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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 디자인의 변천
2006/03/0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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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 공예 운동 (美術工藝 運動, Art and Crafts Movement)
- 일용품의 질자체를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일반대중들을 위한 대중적, 실용적인 예술을 주장하고 대량생산 제품의 질 자체를 수공업에 의해 예술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향상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관련 건축가
존러스킨(Jhon Ruskun 1819-1900년) 19세기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예술평론가로서 예술창조 수단으로서 기계를 부정하고 중세의 수공예의 이용을 주장하였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96년) 푸킨과 존러스킨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미술공예 운동을 창시하고 주도하였으며, 기계생산으로 인한 예술의 질적 저하에 반대하여 중세의 미학적, 정신적 원리의 부흥을 시도하여 대중성을 지향하는 예술, 즉 실용적 가치를 지닌 예술을 주장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필립 웨브가 설계하고 모리스가 실내장식을 한 주택으로서 미술공예 운동의 상징적인 출발점이 되는 작품인 붉은 집(Red House, 영국 켄트(Kent) 주, 1859년)등이 있다.

2)시카고파 건축 (Chicago School Architecture)
-19세기말 미국중부 상공업의 중심지였던 시카고는 1871년의 대화재이후 도시재건 사업으로 도시규모가 급속히 팽창하였으며, 활발한 건설활동으로 토지부족과 지가상승 현상이 발생하여 고층건물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건물에 강철구조를 사용함으로서 구조적 성능을 개선하고, 구조체의 방화성능을 개선한 방화구조를 사용하였다.
관련건축가
루이스 헨리 설리반(Louis Herry Sulllivan, 1856-1924년) 미국의 건축가, 1872~72년 동안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였으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프랭크 퍼니스(Frank Furness)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보스턴을 떠났다. 1873년 사무실이 폐쇄되자 읠리엄 르 제니(Willam Le Jenny)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 시카고로 갔다. 그 후 1874~75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에콜드 보자르에서 수학하였다. 1881년에 단크마 아들러(Dankmaradler)의 시카고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완벽한 파트너로서 1883년 사이에 이들을 위해 일하였다. 설리번은 보자르의 전통으로부터 장식에 대한 관심을 이어받았으며, 라이트에게 그러한 관심을 전하였다. 개런티 빌딩(Guaranty Building)과 같이 시카고나 뉴욕에 설계된 고층건물들은 미국 건축의 우수한 표현이다. 그가 장식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 [건축에 있어서의 장식(ornament in architecture, 1892)]에서는 "만약 우리가 얼마간 장식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예술작품은 위대해질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1896년에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이것은 법칙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만들어내었다. 설리번의 글은 라이트의 생애 최후까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개런티 빌딩(Guaranty Building)

-산업혁명이후 기계문명의 과도기에 기계화와 공업화라는 시대적 현상을 인식하고 기계의 적절한 사용과 그 가치를 인식하여 기계의 적절한 이용은 제품의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으므로 이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여 규격화와 표준화가 도입되었다. 기계화, 공업화를 예술의 질적 향상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서 현대디자인의 출발점을 제공하고, 20세기초 현대건축의 형성기에 합리주의 건축의 출발점을 제공하였다.
관련건축가
무테지우스(H.Muthesius,1861-1927년) 영국에서 미술공예 운동의 전개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건축과 공예를 연구한 후 독일로 귀국하여 공작연맹의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의 전개과정을 직접 경험하며 건축과 공예를 연구한 후 독일로 귀국하여 공작연맹의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영국의 미술공예 운동이 공업기술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믿고 공업기술의 적극적 이용을 주장하였다.
1911년의 공작연맹회의에서 기계화와 공업화에 의한 규격화와 표준화를 디자인에 도입할 것을 주장하여 이후 무테지우스의 규격화와 표준화에 관한 주장이 독일공작연맹의 기본이념이 되었다. 저서로는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영국 주택을 조사연구한 내용을 수록한 저서 [영국의 주택(Das English Haus, 1904년)]이 있다.
피터베렌스(Peter Behrens,1868-1904년) 공업화와 기계화라는 시대적 요구를 건축에 수용하여 건축의 형태로 발전시킨 20세기 최초의 현대건축가이며, 독일 공작연맹의 대표적 건축가로 서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실제 작품을 통해 구체화시킨 건축가이다.
7)바우하우스(Bauhaus)
- 월터 그로피우스가 독일 바이마르市에서 기존의 수공예학교와 예술학교를 통합하여 설립하여 1919년 응용미술 교육기관으로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 in Weimar)를 설립하였다. 개교 초기에는 당시 독일에서 활발했던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교과과정이 요하네스 이텐에 의해 주도되며 표현주의적, 주관주의적 경향을 지녔으나 1921년 이후 데 스틸의 반 되스버그(van Doesburg)와 러시아 구성주의의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영향으로 초기의 표현주의적 경향을 벗어나 합리주의적 교육이념을 확립 하였다. 1933년 독일 나찌정권이 바우하우스를 폐고하였고, 폐교이후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은 각국에서 활동하며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을 세계 각국에 널리 전파함으로서 현대건축의 국제양식, 합리주의, 기능주의 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관련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독일의 건축가. 1903년과 1907년 사이에 건축을 공부한 후에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베렌스 사무실에 근무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의 초기 작품은 신고전주의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는 독일공작연맹의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19년에는 반 데 벨데를 계승하여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이 학교는 바우하우스의 전신으로 처음에는 바이마르에 있었으나, 1925년에 데사우에 새로운 국제주의 건물의 교사가 그로피우스 그 자신에 의해 세워졌다. 그로피우스 자신이 설계한 작품은 매우 적었으나, 학교의 책임자로서 자신의 스텝들에게 예를들어 더 모흘리 나기 같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28년에 개인 사무실을 개설하였고, 바우하우스 책임자로서 한네스메이어(hannes mayer)를 임명했다. 프리처드의 이소콘그룸(Prichard's Isokon Group)을 위해 가구디자인을 했던 1934년과 1937년 사이의 영국 체류 이후에는 하버드 대학 건축과 교수로 취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5년 건축 그룹 TAC를 설립하였으며, 로젠탈을 위해 건축과 도자기 작업을 하였다.
1. 고대 그리스 건축 양식
- 도리아식·이오니아식 등 대표적인 주두와 코린트식 오더가 발전했다.
- BC 1세기경 로마인들이 변형,채용한 코린트식과 함께 이 2가지 오더는 이후 서양 건축에서 계
속 사용되었다.
-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토스카나식, 콤포지트식(또는 복합식)의 5가지가 있다.
* 그리스 건축양식 (Order : 기둥과 기단, 열주의 주요 양식)
- 오더 (order) -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 건축에서 기둥과 엔타시스를 기본단위로 한 형식
- 기둥과 엔타블레이처의 특징에 따라 몇 가지 양식으로 나누어진다.
* 하나의 기둥은 주신(몸)· 주초(받침)· 주두(머리)로 이루어진다.
* 헬레니즘 문화 → 간다라 양식 → 우리나라 석굴암 본존불
* 엔타시스 방식 : 우리나라 경북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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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리아식 Doric ord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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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오래되고 단순, 간결·웅장하고 남성적임이 특징 * 고대 이집트 건축 베이핫 산의 제 3암굴 분묘의 16각 석주에서 그 원형을 모방했다고 한다. * 도리아인이 살던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시작되어 본토 및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유행한 건축양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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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둥의 기초가 없이 직접 기단과 연결되어 나지막하게 보인다. 2. 기둥머리는 얕은 사발 모양의 한 주관(柱冠:echinus)과 네모진 모양의 판관(板冠:abacus). 3. 윗부분은 차차 가늘어진다. 착시현상을 없애기 위해 엔타시스라는 배흘림 기법을 적용.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 4. 주신은 20개의 얕은 홈의 골 줄을 새겨 입체감과 수직성을 강조 5. 간소하고 힘찬 취향은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에 비해 그리스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6. 직선적이고 장중하며 남성적인 느낌. 7. 채석을 운반하기 편리하도록 11개의 드럼(drum)으로 나누어서 시공했다. ※ 도리아식은 그리스 본토에서, 이오니아식은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에서 생겨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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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 BC 5C 중엽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위치 *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도시라는 뜻 * 고대 그리스의 도시중심이나 배후의 언덕으로 종교, 정치적 중심이 되는 장소. * 폴리스 수호신의 신전이 세워져 있어 전시 (戰時)에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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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피아의 헤라이온(Heraion)신전(B.C 640) * 페스툼의 포세이돈(Poseidon)신전(B.C 450) * 아테네의 파르테논(Parthenon)신전(B.C 447~432) * 아테네의 테세이온(Theseion)신전(B.C 428) * 코린트의 아폴론(BC 5세기 초엽) 신전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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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오니아식 Ionic ord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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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세, 경쾌, 우아, 유연한 느낌으로 여성적 - 여성 신을 모시는 신전에 많이 사용 * 이오니아 -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방의 중부에 해당하는 고대 지방. 밀레투스와 에페수스를 비롯한 소아시아반도 서부지방을 일컫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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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둥의 주초는 2개의 둥근판으로 구성되고 기둥에 더 많은 24개의 세로 홈 있다. 2. 기둥머리 : 주두(柱頭)의 소용돌이 장식은 페니키아 이집트의 주두에서 따왔다. 소용돌이 눈에 보석, 색대리석 등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3. 기둥 높이는 하부 지름의 8배이며 (밑 둥과 윗 둥의 차가 적으며 배흘림이 약하다.) 4. 프리즈는 인물 군상 등 장식 조각이 연속적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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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수스(Ephesus)의 아르테미스 신전 *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12개 도시 중 하나 * 이오니아풍의 백색 대리석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이 신전 은 완성까지 120년이 걸렸다고 한다. * 건축용 석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 * 높이 18m 기둥을 127개나 사용 길이는 120m, 폭은 60m *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가량 * 폐허가 된 신전을 재현한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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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사진 - 폐허가된 터어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 * 아테네의 니케 아프테로스 (Nike Apteros)신전 (B.C 426) * 아테네의 에렉테이온 (Erechtheion)신전 (B.C 420~393) * 밀레투스의 아폴로 디디메우스 (Apollo Didymues)신전 (B.C 335~320) * 사진출처:http://cafe.daum.net/drivingtour/MGiw/25? docid=1YQh|MGiw|25|20101215082258&srchid=IIMwVnI7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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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코린트 식 Corint ord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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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아, 화려, 철저한 장식성이 특징 * 코린트는 아크로 코린토스 언덕(해발 575m)의 성채 아래에서 성장 * 코린트는 그리스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전쟁에 말려든다. * 시가가 지진으로 붕괴 1858년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약 5㎞ 곳에 현대의 코린트 시가 건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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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전건축의 절정, 코린트식 오더는 5가지 오더 중에서 가장 우아하다. 2. 조각과 색채로 양식화된 아칸서스 잎과 4개의 소용돌이 장식이 위아래 엇갈려 2줄로 조각 3. 주신에는 끝이 날카로운 세로 홈이 24개 4. 기둥 높이는 하부 지름의 10배 5. 민중적 건축의 발달 : 극장, 경기장 등 (특수한 도기형태 : 아크로폴리스, 프로필레아(propyleea), 아고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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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폴리스 코린트(Corinth)에 위치한 신전 * 198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 BC 420년경 도시가 페스트의 위험에서 벗어나자 도시의 수호신인 아폴로를 위해 1,600m 바사이산 정상에 건립. * BC 146년경 로마 침략으로 파괴, BC 44년에 재건. 521년 지진으로 파괴,1765년 발견, 20세기초 복원.
