 말이다.


**유물선 복원 작업

신안유물선은 우현 쪽으로 15도 정도 누워 있는 상태로 바다속 개펄에 파묻혀 있었다.
노출된 좌현쪽은 거의 원래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660여년이란 긴 세월, 빠른 물살, 바다 해충으로 인해 손상도 심했다.

심한 부식으로 인해 물속에서 선체를 하나씩 해체한 후에 건져 올리는 `해체인양법''이 동원됐다.
스웨덴의 바사호(340년전의 배)나 영국의 메리로즈호(400년전의 배)는 통째로 끌어올렸지만 660여년이나 된 배는 너무 썩은데다 상태가 나빠 그럴수 없었다.
인양된 선편은 모두 720조각. 용골을 비롯한 497조각의 배 몸체와 223조각의 포판재가 건져졌다.

포판재는 외판 등을 바다 해충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덧씌운 나무판이다.
그 크기는 12.7m의 용골에서 1m 내외의 소형재까지 다양했다.
좌현의 모습은 잃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현은 14단 일부까지 남아 선체의 규모와 구조를 알려주었다.
신안유물선은 V자형의 첨저형 선박으로 배밑에는 대단히 튼튼하고 큰 사각단면의 용골이 놓여졌었다. 또 7개의 칸막이 벽이 시설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어느 한 곳에 물이 스며들어도 다른 쪽은 보호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서양인들이 이런 기술을 쓴 것은 신안유물선보다 500년이 뒤진 19세기의 일이다.
널빤지를 이을 때 이음부분을 그냥 맞대지 않고 같이 이어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배의 재원은 최대길이는 34m, 최대너비 11m, 적재중량 약 200t에 쌍돛대를 단 그때로서는 아주 큰 배였다.
1986년 8월 30일 5분의 1 축소 모형배가 만들어졌다.

신안선 복원팀은 탈염처리, 모형제작, 실측기록등을 마치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잔존구조를 확인하고 복원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만든 축소 모형제작에만 4년이 걸린 셈이다.
복원팀은 축소모형배를 근거로 실제 신안유물선 복원에 나섰다.
복원된 신안유물선은 현재 목포해양박물관에 전시돼있다.

신안유물선에는 저울추가 여러개 발견됐는데 절강성 영파인 `慶元路''(경원로)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배의 출항지를 밝히는 결정적 자료가 됐다.
경원항은 일본과의 교역으로 유명했었다.
신안유물선은 절강성 영파를 출항하여 중일간 최단 무역항로인 남로를 따라 일본 후쿠오카로 향하던중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일보 오주승기자

입력 = 2004. 4. 14          

76년 신안해저 유물 발굴(하) 기사보기 클릭

 

 


76년 신안해저 유물 발굴 ()

신안군 증도면(당시에는 지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


목포항에서 서북방 50km 지점. 서쪽으로는 망망대해 황해가 펼쳐져있고 북쪽으로는 임자도가 있는 곳.
인근 어민들의 연안어장이지만 간만의 차와 한류의 이동이 심하기로도 유명하다.

1975년 5월 방축리에 사는 어부 최형근(당시 48세)의 그물에 항아리 몇점이 걸려들었다. 뻘흙과 굴껍데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 볼품없었다.
집에 가져가 잘 씻어놓고 보니 청자와 백자였다.

최형근의 동생 최태호(당시 41세)가 고향집을 찾은 것은 76년 1월. 최평호는 당시 무안 망운초등학교 교사였다.
최평호는 예사롭지 않은 이들 도자기를 들고 목포시청을 찾았다.
고려시대 도자기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서다.
문화재 담당 공무원은 냉담했다.
“바다에서 무슨 고려 청자가 나오냐”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속임수로 보상금을 타려한다”며 꾸짖기까지 했다.

최태호는 발길을 돌려 신안군청을 찾았다.
감정결과 형이 건진 항아리중 하나가 청자대형화병으로 판명됐다.
최씨 형제는 보상금으로 100만원을 받았다.

세금을 제외하고 그들이 손에 쥔것은 40만원.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다.
그렇다면 최형근의 그물에 걸린 것이 최초의 도자기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도덕도 앞바다에서 예로부터 이런 도자기가 심심찮게 어부들의 그물에 걸렸었다.

그러나 어부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물건이었다.
어부들은 대부분 `재수없는 그릇쪼가리''라며 깨서 바다에 버렸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옛날 고려장을 지낼 때 사람을 수장하면서 사용했던 그릇들이다''라는 속설이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산사람을 수장(水葬)하면서 사용한 물건에는 죽은 자의 원귀가 끼어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부는 집에 가지고 가 개밥그릇 등 하찮게 사용하기도 했다.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의 학예연구사로 8년동안의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이명희(현재 60세)씨는 “주민들이 갖고있는 도자기가 상당수 있다는 얘기가 떠돌아 일주일동안 이 일대 섬을 돌면서 자진신고를 받았었다.
이 기간동안만 모두 수백점의 도자기를 회수했었다. 이런 점을 본다면 이미 상당량의 유물이 어민들에 의해 건져진 것을 추정할 수있다”고 말했다.

최씨 형제의 횡재는 소문을 탔다.
돈이있는 곳에 범죄가 있듯이 어김없이 전문도굴꾼이 등장했다.
방축리 주민 조모(당시 50세)씨 등 일당은 `정우호''란 3t급 똑딱선을 12만원을 주고 빌렸다.
잠수부로는 정모(당시 33세)씨가 가담했다.
특별히 밤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백주대낮에 이뤄진 도굴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들은 76년 9월 1일 낮부터 3일까지 1단계작업에서 백색사발 7점, 청색사발 3점, 접시 12개 등을 건져냈다.
이후 그달 21일까지 4차례에 걸친 작업끝에 꽃병항아리 향초접시 등 유물 117점을 인양했다.

문제는 판로. 이들은 이들 유물들을 한점에 200만-300만원씩 받고 목포와 전주 등지에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목포시내 유명기업의 임원도 이들에게서 청자를 사 곤욕을 치렀다.
신안유물을 둘러싼 수십건의 도굴사건의 신호탄이었다.
이들은 경찰에서 “신고를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고하면 보상금 액수가 너무 적은데다 엄청난 세금이 두려워 밀매했다”고 말했다.

신안 유물의 바다 속 최초 목격자인 잠수부 정씨는 “수심 23m 이상의 바다 밑은 갯벌이고 갯벌 속에서 어렵지않게 117점을 건져냈다.
나무토막도 몇개 발견했다”고 목격담을 털어놓았다.
도굴범들이 건저낸 유물을 감정한 맹인재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중국 송·원대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이 지점은 서해를 통해 우리나라 인천이나 군산 등지로 교류 하던 상선이 항해하는 통로의 기점이었다는 점에서 송·원대의 상선이 침몰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안유물이 전국적 유명세를 탄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들의 범행 때문이었다.

이들은 10월 경찰에 덜미를 잡힌다.
어부 조씨와 잠수부 정씨 등 11명이 수사망에 걸린 것이다.
바다에서의 도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신안 유물은 비로소 세간의 관심권으로 떠오른다.
문화재관리국의 발굴조사단이 꾸려진 것도 이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됐다.

발굴단은 76년 10월 26일 목포에 도착한 뒤 다음날 행정선인 `신안호''를 타고 증도면에 도착했다.
1차조사는 이날부터 11월 2일까지, 2차조사는 11월 9일부터 12월 1일까지 진행됐다. 두차례의 발굴을 통해 해저유물의 존재가 명확하게 확인됐다. 그와 동시에 1천 800점의 도자기와 6천점이 넘는 동전이 쏟아져 나왔다.

1·2차 조사의 발굴단은 조명기 서울대교수를 단장으로 한 발굴조사위원 6명, 실무위원 8명, 해저조사위원 10명, 행정요원 3명 등 30여명으로 구성됐다.
김원용 서울대교수,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정기 문화재연구소장, 맹인재 민속박물관장 등 우리나라 학계의 권위자들이 총망라됐다.
국방부에서는 해군 51전대(전대장 최인상 대령) 소속 심해잠수사들을 파견했다.

문화재연구소 민속예능실장으로 1차 조사때부터 참여했던 이호관(전 전주박물관장)씨는 “첫 발굴 때 당시로서는 최신장비를 갖춘 해군 심해잠수사들도 유물 위치를 제대로 못찾았다.
고심 끝에 결국 도굴을 한 경험이 있는 잠수사와 도굴꾼들을 현장에 데려와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고 회고했다.
도굴사건으로 구속된 잠수사 정모씨와 도굴 주범 조모씨가 발굴단의 해저조사요원에 포함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바다속을 알 길없는 발굴단으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들외에 바다길을 잘아는 방축리 주민 3명도 발굴단에 포함됐다.
발굴단은 처음부터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혔다.
이명희씨는 “발굴을 하기에 부적당한 요소가 너무 많았다.
닷줄소리가 휘파람소리 처럼 들릴 정도로 바람이 셌다.
유속은 마치 총알처럼 빨랐다. 물이 차가운데다 물속은 한치 앞도 안보이는 흙탕물이었다.

해군잠수사들은 물속이 온통 뻘밭이어서 발이 잠기고 순식간에 물결에 휩쓸려가 위험한 고비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잠수사들이 바다 밑바닥을 손으로 더듬거려 겨우 찾은 유물이 한점한점 올라올때 마다 환호성이 터졌다”고 말했다.
자연의 악조건은 그뿐이 아니었다.
수심은 23m가 넘었다.

겨울철에는 작업을 할 수 없어 5월에서 10월까지 고작 다섯달 정도만 자맥질이 가능했다.
그나마 밀물과 썰물 시간을 헤아려 하루 한두 번, 한 번에 한두 시간밖에는 작업을 할수 밖에 없었다.
76년 7월에 시작된 3차 발굴부터는 정식으로 발족된 발굴조사단에 의해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당시 발굴 현장에는 30여명의 문화재관리국 직원들과 심해잠수사 60여명 등으로 북적댔다.
증도면에 있는 중앙여인숙은 발굴단의 숙소 겸 사무실이었다.
발굴단은 인근 농협창고를 빌려 유물을 보관했다.
신안해저유물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도굴조직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발굴과 도굴간의 지리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청·백자·한약재까지 653년만에 인양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76년 10월 1차 발굴을 시작으로 84년 8월 10차 발굴을 끝으로 만 9년동안 진행됐다.
신안 앞바다는 끝없이 보물을 토해내는 요술 항아리 같았다.
9차례에 걸친 발굴에서 인양된 도자기의 총수는 2만661점. 이중 청자가 1만 2천 359점으로 가장 많았고, 청백자·백자가 5천 303점에 이르렀다.

도자기 다음으로는 금속제품(729점)으로 은제품과 청동제품이 포함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주전자·거울·바라·은접시와 은병에 벼루·맷돌·숫돌 같은 돌로 만든 물건, 한약재 등도 나왔다.
각종 동전은 총 무게만 28t 18㎏에 이르렀다.
화류장을 만드는 자단목(紫檀木)도 8t이나 나왔다
단독유적에서의 일괄유물로는 세계 고고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량 인양이었다.
특히 도자기는 청자와 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와 온갖 기형들이 포함되어 있어 중국 도자기의 일대전시장을 방불케했다.
침몰연대는 `지치3년 운운''(至治參年 云云)이라고 쓰인 목패가 발견되면서 해결됐다. 지치3년은 서기 1323년이다.

76년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을 감안하면 653년만에 햇빛을 본 셈이다.
유물발굴이 대충 마무리되면서 관심의 촛점은 무역선 인양에 맞춰졌다.
82년 6월 시작된 8차발굴은 선체인양을 위한 작업으로 전환됐다.
선체는 조각조각 절단돼 해체 인양됐으며 83년 10월 21일 최후의 용골재가 인양되면서 끝났다.

광주일보 오주승기자

var flashVersion = parent.swfobject.getFlashPlayerVersion(); if(typeof flashVersion != "undefined" && typeof flashVersion.major != "undefined" && flashVersion.major >= 10 && typeof ExifViewer != "undefined"){ var getTxImages = function () { var result, txImages, images, i, len, img; result = []; images = []; txImages = document.body.getElementsByTagName("img"); len = txImages.length; for (i = 0; i < len; i += 1) { img = txImages[i]; if (/tx\-daum\-image|txc\-image/.test(img.className)) { images.push(img); } } return result; }; var txImages = getTxImages(); ExifViewer.load({ serviceName: "blog", images: txImages, showAllItem: false, imageViewer: { templateVal‎ue: { blogid: encodeURIComponent(BLOGID), articleurl: encodeURIComponent("http://blog.daum.net/jeungdo730/5") }, photoList: { photoListProtocol: "blogphotolistselect", photoListDataFromUrl: "http://blog.daum.net/_blog/api/PhotoListSelectImageViewer.do?blogid={blogid}&articleurl={articleurl}&imageurl={imageurl}" }, groupList: { groupListProtocol: "blogcatelist", groupListDataFromUrl: "http://blog.daum.net/_blog/api/CategoryList.do?blogid={blogid}" }, data: { count: txImages.length, getViewingUrl: function (index) { return txImages[index].src; } } } }); }

 

 

 

 

 

 

 

 

 

신안군 해저침몰선과 닝보 한국교류

2006/09/04 16:02

복사 http://blog.naver.com/yuehu/40028310897








■ 신안선은 중세 중국과 일본 간의 무역선이다.
  14세기는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중국은 원(元)왕조, 일본은 가마쿠라막부시대로서,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는 시대였다.

  1323년 여름, 신안선은 당시 중국의 무역항 경원(慶元 ; 현재의 닝보)에서 수만점의 무역품을 싣고 일본을 향해 출항하였다. 최종목적지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사찰 동복사(東福寺)였다. 서남계절풍을 이용해 고려해역을 지나는 국제 교역항로인 남로(南路)를 따라 항해하였다.

  그러나, 약 700년후 신안선은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 전남 신안 해저에서 발견되었다. 아마도 신안선이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표류하다가 침몰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 분석결과, 신안선에 승선한 사람들은 중국인 선원과 일본인 무역품 주인 또는 그 대리인 등으로 추정된다.
침몰선은 발견지역을 따라 신안선이라 부르고 있으며, 700년간의 역사적 비밀은 배와 함께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밝혀졌다.


■ 항해시기와 국적을 알려주는 유물들

△ 중국 동전 : 至大通寶(1310년) △ 중국 연호가 기록된 화물표(木牌) : 至治三(參)年(1323년)


■ 항로를 알려주는 유물들

△ 출항지 :
중국 무역항 경원(慶元)이 쓰여진‘청동 저울추’
△ 목적지 :
일본 교토 동복사(東福寺)가 쓰여진 목패(木牌; 화물표)

 

최부와 닝보 한국교류

2006/09/04 17:01

복사 http://blog.naver.com/yuehu/40028313345

전 고려대 김준엽 총장이 말하는 최부
최철호/교양사회  2004-09-20 14:20:11, 조회 : 225, 추천 : 28

-닝보에 그밖에 다른 유적들은 없습니까.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고 불교방면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유적들이 널려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2001년 봄에 닝보대학 총장 일행이 내한하였기에 제가 동국대학과 자매관계를 맺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리고는 두 대학 총장에게 첫 번째 사업으로 의통(義通)대사가 세운 보운사(寶雲寺)에 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제의했어요. 아마 두 대학의 노력으로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닝보 남쪽의 린하이(臨海)라는 곳은 1488년 최부(崔溥)가 표류하여 처음 도착한 곳으로 여기에도 기념비가 건립됐습니다.”

