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부채 문양이 있는 타원형 곽 (인로 부타 주쿠리) [ Boîte ovale (inrô-buta-zukuri) à décor de chrysanthèmes et d'éventails ]
출처: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 종류
동아시아미술
- 기법
일본 칠기 문양, 옻칠, 나무, 금(décor en maki-e,laque (technique), bois (matière), or (métal))
- 크기
5.6 x 11.2 x 8.7 cm
- 소장처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442163&mobile&categoryId=3457
1) 시대에 따른 일본 의복의 변천
무녀복장(巫女服装) - 무녀 즉, 미코(巫女)는 신사에서 신을 모시는 여성이다. 노래와 춤으로 신을 위로하거나 신사 내에서 여러 가지 일에 종사한다. 화려한 붉은 하카마(袴)를 입는다.
기모노(着物, きもの)는 헤이안시대 귀족들의 정장의 속옷이 점차 변화한 것으로 에도시대에 이르러 정장과 같은 복장이 되었고 현재는 일본 전통 의복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기모노는 서양 의복(양복)에 대한 일본의 전통 의상이라는 의미에서 와후쿠(和服, わふく)라고도 한다. 현대 일본인들은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양복을 입고 지내지만, 와후쿠는 정장으로서 때로는 실내복으로서 현재도 애용되고 있다.
여성들이 입는 와후쿠는 기모노라는 이름으로 외국에 잘 알려진 아름다운 의상이다. 그 중 가장 화려한 것은 신부가 입는 우치카케(打掛, うちかけ)1)라는 예복이다. 실크 옷감에 금사(金絲)와 은사(銀絲)로 자수를 입히고 화조(花鳥)의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미혼 여성과 기혼 여성의 기모노는 모양과 색깔, 소매 길이 등으로 서로 구분되고, 외출 목적 등에 의해서 달라지기도 한다. 대체적으로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게 되는 것은 정월(正月, しょうがつ), 성인식(成人式, せいじんしき), 대학 졸업식, 결혼식과 피로연, 장례식 때로서 우리 한국보다 그 사용 빈도가 아주 높다.
양복이 체형에 맞추어 만들어지는 것에 비해 기모노는 체형보다는 기쓰케(着付け) 즉, 옷매무새에 따라 몸에 맞추는 것이므로 입기가 쉽지 않다. 보통 때 양복을 입고 있는 현대의 일본 여성들은 혼자서 기모노를 입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현대 일본 남성들의 기모노는 편하게 쉬면서 입는 실내복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정월 같은 때에 자택에서 손님을 맞는 경우 기모노를 즐겨 입는다. 정장으로 입을 경우 하오리(羽織, はおり)2)와 하카마(袴, はかま)3)를 걸치게 된다. 또한 가장 편한 실내 복장으로 면으로 된 유카타(浴衣, ゆかた)4)가 있다. 이 옷은 특히 하절기에 실내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더위를 식히는 데 아주 적합하다.
고대의 의복
야요이시대에 들어서면서 양잠과 직물 짜기가 시작되었다. 그 후 해외에서 전해진 불교와 중국정치 제도의 영향을 받은 쇼토쿠태자(聖徳太子, しょうとくたいし : 574~622년)는 수 왕조(隋王朝 : 589~618년)를 본따 귀족과 신하의 의복에 관한 규칙을 정했다.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たいほうりつりょう : 701년 제정),5) 요로율령(養老律令, ようろうりつりょう : 718년 제정, 757년 시행)에서는 당 왕조(唐王朝 : 618~907년)의 제복을 모방해 의복을 3종류로 새롭게 바꾸었다. 의식용인 예복(禮服), 조정 근무복인 조복(朝服), 노동용의 제복(制服)이 그것이다.
이후 대륙의 영향이 적어짐에 따라 의복 스타일은 간소해졌지만, 옷을 겹겹이 입는 방식에 대해 연구가 시작되었다. 남성 귀족의 예복인 소쿠타이(束帯, そくたい)는 헐렁한 속바지(下袴, したばかま)를 뻣뻣하게 해서 크게 보이게 하는 겉바지(表袴, うえのはかま)와 겹겹이 입은 길고 풍성한 겉옷(袍, ほう)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주니히토에(十二単) - 헤이안시대의 여성 귀족의 정장.
소쿠타이(束帯) - 헤이안시대 무관 남성 귀족의 정장.(© 斎宮歴史博物館)
중세와 에도시대의 의복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과 함께 조정의 위신이 쇠퇴하면서 무사의 딱딱한 의복이 호화스런 비단으로 바뀌었다. 고관은 헤이안시대의 정장인 소쿠타이(束帯)를 입고 있었지만, 약식 사냥복인 가리기누(狩衣, かりぎぬ)6)와 스이칸(水干, すいかん)7)이 무사의 일상복이 되었다.
무사의 행렬을 재현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의 햐쿠만고쿠 마쓰리(百万石祭り). 전투를 위한 복장인 요로이(鎧)를 입고 가부토(兜)를 썼다.
가마쿠라시대 초기, 여성의 정장은 우치키(袿, うちき)8)에 하카마(袴)였지만, 나중에는 밑에 입고 있던 고소데(小袖, こそで)9)를 하카마와 함께 입게 되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고소데 위에 우치카케(打掛)라는 것을 걸쳐 입으면 정장이었다. 이 옷차림은 현대에서는 신부 의상의 일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 강력한 무장이자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이기도 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おだのぶなが)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とよとみひでよし)는 대담하고 장식적인 것을 장려했다. 무사는 당시에도 계속해서 위 아래를 맞춘 가미시모(裃かみしも)10)를 착용하고 있었다. 상의는 소매가 없었지만 차츰 천이 딱딱해져 어깨가 솟아나게 되었다. 여기에 옷자락을 끄는 나가바카마(長袴, ながばかま)11)를 갖춰 입은 형태가 에도시대 말기까지의 무사의 정장이었다.
도쿠가와(徳川, とくがわ) 정권의 250년간은 유복한 도시 상인이 새로운 예술 표현을 지탱하였으며, 가부키자(歌舞伎座, かぶきざ)나 유곽이 유행을 만들었다. 남녀 모두에게 기본 의복이 된 고소데는 유젠염색(友禅染め)12)과 시보리 염색(絞り染め : 홀치기 염색)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화려해졌다.
에도시대의 남성은 고소데 위에 목에서 옷자락으로 일직선으로 옷깃이 붙은 풍성한 하오리(羽織)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에도시대 말기에 무사 계급의 복장 규칙을 새로 정했는데, 고소데와 길이가 복사뼈까지 내려오는 하카마(袴), 하오리(羽織)가 표준이 되었다.
현대의 의복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めいじいしん) 이후에 서서히 일본인의 의복이 서양화되었다. 군인, 경찰, 우체부 등 공무원은 양복을 입어야 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서양화가 진전되었고, 이윽고 학생도 서양식 제복을 입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대부분의 남성이 바지와 셔츠, 재킷을 입게되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양장을 입기까지는 남성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직장 여성과 교양 있는 여성들이 일상복으로서 양장을 입기 시작했다. 양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표준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2) 일본 전통의상의 주요 요소
기모노(着物)
기모노(着物) - 소매가 긴 옷은 미혼 여성의 정장인 후리소데(振り袖).
기모노(着物, きもの)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는 일본의 전통 의상을 나타낸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넓은 의미로서 모든 의복, 또는 서양 의복에 대한 일본고유의 옷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기모노의 원형인 고소데(小袖)는 나라시대부터 속옷으로 사용되어 16세기 중반부터는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윗옷이 되었다. 고소데가 기모노처럼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현대에 일본인이 기모노를 입는 날은 주로 정월(正月, しょうがつ), 시치고산(七五三, しちごさん), 성인식(成人式, せいじんしき), 졸업식(卒業式, そつぎょうしき), 결혼식(結婚式, けっこんしき) 등과 같은 행사나 의식 혹은 전통 예술에 참가하는 경우이다.
기모노에는 안감이 없는 히토에(単, ひとえ)13)와 안감이 있는 아와세(袷, あわせ),14) 면을 넣은 것 등이 있다. 6월부터 9월에는 히토에(単)를 입지만, 일상복으로는 목면에 형지(型紙)로 무늬를 박아 염색한 유카타(浴衣, ゆかた)를 입는 일이 많다. 그리고 외출복이나 예복으로는 비단으로 된 로(絽, ろ : 올을 성기게짠 견직물)나 샤(紗, しゃ : 얇고 성기게 짠 견직물), 조후(上布, じょうふ : 품질 좋은 마직물) 등의 천이 이용된다.
10월부터 5월에 걸쳐서는 주로 비단이나 울 혼방을 입는다. 기모노 위에는 목면을 넣은 옷을 걸쳐 입거나 단젠(丹前, たんぜん)15)을 입는데, 단젠은 한겨울에 집에서 입는 옷이다.
남성의 예복은 검은 하부타에(羽二重, はぶたえ)16)에 흰색으로 여러 곳에 가문(家紋)이 새겨져 있다. 여성의 예복으로는 여러 가지 색이 있는데, 눈부신 신부의 의상은 흰색 또는 빨간색 바탕에 화려한 자수나 금을 입힌 비단 기모노가 일반적이다. 기혼여성은 경사스러운 일에는 수수한 색깔과 무늬의 기모노, 장례식에는 검은색 기모노를 입는다.
일반적으로 기모노를 입을 때에는 우선 다비(足袋, たび : 일본식 버선)를 신고, 그 다음에 위아래 속옷(半襦袢, はんじゅばん : 裾除け)과 나가주반(長襦袢, ながじゅばん)17)을 입고 다테마키(伊達巻, だてまき)18)로 단단하게 묶는다. 나가주반(長襦袢)에는 옷깃을 단다. 옷깃은 흰색이 일반적이며 위에 입는 기모노 옷깃보다 2㎝정도 보이도록 한다. 기모노를 입을 때는 스스로 보아 왼쪽의 섶을 오른쪽 섶위에 겹치게 한다.
오비(帯)
여성의 오비(帯)
오비(帯)란 전통적인 기모노와 함께 착용하는 긴 장식 천을 말한다. 8세기 초까지는 상하가 이어진 풍성한 원피스형의 의복, 혹은 상의에 폭이 넓은 바지(남성)나 주름을 넣은 스커트(여성)를 입고 가느다란 오비로 묶었다. 나라시대에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직물 기술이 전해짐에 따라 오비는 더욱 세련되어 갔다. 헤이안시대에 남성용 오비에는 장식용 돌을 달았지만 조정의 여성은 오비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비는 15세기 말, 고소데(小袖)가 기본적인 복장으로 일반화될 때까지 사용되지 않았는데, 에도시대에 고소데를 하카마(袴)없이 착용하게 되면서 오비의 중요성이 커졌다.
남성의 오비(帯)
남성의 오비는 몇 세기가 지나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현재 남성의 오비는 폭이 약 9㎝ 정도의 딱딱한 천으로 묶는 가쿠오비(角帯, かくおび), 회색이나 검은색의 부드러운 비단으로 홀치기 염색한 헤코오비(へこ帯)가 사용된다. 헤코오비의 폭은 좁아도 50㎝는 되며 감을 때에는 가늘게 꺾어서 묶거나 허리 쪽에 찔러 넣는다. 에도시대 초기에 여성의 오비는 폭이 약 30㎝, 길이는 약 2m였지만 점차 조금씩 길어져 현재와 같은 3~4m 정도가 되었다. 그 당시 여성의 오비는 보통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여자 아이나 미혼여성은 뒤에서 묶고 기혼여성은 앞에서 묶었다.
현재는 미혼, 기혼을 불문하고 뒤쪽에 사각 형태로 묶는다. 여성 오비의 종류는 계절과 장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정장용 오비는 금과 쓰즈레오리(綴織, つづれおり),19) 일상용으로 착용하는 것은 슈스(繻子, しゅす)20)나 하부타에(羽二重, はぶたえ)로 만들어진다. 오비는 기모노보다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며, 좋은 것은 가격이 기모노의 몇 배가 되는 것도 있다.
게타(下駄)와 다비(足袋)
게타(下駄·우)와 조리(草履·좌) - 게타는 목제로 평상복에 맞춰 신는 경우가 많고, 조리는 가죽제품으로 의례적인 장소에 갈 때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게타(下駄, げた)는 기모노와 함께 착용하는 전통적인 일본의 신발이다. 보통 목재로 만들어지며, 신발 바닥에 하(歯, は)라고 하는 돌출된 두 개의 부분이 있어서 신발이 지면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또한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에 V자형의 고정 끈이 붙어있는데, 남성용은 목재를 거의 가공하지 않은 형태로 사용하며 오동나무 재질을 최고로 친다. 보통은 검은 고정 끈을 사용한다. 한편 여성용의 경우는 단순히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칠을 입히기도 한다. 고정 끈도 아름다운 실크나 벨벳을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식 버선인 다비(足袋, たび)를 신기도 하고 맨발로 착용하기도 하는데, 여름철과 같이 습도가 높은 시기에 적합하다.
다비는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가 나누어져 있는 일본식 버선이다. 둘째 발가락 사이가 벌어져 있기 때문에 게타를 착용하는 데 적합하다. 실크나 면이 주로 사용되며, 남자들은 검은색이나 감청색을 많이 신고, 여성들은 정장을 입을 때에는 흰색, 일상복을 입을 때에는 색이 있는 것을 신는다.
- 1) 우치카케(打掛): 원래는 궁중의 의식이 있을 때 무관이 예복 위에 걸친 옷. 또는 무가(武家)의 부인 예복의 하나였다. 현대에는 혼례용 의복.
- 2) 하오리(羽織): 일본 옷 위에 입는 짧은 겉옷으로 남자 의복의 정장.
- 3) 하카마(袴): 겉에 입는 주름 잡힌 하의(下衣).
- 4) 유카타(浴衣): 아래위에 걸쳐서 입는, 두루마기 모양의 긴 무명 홑옷. 옷고름이나 단추가 없고 허리띠를 두름.
- 5) 다이호 율령(大宝律令): 7세기 후반경 중국율령을 모방한 다이호율령이라는 법률이 만들어져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율령국가)가 성립, 전국 지배 체제와 조세제도 등이 완성되었다. 권력이 있는 호족은 율령국가의 관리가 되었으며, 이 제도에 의해 지위나 부를 자손에게 물려 주게 되었다.
- 6) 가리기누(狩衣): 옛날 귀족이 사냥할 때나 여행할 때 입었던 옷. 뒤에 구게(公家)·무사들의 평상복이 되었으며, 에도시대에는 예복으로서 착용했다.
- 7) 스이칸(水干): 풀을 먹이지 않고 널판지에 펴서 말린 비단. 혹은 가리기누의 하나로서 옛날 구게(公家)가 입던 옷.
- 8) 우치키(袿): 헤이안시대 귀부인의 겹으로 된 웃옷의 한 가지. 또는 옛날, 남자가 가리기누(狩衣)나 노시(直衣) 밑에 받쳐 입던 평상복.
- 9) 고소데(小袖): 소매통이 좁은 평상복. 혹은 다이소데(大袖)에 받쳐 입던 소매통이 좁은 옷.
- 10) 가미시모(裃): 에도시대의 무사의 예복으로 같은 빛깔의 가타기누(肩衣 : 상의)와 하카마(袴 : 하의)로 이루어졌다.
- 11) 나가바카마(長袴): 옷자락이 길어 발을 덮고도 뒤로 끌리는 하카마(袴). 에도시대 무사들의 예복.
- 12) 유젠염색(友禅染め): 견포(絹布) 등에 화조(花鳥)·초목·산수 등의 무늬를 염색한 것.
- 13) 히토에(単): 홑옷을 뜻하며 여름 전후에 입는다. 겹겹이 입는 아와세(袷)에 대칭된다.
- 14) 아와세(袷): 아와세기누(袷衣)는 겹옷으로, 근세시대에는 초여름, 초가을 무렵에 입었으나, 현재는 가을부터 초봄까지 사용한다.
- 15) 단젠(丹前): 방한용으로 두툼하게 솜을 넣은 기모노의 겉옷. 에도시대 단젠부로(丹前風呂)라는 목욕탕에 다니는 손님의 풍속에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 16) 하부타에(羽二重): 얇고 반드럽고 광택이 나고 결이 고운 순백의 견직물의 한 가지.
- 17) 나가주반(長襦袢): 일본옷의 겉옷과 같은 기장의 속옷. 여자용은 화려한 색상의 무늬가 있다.
- 18) 다테마키(伊達巻): 일본 옷에서 부인용 큰띠 밑에 매는 좁은 띠.
- 19) 쓰즈레오리(綴織): 갖가지 색실로 무늬를 엮어 짠 천.
- 20) 슈스(繻子): 날실 혹은 씨실로 짠 부드럽고 광택이 있는 견직물.