* 원형기둥들은 푸른 빛이 나는 방해석을 사용 도리아, 코린트, 이오니아 그리스 3가지 양식을 모두 사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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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밧새의 아폴로 신전 BC 420년 무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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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의 라스크라테스 (Lysicrates)의 기념탑 - B.C 335 *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 (Olympieion)신전 - B.C 17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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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마인들은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을 받아들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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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스카나 식 : 도리아 식 오더를 단순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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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둥의 몸체는 세로 홈이 없고 주두가 단순한 에키누스와 아바쿠스로 이루어 져 있다. * 로마의 도리아식과 비례·윤곽이 비슷하나 더욱 단순하다. * 기둥 높이는 원주 지름의 7배. 토스카나식은 모든 오더 중에서 가장 튼실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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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콤포지트(복합)오더 : 이오니아식 + 코린트식 주두를 혼합한 복합 오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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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야 독립된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 코린트식 오더가 로마 시대 후기에 발전한 것이다. * 이오니아식 소용돌이 문양과 코린트식 아칸서스 잎으로 장식되어 있어 복합 오 더라고 함. * 기둥 높이는 원주 지름의 10배이다. * 기둥이 건물의 여러 층을 한꺼번에 장식할 경우에 서로 다른 오더를 사용한다. * 아래층에는 육중한 오더를 사용하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날씬한 오더를 배치 하는 방식. * 빌딩의 맨 위층에는 코린트식과 복합 오더를 중간층은 이오니아 식, 아래층에 는 도리아 식으로 배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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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들은 각층에 서로 다른 오더를 사용하는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컬로셜 오더를 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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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2층이나 그 이상 높이의 건물에 곧추 뻗은 하나의 기둥으로 장식하는 것 이다. ※ 컬로셜 오더 (colossal order 또는 giant order) - 거대한 양식 * 지상에서 몇 층 높이로 솟은 고전주의 건축의 기둥 양식. 이 양식은 고대에도 사용되었고 르네상스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건물 정면에 쓰 이기 시작. * 토스카나식·도리아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복합식 등 어떤 양식의 기둥이라 도 이 형태를 사용할 수 있다. * 거대한 컬로설 오더는 18세기 유럽에서 부활, 특히 영국에서 존 밴브루 경과 니 콜러스, 혹스무어의 장엄한 극장식 고전주의 건물에 많이 사용되었다. |
* 참고도서
* 그리스 문명의 탄생 / 피에르 레베크 지음 / 최경란 옮김 / 시공사
* 청소년을 위한 서양미술사 / 도병훈 지음 / 두리미디어
* 서양미술사 / 진중권 / 휴머니스트
* 다음, 네이버 백과사전
** 고대 그리스미술을 마치고...... 이제는 로마미술로 들어갑니다~~
* 이 후에 것은 추계예술대학 동문회에 싣습니다.
중세기독교 미술 - 르네상스 - 바로크, 로코코 - 신고전주의....
http://cafe.naver.com/chugyealumni
역사·전례·양식으로 본 한국의 교회건축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과 국가는 고유의 건축물이 그 문화의 척도였으며, 건축은 ‘문화적 유산과 자산’으로 볼 수 있다. 건축이라는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종교건축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시대 최고의 건축가들과 장인들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220여년 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초기에는 혹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불교, 유교와 함께 공존하면서 세계에 유례가 없을 만큼 성장하였다. 개항기, 일제강점기, 전란, 격동기의 어려운 시대에도 훌륭한 교회당이 지어졌고, 그 중에는 근대기 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되거나 등록되었다.
하지만 최근 30년 동안 지어진 교회당 중 정말 종교적이며, 그리스도교적이고, 한국적인 현대 교회당은 몇 개나 될까, 우리 시대에 맞는 교회건축을 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기가 왔다. 종교건축이라고 해서 현대 건축조류를 외면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지나온 역사와 유산, 신앙의 원천인 전례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 책의 1부인 ‘찬란한 신앙의 유산’에서는 문화재로 지정·등록된 교회건축물 중 대표적인 유산을 사진과 함께 건축적·역사적 가치를, 2부인 ‘한국 그리스도교의 수용과 교회건축의 발전’에서는 한국 교회건축이 걸어온 100년 간의 변천사를, 3부인 ‘종파별 전례와 건축양식’에서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성공회 등 각 종파별 예배의식, 특징, 전통에 대해 새겨보았다.
저자 김정신 교수는 1952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가톨릭 성당건축의 수용과 변천과정」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군본부 시설감실과 한국환경설계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히고, 영국 Bath대학(1990년), 일본 京都대학(1997년 단기)에서 연수하였다. 1980년부터 단국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회건축과 한국근대건축사, 문화유산보존에 대한 작품과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영암시종공소(1998), 약현성당 복원(2000), 북한 KEDO종교동(2001), 송현성당(2004) 등이 있고, 가톨릭미술상(2005), 대한건축학회 특별상 남파상(2005), 소우 저작상(2009), 한국건축역사학회 송현논문상(2011)을 수상하였으며, 문화재청과 서울시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美세움 출판사는 도시·건축·디자인·문화를 중심으로 한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와 아름다운 고향 만들기를 위한 도서와 건강한 도시 만들기, 문화도시 만들기 등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를 주제로 한 도서를 지속적으로 출판함으로써 건강한 출판문화를 창조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근세건축 변천사
건축 변천사
2006/12/29 12:53
http://blog.naver.com/sangtakk/100032543974
5. 근세건축 변천사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건축, 로코코 건축
르네상스(Renaissance) 건축
1. 개요
봉건제도와 기독교 정신 위주의 중세가 붕괴되고 상공업 위주의 시민사회가 성립된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어 15,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전개된 고전주의적 경향의 건축 양식.
2. 건축 양식의 특성
1) 재료 및 구조
① 주로 석재, 벽돌, 콘크리트 등을 주재료로 이용.
② 실제 구조는 조적식 구조이면서 외부 입면에는 가구식 구조로 표현.
③ 돔(Dome)은 시공성, 경량화, 아름다운 외관을 위해 골조 구조를 내외로 마감하는 이중 구조로 시공.
2) 인본주의 (Humanism)
① 르네상스인들은 중세의 지나친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향.
② 르네상스 예술은 중세와는 달리 신이 아닌 인간을 주제로 함.
③ 건축은 교회에 집중되었던 중세와는 달리 공공건물, 궁전, 주택 등 다양한 분야로 진행.
3) 복고주의
①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중세의 지나친 신 중심의 감성적, 낭만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고 고전주의 예술에 관심.
② 르네상스 예술 전반에 걸친 복고주의적 경향에 따라 과거의 고전주의 건축에 관심.
③ 고전 건축에 대한 연구분석을 통해 고전 건축의 구성원리를 이론화, 체계화하여 이용.
④ 고전 건축에 핵심적 건축 구성원리는 주범 양식이며 고전 건축미의 근원은 주범에 의한 비례, 질서, 조화임을 인식.
⑤ 주범 양식과 함께 엔타블레춰(Entablature), 박공(Pediment), 코니스(Cornice), 아치(Arch), 아케이드(Arcade) 등 고전적 건축요소들을 건축에 도입.
4) 건축의 법칙 추구
①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신 중심의 사고관에서 벗어나 수학적 비례체계가 우주의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합리적,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짐.
② 수학적 비례체계가 건축물의 기본 구성원리로서 건물의 평면과 입면을 지배.
③ 주관적, 임의적, 감상적이 아닌 규범과 법칙에 의한 객관적, 합리적, 수학적인 건축 양식.
5) 형태 및 장식
① 고전 건축의 질서와 형식미를 건축의 기본적 요소로서 고려.
② 수학적 관계에 바탕을 둔 조화와 질서, 균형과 통일에 의한 형태미를 추구.
③ 건축의 각 구성요소가 그 자체와 상호관련성에 있어서 완벽한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건축형태를 추구.
④ 주범, 코니스, 박공, 아치, 아케이드 등의 고전적 요소들을 장식적 요소로서 이용.
⑤ 외벽은 벽면을 거칠게 마감하여 재질감을 강조하는 러스티케이션(Rustication)기법을 적용.
3.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건축
1) 개요
① 르네상스 문화의 발상지로서 유럽에서 가장 융성.
② 15세기 초부터 16세기 말까지 전개.
2) 전개 과정
① 초기 르네상스 (1420~1500)
- 당시 이탈리아 제일의 상공업 도시인 플로렌스를 중심으로 전개.
- 주범, 아치, 아케이드 등의 고전적 요소가 장식적 요소로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함.
-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쪼 등의 건축가가 주도.
② 전성기 르네상스 (1500~1540)
- 종교, 예술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축으로 전개, 고전주의적이고 복고주의적 성격이 기념성을 가진 성숙기에 도달.
- 선구자적인 알베르티, 브라만테, 상갈로 등이 대표적인 건축가이며 미켈란젤로는 독창적인 작품활동을 함.
③ 후기 르네상스 (1540~1580)
- 미켈란젤로의 건축에서 유래된 매너리즘적 경향이 주류을 이룸.
- 매너리즘 :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과 마찬가지로 과거 양식의 규범을 모방하지만 다양하고 의도적인 조작을 통하여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건축을 추구하는 경향.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1446)
- 르네상스 최초의 건축가로서 초기에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정립.
- 건축에 이전 시대의 고전적 요소들을 도입.
- 플로렌스 성당의 돔, 플로렌스.
- 파찌 예배당, 플로렌스, 1429~1446년.
- 성스피리토 교회, 플로렌스, 1436~1482년.
미켈로쪼 디 바르톨로메오 (Michelozzo di Bartolommeo 1396~1472)
- 브루넬레스키의 제자로서 메디치가의 전속 건축가로서 활동.
- 메디치궁, 플로렌스
- 스트로찌궁, 플로렌스, 1489년
알베르티 레온 바티스타(Alberti Leon Battista 1404~1472)
- 고전 건축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건축의 법칙을 추구.
- 건축의 본질은 '질서와 비례의 법칙에 의한 미'라는 이론을 정립.
- 로마 시대의 건축 이론가 비트루비우스의 건축이론서인 '건축십서'를 분석정리한 '건축론'을 저술.
- 고전 건축에 관한 이론을 최초로 분석 정리한 알베르티의 건축이론은 르네상스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침.
- 루첼라이궁, 플로렌스
- 성안드레아 성당, 만투아, 1472~1512년
- 성프란체스코 성당, 리미니, 1446년
브라만테 (Donato Branmante 1444~1514)
- 초기에는 화가로서 활동.
- 브루넬레스키,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아 집중식 평면을 탐구.
- 성베드로 성당, 최초 계획안 : 로마 교황청의 현상설계에 당선된 집중식 평면 계획안.
- 템피에토, 로마, 1502~1513년 : 성 베드로의 순교지에 건립된 기념성당.
- 성마리아 델라 파체, 로마, 1504년.
안토니오 상갈로 (Antonio da San Gallo il Giovine 1485~1546)
- 브라만테의 제자로서 브라만테의 영향을 받음
- 파르네제궁, 로마, 1535~1550년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 화가, 조각가를 거쳐 건축가로 활동.
- 르네상스 후기 매너리즘 양식의 선구자적 역할.
- 메디치가의 능묘, 플로렌스, 1521~1529년
- 라우렌치아 도서관, 플로렌스, 1624~1626년
- 캄피돌리오 광장, 로마, 1539~1547년
- 성베드로 성당, 로마, 1506~1626년
안드레아 팔라디오 (Palladio Andrea 1508~1580)
- 르네상스 후기 고전주의 건축의 대가.
- 알베르티의 건축 이론을 추종하여 수치적 관계 즉, 비례를 기본적 구성원리로 하는 건축을 추구.