-최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최부(1454~1504)는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되는 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중요한 인물입니다. 원래 과거합격 후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추세경차관으로 제주도에 파견된 사람이었어요. 옛날에 죄를 진 사람들이 제주도로 많이 도망가 정부에서 죄인을 체포해오곤 했는데, 그 책임자로 제주도에 간 것이지요. 그런데 제주도에 가자마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가 1488년(성종19년) 1월3일로 난파된 배에 탄 일행 43인과 함께 표류하다가 1월17일 저장성 해안(臺州府 臨海縣)에 도착했어요. 처음엔 왜구로 오인받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만, 필담을 통해 왜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부터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게 됐습니다. 135일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닝보 항저우 양저우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베이징(北京)까지 간 뒤 귀국했는데 이때 거쳐간 거리가 무려 8000여리에 달합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 표해록입니다. 당시 중국의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런 중요한 기록이 그 동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메모를 아주 상세하게 해 명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최부가 직접 경험한 해안의 경비상황, 즉 해방(海防)이라든가 지방의 군사제도, 특히 지명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운하의 상황이라든가 수차(水車)도 자세히 기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차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부입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79년에야 비로소 최부의 17대손인 최기홍(崔基泓)씨에 의해 표해록 한글번역본이 나왔어요. 일본에서는 이미 1769년에 일어 초역본이 나왔고 이를 근거로 한 영역본도 1965년에 존 메스킬이라는 사람에 의해 나왔으니까 매우 늦은 셈이지요.”

이 글이 나온 곳: 신동아 2004년 1월호의 [황의봉의 종횡무진 中國탐험 ① ]의 “한국 최고 중국통 김준엽과 함께 떠나는 韓中交流史 여행” 

[출처] 최부와 닝보|작성자 해풍

제주(濟州)와 닝보(寧波) 한국교류

2006/09/05 14:16

복사 http://blog.naver.com/yuehu/40028346749

제주(濟州)와 닝보(寧波)
2006년 09월 05일 (화) 제주일보
선사시대의 민족이동과 문화전파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무궁무진하다.

그래서인지 어떤 민족이건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땅에서 생겨난 유일한 시조로부터 한 핏줄을 이어받은 단일 민족이라 믿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처럼 민족 구성이 단순한 경우 그런 감정은 더 강하다.

70년대 중반, 서울 고려대에서 열렸던 문화인류학회 심포지엄에서는 “한국문화는 북방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남방문화적인 색채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 때 일부 학자들은 “그렇다면 우리민족이 남방 미개인의 후손이냐”며 몹시 분개했다.

그들이 이처럼 남방문화권에 저항을 느꼈던 까닭은 단순하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남방 아시아족은 북방에 비해 미개한 야만이라는 선입관 탓이다.

특히 남방문화적 색채가 있다고 지적된 남해안 지방의 사람들은 우리가 왜 북방문화인이 아니고 야만인의 후손이냐는 지역적 저항도 크게 한 몫 했다.

그 뒤,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나 고인돌 풍습 등 열대해양문화의 증거들이 강조되고 백제, 신라, 가야의 시조가 모두 농경을 위주로 한 남방의 난생(卵生) 신화 계통의 인물임이 밝혀졌지만 지금도 남방문화론은 학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주 근해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면 남쪽으로 흘러가 닿는 곳이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다.

성종때 제주도 관리 최부(崔溥)가 배를 탔다가 난파, 도착한 곳도 닝보였다.

이 닝보는 중국에서 남방문화를 대표하는 지역 중 하나다.

송(宋) 시대의 기록에 보면 이 닝보의 항구에 고려와 탐라에서 온 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고 했다.

또 고려나 탐라사람들의 주거지가 집단을 이루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제주와 닝보는 역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이다. 어민들의 생활습속이나 전래되는 설화 등이 우리 제주와 여러 가지 유사점이 많다. 이 닝보에 고려 사람들이 살았던 지역에 그 교류사를 재현하는 기념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제주와 닝보의 문화교류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해 제주에 관한 내용이 이 기념관에 전시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얘기 때문이다.

 

 

고려청자와 닝보 한국교류

2006/09/05 15:16

복사 http://blog.naver.com/yuehu/40028349008

지금 세상에서 흔히 떠드는 한국 도자공예의 아름다움은 고려시대의 청자(靑磁)부터 시작된다. 이 고려조(高麗朝)의 도자공예를 살펴볼 때 그 시대의 정치와 종교, 그 시대의 생활감정과 민족정서가 어쩌면 그렇게도 잘 반영되어 있을까.

  귀족과 상류사회의 유장(悠長)하고도 풍아한 생활, 이것은 고려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지어 부른 비색(翡色) 청자의 맑고 푸른 빛갈과 길고도 연연하고 또 부드러운 몸체 곡선의 아름다움 속에 촉촉히 스며져 있어서 고려 청자를 예찬하는 많은 감상가들의 사화(詞華)를 장식해 주고 있다.

  원래 고려 청자의 기법은 10세기경 중국 남방의 월주요계(越州窯系)의 청자기법을 받아들여서 전라도의 해안지대에서 성립시킨 것이지만 받아들인지 불과 1세기 남짓한 동안에 그 원류(源流)인 월주, 여요요(餘姚窯)의 기술과 그 청자기 빛깔을 딛고 넘어서서 이른바 고려 청자 독자적인 비색(翡色)을 성립시켰고 이어서 중국적인 기형에서 탈피해서 전아한 고려적 곡선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비 개인 후 먼 하늘의 맑고 푸른 빛을 연상케 하는 이른바 비색(翡色)의 해맑은 푸른빛은 훗날 백자 전성의 조선 자기에도, 그리고 우리네가 즐겨 입은담담한 의상 빛깔에도 일관해서 나타나는 민족의 성깔이며 결곡하면서도 부드럽고 또 길고 긴 곡선의 아름다움은 고려 상류사회의 유연한 생활과 불교적인 감성이 깃들인 것이라고 흔히 설명을 하게 된다.

  그 시대 청동제의 연(蓮)잎 수저가 보여주는 유선(流線)의 세련, 그리고 길고도 미끄러운 선의 움직임도 너무나 청자(靑磁)의 선(線)에 잘 어울리고 있으니 청자의 아름다움은 도시 그 시대의 사회상(社會相) 그대로 귀족문화, 그리고 불교문화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을 빗어내고 길러낸 도공들의 생활이나 중서(衆庶 )의 생활은 이 상류사회의 유연하고 화사한 생활을 따를 길이 없었으니 이를 도시 전통적 민족정서의 발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청자의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민중적인 아름다움도 도공들의 작위(作爲)로 이루어진 아름다움도 아니고 보니 이를 귀족적이나 불교적인 아름다움으로만 치우쳐서 생각해서는 안될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늘날 고려 청자의 기술이나 아름다움은 이미 과거의 한국이 이루어 놓은 개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세계 제일급의 공예작품으로 꼽히고 있으니 우리 민족의 조형역량에 기대할 앞날이 많다고 해야겠다.

  고려도 5백년의 왕업이 끝날갈 무렵에는 국정(國政)이 문란하고 경제(經濟)가 악화되어 그 정치(精緻)하던 청자문화(靑磁文化)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퇴화되어 간 상감청자(象嵌靑磁)의 말로(末路)는 속물화(俗物化)된 분청사기(粉靑沙器)로 타락했으며 일시적으로 거의 청자문화(靑磁文化)의 절멸을 보이는것 같았으나 조선 문화의 신흥 기운에 힘입어 거의 가망없던 청자문화의 잔해, 이 분청사기도 새 시대의 신선한 호흠과 민중적인 아름다움을 걸치고도 건전하고도 새로운 하나의 조선미로 재빠르게 성립하였다.(계속) 

 

월주요계(越州窯系)

중국 당대(唐代:618~907)의 형요(刑窯)와 함께 명성을 떨친 청자요(靑瓷窯).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닝보시에 속한 현급시)[餘姚]의 상린 호[上林湖]를 중심으로 상위[上虞]·사오싱[紹興]·닝보[寧波]·융자[永嘉]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당시 생산품은 외국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육우(陸羽)는 〈다경 茶經〉에서 "얼음 같고 옥 같다"는 비유를 들어 월요 밝고 깨끗한 빛깔을 설명하면서 최상품 대열에 분류했다. 월요의 장식수법은 꽃그림·꽃조각과 조소·투조 등 다양하며, 앵무새·나비·구름과 용·난새·봉황·화훼·인물 등의 도안이 자주 보인다. 월요가 가장 흥성했던 만당·오대(晩唐五代:907~960) 시기에는 관요(官窯)가 되었으며, 궁정에서 쓰이는 자기를 구워 비색(秘色) 자기라고도 불렀다. 월요의 유구한 역사와 굽는 기술은 후에 룽취안 요[龍泉窯요]를 출현시키는 주춧돌이 되었다

[출처] 고려청자와 닝보|작성자 해풍

 

 

명주(明州, 寧波) 한국교류

2006/09/06 23:20

복사 http://blog.naver.com/yuehu/40028404929

  신라가 통일 이전에 당은포를 출발하여 중국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비단 고구려나 백제의 방해라는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서울인 경주가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하여 당과는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가담이 『도리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에서 남양만에 이르러 다시 왕도 경주까지 가려면 ‘육행 칠백 리’라는 노정에다 험준한 추풍령도 넘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적지 않은 ‘국신물(國信物)을 지닌 사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교역을 주업으로 하는 상인들도 험한 육로를 통한 수송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나·당 양국간의 교통 불편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육로보다 편한 해로와 수송능력면에서 월등히 나은 선편이 자연스럽게 이용될 수 밖에 없었다. 경주에서 가까운 감포·영일만이나 울산만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지나 흑산도 부근에서 뱃길을 서북방으로 돌려 산동반도쪽으로 가거나 서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양자강구나 남중국으로 직항하는 해로가 이용되었다. 이 항로의 중국 측 중심 해항은 명주 정해현(定海縣)·대주 황암현·양주·천주·광주 등이며 우리 나라 측에서는 무주(광주)·나주·전주·강주(진주)가 이용되었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송사』 고려전에 나오는 노정이 곧 이해로 이용된다.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매잠(창국현)에서 백수양(白水洋, 절강성 연안 해중)·황수양(黃水洋, 장강구의 탁수바다)·흑수양(黑水洋, 흑조해역)을 지나 협계산(소흑산도)·배도(진도 동쪽바다 섬)·흑산도에 도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나주·군산·인천·강화도를 지나 예성강에서 개경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서긍 일행은 음력 5월 28일에 매잠을 출발하여 3일 뒤인 6월 2일에 ‘화이’의 경계라던 협계산에 도착하였고, 3일 후에는 흑산도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계절풍을 이용하면 명주에서 불과 5일 만에 흑산도에 도달한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에도 고려 사행로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명주를 출발하여 4일만에 흑산도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종 36년(건염 2년, 1128) 양응성(梁應誠) 등의 사행길은 5일째 되던 날 명주 정해현에 도착하고 있다. 『송사』고려전에도 명주 정해를 출발하여 순풍을 만나면 5일만에 흑산도에 이르며, 7일째에는 예성강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남제서』(권 58 동이전)에 보면 가라국왕(伽羅國王) 하지(荷知, 감지)가 건원 원년(479) 남제(479-501)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김해 지방의 나라가 백제에 앞서(484) 단독으로 남제와 통교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동중국해를 직접 횡단한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승 각덕(覺德)이 양(502-556)으로 건너갔을 때나 또 그가 진흥왕 10년(549)에 양의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가지고 왔을 때도 이 남방해로를 이용하였음이 분명하다(『해동고승전』 권2). 진흥왕 26년(565)에 남조 진(557-589)의 사신 유사(劉思)와 함께 경론 1,700여권을 가지고 온 ‘입학승’ 명관(明觀)도 필경 이 항로를 따라 왔을 것이다. ·
  신라가 중국 제왕조에 대한 이른바 ‘조공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한 것이 남조 이전부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신라는 남방해로를 보다 많이 활용하였을 것이다. 진과의 교역을 진흥왕 대에만 해도 전후 4차례나 되었으며 진지왕(576-578)·진평왕(579-631)대에 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진평왕 7년(585) 고승 지명의 입진이나 (『삼국사기』 권4) 동왕 9년(587)조에 나오는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의 이야기도 신라 사람들이 남방 해로로 남중국의 오월에 이르렀던 당시의 정황을 반증한 좋은 예라 하겠다. 이 밖에도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선편으로 금능(남경)에 직항한 기록 등은(『속고승전』 권 13 석원광) 신라가 통일 이전에 이미 남방해로를 통하여 남조와 왕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통일 이후에도 이 뱃길이 활발히 이용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조선술과 계철풍을 이용한 항해술의 발달에서 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안사의 난(755-563) 이후 강남 지역의 경제 성장과 양주를 비롯한 남중국의 광주·복주·항주·명주·천주 등 여러 항구가 국제항으로 크게 번창한 까닭이기도 하다. 중세기의 이슬람·아라비아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거쳐 남중국의 양주까지 무역 시장을 개척하고 서방의 문물을 다량으로 전래한 데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파는 당나라와 정치·경제·문화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신라에 미쳤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 지역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헌덕왕 8년(816) 흉년이 들자 신라 사람 170명이 당의 절동(남중국 절강 동쪽)에 건너가 먹을 것을 구하엿던 사실(『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제 10)은 이의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남방해로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회요』에는 망해진(명주 정해현)이 일찍부터 신라 원항 선박의 중요한 발착항구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지기승』(권 11 양절동로 경원부 명주 물경 하)에는 명주 창국현의 매잠산은 고려·신라·발해·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라고 하고 있다.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이 항선상의 보타산 조음동의 ‘불긍거관음원’에는 ‘신라고인’이 오대산에서 모셔온 그 관세음상이 중국 관음신앙의 시원이 된다. 신라 무역상인들이 배를 타고 가다 좌초한 그 해암에 관음신앙을 모시고 먼 해로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신라 선박의 왕래가 얼마나 많았기에 항로상에 있는 위험한 해암에 ‘신라초’라는 이름이 붙여졌을까 놀랄 만 하다. 이렇게 라도 하여 왕래 선원들의 안전을 도모하려던 그 당시 신라 해상 상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 신라 선원들의 항해술은 매우 우수하여 여타 나라의 선원과는 비길 바가 못되었다. 845년 동남해상에 표류한 일본 선원 50여명을 광주에서 일본으로 데리고 간 것도 신라 선원들이다. 물론 남방해로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출발할 때에는 이미 역풍이 불고 있었던 계절이라 생각되므로 그들의 항해술의 수준을 짐작케 한다.
  신라 말에 오면 이 남방해로는 더 많이 이용되었다. 그 이유는 북중국에 거란족의 세력이 등장한 데에도 한 원인이 있었겠지만, 이 항로를 이용하는 선원들은 이미 계절풍과 해류의 흐름을 잘 알고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많은 신라승의 입당과 귀국의 기록을 보면 서북풍이 부는 10-2월에 중국으로 출발하여 서남풍이 부는 3-8월에 귀국하고 있다. 여주의 고달사 원종대사(元宗大師)도 진성왕 6년(892) 늦겨울에 상선편으로 서주(舒州) 동성현(안휘성 동성현)에 도착하였다. 그러다가 경명왕 5년(921) 7월에 강주(진주) 덕안포를 거쳐 귀국하였다(『조선금석총람』 상). 항해 기간도 놀라울 정도로 단축되었다. 앞에서 본 『고려도경』이나 『송사』 고려전의 기록처럼 5-6일 이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 866-932)의 탑비에는(『조선금석총람』 상, 『해동금석원』 권3) 그가 진성왕 10년(896) 입절사(入浙使) 최운희와 함께 ‘불과수일’만에 영파에 도착하였고 효공왕 15년(911)에 나주 회진으로 환국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계절풍을 잘 이용한 항해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문경 봉암사의 정진대사(靜眞大師)도 효공왕 4년(900)에 상선을 타고 강회부근에 도착하였고 경명왕 8년(924) 7월에 전주 희안현 포구로 귀환하였다(『조선금석총람』상, 『해동금석원』 권 4). 광양의 옥룡사 통진대사(同眞大師)는 진성왕 6년(892) 늦은 겨울에 출항하여 경명왕 5년(921) 여름(7월)에 전주 임해군에 귀착하였다(같은 책). 오룡사의 법경대사(法鏡大師)는 효공왕 12년(908) 7월에, 지평 보리사의 대경대사(大鏡大師)는 같은 해 13년(909) 7월에 무주(광주)의 회진과 승평에 귀환하고 있다.
  많은 승려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늦겨울에 중국으로 가서 여름철(7월)에 무주·전주·강주(진주)·나주 방면으로 돌아오고 있다. 물론 계절풍과 관계 있는 항해의 결과이다. 후백제 견훤과 오월 등 여러 나라와의 빈번한 왕래는 이 항로의 지속적인 이용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는 예라 하겠다.
  당회요』에는 망해진(명주 정해현)이 일찍부터 신라 원양선박의 중요한 발착항포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여지기승』(輿地紀勝 권11 양절동로 경원부 명주 경물하)에도 명주 창국현(昌國縣)의 매잠산(梅岑山)은 고구려·신라·발해·일본 등의 선박이 바람을 기다리던 곳이라 하고 있다.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과 『송사』(宋史)고려전에도 명주 정해현을 출발하여 매잠에서 바다 항해를 시작하여 소흑산도(흑산도) 진도에 도착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한다고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자치통감』(권 250, 함통 원년, 860, 권252, 건부 3·4년, 876~7)에는 명주가 강남의 군사·교통·무역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대·송대에 오면 남해제국은 물론 동북 여러 나라의 해상무역의 일대 중심항으로 번창하여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던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 외국상인들은 명주의 동도문(東渡門) 안팎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신라상인들은 진명령(鎭明嶺) 일대에서, 페르시아인은 동도문 안에서 많이 거주하여 페르시아 거리를 형성하기도 했다. 지금도 영파 항구로부터 10여분 거리에 있는 ‘고려관지’(高麗館址, 鎭明路 宝奎巷 57)는 그 때의 사정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출처] 명주(明州, 寧波)|작성자 해풍