현대 일본과 정신세계
목차
- 1) 가문(家紋)
- 2) 경축일(祝日)
- 3) 골든 위크(ゴールデンウィーク)
- 4) 공양(供養, くよう)
- 5) 교과서 재판(敎科書裁判)
- 6) 국가(國歌)
- 7) 국기(國旗)
- 8) 국조(國鳥)
- 9) 국호(國號)
- 10) 국화(國花)
- 11) 네마와시(根回し)·혼네(本音)·다테마에(建て前)
- 12) 노렌(暖簾)
- 13) 놀이(遊び)
- 14) 달마(達磨)
- 15) 덴구(天狗)·갓파(河童)
- 16) 도박
- 17) 마네키네코(招き猫)
- 18)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
- 19) 무도(武道)
- 20) 무상(無常)
- 21) 부부별성(夫婦別姓)
- 22) 사비(寂)
- 23) 성(姓)
- 24) 스모(相撲)
- 25) 이키(粋)·스이(粋)
- 26) 야구·축구
- 27) 여행
- 28) 영화
- 29) 오카시라쓰키(尾頭つき)
- 30) 온(恩)·기리(義理)·닌조(人情)
- 31) 온천
- 32) 와비(侘)
- 33) 이에모토(家元)
- 34) 일관교육(一貫敎育)
- 35) 일본인론(日本人論)
- 36) 전별(餞別)·미야게(みやげ)
- 37) 정년이혼(定年離婚)·숙년이혼(熟年離婚)
- 38) 주신구라(忠臣蔵)
- 39) 천황(天皇)과 원호(元號)
- 40) 풍류(風流)
- 41) 하쓰유메(初夢)
- 42) 하지(恥)·세켄테이(世間体)
- 43) 호간비이키(判官贔屓)
- 44) 후지산(富士山)
1) 가문(家紋)
가문(家紋)
가문(家紋, かもん)은 집안마다 정해져 있는 문장(紋章)을 말한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へいあんじだい)에 구게(公家, くげ) 즉, 귀족들이 의복이나 우차(牛車)에 문양(文樣)을 새겨 넣은 것이 시초로 전해진다.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かまくらじだい)에는 무사가 일족의 단결을 과시하고 전투시에 적과의 구별을 위해 깃발에 독자의 문양을 새기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전투가 사라진 에도시대에는 복장이나 생활도구 등에 가문을 표시했으며 서민들 사이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현재 가문(家紋)은 남성의 하오리하카마(羽織袴, はおりはかま), 여성의 도메소데(留袖, とめそで)나 상복(喪服)과 같이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의례적 복장에 들어가거나 묘석에 새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6개 꽃잎의 국화문양(十六弁重表菊紋, じゅうろくべんやえひょうきくもん)은 천황과 황실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2) 경축일(祝日)
2009년 현재, 일본은 '국민의 축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15개의 국경일이 정해져 있다. 15개의 국경일은 다음과 같다.
1월 1일 : 간지쓰(元日). 정월 초하루. 쇼가쓰라고도 한다.
1월 두 번째 월요일 : 성인의 날(成人の日). 만 20세가 된 남녀를 축하한다.
2월 11일 : 건국기념일(建國記念の日). 전설상의 초대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 즉위를 기념하는 국가주의적 경축일이다.
3월 21일경 : 춘분(春分の日). 성묘를 하는 날로 친척이 모두 모인다. 히간에(彼岸会)1)의 가운데 날에 해당한다.
4월 29일 : 쇼와의 날(昭和の日). 격동의 세월을 지나 부흥을 이룬 쇼와시대를 돌아보기 위해 제정되었다.
5월 3일 : 헌법기념일(憲法記念日). 1947년의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의 시행을 기념하는 날이다.
5월 4일 : 숲의 날(みどりの日). 자연을 즐기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풍요로운 마음을 키우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5월 5일 : 어린이날(こどもの日). 어린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예로부터 단오절(端午の節句)로 축하되고 있다.
7월 세 번째 월요일 : 바다의 날(海の日). 바다의 은혜에 감사하고 해양국 일본의 번영을 기원한다.
9월 세 번째 월요일 : 경로의 날(敬老の日). 노인을 공경하고 장수를 축하한다. 노인 복지법의 제정을 기념해 1966년에 제정되었다.
9월 23일경 : 추분(秋分の日). 성묘를 하는 날로 친척이 모두 모인다. 히간에(彼岸会)의 가운데 날에 해당된다.
10월 두 번째 월요일 : 체육의 날(體育の日). 운동을 가까이하고 건강한 심신을 북돋운다. 1964년 10월 10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된 도쿄올림픽을 기념해 제정되었다.
11월 3일 : 문화의 날(文化の日).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에 명문화된 평화와 자유의 애호를 문화활동에 의해 촉진한다.
11월 23일 : 근로감사의 날(勤勞感謝の日). 근로를 존중하고 생산을 축하하며 국민 상호간에 감사한다.
12월 23일 : 천황탄생일(天皇誕生日). 아키히토(明仁) 헤이세이(平成)천황의 생일을 축하한다.
3) 골든 위크(ゴールデンウィーク)
일본은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에 걸쳐 약 1주일간의 긴 연휴가 있는데 이를 골든 위크(ゴールデンウィーク)라고 한다. 대형연휴, 황금주간, 혹은 GW라고도 말한다. 골든 위크는 4월 29일부터 시작된다. 이 날은 쇼와천황(昭和天皇, しょうわてんのう)의 생일을 기념한 쇼와의 날(昭和の日)로 경축일이다. 이어지는 5월 3일은 헌법기념일(憲法記念日), 5월 4일은 숲의 날(みどりの日), 5월 5일 어린이날(こどもの日)의 3일 연휴가 있고, 여기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겹쳐져 골든 위크의 대형연휴가 되는 것이다. 이 기간에 많은 일본인들이 국내 여행 혹은 한국 등의 해외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4) 공양(供養, くよう)
공양(供養, くよう)은 본래 佛·法(佛의 가르침)·僧(佛의 교단)에 음식 등의 공물(供物)을 바치는 것을 의미했는데,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현재 일본에서는 죽은 자나 선조의 명복을 기원하는 추선공양(追善供養)을 뜻한다. 또한 일부 사찰이나 신사에서는 사용하지 않게 된 인형 등을 소각하는 인형공양(人形供養), 오래 사용한 바늘을 두부나 곤약에 꽂아 보관함으로써 제봉기술의 기술 향상을 바라는 바늘공양(針供養) 등 무생물에 대한 공양도 이루어지고 있다.
5) 교과서 재판(敎科書裁判)
1965년 6월 12일, 고교 일본사 교과서의 집필자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いえながさぶろう)가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은 헌법에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금하는 검열에 해당하는 것이라며 그 위헌성을 지적하고, 나라를 상대로 제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재판에서는 1970년 검정 불합격의 취소를 명령, 교사의 학문·교육의 자유를 인정했다. 이에나가 사부로는 일본의 역사학자로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ナンキンだいぎゃくさつ)의 올바른 실상을 싣고자 30여 년간 투쟁해 1970년 승소했다. 그 후 일본의 극우파에게 많은 위협을 받았으며 2003년 사망했다.
6) 국가(國歌)
기미가요(君が代). - 헤이안시대 이래 귀인이나 연장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던 시가를 가사로 해서 메이지시대에 곡을 붙여 사실상 일본의 국가로서 사용되어 왔다.
기미가요(君が代)는 오랫동안 일본의 국가(國歌)처럼 불려져 왔다. 노래의 내용은 '천황의 치세는 천대 팔천대 계속되기를. 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다시 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영원하기를(君が代は千代に八千代にさざれ石のいわおとなりて苔のむすまで)'이라는 것으로, 이 가사(歌詞)는 10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의 고전시가집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 こきんわかしゅう)』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 고대 시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곡(曲)은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만들어졌다. 기미가요는 관례적으로 국가 제창시에 부르고 있는데, 정식 국가로 제정된 것은 1999년의 일이다.
7) 국기(國旗)
붉은 원의 모습으로 잘 알려진 일본의 국기(國旗)는 일장기(日章旗) 혹은 히노마루(日の丸)라고 한다. 여기에는 태양의 깃발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신사(神社)의 깃발로 이용되어 오다가 16세기경부터 일본을 상징하는 깃발로 선박 등에 게양되었다.
그리고 1870년에는 '해가 떠오르는 나라'라는 국호와 의미상으로도 일치한다고 해서 상선에 게양하는 국기로 제정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국기로 사용되어 왔으나, 패전 후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는 이유로 국가(國歌)에 해당하는 기미가요(君が代)와 함께 일장기(日章旗)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체적으로 일장기와 기미가요를 국가의 상징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8) 국조(國鳥)
일본의 국조(國鳥)는 꿩(きじ)이다. 꿩은 일본의 신화나 설화 등에 자주 등장해 일본인들에게 가장 전통적이고 친숙한 새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꿩이 국조로 지정된 것은 1947년의 일이므로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덧붙여 일본 축구협회에서는 세발 달린 까마귀를 심볼로서 채용하고 있는데, 세발 달린 까마귀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야타가라스(八咫烏, やたがらす)로 초대천황인 진무천황(神武天皇, じんむてんのう)이 야마토로 진격할 때 길 안내를 했다고 전해진다.
9) 국호(國號)
일본인은 자국을 닛폰(にっぽん) 혹은 니혼(にほん)이라고 한다. 이것은 7세기 초 고대국가의 주역이었던 쇼토쿠태자(聖徳太子, しょうとくたいし : 574~622)가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의 나라를 가리켜 '해가 떠오르는 나라'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그 의미를 본따 한자로 표기한 것이 '日本'이고,이때부터 '닛폰'과 '니혼'이라고 발음한 것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닛폰'과 '니혼'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국제 스포츠 대회나 우표 등 공식적인 명칭으로서는 닛폰(NIPPON)이라고 한다. 지금의 Japan이라는 영어 명칭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중국 북부지방에서 일본국을 Jiepenkuo라고 부르던 것을 포르투갈인들이 Zipangu 혹은 Jipangu로 들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중국 남부지방에서 일본을 Yatpun이라고 부르던 것을 네덜란드인들이 Japan이라고 들었다는 설이 있다.
10) 국화(國花)
벚꽃(桜, さくら)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여겨져 왔다. 벚꽃은 일찍이 일본 신화에도 등장했고, 필 때는 일제히 화려하게 피었다가 질 때는 눈이 내리듯 순식간에 지는 모습이 일본 무사들의 전통적인 인생관에 비유되기도 하면서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꽃으로 뿌리내렸다. 일본 각지에는 수많은 벚꽃 명소가 있고, 봄철에 벚꽃이 활짝 피면 그 나무 아래서 음료와 음식을 먹으며 한때를 즐기는 하나미(花見, はなみ)는 봄철의 가장 큰 행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선비들은 전통적으로 매화를 좋아했지만, 지금도 한국 곳곳에 벚꽃 명소가 남아 있는 것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취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벚꽃 이외에도 일본 황실의 문장(紋章)이 국화(菊)로 되어있는 점에서 국화도 일본을 대표하는 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1) 네마와시(根回し)·혼네(本音)·다테마에(建て前)
네마와시(根回し)란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일본인들의 사전 작업 내지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정식 토의나 투표가 실시되기 전에 유력자의 지지를 얻어내거나 동의를 얻기 위해 사전에 공작하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 사회는 일반적으로 집단의 결정을 기본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회의 등에서 만장일치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이 네마와시가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것은 대립이 표면화되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식 결의 사항의 대부분은 이미 사전에 결정된 사항을 확인하는 일종의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회의를 하는가?' 하는 비판의 소리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네마와시'의 정신이다.
한편 혼네(本音, ほんね)는 개인의 본심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다테마에(建前, たてまえ)는 사회적인 규범에 의거한 의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일단 이 두 정신구조는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인은 자기 의견을 피력함에 있어 이 두 가지를 구별해 사용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상황 변화에 따라 이것을 수시로 활용한다.
예를 들면 공식 회의 석상에서는 상사의 의견이나 회사 방침에 따르는 듯한 '다테마에'적인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회의가 끝난 후 동료들과 술을 마시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상사나 회사를 비판하는 '혼네'의 의견을 밝히는 것은 일본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이중적 자세는 전체의 조화를 위해 개인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는 미덕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개인 위주의 삶을 솔직히 살아갈 것을 기본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신구조로 볼 수 있다.
12) 노렌(暖簾)
노렌(暖簾)을 건 점포.
상점의 출입구에 내걸어 놓은 천을 말한다. 또한 민가에서도 방 입구에 내걸기도 한다. 원래는 가게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게 하거나 바람이나 햇볕을 막기 위한 용도였는데, 점차 상점의 이름이나 마크를 새긴 노렌(暖簾, のれん)이 상점을 상징하는 용도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노렌을 과시하다(のれんを誇る)」(상점의 역사·품격을 자랑하다), 「노렌을 지키다(のれんを守る)」(사업이나 전통을 지켜나가다), 「노렌에 걸린 문제다(のれんにかかわる)」(상점의 신용이 걸린 문제다)와 같은 말들이 만들어졌고, 상점을 폐업하는 것을 「노렌을 내리다(のれんを下ろす)」, 오래 근무한 종업원이 독립해서 같은 상점명으로 영업하게 하는 것을 「노렌을 나누다(のれんを分ける)」라는 표현을 한다. 또한 노렌이 상점에 내걸려 있으면 영업중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노렌이 치워져 있으면 영업이 종료되었음을 나타낸다.
13) 놀이(遊び)
일본의 어린이들이 전통적으로 즐겨 하는 놀이에는 죽마(竹馬, たけうま), 공기놀이(お手玉), 팽이, 연날리기, 구슬놀이, 딱지놀이, 그림맞추기, 실뜨기 등이 있다.
죽마(竹馬)는 두개의 대막대기에 각각 발걸이를 붙인 놀이기구이고, 딱지놀이는 일본어로 가루타(カルタ)라고 하는데, 일본의 전통시가인 와카(和歌, わか)나 속담 등이 적힌 수십 장의 카드를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그에 대응하는 수십 장의 시가나 그림을 빠른 시간 안에 찾아내는 놀이이다. 그 외의 놀이는 대체적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어린이 놀이와 유사하다.
14) 달마(達磨)
다루마(達磨)
선종의 시조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좌선 수행 중인 모습의 인형을 말하는데 일본어로는 다루마라고 한다. 손발이 없고 붉은 옷을 입고 있다. 사업번창, 개운출세(開運出世)의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달마인형에는 눈이 그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데, 무언가 기원한 것이 이루어지면 그때 가서 눈을 그려 넣는 관습이 있다. 연초에 각지에서 여러가지 크기나 종류의 달마를 파는 시장이 열린다.
15) 덴구(天狗)·갓파(河童)
덴구(天狗)
일본 각지에는 여러 가지 요괴전설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친근한 것으로 산의 요괴인 덴구(天狗, てんぐ)와 강이나 연못·늪·바다의 요괴인 갓파(河童, かっぱ)가 있다. 덴구는 빨간 머리와 큰 코에 산사람인 야마부시(山伏, やまぶし) 차림을 하고 하네우치와(羽団扇, はねうちわ)라고 하는 부채를 사용해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다닌다. 덴구전설이 태어난 배경에는 평지에서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산속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별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두려워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산 속에서의 괴이현상을 덴구의 행위라고 생각하거나 어린이가 없어지면 덴구에게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곤 했다. 덴구가 산악불교의 수행자인 야마부시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은 산 속에서 혹독한 수행을 하고 있는 야마부시를 평지 사람들이 외경(畏敬)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고, 빨갛고 큰 코에는 산 속에 사는 독수리나 매와 같은 조류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갓파(河童)는 청색과 회색의 몸에 머리 위에 물을 담은 접시가 얹어 있고 손에는 갈퀴가 붙어 있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해 사람들과 씨름을 하거나 사람이나 말을 물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갓파가 좋아하는 음식은 오이라고 하는데, 이를 빗대어 일본의 초밥집에서는 오이조각을 김으로 말은 초밥을 갓파마키(かっぱ巻き)라고 부른다.
16) 도박
일본의 도박은 지방자치단체 등이 주관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공영도박과 파칭코·마작 등의 도박성이 강한 게임 등이 있다. 공영도박에는 경마·경륜(競輪)·경정(競艇)과 복권, 축구복권 등이 있다.
17) 마네키네코(招き猫)
마네키네코(招き猫)
한쪽 다리를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을 한 고양이 상(像)을 말한다. 사람을 부르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에 손짓하는 고양이라는 의미로 마네키네코(招き猫)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객이나 행복, 돈을 불러 모으는 행운의 장식품으로 여겨져 음식점 등에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마네키네코의 유래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에도시대 히코네번(彦根藩, ひこねはん)의 영주가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토쿠지(豪徳寺, ごうとくじ)라는 절 앞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그 절에서 키우는 고양이가 부르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기에 절에 들러 휴식을 취했더니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비를 피할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라고 한다.
마네키네코는 현재도 인기가 있어서 외국인에게 보내는 기념품이나 휴대폰 장식 등으로도 사용된다. 일본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기록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헤이안시대의 귀족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우고 있었음은 당대의 대표적인 고전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げんじものがたり)』등에도 묘사되고 있다.