- 건축이론서 '건축사서'(1570년)를 저술하여 고대 건축과 자신의 작품을 분석설명.
- 팔라디오 스타일은 영국에서 특히 애호되어 팔라디오를 형성.
- 카프라 별장, 비첸차, 1549년, 일명 로툰다 별장.
- 성지오르지오 마지오레 성당, 베니스, 1565년
- 성일레텐토레 성당, 베니스, 1576년
자코모 바로찌, 자코모 다 비뇰라 (Giacomo Barozzi da Vignola 1507~1573)
- '건축의 5 주범' 저술
- 일계수 성당, 로마, 1568~1584년
- 카프라로라의 파르네제궁, 카프라로라, 1547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라파엘로 산지오 (Rafaello Sanzio 1483~1520)
쥴리오 로마노 (Gulio Romano, 1492~1546년)
- 델 테 궁전, 만투아, 1525~1535년
쟈코모 산소비노 (Jaccomo Sansovino, 1470~1570년)
- 성마르코 도서관, 베니스, 1536~1553년
발다사레 페루찌 (Baldassare Peruzzi, 1481~1536년)
- 마사미궁, 로마, 1535년
조르지오 바사리 (Giorgio Vasari 1511~1574)
- 우피지궁, 플로렌스, 1560년
4. 프랑스의 르네상스 건축
1) 개요
- 1495년 이탈리아 침입 당시 르네상스 문화를 접한 후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도입.
- 교회 등의 종교건 축 보다는 귀족에 의한 궁성, 성관 건축이 성행.
2) 건축 실례
- 블로아성, 블로아, 1515~1525년
- 샴보르성, 블로아, 1519~1550년
5.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
1) 개요
- 16세기 후반경부터 도입되어 17세기에 성행.
- 목재가 외부로 노출되어 보이는 장식수법인 하프팀버(Half Timber) 기법을 즐겨 사용.
① 튜더 르네상스(Tudor Renaissance 1485~1547)
헨리7,8세의 통치기. 수직적 고딕의 최후기. 튜더아치(4심아치), 하프팀버, 헤머빔 천장(hammer beam), 전체 구성보다는 세부적인 의장에 장식적 요소로 반영.
② 엘리자베스 양식(Elizabethan Style 1558~1603)
엘리자베스1세의 통치기, 고딕에서 르네상스로의 전환기, 구조 방식은 고딕 답습, 양식적으로 고전 모방.
③ 자코비안 양식(Jacobean Style 1603~1625)
제임스1세의 통치기,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건축 양식 도입, 엘리자베스 양식에 비해 장식 간소화.
이니고 존스 (Jones Inigo 1573~1652)
- 영국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적 건축가로서 영국의 르네상스 건축물 완성.
- 화이트 홀(White Hall)의 연회장 건물, 런던, 1619~1622년
- 그리니치(Greenich)의 여왕 저택, 그리니치, 1616~1635년
6. 에스파니아(스페인)의 르네상스 건축
1) 플라테레스크(Plateresque) 양식
- 이탈리아 양식인 르네상스와 스페인의 후기 고딕과 이슬람 요소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초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은세공(Plateria) 양식으로도 불린다. 이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풍부한 장식적인 벽면을 만들어낸 것으로 고전적 오더나 몰딩, 아칸더스의 스크롤 등에 무어적 무늬의 타일로 바닥이나 벽을 장식하고 무어적인 목조의 패널이나 천장을 채용했으며, 정교하고 섬세한 부조가 벽면을 뒤덮었다.
- 디에고 데 리아노(Diago de Riano ~1534)의 세빌리아 시청사(Ayuntamiento Sevilia 1525~)가 대표적인 실례이다.
2) 그리에고 로마노 양식(Griego Romano Style)
- 16세기 중엽의 간소하고 엄정한 고전적 양식, 로마 르네상스와 매너리즘의 혼합.
- 대표적인 실례는 카를로스 5세의 궁전(그라나다 Palacio de Carlos V 1526~), 비스페인적인 성격으로 환영받지 못함.
3) 헤레라 양식(Herrera Style)
- 스페인 절대왕정의 절정기인 펠리페 2세 시대때 쥬안 데 헤레라(Juan de Herrara 1530~1597)가 주로 왕가 건축에 사용한 양식으로 화려한 플라테레스크 기법을 벗어나 엄격하며 현실적인 단순성을 갖춘 형식이다.
- 스페인 궁정의 공식 양식으로 지정되었으나 왕가 건축 이외에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 독일의 르네상스 건축
- 하이델부그(Heidelburg) 성, 하이델부르그, 1531~1612년
- 아우스부르그(Ausburg)의 시청, 아우스부르그, 1610~1620년
8. 네델란드의 르네상스 건축
- 안트베르프 시청사(Antwerp 1561~1565년), 코르넬리스 플로리스(Cornelis Floris) 설계.
바로크(Baroque) 건축
1. 건축의 배경
1) 지리적 배경
- 바로크 건축의 기원 : 로마
- 여러 가지 지방적 특색을 지님.
프랑스 : 고전주의 경향.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 : 대중화, 지방적 특색 부여.
2) 종교적 상황
- 반종교적 시대 이후의 정신 : 국가와 교회가 다시 자신감을 얻음으로서 새롭게 얻어진 안정감에서 비롯된 풍요로움.
- 종교의 본질이 바뀜 : 세속화 경향.
- 로마의 교황, 추기경 : 예술 후원.
3) 정치적 상황
- 바로크 양식은 절대주의 양식이라고도 불림 : 절대권력을 가진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는 중앙 집권 국가의 양식을 의미.
- 프랑스의 바로크는 절대자의 세속적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으나 억제되고 엄격한 고전주의적 경향.
- 바로크 시대에 근대적 민족국가 탄생,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는 도태.
4) 예술적 상황
- 지식의 독점에서 벗어남 : 대중화.
- 복잡성, 풍요성, 빛의 극적 효과 이용.
- 회화, 조각, 건축 : 종합 예술(Gesamtkunstwerk)로 통합, 웅대하고 동적이며 화려하고 과장되면서 열정적이고 다양함.
- 연극의 시대 : 예술은 자연을 반영하는 거울.
- 르네상스에 비해 건축 규모가 커지고 곡면 형태에 바탕을 두어 동적인 효과를 얻게 되며, 새로운 평면 형식과 공간의 창조를 기도함.
2. 이탈리아 바로크 건축(1600∼1750년경)
1) 바로크의 발생지 : 로마
2) '바로크' 란 말의 본 뜻은 '이상하다' 로 경멸적인 뜻으로 쓰였으나 188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멸적인 뜻이 없어짐, 1600∼1750년 사이의 서양 예술 사조를 지칭하는 표준 명칭.
3) 종교적 열정과 함께 교회 건축에서 시초가 됨.
4) 주요 건축물
성베드로 성당
(1) 개요
잔로렌조 베르니니에 의해 완성.
(2) 설계자에 따른 평면과 형태의 변화.
① 브라만테 : 그릭크로스를 기초로 하는 평면, 정방형 형태 안에 앱스만 돌출.
② 미켈란젤로
- 서측에 거대한 포티코를 첨가.
- 중앙 집중식 배치와 축선상의 배치를 종합.
- 브라만테보다 훨씬 더 높고 다이나믹한 디자인의 돔 설계.
-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 기능적이지 못함 (이교도적 냄새 풍김, 늘어나는 신도들을 수용하기에 불충분).
③ 마데르나
- 서측에 네이브를 첨가 : 라틴크로스의 평면.
- 서측 정면(파치아타) : 중앙 돔으로 향하는 시선 차단.
④ 베르니니
- 오벨리스크와 2개의 분수대 등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타원형 열주랑.
- 광장의 가로축을 형성하는 요소로 사용.
- 정면 높이 강조 : 마르데나의 빈약한 정면 교정, 광장과 성당을 연결하는 열주랑은 사다리꼴 형태, 자연스러운 원근법을 사용하여 건물 정면을 관찰자에게 가까이 이끔.
(3) 건축적 형태
① 전체 배치 : 2개의 중심과 이들을 잇는 통로.
② 내부의 중심
- 돔 아래의 주제단과 발다키노 설치.
- 그릭크로스의 익랑에 의한 가로축.
③ 외부의 중심 : 오벨리스크와 2개의 분수에 의한 타원형 광장의 가로축.
④ 통로 : 외부와 내부 공간을 마데르나가 설계한 서측 정면(파치아타)으로의 연결.
⑤ 내부 통로 : 마데르나가 덧붙인 3개의 베이브 베이로 구성.
⑥ 외부 통로 : 주 출입구를 오벨리스크와 연결시켜 축을 구성.
(4) 건축적 의미
① 통로 : 건축적 배치를 주위의 보다 넓은 환경과 연결하여 모든 기독교 세계와 광대한 우주에까지 상징적으로 연결.
② 내외부의 2개의 중심.
- 순례 여행이 끝난 후 외부 광장에 도착.
- 하늘을 상징하는 내부 돔 아래로 최종적 도착.
③ 열주랑 : 폐쇄와 개방의 공간.
④ 거대한 현관 : 하늘로 들어가는 마지막 입구.
⑤ 제단 (성베드로의 무덤) : 교회의 중심부.
성카를로 알레 콰르로 폰타네 성당
(1) 개요
① 수도원 부속의 성당으로 규모가 작음.
② 보로미니의 대표작
(2) 건축적 형태
① 내부 : 타원형의 돔과 평면을 사용하여 긴장되고 압축된 공간 창출.
② 내부의 동적 공간 : 대담하게 돌출된 기둥들로 분절.
③ 요철면이 교호하는 파상벽 창조, 유연하고 부드러운 전이 효과.
④ 1층에서는 오목 - 볼록 - 오목면, 2층에서는 오목 - 오목 - 오목면의 순서로 반복.
⑤ 요철을 둔 입면에서 돌출된 부분에 입구를 두어 율동감을 일으킴.
⑥ 정면의 중앙부 : 강력한 수직적인 힘, 성인상에 의해 가일층 강조.
⑦ 건물의 정면 : 전이 공간.
⑧ 배치 : 원형 배치와 직선 배치의 통합.
(3) 건축적 의미
① 내외부 공간이 지닌 주된 의미 : 외견상 모순된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통합.
② 내외부 정면에 파상선 사용 : 내부와 외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합.
③ 정면 외부의 수평선은 수직적인 강조와 훌륭하게 조합.
④ 문화적 통일을 위해 통합해야 한다는 강한 욕망을 내외부 공간에 표출.
3. 이탈리아 외부의 바로크 건축
1) 프랑스의 바로크
- 보로미니와 구아리니에 의해 발전된 바로크 건축의 자유로운 유입을 허용하지 않음, 엄격하고 고전주의적인 베르니니의 건축을 출발점으로 사용.
- 프랑스가 바로크 건축에 기여함, 세련된 주거 형태의 발전 및 외부공간의 구성.
베르사유 궁전
(1) Vaux-le-Viconte(보르비콩트) 대저택을 모델로 삼음.
(2) 보르비콩트 대저택
- 푸케 소유.
- 루이 르보 설계.
- 부속된 정원은 앙드레 르 노트르 설계.
- 로마의 바르베리니 궁전에서 배치 따옴.
- 큰 스케일의 정원을 가지면서도 자연과 일체되는 주거의 최초의 예로서 루이 14세의 질투심 불러일으킴.
(3) 루이 14세는 똑같은 건축가 고용하여 주제를 발전시킴.
(4) 1668∼1708년 사이에 큰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개념 형성.