 

 

에도시대 [江戶時代(강호시대)]
요약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

에도시대 [ 德川時代 , Edo─ ]

글자크기
요약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권력을 장악하여 에도(江戶) 막부(바쿠호)를 설치하여 운영한 시기(1603~1867)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일본 역사의 시대 구분 가운데,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대장군이 되어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개설한 때부터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한 1867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 일본의 봉건사회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쇼군(將軍)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ㆍ지배하였다. 정권의 본거지가 에도[江戶, 현 도쿄]여서 에도시대라고 부르며, 정권의 주인공의 성을 따서 도쿠가와시대라고도 부른다.

에도도쿄 박물관 / 도쿄 료고쿠(兩國) 소재 에도도쿄(江戶東京)박물관. 에도시대와 도쿄시대의 서민생활에 관한 전시실과 영상실 등이 있다
본문

정권의 본거지가 에도[:현 도쿄]였으므로 이렇게 부르며, 또한 정권의 주인공인 도쿠가와의 성을 따서 도쿠가와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가마쿠라[]시대에 이룩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체제가 마지막 마무리를 거쳐 확립된 시기이며,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지배하는 집권정치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병농분리()가 완성되고 다이묘[]를 비롯한 무사계급의 봉토()와 관록제, 농민으로부터 연공()을 징수하는 사회적 원리 등이 확립되었다. 상인()과 상업에 대한 통제는 대외적으로 유례없는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나타나 2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 시대는 또 엄격한 신분제도의 사회였으며, 사농공상() 중 인구 5∼6 %의 무사계급이 80% 이상의 농민과 5∼6 %의 공상()을 지배하였다. 무사계급도 쇼군을 최고주권자로 하여 여러 계층으로 구별되고, 동시에 철저한 주종() 관계가 성립되었다. 260∼270가()에 이르는 다이묘는 영토가 주어지는 동시에 엄격한 통제하에 들어갔고, 개역()·전봉() 등의 처분을 자주 받았다.

지배계급이라 해도 하급무사는 정해진 녹봉을 받는 도시의 소비자에 불과하였다. 농민에도 몇 개의 계층이 있었으며 상업의 활동은 전국적인 상품유통망을 조성하는 동시에 농작물 유통과 결부하여 농촌을 화폐경제로 끌어들여 사회변동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들 외에 전통적 권위를 지닌 교토[]의 천황 및 구게[:조정에 하는 집안]의 세력이 정치적으로는 무력화된 채 존재하였다.

다음 : 에도시대의 3단계 시기
이미지
에도도쿄 박물관
800*600, 183kb
다카야마 산마치
800*533, 200kb
에도시대 가용실
800*600, 190kb
에도시대 복장
418*600, 103kb
에도시대 거리
800*600, 171kb
에도시대 전통 촌마게 공예점
800*600, 195kb
더 많은 이미지 보기

 

 

 

 

 

 

 

 

 

 

 

 

 

 

 

 

 

 

 

에도 시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일본의 역사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

v  d  e  h

에도 시대(일본어: 江戸時代 えどじだい[*]; 강호시대)는 도쿠가와 시대(일본어: 徳川時代)라고도하며,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은 시간을 가리킨다. 1603년 3월 24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왕조)를 연 시기를 에도 시대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868년 5월 3일 에도 성메이지 정부군에 함락되는 때까지의 265년간을 가리킨다.


목차

 [숨기기

[편집] 개요

[편집] 에도시대 초기

[편집] 법치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고 자신의 영지인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막부가 탄생한다. 도요토미 정권 붕괴 후의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생산, 교육의 진흥, 그 외의 대책에 힘을 쏟음과 동시에 오사카 전투에 의해 도요토미 세력을 일소한다. 길게 계속된 정국불안은 끝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철저한 정국안정책을 실행하여,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는 등 다이묘와 조정에 대해 철저한 법치체제를 깔았다. 다이묘의 대부분이 영지몰수로 모습을 감추고, 전국의 중요지방은 직할령으로서 다이묘를 두지 않고 다수의 신반다이묘에게 큰 영지를 맡기고, 그 사이에 토자마다이묘를 배치하여 후다이다이묘에게는 작은 영지와 중앙정치에 관여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절묘한 분할정치책을 실시하였다.

자가우선주의라는 비평도 있지만, 이에 의해 결과적으로는 265년이상 계속된 장기안정정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천하태평이라는 일본어가 생겨날 정도로 상대적인 평화상태를 일본에 가져왔다.

[편집] 경제성장시대

농본주의적으로 생각되는 이에야스이지만,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동시대의 사람이었고, 또한 노부나가의 철저한 규제완화에 의한 경제진흥책을 직접 경험했다는 사실로부터, 성장중시의 경제 진흥파였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평화가 도래하여 대량의 병사(무사)가 비생산적인 군사생활에서 행정활동으로 옮아가고, 광역적인 개간활동이 각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에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까지 긴 성장을 계속해왔던 경제는 폭발적으로 발전하여, 고도성장시대가 시작되었다.

[편집] 기독교 금지령

에도시대에는 나가사키 데지마에서의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류와 쓰시마 번을 통한 조선과의 교류 이외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하는 쇄국정책을 폈다.(하지만 실제로는 류큐를 통한 대명, 청 교역이나 북방교역이 존재했다.) 바테렌(기독교 선교사)추방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발령하였지만, 쇄국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시마바라의 난으로, 기독교잇키의 협력으로 인해 농민들의 난을 제압하기가 힘들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정치적 위험성이 강하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편집] 쇄국정책

또한 이 시기에 네덜란드가 일본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게는 일본 식민지화의 의도가 있어 위험하다고 막부에 조언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이와 비슷한 정책을 해금(海禁)정책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경우에는 주로 연안지역의 왜구를 포함한 해적 방어와 해상에서의 밀무역을 금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일본의 쇄국과는 사정이 다른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쇄국도 중국의 해금과 같이 쇄국보다는 해금이라고 하는 쪽이 적당하다는 설명도 있다. 쇄국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에는 일본인의 해외진출은 활발했고, 동남아시아에 많은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한 타이에 건너간 야마다 나가마사처럼 그 나라에서 중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편집] 자급경제

하지만 쇄국 후에는 오로지 국내중시 정책이 채용되고, 기본적으로 국내 자급 경제가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3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 경제와 각지의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하는 한(藩)경제와의 복합적인 경제 구조가 형성되어, 각지의 특산물이 주로 오사카에 집중되어, 거기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하여, 경제적인 번영을 보인 것이 겐로쿠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문학과 미술 면에서도 이하라 사이카쿠우키요조시, 마츠오 바쇼하이카이, 치카마츠 몬자에몬죠루리, 히시카와 모로노부우키요에 같은 것이 탄생한다.

[편집] 에도시대 중기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교호의 개혁으로 막부의 재정을 튼실히 하였지만, 다시금 재정이 악화되자 막부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간세이의 개혁, 미즈노 다다쿠니덴보의 개혁을 하여보지만, 성공하지는 못하였고 점차 막부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겐로쿠 문화와 같이 상공인이 중심이 된 가세이 문화가 꽃을 피웠고, 가부키, 하이카이, 우키요에 등이 유행하였다.

화폐상품 경제가 발달하자, 옛부터 쌀을 기반으로 연공수입을 가졌던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막부와 같이 번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슈 번사쓰마 번은 이 개혁이 성공하였고, 막부 말기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편집] 에도시대 말기

에도 말기 구미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에 문호개방을 요구하였고, 막부는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시작으로 유럽 여러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채결하게 된다. 이에 존왕양이 사상이 고추되어 갔고, 막부의 고위관료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정국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867년 11월 9일,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선언하고, 다음해 1868년 5월 3일에도성의가 메이지 정부군의 손에 떨어지고, 도쿠가와 막부는 붕괴했다.

 

 

 

헤이안 시대 [Heian period, 平安時代]일본 역사 | 브리태니커

var socialWidgetCfg = { prefix : "헤이안 시대", prefix_twitter : "#Daum100", link : location.href, source_id : "95" }; dic100.domReady(function(){daum.load("http://s1.daumcdn.net/img-contents/script/social/237/SocialShareWidgetIcon.min.js" );});

일본 역사에서 794~1185년의 기간.

시대명은 794년 나라[奈良]에서 천도한 헤이안쿄[平安京:교토]의 이름을 땄으며, 정치·문화의 중심이 헤이안쿄에 있었던 시대이다. 나라 시대(710~784)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던 중국식 중앙집중화된 정부 체계는 장원, 즉 개인 영지들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변모되었다. 이들 개인 영지는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국가 토지를 잠식해가 결국 국가 재원을 감소시켰다. 9세기 중엽부터 조정은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지배를 받았는데, 후지와라 씨는 집안의 딸들을 왕의 후사와 결혼시키는 정책에 의해 섭정으로 왕실을 지배했다. 이 가문의 영향력은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는 995~1027년에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후 후지와라 씨 출신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천황이 정권을 잡자 몰락하고 말았다. 1086년 시라카와 천황[白河天皇]이 일찍 퇴위해 막후에서 정치를 하는 인세이[院政] 체제를 설립함으로써 권력의 중심이 새로이 바뀌었으며, 이 제도는 이후 몇몇 천황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시대에 궁중귀족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는데, 미학적인 세련됨을 추구함으로써 미술과 문학이 더욱 새롭게 발전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쓴 11세기 소설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는 귀족생활에 대한 뛰어난 기록물이며 세계문학사에서 위대한 작품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종교에서는 밀교인 천태종(天台宗)과 진언종(眞言宗)이 정교한 궁중의식과 병행되는 공식적인 의식들을 치렀다.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정토종(淨土宗) 교리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교리들은 지방의 반란과 지방 군벌들 사이의 무력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사회적 격변기에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지방 군벌들간에 벌어진 이러한 싸움은 1156년 수도에까지 파급되었으며 다이라 씨[平氏]와 미나모토 씨[源氏]는 서로 다른 천황을 세우기 위해 경쟁했다. 결국 다이라 씨가 승리해 1185년까지 조정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교토] 일본안에 녹아있는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유산, 교토는京都 우리가 생각하는것 이상의 도시다. 먼나라 일본, 生活

2012/01/27 09:40

복사 http://jelrom.com/140150622695



京 都 , 일 본 인 들 의    수 도  首 都   교 토


?일본을 이야기 하면서 헤이안 시대를 빼놓을 수 없듯이 이곳 교토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수도千年首都 이기에 일본인에게 천년고도天年古都 이지만 정작 이들에게 저 단어는 낯설기만 하다.


일본인에게 교토와 헤이안 시대의 문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교토의 모습은 머나먼 고향의 이미지가 아닌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느낌이다.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헤이안 시대의 느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단절된 과거로의 추억과 향수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헤이안 시대를 시작으로 가마쿠라, 무로마치 를 거쳐 에도까지 그들의 문화와 관습은

중된되고 퇴출된게 아니라 지금까지 농축되고 응축되어 전달되고 있다.


교토에는 그러한 과거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함께한다.

 



중요한건 이들에게 전통이란게 애써 힘들게 지키고 유지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지금까지 했던 대로 생활 속에 함께 하면 된다.


교토는 특별하다.


나에게 교토는 역사의 도시 이전에 투쟁의 도시로서의 이미지로 먼저 다가왔다.

일본에 대해 정말 無知했던 그때, 교토는 일본의 급진적 학생운동의

상징인 도쿄 대학교 "야스다 강당" 사건 처럼 나에게 교토대는 "전공투"의 이미지와

윤동주 시인의 도시샤 대학등 교육의 도시로서의 이미지였다.


일본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던 나에게 교토는 그저 그런 동네였다.




교토는 수도다.


지금 교토의 명칭은 京都 지만 옛날 교토의 지명은 그저 교, 京 이었다.

그렇다 교토는 수도다 그러기에 그냥 한자로 "서울 京" 이라고만 섰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이곳 교토로 수도를 옮기고 헤이안平安 시대를 연다.

당시 간무 천황은 이곳을 헤이안교平安京이라고 부르고 도시의 모습을

당시의 당나라 장안 (지금의 서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794년은 우리역사에서 발해의 5대 王, 성왕이 즉위를 하고 서울의 봉선사가 건축된 해다. 




794년에 헤이안 시대의 수도로 지정된 후 교토는 1868년 일왕의 거쳐가 도쿄로 옮겨질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도로 있었다.


물론 에도시대에는 정치적인 힘이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도쿄로 

옮겨지기는 했으나 엄연히 황궁과 천황이 있는 교토는 수도로써 남아있었다.


또한 지금의 일본의 수도를 이야기 할때 법적으로 일본의 수도가 도쿄라고 명시 되어있지 않기에

천황이 거처를 옮긴 지금도 교토가 일본의 수도라고 보는 일부 견해도 있다.



 



교토를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난 교토대 기숙사 추천한다.

교토대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건설된지 90년이 되어가는 요시다 기숙사를 둘러보기를 권한다.


100년 교토대 역사와 함께 100년의 학생자치 시대를 함께 하고 있는 요시다 기숙사를 가보면

자율이 무언지 그리고 좌파가 무엇인지, 더러움이 무엇인지 알게될것이다.


한 달 기숙사비 400엔.

한국 돈 6천원 에 한 달간 지낼 수 있는 지구상 가장 저렴한 기숙사에서

가난한 교토대의 엘리트들이 어떻게 생활하며 동아리 활동과 취미 활동을 하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난 일이다.