18)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는 헤이안시대에 만들어진 문학 및 미학의 이념이다. 그 중심에 자연과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나타나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깊고 애절한 이해가 존재하고 따라서 애조(哀調)의 색을 내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감탄이나 외경(畏敬), 때로는 기쁨을 동반하기도 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もとおりのりなが)의 저서에 의해 문학 비평 용어로서 부활했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에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견해에 따르면 모노노아와레는 인간과 자연의 가장 깊은 부분에서 일어나는 순화된 숭고한 감정이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는 인간의 감정 모두를 함축할 정도의 넓은 의미를 지니며 또한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인간적 가치를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주로 인생의 덧없음과 그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는 감성에 넘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 고전문학 작품들 중에서 특히 일본인들이 전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헤이안시대의 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げんじものがたり)』의 미적 세계도 바로 이 모노노아와레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 무도(武道)
현재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요 무도에는 유도(柔道, じゅうどう), 검도(劍道, けんどう), 가라테(空手, からて), 나기나타(なぎなた), 궁도(弓道, きゅうどう) 등이 있다. 유도(柔道)는 1882년에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 かのうじごろう)가 일본 고유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격투술인 유술(柔術, じゅうじゅつ)을 스포츠화해 유도(柔道)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해외 진출에 의해 점차 세계화되기 시작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남자 유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92년에는 여자 유도도 정식종목이 되어 유도는 세계의 스포츠로서 그 위치를 확립했다. 이러한 유도의 글로벌화와 더불어 유도를 무도(武道)의 일환으로 보고자하는 일본과 스포츠의 하나로 생각하는 여러 외국들 간에 룰 문제를 둘러싸고 자주 의견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글로벌화에 따른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검도(劍道)는 무사가 도검(刀劍)을 사용해 자신을 지키고 적을 공격하는 기술의 연마에서 시작된 것으로 초기에는 아주 실전적인 형태였다. 에도시대가 되면서 무사로서 필수적인 기술이 됨과 동시에 정신적인 요소도 강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보호복과 죽도 등의 도구도 개발되었다. 메이지시대에 무사계급이 없어지면서 검도도 잠시 쇠퇴했지만, 그 후 스포츠로 변화하면서 학교 교육에서 이것을 도입하게 되는 등 점차 무도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가라테(空手)는 손과 발의 동작을 중심으로 하는 무술이다. 중국의 권법(拳法)이 오키나와(沖縄, おきなわ)에 전래된 뒤 재래의 무술과 융합해 발전한 것으로 1920년대에 일본 본토에 소개되어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나기나타(なぎなた)는 긴 나무봉 끝에 칼을 장착한 무기로서 헤이안시대(794~1192)부터 사용되었는데 창과 철포의 발달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에도시대에는 무사계급의 여자들의 호신용구가 되었다. 근대에는 여자의 스포츠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도(弓道)는 일본의 전통적인 활과 시위를 사용하는 무술로 무사의 주요 무술의 하나였다. 메이지시대에 무사계급이 없어지면서 쇠퇴했으나, 학교 체육에서 다시 행해지게 되어 스포츠로 발전했다. 일본의 활은 길이가 220㎝로서 비교적 긴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일본의 무도에는 합기도(合気道, あいきどう), 이아이도(居合道, いあいどう), 인술(忍術, にんじゅつ) 등이 있다.
20) 무상(無常)
무상(無常)은 한국어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모든 사물은 생겨나고 없어지며 변화함으로써 항상 움직이고 있다는 교의(敎義)를 나타내는 불교용어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만물은 덧없는 것)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2) 즉, 3가지 근본적인 가르침의 하나이다.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사물의 변화에 민감해 무상관은 일본문학의 주요 테마가 되어 왔다.
21) 부부별성(夫婦別姓)
일본의 현대 호적
일본 법무성(法務省)은 1996년 민법 개정 요강을 확정했다. 특히 가족법과 관련해 여성계로부터 자주 지적된 여성의 사회적 불이익을 개선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재혼 금지 기간을 이혼 후 6개월에서 100일로 단축하고, 부부는 동일 성씨를 선택하도록 한 내용을 개정해 부부가 각각의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혼으로 재산 분할 시 각자 기여한 부분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부부가 동등하게 2분의 1씩 인정받도록 규정했고, 5년 이상 별거 시에는 자동이혼으로 인정하며, 적출자와 비적출자 사이의 재산상의 법적 상속분 차별을 철폐하였다.
특히 현행 민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부부동성제(夫婦同姓制)에 대한 개선 요구는 여성의 개인 인권과 존엄성, 남녀 평등의 관점에서 계속되어 왔다. 여성들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한 후 결혼을 하면 98% 정도가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른다. 이런 경우 여성은 성씨가 바뀌게 되어 직장생활과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여러 가지 부담과 불편을 겪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부담과 불편을 여성에게만 지우는 것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차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재혼 가정의 경우, 현행 민법에서는 현(現) 남편의 성이 전(前) 남편과 다를 경우, 부인측 자녀의 성은 또 한 번 바뀌게 된다. 자녀들의 성씨 변경은 자녀 교육에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재혼이 보편화되고 있는 일본 사회에서 이런 측면에서도 부부동일성씨제를 개정하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인의 결혼 후 성(姓)에 대한 생각 - 『現代日本人の意識構造 第六版』 (NHKブックス. 2004)
22) 사비(寂)
사비(寂, さび)는 일본의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근세의 가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まつおばしょう : 1644~94년)와 그 문하인들의 근세시 즉, 하이카이(俳諧, はいかい)의 시적 이념이다. 그러나 사비의 개념이나 단어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늙음이나 고독, 체념, 정적 등의 요소가 혼합된 중세 일본의 미의식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서민적이고 생동하는 근세시대의 문화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다도의 미적 개념인 와비(侘, わび)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와비(侘, わび)·사비(寂, さび)'로 병기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저명한 시인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 ふじわらのしゅんぜい)3)가 그의 가론(歌論)에서 처음으로 이 말을 썼는데, 그 의미로서 해변의 서리 내린 볏짚의 이미지를 예로 들어 고독과 황량한 정조(情調)를 강조했다. 제아미(世阿弥, ぜあみ : 1363~1443년)나 신케이(心敬, しんけい)4) 등과 같은 중세의 예술인들에 의해 사비의 정신은 더욱 황량한 것으로 추구되었고, 그 미적 이념은 더욱 고담(枯淡)의 정취5)를 획득했다. 이 미의식의 본바탕에는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인식하고 그 고독에 몸을 맡김으로써 아름다움을 찾아내고자 했던 중세 일본의 불교신자 특유의 우주관이 깔려 있었다.
23) 성(姓)
일본 성씨 Best 20
| 구분 | 성씨 | 인구 수 | 구분 | 성씨 | 인구 수 |
|---|---|---|---|---|---|
|
1 |
사토(佐藤) |
약 1,928,000 |
2 |
스즈키(鈴木) |
약 1,707,000 |
|
3 |
다카하시(高橋) |
약 1,416,000 |
4 |
다나카(田中) |
약 1,336,000 |
|
5 |
와타나베(渡辺) |
약 1,135,000 |
6 |
이토(伊藤) |
약 1,080,000 |
|
7 |
야마모토(山本) |
약 1,077,000 |
8 |
나카무라(中村) |
약 1,058,000 |
|
9 |
고바야시(小林) |
약 1,019,000 |
10 |
사이토(斎藤) |
약 980,000 |
|
11 |
가토(加藤) |
약 860,000 |
12 |
요시다(吉田) |
약 835,000 |
|
13 |
야마다(山田) |
약 816,000 |
14 |
사사키(佐々木) |
약 716,000 |
|
15 |
야마구치(山口) |
약 641,000 |
16 |
마쓰모토(松本) |
약 634,000 |
|
17 |
이노우에(井上) |
약 610,000 |
18 |
기무라(木村) |
약 584,000 |
|
19 |
하야시(林) |
약 541,000 |
20 |
시미즈(清水) |
약 524,000 |
24) 스모(相撲)
도효(土俵, どひょう)라고 불리는 원형의 씨름판 위에서 샅바인 마와시(まわし)만을 걸치고 경기를 하는 씨름경기로서 일본의 국기(國技)이다. 오곡풍요를 기원하는 농경의례에 기원이 있는 스모(相撲, すもう)는 궁중의 의례가 되었고 무사의 무술로도 정착되었다. 에도시대에는 직업적인 스모집단이 만들어져 에도·오사카·교토 등에서 사찰·신사의 건립이나 수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스모시합이 열렸고,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시합으로 발전했다.
현재는 일본스모협회(日本相撲協会) 아래 각 헤야(部屋, へや)라고 불리는 여러 조직의 리키시(力士, りきし), 즉 선수들이 도쿄, 나고야, 오사카, 후쿠오카 등을 순회하며 연 6회 각 15일간의 시합을 벌인다. 최상위의 리키시는 요코즈나(横綱, よこづな)라고 부른다. 일본의 국기로서 최고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스모선수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몽골인, 한국인, 불가리아인 선수들의 활약도 두드러져 스모 분야에도 국제화가 진행되고 있다.
25) 이키(粋)·스이(粋)
이키(粋, いき)와 스이(粋, すい)는 에도시대 도시의 서민계급이 지니고 있던 미적, 윤리적 이념이라고 할수 있다. 스이(粋)의 개념은 17세기 후반, 오사카(大阪)에서 유행했고, 이키(粋)는 19세기 초 에도에서 유행했다. 미학적으로는 두 개념 모두 관능성을 기조로 한 도회적이고 세련된 도시 상인들 취향의 미적 양식이다.
윤리적으로는 부자들이 돈에 집착하지 않고 성적 쾌락을 즐기지만 결코 성욕에 탐닉하지 않으며, 세속의 삶의 번잡함을 알면서도 정작 그것에 휘말리지 않는 인간의 정취 있는 삶의 방식을 이상(理想)으로 삼고 있다. 사람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을 강조하는 점에서 헤이안(平安, へいあん) 왕조의 궁정인들의 미의 이념인 아와레(あわれ)6)와도 비슷한 이념이지만 보다 더 서민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스이는 현대 일본어에서는 보통 粋라고 표기하지만 당시에는 酸, 推, 水, 帥와 같은 별도의 한자로 표기되기도 했다. 이 개념은 이런 모든 의미들을 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었다. 즉 인생의 쓴 경험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는 여러 상황에 대해 형태 없는 물과 같이 순응해 당대의 취미나 유행을 앞서가는 인간의 언어 행위나 처신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키는 본래 '意気'를 의미했는데 뒤에 '위세가 좋다'나 '기운이 좋다' 등의 의미로 변화했고, 위세가 좋은 사람의 이야기 분위기나 태도, 복장 등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다. 이키가 에도 서민의 이상을 표현하게 되면서 오사카의 스이에 영향을 받아 때로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을 정도로 두 단어의 차이는 근소했다. 미적 개념으로서의 이키로 표현되는 미(美)에는 스이정도의 화려함은 없고, 또한 이키에는 스이를 조금 상회하는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성 특히 고상하고 멋진 성적 매력을 갖춘 화류계의 여성을 표현하는 데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
26) 야구·축구
일본에서도 야구와 축구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야구는 1871년에 미국인 교사가 도쿄대학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야구는 학생들 사이에 퍼져나가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팀이 만들어져 시합이 벌어지게 되었다. 1915년에 중등학교 야구대회(현재의 고교야구), 1925년에 도쿄 6대학 야구리그, 1927년에 전국 도시대항(사회인야구)가 시작되었다. 프로야구가 시작된 것은 1935년으로 현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즈, 주니치 드래건즈 등의 팀들이 창단되어, 다음 해인 1936년부터 공식적인 시합이 시작되었다.
현재의 프로야구는 센트럴 리그와 퍼시픽 리그의 2리그제로 운영되고 있다. 센트럴 리그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東京, とうきょう), 도쿄 야쿠르트 스와로즈(東京, とうきょう), 요코하마 베이스터즈(横浜, よこはま), 주니치 드래건즈(名古屋, なごや), 한신 타이거즈(西宮, にしのみや), 히로시마도요(広島東洋) 컵즈(広島, ひろしま)의 6구단, 퍼시픽 리그에는 홋카이도닛폰(北海道日本) 파이터스(札幌, さっぽろ), 도호쿠라쿠텐(東北楽天) 골든이글스(仙台, せんだい), 사이타마세이부(埼玉西武) 라이언즈(所沢, ところざわ), 지바(千葉) 롯데 마린즈(千葉, ちば), 오릭스·버펄로즈(大阪, おおさか), 후쿠오카(福岡) 소프트뱅크 호크스(福岡, ふくおか)의 6구단이 있다.
고교야구는 춘계의 선발고등학교 야구대회와 하계의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의 2대 행사가 대표적이며, 각 지역을 대표하는 팀이 출장하기 때문에 해당 지역사람들의 응원 열기가 뜨겁다. 대학야구에는 도쿄 6대학(東京大学(とうきょうだいがく), 早稲田大学(わせだだいがく), 慶応大学(けいおうだいがく), 立教大学(りっきょうだいがく), 明治大学(めいじだいがく), 法政大学(ほうせいだいがく)) 대회가 유명하다.
축구는 1873년에 영국인에 의해 소개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1921년부터 전일본선수권대회가 시작되었고, 1929년에는 FIFA에 가입했다. 1968년의 멕시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바 있고, 1993년에 일본프로축구리그(J리그)가 발족, 10팀으로 시작되었는데 현재는 J1(18팀), J2(15팀)의 33팀이 2부로 나뉘어 시합을 행하고 있다. 월드컵에는 1998년의 프랑스대회에 처음 참가했고, 2002년 한일공동개최 월드컵에서는 16강까지 진출한 바 있다.
27) 여행
일본에서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에도시대(1603~1867) 중기 이후로서, 신앙생활의 연장으로서 이세신궁(伊勢神宮) 등 각지의 사찰이나 신사 등의 명소를 찾는 집단여행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도로나 숙박시설이 정비되었고, 각종 명소를 소개하는 책자나 여행안내서가 출판되는 등 서민의 여행은 점차 편리해졌다. 근대기가 되면서 이러한 여행은 관광여행, 수학여행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일본인의 여행이 본격적으로 대중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 경제 성장과 1964년에 개최된 도쿄올림픽, 1970년에 열렸던 오사카 만국박람회였다.
일본인들이 이 이벤트를 보기 위해 전국적으로 이동한 본격적인 여행 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행 수단도 철도 수송으로는 한계에 달해 관광버스, 자가용차, 비행기에 의한 여행이 늘어났다. 또한 1964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화 됨에 따라 항공회사나 여행업자의 패키지 투어가 등장했다. 또한 해외여행자 수가 급증해 2007년 현재 1,700만 명 이상이 해외여행에 나서고 있고, 국내여행자 수는 5,000만 명을 넘고 있다. 일본인 해외여행자들의 주요 방문지는 아시아, 북미, 유럽 등이고 1위는 중국, 2위는 한국, 3위는 하와이 등이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여행 장르 Best 20
| 순위 | 여행 장르 |
|---|---|
|
1위 |
온천 |
|
2위 |
가족 여행 |
|
3위 |
자연 풍경 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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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
드라이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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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
하나미·단풍놀이 |
|
6위 |
식도락 |
|
7위 |
자유 여행 |
|
8위 |
기차 여행 |
|
9위 |
쇼핑 |
|
10위 |
유명지 돌기 |
|
11위 |
유원지·테마파크 돌기 |
|
12위 |
절과 신사 돌기 |
|
13위 |
1박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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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위 |
버스 여행 |
|
15위 |
미술관·박물관 돌기 |
|
16위 |
당일치기 여행 |
|
17위 |
투어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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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위 |
조개 캐기·포도 따기·밤 줍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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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위 |
마쓰리 구경 |
|
20위 |
도시 구경 |
『日本人の好きなもの』 (NHK出版生活人新書. 2008)
28) 영화
일본에 처음으로 영화가 소개된 것은 1896년으로 에디슨이 발명한 키네트스코프였다. 그 뒤 바로 일본인도 영화 제작을 시작해 1912년에 영화제작회사 닛카츠(日活, にっかつ)가 탄생했다. 초기의 영화는 시대극이나 현대극 모두 무대연극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화면의 움직임이 적었지만, 영화 특유의 독자적인 표현을 지니는 영화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뒤 영화는 토키 영화(발성영화)로 변하면서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고, 1930년대 이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이 이어지면서 일본 정부의 간섭도 강화되어 영화는 전의를 고양하는 군국주의적인 내용으로 변해갔다. 패전 후 일본 영화는 다시 발전기를 맞아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くろさわあきら),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みぞぐちけん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おづやすじろう) 등과 같은 감독들이 활약을 했고 베네치아영화제, 칸느영화제에서 수상을 받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연간 500편을 넘는 작품을 제작하고 12억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영화도 1950년대를 피크로 텔레비전의 출현 등에 의해 쇠퇴하기 시작해 2007년의 영화 공개 편수는 810편(일본 영화 407편, 외국 영화 403편)이었고, 영화 관객 동원수는 1억 6,319만 명을 기록했다. 또한 1950년대까지 일본 영화와 외국 영화 배급의 수입 비율은 8대 2로 일본 영화가 우위를 점했지만, 그 비율은 점차 역전되어 90년대에는 4대 6이 되었다. 다시 2000년대에 들어와 일본 영화가 만회하여 2006년에는 21년만에 일본 영화가 외국 영화를 상회하게 되었다.
29) 오카시라쓰키(尾頭つき)
도미의 오카시라쓰키(尾頭つき)
오카시라쓰키(尾頭つき)란 머리부터 꼬리끝까지 통째로 한 마리의 도미를 가르킨다. 도미는 결혼식이나 생일잔치에 등장하거나 또는 마쓰리날 신에게 봉납하는 생선이다. 일본어로 「타이(たい)」라고 발음되는 도미는 축하한다는 의미의 「메데타이(めでたい)」라는 어구와 통한다는 점에서 축하용 요리로 사용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본래는 도미의 붉은색과 모습, 맛 등을 선호한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쓰리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음식에 붉은색 밥인 세키한(赤飯, せきはん)이 있다. 세키한은 찹쌀과 팥을 섞어 찐 밥이다. 세키한이 이처럼 사용되는 것은 흰 쌀밥이 일반화되기 전에 적미(赤米)나 혹은 팥을 섞은 밥을 먹었던 습관이 이후에 의례적으로 남아 있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30) 온(恩)·기리(義理)·닌조(人情)
온(恩)이란 호의를 받았을 때 느끼는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그와 동시에 상당 부분 부담으로 느끼고 있는 마음도 혼재되어 있는 정신구조를 가리킨다. 우리의 '은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뉘앙스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사랑해 주고 키워 준 부모님이나 다양한 편의와 호의를 베풀어준 고용주, 그리고 친절하게 지도해 준 선생님에게 은혜를 느끼는 법이다. 이러한 점은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에서는 이럴 경우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존경심과 충성심을 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때가 되면 선물을 보내는 일본인들의 습관은 바로 이와 같은 사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한다고 느끼는 정도가 거의 사회규범 내지는 의무감의 경지에 와 있는 것이 일본인들의 온(恩)이 지니는 정신구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개념에 진실한 인간적인 유대감과 교류가 바탕이 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점이 한국어의 은혜와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어의 '기리(義理, ぎり)' 역시 한국어의 '의리(義理)'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기리는 어떤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해야만 하는 의무에 가까운 개념이다. 인간관계에서의 기리는 온에 보답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면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에게 반드시 답례를 해야 함을 말한다.