- 공원을 면한 U자 모양의 커다란 중앙 블록을 U자의 끝부분에서 직각방향의 양쪽으로 길게 연장시키는 것.
- 왼쪽 부분 : 왕자들을 위한 곳.
- 오른쪽 부분 : 여러 장관들의 집무실, 개방된 구조물.
(5) 정원쪽의 거대한 정면은 전형적 바로크 양식 : 하나의 단위와 두개의 부속 단위로 이어지는 사분된 구획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벽면 분절.
(6) 확장이 기본 주제가 됨, 건물도 필라스터 사이가 커다란 아치 창문들로 완전히 채워지는 투명한 골조로 구성된 단순한 반복 체계로 변형.
(7) 베르사유 궁전은 유리집과 같은 특성을 지니면서 고딕시대의 투명한 구조를 19세기의 거대한 철골과 유리 건물로 이어줌.
(8) 근대적 개념을 예시하는 또다른 특성.
① 확장의 불규칙성과 내부와 외부 공간의 상호 관입.
② 베르사유 궁전의 로얄 채플(1698년경)
- 고전적 요소와 바로크적 요소가 실내공간에서 종합되는 예.
- 근본적 형태 : 정방형 건물에 네이브와 같은 높이로 된 앱스 부가.
- 커다란 클리어스토리 창, 1층과 갤러리 창을 통하여 자유롭게 들어오는 빛은 내부의 정교하게 정다듬한 부분까지 밝고 골고루 비워주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바로크 건물에서의 직접적이고 극적이며 절정의 효과는 내지 못함.
- 내부는 고딕 채플의 특징.
- 장식 절제, 그러나 환상적인 천장 처리.
③ 베르사유 궁전의 외부 공간
- 베르사유의 도입부에 힘과 위엄을 부여하는 아름다운 만곡의 구조물은 황실의 마구간.
- 이 마굿간으로 인해 파리로 연결되는 고속도로가 돋보임, 궁전으로의 접근 강조.
- 정원 : 장식용 연못 있슴, 테라스로부터 내리막 이룸, 시선을 잔디밭을 거쳐 십자가 모양의 거대한 운하로 이끔.
(9) 정원 건축의 비교
① 이탈리아의 정원
- 일찍부터 도시국가 발달, 부의 축적, 도시의 더위 피함 , 교외의 구릉이나 산간의 정원 생활 즐김.
- 전원 취미와 자연을 조망하려는 의도에서 구성.
- 구릉이나 경사지에 세운 건물은 경관조망과 식물재배에 적합.
- 경사지는 몇단으로 테라스를 만들어 지형을 입체적으로 활용, 이탈리아의 조경은 건축적 특성이 강해 노단 건축형식이라고도 함.
- 캐스캐이드, 분수, 물풍금 등의 다이나믹한 수경.
② 프랑스의 정원
- 보수적 기질의 프랑스인들은 성곽생활 영위.
- 피서 겸한 빌라가 발달한 이탈리아와는 달리 성주가 필요로 하는 모든 시설 갖춘 도시주택과 수렵용 건물의 복합체인 성곽으로 발달.
- 지역상으로도 왕실이 있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 한정.
- 잔잔하고 넓은 수면, 호수는 방어요소에서 장식적 요소로 전환.
- 수직적 공간요소로 산림 이용.
③ 영국의 정원
- 보올링그린, 채소원, 포장된 산책로(주택에서 곧게 뻗어나가는 산책로, 자갈을 깔거나 잔디를 입힌 산책로) 등을 설치.
- 마운드(mound) : 방어와 감시탑의 기능, 기하학적 규칙성을 지닌 인공적 언덕, 바빌론의 지구랏트와 유사한 형태.
(10) 베르사유 궁전의 역사적 위치
-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세속적 건물의 종결이자 절정.
- 르네상스 시대에 신 중심의 세계관이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환 : 이후로 인간이 건축공간의 중심, 베르사유 궁전에서 절정.
(11)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적 형태
- 방사형 도로들은 궁전을 향해 수렴.
- 가운데 도로는 궁전과 파리 연결.
- 이 도로들은 알현실 및 의전실로 겸용되는 왕의 침실에서 교차.
- 주요 형태요소 : 직선
① 접근선 : 파리에서 시작해서 왕의 침실에서 끝남.
② 출발선 : 왕의 침실에서 시작해서 넓은 정원을 거쳐 무한대로 사라짐.
- 직선들은 중심으로 해석되는 점들과 밀접한 관계,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침대에서 구체화.
- 직선들은 방사형의 수렴하는 선이 되면서 중심과 더불어 전체적 배치를 구성, 그러나 대칭적이지는 않음.
- 건물 외부의 구성 : 3분할 구획방식.
- 한 부분은 다른 부분을 절대적 지배, 절대주의 개념.
(12) 베르사유 궁전의 건축적 의미
- 베르사유 궁전은 왕의 절대적 권력과 중앙집중화 권위 상징.
- 태양광선을 상징하는 방사선 : 태양왕의 의미 전달.
-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태양왕이 침실에서 나타남, 베르사유 궁전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정교한 의식.
- 직선의 단순성, 지고한 용기와 자신감.
- 이상주의적 신념을 기념적으로 나타냄.
-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바로크 의지를 나타냄.
- 왕의 절대주의가 교황의 종교적 권위 대신함을 상징.
2) 영국의 바로크
- 비교적 차분, 특이한 형식 꺼림.
크리스토퍼 랜(1632∼1723)
- 런던 재개발에 참여
- 방사형, 환상형 도로
-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겸, 예술가적 개념에 가까운 바로크시대의 인물.
- ·숙련된 엔지니어, 바로크 건축에도 정통.
성바울(Saint Paul) 성당
- 런던, 영국, 1625∼1710년경, 크리스토퍼 랜.
- 정면은 페로가 설계한 루브루 궁전의 정면을 모델로 삼음.
- 양쪽의 두개 탑 윗부분과 돔의 채광창 : 보로미니의 성아그네세 성당 참고.
- 돔 : 브라만테의 템피에토를 약간의 변화를 가하여 확대시킨 형태.
- 윗 층은 대체로 보로미니의 방식과 흡사, 아래 층은 파라디오 방식 : 이 모든 요소의 절충과 기념적 통일체 이룩.
- 돔은 고전적이며 정제된 외곽선 만듬.
- 내부 : 고딕 성당의 특징 유지.
- 돔 : 네이브와 아일을 합쳐 놓은 폭이 직경임.
- 돔은 8개의 직사각형 피어에 의해 지지.
- 중앙 돔은 주축을 따라 양쪽으로 3개의 베이에 이어짐.
- 전체적 평면의 형상은 양쪽이 연장된 그릭크로스에 입구 전면부가 덧붙여진 형태.
4. 바로크 건축의 특징
① 비례, 균제, 구조적이 아니라 장식적.
② 회화, 조각, 광선을 도입 양감적, 감각적.
③ 회화, 조각 공예 등의 모든 분야가 건축에 종속, 융화.
④ 공간 구성 기법.
- 투시기법.
- 외부공간(광장)과 건축공간(건물, 중정)의 조합.
- 중심축 가시적 표현.
⑤ 이중 돔, 대 오더 사용.
⑥ 원형 돔 → 타원 → 동적 곡면.
로코코(Rococo) 건축
1. 개요
1) 로코코 양식의 배경
17세기 후반 프랑스는 루이 14세에 의해 바로크를 엄숙함을 지닌 프랑스의 고전을 바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베르사유 궁의 웅장함과 그의 치세(治世) 동안 유행한 바로크 양식에 반발하여, 주지주의에 대치하는 감각주의와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확립되는 사회적인 자유의 관념에 선행하는 감각적 자유의 자발적인 표현이 로코코 양식의 배경이 되었다. 로코코 양식은 17세기의 바로크 양식과 18세기 후반의 신고전주의 양식 사이에 유행한 18세기 루이 15세 (1715~1774) 시대의 실내 디자인 양식이다. 로코코 시대에는 새로운 부르조아 계급의 급성장으로 아름다운 부인들을 중심으로 살롱(salon)문화가 발달하고, 여기에서 여성 중심의 예술이 꽃피어 잔잔하고 섬세한 곡선미의 로코코 예술이 탄생되었다. 바로크 양식이 절대적인 국가의 왕성한 의욕을 나타내었다면 로코코 양식은 인간적인 친근함과 상냥함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취향은 귀족 사회가 퇴폐해 가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도 퍼져나갔다.
2) 로코코 양식이 유행한 연대.
로코코 양식이 유행한 것은 연대적으로 루이 15세 시대로써 18세기 초반 1710년부터 1770년까지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173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로코코 시대에 들어섰다는 주장이 있다.
3) 루이 15세 시대에 장식 양식이 유행.
로코코라는 말은 프랑스어의 로카이유(rocaille)에서 유래한다. 본래는 당시 귀족사회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하여 고안된 장식 양식 내지 공예품에 대하여 쓰인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이 시대의 프랑스 미술 나아가서는 유럽 미술 전반에 걸친 양식 개념이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그 어원에서 오는 조소적(嘲笑的)인 의미는 불식되고 독자적인 형식감정과 이에 부응하는 창조적이며 자율적인 가치를 가진 미술양식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로카이유(rocaille)란 프랑스어로 작은 돌, 자갈이라는 뜻이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왕후의 정원에 그로토를 만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로카이유란 그로토의 내장에 자주 쓰였던 자갈이나 조개껍질을 뜻한다. 그로토 (grotto)는 이탈리아어로 동굴이란 뜻이다. 그러나 정원 관계의 용어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또는 동굴 같은 방을 가리키며 그 내부를 작은 돌이나 조개껍질로 굳혀서 마치 천연의 동굴, 특히 바닷 속의 동굴 같은 느낌을 냈던 것이다. 그로토에는 대개 샘을 설계하고 해신, 해마, 님프, 돌고래, 어패류 등 물과 관계가 깊은 조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가끔 기괴한 취미를 발휘했는데 원래는 '그로토와 같은'이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어 그로테스크 (grotesque)가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4) 로카이유 양식이 건축물에 도입되어 건물 내부장식의 주류를 이룸.
로코코 양식은 국왕 이름을 따서 루이 15세식 양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로코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내부의 벽면이나 문 장식에 로카이유 모양의 장식이 애용되었다는 점이다. 로코코식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건축 내부의 마무리 방법이다. 먼저 방의 사이즈가 일반적으로 작아졌다. 위압적인 바로크식의 장대함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비교적 적은 인원의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기지에 넘친 대화를 즐기는 살롱이 왕후 귀족의 사교생활에서 중심이 된 것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작지만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왕후의 궁전이라면 넓은 방에 높다란 천장이라는 것이 상례였으나 차츰 보통 저택과 같은 느낌으로 가까워져서 천장의 높이도 낮아졌다. 쓸데없이 높은 천장은 차분한 느낌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로카이유는 그로토에서 벗어나 실내의 벽면 장식에도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로토와는 달리 진짜 조개껍질을 벽면에 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조개껍질과 해초를 뒤섞어 놓은 듯한 환상적인 모양을 벽에 시공하였다. 이것이 로카이유 무늬이다. 로카이유도 대체로 그 어원인 자갈은 모습을 감추고 전적으로 조개껍질도 아니고 또 일정하게 정해진 것도 아닌 듯한 불규칙한 곡선이 많은 무늬를 애용하였다. 로코코의 건축가들은 로카이유 무늬의 경묘함과 우아함에도 주목하고 벽이나 문의 장식에는 전적으로 로카이유를 사용하였다. 벽이나 문을 장식할 때 로카이유가 되어 있으면 그 방은 로코코식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철저하게 로카이유를 애용하였다. 그 무늬도 가벼운 느낌을 내기 위해 일부러 좌우대칭을 피하고 선은 되도록 가늘게 했으며 밝은 색 벽면에 황금빛의 로카이유를 우아하게 벽면에 떠오르게 하였다.