학교측의 리모델링과 재건축 제의에도 완강히 거부하며 학생 자치로 이끌어 가는 요시다 기숙사,

엉뚱하지만 교토에 와서 시간이 남는다면 한번쯤 이 기숙사를 둘러 보는 것도 괜찮다.


원하면 머물 수 있다.

규칙에 의해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과의 동거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 

또한 이 기숙사에서 머물 수 있다.


실지로 교토대를 들어가려고 하는 고등학생들이 시험보기 전에 이곳에서

머물고 간다고 한다.


6 명의 노벨상을 배출한 교토대학교는 충분히 역사와 유적에 무관하게 둘러볼 만하다.

교토대는 이곳에서 교대라고 부른다 "京大" 한자를 풀이하자면 수도대학이다.


교토는 수도다.


 


일본 안에서도 유난히 지방색이 강한 교토에서 외지인이 살기란 살짝 어려운 구석이 있다.

교토에 3대를 살아야지만 "나 교토 人 이요" 하고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지방색이 강한 일본에서도 교토는 특별하다.

천황과 함께 한 도시에 사는건 특별한 능력이고 천황의 축복이다.


교토인은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하다.


이런 교토에서, 교토인을 만나 교토인이 질문을 한다.


"교토로 여행 와서 본 것 중에 어디가 좋던가요?"


무심코 대답한다

" 교토역을 나오면 보이는 교토타워가 훌륭하더군요"




교토인 들은 교토타워를 싫어한다.


도시의 미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을 지어 놓았다.

높은 건물이 없는 교토에서, 자신의 건물을 수리 하려고 해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

교토에서 그것을 전혀 거추장스럽다거나 개인의 재산권이 침해 받는다는 생각 없이

단지 교토라는 이유만으로 지내던 사람들에게 1964년 수많은 반대속에서

완공이 되어 교토를 내려다 보는 모습으로 교토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교토에 와서 교토타워가 멋있다고 칭찬하지 말아라.


(수정 합니다, 원 글에는 교토驛이라고 오기를 했습니다 교토역이 아니라 우수꽝 스러운 모습으로

古都 교토의 중심에 솟아 오른 교토타워 입니다, 더구나 교토의 많은 유물을 이야기 하지 않고

교토타워라고 대답하는게 교토인들이 존심이 상한다고 합니다) 




교토는 미식의美食 동네다.


왜 안 그렇겠는가? 1세기 동안 나라의 수도였는데 그 맛집의 전통과 기술이 오죽하겠는가.


바닷가와 먼 곳인 교토에서는 수산물 없이 원 재료를 꾸밈없이 먹는 걸로 유명하다.

즉,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요리로 유명하다, 


과거 일본은 소고기도 돼지고기도 먹지 않았다,

그들에게 수산물과 산과 들에서 자라는것이 먹을것이었다.


그래서 교토의 요리에서 야채와 채소의 품질은 그 어느 곳보다 중요시한다.

또한 그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소금과 간장 그리고 미소 또한 매우 중요한곳이 교토다.

 

역설적으로 교토의 채소와 그 채소를 뒷받침 해주는 간장, 미소는 훌륭하다는 소리다. 


교토의 로컬 시장은 도시 한가운데 있다.

이 큰 도시의 한가운데 재래시장이 있다.


 "니시키 시장"에서는 손님이 손수 구입한 채소로 요리를 내놓는 집도 있다. 


교토의 음식, 교토에 와서 라면이나 우동만 먹고 간다는건 슬픈 일이다.


기회가 없다면 시장에 들려 배추와 홍당무라도 씹고 가라.

교토는 과거 한 집 건너 한 집이  궁중 요리사였다.




2,000천여 개의 사찰이 있는 교토에서 그 역사가 500년이 넘는 사찰은 흔히 만날 수 있다.

일본 내 문화재의 20%가 이곳 교토에 있다, 교토는 그 자체로 일본의 박물관이다.


17개의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교토.


그러면서도 닌텐도와 와코루의 본사가 있는 교토.


집집마다 방화수와 방화사를 준비해 놓고 있는 교토.


이런 교토를 관광지 이상으로 다가선다면 조금 더 재밋는 여행이 될 것이다.

어느 도시나 의미가 있겠지만 교토는 특별하다.




교토의 밤은 의외로 어둡다.


교토의 밤의 술과 잘 어울린다.


이러한 교토의 이야기를 이제 시작 하려고 한다.


특별한 교토, 그리고 특별한 교토인.


 

 

헤이안 시대

[일본사] 헤이안시대 (Rise of Samurai)  

 

 후지와라씨      다이라씨(헤이시)   →  미나모토씨(겐지)       

 

 

◆후지와라 씨족: 나카토미씨의 분가로 일본역사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가문으로 800년경부터 400년간 섭정(셋칸케)과 관백을 독점하여 천왕을 대신에 정권을 장악. 2번째 가문의 권력자가 된 후지와라 후히토의 4아들이 남,북,식,경의 영지를 받아 후지와라 4가를 이루었고 처음엔 식가의 권세가 강했으나 후에 북가의 힘이 강해져 북가가 본가의 지위를 얻게 된다.
후지와라씨는 천왕의 왕비를 지속적으로 배출합니다.

 


도호쿠지방의 패권다툼  (오슈 후지와라씨의 시작)

무쓰국(우슈)의 유력 호족인 아베씨(아이누족) 당주 아베 요리토키는 두 딸을 다이라 나가히라(이구십랑)와  후지와라 쓰네키요(신리권태부) 시집보내면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세를 확대해나갔다. 이중 중요한 인물이 후지와라 쓰네키요아베의 딸사이에서 난 아들 키요하라 키요히라의 오슈 후지와라씨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이이다.

 

 

 도호쿠지방의 세력이동:                                 

 아베 요리토키 ▶ 아베 사다토 ▶ 키요하라 다케사다 ▶ 키요하라 사네히라 ▶ 키요하라 키요히라ㆍ이에히라형제( 동母형제) ▶ 후지와라 키요히라(친부의 성으로 개명)

 무쓰노카미: 무쓰국에 파견된 시장이나 도지사의 계급. 해당 지방 관리의 최고위직

 

전9년의 역(1051~10621)


 중앙 조정의 지방관 VS 지방 유력 호족 아베씨
1051년 조세를 거부한 아베씨지방관 후지와라 나리토우가 토벌에 나섰지만 아베씨의 승
1052~1062년 조정에서
무쓰노카미 지방관으로 미나모토 요리요시(가와치국 겐지가문의 2대 당주)를 파견

1052년 미나모토 요리요시를 무쓰로 파견하지만 요리요시가 도착하자 사면령을 받은 아베씨의 족장 아베 요리토키요리요시에 평화적 태도를 보인다.
1056년 미나모토 요리요시 휘하의 후자와라 미쓰사다ㆍ모토사다 형제가 야영중에 기습받는다.
1057년 5월 미나모토 요리요시는 아베씨의 배후에 있던 아베 토미타나, 쓰가루지역의 아이누족을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이에 토미타나를 만나러 가던 무쓰 아베씨의 당주 요리토키토미타나의 복병으로 죽는다.
         11월 아베 사다토(아베 요리토키의 아들)4000명 VS 미나모토 요리요시 2500명이 키노미에서 전투를 벌였고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대패하게 된다. *아베씨는 이전투로 고로모가 남쪽까지 세력을 넓힌다. 패한 요리요시는 교토무사단을 재편성하고 간토,도카이,기나이지방의 무사들로 병력을 증강한다.
1062년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지방관 임기를 마치고 후임으로 타카시나 쓰네시게를 무쓰국에 파견했지만 현지에서 따르지않아 교토로 되돌아가야했고, 이에 어쩔수 없이 미나모토 요리요시가 다시 무쓰국의 지방관을 맡게된다.
       요리요시데와국의 유력호족 키요하라씨의 당주 미쓰요리를 끌어들여 키요하라 미쓰요리키요하라 타케노리(미쓰요리 동생)를 총대장으로 하여 7000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아베씨(무쓰국)4000명?? VS 중앙조정(미나모토 요리요시)3000명 + 키요하라씨(데와국)7000명 총1만의 연합군은  아베씨의 거점 구리야가와(현 이와테현 모리오카시)를 함락시키고 아베 사다토를 참수하고 아베씨는 몰락한다. 후지와라 쓰네키요 역시 참수된다.
      -아베씨 정벌결과: 미나모토 요리요시는 무쓰국에 머물러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지만 조정에서 그를 이요국 지방관에 임명하였고, 키요하라 타케노리는 종5위하 진슈후쇼군에 임명되고 오우 6군의 지배권을 받고 키요하라씨는 무쓰국과 데와국의 패자가 된다.
         *오우: 오슈와 우슈를 합친말로 오슈는 데와국, 우슈는 무쓰국)

 


후3년의 역
1083년

※사전배경

무쓰국 키요하라가문의 당주가 된 다케사다(다케노리의 아들)는 아베 토리요키의 딸을 측실로 삼고 그녀의 아들(키요하라 키요히라/토리요키의 외손자)도 양자로 삼고 토리요키의 딸에게서 아들 이에히라(키요하라씨+아베씨)를 얻는다
 

키요하라 다케사다 사후.. 데와 키요하라씨의 당주는 장남인 사네히라가 이어받는다. 사네히라는 헤이시가문(다이라씨)과 겐지가문(미나모토씨)와 혼인관계를 구축한다.

 사네히라의 딸과 겐지가문의 혼사를 축하해주러 온 키요하라일족의 장로 히데타케는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사네히라에 격분하여 선물로 가지고온 사금을 뜰에다 쏟아버렸고 이에 격분한 키요하라 사네히라는 군사를 일으켜 히데타케를 토벌하러 간다.
    이에 히데타케는 키요히라(아베씨와 후지와라씨 피)ㆍ이에히라(아베씨와 키요하라의 피)형제를 부추겼고 형제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사네히라는 키요히라형제를 공격하려했으나 이들이 후퇴하자 다시 히데타케토벌을 준비한다.  이시기에 무쓰국 지방관으로 미나모토 요시이에(요리요시의 아들)가 파견되어, 사네히라는 요시이에 환영식을 사흘간 성대히 열고 출격한다.
 사네히라가 없는틈을 타 키요히라 형제가 사네히라의 본거지를 공격하지만 미나모토 요시이에가 사네히라편을 들어주어 패하여 항복하지만, 행군중이던 사네히라가 급사하고 만다.


이에 사네히라의 영지 오우6군을 키요히라이에히라에게 3군씩 나누어 준다. 영지배분에 불만을 품은 이에히라가 동모형 키에히라의 저택을 쳐서 키에히라 일족을 다죽여버리고 키요히라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미나모토 요시이에에게 도망친다.
  이에히라는 누마요새에서 농성하고 미나모토 요시이에와 키요히라 연합군이 공격했지만 겨울등의 이유로 패하고 만다.


   이에히라의 승리소식의 이에히라의 작은아버지인 키요하라 다케히라가 축하하면서 가담했고 이들은 가네자와 요새로 옮겨간다. 1087년 요시이에와 키요히라 연합군은 가네자와 요새를 포위하였고 양식이 떨어진 이에히라와 타케히라는 도망치다 잡혀죽는다.
       -키요하라씨 처리결과: 조정의 명령에 의한 전쟁이 아니었기에 논공행상은 거부당하고, 미나모토 요시이에는 무쓰국지방관직을 해임당한다. 요시이에가 동원한 간토지방의 무사들은 은상을 받지 못하자 결국 요시이에가 사재를 털어 은상을 주었고 이는 간토지방에서 겐지가문의 명성을 높이게 되어 훗날 겐지가문의 가마쿠라 막부창건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승리한 키요하라 키요히라는 친아버지 후지와라 쓰네키요의 성인 후지와라씨를 회복하여 오슈 후지와라씨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오슈(데와국) 후지와라가문은 4대에 걸쳐 100년간 무쓰국과 데와국의 대호족으로 군림하고 분가지만 후에 후지와라 본가의 지위를 얻게된다.

 

 

 

 

시라카와 천왕(72대 1053~1129) : 섭관 가문이자 외척인 후지와라 씨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8세 아들(73대 호리카와 천왕)에게 양위하여 스스로 정무에 관여하는 섭정형식의 원정을 하였고 후지와라 씨족의 섭정은 관백(간바쿠)이라는 관직으로 바뀌게 됐을뿐이었다.
하지만 섭관 가문인 후지와라씨족 내부 혼란과 호리카와 천왕의 요절로 손자인 어린 천왕과 미숙한 섭정인 후지와라 다다자네로 인해 시라카와 법왕은 실권을 장악하여 중하류 귀족과 무가(사무라이)계급을 임용하여 후지와라씨를 견제한다.

 

※원정(院政인세이): 상왕이 어린 천왕에게 양위후 정치에 관여하는 섭정을 원정이라 부른다. 이후 왕족으로 권력을 잡는다는건 천왕이 되어 허수아비가 된다는게 아닌 상왕이 되어 원정을 하여야 권력을 잡는식의 인식이 된다. 외척인 후지와라씨의 섭정과는 다른 상왕의 정치 권력.

 

호리카와 천왕(73대 1079~1107) : 8세에 천왕이 되어 아버지인 시라카와 상왕 허수아비였고 병약하여 29세때 요절.

 

도바 천왕(74대) : 호리카와 천왕의 아들....

 

스토쿠 천왕(75대, 1119~1164 고시라카 천왕의 형): 도바 천왕(74대)의 1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인 도바 천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도바 천왕의 아들이 아닌 후지와라 타마코가 시라카와 법왕과 밀통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들 대접을 받지 못하고 숙부뻘 아들이라 불렀다고 함)
역시 관백이던 후지와라 타타미치의 장녀 키요코와 결혼하였다. 아버지?인 도바 상왕이 후지와라 도쿠코를 총애 1141년 양위 할것을 강요하여 도바 상왕과 후지와라 도쿠코 소생의 아들인 다이히토(고노에 천왕)를 즉위시켜 양위 였지만 사실상 패위되었고 양위된 천왕이 동생이라 원정(인세이)를 하지 못하게 되고 이에 큰 한이 맺힌다.
양위후 스토쿠 천왕은 신인(新院)으로 불리게 된고 신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을 배다른 어머니인 도쿠코의 양자로 들인다. 고노에 천왕이 17세에 요절하자 다음 천왕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고 신인의 아들인 시게히토 친왕이 가장 유력했음에도 도모쿠(비후쿠몬인)의 다른 양자인 모리히토(니조 천왕)가 즉위할때까지 모리히토의 아버지이자 신인(스토쿠 천왕)의 동생인 마사히토 친왕(고시라카와 천왕)이 즉위한다.
※이것은 신인(스토쿠 천왕)이 상왕으로써 원정(인세이)을 할경우 자신들의 입지가 위축될것을 우려한 후지와라 타마코(비후쿠몬인)와 장인이자 관백이던 후지와라 타다미치(사위가 딸이 아닌 후궁인 미나모토씨인 쓰보네를 총애해서)등 후지와라씨의 견제로 신인의 아들은 천왕이 신인은 원정을 할수 없게 된다.

 

호겐의 난
고시라카 천왕파
VS 스토쿠 상왕파의 대립 천왕가문의 권력다툼으로 분열되자 외척이던 후지와라 가문도 섭정과 가문 계승에 대한 권력 다툼으로 천왕파 상황파로 갈리게 되고, 사무라이계급(부시계급)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사무라이가문의 양대산맥인 미나모토(겐지)가문다이라(헤이지)가문도 분열되어 일본의 지배층은 갈라지고 결국 천왕파의 승리로  미나모토가문과 다이라가문은 공신이 되었다.
※호겐의 난은 같은 씨족 대 다른 씨족의 대결이 아닌 현정권과 전정권과의 대립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호겐의 난을 계기로 본격적 사무라이계급의 가문들이 공신이 되어 대두되게 됩니다.