봉건시대 무사들에게 있어 기리라는 것은 주군(主君) 즉, 영주로부터 받은 영지나 가록(家祿, かろく)7)과 같은 은혜에 대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주군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 즉, 조선시대 선비들의 의리, 말 그대로 의롭고 이치에 맞는 의리의 개념에 비해 일본의 기리는 계약적인 성격이 짙고, 이것이 그대로 사회규범이 된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닌조(人情, にんじょう)는 부모 자식 간이나 연인과 같은 인간관계에서 상대에 대해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즉 사랑, 연민, 동정, 슬픔 등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닌조가 사회적인 기리와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봉건시대의 일본에서는 때로는 기리와 닌조가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주군의 자식을 구하기 위해 자기 자식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무사의 이야기나, 혹은 신분이 다른 계층 간의 결혼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제도 때문에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을 위해 자살을 하는 연인들의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일본인들은 기리와 닌조의 대립과 갈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경우 닌조를 희생하고 기리를 내세우는 것이 일본인들의 전통적 정신세계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31) 온천
일본은 화산국(火山國)이기 때문에 홋카이도(北海道, ほっかいどう)에서 오키나와(沖縄, おきなわ)까지 전국에 걸쳐 온천이 분포되어 있고, 그 수는 3100개소를 넘고 있다. 온천은 부상이나 질병을 치유하는 데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에도시대부터 온천은 농한기의 농민들이 농작업에 의한 부상이나 피로를 치유하는 데 이용되었고 그들이 장기적으로 체재하는 시설이 온천지역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점차 장기체재는 단기체재로 변화되어 오늘날에는 온천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숙박을 하지 않고 당일 중에 귀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노천온천
오래된 목조건물의 온쳔여관
32) 와비(侘)
와비(侘, わび)는 세속적인 만사에서 해방된 한적함 안에서 정취 있는 생활의 기쁨을 내세우는 일본인 특유의 미학적, 윤리적 개념이다. 중세 일본의 은자(隠者)들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는데, 꾸밈 없는 간소한 아름다움과 속세를 초월하려는 은둔과 자적(自適)의 정신을 강조한다. 다도 미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 근세 일본의 전통시가인 하이쿠(俳句, はいく)8) 등에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 정신은 풍류(風流)나 사비(寂, さび)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와비는 일본어 동사 '와부(侘ぶ)'(낙담하다)나 형용사 '와비시(侘びし)'(고독하다)가 그 어원으로, 원래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의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가마쿠라시대와 무로마치시대의 수행자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보다 긍정적인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즉, 가난이나 고독을 물질적, 정서적인 근심사로부터의 해방으로 파악하고 표면적인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새로우면서 한 단계 차원을 달리하는 고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미의식의 양성에 힘을 기울인 것은 특히 다도의 달인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센노리큐(千利休, せんのりきゅう : 1522~1591)는 다도에 선(禪)의 정신을 도입함으로써 다도의 예술성을 높이고자 했고, 청빈함 속에서 풍요로움과 간소함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 일본 재벌 총수들의 검소한 전통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와비(詫び)의 정신이 현대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그만큼 일본인들에게는 친숙한 미적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33) 이에모토(家元)
꽃꽂이, 다도, 무용, 노(能), 교겐(狂言) 등과 같은 고전예능 분야에서 각 유파(流派)의 전통이나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는 집안이나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종가(宗家)라고도 한다. 이에모토(家元, いえもと)는 계층적 조직인 제자들의 최상위 위치에서 예명(藝名)의 명명권(命名權)이나 면허 장의 발행권을 지니고 있으며 그 지위는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모토가 유파를 관리하고 기술을 전수해 가는 시스템을 이에모토제도라고 하는데, 그 시작은 헤이안시대 귀족사회 가운데서 일본의 전통음악인 아악(雅樂)이나 고전시가인 와카(和歌) 등의 기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이 만들어진 것에서 찾을 수 있고,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 かまくらじだい)에는 무예를 전문으로 하는 가문이 나타났고,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むろまちじだい)에는 노(能, のう), 교겐(狂言, きょうげん), 향도(香道, こうどう), 다도(茶道, さどう) 등 여러 분야에서 유파와 이에모토가 성립했다.
이에모토제도가 확립된 것은 에도시대(江戸時代, えどじだい)인데, 그 배경으로서 에도를 비롯한 전국의 도시에 부유한 상인계급이 형성됨에 따라 이들이 각종 예능의 수요자가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모토제도는 전통의 계승과 유파의 결속 등의 면에서 유효한 제도라고 할 수 있으나 반면에 유파의 폐쇄성, 불투명한 자금 상납 시스템 등의 폐해도 지니고 있다.
34) 일관교육(一貫敎育)
사립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는 그 대학에 진학하는데 일정 부분 우선권이 주어져 입학 경쟁이 치열하다. 그 중에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까지 부속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또한 도쿄나 간사이 지방에서는 사립 중고교 일관교육을 실천하는 학교도 많아 대학 진학 성적이 좋은 학교는 중학교 입시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35) 일본인론(日本人論)
일본인론(日本人論)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인의 아이덴티티(정체성)를 밝혀내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자신은 물론 외국인의 시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론에 의한 일본인론이 제시되어 왔다.
일본인론은 주로 근·현대 일본인의 행동양식 및 생활양식의 특질을 밝혀내는 것으로서 일본문화론의 논리를 규명하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 문화는 일본이 근대화되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리고 그 근대화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서 일본인의 집단주의가 자주 거론되어 왔다. 이는 서구형 근대사회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서양의 근대사상을 체계적으로 일본에 소개한 일본 최초의 사상가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ふくざわゆきち)9)이다. 후쿠자와는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1875)에서 자신의 문명론을 '중심발달론(衆心發達論)'이라 칭하며, 민중정신의 발달이 곧 문명의 발달이라고 주장했다.
메이지시대 말기에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なつめそうせき : 1867~1916)가 일본의 근대화를 위기상황으로 보고 일본은 착실하게 문명개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자기본위가 아닌 서구의 외압에 의한 급격한 개화, 소위 근대화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을 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일본문화론은 대부분 주관적이고 국가의식이 강한 국수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그 중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 わつじてつろう : 1889~1960)는 『풍토(風土)』(1929)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표면상의 생활양식이 바뀌더라도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일본 민족의 성격은 풍토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와쓰지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조용한 격정과 희생적 전투심'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가족적 결합, 황실을 종교시하는 가족국가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러한 국수주의적 문화론을 대신해 과학적 연구에 의한 일본인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菊と刀)』 이다.
『국화와 칼(菊と刀)』 표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그의 저서 『국화와 칼(菊と刀)』(1948년)에서 일본 문화의 특징을 크게 '집단주의(集團主義)'와 '수치의 문화(恥の文化)'10)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 집단주의는 일본의 근대화와 현재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낸 기본 요인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베네딕트는 한번도 일본에 가 본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정신세계와 문화의 전체상을 생생하게 그려냈는데, 그 방법은 문화상대주의에 따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로도 많은 일본문화론이 등장했는데, 대체로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외국 또는 이문화(異文化)와 비교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를 강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공통된 문화를 일본만의 것으로 잘못 인식해 서술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36) 전별(餞別)·미야게(みやげ)
전별(餞別, せんべつ)이란 일과 관련해 먼 곳으로 부임하거나 여행하는 사람에게 그를 격려하고 아쉬움을 표하기 위해 전해주는 금전이나 선물 등을 말하고, 미야게(みやげ)는 여행지에서 구입하여 가족이나 친지, 이웃 사람들에게 선물로 전하는 여행지의 산물(産物) 또는 아는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 가지고 가는 선물을 말한다. 전별은 현금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고 여행시의 미야게는 여행지의 명물이나 특산품, 예를 들면 과자 등의 식품이나 소박한 공예품이 많다.
37) 정년이혼(定年離婚)·숙년이혼(熟年離婚)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서 결혼 기간이 30년 이상 경과한 장년·노년층의 이혼이 사회문제가 되었다.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실직과 부채 등에 따른 가정의 경제 상황 악화로 부부가 이혼에 이르는 사례도 많지만, 남성 우월적인 가정 생활에서 남편의 멸시와 비인격적인 처우에 인내의 한계를 느껴 이혼에 이르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남편이 정년을 맞아 연금을 수령 할 자격을 얻게 되면 그 이후 이혼한 배우자에게도 남편의 직장 연금을 공동으로 수령할 수 있는 자격이 인정된다.
결혼건수와 이혼율
| 연도 | 결혼건수 | 이혼건수 | 이혼율 | 남 초혼율 | 여 초혼율 |
|---|---|---|---|---|---|
|
1930 |
506,674 |
51,259 |
0.80 |
86.3 |
91.8 |
|
1940 |
666,575 |
48,556 |
0.68 |
87.1 |
92.5 |
|
1950 |
715,081 |
83,689 |
1.01 |
... |
... |
|
1960 |
866,115 |
69,410 |
0.74 |
90.3 |
93.8 |
|
1970 |
1,029,405 |
95,937 |
0.93 |
91.7 |
94.0 |
|
1980 |
774,702 |
141,689 |
1.22 |
89.2 |
90.5 |
|
1990 |
722,138 |
157,608 |
1.28 |
86.6 |
88.3 |
|
1995 |
791,888 |
199,016 |
1.60 |
86.8 |
88.4 |
|
1996 |
795,080 |
206,955 |
1.66 |
86.6 |
88.3 |
|
1997 |
775,651 |
222,635 |
1.78 |
86.4 |
87.9 |
|
1998 |
784,595 |
243,183 |
1.94 |
86.1 |
87.6 |
|
1999 |
762,028 |
250,529 |
2.00 |
85.6 |
87.2 |
|
2000 |
798,138 |
264,246 |
2.10 |
85.0 |
86.6 |
|
2001 |
799,999 |
285,911 |
2.27 |
84.3 |
86.0 |
|
2002 |
757,331 |
289,836 |
2.30 |
83.7 |
85.2 |
|
2003 |
740,191 |
283,854 |
2.25 |
82.9 |
84.6 |
|
2004 |
720,417 |
270,804 |
2.15 |
82.2 |
84.1 |
|
2005 |
714,265 |
261,917 |
2.08 |
81.8 |
84.0 |
『現代日本人の意識構造 第六版』 (NHKブックス. 2004)
38) 주신구라(忠臣蔵)
1702년에 구 아코번(舊赤穂藩, きゅうあこうはん)의 무사 46인이 주군의 원수를 갚은 사건을 제재로 한 조루리(浄瑠璃, じょうるり)와 가부키(歌舞伎, かぶき) 등의 작품을 말한다. 사건은 1701년 교토에서 에도성에 온 천황사절의 접대역이었던 아코번(赤穂藩, あこうはん)의 영주인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 あさのながのり)가 지도역(指導役)인 기라 요시나카(吉良義央, きらよしなか)에게 칼로 부상을 입힌 것으로 시작되었다.
칼부림을 한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사노 나가노리는 에도성안에서 무기를 지참할 수 없다는 법을 위반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바로 자결할복에 처해짐으로써 아사노가(浅野家)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상대측인 기라 요시나카에게는 아무런 처벌도 주어지지 않았다. 사건 다음 해인 1702년, 아사노가의 단절로 주군이 없는 낭인(浪人)이 된 가신들 중 46인이 기라 요시나카의 저택을 습격해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묘에 바치는 복수극을 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46인의 처리를 놓고 막부 내에서는 충의의 행위인가 아니면 현행법을 위반한 범죄인가 라는 논쟁이 벌어졌는데, 결국 전원 할복이라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들의 행위는 서민들 사이에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켜 그들은 아코의사(赤穂義士, あこうぎし)라고 불려지게 되었고, 사건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현재에도 매년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는 등 일본의 대표적인 국민극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신구라의 주인공들이 주군인 아사노 나가노리(浅野長矩)와 함께 묻혀 있는 도쿄 미나토구(港区)의 센가쿠지(泉岳寺). 주신구라 팬들의 참배가 끊이지 않는다.
39) 천황(天皇)과 원호(元號)
천황(天皇, てんのう)이라는 칭호는 7세기 전후에 일본 통치자에 대해 처음 사용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군주(君主)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여자천황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남계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지배자로서 간주되어 왔으나,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의 최고 사제로서 그 역할이 강조되었을 뿐, 정치 권력의 상당 부분은 실무진에게 맡겨져 왔던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메이지시대(明治時代)에 들어 왕정복고(王政復古)라는 슬로건 아래 천황이 정치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상징으로서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패전을 맞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패전 후 천황의 지위는 전후(戰後) 일본 헌법에 의해 일본 및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었다. 천황에게는 정치적인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헌법으로 정해진 국가의식에서 의례적인 역할을 하도록 했다. 주요 임무로는 정부관계의 서류에 서명, 날인하는 것 외에 국회를 소집하거나 국무대신의 취임을 승인하고 공식 만찬회 등을 열어 외국 사절을 접대하는 것 등이 있다.
한편 일본 최초의 공식 원호(元號(げんごう). 年號(ねんごう)라고도 함)는 645년(大化, たい化か 1년)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것을 의심하는 설도 있다. 701년(大宝, たいほう 1년) 이후부터는 연속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예전에는 천황 1대에 몇 개의 원호가 사용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메이지시대 이후 일세일원(一世一元, いっせいいちげん)이 되었고, 원호를 따 메이지천황(明治天皇, めいじてんのう), 다이쇼천황(大正天皇, たいしょうてんのう), 쇼와천황(昭和天皇, しょうわてんのう)이라고 부르고 있다. 쇼와천황이 사망하고 현재의 아키히토천황(明仁天皇, あきひとてんのう)이 대를 이은 1989년부터 현재의 원호인 헤이세이(平成, へいせい) 1년이 시작되었다.
40) 풍류(風流)
일본어로 후류로 발음하는 풍류(風流, ふうりゅう)는 교양 있고 세련된 인간의 우아한 취향 내지는 그러한 인간이 지니는 예술 작품 등을 지칭하는 말로, 한국어의 '풍류(風流)'와 어원이 같고 뜻도 비슷하다. 원래는 좋은 행동과 작법을 의미하는 중국어로서 8세기경에 일본에 전해졌다. 처음에는 심미적인 의미로 궁정인들의 세련된 행동양식을 의미했는데, 훗날 우아한 아름다움이나 취향, 예술성이 있는 사물에 관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뜻으로 풍아(風雅)라는 말이 있는데, 풍류(風流) 쪽이 시가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 전반에 폭 넓게 사용되고 있다.
12세기가 되면서 일본인들은 풍류의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대중예술에서 나타나는 보다 세속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풍류라고 보았고, 또 하나는 정원이나 꽃꽂이, 건축, 중국의 서경시(敍景詩) 등에 나타나는 아름다움 안에서 풍류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 후자의 흐름이 무로마치시대에 다도(茶道)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근대에는 작가 고다 로한(幸田露伴, こうだろはん)11)이 쓴 단편소설 『風流仏(ふうりゅうぶつ)』(풍류불. 1899년)에서 '風流'라는 이름으로 사랑과 예술, 종교의 통합을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なつめそうせき)는『草枕(くさまくら)』(풀베개. 1906년)에서 풍류에 정과 인간성을 쏟아넣음으로써 이 개념을 되살리고자 했다.
41) 하쓰유메(初夢)
신년 1월 1일이나 2일에 처음으로 꾸게 되는 첫꿈을 말한다. 하쓰유메(初夢, はつゆめ)의 내용에 따라 그해의 길흉을 점쳤다. 좋은 꿈을 꾸기 위해서는 베개 밑에 보물선 그림을 넣고 자면 된다는 속설이 있다. 또 이 첫 꿈에 나타나서 좋은 것으로는 「후지산, 매, 가지」의 순이라고 한다.
42) 하지(恥)·세켄테이(世間体)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국화와 칼(菊と刀)』(1946년)에서 일본의 문화는 전형적인 하지(恥, はじ) 즉, 수치심을 생각하는 문화라고 단정지었다. 그녀의 이 하지(恥) 이론은 일본인의 대인관계를 둘러싼 다양한 모습들을 너무 단순화시킨 면은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는 키워드이다. 이 하지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타인의 비판, 조소, 반대 등을 피하기 위한 행동 기준을 세우고 있어서 자신의 나쁜 행위가 타인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켄테이(世間体, せけんてい)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정신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하지의 감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은 죄를 범하는 자체보다 그것으로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고 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나쁘게 보지않을까 하는 걱정, 즉 타인을 의식하는 행위와 사고가 세켄테이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공중도덕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일본인의 심리 안에는 바로 이러한 세켄테이의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으로,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선악의 판단이 우선이 아니라는 지적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43) 호간비이키(判官贔屓)
요시쓰네 사당(義経堂) - 이와테현(岩手県) 히라이즈미초(平泉町)에 있는 비극의 무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를 제신으로 모시는 사당.