2. 특징
1) 구조적인 특징없고 장식적.
로코코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외형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로크식의 요란스러움을 없애고 오묘하고 우아한 느낌을 내게끔 신경을 썼지만, 두드러진 특징을 건물의 외형에는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이 정성을 들인 것은 건축 내부의 설계였으며 건축의 후원자였던 왕후 귀족의 관심도 전적으로 그 방면에 쏟아졌다.
2) 바로크를 우아하고 섬세하게 치장.
로코코의 특징은 조용하고 관능적인 우아함에 있다. 강요하는 듯한 것, 과장된 것, 힘찬 느낌과 양감을 과시하는 것은 모두가 품위가 없다고 배척되었다.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라는 순서로 등장한 건축 양식이 모두 교회 건축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로코코는 귀족이나 부유한 시민의 저택, 왕후의 궁전 건축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기독교가 유럽사회의 주역에서 퇴장함을 의미한다.
3) 프랑스 바로크 연장선상에서 발생된 하나의 장식 양식.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정형(不定形)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및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는데, 바로크가 남성적 의지적(意志的)임에 비하여 로코코는 여성적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 양식에서는 벽면과 천장, 소조(塑造) 등을 조개나 자연물 형상뿐 아니라 'C'자(字)나 'S'자 같은 기본형태 위에 교차곡선과 역곡선(逆曲線)을 그린 문양으로 장식했는데, 대칭보다는 비대칭을 기본으로 삼았다. 색상은 밝은 파스텔색, 상아빛 흰색, 황금색이 주로 쓰였으며 이 양식의 장식가들은 유리도 자주 사용하였다.
4) 파리 중심으로 일어나서 남부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환영받았으나 그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 못함.
'모서리가 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기둥, 대들보, 문틀, 창틀이 삐쳐 나오는 것을 의식적으로 없애고 방안에서 보면 주위의 벽을 모두 평평한 평면으로 마무리하였다. 기둥, 대들보, 문틀, 창틀은 건축구조에서 꼭 필요한 것이므로 벽이나 천장에 메워 넣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열주와 대들보, 로마 건축에서는 열주와 아치와 벽체가 자아내는 힘찬 구성감이 건축에서 중심이 되었다. 여기서 유럽의 건축은 그 전통을 계속 계승해온 셈이지만 로코코가 추구한 건축의 미의식은 실로 180도의 전환이었다. 로코코식의 궁전은 방과 방을 막고 있는 벽이 너무 두텁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메워넣기의 기법'을 쓴 결과로 그만큼 방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집안의 공간을 가능한 살리려고 애쓴 사실에서 보면 어느 면에서는 사치스럽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이러한 불합리와 사치를 멈추지 않았던 부류는 일부 특권 계급일 뿐이었다. 따라서 로코코 양식은 일부 계층의 유행에 국한되었고 그 지역 건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3. 건축물
로코코 건축의 최초 작품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유 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제르맹 보프랑(1667~1745)이 만든 파리에 있는 오텔 드 수비즈(1735~1740 건축)의 타원형 살롱, 쿠르톤느(1670~1740)가 설계한 파리의 오텔 드 마티뇽(1721), 장 오베르가 장식한 샹티이의 쁘띠 샤또에 있는 무슈 르 프랭스의 살롱(1722 완성), 가브리엘의 퐁텐블로 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유 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보여준다. 가구 분야에서는 C.크레상이 일찍이 레장스 양식을 완성하였고, 루이 15세의 궁정소속 가구목수인 A.고드로, P.미종, 독일 출생인 J.F.에벤이나 그의 제자인 J.H.리즈너 등도 유명하다.
로코코의 실내장식은 실내에 있는 그림, 조각, 공예, 거울, 그 밖의 모든 것을 하나의 기조 위에 통합, 조화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그 특색은 공예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가구나 집기류는 모두 경쾌하고 우아한 형태와 무늬로 만들어지고, 자기(瓷器)에도 지나치게 도안화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인간이나 식물의 형태, 무늬가 활용되었다. 좌우대칭의 전통이 깨지고 애시메트릭(asymmetric)한 자유로운 디자인이 등장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 유럽에 유행하였던 중국 취미와 더불어 동양 공예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특히 1715~1745년의 장식예술은 로코코풍이 강했던 시기였는데, 그 이유는 이 양식이 가구, 벽걸이, 자기 등과 금은 세공품에 잘 어울리는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허접한작품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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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이상한점 고칠점이보인다면 덧글로 충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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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건축
유럽의 건축은 19세기 후기까지는 세계 대부분의 문명지역에 보급되었으나 그 양식의 기본적인 성격은 르네상스 이후 과거의 건축양식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 그렇지만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변혁으로 인하여 건축에도 큰 변혁을 가져왔다. 대규모의 공장 ·창고 ·철도역 ·시장 ·백화점 ·고층빌딩 등의 건조, 대도시의 형성이나 주택문제와 같은 새로운 과제로 인하여 주철 ·선철 ·강철 ·철근콘크리트와 같은 신재료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수공업적 기술의 쇠퇴와 노임의 상승이 전통기술의 유지와 응용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새로운 건축양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과거 양식에 의존하던 건축미학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 미의식의 개혁이 가장 곤란하였다.
W.모리스와 그 일파는 1860년경부터 단순하고 솔직한 표현을 존중하는 공예개혁운동(工藝改革運動)을 일으켜, 주택 합리화를 유도하였다. 모리스의 영향을 받아 1890년대의 벨기에에서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양식과는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양식을 창조하고자 하는 최초의 시도로서 각국에서 일어났으나, 사회적 요구나 기술적인 발전방향과 밀접하게 합치되지 못하여 뿌리 없는 표면상의 예술운동에 지나지 않은 감이 있다.
또한 아르누보는 피상적이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직접적인 표상의 한 발전일 뿐 그 이상의 더 큰 운동으로서의 중요성이나 사회성은 찾을 수 없다. 회화에 있어서는 1890년대부터 세잔과 고갱에 의하여 새로운 발전을 볼 수 있는데, 면(面)·형태(形態)·색채(色彩)의 균형 등에서 추상적(抽象的) 회화의 미학이 점점 확립되었다.
P.베렌스가 설계하여, 1907년 독일의 베를린에 건립한 A.E.G 터빈 공장은 근대건축의 새로운 철의 시기를 기념하는 기념비적 존재인데, 베렌스의 작품에 따라다니는 고전주의적 형태가 이 건물의 기념비적 의미를 한층 강조하고 있다. 철골은 명료하게 노출되고, 측면을 벽으로 막는 대신에 교묘하게 구획한 큰 유리면을 쓰고 있으며, 거대한 건물의 중량과 강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모서리에 돌을 사용하는 등, 기하학적 구성에 이르는 건축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A.페레가 철근콘크리트의 특성을 살리는 골조구조의 건축양식을 창조하고, 시카고에서는 L.설리반이 고층 빌딩 건축에 대하여, F.L.라이트(1869∼1959), 로마 주택건축에 대해서 나름대로 새로운 건축적 표현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을 계승하고 종합하여 건축에서의 근대 디자인의 방법과 방향을 확립한 사람은 베렌스의 주임조수였던 W.그로피우스이다. 그는 파구스 제화공장(Fagus Fabrik, 1911)과 쾰른 독일공작연맹 전람회의 모델공장(1914)에서 철과 콘크리트와 유리에 의한 자유로운 기하학적 구성과, 이것을 이룩하기 위한 기본적 건축기법을 명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의 독일에서 일어난 보다 자유로운 개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표현주의 건축운동은 그 이론적 뒷받침의 미비함으로 인하여 단기간에 종식되었으나, 같은 1920년대에 그로피우스는 자기의 수법을 발전시켜 데사우(Dessau)의 바우하우스 교사(Bauhaus 校舍, 1926)를 완성하고, 르코르뷔지에는 주택에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미학을 적용하여 보다 풍부한 조형성(造形性)을 이룩하였으며, M.V.d.로에는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관(1929)에 철저한 건축조형의 순수화를 추구하여 나름대로 기능주의와 기하학적 추상미학에 의한 근대 디자인을 성숙시켰다.
1930년대는 근대건축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는데, 앞에서 말한 3인 외에 핀란드의 A.알토, 스웨덴의 E.G.아스프룬트, 미국의 R.노이트라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나, 독일에서는 나치즘의 대두로 근대화운동이 탄압되었으며, 소련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국제적 양식이 억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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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근대건축
2011/06/1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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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근대건축을 추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글을 쓴다.
‘가장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이라는 표현에서 수많은 건물들이 떠오른다. 우리 땅에 서 있는 건물 만으로도 손에 꼽기가 벅찰 만큼 좋은 건축물은 많이 있지만 그 대상이 ‘근대건축’에 한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시작된다.
근대건축은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연도로는 1800년대 후반에서 1945년까지 약 50~60여년 간의 시기가 대상이다. 오늘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근대건축물로는 한국은행본관, 명동성당, 독립문, 구서울역사, 대한의원본관, 서울시청사, 연세대언더우드관, 고려대 본관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목조건축에서 벗어나 콘크리트 골조와 서양식 건축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특징이 있고, 건물 만으로는 유럽의 어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그 시절의 건축양식이거나 현대건축으로 넘어오는 과도기적 현대식 건물인 경우가 많다.
건축적 완성도의 기준이 조형에 있는지, 공간에 있는지, 튼튼함에 있는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겠지만, 이들 건물의 상당수가 기준치 이상의 견고함, 모듈화된 평범한 실내공간, 수공예를 연상케 하는 치밀한 디테일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이들 건축의 공통점은 요소나 양식, 기술이 부분적으로 수입되어 기존의 한국건축과 접목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완제품이 수입되듯이 완벽하게 외국의 것 모습 그대로 공간이동 하듯 들여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건물들은 처마나 기와 툇마루나 온돌, 황토벽이나 목조장식과 같은 한국전통건축의 요소들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고, 100% 당시 외국의 건축 그대로 들어왔으므로 주변환경과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동시에 그 자체로서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가 존재한다.
따라서 조형이나 공간, 견고함에 있어서 상위권의 근대건축물들은 모두 대동소이하게 우수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것을 골라낸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나 인연이 선정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무의미한 선정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세운 시청건물이 우리민족에 의해 우리 손으로 지어진 고대 본관보다 못하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역사적인 의미와 감정적인 문제로 본다면 근대건물이든 사적이든 톱으로 잘라내 갈아 없애 버릴 수도 있을 만큼 (조선총독부 건물이 그랬다)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은 크지만, 건축적 완성도 라는 표현은 역사적, 감정적 부분에 대한 평가는 배제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완성도”라는 용어를 그 나름대로 정의해 봄으로서 순위를 정해보려 한다.
완성도란 초기에 고안한 건축물의 규모와 형태가 오랜 시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큰 변형이 없으며, 오늘날 까지도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건물로서 얼마나 활용도가 있는지로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신역사에 본연의 기능을 내 줘 버린 구 서울역사는 순위에서 밀려난다. 시대적 요구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하는 건물로서 역사적 의미는 있겠지만, 이제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완료’되어 버린 건물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시청사와 독립문도 제외된다. 독립문은 기념물로서 이미 건축이 아니며, 한국은행은 대중이 누릴 수 없는 폐쇄된 공간으로서 의미가 적다고 보았다.