 

1156년(호겐 원년)

7월 2일 도바 법왕이 병사하자 신인이 문병하러 갔지만 대면할수 없었고 이에 분개해야 했다.
     5일 신인(스토쿠 상왕)과 좌부(후지와라 요리나가)가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풍문이 나돔.
     8일 후지와라 타다미치ㆍ요리나가 부자의 영지에서 그들의 모병을 금지한다는 고시라카 천왕의 윤지가

           내려지고,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의 병사들이 셋칸케(섭정가의 저택.섭정=후지와라씨)에 난입하여 저택을 검열함.
       *이러한 조치는 도바 법왕의 측근(타마코, 타다미치)들의 견제 조치.
     9일 이에 위협을 느낀 신인(스토쿠 상왕)은 아들(시게히토 친왕)도 대동하지 않고 처소를 탈출해 교토 동쪽 무네코 내친왕(토바 법왕의 둘째딸로 스토쿠 천왕의 여동생)의 저택에 침입했고 이후 저택을 빠져나와
     10일 신인이 측근인 후지와라 노리나가, 다이라 이에히로, 미나모토 다메요시, 다이라 타다마사등의 무사가 집결했지만 스토오 상왕파의 병력은 열세였다. 
     11일 신인(스토쿠 상왕)이 무사를 집결하자 코시라카 천왕측에선 '풍문이 사실로 드러난것'이라며 무사들을 동원해  신인측이 집결해 있는 시라카와후쿠덴을 공격해 신인은 도망간다.
     13일 도망친 신인은 친동생인 가쿠쇼 법친왕에게 중재를 부탁했지만 거절 당해 옛 암자로 옮겨져 미나모토 시게나리의 감시를 받는다.
      23일 신인은 측근인 후지와라 노리나가와 함께 사누키국(시코쿠서섬의 동북)으로 유배되고 8년뒤인 1164년 유배지에서 4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암살설)
    

 

                
고시라카 천왕(77대, 1127~1192 스토쿠 천왕의 동생)은 호겐의 난 이후 권력을 장악하여 1158년 양위후에도 권력을 유지하였고 외가이던 후지와라 씨족을 약화시키고 사무라이의 권력을 강화시켜 다이라 기요모리가 권력을 잡게된다. 말년에 와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라쿠마 막부를 여는걸 묵인함 이후 일본은 700여년간 무사계급의 지배를 받게됨.

 


헤이지 난  고시라카 상왕파(미나모토씨족) VS 니조 천왕파(다이라씨족)
1159년 고시라카 천왕이 왕위를 니조 천왕에게 물려 주어 귀족,무가(사무라이계급) 등은 고시라카 상왕파와 니조 천왕파로 대립하였고 12월 상왕파(미나모토 요시토모)가 선제공격을 치열한 접전끝에 천왕파(다이라 기요모리)가 승리하여 고시라카 상왕은 유배되고 천왕파를 대표하는 다이라 기요모리가 무가정권(막부의 원형)을 세우고, 오랫동안 후지와라씨족이 독점한 외척의 자리를 대신한다. (외척인 후지와라정권->무가인 다이라정권수립) 
      

 

다이라 마사카도 (903~940) 간토지방의 다이라일족간의 항쟁을 끝마치고 간토지방의 패권을 잡고 스스로 천왕에 올라 교토의 천왕에 맞섯으나 즉위 두달만에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다이라노 사다모리에게 토벌된다.

 


★다이라 기요모리(1118~1181)

 다이라 타다모리의 장남으로 헤이시가문의 수장이 된다. 호겐의 난때 고시라카와 천왕의 신뢰를 얻지만 헤이지 난때는 니조 천왕파로 승리를 얻어 사무라이계급 최초로 태정대신의 자리에 오르고 딸 도쿠코를 다카쿠라 천왕(80대, 1168~1180 고시라카와 천왕의 4남)에 시집보낸다. 


 호겐의 난에서 양모인 이케젠니가 스토쿠 상왕 아들의 유모였기에 난처한 입장이었으나 가문의 결속을 위해 고시라카와 천왕측에 가담하고 공적으로 대재대신이 된다.


     헤이지의 난에서 정권을 장악한후 후지와라 노부요리, 쓰네무네, 코레카타등 반 신세이파를 일소하면서 정치권력을 쌓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나모토 요시토모, 시게나리, 스에자네, 미쓰야스등 미나모토씨족의 유력무사가 멸망하여 무사들중 1인자가 되었고 헤이씨(다이라) 일족은 주요관직을 독점하여 일본 전국에 500여개 장원을 보유하며 경제력은 물론 군사 경찰권을 장악하고 무가정권의 기초를 쌓는다.


      하지만 기요모리(다이라=헤이시 씨족)에 대한 불쾌감을 고시라카와 법왕을 시작으로 천왕가의 원정세력이 느끼게 됐고 점점 기요모리와 대립하게 된다. 1179년 기요모리는 딸을 잃었고 고시라카 법왕은 기요모리 딸의 장원을 몰수한다. 또한 가문의 후계자였던 다이라 시게모리(기요모리의 장남)가 42세에 병사하자 또 고시라카 법왕이 시게모리의 에치젠국을 몰수하고 셋칸케(섭정)가문의 지위도 마쓰도노가가 계승할것임을 명백히 하자.


      이에 두고 볼수 만은 없었던 기요모리는 1179년 11월 14일 후쿠하라(고베시)에서 군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반 헤이시 세력을 모두 해임하고 헤이시측 관리를 임용시킨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고시라카 법왕은 기요모리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11월20일 법왕을 도바도노로 유폐시키고 고시라카와 법왕의 원정은 정지한다.


  후속조치를 다카쿠라 천왕, 다이라 무네모리. 코노에 모토미치등에게 맞겼으나 이들이 미숙했기에 표면에 나서 일문의 결속과 후지와라씨족의 회유에 힘쓰고 1180년 다카쿠라 천왕의 양위로 노리히토 친왕(안토쿠 천왕)이 즉위하여 헤이시의 괴뢰정권을 세운다.       *하지만 법왕의 유폐로 반 헤이시(다이라) 세력이 더 많이 나타난다.

 ●기요모리에 대한 반란
  모치히토 왕(고시라카 법왕의 3남)은 친왕이 될기회가 키요모리에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자 반란을 획책한다. 미나모토 요리마사, 미나모토 나카이에, 아시카가 요시키요, 시모코우메 유키요시등과 고호쿠지(법상종), 온죠지(천태종)들의 사원세력도 계획에 가담하지만 발각되어 후지와라 카게타카, 타다쓰나의 300병사들로 토벌된다. 그러나 친 헤이시였던 엔랴쿠지(천태종)도 이때문에 반헤이시 움직임이 있었 유력 사원세력에 둘러싸인 교토(수도)를 포기하며 일문의 반대를 누르고 1180년 헤이시가문의 거점 오오와다노토마리(고베시)를 바라보는곳으로 천도를 강행한다. 하지만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전국 각지에 번져나가 미나모토 요리토모, 다케다 노부요시가 가이겐지에서, 시나노국에서 기소 요시나가가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기요모리는 미나토모씨의 세력확대를 막기위해 다이라 코레모리를 총대장으로 대군을 간토지방에 파견하지만 후지가와 전투에서 교전하지 않고 패퇴한다. 이를 계기로 온죠지, 고후쿠지의 사원세력이 반란의 움직임을 보였고 온죠지, 엔랴쿠지 세력은 물류의 요충지 비와호수를 점거하고 옛수도인 교토를 공격할정도의 세력으로 반란이 확대된다.


        또한 규슈에서도 반란이 발발해 헤이시 일문과 엔랴쿠지의 친헤이시 세력들도 천도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가 확대되어 기요모리는 교토로 귀환하여  다이라 도도모리, 스케모리, 후지와라 기요쓰나를 파견해 온죠지를 불살라버리고, 오우미국의 야마모토 요시쓰나, 카시와기 요시카네를 격파하고 오우미를 평정한다. 

 

이후 기요모리는 기나이(긴키, 수도권)지방의 최대 반 헤이시 세력이던 고후쿠지 사원세력을 목표로 다이라 시게히라를 총대장으로 하여 대군을 보내 고후쿠지, 도다이지의 사찰을 불태웠다. 이것으로 긴키지방의 반헤이시 움직임은 진정되었으나 '남도소토'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다.
                
       헤이시 씨족의 세력기반인 시고쿠에서도 이요국의 코우노 미치키요ㆍ미치노부 부자가 병사를 모았고 규슈 분고국의 오가타 코레요시, 우스키 코레타카, 사가 코레노리등의 호족이 병사를 모았고 이세지마에서도 반란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또한 간토지방의 사타케가문이 미야모토 요리토모에게 토벌 당하여 상황은 악화되어갔다.
                   이에 기요모리는 다시 교토중심의 체제를 구축하기위해 정비하여 임전체제를 구축하고 에치고국의 죠 스케나가, 무쓰국의 후지와라 히데히라에게 미나모토 요리토모, 다케다 노부요시 토별명을 내렸다.
                   반란을 토벌하기로 결정한 다음날 기요모리는 급사하였고 헤이시(다이라)가문의 가권은 3남 다이라 무네모리에게 맡겨졌다. (1남과 2남은 일찍 죽었기에..)
                  
                 다이라 무네모리가 헤이시의 가문의 가장이 되었으나 전국각지로 번져가는 반란에 대처하지 못해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고 말았고 대기근이란 자연재해도 잇따라기때문에 1183년 쿠리카라토우케 전투에서 헤이시군이 괴멸된후 미야모토 요시나카의 공세에 준비도 하지 못하고 교토가 함락당한다.
                   2년후인 1185년 단노우라 해전에서 패하여 헤이시가문(다이라 씨)은 멸망한다.
                


★미나모토 요리토모


★미나모토 요시나카

 

 

☆나중에 수정해서 이어 쓸게요. 전 한 글에 다 꾸겨 넣는 경향이... 그림도 만들어서 좀 넣고.. 센고쿠시대는  신장의야망이란 게임때문에 호기심에 정리겸 공부겸 찾아서 정리해보았었는데 헤이안시대는 처음이군요.. 역시 동기는 게임입니다. 쇼군2 라이즈오브사무라이... 3개 가문이 나오는데 뭐지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들어봤는데?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습니다. 시대적 배경이 사원세력이 무시못하더군요. 아직 어떤 식으로 정리하는게 쉽게 느껴질지 몰라서 늘어만 보았습니다..

 

 

 

오와리국[:]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 간파쿠[]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혼노지[]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이 되자 후지와라[]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시대를 열었다.

1588년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 수 하였고 관리를 파견하여 모든 토지를 조사하였다.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는 일에만 집중하고 무사가 되거나 다이묘가 되겠다는 의도를 가질 수 없도록 하였다.

또한 무사와 농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강력한 지배력을 확보하였다.

이로 인하여 농업기술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당시 세금은 쌀로 징수 되었기 때문에 많은 물자가 이동하였고

이를 담당하는 상인들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당시 상인으로 유명했던 가문이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되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토지를 몰 수 당한 다이묘나 지방 호족세력의 불만이 높아

해외로 관심을 돌리게 할 목적이 있었고,

상업의 발달로 성공한 이들은 해외무역의 필요성 때문에 전쟁에 찬동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현재 히젠의 가츠라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승전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중국 정벌의 꿈에 부풀게 되었고

중국 정복 이후의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명나라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와가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1597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고전을 거듭하였고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 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이전의 무로마치 막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보아도 권력을 장악하면 막부를 세우고 스스로 쇼군의 자리에 오르는데 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막부를 세우지 않고 껍데기 뿐인 중앙정부의 태정대신자리에 앉았나요? 허울뿐인 교토정부의 고위관직보다 막부의 수장인 쇼군이 더 권위있는 자리일텐데 말입니다.

 

정이대장군은 겐지 집안만이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히데요시나 노부나가는 그럴 건덕지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음. 히데요시야 출신이 그렇다 치고 노부나가도 겐지의 라이벌이었던 헤이지의 분가라고 주장한걸로 알고 있는데....이에야스는 자신이 겐지 집안의 멀디 먼 후손으로 주장해서 된 걸로 알고 있음. 조선 시대 기록을 봐도 히데요시를 평(平, 다이라)수길로, 이에야스를 원(源, 미나모토)가강으로 쓰여있다고 알고 있음
 
★海東天子☆ 11.08.17. 23:47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의 성씨가 [원평등귤(源平藤橘)]의 4성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잡다한 성씨도 나옵니다만, 적어도 이 4대성씨 안에는 들어야 '대성(大姓)'으로 봅니다.
때문에 고니시는 평행장으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평의지로, 히데요시는 평수길- 혹은 '평적(平賊 = 평씨 역적놈)'으로 통칭되죠...ㅋ
 
배고프네 11.08.18. 00:46
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이어받았다는 지딴의 의지로 평수길로 쓴 줄 알았는데
 
배고프네 11.08.18. 00:47
원씨는 겐지 미나모토, 평씨는 다이라 헤이지, 등씨는 후지와라, 근데 귤씨는 뭡니까?
 
나옹 11.08.18. 09:19
귤씨는 타치바나 입니다
 
 
하히해 11.08.17. 23:01
굳이 무가의 최정상인 쇼군보다 허울뿐이지만 '정통성 있는 조정의 중신'인 '태합이나 관백'에 오른건 도요토미 자신의 허영도 약간은 첨가되어있고. 정세적으로도 당시 도요토미가 닛뽄 최강!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아직 기라성같은 다이묘들이 있기도 했고..;;
 
 
★海東天子☆ 11.08.18. 16:23
히데요시인들 쇼군이 되고싶지 않았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겐지]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겐지가 아니면 쇼군이 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끝내 쇼군이 되지 못하죠...ㅋ 쇼군으로의 길이 막히자- 히데요시는 섭관의 직을 독점하던 최고위 귀족인 [5섭가(五攝家)]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입적하여 귀족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미카와 지방영주 출신 마츠다이라씨의 자손인 이에야스는 자신의 선대를 날조하여 겐지의 자손인 '도쿠가와(德川, 혹은 得川)씨'로 조작하여 쇼군의 자리에 오릅니다.
 
 
유문기 11.08.17. 23:56
그게 2가지 설이 있지요. 첫 번째는 다른 분들의 말씀대로 겐지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원숭이의 권력으로 보자면, 겐지의 혈통을 충분히 위조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가 최소한 다이묘의 아들 정도는 되었어야 되었지요. 제 6천마왕의 경우는 그의 아비 노부히데 때부터 본격적으로 오와리 지역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을 했고 이미 저기 주인집인 오다가를 대신해서 정식적인 오다가를 행해했기 때문에 최소한 다이묘의 자손이라고 볼 수 있지요. 때문에 오다가 죽기 1개월 전인 1582년 5월, 천황 뭐 하겠냐고 제시한 직함-태정대신, 정이대장군, 관백- 중에 정이대장군이 들어가 있지요.
 
 
유문기 11.08.18. 00:01
참고로 오다가의 성은 타이라지 결코 겐지가 아닙니다. 즉, 겐지이든 아니든 최소한 무가의 자손이라면 어떻게든 족보를 조작하여서 무가의 우두머리인 정이대장군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손금| 손금 이야기
문경 민봉기 | 조회 51 |추천 0 | 2012.05.24. 15:18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두차례의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게한 철천지 원수지만

일본에선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천하통일을 달성한 위대한 무장이다.

 

1537년 태어났고, 1553년(17살)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1582년(46살) 부터 승승장구를 시작하여 1591년(55살)에 일본을 재패했다.