약자를 동정하거나 편드는 심정을 말한다. 헤이안시대 말기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みなもとのよしつね)의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かまくらばくふ)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 みなもとのよりとも)의 이복동생으로 적인 다이라씨(平氏, たいらし) 타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내부의 대립과 교토의 황실에 의한 이간공작에 의해 요리토모에게 밉보이게 되었고 결국 요리토모에게 공격을 당해 자살했다.
요시쓰네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가부키와 조루리의 여러 작품으로 만들어졌고, 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몰락하고 마는 비극의 주인공에게 공감하는 일본인들에게 인기작품이 되었다. 호간(判官, ほうがん)은 관직명으로 요시쓰네를 가르키는 것이고 히이키(贔屓, ひいき)는 편든다는 뜻인데, 이렇게 약자와 불행한 사람에게 동정심을 표하는 것을 호간비이키(判官贔屓, ほうがんびいき)라고 말하게 되었다.
44) 후지산(富士山)
일본을 대표하는 후지산(富士山). - 주위에 큰 산이 없는 단독 봉우리라서 먼 지역에서도 쉽게 관망할 수 있다.
후지산(富士山, ふじさん)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3,776m에 달한다. 18세기 초에 큰 분화(噴火)가 일어난 뒤로 그 이후에는 분화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원추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차지하는 지역이 매우 광활하다. 정상 부근은 1년 내내 거의 눈이 쌓여 있으며 그 모습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또한 맑은 날에는 100㎞ 이상 떨어진 도쿄지역에서도 그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후지산을 전통적인 일본의 모습으로 간직해 왔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1) 히간에(彼岸会): 춘분·추분을 중심으로 한 7일간 행하는 법회.
- 2)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가리킨다. 인(印)이란 인신(印信)·표장(標章)의 뜻으로 일정 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 3) 후지와라노 슌제이(藤原俊成): 1114~1204. 좌우 두 편으로 나누어 시가 짓기 대결을 벌여, 그 우열을 가리는 우타아와세(歌合)의 심판이었다. 육백번우타아와세(六百番歌合)와 시가에 대한 이론서인 『고라이후테이쇼(古来風体抄)』를 남겨 헤이안시대 말기와 가마쿠라시대 초기에 걸친 과도기 와카의 변천을 보여 주었다.
- 4) 신케이(心敬): 1406~75. 무로마치시대의 렌가시(連歌師).
- 5) 고담(枯淡)의 정취: 글·그림·글씨·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 6) 아와레(あわれ): 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 7) 가록(家祿): 집안 대대로 물려가며 받았던 봉록(俸祿).
- 8) 하이쿠(俳句): 5·7·5의 3구 17음절로 된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계절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계어(季語)를 꼭 넣어야 하는 규칙이 있다.
- 9)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4~1901. 교육가. 계몽사상가. 게이오기주쿠(慶応義塾)대학의 창립자. 실학을 장려하고, 부국강병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으며, 「서양사정」, 「학문의권장」 등을 통해 국민의 교육과 계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철저한 국수주의자로서 아시아를 경시하는 '탈아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 10) 수치의 문화(恥の文化):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특징을 집단주의·수치의 문화라는 개념으로 결론지었는데, 도덕적 기준을 죄의 내면적 자각(죄의 문화)에 두고 자신을 다스려 가는 서구의 문화에 대해, 일본의 문화는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타인의 비판을 기준으로 삼는 수치의 문화라고 했다.
- 11) 고다 로한(幸田露伴): 마치 우리나라의 신소설 같은 다소 구어체적인 문체와 권선징악적 주제를 다룬 그의 작품으로는 『風流佛』(풍류불. 1889), 『五重塔』(오층탑. 1891) 등이 있는데, 예도(藝道)에 정진하는 남성상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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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번은 실수라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며칠 전에 자그니님이 한국 사람으로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라는 포스팅을 했는데, 이제는 일본 정부의 문양에 대한 공부도 그 목록에 추가시켜야 할 지경이다. 얼마 전에 위의 포스팅을 남겼더니 그 내용에 대해 몇 분이 오류를 지적해 주었다. 오동나무 문양을 사용한 것을 일본의 도발로 받아들이는 것은 과하다는 지적이었다.
뭐? 이게 조선 총독부의 문장이라고?
확실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블로그는 참 웃기는 게 내가 뭐 하나 글 쓰다 꼬투리 잡힐만한 일이 있다싶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검은색 닉네임들이 두더지 머리 디밀듯이 머리를 내밀면서 '드디어 너도 끝장이다' 식의 댓글을 남긴다. 왠만하면 같은 수준에서 놀아줄 수 있지만, 요 며칠 좀 본의아닌 소란을 벌인 터라 당분간 조용히 지내자는 뜻에서 그냥 지워버렸다.
아무튼 저 글의 요지는,
1. 오동나무 문장은 도요토미 가문의 일부에서 사용한 문장이 맞긴 하므로,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 메이지 유신 시대에 저 문장이 일본 수상과 정부의 문장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조선총독부에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확인 못함)
3. 그렇지만 그 문장을 사용한 것을 일본의 도발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4. 오동나무는 워낙에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문양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없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고,
5. 일본정부에서 저 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3년도부터이니 그 전에 저 문장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6. 다른 외국 정상들이 참석한 자리에서도 이 문장은 써왔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너무 확대해석하지 말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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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일본 정부 문양도 공부해야 하는 세상이 왔구나.
이명박 대통령도 오동나무 문양
저게 전부 도발이면 위 사진의 고시치기리 단상은
2차대전때 함께 연합국에 맞써 싸웠던 핀란드에 대한 예우로 꺼내쓴거랍니까?
결국, 한국 대통령 방일때 꺼내 써서 의도적으로 도발하는 거라는 것은 근거없는 소리.
욱일승천기나 나치 철십자 같은 민감한 도안도 아니고,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널리 쓰이던 문장이고,
메이지 시절 이후로 쓰여왔던 총리/정부 문장에다가 시비거는건,
편협한 시각으로 보면 식민지 컴플렉스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시비를 걸다 보면, 현 일장기도 욱일승천기 축소판이라면서 치워버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양국 정상회담이라는 중요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문양을 치우라고 하는건 약간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논란이 나오는 것도 일본측이 제대로 사과를 안 했기 때문에 나오는 문제라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쥐새끼 한마리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들썩 하는 시점에서,
이런 낭설을 기사화 한다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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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이분의 시각이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게 전부 도발이면 위 사진의 고시치기리 단상은
2차대전때 함께 연합국에 맞써 싸웠던 핀란드에 대한 예우로 꺼내쓴거랍니까?
2차대전 무렵 핀란드가 바라보는 일본과 우리가 바라보는 일본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유하면 안 된다는 것쯤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욱일승천기나 나치 철십자 같은 민감한 도안도 아니고,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널리 쓰이던 문장이고,
메이지 시절 이후로 쓰여왔던 총리/정부 문장에다가 시비거는건,
편협한 시각으로 보면 식민지 컴플렉스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식의 시비를 걸다 보면, 현 일장기도 욱일승천기 축소판이라면서 치워버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분 말마따나 이 문양이 메이지 시절부터 일본의 총리/정부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이용되어 왔다면 욱일승천기나 나치 철십자 만큼 민감한 도안은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민감한 도안임에는 틀림없다. 욱일승천기나 철십자는 군대의 상징이라면 오동나무는 정부의 상징, 대중들에게는 욱일승천기나 철십자기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는 못하더라도 상대 정부에게는(특히 한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쾌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 문장이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쓰이는 문장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일본 정부는 무엇 때문에 2003년 이전까지 이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다음 사진과 비교해보면 이 문장 관련된 시비를 단순히 낭설로 취급할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우선 많은 분들이 일본 하면 벚꽃과 국화(菊花)를 쉽게 떠올리실 텐데요.
먼저 벚꽃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게요~
벚꽃은 벚나무 라고도 하는데요, 장미목 장미과의 식물입니다. 일본에서는 벚꽃으로 봄을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벚꽃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하나미(벚나무 아래에서 자리를 잡고 음식 등을 먹으며 벚꽃을 구경하는 것)는 왠만하면 빼먹지 않는 연례행사일 정도로 일본인들은 벚꽃을 아끼고 사랑하죠~
그런데 벚꽃의 원산지가 한국이라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제가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갔을 때 버스기사 아저씨가 열변을 토하며 말씀해 주셔서 처음 알았는데요, 제주도의 한라산이 원산지라고 합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드릴께요^-^
1900년대에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벚꽃이 널리 재배되고 있었기에 자생지(自生地, 식물이 저절로 나서 자라는 땅) 또한 일본에 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벚꽃의 자생지를 찾을 수가 없었는데요. 그러던 중 1908년 4월 15일, 타케 라는 신부가 지금의 한라산 국립관리사무소 관음사 지소 일대로 추정되는 곳에서 세계 최초로 벚꽃의 표본을 채집했다고 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 이외에는 벚꽃의 자생지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니, 벚꽃은 우리나라의 토종 꽃나무 라는 거죠~ 어때요? 놀랍지 않으세요~? @.@
저도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길가에 벚나무가 심어져 있거나 하면 굉장히 기분 나빠하고 그랬었거든요. 무궁화도 있고 개나리도 있고, 예쁜 꽃나무들이 많은데 굳이 일본 나무를 우리나라에 심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나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벚나무는 토종 한국의 꽃나무 이니까 이제는 길가의 벚나무들을 보면 뿌듯한 마음으로 구경할 수 있을거 같아요~ >. <
벚꽃과 함께 일본을 상징하는 꽃으로는 국화가 있습니다!
동척 오동나무 꽃 문양 정면에서 찍은 4개의 꽃임 문양을 도요토미 사무라이 옷에서 볼 수 있다. 도요토미는 5 7 동 오동나무 꽃 문양을 황제로부터 받아 가문의 문양을 오동나무로 햇다. 상의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뜻으로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 꽃으로 문양을 새겼다.
1. 오동나무에 꽃이핍니까?
네
2. 꽃이 핀다면 몇살부터 몇년주기로 핍니까?
5~6월에 매년 핍니다.
3. 꽃의색갈과 크기, 형태는 어떠합니까?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지며 열편은 긴 난형이고 첨두이며 서기도 하고 퍼지기도 하며 양면에 잔털이 있다. 화관은 길이 6cm로서 자주색이지만 참오동나무와는 달리 세로로 된 자주색 줄이 없으며 후부(喉部)는 황색이고 내외부에 성모와 선모가 있으며 이강웅예(二强雄蘂)는 털이 없고 자방은 난형으로서 털이 있다.
라고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나와있네요...^^;
학명은 Paulownia coreana UYEKI이다. 원산지는 울릉도로 추측된다. 참오동나무와 같이 자라며 외모가 비슷하지만 잎 뒷면에 다갈색 털이 있고 화관(花冠)에 자줏빛이 도는 점선이 없는 점이 다르다. 높이는 15m에 달하고 뿌리는 천근성(淺根性)이다.
잎은 마주나고 난상원형 또는 타원형이지만 흔히 5각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밑은 심장형이다. 길이 15∼23㎝, 너비 12∼29㎝로 표면에는 털이 거의 없고 뒷면에는 갈색 성모(星毛)가 많으며, 잎자루는 9∼21㎝로 잔털이 있다. 꽃은 5, 6월에 잎보다 먼저 피며 가지 끝의 원추화서(圓錐花序:둥근 뿔 형태의 꽃차례)에 달린다.
화관은 길이 6㎝ 정도로 자주색이지만 끝부분은 황색이고 안팎에 성모와 선모(腺毛)가 있다. 과실은 삭과(蒴果:여러 개의 씨방으로 된 열매)로 구형이며 10월에 성숙하고 삭과당 종자수는 2,000∼3,000개이다.
최근 오동나무재배가 크게 각광을 받게된 것은 1년에 1∼2.5m씩 자라며 6·7년이면 가슴높이지름이 20∼25㎝에 달하는 등 생장이 빨라 자본회수기간이 짧을 뿐 아니라 목재의 용도가 다양하여 기업림 조성은 물론 농촌부업림으로 매우 유망하기 때문이다.
생태
현재 우리 나라에 재배되고 있는 것은 오동나무·참오동나무·대만오동나무 등 3종류이며 재배가능지역은 중부 이남의 높이 400m 이하의 마을부근의 비옥한 땅이다.
이 중 참오동나무가 많이 재배되고 있는데, 이는 재목이 회백색 또는 은백색으로 탄력성과 광택이 있어서 공예적 용도에 좋고, 다른 종에 비하여 비교적 내한성(耐寒性)이 강하여 -25℃에서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 이하로 기온이 급강하하면 피해를 받는다.
오동나무는 수광량(受光量)이 많고 바람의 피해가 적고, 양분이 많으며 토심이 80∼90㎝이고 아래에 사력층이 있어 과습하지 않고 물이 잘 빠지는 곳이 좋다. 특히, 병균의 침해를 잘 받으므로 재배상의 기술과 주의를 요한다.
효능 및 기능
오동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나 가볍고 방습과 방충에 강하므로 장·상자·악기류 제작에 좋다. 따라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딸을 낳으면 뜰안에 오동나무를 심어 결혼할 때 장을 만들어 주었다. 또, 오동나무의 껍질은 동피(桐柀)라 하여 약재로 쓰였다.
약성은 한(寒)하고 고(苦)하며, 소종(消腫)·양혈(凉血)의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옹종(癰腫)·창종(瘡腫)·치질(痔疾)·단독(丹毒)·질타손상(跌打損傷)에 치료제로 쓰인다.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는 법복을 입었을까요. 이 열사는 고종황제가 설립한 법관양성소를 1기로 졸업한 뒤 1906~1907년 검사로 일했습니다. 당시 고종황제는 법관과 검사들에 대해 법복을 입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박물관에도 양복을 입은 이준 열사의 사진만이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판사와 검사는 임관식장에서 법복을 지급받습니다. 법조인으로서 첫 출발의 마음가짐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법복의 역사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현택 기자
법복은 법정 권위 상징
법복은 법정의 권위를 상징한다. 공정과 지혜, 양심의 의미를 내포한다. 많은 국가가 법률 등에 재판정에 들어서는 판사와 검사의 법복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미국 판사들의 법복은 대학 학위복과 유사하다. 미국의 초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존 제이(John Jay, 1745~1829)가 킹스칼리지(컬럼비아대의 전신) 졸업 때 입었던 학위복을 법원에서 즐겨 입은 것이 기원이 됐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법정에서 판사들이 가발을 쓰는 게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졌다. 변호사도 법복과 가발을 착용한다. 법이나 규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17세기 이후 내려온 전통이다. 변호사가 되면 받는 선물이 가발일 정도다. 가발 착용 반대론자들은 “불편하고 비싸며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상당수 법관은 “가발이 권위 있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며 찬성한다. 영국 대법원은 2008년 1월 민사재판에 한해 가발 전통을 폐지했다. 형사재판에서는 가발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독립 초기에는 법조인들이 가발을 썼다. 그러나 4대 대법원장인 존 마셜이 가발 전통을 없앴다.
중국에서는 판사들이 20세기까지 군복을 입었다. 최근에야 서양식 법복을 입기 시작했다. 전제적인 기존의 이미지 대신 국민의 분쟁을 해결해주는 역할이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흔히 판결을 할 때 ‘법봉을 두드린다’는 표현을 한다. 법정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판사가 선고를 하면서 법봉을 두드리는 장면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국 이후 법봉이 도입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기 때문이다. 신동훈 대법원 홍보심의관은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법정에서 법봉이 사용되지만 국내 법원에서는 법봉을 쓴 적이 없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는 법정에서 휴대전화 사용이나 소란을 피우는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2001년 법봉이 도입됐다.
국내 법복 도입은 고종황제가 시초
우리나라에 법복이 도입된 것은 1906년 고종황제가 ‘평리원 이하 각 재판소 사법관 및 주사 재판정복 규칙’을 반포하면서다.
판사 법복
고종은 1895년 갑오개혁 당시 재판소 구성법을 제정·공포하면서 판·검사를 임명했다. 오늘날 사법연수원 격인 법관양성소를 설립하는 등 근대 사법제도를 창설했다.
1906년 마련된 규칙에 따르면 검정 두루마기에 대(帶), 검정 모자, 검정 신발을 착용하게 했다. 판사는 자색, 검사는 주황색, 주사는 녹색으로 깃과 속대의 색깔을 달리해 구별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판·검사들이 재판정복을 착용한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헤이그 특사’ 이준(1859~1907) 열사도 이 당시 검사 생활을 했지만 법복을 입은 사진은 남아있지 않다. 남아있는 사진들은 대개 이준 열사가 양복을 입고 촬영한 것이다. 1895년 법관양성소 1기로 졸업한 그는 1906~1907년 1년간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로 일했다.
일제시대에는 오동나무 꽃 수놓은 법복
일제시대 들어 일본의 법복과 동일한 상의와 모자를 착용하게 했다. 1911년 조선총독부는 판사와 법원 직원에게 총독부 복식을 강요했다. 이 때문에 법정에서 칼을 차고 재판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풍경이 연출됐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직후 칼을 차는 규정은 폐지됐다. 1920년 10월 일제는 ‘조선총독부 재판소 직원 복제의 관한 건’을 시행해 일본식 법복이 도입됐다. 판사와 검사는 오동나무 꽃과 당초무늬가 수놓인 검정색 법복을 입고,구름무늬가 새겨진 검은 법모를 착용했다. 오동나무는 일본왕의 상징이다. 재판소 서기는 깃에만 녹색 당초무늬가 자수된 검은 법복을 입었고 무늬 없는 법모를 썼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식 법복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판·검사들은 두루마기나 양복 등 평상복을 입고 법정에 들어섰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던 이인(1896~1979) 선생은 “짝짝이 구두에 떨어진 양복을 입은 대법관들이 태반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이후 미 군정에서 법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1946년 법관의 법복을 새롭게 정했지만 시행하지는 못했다.