오늘날까지 본연의 기능과 위용을 자랑하며 여전히 사용되고 만인에게 사랑받고 있는 건물은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본관 건물로 쓰이고 있는 그 두 건물이 아닐까 한다. 지어질 당시에도 학교 건물이었고, 오늘날에도 학교 본관으로서 소용되고 있으며, 덧붙여지거나 외형이 크게 변하는 일이 없이 오히려 주변 건물의 형태와 배치도 이들 건물을 강하게 의식해서 지어질 만큼 이미지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많은 근대건물이 관리가 안되거나 용도가 부적합해 지면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는 반면 이 두 건물은 오히려 주변이 더 잘 가꾸어 지고, 해당 지역의 랜드마크로 활용되는 등 건축물로서의 완성도가 나날히 높아져 가고 있다.
그래서 연세대 언더우드관과 고려대 본관을 건축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건물 공동 1위에 선정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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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의 근대 건축물 서울성공회 성당
2009/03/15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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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옆에 위치한 성공회 성당을 다녀왔습니다.
막연히 카톨릭 성당인줄 알았습니다만... ^^;;
로마 카톨릭에서 독립한 영국국교 성당이군요.
영국 공사관(현 영국 대사관) 앞에 위치하게된 이유이기도 하겠네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로 로마교회에서 나와...
국왕 스스로 교회수장이 되었던... 역사적으로 볼때 시대적 입맛에 맞게
변화하는건 종교도 예외가 아니였습니다. ㅡ ㅡㅋ
솔직히 카톨릭도 마녀사냥, 면죄부 판매... 개신교 탄압학살...
십자군 전쟁... 세계대전때 교황청의 방관... 등등 역사적으로 안좋았던 시절이 있었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
종교개혁으로 나온 개신교... 뜻은 좋은데... 현재는 개신교가 젤 욕 많이 먹죠.
신도수, 헌금에만 관심있는 먹사님들 많으시고. 교육관 만든다고 동네땅 다 사들이고...
개념있는 어느 교회는 강당이 있는 사회시설 빌려 예배드리는 곳도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용어 자체를 개신교만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하거나
개신교와 천주교로만 한정하는 등 잘못쓰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의 교파를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종교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있지요.
아브라함계 종교라고도 합니다. 유대교는 구약만, 이슬람교는 구약, 코란
그리고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인정합니다. 그 뿌리는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종교적 대립으로 서로 총칼을 맞대고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오 신이시여 ~~~ ㅜㅡ
로마네스크 건축양식
지중해 연안에 꽃 피웠던 로마 제국이 멸망과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등 로마의 문화가
내륙 쪽으로 전파하게 되었고 차후 유럽이 안정화 되면서 생성된 건축양식입니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로마네스크(Romanesque)는 합성어로 ’로마적인 양식‘ 이란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고대의 로마건축양식을 기준으로 유럽 내륙으로 전파되면서
수도원 및 성당 건축에 이용되었습니다.
기본 구조는 아치와 기둥 체계로 이루어진 형태입니다.
즉 기둥과 기둥 사이 상부의 아치 형태 개구부는 상부 벽체 하중을 기둥으로 원활하게
전달하기 위한 형태로 일정한 마름모꼴 모양의 벽돌 서로 맞대어 만든 반원형
아치 형태의 지지물이 상부의 하중을 원활히 기둥에 하중을 전달하는 형태인 것입니다.
그 외에 두꺼운 주벽에 작은 채광창의 착색유리(stained glass)를 통해서
내부의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당시 대부분 신도들이 문맹이었던 것을 감안하여
내부 넓은 벽에 회화와 조각을 함으로써 성서의 내용을 신도들에게 전달했다고 합니다.
내부의 아름다움을 느끼고파 들어가고자 했으나... 아쉽게도 문이 잠겨 있었습니당.ㅜㅡ
토요일이라 개방시간이 조정되었나 봅니다.
선이 참 아름다운 성당이였습니다. 멋지죠...^^
십자가 위의 3개의 창은 혹시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성부, 성자, 성령
1922년에 착공하여, 1926년 5월 2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설계자는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아더 딕슨(Arthur Dixon)이며,
감독자는 브록크... 건축 모금액은 조선에서 6,000원을, 영국에서 8,000원을 모아
합계 14,000원이었으나, 예상 공사비가 30,000원이었기 때문에
계획 건물을 100% 완공할 수 없었습니다.
설계자 딕슨은 이 건물이 완공된 직후인 1927년 성당 일부를 개조하기 위하여
내한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개조된 내용은
첫째, 원 설계 규모의 일부만이 준공되었고,
둘째 내부 벽화ㆍ색채에 대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고,
셋째 서양의 건축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설계하였으며,
넷째 도시경관을 고려하여 조경계획을 하였습니다.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5호 , 지정연월일 : 1978년 12월 18일
시 대 : 1922년 착공, 1926년 5월 2일 완공, 1996년 증축
규모·양식 : 지하 1층, 지상 3층, 초창시 건축면적 519㎡(157평), 연면적 909㎡(275평),
로마네스크 양식
재 료 : 구조- 목조 트러스, 외장재- 적벽돌ㆍ화강암
설 계 자 : 아더 딕슨(Arthur Dixon)
소 유 자 : 대한성공회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1991년 성공회 성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대성당을 증축하고자 하였는데
설계도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1993년 한 영국 관광객이 그가 근무하는 렉싱톤도서관에
보관된 아더 딕슨의 원 설계도를 찾아냈고, 원 설계도에 따라서 광장건축의 김원(金洹)이
실시 설계하였으며, 대우건설이 시공하여 1996년 축성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긴 십자형 평면(latin cross)으로, 우아한 내부 공간과 변화 있는 매스,
견실한 상세 등으로 한국 로마네스크양식 교회건축을 대표하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과 쌍벽을 이루는 성당건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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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5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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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 포스팅은 처음이네요. 신기하기도 했고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아닌 식민지 상태에서의 일본영사관은 어떠했을까 상상도 해보았네요. 목포에서 만났던 일본영사관 건물입니다.
우체국이 있고...
주목할 만한것. 국도 1호선 도로원표
목포에서 신의주 까지 939km
목포에서 판문점까지 498km
국도 1, 2 호선 기점
조선 광무4년인 1900년 1월에 착공해서 12월에 완공된 매우 유서깊은 건물입니다. 1907년까지 일본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한일간의 국제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1914년부터 목포부청사, 1974년부터 목포 시립도서관, 1990년부터 2009년까지 목포 문화원으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한동안 목포 시민들은 이 건물을 바라만 봐도 치가 떨렸을 것 같네요.
매우 공을 많이 들인 건물임을 단번에 알수 있겠지요. 창틀 위쪽마다 만들어 놓은 아치모양이며 그 위의 원모양 무늬, 1층과 2층의 경계는 돌출되게 벽돌을 붙여 경계를 확실히 했고(이런것을 전문용어로 허리 돌림띠라고 하더군요)2층 창문 주변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습으로 장식된 모습이 이 건물은 보통 건물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바다로부터 1km 정도의 거리에 유달산 기슭에 위치하여,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 건물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입니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되었지요. 그리고 1897년 10월 26일에는 목포 일본영사관이 설치 되었구요.
건물 평면은 장방형으로 중앙 바깥쪽으로 현관을 두었고, 내부 바닥을 나무로 구성하였으며, 우진각 지붕으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돌출된 부분은 화장실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대리석으로 치장한 벽난로와 당시 사용하던 거울등이 잘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데 들어가진 못했습니다.
일제 침략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건축물로서 역사적교훈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써 보존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빨간 벽돌위에 하얗게 동그랗게 만들어놓은 것은 어찌보면 일장기의 모습을 나타낸것이 아닌지...
목포에서 만나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축물.
그래서 198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지요.
2차 세계대전당시(194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말엽)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 동원해 파놓은 인공동굴입니다. 우리나라 민초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는 정말 유서 깊은 곳이죠.
내부 전체길이가 82미터나 되고 높이는 2미터, 폭은 넓은곳이 3.3미터 가량이며 출입구는 모두 3개이라고 하더군요. 현재 목포에 남아 있는 여러 개의 다른 방공호에 비하여 길이가 길고 형태가 정교한 것으로 보아 전쟁시 매우 긴요한 목적과 기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들 살라고 88미터나... ... 고생많이 했겠네요... 강제로 끌려와서 노동에 시달렸을 텐데...
목포 문화 사랑방으로 쓰였던 건물인데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듯... 목포 부청의 서고로 지어졌을 거라는 추측만 있더군요.
부속건물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이곳은 봉안전 터 입니다. 봉안전은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 백성들을 황국신민(일본국민)으로 만들기 위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관공서, 학교 등에 천황의 사진, 칙어등을 모셔놓고 신사참배를 하지 못할 때 대신 참배 하도록 했던 곳입니다.
이 봉안전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철옹성같은 한평 남짓한 건물이었답니다.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목포시의 모습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평화가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네요.
목포 영사관에서 다시 한번 울분을 느낍니다.
서양 근대건축사 산책」-(4)
순정인가, 일탈인가: 1900년 전후의 핀란드 민족낭만주의 건축
“우리는 스웨덴 사람이 아니고, 러시아인이 될 수도 없다. 우리, 핀란드 사람이 되도록 하자.”
이 모토는 19세기 핀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이다. 1809년까지 약 7세기 동안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더니만, 그 후에는 또 러시아의 대공국(大公國)이 되어 1917년에야 비로소 독립한 북유럽의 변방 국가 핀란드. 지금은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손꼽히나 100년 전만해도 국가의 주체적 존립 자체가 불투명했고, 따라서 민족의식의 고취는 그들에게 절실한 과제였다. 그런 그들의 정체성을 위한 유력한 근거는 바로 ‘말’이다. 우랄어족에 속하는 핀란드어는 (알타이어로 분류되는 우리말과 먼 친척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여타 유럽 국가들과는 물론이고 스칸디나비아나 슬라브계 주변국들과도 달라 그들에게 구별된 민족정서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핀족(The Finns)이 역사의 여명기에 유라시아대륙을 거쳐 현재의 땅에 정착했다는 이론이 19세기 학자들 사이에 크게 대두되기도 했다. 민족 서사시 『깔레발라(Kalevala)』(1835/1845)의 출판은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중요한 배경이 됐는데, 이는 ‘까렐리아(Karelia)’라 불리는 핀란드와 러시아의 국경 지역에서 핀족의 기원과 관계된 구전 민담과 시가를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1900년 전후 핀란드에 더욱 강화된 러시아화 정책은 오히려 그들의 민족주의 움직임을 확산시킨다.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까렐리아 순례를 통해 영감을 얻어 낭만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예술창작에 노력함으로써 이른바 ‘까렐리아니즘(Karelianism)’이라는 흐름을 낳았다.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 시인 에니노 레이노, 화가 아끄셀리 갈렌-깔렐라 등이 그러했고, 건축에서는 라르스 쏭크(1870-1956) 및 3인조로 활동한 엘리엘 사아리넨(1873-1950), 아르마스 린트그렌(1874-1929), 헤르만 게젤리우스(1874-1916)가 주도적이었다.
http://blog.daum.net/clairemarie/3 건축 기둥 명칭
스웨덴 스톡홀름에는 프랑스 퐁피두센터를 모방한 ‘문화의 집’이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제 문화센터보다 스웨덴인들의 사회문화적 소통에 더 큰 역할을 하는 곳은 주민들이 전국 곳곳에 지은 ‘민중의 집’이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민중의 집(Maison du Peuple)’ 전통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전역에 퍼졌다. 생활과 정치가 만나는 곳이자 문맹퇴치 교육, 직업훈련, 문화공연, 생활 스포츠의 공간이기도 하다. 2008년 서울 마포에 국내 최초 ‘민중의 집’을 열었던 저자가 45일간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을 돌며 탐방한 민중의 집을 소개했다

1. Art Nouveau Architecture
“아르 누보 건축”이란, 19세기 말엽 절충주의와 아카데믹한 고전주의의 흐름에 대한 반작용으로 형성되어 1890년부터 1910년까지 지속되면서 유럽 전역과 북미에 커다란 영향을 준 다양한 현상을 일컫는다.