1592년과 1597년의 두차례의 조선침략에 실패한 후

1599년 62살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손금은 막쥔금에 감정선 한가닥이 살아있는 모습이다.

생명선 안쪽에서 중지 첫째마디까지 올라가는 운명선이 아주 독특한 구성이다.

 

도요토미 자신이 어려서 부터 손금에 아주 관심이 많았는데,
본래 운명선이 중지 둘째마디까지 올라와있는 것에 만족치 못하여
손가락 끝까지 운명선이 타고 올라오도록 칼로 그었다고 한다.

 

손금의 나이에서 31살(우리나라 나이로 32살)은 도요토미가

오다 노부나가로 부터 무장으로 탁월한 능력을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로 보인다.

 

막쥔손금에 있어선 막쥔금이 인생길에 있어 가장 넘기 힘든 장벽으로 작용하는데..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하기 시작한 46살이 막쥔금을 막 넘어선 나이로 추정된다.

 

그 다음의 장벽은 감정선이었을테니 그게 55살..

그때가 전국통일을 이룩한 때이다.

 

운명선이 감정선을 훌쩍 넘어서 손가락까지 올라가고 있으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일본 황족의 뿌리인 하늘 같은 나라 조선을 침범하여 갖은 업보를 쌓았으니..

그가 죽고난 후 처와 자식들의 최후가 비참하였다.

 

예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인물들이 손금을 조금이라도 볼줄 알았다면..

이렇게 예사롭지 못한 인물을 가볍게 여기진 못했을텐데..

 

일국의 군주의 지위에 오른 자가

손금에 관심이 많아 이렇게 손도장까지 남겼다니..

손금..!! 정말 흥미롭다..

 

 

 

 

오다 노부나가 :
당시 소국의 영주로 시작해 자신이 40여세에 사망할때까지 일본의 거의 절반을 정복한 인물입니다. 그 당시 인물로는 대단히 개방적인 인물로, 구시대적인 발상을 배제하고 철저히 현실주의나 실용주의를 내세운 인물입니다.
가문의 출신이나 성분을 보지않고 능력위주로 사람을 발탁했으며, 유통과정을 파악해 당시 각 지역마다 있던 통행세를 내던 관문을 패쇄해 경제유통에 활기를 띠게 했으며, 최첨단 무기였던 철포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외국과의 교역을 위한 항구을 독점해 외국문물을 받아들여, 외국 선교사의 포교및 철포와 화약을 대량 구매했습니다.
거기에 중상주의 정책을 펴, 그당시 전국시대 병력동원이 농민들로 이루어진 농민병으로 농사철에는 전쟁을 못했는데, 돈으로 고용하는 용병을 조직해 병농분리를 처음으로 실현시킨 인물로 이를 통해 일본 제일의 강력한 군주가 되었습니다.
철포를 3부대로 나눠 돌아가며 연속으로 쏘는 전술을 개발해, 당시 일본 최강의 무력을 지녔던 기마군단 타케다씨를 나가시노 전투에서 격파해 노부나가의 이름을 일본전역에 떨쳤습니다.
노부나가 자신도 새로운것을 좋아해, 외국의 철갑옷이나 지구의등을 좋아했고, 포루투칼 선교사에게 기독교에 대해 강의하게 해달라고도 했습니다. 또한 스모나 다도같은 문화적인 교양도 높아 자신의 휘하 장수들에게도 다도같은 문화적인 교양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성격은 상당히 쾌할하고 유쾌하지만 어떤때 너무나도 잔인하여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노부나가에게 다가가지 못하기도 한 수수깨기 인물이죠. 혼간지라는 영주에게 대항하는 민중교도들 4만-6만명을 대량 학살하거나 자신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유명한 절을 불태워 그절에 있던 2만명의 신도와 승려를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이런 잔인한 성격때문인지 훗날 자신의 부하장수인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혼노사에서 포위공격 당해 자결햇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우리에겐 임진왜란을 일으킨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일본에선 상당히 인기좋은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처럼 아무것도 없는 평민으로 노부나가의 변소치기 하인으로 시작해 훗날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인이 된 소위말하는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사람이 상당히 유쾌하며, 친절해서 여러 무장들과 교우관계를 쌓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으며 치밀했고, 노부나가의 기분이나 성격, 생각을 거의 알아 맞추는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점차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내 후에 노부나가가 자랑하는 4명의 장수들중 한명이 되었지요.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지위에 까지 오른건 순전히 그의 재능과 능력, 성실성 때문이겠지요.
히데요시 또한 노부나가와 같이 경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후에 그의 영지 또한 노부나가와 비슷한 정책으로 전국의 금광과 은광, 산림개발지는 히데요시 개인의 영지가 되었지요. 히데요시가 죽기전에 남겨진 금의 양은 엄청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사후 노부나가의 다른 부장들과의 다툼에서 우위을 다지고, 경쟁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을 굴복시켜, 천하인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그 자신이 평민출신이다 보니, 휘하에 믿을만한 부하가 적은것이 흠이었지요.
그는 처음으로 검지라는 일본 전국에 대한 실측량을 개시했으며, 민중들의 봉기를 막기위한 조치로 무기회수령을 발표해 민중들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민중의 확실한 방패막이를 제거해 통치를 원활하게 한 공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늙으면서 빛나던 재기는 사라지고, 망령이 나면서 조선을 침략하라는 미련한 짓거리도 감행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엄청난 원한을 산 인물이지요.
히데요시 사후 천하인의 자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차지하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공격해 죽여버려 화근을 없앤 후 자신의 막부를 창설하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리에겐 잘 알려진 인물로 일본 전국시대는 이 3사람을 최고의 영웅이자 스타로 여겨집니다. 3사람은 가장 많은 활약을 보였으며, 그시대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이기 때문이죠.
특히 이에야스는 이들중 최고 오래살면서 기어코 패권을 차지한 승자입니다. 그는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입니다. 앞의 두 인물처럼 개방적인 사고는 없는 사람이죠.
왜냐하면 그의 가문이 옛날부터 내려온 명문가문의 한 일파이기 때문입니다. (아닐수도 잇습니다.)
그는 참을성이 대단한 인물로 노부나가와 동맹한 후에는 그를 따라 여러전투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며 노부나가를 지원했고, 노부나가가 의심을 하여 자신의 큰아들을 자결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을정도로 인내심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인내심으로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히데요시에게도 허리를 굽혔고, 히데요시 사후에는 자신에게 대항할 정도의 무장이 없자 본색을 드러내 히데요시가문을 멸망시킬정도로 교활한 면도 갖고 있는 노련한 무장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런 교활한 점을 비꼬아 '너구리영감'이라 불리기도 했죠.
그는 뛰어난 야전사령관이자 행정 정치가이며, 교활한 모사꾼의 재능까지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금에 대한 야욕을 가진 인물로 포루투칼에서 배운 채광기술로 막대한 금을 축재하기도 했습니다.
어찌나 많이 축재했는지 그 창고 마루가 내려앉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수십조 일거라고 합니다.
그는 특히 무가정치를 갈망했기에 천황을 대신해 자신들의 무사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인물입니다.

제가 아는건 여기까지 이고,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역사책이나 일본사등을 읽어보시는게 좋을것입니다.
그리고 비교하자면 그들의 군사적 재능이나 경제관념, 정치이념등을 잘 살펴보시면 다른점이 많아 아주 재미있으실 것입니다.

 

 

오부노부 나가: 일본의 전국시대때 거의 통일을 할뻔했죠 거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부하의 배신으로 절에 불을 타고 자살함 귀무자2에서 나쁜놈 대빵이 오부노부나 가로 나옴

일명 마왕으로 부르며 전국시대의 영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부노부나가에 의해

발탁된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명 원숭이 오부노부나가 밑에 있다가 오부노부나가 가 배신으로

갑자기 죽자 정권을 차지함 한마디로 밥은 오부노부나가 가 했는데 먹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먹는 꼴이됨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 임진왜란이 거의 소강상태에 들때

쯤 죽음 일본 만화책을 봐도 책을 봐도 거의 평가는 안좋음 개인적인 생각에 오부노부

나가 가 만들어놓은 뱝을 먹기만 해서 그럴것 같음 한마디로 운이 좋음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명 대가만성형

도쿠카와 막부를 연 주인공 전국시대 부터 다이묘로서 활약 오부노부나가 사후 제2인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밀려남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과의 싸움에서 승리

에도 막부를 열음 임진왜란때 참가하지 않음 우리나라한테 통신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함 오부노부나가 시대 와 도요토미 시대 까지 거의 세력으로 2인자로 지내다

드디어 일인지가 됨 오랜기다림에 승리함

오부노부나가는 전국시대를 거의 통일했어나 암살당했고 토요토미 정권은 시기가

짧았고 도쿠가와 정권은 그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까지 쭉이어짐

마지막에 웃으사람은 세사람중 도쿠가와 이에야스.



참고 게임중 사무라이 스피리트에 나오는 핫토리한조는 도쿠가외 이에야스 밑에 있던

닌자두목 실존 인물 (어떤 사람들은 이가닌자 두목들을 핫토리한조라고 부른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핫토리한조가 실명이라고 하기도 하고 의견이 분분함)
어째든 실존일물임

도쿠가와의 저주받은검 무라마사

명검이라고 알려져있으며 도쿠가와도 이검에 다치고 아들또한 이검으로 자결해서

토쿠가와가의 저주받은 검이라고도 함

참고로 배가본드에 나오는 미야모토 무사시는 세끼하라 전투에 어린나이에 참가했으니까

도쿠가와 말이나 도쿠가와 아들 시기쯤 날림

 

 

 

1.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

- 1592년

 

2.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유

국내 -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도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3.임진왜란에 큰 공을세운사람

 

통제사 이순신:당항포 해전승리,옥포해전 승리,한산도 해전 승리,명량해전에서

 

승리,부산해전으로 조선의 제해권 탈환,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집

 

니다. 당항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도 다카도라와 싸워 이겼으며 적 수천을

 

멸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명량해전을 좋아합니다. 명량해전은

 

칠천량 해전 후 조선함대 12대 밖에 남지 않았고, 마침 왜선 336척이

 

쳐들어 왔었는데요...거기서 이순신장군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치고

 

적선을 마비시켜서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도원수 권율: 권율장군은 이순신장군의 배후에서 도와 줬습니다.그리고 대표적으로

 

행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죠.3만의 왜군을 맞아서 이긴 전투 입니다

 

 

後 통제사 원균:이 사람은 활약은 했다고 볼수 없지만 이순신장군을 도왔으므로 씁니다.

 

이 사람은 이순신장군과 연합함대를 이루어 당항포 해전 등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칠천도에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의해 죽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 삼도수군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장군이 맡게 됩니다.

 

전라병사 김시민:이 분은 3800명의 조선군으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30000명의 적을 맞아서 싸웠습니다. 6일동안 치열하게 싸웠고

 

의병의 지원으로 왜군을 무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투로 의해

 

전사하게 됩니다.

 

 

의병장 곽재우,사명대사:이분들은 왜군이 세워둔 표지판을 거꾸로 해놓아서 교란작전을

 

펼쳤는데요..그 작전에서 조선군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2) 이순신 장군의 활약

전쟁에 대한 대비 :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해둠.

 

옥포 해전

①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승리

 

한산도 대첩

①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물리침.

②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

 

노량 해전

①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② 이순신 장군 전사

 

수군 승리의 의의 : 해산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끊음

 

임진왜란의 3대첩

☆ 진주 대첩 :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거둔 승리.

☆ 행주 대첩 : 권율 장군이 행주 산성에서 거둔 승리.

☆ 한산도 대첩 :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한 해전.

 

(3) 의병들의 활동

① 유학자와 농민, 승려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과 승병이 되어 싸웠다.

② 의병 : 전문부 (길주), 곽재우(의령), 조헌(금산), 김천일(나주) 등이 활약하였다.

③ 승병 : 서산대사(묘향산), 사명대사(금강산), 영규대서(금산) 등이 활약하였다.

 

 

         병자호란과 북벌정책의 배경.

 

시대 상황

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힘을 쏟음.

②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르 세움.

③ (후금이)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꿈.

④ 청은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⑤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

 

경과 및 결과

①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의 한양을 침략함.

②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대항함.

③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북벌 정책과 북학

① 봉림 대궁이 효종으로 왕위에 오름.

②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정책을 추진함.

③ 효종은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함.

④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여러준비를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함.

⑤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이 대두됨.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① 1627년 :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함.(정묘호란)

② 1632년 : 후금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거절함.

③ 1636년 : (후금이)청으로 이름을 바꾼후 조선을 침략.(병자호란)

④ 1636년 : 12월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

⑤ 1637년 :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이 포로로 잡힘.

⑥ 1637년 : 1월 30일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음.

 

병자호란의 발달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후금을 세움

*나라 이름을 '청' 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조선이 여진족의 요구를 거절하자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함

 

병자호란의 경과

*청군이 한양으로 침입해 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함

*결국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북벌론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정책을 추진함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함

 

북학론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병자호란의 원인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

 

병자호란의 전개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한편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였습니다.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완전 전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때 대신들은 끝까지 버티자는 주전파와 청군과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주화파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합니다.

 

항복을 결심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온뒤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세번절을 합니다(삼전도의 치욕)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등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도 끌고 갔습니다. 끌고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등 문제가 심각 하였습니다.

또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복구도 다 하기전에 난이 발생한터라 국가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더더욱 피폐헤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습니다.

이 호란후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때 까지 계속됩니다.

  병자호란은 막지 못하고 패한 전쟁 입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으며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청나라에게 복속을 당했으니 막지 못한 전쟁이죠.

막을수 없었던 이유는 이괄의난등으로 인해 북방방어가 허술해져 있었고 인조와 서인들이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에 빠져있었던 까닭입니다.

 

병자호란(1636)

1.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

- 1592년

 

2.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유

국내 -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도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3.임진왜란에 큰 공을세운사람

 

통제사 이순신:당항포 해전승리,옥포해전 승리,한산도 해전 승리,명량해전에서

 

승리,부산해전으로 조선의 제해권 탈환,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집

 

니다. 당항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도 다카도라와 싸워 이겼으며 적 수천을

 

멸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명량해전을 좋아합니다. 명량해전은

 

칠천량 해전 후 조선함대 12대 밖에 남지 않았고, 마침 왜선 336척이

 

쳐들어 왔었는데요...거기서 이순신장군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치고

 

적선을 마비시켜서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도원수 권율: 권율장군은 이순신장군의 배후에서 도와 줬습니다.그리고 대표적으로

 

행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죠.3만의 왜군을 맞아서 이긴 전투 입니다

 

 

後 통제사 원균:이 사람은 활약은 했다고 볼수 없지만 이순신장군을 도왔으므로 씁니다.

 

이 사람은 이순신장군과 연합함대를 이루어 당항포 해전 등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칠천도에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의해 죽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 삼도수군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장군이 맡게 됩니다.

 

전라병사 김시민:이 분은 3800명의 조선군으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30000명의 적을 맞아서 싸웠습니다. 6일동안 치열하게 싸웠고

 

의병의 지원으로 왜군을 무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투로 의해

 

전사하게 됩니다.

 

 

의병장 곽재우,사명대사:이분들은 왜군이 세워둔 표지판을 거꾸로 해놓아서 교란작전을

 

펼쳤는데요..그 작전에서 조선군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2) 이순신 장군의 활약

전쟁에 대한 대비 :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해둠.

 

옥포 해전

①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승리

 

한산도 대첩

①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물리침.

②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

 

노량 해전

①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② 이순신 장군 전사

 

수군 승리의 의의 : 해산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끊음

 

임진왜란의 3대첩

☆ 진주 대첩 :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거둔 승리.