1953년 한국 최초의 ‘무궁화 무늬 법복’ 도입
대한민국 최초의 법복이 도입된 것은 1953년 3월이다. 대법원은 ‘판사·검사·변호사 및 법원서기 복제 규칙’을 제정했다. 소매가 넓고 가슴 부위에 무궁화 문양이 수놓인 검은색 법복이었다. 문양의 색깔은 판사가 흰색, 검사가 황색, 변호사가 자색이었다. 법모는 무궁화 문양에 태극장이 수놓아졌다. 법원서기는 무늬 없는 법복에 청색 자수 법모를 썼다.
하지만 오동나무 무늬가 무궁화로 바뀐 것 외에 일제시대 법복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와 1966년 법복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된다. 미국의 법복을 참고해서 제작됐다. 대학 졸업식에서 입는 학위복과 유사하게 만들어졌다. 법모는 이때부터 쓰지 않게 됐다.
1966년 대법원은 검사와 변호사의 법복에 관한 규정을 삭제했다. 하지만 법무부에서 자체적으로 제정한 검사의 법복 역시 판사의 법복과 비슷하게 제작됐다.
오늘날 법정에서 볼 수 있는 법복은 1998년 사법 50주년을 맞아 개정된 것이다. 검은색 천에 자주색 띠가 가미됐다. 판사의 경우 법원 로고가, 검사의 경우 무궁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여성 판·검사 넥타이는 어떻게?
법조계에 넥타이 문제가 대두된 것은 1966년 법복 개정 때부터다. 이전까지 입던 무궁화 무늬 법복은 상체의 전부를 가리기 때문에 넥타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었다.
검사 법복
1992년 9월 대법원이 남성 판사의 넥타이를 검은자주색으로 통일하기 전까지는 관례적으로 흰색 사선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썼다. 여성 판사의 경우에는 1973년 검은색 줄로 넥타이를 대신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1986년부터는 별도 규정을 두지 않고 있다.
1998년 대법원이 법복을 다시 한 번 바꾸면서 넥타이가 변했다. 남성 판사의 경우 짙은 회색에 법원 문양이 새겨진 넥타이가, 여성 판사에게는 두 번 접힌 모양의 은회색 에스코트타이가 지급됐다. 검사의 경우 여성에게만 무궁화 무늬가 새겨진 회색 민짜형 에스코트타이가 보급됐다.
넥타이는 여름철 더위를 가중시키는 주범이다. 서울지역의 한 여성 검사는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에스코트타이를 하지 않고 법정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판사나 남성 변호사의 경우 넥타이를 하고 법정에 들어가야 한다. 지난해 6월 대한변호사협회는 “여름철에 법정에서 넥타이를 매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는 “법정의 권위가 훼손될 수 있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검사는 공판검사만 법복 입어
현재 검사의 경우 법정에서 공판을 담당하는 공판부 검사만 법복을 입는다. 수사를 맡는 수사검사는 법복을 입지 않는다. 수사검사의 경우 본래 수사를 전담하고 법정에서 공판에 참여하는 것이 본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굵직한 사건의 경우 수사검사가 직접 공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대부분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입장한다.
수사검사가 법복을 입지 않는 이유는 법복이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모든 신규 임용 검사에게 법복이 지급된다. 임관식에서 신규 임용 검사 전원이 법복을 입고 임명장을 받는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검사들은 공판부에 배치될 때만 법복을 받고 그 외에는 법복을 법무부에 반납했다.
올해 초 변호사 법복 ‘부활’ 논란
변호사는 1966년 대법원 규칙에서 변호사의 법복에 관한 조항이 삭제되면서 법복을 입지 않게 됐다. 오늘날 변호사들은 대개 검은색 양복에 변호사 배지를 착용한 채 법정에 나타난다.
하지만 변호사 업계 일각에서는 변호사가 형사사건에서 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일한다는 뜻으로 희망자에 한해 법복을 입게 해달라는 주장이 있었다. 서울변호사회는 올해 초 “변호사 중 희망자에 한해 형사 법정에서 법복을 입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공문을 법원행정처에 제출했다. 법정에서 변호사도 검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변호사의 책임 의식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서울변회의 회원 변호사 자체 설문조사 결과 “구시대적 발상이며 법복 지참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응답자의 53.7%가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법원경위에게는 ‘금배지’ 있어
법정에 재판부가 들어서면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라고 근엄하게 당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법정 질서를 잡는 법원 경위들이다. 이들은 재판 중에도 엄숙한 표정으로 서서 방청석을 지켜본다. 법정에서 방청객이 떠들면 제지하는 것은 물론, 휴대전화를 사용할 경우 퇴장시킬 수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녹취를 하거나 사진을 촬영하면 삭제하는 것은 물론 며칠간 감치시킬 수도 있다. 법원경위는 긴 소매의 하얀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착용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경호원들처럼 귀에 이어마이크를 착용하는 경우도 있다. 넥타이는 진청색 바탕에 흰색 대각선 줄무늬가 새겨져 있다. 1998년부터 여성 법정경위가 채용됨에 따라 여성 경위에 대해서는 치마를 입게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녀 모두 바지로 통일됐다. 법정경위는 다른 법원공무원들과는 달리 정장에 ‘금배지’가 있다. 무궁화 모양에 한글로 ‘법원’이라고 적혀 있다.
해주최씨 승지공파 17세
최경회(崔慶會): 1532.11.21(중종27년)∼1593(선조26년)
자:선우(善遇), 호:삼계(三溪) 별호:일휴당(日休堂)
1561년(명종 16년) 신유 식년시 생원 1등 3위 급제
1561년(명종 16년) 신유 식년시 진사 1등 3위 급제
1567년(명종22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1위급제
1532년 화순 삼천리에서 탄생
1548년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선생에게 수학
1557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선생에게 수학
1561년(명종 16년) 신유 식년시 생원 1등 2위 급제
1561년(명종 16년) 신유 식년시 진사 1등 3위 급제
1567년(명종 22년) 정묘 식년문과 을과 1위 급제
1574년(선조 7년) 성균관 전적,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옥구읍민이 송덕비 건립)
1577년(선조 10년) 장수현감(장수읍민들이 선정비 건립)
1579년(선조 12년) 무장현감(치적최고점을 받아 영암군수로 승진)
고을민들이 송덕비 건립)
1582년(선조 15년) 영암군수(고을민들이 송덕비 건립)
1584년(선조 17년) 호조정랑,형조정랑,
영해부사
(영해고을민들이 생사당을 세워 公의 상(像)그려 모셔놓고 제사를 지냄)
1587년(선조 20년) 사도시정, 담양부사(고을민이 선정비건립)
1590년(선조 23년) 모친상으로 관직사직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때 전라우의병장
1593년(선조 26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2차진주성싸움에서 순절
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사무소앞에 서 있는 영해부사 최경회공의 선정비
1532년 화순현 삼천리에서 출생하시어 1567년 문과에 급제하시고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 옥구현감, 장수현감, 무장현감,영암현감, 호조정랑,형조정랑 등을 거쳐, 담양부사 재직중 1590년 모친 평택임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셨습니다.
임진왜란(1592년) 일어난 때 61세의 나이로 모친 평택임씨의 상중이었는데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하던 효도를 나라에 충성으로 바치리라.”
하시며 맏형인 최경운, 둘째형 최경장, 아들 최홍기, 최경운의 큰아들 최홍재, 최경장의 큰아들 최홍우 6명이 힘을 합하여 화순 삼천리 고사정(高士亭)터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 되셨고 전라우의병(全羅右義兵)이라 했습니다.
맏형 최경운의 큰아들인 사헌부지평 최홍재를 금산의 고경명 휘하로 보냈으나 고경명장군이 이미 패전하여 군사들이 흩어졌으므로 1592년 7월 26일 고경명장군의 흩어진 병력 800명 정도를 재규합하여 전라우의병에 편입시켰고 "골(?)"자를 표식으로 썼습니다.
최경회공께서 지휘하시던 전라우의병의 깃발
골입아군(?入鴉群)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글자로 송골매가 갈까마귀 무리 속으로 들어감 즉 아주 용맹한 자가 약한 무리들의 한떼를 쳐 흩어버린다 비유를 뜻하는 말입니다.
전라우의병은 당초에 한양으로 근왕을 가려고 하였는데 전라감사 권율의 요청에 의해 전라도 장수로 향하는데 담양 순창 등을 거쳐 남원에 이르자 군사가 많이 충원되었고 전부장(前部將)에 송대창(宋大昌), 후부장(後部將)에 허일(許鎰), 좌부장(左部將)에 고득뢰(高得賚), 우부장(右部將)에 권극평(權克平), 참모관에 문홍헌(文弘獻)을 임명하였습니다.
전라도 장수는 최경회공께서 예전 장수현감으로 재직하시며 지형에 익숙하고 최경회공이 현감으로 재직하실때 선정을 베풀어 공덕비가 서 있을 정도로 고을민들에게 신망이 높은 곳이라 의병의 주둔지로는 매우 적합한 곳이어서 장수에 주둔하며 전라도 방어에 나섰습니다.
전라우의병은 금산(錦山), 무주(茂州)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금산전투에서는 밤에 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볏짚을 병사로 위장해서 적의 화살과 탄환을 소비하게 하고 어둠이 개이고 날이 밝아올때를 이용해서 적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습니다.
또 최경회공은 군사를 이동시킬 때 지리적 상황을 이용하여 장사진(長蛇陳) 어관진(魚貫陳) 조운학익진(鳥雲鶴翼陣) 등을 펼쳤고 전라우의병은 능률적인 진법과 기습작전및 매복작전으로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1592년 8월 20일 최경회공은 왜군의 일부가 전주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는 첩보를 받고 왜군의 진로에 의병을 매복시켜 왜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전투를 무주대첩이라 합니다.(무주대첩)
이 전투에서 최경회(崔慶會)공은 200보 밖의 왜군 장수를 활을 쏘아 살해 했는데 원래 최경회공은 활쏘기에도 매우 능했습니다.
선조실록 8권에 의하면 선조 7년(1574년)5月 2日(乙亥) 1번째 기사에 왕의 앞에서 활쏘기 시합을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文臣二品以下竝試射, 而崔慶會以二十五分爲魁
“문신 2품이하의 관리들의 활쏘기 시합에서 최경회가 25분으로 장원을 했다.”
또한 庚寅試射龍樓再加官資 즉 병인년(1590년) 용루에서 임금이 활쏘는 시험을 보였는데 잘 쏘아 다시 벼슬의 품계를 올려주었다는 기사로 미루어 최경회공은 활쏘기에도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군장수의 목을 베고 큰 칼과 그림통 하나를 노획했는데 칼은 자루가 길고 칼날이 등쪽으로 휘어진 언월도(偃月刀)로써 칼날에 성도작(盛道作, 모루미치作)이라고 칼을 제조하였던 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사용하는 사람의 신분을 알수 있는 오동나무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본의 양대신검으로 불리는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에 속하는 검중 하나였습니다.
또한 그림통에는 고려 공민왕이 그린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가 들어 있었습니다
1592년 9월초 무주대첩에서 최경회공께서 백마를 탄 왜장을 직접 화살로 사살하시고 노획한 언월도이다. 칼날의 길이 53cm, 자루가 135cm 총길이 193cm이고 양날이 있고 등으로 굽은 언월도이다. 오동나무 문양과 성도작(盛道作, 모루미치作)이라고 만든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일본의 다이묘(大名)급 장군에게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하사한 칼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자웅검이라 해서 한쌍의 칼이었는데 일본에 남아 있는 다른 한개의 언월도는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이다.
이 칼은 최경회공께서 2차 진주성전투후 순절하시기 직전 조카 최홍우공의 손에 들려 최경장공께 전해 졌고 최경장공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 졌습니다. 전언(傳言)에 의하면 일제시대에 일본 경찰이 칼을 되찾기 위해 최경장공의 후손을 붙잡아 마을 앞 향나무에 매달아 놓고 고문하며 칼의 행방을 물었으나 땅에 묻어 놓고 내어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땅에 묻혀 있던 과정에서 나무로 된 손잡이 부분은 없어지고 칼은 녹이 슬었고 6.25때는 경찰에 압수당해 경찰서 화로 부지깽이로 쓰이기도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최경장공의 후손의 손에 다시 들어 왔습니다. 장수, 무주에 주둔하며 큰 승리를 거둔 최경회공은 장수에서 남원으로 주둔지를 옮겼는데(1592 9. 22) 그 이유는 전라우의병이 장수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전라도를 넘보지 못한 왜군이 경상도로 물러났기 때문에 방어선을 남원쪽으로 옮긴 것입니다. 최경회공의 부대가 남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때 영남의병장 김면(金沔)과 경상우도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원군을 요청하여 경상도로 진격하려 하자 최경회의 부장(部將)들과 고을민들이 몰려와 “지금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어찌 호남지방을 버리고 멀리 영남을 구원해야 하느냐”며 영남으로의 출병을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최경회공은 “湖南我國之土, 嶺南我國之土也,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인데 의(義)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어찌 영남, 호남을 가리겠는가”라고 하며 영남으로 출병하였습니다. 최경회공의 전라우의병은 진주 살천(薩川)까지 진출하여 1592년 10월 1차 진주성전투때 외곽 지원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때 임계영이 이끈 전라좌우병도 함양지역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태인출신의 민여운(閔汝雲)도 의병 2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전라도 의병은 경상도 사람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전사로 여겨졌는데 영남의병장인 조정(趙靖)의 임란일기(壬亂日記)에 의하면, “호남의 풍속은 사납고 용감하여 전쟁에 임하면 장수와 병사는 겁내지 않는다. 용감하게 돌진하는 것은 번개 치듯 하니 능히 승리를 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영남은 인심이 유약하여 적을 보면 먼저 겁을 내니, 더욱이 주장(主將)은 의(義)로써 죽겠다는 마음이 없다. 도처에서 적을 피하여 오직 살길만을 찾는다. 그것이 패하게 되는 이유이니 괴이할 것이 없다”고 기록했습니다. 최경회공의 전라우의병은 왜군의 1차 진주성 공격이 임박했을때 경상도 산음(山陰)에 머물고 있던 경상우도 관찰사 김천일과 의논하여 군사 1천명을 이끌고 진주 살천창(薩川倉)에 주둔하였는데 왜군은 인근 지역은 침입하여 살상과 약탈을 하고 돌아갔으나 최경회가 이끈 의병부대의 주둔지에는 침입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피난민들은 ‘전라도 대군이 우리 고장에 들어와 있고 합천의 군사가 올 것이니 우리는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최경회공께서 이끈 의병부대가 그 지역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정을 주었고 왜군의 침입에 대한 방어를 잘 했는가를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는 진주목사 김시민의 지휘와 전략도 뛰어 났고 진주성을 사수하려는 군사와 주민들의 결사 항전의 결과였지만 여기에 진주성 외곽에서 전개된 전라좌우병의 외곽지원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 승리 이후 최경회공의 전라우의병은 거창에 주둔하며 영남의병 김면과 합동작전으로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1593년 1월15일 성주성 탈환에 성공합니다.
성주성을 수복하여 영남지역을 수복하는 개가(凱歌)를 올리자 조정은 최경회공에게 경상우도병마사를 제수합니다.
영남지역의 수복에 전라의병의 역할이 크고 전투력이 매우 높아 조정에서는 전라우의병을 영남에서 철수하여 국왕을 근왕하게 하려고 했는데 영남지방 주민들의 반대와 민심의 불안으로 인해 그 계획이 실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최경회공께서 이끈 전라우의병과 임계영공의 전라좌의병의 역할과 그 의미는 영남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이 작성한 통문(通文)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최경회, 임계영의 양군(兩軍)이 처음부터 적을 치는데 피차(彼此)가 없다고 하였으며 정병(精兵) 수천을 거느리고 영남에 주둔하면서 성주와 개령 등지에 있던 적을 섬멸하였다. 그 열렬한 의기(義氣)는 보고 듣는 이들을 감동시키니 이는 나라를 도와 강토가 회복되려는 징조”라고 하였다. 최경회공은 이 땅에서 왜군을 축출하는데 너와 내가 따로 없다고 하여 의기와 진실한 마음으로 영남구원에 나섰습니다.
최경회공의 비장한 결의와 충정은 고의 최후 전투인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잘 드러납니다.
1차진주성전투와 달리 2차 진주성전투때는 영남의병부대를 이끌던 곽재우도 관군을 지휘하던 도원수 권율도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진주성의 수성을 위해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과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및 일부 영남의병만이 참여하였을 뿐 대부분의 군사는 전라도에서 모여든 의병이었습니다. 창의사 김천일이 이끈 군사 3백명, 전라우의병장 겸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지휘한 군사 5백명, 복수의병장 고종후(고경명장군의 아들)의 군사 4백명, 전라좌의병 부장 겸 사천현감 장윤의 군사 3백명, 충청병사 황진의 군대 7백명, 의병장 민여운의 군사 2백명, 의병장 이계련의 군사 1백명, 의병장 변사정을 대신한 그의 부장 이잠의 군대 3백명 등이 진주성에 들어갔다. 이외에 남원의 고득뢰, 보성의 오유(吳宥), 광양의 강희보(姜希輔) 강희열(希悅) 형제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습니다.