“Art Nouveau”라는 명칭은 1895년 프랑스 파리의 S. Bing라는 사람이 “Maison de l` Art Nouveau`라는 상점을 설립, 개점하고 새로운 양식의 예술품, 즉 어느 특정 시대를 모방하지 않은 양식의 제품을 판매하였는데 새로운 예술을 의미하는 말인 “Art Nouveau”가 여기서 유래하였다.
Art Nouveau 운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것은 다양한 국가의 전통이라는 특수 맥락, 개개 건축가가 탐구하는 다양한 원천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장식적인 예술양식의 기원은 19C 초엽 예술가이자 시인인 W. Blake의 꾸불꾸불한 선을 회화의 전통에 있으며, 삽화예술가인 비어즐리의 미학,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화가 고갱 등의 영향을 받았다.
Art Nouveau양식을 대표하는 장식적인 특성은 파도, 불꽃, 꽃줄기, 꽃봉오리, 넝쿨손, 곤충의 날개, 흐르는 듯한 머리카락 등과 같이 파동치고 비대칭을 이루는 선이다. 선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리듬 있고 강력하고 채찍과 같이 힘찬것일 수도 있다. 건축이나 기타 조형 예술분야에서는 3차원적 형태 전채가 유기적이고 파동치고 선형의 리듬에 휘말리면서 구조와 장식의 융합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건축은 이러한 장식과 구조의 통합을 잘 보여주고 있다.
Art Nouveau양식으로 작품 활동을 한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는 무수히 많았다. 이 중에서 특히 뛰어났던 인물로는 스코틀랜드의 건축가 메킨토시, 벨기에의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 빅토르 오르타, 프랑스의 건축가 헥토르 기마드,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등이 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Art Nouveau양식은 시대에 뒤진 것으로 되어 전반적으로 장식적인 양식으로서 포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제반 과거양식의 모방에 종지부를 찍고 공간적인 평면표현상의 변화보다는 표면과 장식의 관계라는 새로운 개념을 추구하여 커다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2. Victor Horta의 생애
빅토르 오르타는 아르누보 건축의 세계적인 유행에 선구적 역할을 한 사람으로, 1861년 1월 6일 겐트(Gand)에서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출생했다. 12세에 국립음악학교에 다니다가 15세때부터 건축공부를 시작하였다. 17세에는 파리에 체류하며 장식건축가인 쥘 드뷔송과 함께 전시장식등의 일을 했으나 곧 귀국하였고, 1880년 브뤼셀에 정착하여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신고전주의 건축가 알퐁스 발라의 교육을 받았다.
1. Art Nouveau Architecture
2. Victor Horta 의 생애
3. Victor Horta 의 작품들
1) 타셀 주택 (Tassel House)
2) 오트리끄 하우스 (Autrique House)
3) 솔베이 저택 (Solvay Hotel)
4) 반 에트벨데 하우스 (Van Eetvelde House)
5) 민중의 집 (Maison du Peuple)
6) 빅토르 오르타 박물관(Musee Horta)
장인정신과 미술이 결합된 붉은 집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한 ‘미술수공예운동’ 개념 실현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은 모든 분야에서 혁신적 변화를 몰고 왔다. 특히, 산업혁명이 낳은 핵심인 대량생산은 디자인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계생산된 공예품이 쏟아져 나왔고, 가구 등 각종 건축관련 제품도 규격화되어 생산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몰고 온 이 같은 변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점차 커졌다. 진정한 디자인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장인정신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선봉에는 현대디자인의 선구자로 불리는 윌리엄 모리스가 자리했다. 그는 조잡하게 기계생산된 제품이 삶의 질을 저하시킴을 지적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한 ‘미술수공예운동’을 전개했다.
디자인을 통하여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에 찬 모리스는 가구, 벽지, 스테인드 글라스, 자수 등 다양한 대상을 통하여 그의 이상을 실험했다. 무엇보다도 모리스의 개념이 완벽하게 실현된 것은 1859년 런던 근교 벡슬리히스에 지은 ‘붉은 집(Red House)’을 통해서다. 이 집은 모리스의 신혼집으로써 필립 웹이 함께 디자인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집은 고딕건축과 같은 위엄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매우 간결하고 실용적이다. 특히, 이전 혹은 당시에 보편적으로 유행했던 대칭적이고 화려한 외부 장식 등에서 과감하게 탈피했다. 그러나 내부의 상황은 다르다. 모리스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벽, 바닥, 천장은 물론이고 각각의 공간에 필요한 모든 소품들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다. 그야말로 땀이 묻어난 장인정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외부에서 보면 붉은 집은 토속적인 모습 때문에 마치 수도원처럼 느껴진다. 19세기 유럽의 주택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겪던 시기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붉은 집은 적어도 당시로서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붉은 집은 거주공간은 근본적으로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졌고, 영국 나아가서 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르누보의 이상을 실현한 타셀 주택
원초적인 형태·색 등 디자인에 접목시켜 새로운 변화 모색
붉은 집이 지어진 지 30여년이 지난 1893년 또 하나의 획을 긋는 주택이 등장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지어진 타셀 주택(Tassel House)이다. ‘아르누보’는 전문적인 용어지만 일반인에게도 친숙할 듯싶다. 이는 아르누보가 건축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가구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서 발전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아르누보는 건축과 디자인이 기존의 고전양식으로부터 발전을 꾀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자연 및 생명체가 지닌 원초적인 형태와 색 등을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이다. 표현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계화되고 단조로워지기만 하는 주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앞서 설명한 미술수공예운동과 공통점이 있다.
타셀 주택은 아르누보의 이상을 완벽하게 실현한 최초의 주택으로 여겨진다. 브뤼셀 도심에 위치한 타운하우스인 타셀 주택은 과학자인 에밀리 타셀을 위한 주택으로 전면이 불과 7미터 남짓 밖에 되지 않는 좁은 대지에 지어졌다. 외부에서 보면 타셀 주택은 우아하게 돌출되고, 화려하게 장식된 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현관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이 집의 진면목과 마주한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에 설치된 주철재 기둥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습으로 정교하게 디자인되었다. 그런가 하면 바닥과 천장, 벽은 원시림을 연상시킨다. 2층에 설치된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과 함께 어우러진 이 공간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한편, 타셀 주택은 기존의 전통적인 주택과는 다르게 내부 공간을 건축주의 요구에 맞게 융통성있게 구성함으로써 아름다움과 기능을 동시에 성취했다.
타셀 주택은 유럽을 대표하는 저택들과 다르게 도시에 지어진 작은 집이다. 그러나 타셀 주택이 실현한 아르누보의 이상은 그 어떤 주택보다 의미있다. 유네스코가 지난 2000년에 타셀 주택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다.
| ▲ 붉은 집(사진왼쪽)은 당시 유행하던 대칭적이고 화려한 외부 장식 등에서 과감히 탈피해 모든 소품들을 정교하게 디자인한 장인정신의 진수를 보여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타셀 주택(사진 오른쪽)은 내부 공간(사진 안)을 융통성있게 구성해 아름다움과 기능을 동시에 성취했다. |
목차
아르누보 건축
- 산업혁명 새로운재료, 새로운기술, 새로운정신
프랑스의 아르누보 건축
- 빅토르오르타
- 헥토르기마르
빈 분리파운동
- 이념
- 주요활동인물
이후 전개양상
- 바우하우스
- 국제주의 건축
결론
산업혁명
산업혁명이 가져온 공업화, 도시화의 흐름가운데 건축역시 커다란 변모를 맞이했다. 한업혁명 이전의 건축이 절대적으로 교회나 귀족의 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과는 달리 공업화시대의 사회에서는 공장과 창고와 같은 산업관련시설이나 직주분리와 같은 새로운 생활형태에 대응한 주택이 건축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새롭게 나타난 새로운 건축은 공업생산된 철과 유리,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축되었다.
새로운 건물유형의 탄생
산업혁명 이전의 도시는 지배계급이나 상인이 도시의 주요 계층이었던 반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도시의 경계 밖에서 살고 있었다. 도시는 지배계급의 저택이나 권력기구의 시설, 상업활동을 위해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업혁명에 의한 공업도시의 출현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와 피지배계급인 노동자가 같은 도시내의 같은 공장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의 출현은 새로운 건축의 출현을 요구한다. 그것은 공장이나 사무실, 창고, 철도시설 등 새로운 산업을 위한 건축이었다.
이에따른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생활, 새로운 도시의 존재방식을 모색하는 일이 건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공업화시대의 건축재료
18세기 후반이후, 생산기술의 향상에 따라 철, 유리, 콘크리트와 같은 재료가 공업제품으로 대량생산 되었으며 새로운 건축재료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이들 재료는 일찍부터 건축재료로 이용되기는 했으나, 대대적으로 사용된 것은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생산시스템의 공업화 이후였다. 대량생산에 의한 비용절감과 품질수준의 확보가 가능하게 되면서 재료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철은 석재나 벽돌에 비해 현저하게 강도가 높으며 얇은 부재로 넓은 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 철은 역이나 공장, 시장과 같은 대공간을 필요로 하는 건물에 사용되었다.
콘크리트는 19세기 후반 철근콘크리트 기술개발이 시작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철근 콘크리트는 철골구조에 비해 뛰어난 내화성과 (조셉 팩스톤의 수정궁은 순수 철골구조물이었는데 결국 화재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전의 콘크리트 구조물의 취약점인 약한 인장강도를 획기적으로 높인점, 저렴한 가격, 무제한적인 표현의 가능성등은 철근콘크리트를 근대건축 대부분이 채택하게 하였다.
유리는 19세기 전반 유리제조기술의 향상과 판유리의 새로운 제조방식의 도입은 균질한 품질의 판유리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값싼 판유리의 보급은 철골구조의 발달과 함께 건물전체의 외벽을 덮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박람회 건축물과 온실, 미국의 빌딩등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건축
이시대의 건축가들의 특징은 과거의 건축양식을 정확하고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과 자국과 다른나라의 건축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차용하여 건축디자인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또는 절충주의적인 건축적용방식은 점차 시대의 조류에 대응하는 진정한 창조가 아닌 정체적이고 소모적인 양식의 장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량생산의 가능은 단편적인 양식의 대량복제가 가능해짐에 따라 디자인의 질적 저하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초기의 근대건축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하에 탄생하였다. 20세기초 근대건축 예술가들은 19세기 말엽, 모순되었던 역사주의와 절충주의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의 전개를 보여주었다.
아르누보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속에 영국에서 시작된 ART & CRAFT 이후에 주도적으로 나타난 건축운동이 바로 아르누보건축 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유행한 곡선과 곡면으로 장식된 양식이며 자연적인 움직임을 지닌 가늘고 부드러운 곡선, 식물의 가지나 잎, 곤축이나 새, 긴 머리카락이나 여성의 신체에 이르기까지 생명감으로 충만한 모티브를 디자인의 원천으로 삼고 과거의 어떠한 양식과도 유사하지 않은 새로운 양식의 창조를 목적으로 했다.