☆ 행주 대첩 : 권율 장군이 행주 산성에서 거둔 승리.

☆ 한산도 대첩 :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한 해전.

 

(3) 의병들의 활동

① 유학자와 농민, 승려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과 승병이 되어 싸웠다.

② 의병 : 전문부 (길주), 곽재우(의령), 조헌(금산), 김천일(나주) 등이 활약하였다.

③ 승병 : 서산대사(묘향산), 사명대사(금강산), 영규대서(금산) 등이 활약하였다.

 

 

         병자호란과 북벌정책의 배경.

 

시대 상황

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힘을 쏟음.

②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르 세움.

③ (후금이)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꿈.

④ 청은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⑤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

 

경과 및 결과

①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의 한양을 침략함.

②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대항함.

③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북벌 정책과 북학

① 봉림 대궁이 효종으로 왕위에 오름.

②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정책을 추진함.

③ 효종은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함.

④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여러준비를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함.

⑤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이 대두됨.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① 1627년 :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함.(정묘호란)

② 1632년 : 후금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거절함.

③ 1636년 : (후금이)청으로 이름을 바꾼후 조선을 침략.(병자호란)

④ 1636년 : 12월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

⑤ 1637년 :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이 포로로 잡힘.

⑥ 1637년 : 1월 30일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음.

 

병자호란의 발달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후금을 세움

*나라 이름을 '청' 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조선이 여진족의 요구를 거절하자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함

 

병자호란의 경과

*청군이 한양으로 침입해 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함

*결국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북벌론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정책을 추진함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함

 

북학론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병자호란의 원인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

 

병자호란의 전개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한편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였습니다.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완전 전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때 대신들은 끝까지 버티자는 주전파와 청군과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주화파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합니다.

 

항복을 결심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온뒤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세번절을 합니다(삼전도의 치욕)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등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도 끌고 갔습니다. 끌고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등 문제가 심각 하였습니다.

또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복구도 다 하기전에 난이 발생한터라 국가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더더욱 피폐헤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습니다.

이 호란후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때 까지 계속됩니다.

  병자호란은 막지 못하고 패한 전쟁 입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으며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청나라에게 복속을 당했으니 막지 못한 전쟁이죠.

막을수 없었던 이유는 이괄의난등으로 인해 북방방어가 허술해져 있었고 인조와 서인들이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에 빠져있었던 까닭입니다.

 

병자호란(1636)

1.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

- 1592년

 

2.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유

국내 -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다. 특히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무시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도 조세 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일본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 여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3.임진왜란에 큰 공을세운사람

 

통제사 이순신:당항포 해전승리,옥포해전 승리,한산도 해전 승리,명량해전에서

 

승리,부산해전으로 조선의 제해권 탈환,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집

 

니다. 당항포 해전에서는 적장 도도 다카도라와 싸워 이겼으며 적 수천을

 

멸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명량해전을 좋아합니다. 명량해전은

 

칠천량 해전 후 조선함대 12대 밖에 남지 않았고, 마침 왜선 336척이

 

쳐들어 왔었는데요...거기서 이순신장군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치고

 

적선을 마비시켜서 공격해서 이겼습니다.

 

 

도원수 권율: 권율장군은 이순신장군의 배후에서 도와 줬습니다.그리고 대표적으로

 

행주 대첩에서 승리를 거두었죠.3만의 왜군을 맞아서 이긴 전투 입니다

 

 

後 통제사 원균:이 사람은 활약은 했다고 볼수 없지만 이순신장군을 도왔으므로 씁니다.

 

이 사람은 이순신장군과 연합함대를 이루어 당항포 해전 등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그도 결국 칠천도에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의해 죽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조선 삼도수군통제사는 다시

 

이순신장군이 맡게 됩니다.

 

전라병사 김시민:이 분은 3800명의 조선군으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비롯한

 

30000명의 적을 맞아서 싸웠습니다. 6일동안 치열하게 싸웠고

 

의병의 지원으로 왜군을 무찌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전투로 의해

 

전사하게 됩니다.

 

 

의병장 곽재우,사명대사:이분들은 왜군이 세워둔 표지판을 거꾸로 해놓아서 교란작전을

 

펼쳤는데요..그 작전에서 조선군은 큰 승리를 거둡니다.

 

 

2) 이순신 장군의 활약

전쟁에 대한 대비 :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해둠.

 

옥포 해전

①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승리

 

한산도 대첩

①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 전법으로 크게 물리침.

②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

 

노량 해전

①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② 이순신 장군 전사

 

수군 승리의 의의 : 해산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보급로를 끊음

 

임진왜란의 3대첩

☆ 진주 대첩 :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에서 거둔 승리.

☆ 행주 대첩 : 권율 장군이 행주 산성에서 거둔 승리.

☆ 한산도 대첩 :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격파한 해전.

 

(3) 의병들의 활동

① 유학자와 농민, 승려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의병과 승병이 되어 싸웠다.

② 의병 : 전문부 (길주), 곽재우(의령), 조헌(금산), 김천일(나주) 등이 활약하였다.

③ 승병 : 서산대사(묘향산), 사명대사(금강산), 영규대서(금산) 등이 활약하였다.

 

 

         병자호란과 북벌정책의 배경.

 

시대 상황

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힘을 쏟음.

②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르 세움.

③ (후금이)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꿈.

④ 청은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⑤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음.

 

경과 및 결과

①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의 한양을 침략함.

②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대항함.

③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북벌 정책과 북학

① 봉림 대궁이 효종으로 왕위에 오름.

②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정책을 추진함.

③ 효종은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함.

④ 군사를 훈련시키는 등 여러준비를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함.

⑤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이 대두됨.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① 1627년 : 후금이 형제의 관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함.(정묘호란)

② 1632년 : 후금이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거절함.

③ 1636년 : (후금이)청으로 이름을 바꾼후 조선을 침략.(병자호란)

④ 1636년 : 12월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

⑤ 1637년 : 1월에 강화도가 함락되고, 강화도로 피신했던 왕이 포로로 잡힘.

⑥ 1637년 : 1월 30일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음.

 

병자호란의 발달

*만주 지방의 여진족이 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후금을 세움

*나라 이름을 '청' 으로 바꾸고 명나라를 멸망 시키고 나서 조선에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함

*조선이 여진족의 요구를 거절하자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함

 

병자호란의 경과

*청군이 한양으로 침입해 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나라에 대항함

*결국 청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됨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대한 두 가지 입장

북벌론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공격하자는 북벌정책을 추진함

*군대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사를 훈련시켰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함

 

북학론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

 

병자호란의 원인

 

인조는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후금을 멸시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때 명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고, 후금은 중국 대부분의 영토를 차치하고 세력을 키워나가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때 집권세력이 서인들이었는데 서인들은 끝까지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쳤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군신의 맹약을 하자고 독촉합니다. 그러나 조선조정은 몇차례에 걸친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청태종은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 옵니다.

 

병자호란의 전개

 

청이 침입하자 조정은 극도이 혼란에 휩싸입니다. 침입 14일 만에 청군이 개성에 다다르자 도성내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기 시작합니다.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강화도로 피난을 가고, 인조 자신도 그날밤 도성을 빠져 나가려고했으나 벌써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길을 봉쇄하였다는 보고를 듣자 이를 포기하였습니다.

인조는 대책을 논의한끝에 세자와 백관들을 대리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합니다.

이날 새벽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떠나려했지만 폭설이 내려 포기합니다.

남한산성에는 약 50일 정도 버틸수있는 식량이 있었습니다.

한편 청태종과 청군은 남한산성에 당도했고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에 포진하였습니다. 별다른 싸움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완전 전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때 대신들은 끝까지 버티자는 주전파와 청군과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주화파쪽으로 의견이 모아지자 인조는 항복을 결심합니다.

 

항복을 결심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온뒤 한강동편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뒤 세번절을 합니다(삼전도의 치욕)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봉림대군,인평대군등을 인질로 잡아갔으며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도 끌고 갔습니다. 끌고간 이유는 돈을 받고 여자들을 되돌려 주기 위함이었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은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하거나 쫓겨나는등 문제가 심각 하였습니다.

또 임진왜란때 입은 피해를 복구도 다 하기전에 난이 발생한터라 국가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더더욱 피폐헤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습니다.

이 호란후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때 까지 계속됩니다.

  병자호란은 막지 못하고 패한 전쟁 입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했으며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갔고 청나라에게 복속을 당했으니 막지 못한 전쟁이죠.

막을수 없었던 이유는 이괄의난등으로 인해 북방방어가 허술해져 있었고 인조와 서인들이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에 빠져있었던 까닭입니다.

 

[편집]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멀리 바다 건너 섬에 웅거해 있으면서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요긴한 것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뒤 인원을 300명으로 늘렸으며, 그런 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가 더 극성스럽게 해적질을 했던 것이다. 왜구는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불편해 공식 무역의 길을 트려고 노력하면서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편집] 제1차 침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쓰시마 도주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5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하게 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서울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숱한 싸움을 겪었던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상태에서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없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련한 대책은 하나같이 효과적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또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해버리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무력한 조정과 관군을 대신하여 1592년 6월 이후 조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은 충의의 뜻을 강하게 지닌 선비와 전직 관료,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농민과 상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사기가 높았고 향토지리에 밝은 이점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비상대책으로 또 하나의 조정을 만들었는데 왕세자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보급로,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려놓았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한산도 등지에서 싸우는 족족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육지에서는 김시민이 진주 대첩에서 분전하여 큰 승리를 거뒀고, 권율도 행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은 점점 조선군에 밀리게 되었다.

한편, 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서울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편집] 제2차 침략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고 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화의에 결사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군사력을 강화해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가 왜성을 쌓고 대기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교섭을 하려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내줄 것, 감합무역을 부활할 것 등을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은 결렬되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지방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을 집중 공략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물리쳤고 일본 육군은 전라도 각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코나 귀를 베어 일본에 보냈고,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나 곧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북상을 저지하였고 잠시 파직 되었던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극심한 군량 부족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대파하였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7년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편집]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편집] 조선에 끼친 영향
거듭된 전쟁으로 인한 농지의 황폐화, 국가질서의 문란과 더불어 관리와 토호들의 부정행위는 민중과 국가 재정을 모두 궁핍하게 만들었다. 전후 대책으로 실시된 군비확장과 시설복구에 지출이 계속 증가하자, 대대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2번에 걸쳐 청나라가 침범해 왔기 때문에 농지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까지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농민에게는 과대한 부담이 강요되어 농민의 농지 이탈 현상이 증가하였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관리들의 부정을 방지하고자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전쟁 중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던 문서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공명첩이 발행되면서 사회절서 유지의 근간인 신분제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궁궐과 서원 등 중요한 건축물과 많은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거나 약탈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전쟁 중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들을 숭배하는 풍조가 고양된 반면, 일본군에 의한 피해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을 더욱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깊어졌다.

 

[편집] 당시 사용된 무기

[편집] 조선(한국)

  • 각궁
  • 대장군전
  • 비격진천뢰
  • 대장군포
  • 신기전
  • 장병겸
  • 총통 -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세총통, 승자총통
  • 편곤
  • 화차
  • 환도

[편집]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 가마야리
  • 나이카마
  • 시케토우 유미
  • 시호다케 유미
  • 일본도
  • 철포(조총)

[편집] 양국 전함 비교

[편집] 조선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 거북선
  • 판옥선

[편집]

  • 아타케부네
  • 세키부네
  • 고바야

[편집] 주요 인물

[편집] 조선 (한국)

  • 강항
  • 고경명
  • 고인후
  • 고종후
  • 곽재우
  • 곽준
  • 광해군
  • 권율
  • 권응수
  • 권준
  • 김덕령
  • 김면
  • 김명원
  • 김성일
  • 김시민
  • 김억추
  • 김여물
  • 김완
  • 김응남
  • 김응서
  • 김응함
  • 김제갑
  • 김천일
  • 김충선
  • 나대용
  • 논개
  • 민정붕
  • 박진
  • 박홍
  • 배설
  • 배흥립
  • 백광언
  • 백사림
  • 변이중
  • 사명대사
  • 서산대사
  • 서예원
  • 선조
  • 송상현
  • 송유진
  • 송희립
  • 신각
  • 신립
  • 신점
  • 안위
  • 양대박
  • 여여문
  • 오억량
  • 우치적
  • 원균
  • 유극량
  • 유성룡
  • 유숭인
  • 윤두수
  • 이각
  • 이경록
  • 이덕형
  • 이몽학
  • 이순신
  • 이억기
  • 이영남
  • 이운룡
  • 이원익
  • 이일
  • 이장손
  • 이정암
  • 이항복
  • 이헌국
  • 임해군
  • 정걸
  • 정기룡
  • 정문부
  • 정발
  • 정운
  • 정인홍
  • 정평구
  • 정철
  • 정탁
  • 진대유
  • 조헌
  • 조종도
  • 최경회
  • 최호
  • 한호
  • 한응인
  • 허준
  • 황윤길
  • 황진

[편집] 왜 (일본)

  • 가토 기요마사
  • 가토 미쓰야스
  • 가토 요시아키
  • 게야무라 로쿠스케
  • 고니시 유키나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구로다 나가마사
  • 구로다 조스이
  • 구루시마 미치유키
  • 구루시마 미치후사
  • 구키 요시타카
  • 깃카와 히로이에
  • 나베지마 나오시게
  • 다치바나 무네시게
  • 다치바나 야스히로
  • 다테 마사무네
  • 도도 다카토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카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루이스 프로이스
  • 마시타 나가모리
  • 마에노 나가야스
  • 모리 가쓰노부
  • 모리 데루모토
  • 소 요시토시
  • 시마즈 요시히로
  • 아리마 하루노부
  • 아사노 요시나가
  • 안코쿠지 에케이
  • 야나가와 노리노부
  • 오타니 요시쓰구
  • 오토모 요시무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우에스기 가게카츠
  • 우키타 히데이에
  • 이시다 미쓰나리
  • 이코마 지카마사
  • 이토 스케타카
  • 죠소카베 모토치카
  • 하치스카 이에마사
  • 호소카와 다다오키
  • 후쿠시마 마사노리

[편집] 명 (중국)

  • 동일원
  • 두사충
  • 등자룡
  • 마귀
  • 만력제
  • 만세덕
  • 사대수
  • 송응창
  • 심유경
  • 양소훈
  • 양방형
  • 양원
  • 양호
  • 오유충
  • 오종도
  • 유정
  • 이령
  • 이여송
  • 이종성
  • 임세록
  • 조승훈
  • 진린
  • 진유격
  • 천만리
  • 팽신고
  • 황응양

 

막부 [ 幕府 ] 사무라이가 지배한 봉건 사회

글자크기
요약
원래는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장군의 집무실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사무라이 정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참고 이미지

날씨가 더우니 점점 긴 머리가 귀찮아지기 시작했어. 목 뒤에 닿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싫어서 올려 묶다보니 점점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버렸지 뭐야. 학교에 갔는데, 친구들이 모두 난리가 났어. 나더러 사무라이 같대. 나는 어려서 칼싸움도 한 번 안하고 컸는데, 사무라이라니……. 자기들은 뚱뚱이 스모 선수 같으면서. 그런데 사무라이는 일본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한 사람들일까?

가마쿠라 막부 - 사무라이들의 봉건 제도1)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
헤이안 시대 말기에 본격적으로 사무라이들이 등장했어. 이 중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가장 유명한 사무라이 가문들이야. 둘 중에서 다이라 가문이 먼저 권력을 잡으면서 미나모토는 가마쿠라로 귀양2)을 갔어. 이곳에서 미나모토는 집을 짓고, 복수를 준비했어. 동생 덕분에 복수에 성공한 후에는 자신을 도와 준 동생마저 죽이고, 천황을 협박하여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빼앗아왔어.