2차진주성전투의 상황도
최경회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진주성을 사수하고 있고 성은 왜군들에게 포위되어 고립되어 있고 외부의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1차진주성전투때와는 달리 진주성이 왜군들에게 포위되어 고립 되어 있고 외곽의 지원은 전혀 없습니다. 이는 진주성 방어를 두고 조선과 명나라 지원군 사이에, 그리고 조선군사이에서도 영남의병과 호남의병의 사이에는 전략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지원군은 회담을 이유로 전투에 소극적이어서 진주성의 공성책(空城策)을 주장하였는데 공성책이란 진주성을 비워 놓으면 일시적으로 왜군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다가 곧 물러갈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진주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한데서 나온 것이었고 명의 적극적인 전투수행 의지가 없었기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군도 진주성의 사수에 대한 열기가 약해졌습니다. 도원수 권율과 순변사 이빈 전라병사 선거이 등은 함안에 있다가 후퇴하기에 이르렀는데 순변사 이빈은 영남의병장 곽재우에게 진주성의 지원을 권했으나 곽재우는 이를 거부하였고 충청병사 황진이 진주성에 입성하려고 하자, “진주성은 고성(孤城)이어서 지키기 어렵고, 그대는 충청도절도사인데 진주성을 지키다 죽는 일은 맡은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황진의 진주성 입성을 만류하였고 곽재우는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진(鼎津)으로 물러갔습니다. 이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에 들어간 의병들은 김천일을 우도절제(右都節制), 최경회를 좌도절제(左都節制), 황진을 도순성장(都巡城將)으로 삼았습니다. 진주성의 수성은 전라의병장들에 의해 주도 되어 김천일은 수성에 소극적이었던 진주목사 서예원을 대신하여 장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으니 군사들의 사기가 다시 높아졌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당시 영남의 의병및 군대 지휘관들은 당시에 권세를 잡고 있던 동인(東人)이 대다수였고 전라의병의 대부분은 비주류였던 서인(西人)이 대부분이어서 국난을 당해 힘을 합해도 부족할 판에 당파에 의해 전략을 달리했던 부분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더구나 전라우의병은 영남도 호남도 우리나라의 땅이라며 먼 길을 진군해 영남에 출병했던 군대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아쉬운 부분입니다. 물론 2차 진주성 전투는 왜군들이 거의 총력전을 펼쳤고 때마침 장마때문에 성곽이 무너지고 장마철이라 활을 제대로 쏠 수 없고,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녹슬고 진주성안에 있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훈련을 받지 못한 피난민들이어서 전투력이 떨어졌던 면도 있지만 후일 조정의 분석에서도 2차 진주성전투의 패전원인으로 지휘계통의 불일치, 1차진주성전투와 달리 거의 없었던 외곽지원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왜군의 대규모 공세에 외부의 지원도 없이 흔들림 없이 저항하였습니다. 일본군이 성벽을 기어오르면 큰 나무와 큰 돌을 던지거나 굴러 내리고 끓는 물을 내리 부었으며 섶에 불을 붙여 집어 던졌다. 적이 성 밖에서 토산(土山)을 쌓아 올리면 성안에서도 그 정도의 높이로 쌓아 올려 적의 공격을 방어하였다. 적의 성벽 공격으로 성이 무너져 내리면 백성들과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진주성안에 있던 의병과 백성들의 노력을 외면하듯 내리던 비로 인해 오래된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백성들이 성벽을 다시 쌓고 쌓아도 무너져 내리는 성벽, 적의 맹렬한 공격, 늘어나는 사상자와 부족한 군수품 등으로 인해 수성군의 힘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장마로 인해 활을 제대로 쏠 수 없었고 화살도 다하며 창끝도 녹이 슬어 무디어져 갔습니다. 1593년 6월 28일 순성장 황진이 총탄에 이마를 맞고 전사하였고 29일에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는데 이날 순성장 장윤도 적의 총탄에 사망하였고 성은 적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전투가 발생한지 9일만이었습니다. 성이 함락 되자 끝까지 저항하였던 전라우의병장겸 경상우병사 최경회, 창의사며 도절제 김천일, 그의 막하에서 활동하며 생사를 같이한 문홍헌 구희, 오방한, 박혁기, 박치경, 김인갑,등이 촉석루에 모였습니다. 최경회장군은 함께 따라 죽으려는 조카 최홍우에게 무주대첩에서 노획한 언월도와 청산백운도, 조복을 건네주며 살아서 고향에 있는 둘째형 최경장께 유언과 유품을 전하라고 합니다. “내가 죽은 줄 알면 형님이 필히 의병을 일으키실 것이니 너는 후일을 기약하라"며 최홍우를 탈출시킵니다. 아들 최홍우에게 동생 최경회장군의 순절소식과 유품을 받아든 둘째형 최경장공은 화순에서 1593년 의병을 일으켜 통고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고 최홍우공 또한 부친의 계의병군에 속해 통고대첩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최경회는 동향의 의병으로서 참여하였던 인물들과 촉석루(矗石樓)에서 북쪽을 향해 재배하며 죽음을 앞두고 투강시(投江詩)를 피맺힌 목소리로 읊었다. 矗石樓中 三壯士 촉석루의 삼장사는 一杯笑指 長江水 한 잔의 술로 웃으며 장강의 물을 가리킨다 長江之水 流滔滔 장강의 물은 도도히 흘러가니 波不渴兮 魂不死 저 물이 마르지 않은 한 혼은 죽지 않으리라 *촉석루 삼장사:최경회,고종후,김천일 시를 마치자 최경회께서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셨습니다. 이어서 김천일도 고종후(고경명장군의 아들)도 강에 뒤어 들어 순절하였고 결국 최경회와 문홍헌을 비롯한 동향의 의병들은 끝까지 죽음을 함께 맞이하였다. 2차진주성 전투에서 전라우의병장겸 경상병사 최경회,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복수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우의병부장 고득뢰(高得賚), 좌의병부장 장윤(張潤), 적개부장 이잠(李潛), 영광의병장 심우신(沈友信), 해남의병장 임희진(任希進), 태인의병장 민여운(閔如雲), 순천의병장 강희보(姜希甫), 의병장 이계련(李繼璉),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사천현감 김준민(金俊民), 남포현령 송제(宋悌),허일(許鎰), 권극평(權克平), 송대창(宋大昌), 김예수(金禮秀), 문홍헌(文弘獻), 구희(具喜), 최희립(崔希立), 노희상(盧希尙),이영근(李永根),최억룡(崔億龍),안기중(安器重), 노언경(盧彦卿), 오방한(吳邦翰), 박혁기(朴爀起), 노성니(盧省尼), 안기남(安器南), 정봉수(鄭鳳壽), 정현보(鄭賢輔), 위정설(魏廷設), 최개(崔漑)등 20여인과 수만명의 의병들과 백성들이 전사하거나 순절했습니다.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군관민 수만명이 죽었지만 2차 진주성싸움은 결코 패전이라고 할 수 없는 싸움이었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조선, 일본 모두가 승자였다고 혹은 패자였다고 할 수 있는 전투였고 두 나라 모두에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킨 전투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9일간의 전투 동안 조선에 와 있던 거의 전병력을 투입했으나 많은 전력의 손실을 입은 왜군은 함락시킨 진주성에 주둔하지도,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부산으로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일본의 학자 소하리 이치로는, “진주성 함락은 조선의 치욕이 아니라 명예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조선,명나라 육군, 수군, 의병, 수군, 승병의 그 많은 장수들 중 진주성 전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일본 측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직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는 진주성 전투에 전쟁의 승패를,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전쟁에서는 백성의 마음을 잃은 편이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임진년 조선 침공에 나서는 부하들에게 ‘조선 백성을 보호하라’는 명을 내려서 왜군은 저항하는 조선인은 무자비하게 도륙시켰지만 ‘조선 백성을 보호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대체적으로 따랐습니다.
조선천민들은 이씨왕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어서 그들은 세상이 뒤집혀지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천민들은 통치자가 왜군이 되던 누가 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불과 두달만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런 조선 정황 탓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백성의 끈질긴 저항으로 왜군이 궁지에 빠지게 되자 히데요시 막부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공포에 빠져 복종하게 만들려고 진주성 육만여 백성을 학살시켰습니다.
진주성 초토화는 이 전쟁에서 히데요시의 최대 악수이였습니다.진주성 백성 학살 후 조선천민들의 마음은 히데요시 막부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진주성 전투 후 히데요시 막부는 사실상 몰락의 길에 들어서버렸습니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히데요시는 발악적 방책으로 전라도 백성 학살 명령을 내렸는데 그 결과는 조선민중의 마음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주성 전투는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야망을 좌절시킨, 세계의 운명을 바꾼 대전투였고 진주성 백성들의 혈투는 왜군에게 조선인과 조선의 읍성에 대한 공포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무력해 보이는 조선민중이 때로는 얼마나 무서운 인간이 되며 담장 같은 조선 읍성이 철옹성이 된다는 것을 왜군은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2차진주성전투에서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 희생이 결코 헛된 희생이 아니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2차 진주성 전투후 왜군은 진주성에 주둔하지도 한양이나 호남으로 진격하지도 못하고 부산으로 후퇴하게 되며 히데요시의 몰락을 가져오게한 전투가 된 것입니다.
최경회장군 필적(간찰,편지):고애자(孤哀子)라는 표현에서 喪中임을 알수 있다.
충의사(忠毅祠)
화순군 동면 백용리에 위치한 최경회장군의 사당입니다.
위치: 전남 화순군 동면 백용리 422번지
버스:광수시내버스 151번, 화군군내버스 217번
화순군 동면 백용리에 있는 최경회장군의 사당 충의사의 석비
진주성으로 향할 때 호남을 버리고 영남으로 가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변의 만류에 답했던 “호남도 우리나라 땅이요 영남도 우리나라 땅인데 어찌 영호남을 가른단 말인가?”
1593년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세가 기울자 성을 버리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에 대해 “진주성이 있으면 나도 있고 성이 망하면 나도 죽는다”라는 옥쇄의 결의를 보였던 말과 남강에 투신하실 때 남긴 투강시(投江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문헌:조선왕조실록에 44회 언급
선조실록: 선조26년(1593) 8월 7일
진양(晉陽)은 강우(江右)의 보장(保障)이다. 변란의 초기부터 외로운 성을 홀로 지키면서 사나운 기세로 밀려 오는 왜적을 올 적마다 물리쳤으니 어쩌면 그리 장한가. 성이 함락됨에 미쳐서는 만사가 와해되어 찔러 죽임을 당한 것이 끝내 이런 극한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그렇게 쉽게 무너졌는가. 아 간성(干城) 같은 태수(太守)가 총탄을 맞아 먼저 죽고 주석(柱石) 같은 방백(方伯)이 마음과 힘을 다하다가 뒤이어 죽었다. 비록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절도사(節度使) 최경회·황진·이종인 같은 이들이 힘을 다하여 국가를 위해 죽으려는 정성이 있었고 김준민·장윤이 활을 잘 쏘아 적을 막는 용맹이 있었으나, 혹은 멀리에서 달려오기도 하였고 혹은 새로 병권(兵權)을 맡아 군기(軍機)에 통수(統帥)가 없고 호령이 나오는 곳이 한 군데가 아니었으니, 어찌 패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온 성중의 제군(諸軍)이 모두 역전(力戰)하였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때를 당하여 약간의 외원(外援)만 있었더라면 왜적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낭패를 당하고 물러갔을 것이니, 어찌 이처럼 참혹한 데 이르렀겠는가.
어사제문(御賜祭文,임금께서 내린 제문)
宣組賜祭文 萬曆 甲午年(1594년) 正月 二十日(선조임금께서 내리신 제문)
國王遣禮曺佐郞臣楊士衡諭祭干卒兵使崔慶會之靈曰惟靈降自南嶽克生東方應時抱材渾世含光白首枳棘始予何識蒼松歲寒乃徵今日鳴呼國事尙忍更言方賊猖獗予遭播遷間關奉天敵愾誰倚寂寞江淮保障無寄歷十一代環三百城泯泯士氣蔑蔑義聲幸?湖南天命周楨文武如卿一代不數初無職守與義爲偶不因尺寸應者如鄕兵以義名師以直壯按節嶠南兇賊遁跡蹴迫星山驕酋?魄勳克在汝賞未孚功登壇一拜豈云褒崇專?千里用?鎭?那知殘擊尙肆狡逆環攻四隅勢急三?數月?陽援絶?蟻人謀奈何獸角終?天地亡兒卿豈?生范范石崖俯接孤城忠軀所隕峻節高矗一死雖榮長痛何洩事聞以來宵?靡寧?加贈秩貴卿忠貞遠具時羞致予哀誠使卿至此無非予故予實慘恒予尙奚報秋原欲蕪魂魄底處巡遠不孤死亦有侶所存壯氣靡謝山河可作?鬼當化此賊未滅靈豈暝目玆宣悲告式佇來格
선조(宣祖)께서 내린 제문(祭文) (만력 갑오년(1594년)1월 20일)
국왕(國王)이 예조좌랑(禮曺佐郞) 양사형(陽士衡)을 보내 죽은 병사(兵使) 최경회의 영혼을 제사 하노라.
영령(英靈)께서는 남악(南嶽)의 정기를 타고 우리나라에 태어나셨네.
시운(時運)에 맞는 재주를 가졌지만 어지러운 세상에 빛을 감추고 고생하며 늙었도다. 처음에야 내가 어찌 그 재주 알았으랴.
푸른 소나무가 추위를 이기듯한 충성 오늘에야 드러났도다.
아! 어려운 나라일을 지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지만 날뛰는 왜적 막을 길이 없어 임금인 나까지 피난 떠났네.
의주에 이르러 나의 분한 마음 풀어 줄 사람 누구였나?
적막한 강회(江淮)를 지킬 사람 없어 역대 열 한분 임금이(역주:선왕중 단종과 연산군을 빼고 열한분) 물려준 나라요, 3백개의 성(城)을 가진 나라의 사기(士氣)와 의로움이 꺼져 버린듯 없었네.
다행히 호남지방에 하늘이 기둥감을 내렸으니 경(卿)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당세에 드문 인재였네.
처음에는 관직도 없이 의병을 일으켜 아무 가진 것 없어도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네. 의병이라 부른 군사 장하기도 하였다.
경상우병사 되자 사나운 왜적 도망하고 성산으로 쫓아가니 교만하던 왜적의 괴수 넋을 잃었네.
그대가 세운 크나큰 공로에 비해 포상이 너무 작았고 장수된 후 한번 내린 벼슬을 어찌 포상이라 하겠는가?
천리를 지킬 병권(兵權) 맡기었는데 어찌 뜻하였으랴,
남아 있던 왜적들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여 사방으로 공격하고 세 겹으로 포위했네.
몇 달 동안 진주성에는 후원군 조차 끊어지니 사람의 지혜로 어찌할 것인가.
높은 바위 절벽에 의지하고 있는 진주성은 바로 충성스런 그대 떨어져 높은 충절 세운 곳이네.
그대 한번 죽는 것은 영광스럽지만 나의 이 끝없는 슬픔은 어찌할 것인가.
그대 죽었다는 소식 들은 이후로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벼슬을 추증하여 그대의 충성을 빛내주고 멀리 제수(祭需) 장만하여 슬픈 내 마음 달래노라, 그대가 죽은 것 모두 나의 탓이라 생각하니 슬프구나 내 무엇으로 보답하랴.
가을 맞은 그대 무덤의 풀 시들어 가는데 그대의 넋은 어디를 헤메는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외롭지 않으려고 죽어서도 짝을 얻었도다.
충성심 있는 곳에 장한 기운 떨어졌으나 산하(山河)도 되고 여귀(?鬼)도 되어서 이 왜적들 다 무찌르지 못하면 영령인들 어찌 눈을 감으랴.
이에 슬픈 내 마음 전하노니 영령은 이르러 흠향하라.
왕세자 광해군이 내린 제문
王世子賜祭文(年月上同)
男兒死耳愍雄圖之未伸忠義凜然想英靈之如在有懷惟烈非慟而誰靈文武之才忠孝所性三年血泣共稱子羔之善居一朝登壇衆推元規之宿望人皆棄甲而瓦鮮卿獨與疾而星馳全保障於江淮作聲勢於湖嶺中興之功第一佇殲賊之可期國士之良無雙庶撥亂之有?逮晋陽之圍急奈賊勢之日添不與讐戴天肯旋南下之踵願爲鬼殺賊忍聞西向之辭事而至斯天何奪我士爲知己者死固無憾於當時國必得人而昌?不慟於今日屬余行之事至思若人而不忘玆命有司用陳薄奠死者可作慨九原之誰歸魂基有知?一?之式享
왕세자가 내린 제문(임금과 같은 날에 한 것이다.)
남아가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죽는것이 슬프도다. 그러나 충의가 늠름하였으니 영령께서 와 계신 듯 하여 감회가 깊다.
생각할수록 장하였으니 그대를 위해 통곡하지 않고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는가?
영령께서는 문무를 겸비한 재주와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충효를 지녔었다.
부모상에 삼년동안 피눈물 흘리니 모두가 자고(子羔)(1) 처럼 상을 잘 치룬다고 칭찬하였으며 하루 아침 사이에 장수가 되니 대중들이 원규(元規)(2) 의 덕망처럼 우러러 보았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는데 그대 혼자 바쁘게 싸웠도다.
그래서 한쪽 지방을 온전하게 지키고 호남과 영남에서 기세를 떨쳐 나라 수복하는 일등공로 이루었네. 더욱 적을 무찌르기 기대하여 비교할만한 사람 없어 난리를 평정하리라 믿었었네.
진주를 포위한 적의 형세 날로 더하여 어쩔수 없었네.