이제 천황은 존재하지만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천황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미나모토가 최고의 통치자인 ‘쇼군3)’이 된 거야. 지방 세력에게 땅을 주고, 자신이 천황과 지방 세력의 보호자가 되어 정치를 했지. 이런 관계를 바로 봉건 제도라고 해. 천황의 자리가 욕심났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 뻔하니 천황이 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천황을 이용해서 권력을 유지한 거야. 미나모토가 만든 이런 정치를 막부 정치라고 불러.

가마쿠라 막부의 위기
사람의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나 봐. 미나모토가 어느날 갑자기 죽으면서 쇼군이 된 그의 아들은 아내인 호조 마사코의 친정 식구들을 끌어들여 정치를 했어. 결국 호조 마사코의 친척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어. 가마쿠라 막부를 만든 건 미나모토 가문이었지만, 사실상 호조 가문의 세상이 된 거지. 가마쿠라 막부에 위기가 찾아온 건 두 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의 침입이었어.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태풍이 불어 일본이 승리했지만, 몽골에게 얻은 땅이 없으니 싸움에 참여한 신하들에게 나누어 줄 땅도 없어 전쟁에서 희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을 해 줄 수 없었어. 그러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지. 반란이 심해지면서 호조 가문은 멸망하였고 1333년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졌어.

참고 이미지

5대 쇼군인 쓰나요시는 어진 성품과 명석한 두뇌로 훌륭한 정치를 폈대.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이
일찍 죽고 후사4)가 없는 거야. 전생에 피를 많이 봐서 그렇다는 점쟁이 말에 따라 죄를 씻기 위해
‘살생 금지령’을 내렸지. 특히 개띠 해에 태어난 그는 개를 보살피기 위해 세금을 더 걷고,
불공까지 들였어. 이 황당한 법은 23년이나 계속되다 쓰나요시의 몰락을 가져왔어.

읽을 거리호조 마사코가 누구예요?

“내 남자는 내가 고른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 쓰고 집을 뛰쳐나와 미나모토 집안의 요리이에와 결혼했어. 다이라 가문이 망하고 미나모토 집안이 권력을 잡으면서 아버지도 내 편이 되어 주셨지. 쇼군이 된 남편이 죽은 후 난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어. 그사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난 이미 많이 늙었지만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어. 사무라이들을 모아 놓고 무사 정신을 강조하고 충성을 다짐받았지. 세상은 다시 호조 가문의 것이 되었어. 사람들은 나를 남자보다 강한 여자라고 부르지.”

무로마치 막부 - 새로운 무사 정권의 수립

무로마치 막부의 성립
가마쿠라 막부 후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고다이고 천황을 내세워 반란에 성공한 사람은 다카우지였어. 한때 두 명의 천황과 두 개의 정부가 동시에 나타나 남·북조로 갈라지기도 했지만 다카우지가 통일하면서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가 240년 간 이어졌어.

혼란 속에도 계속되는 발전
가마쿠라 막부에 비해서 무로마치 막부는 세력이 약한 편이었어. 각지에서 ‘다이묘5)’라고 부르는 영주들이 새롭게 생겨나면서 혼란이 심해졌지. 충성을 바치는 무사 정신은 다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이익에 따라 배신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어.

그런데, 참 신기하지?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세상은 점점 발전해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야. 사람들은 혼란한 세상 속에서 정신적으로 위안을 받기 위해 불교에 의지하면서 불교를 발전시켰어. ‘나무아미타불’이나, ‘남묘호렌게쿄’만 외워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파가 유행하면서 누구나 쉽게 불교를 믿을 수 있게 되었어.

농업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어. 이 시기에 들어와 벼와 보리를 한곳에서 연이어 재배하는 2모작이 시작되었고, 무기와 물자를 팔면서 상업도 발전했지. 1543년 포르투갈 배가 일본에 온 것을 계기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그때 처음으로 조총6)크리스트교가 일본에 소개되었어. 특히 조총은 혼란하던 이 시대 다이묘들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어. 이후에는 일본 내에서도 조총을 생산하는 단계까지 발전하였고,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지.

통일의 새로운 기운
혼란 속에서도 조총과 직업 군인을 만들고, 크리스트교를 보호하며 외국과 지속적인 교류를 했던 인물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야. 천하 통일을 꿈꾸던 그는 통일을 눈앞에 두고 배신을 당했어. 그후 부하인 도요토미가 1590년 드디어 천하 통일을 이루었지만,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았어. 다이묘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어야 했고, 직업 군인에게는 일거리와 월급을, 상인에게는 새로운 교역국을 만들어 주어야 했거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을 상대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는 승리하지 못하고 결국 병으로 죽었어.

참고 이미지

닌자(忍者)는 탐정, 첩자, 자객, 도둑 등으로 활동하는 사람이야. 은신·암살·교란·추리의 달인으로
자신을 숨기기 위해 얼굴에 가면이나 복면을 쓰고 다니지. 쇼토쿠 태자 시절에 큰 활약을 했고,
표창·독침·마취제 등을 능숙하게 사용하며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을 바쳤어. 여자 닌자는 쿠노이치라고 해.

참고 이미지

일본인들은 다른 높이에서 적들을 공격하기 위해 여러 층으로 된 성을 쌓았어.

더 알아보기오다 노부나가의 마부
참고 이미지

오다 노부나가는 성격이 얼마나 괴팍했는지 차를 마시다가 입맛에 맞지 않으면 차를 만든 부하를 단칼에 죽여 버렸어. 그런데 말을 청소하는 시종이 차 시중을 맡으면서 차가 입맛에 꼭 맞는 거야. 나중에 안 결과 시종이 먼저 맛을 봐서 온도와 맛을 맞추어낸다는 걸 알았지. 처음엔 ‘감히 내 찻잔에 입을 대다니!’라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노부나가의 차에 누가 독약이라도 넣었을까봐 그랬다는 말을 듣고 결국 신임하게 되었대. 그 시종이 바로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까지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야. 일본을 통일하고,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바로 그 도요토미 말이야.

에도 막부 - 천하 통일 시대

통일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오다 노부나가, 통일을 이룩한 사람은 도요토미였지만, 통일 후 정작 쇼군이 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야. 그는 에도(오늘날의 도쿄)에 막부를 세웠는데, 이후 260년 간을 에도 시대라고 해.

강력한 막부와 무사 중심 신분 사회
에도 막부는 전국의 많은 땅을 자신의 친척이나 자신에게 협력하는 다이묘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어. 지방 군사력을 약화시키려고 성을 무너뜨리고, 다이묘의 아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고 있었어. 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다이묘들은 2년에 한 번씩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번갈아가며 왔다갔다 해야 했지. ‘산킨고타이’라 부르는 이 제도로 사회는 훨씬 안정되었어.

그런데 사무라이들은 할 일이 없어져 버렸어. 그래서 성리학을 도입해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신분 질서를 만들게 되었어. 사무라이는 칼을 차고 다니며, 즉결 심판권을 가졌어. 농민들은 사무라이에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게 되었지. 사농공상(무사-농민-수공업자-상인)의 신분제는 이렇게 만들어졌어.

일본 서민 문화의 발달과 쇄국 정책
전쟁이 없이 편안한 세월이 계속되자 황무지 개간, 농기구 및 품종 개량, 작물의 다양화, 모내기법의 등장으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어. 또 대량으로 물건이 만들어지고 곳곳에 시장이 세워졌지. 상업이 발달하면서 시장에서 물건을 편리하게 교류하기 위해 화폐가 널리 사용되었어. 시장에는 ‘조닌’이라는 상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만들어 나갔어. 조닌은 자녀들을 서당과 비슷한 ‘데라코야’라는 학교에서 공부하게 했지. 그리고 읽기·쓰기와 숫자 계산을 위한 주판을 가르쳤어. 또 당시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가부키’라는 전통 연극이 유행했는데, 중국의 경극처럼 여자는 출연할 수 없었어.

외국과의 교류도 활발해졌어. 다양한 문물과 함께 크리스트교가 확산되자 막부는 크리스트교를 금지시켰어. 혹시 크리스트 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서 그랬대. 그래서 나가사키를 포함해서 4개의 항구만 개항한다는 쇄국 정책을 실시했어. 그런데 여기에는 다이묘의 무역을 금지하고, 막부가 혼자만 돈을 벌겠다는 욕심이 숨겨져 있었어.

참고 이미지

더 알아보기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기념물 귀무덤, 코무덤?
참고 이미지

일본의 천 년 수도 교토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켰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야. 그런데 여기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우리 조상들의 코를 베어다가 묻어 놓은 코무덤과 귀무덤이 있어.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으로 바뀌었대. 도요토미는 귀와 코를 베어오는 일본군에게 영수증까지 만들어줬어. 전라도에서는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속담과 ‘애비’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어. ‘애비’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위험한 물건을 만지지 못하도록 겁줄 때 사용하는 말로 ‘이비(耳鼻, 귀와 코)’가 말이 변한 거야.

전국 시대 일본의 3대 영웅을 만나 보자!

영웅은 혼란한 시기에 나타난대. 일본에서도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무로마치 막부 후기의 전국 시대를 수습하고 통일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대 영웅이 등장했어. 이 세 사람은 성격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 오늘날에도 많이들 비교하고 있어. 어떤 사람들은 오다가 떡가루를 찧고, 도요토미가 반죽한, ‘천하’라는 떡을 도쿠가와가 앉은 채로 먹었다고 표현하기도 해. 그리고 에도 시대에 유행한 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비교하고 있지.

참고 이미지

이름

생몰 연대
(셋 다 성격대로
살다가 죽음)

별명

성격

1534~1582년
48세에 부하인
아케치의
반란으로 죽음

풍운아,
바보

“난 어릴 때부터 예측불가였어. 무슨 뜻이냐고? 항상 내 멋대로 했다는 말이지. 하지만 전투에서는 늘 순간적인 판단력으로 적을 제압했지.

의심이 조금 많고, 성격이 까칠한 편이라 몇백 명의 스님들을 몰살시키기도 했고, 친척과 아들까지도 할복하게 했어. 하지만 통일을 눈 앞에 둔 나를 죽게 만들다니……. 귀신이 되어서도 절대 용서 못해!”

오다 노부나가

1536~1598년
62세에 임진왜란에 지고 나서 홧병으로 사망

원숭이,
꾀쟁이

“난 눈 내리는 추운 겨울 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그를 감동시키면서 하급 무사에서 일본 최고 무사가 되었어.

한마디로 치밀하게 계획하는 성격의 소유자이지. 오다가 죽은 후, 재빨리 오다 노부가나를 죽인 아케치를 처형하고 최고 통치자가 되었어. 미천한 출신이라 글자를 잘 모르는 거랑 임진왜란에 진 게 제일 억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1543~1616년
74세에 늙어서
병으로 사망

인내의
1인자

“난 6살 때부터 인질 생활을 하며 독한 인내심을 길렀지. 오다 노부나가의 딸과 내 아들을 결혼시켰지만, 그의 명령으로 아들과 아내를 죽였어.

도요토미가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그의 늙은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그에게 충성했어. 그리고 교묘하게 임진왜란에는 참여하지 않았지. 결국 천하는 내 것이 되었으니, 이만하면 내가 진정한 1인자 아니겠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각주
  • 1) 봉건 제도(封 봉할 봉, 建 세울 건, 制 억제할 제, 度 법 도) 지배 계급 내에서 땅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지방 분권적인 관계.
  • 2) 귀양 죄인을 먼 지역이나 섬으로 옮겨가서 살도록 했던 형벌.
  • 3) 쇼군 일본 막부의 우두머리로서 천황은 상징적인 존재이며, 모든 권력은 쇼군이 가졌음.
  • 4) 후사(後 뒤 후, 嗣 자손 자)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
  • 5) 다이묘 중세 일본에서 많은 영지를 거느렸던 영주. 무사 계급으로서 그 지방의 군사, 행정, 조세권과 사법권 등을 갖는다.
  • 6) 조총(鳥 새 조, 銃 총 총) 화승총이라고도 하며, 화승에 불을 붙여서 터지게 만드는 구식 총.

 

동복사(東福寺)[토오후쿠지]

 

임제종 동복사(東福寺派) 대본산으로 높이 15m의 초대형 석가여래(?迦如?)을 본존으로 모신 20만평의 대사원이다. 고위직 관료였던 쿠조오 미치이에(?道家1193-1252)가 나라(奈良)동대사(東大寺)와 흥복사(興福寺)를 본떠 1236년 착공해 19년 만에 완성했다. 경내에 심어진 2000그루의 단풍나무는 고찰과 함께 교토의 가을을 대표하는 풍광을 연출하는데, 특히 본당과 개산당(開山堂)을 연결하는 회랑에서 바라보는 단풍경으로 유명해 가을이면 전국각지의 관광객들로 성황을이룬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산문(山門)과 근대 선종정원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방장(方丈)고산수정원과 개산당의 정원이 볼만하다. 

 

관람시간: 9:00-16:00 (11월은 8:30-16:30) 관람요금: 경내는 무료개방, 방장(方丈)과 통천교(通天橋)는 각각 400엔  ●지도

 

*쿠조오 미치이에:

마쿠라시대 초기의 공가귀족(公家貴族, 조정에 출사하는 귀족)으로 섭정과 관백을 역임했다. 1219년 사남 쿠조오

요리쓰네(???)카마쿠라막부 4대 장군이 되면서 한층 권력을 얻었지만 만년에는 막부와의 불화로 세를 잃었다.


 

도후쿠사 삼문 / 일본 교토. 삼문(三門)은 공문(空門)·무상문(無相門)·무작문(無作門) 3개의 해탈문을 말한다. 선종양식과 일본풍이 조합된 건축양식이다.
 

 

헤이안시대 말기에 나라[]의 도다이사[]와 고후쿠사[]에 대적할 만한 사찰을 짓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이름도 도다이사[]와 고후쿠사[]에서 한 자씩 따서 도후쿠사[]라고 하였다. 삼문()·선당()을 비롯하여 국보급의 건물이 많아 교토 5산(: 선종 사찰 중 최고의 5개) 중 하나로 꼽힌다. 사찰 안 계곡 위에 걸쳐 놓은 회랑식 목조다리 '쓰텐교[]'에서 바라보는 고풍스러운 사찰의 풍경이 특히 뛰어난데, 다리 주변은 단풍나무가 우거져 있어 가을이면 단풍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모래와 돌로 만든 가레산스이[] 정원도 있다. 

 

목패

  • 한자木牌
  • 국적/시대중국(中國)-원(元) <14세기>
  • 출토지전라남도(全羅南道)-신안군(新安郡) / 지도면(智島面) 방축리(防築里) 도덕도(道德島)
  • 재질나무
  • 소장기관국립중앙박물관
  • 유물번호신안(新安)-023584-000
-->신안 침몰선에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 목패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목패는 도자기를 비롯한 문화재들이 들어 있는 상자나 동전 꾸러미에 묶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들은 화물에 매다는 꼬리표 즉 부찰(付札)이었다. 목패에는 먹으로 쓴 글씨들이 있어 신안 침몰선의 구체적인 실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1. 한면은 ″십관공용□(十貫公用□)□″, 한면은 ″동복사(東福寺)″ 라고 적혀있다.
2. 한 면은 ″십관공용□(十貫公用□)″, 한면은 ″동□□(東□□)″ 라고 적혀있다.
3. 한 면은 ″□□□□″, 한면은 ″십관오(十貫吳)″ 라고 적혀있다. 이들 목패가 묶여져 있던 물품들은 도호쿠 사(東福寺)에서 주문하여 사들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목패 큰 이미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