원수와 같은 하늘 밑에서 살지 않는 법이니 어찌 남쪽으로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겠는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적을 죽이겠다고 임금 향해 절하고 죽었다는 말 들었도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하늘이여 왜 나의 선비를 빼앗아 갔는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마땅하지만 나라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있어야 번창하는 법, 어찌 오늘날 슬프하지 않으랴.
내가 돌아올 때 이 사람을 생각하고 잊지 못하여 이에 담당관을 보내 변변찮은 제사를 드리게 하노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면 누가 황천에 가겠는가?
혼령이 아는 것이 있다면 이 한 그릇 음식을 흠향하소서 아! 슬프다.
숙종께서 내린 제문
肅廟賜祭文
一片晋陽雙廟對屹?矣忠愍殞身亦烈儼其位序列宿是應千載想像孰不添膺?在龍蛇島夷猖獗湖嶺響震靡不?覆晋獨截然若砥抗流賊所蓄憾兩歲一州歸師環攻?屯蟻聚烈烈倡義會兩節度白袍從事以孝以忠有來如雲義?攸同地有必爭人能捨命非謨或?奈天不靖雲梯百道賊乃乘城?我豪英與堞同平或丸或?視死如歸或赴干水腋挾靑衣北面慟哭義烈愈彰列壁坐觀獨何心?城雖覆矣氣則不?化?殲賊以洩餘憤亦作山河以壯關防?掃凶?寔??相維此寃?貫徹古今滔滔大江與之共深建宇妥靈崇報靡替歲月寢遙誠禮或怠曠焉相感恍基如昨命官齋沐替此洞酌
숙종(肅宗)께서 내린 제문
이 진주(晋州) 한곳에 두 사당이 나란히 서니 장하다.
충의공과 충민공이여 장하게 죽었도다.
엄숙한 차례는 열성(烈星)도 응할 것이네. 천년 뒤에 상상해도 누군들 가슴 아프지 않으리. 지난 임진 계사년에 왜적이 창궐했네. 호남, 영남이 진동했는데 오직 진주성만 우뚝해서 물속의 돌기둥인듯, 그래서 적의 유감사서 두해에 이 한고을을 돌아가던 왜적들이 치니 벌과 개미떼처럼 달라 붙었네. 열렬한 창의사와 두 절도사가 백의로 종군하고 충효로운 선비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충의를 함께 했네.
빼앗길 수 없는 땅이어서 사람들이 목숨 바쳤네. 계책은 잘못 없었으나 하늘이 돕지 않아 백길되는 운제(雲梯)로 적들이 성으로 기어 오르니 죽은 우리의 호걸 성을 가득 채웠네. 어떤 이는 칼날 앞에 어떤이는 총탄앞에 죽는 것을 예사로 여겨 더러는 물속으로 뛰어들며 청의(靑衣)를 끼고 어떤 이는 북쪽 향해 통곡했으니 의열이 더욱 장하도다. 다른 여러 성에서는 구경만 했다 하니 그 무슨 심뽀인가? 성은 비록 함락되었으나 기개가 사라지지 않아 귀신이 되어 적을 죽여 분한 마음 풀었네.
아니면 산이 되고 물이 되어 변방을 튼튼히 하였으니 흉악한 기운 재빨리 소탕한 것은 실로 이분들의 도움에 힘입음이네. 그러나 이 원통하고 억울함은 고금에 없어서 유유히 흐르는 저 큰 강물처럼 깊으리. 사당지어 영혼 모시고 높은 공훈 보답 변함없더니 세월이 멀어지자 정성스런 예(禮) 태만하게 되었네.
멀리 생각하면 어제 일과 같기에 관원을 시켜 목욕재계하고 나를 대신하여 박주 한잔 올리노라
영조께서 내린 제문
英廟賜祭文(丁卯得印後致祭)(1747년 인장을 얻은후 제사 지낸 것이다.)
惟靈龍蛇之難八域??呑豕食國步日窘惟卿數子?賊干晋號召忠義奪勇行陣蔽遮江淮張許是準死守九日無?有進臣力己竭臣職自盡天愁日慘全城火燼抱印廉丹握?先軫江南渺?矗石??凜凜義烈千載霆震間??祭?事增愍適玆州氓波心獲印嶺右節度篆章可認百五十年神秘鬼吝?出豊城光?騰迅物有顯晦毅跡難泯帥臣馳聞事可徵信摩?愛玩烈士攸殉??前度手携以觀魂兮不死詩語乃?萬曆二字我涕如隕匣而銘之?干舊鎭復命錄後勿替其引仍相當時後先立?視死如歸匪丸則刃?忠念寃一倍傷悶?於崇報予其可忍遣官致?我思?醇感通有理歆此잔
영조(英祖)께서 내린 제문(정묘년, 1747) 인장을 얻은후 제사지낸 것이다.
지제교(知製敎) 홍계희(洪啓禧)지음
왕(王)은 말하노라
임진왜란때 팔도가 적에게 짓밟혀 사나운 적의 기세에 나라가 날로 위태로롭게 되었다. 그 때 그대들 몇 사람이 진주에서 적을 막았도다. 충성과 의리 있는 사람을 불러모아 용감하게 행군했네. 영남, 호남 지킨 것은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에게 비교할만 하네. 죽음으로써 9일 동안 성을 지켰으나 적 물리치지 못하고 신하들 힘빠져 죽음에 이르렀네. 하늘도 슬퍼하고 해도 빛을 잃었고 성(城)은 온통 불길에 휩싸였네.
그대는 관인을 끌어안고 죽은 염단(廉丹)이요 창을 쥔 채 죽은 선진(先軫)이로다. 남강 물 유유하게 흐르고 촉석루 우뚝하게 높은데 그대의 늠름한 의열(義烈)은 영원히 우뢰처럼 전하리라.
일찍이 사람 보내 제사지내니 슬픔 감회 일었는데 때마침 이곳의 백성이 강속에서 관인을 찾아내었네.
[영남우절도사]라고 새긴 전자(篆字) 분명하니 1백50년동인 귀신이 간직하며 아꼈나 보다.
보검(寶劍)이 풍성(豊城)에서 나오니 광채가 높이 뻗쳤네. 물런이란 드러나고 감추어진 때가 있지만 그대의 훌륭한 행적이야 감추기 어렵네.
그곳 부사(府使)가 관인을 찾아 급히 아뢴 일이니 믿을 만하여 사랑하며 어루만지며 살펴보니 순절한 열사(烈士)가 내 앞에 와 서로 손을 잡고 보는 듯 하여라.
“영혼은 죽지 않는다” 하는 그대의 시(詩)와 일치하는구나. 만력(萬曆)이란 두 글자 보고 나는 눈물이 쏟아져 도장갑을 만들어 명(銘)을 지어 진주 병영에다 간직하게 하고 또 그대의 후손들을 기록하여 영원히 등용(登用)하게 하였도다.
당시 일 생각하니 모두가 죽기로 작정하고 죽는 것 두려워하지 않아 탄환이 아니면 칼에 맞아 쓰러져 충성심과 원통한 마음 품어 더욱 슬프구나 높이 포상하고 공로를 갚는데 내 어찌 인색하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니 내 마음 진정할 길 없네.
느낀바가 있거든 영혼은 와서 내 잔을 흠향하라.
義岩婦人 주논개(朱論介):1574-1593
최경회 장군의 후처(족보)
전라도 장수출생으로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공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장수현감 최경회공은 이들을 무죄로 방면하고, 갈곳이 없는 논개모녀를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습니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부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현감은 논개를 부실로 받아들이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납니다.
최경회공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2차진주성싸움에서 성이 함락되고 순절한뒤 1593년 7월 7일 일본군 장수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됩니다.
논개는 깍지를 끼었을 때 빠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장마철이라 넘실거리는 남강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는데 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장수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고 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습니다.
그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강 하류에서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왜군의 감시때문에 운구가 여의치 않자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는데 의병의 후손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지다 1976년 논개와 최경회공의 묘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진주 촉석루의 의암(義岩)
최경회공과 의암부인 논개의 묘소위치
최경회장군과 의암부인 주논개의 묘소(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앞쪽이 의암부인 논개, 뒷쪽이 최경회장군 묘소
??최경회장군 묘소
논 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렬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전북 장수군 주촌마을 주논개 생가지터
진리의 물이 샘솟는 법천사의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
강원도 원주에는 '흥법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 등 유명한 폐사지가 많이 있다. 그 중에서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있어 폐사지의 허망함을 감싸안고 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는 2만여 평의 절터를 감싸고도 남을만큼 화려하고 장대한 비석 자체의 품격과 가치도 있지만, 이 비석이 다른 비석에 비해 뛰어난 것은 비석에 새겨진 조각의 내용 때문이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로, 국보 제59호이다. 비문은 당대의 명신인 정유산(鄭惟産)이 찬했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안민후(安民厚)가 구양순체를 바탕으로 썼으며, 이영보(李英輔)와 장자춘(張子春) 두 사람이 각을 하였다.
이 비석의 주인공인 지광국사(984 ~ 1070)는 원주 원씨이며, 984년 12월 31일 원주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고려 성종 3년으로, 스님의 어머니는 '하천 물이 넘실거리고 샘물이 용솟음치는 모습'을 태몽으로 꾸고 스님을 낳았으며, 태어나자 이름을 수몽(水夢)이라 지었다고 한다. 수몽은 7세 때에 원주에 있는 법고사(法皐寺)의 관웅스님으로부터 불교의 경전을 배웠으며, 해린(海麟)이란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해린은 개경의 해안사(海安寺)의 준광(俊光)스님에게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21세 때인 1004년에 왕륜사(王輪寺)에서 치러진 승과에서 합격하여 대덕(大德)이 되었다. 그 후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를 차례로 거쳐 1045년에는 교종의 제일 높은 지위인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 후 문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046년에는 궁중에 초청되어 불교 경전을 강의하는 등 국왕의 신임을 받았다.
비석 몸 돌의 높이는 3.07m, 넓이 1.43m, 옆면 넓이 31cm이다. 전면의 윗 쪽에는 비의 이름과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 스님의 이력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비석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그림의 내용을 보면, 가운데 부분에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다는 용화수(龍華樹)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가, 왼쪽에는 달을 뜻하는 달 토끼[姮娥]가 중심 그림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향로를 받쳐 들고 날고 있는 비천상(飛天像)과 여러 가지 꽃과 구름, 산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림의 아래에는 비석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제목 글인 '증시지광국사현묘지탑비명(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銘)'이 6칸에 두 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제목의 좌우에는 봉황을 새겼는데, 글씨는 음각으로, 봉황은 봉황이 두드러져 보이도록 돋을 새김으로 새겨서 음각과 양각을 잘 활용하고 있다.
위의 그림을 탁본한 것이다.
가운데 높이 솟은 산이 수미산인데, 수미산이란 산스크리트어의 수메루를 한자 음으로 옮겨 쓴 것이다. 이 산은 고대 인도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것으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산이다. 그런데 수미산은 불교에서 받아들여 불교의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에 근거하여 세계의 맨 아래를 풍륜(風輪), 그 위에 수륜(水輪)과 금륜(金輪) 또는 지륜(地輪)이 있으며, 금륜 위에 수미산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8개의 큰 산이 둘러싸고 있고, 산과 산 사이에는 각각 8개의 큰 바다가 있다고 한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사방에 섬이 있는데 그 중에서 남쪽에 있는 염부제(閻浮提)라는 섬에 인간이 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이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신(神)들의 세계'인 것이다.
또한 수미산은 황금, 백은(白銀), 유리(瑠璃), 파리와 같은 4가지의 보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미산의 중허리의 사방은 사천왕(四天王)이 지키고 있으며, 산의 정상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주인인 33곳의 하늘나라 궁전[33天]이 있고,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한다.
수미산의 위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주렁주렁 매 달린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새겨져 있다. 이 나무의 그림은 비석에 새겨진 그림들의 중심그림으로, 주변의 다른 문양들 중에서 가장 크게 표현되어 있다. 이 나무는 학자들에 따라 보리수, 뽕나무, 용화수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광국사가 속한 종파가 화엄종과 함께 고려시대 교종의 중심 종파였던 법상종(法相宗)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 나무는 용화수로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법상종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의 사상(事相)에 대한 고찰과 분류 해명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 종파로,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용화수와 관련이 있는 것은 미륵신앙의 경전들이다.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에 보면 '미륵이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고 세 번의 설법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미륵신앙의 경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용화수는 수 많은 수정이 주렁주렁 매 달려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지광국사현묘탑비에 그려진 나무는 용화수를 표현한 것이며, 미륵의 세계인 도솔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미륵부처님은 수행하면서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러 올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현묘탑비에 새겨진 용화수는 미륵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해린 스님의 원력을 나타낸 것이리라.
용화수의 왼쪽에는 달토끼와 향로를 받쳐들고 하늘을 나는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달에는 약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가 살고 있는데, 그 토끼의 이름은 항아 또는 상아라 불렸으며 활을 잘 쏘았던 예라는 신의 아내였다. 예는 서왕모라는 여신으로부터 불사약(不死藥)을 얻었는데, 그 아내인 항아가 이 약을 몰래 훔쳐서 달로 도망갔다. 그런데 달에 도착하자마자 토끼가 되었다고 한다. 달은 음(陰)이라 하여 여신(女神)으로 숭배 되고 있다. 이와 함께 태양은 양(陽)이며 남신(男神)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세 발 달린 까마귀로 상징되고 있다.
한 20년 전에 '접시꽃 당신'이란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는데,
그 애절한 남편의 마음을 시로 쓴 것이 유명해져서 영화화 되었던 거란다.
그 유명한 시 '접시꽃 당신'을 한번 읽어 보렴.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접시꽃 당신)

접시꽃은 예전에 시골의 마을 입구(동구)나 집앞에 많이 심었던 흔한 꽃이다.
크기가 접시만 하대서 접시꽃인데,
수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꽃이란다.
아주 화려하거나 아름답기보다는, 함께 어울려서 자기 존재를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모습이 든든한 그런 꽃이지.
죽음은 누구나 받아들이도록 정해진 일이지만,
젊은 나이에 뜻밖의 죽음을 맞게 되는 일은 참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한용운도 '이별을 슬픔으로만 받아들이면 사랑이 깨진다'고 님의 침묵에서 노래했듯이,
죽음을 아프게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을 했던 것 같구나.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물론 죽어가는 이에게 장기 기증을 하라든가 하는 이야기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인간이 산다는 것은
주는 기쁨, 사랑의 기쁨을 배운다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면,
뿌듯이 주고 가자는 화자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시에서 몇 번이나 '남은 날은 짧지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아쉬운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시란다.
우리도 매일매일이 무의미하게 돌아오는 날들 같지만,
사실은 영원히 다시 살 수는 없는 날들임을 생각해 보면,
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제 아내가 죽어 옥수수밭 옆에 묻고 돌아오면서 쓴 슬픈 시를 한편 읽어 보자.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땅에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해 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 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옷가지 몇 벌 이웃에게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만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나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하필이면 아내를 묻던 날이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었는지, 그 무렵이었는지...
아내를 묻고 오는데,
살았을 때 제대로 된 옷 한 벌 멋지게 입혀본 적 없는데,
죽고 나서 '수의(壽衣)'를 해 입힌 게 돌아보니 참 부끄럽단다.
아내가 손수 만든 옷들일랑은 이웃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묻고 돌아오는 남편이 허한 가슴이란...
앞부분에서는 그런 허전한 가슴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뒷부분에서는 그런 힘겨운 마음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지금은 비록 이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흙이 된 당신과, 훗날 바람이 되어 떠도는 나의 넋이
다시 만날 것임을, 윤회의 미래를 믿게 된다는 이야기겠다.
내 남아 밭갈고 씨 뿌리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한 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그저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되고,
밭갈고 씨 뿌리며 땀흘리는 삶을 살아야,
그렇게 나름대로 노력하며 옳바르게 살아야,
한 해 한 번이라도 당신의 넋과 만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임을 생각한다.
아내도 참 검소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아내와 만나게 된다하더라도, 내가 부끄럽게 산다면 얼마나 스스로 바보같겠니.
그래서 재회의 희망과 삶의 의지를 일깨워 보는 것이겠다.
슬픔을 절제하고 담담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어서 더욱 슬픔을 깊게 느낄 수 있다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굴강(掘江)·외호(外濠)·성호(城濠)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수원 성곽(水原城郭)·공주 공산성(公州公山城) 등에 해자를 설치한 유적이 남아 있다. 해자가 잘 보존되어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평지 성곽이 많은 일본은 이 해자가 발달하여 지금도 이름 있는 성곽에는 대개 해자가 남아 있다.
해자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
평지 성곽이 많은 일본에서 해자가 발달했다. 일본의 이름있는
성곽에는 해자가 거의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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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항목 :
- 성
해자 [ 海子 ] 일본말로 호리라고 해자(물길 수로)를 부름
성(城) 주위에 빙 둘러가면서 파서 물을 채운 것을 말함.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임. 해자(垓字).
경상우도 병마 절제사 신숙청이 아뢰기를, “지금 거제 읍성과 해자 읍성을 살펴본다면 고쳐 쌓아서 동북쪽의 1천여 척을 증축하는 것이 진실로 만전의 계책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비록 성이 협착하고 낮지마는 현재 무너지지 아니하였으니 고쳐 쌓지는 말게 하고, 해자는 마땅히 고쳐 파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 慶尙右道兵馬節制使辛俶晴啓 今審巨濟邑城及海子邑城 則改築而增東北一千餘尺 誠爲萬全之計 然雖窄狹低微 時不頹圯 請勿改築 海子則宜令改鑿 [문종실록 권제3, 29장 앞쪽, 문종 즉위 9월 2일(계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