당시의 아르누보 건축관은 과거 신고전주의나 절충주의와 같은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시민을 위한 예술, 대중을 위한 예술을 꿈꾸며 예술가의 자아를 중시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을 현실화 시키는 수단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과 재료의 사용을 통해 전위예술로 통하는 예술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영국에서는 아르누보를 근대양식 - Modern Style -
독일에서는 - Jugend Stil -
프랑스에서는 - L'art Nouveau -
오스트리아에서는 - Secession Stil -
등으로 불렀다.
아르누보건축의 주요특징
아르누보는 예술에 있어 전통과 역사적 절충주의를 거부하고 예술가 개인의 자유로운 주관성과 창의력을 중시하였다. 당시 반 역사주의적인 경향은 건축의 재생이라는 측면에서 대두되어 격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당시의 건축, 미술, 공예 등 전반적인 예술의 경향을 자유로운 형태로 이끌고 가게 된다.
아르누보 건축가들은 새로운 재료인 공업생산된 철과 유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재료의 사용으로 인해 철과 유리의 미학적 가능성을 예시해 주었다. 아르누보의 모든 예술작품들은 과거의 양식과 완전한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나타난 결과들인데 이러한 작품들이 나타나게된 요인으로는 표면과 장식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건물을 이루는 고전적인 프로포션, 외곽선, 기하학적 특징은 사라지고 자연적이고 유기적인 곡선의 사용을 통해 반 역사주의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이다.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
벨기에의 건축가인 빅토르 오르타는 아르누보 건축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892년 오르타는 <타셀주택 - Tassel House (브뤼셀)>의 설계로 아르누보의 대표 건축가로서 유럽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타셀주택의 현관홀과 계단실에 노출된, 하중을 지지하는 철제기둥은 장식이 첨가되어 있어 장식과 구조가 일체로 되어있다. 이 계단실은 가느다란 곡선난간과 화려한 꽃무늬의 벽면이 특징적이다. 표면장식은 두텁고 무거운 벽돌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게하여 벽의 부동성과 수직의 압축력을 피하는 자유롭고 매끄러운 형태처리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브뤼셀의 <솔베이 저택 - Solvay House 1900>
사회당의 브뤼셀본부 <인민의집 1898>
헥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
기마르는 프랑스 아르누보 건축의 대표적 건축가로서 빅토르오르타의 곡선적 장식에 영향을 받았다. 기마르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일련의 <파리 지하철역 입구 1904> 의 디자인이다. 유리캐노피와 그것을 지지하는 주철재의 아치, 손잡이와 조명기구, 안내판의 문자에 이르기까지 철의 가공성을 살린 아르누보 곡선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빈 분리파 (Wien Secession)
근대 초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일어났던 과거의 전통적인 건축과의 분리를 주장했던 운동이며, 근대건축의 가장 주도적이고 핵심적이었던 건축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1897년 빈에서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가 모여 빈 분리파를 결성한다. 초대 회장으로 화가인 Gustav Klimt가 취임하고 건축가 Otto Wagner, Joseph Maria Olbrich, Joseph Hoffman이 참가한다. 과거의 양식으로부터 분리를 제창하고 아카데믹한 예술가들의 퇴폐적인 리바이벌에 반항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예술 창조를 목적으로 한 근대운동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건축가들은 그 이전까지의 고전주의 건축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빈은 고전적이면서 아름다운 건축이 도시 전체에 만연되어 있었다. 빈 분리파는 이러한 고전적 장식을 비판하고 장식을 단순화시킴으로 장식의 과도함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Otto Wagner의 주도하에 일어난 분리파 운동은 과거의 고전양식에서의 분리와 해방을 지향하고자 하였으며 Otto Wagner 자신의 저서 <근대건축>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근대건축의 설계지침을 제시하였다.
첫째.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맞는 기능을 완전하게 충족시킬 것
둘째. 시공재료의 적절한 선택을 통하여 근대의 건축미학에 맞는 표현 추구
셋째. 건축에 사용하는 구조로서 간편하고 경제적인 구조를 채택할 것
넷째. 위의 요구사항을 적절히 충족함으로써 나온 건축형태는 그시대에 맞는 필요양식임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져서 이후 건축적 흐름은 근대건축의 효용성과 기능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빈 분리파는 당초부터 활발한 경향을 보여주었는데, 하나의 통일된 특징적 표현을 찾기란 어려운 반면 각각 다양한 분야와 연계된 적극적인 협동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빈 분리파의 아르누보적 특징은 과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기하학적 완결” 이라는 이미지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후 근대건축운동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국제주의 양식으로 발전되었다.
오토 바그너 (Otto Wagner 1841-1918)
오토 바그너는 자신의 저서 <근대건축>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분리파 건축을 이끌었는데 주장의 핵심은 근대의 새로운 건축은 과거의 모방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근대의 기술적인 조건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저서는 각 국어로 번역되어 폭넓은 영향력을 미쳤는데 동시대 다른 건축과들과 비교하여 최후까지 장식, 고전적인 3단구성(기단, 주신, 주두), 대칭성을 선호했다. 그가 양식적 장식건축에서 근대건축으로 전환했을 때 나타난 특징은 3차원적인 장식을 2차원의 평면적인 장식으로 단순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우편저축은행 오토바그너 1905
이 건물은 바그너의 가장 대표적이며 빈 분리파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축이다. 이 건물은 순수성을 표현한느 새로운 재료와 그것을 잘 조합한 시공방법, 철저한 기능의 처리로 특징을 이룬다. 이는 그의 저서 <근대건축>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근대의 건축적 미학의 실질적 표현이라 해도 그리 틀린말은 아니다. 유리와 철로 이루어진 천장볼트는 가는 강철재의 수직부재로 처리되어 있으며 천장의 부유하는 듯한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 모든 장식은 배제되었는데, 건물은 기본적으로 사각형이며, 기계적인 인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 (Joseph Maria Olbrich 1869-1908)
오토 바그너의 제자인 올브리히는 1898년 빈 분리파를 위한 활동 거점인 <빈 분리파 전시관>을 건축함으로 건축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스승의 이념을 충실히 받아들이며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했던 그의 명성은 독일 다름슈타트의 예술가촌 대부분의 건물을 디자인하기에 이르렀다.
빈 분리파 전시관 - Secession 관 1898
단순한 윤관과 평탄한 매스의 구성에 의거한 이 디자인은 역사양식으로부터 분리를 선언한 것은 명백히 알 수 있다.
단순한 입방체와 중앙부 옥상에 설치된 금색의 투명한 세공작품인 나뭇잎장식의 구체 는 과거양식과의 결별과 아르누보적 장식이 혼재된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다름슈타트 헤센 대공 성혼 기념탑 1907
1899년 올브리히는 독일 헤센의 에른스트 루드비히(Ernst Ludwig)대공에 의해 초빙되어 다름슈타트에 대공이 기획한 스튜디오, 자택, 전시회장, 루드비히 관 등 환경정비를 포함한 다름슈타트 예술가촌의 건물을 계획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헤센 대공 성혼 기념탑(Hochzeisturm)은 루드비히 대공의 결혼을 기념하여 완성되었다. 특색있는 탑 정상부의 조형과 탑의 각부를 잘아내어 비대칭으로 배치된 창은 근대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노출된 적색 벽돌과 석재 장식물, 청, 금색의 모자이크면은 디테일의 완벽한 처리라는 측면에서 돋보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전개양상
이후 전개양상은 다양하게 진행되어 나갔다. 유럽 각국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예술에 대한 성명이 잇따라 발표되었으며 예술 각 장르간 활발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이 때부터 모더니즘이 하나의 확고한 양식으로 자리잡을 때까지 이시대를 가장 잘 나타내는 활동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바우하우스와 르 꼬르뷔제에 의해 주도적으로 나타난 국제주의 양식을 지적할 수 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 시에 설립된 종합조형예술학교로서 새로운 예술형식과 교육방법의 실험장 이었다. 초대 교장직을 맡았던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이념은 이전 시대의 통합된 회화, 조각, 건축의 세분화에 우려를 나타내며 모든 조형예술의 재통일을 구상하였다. 근대 공업과 본격적으로 협력하여 수공예 예술과 대량생산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면서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디자인의 특성으로 기하학적 형태, 원색의 단순한 디자인, 소재의 솔직한 표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표적인 건축으로 바우하우스 교사가 있다.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이 건물은 기능에 충실하며 비대칭의 기하학적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외부커튼월, 새로운 비례, mass의 조합..
국제주의 양식은 뉴욕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MOMA)에서는 1932년 <근대건축 : 국제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필립존슨과 헨리러셀히치코크는 공저로 전시회와 거의 동시기에 <인터네셔날 스타일 : 1922년 이후의 건축>을 출판하고, 그로피우스의 <국제건축>의 개념을 차용하여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건축양식의 성립을 주장하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미학적원리는
첫째 볼륨으로서의 건축, 둘째 규칙성을 지닌 건축, 셋째 무장식의 건축
이었다. 무게감이 없는 형태의 사용, 합리적인 구조와 균질한 내부질서를 반영한 리듬에 근거한 조형, 장식을 없애고 그대신 디테일의 처리를 중시하는 조형이다. 이는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도시건물에 적용되어 왔던 개념들이고 최근에는 하이테크 조형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다.
결론 및 비평
모더니즘과 국제주의 양식에 의한 오늘날의 도시환경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건축가가 참고해야할 대상은 자기자신과 건축사 두가지 밖에 없다. 지금의 도시와 건축이 당면한 과제는 지금의 건축상황이 안고있는 문제점이며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위한 수단으로 과거 건축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활동들을 고찰하는 것으로 많은 건축가들이 노력하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은 조형, 세부장식의 독특함으로 특징적인 건축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양식상의 단편들을 그저 차용하는 수준이 아닌 아르누보 건축가들의 건축관, 정신세계등에 영향을 받아 지금의 시대에 펼쳐보이려 하는 노력들이 있으며 이는 비단 아르누보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모더니즘이 유럽을 휩쓸때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류역사상 그때만큼 활발한 정신세계의 움직임이 없었으며 아직도 우리는 그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 건축과 4학년 신동재.. rainy-cul@hanmail.net -
아르누보(Art Nouveau)운동
신예술을 의미하며 벨기에에서부터 시작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각지, 또는 미국 등 넓은 지역에 유행을 읽으킨 공예상의 자연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운동은 양식미를 특히 강조한 공예 형태로서 신선하고 자유분방한 조형운동으로 식물 모양의 공예양식의 도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식미만을 주체로 하여 창조된 공예 형태였다. 따라서 동식물의 형태를 모티브로 한 유동적인 장식 형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형식은 아르누보의 호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뱀장어양식, 국수양식, 촌충양식, 귀마르양식 등 다양하게 불리며 독일에서는 청춘양식(Juge Still), 블란서나 스페인에서는 현대양식 등으로 불리었으며, 이러한 호칭 외에도 각기의 지역에 따라 약 30여개에 달하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
* 운동은 영국의 아아트 앤드 크라프트(Arts and Craft)운동의 이식공예라 하며 다른 점은 어느 시대를 모방하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것을 반대하고 건축외부에 철을 즐겨 사용 했다는 점이다.
아르누보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공적은 건축 외부에 철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이고, 어느 시대를 모방하거나 또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것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아르누보는 이 점에서 아아트 앤드 크라프트(Arts and Craft)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양식은 전 유럽에서 동일시되고 있었고 전람회에서도 다 같이 진열되었으며 모든 미술잡지에서는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느낌을 가진 직선과 원색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르누보의 특징인 것이다.
자유분방한 곡선은 1883년 영국의 맥머어도(Macmurdo)의 표지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가 있지만 당시 유럽의 공업과 진보적 운동 중심지였던 벨기에에서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1957)는 태어나 1893년 그가 30세 때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나 러스킨(John Ruskin)의 공예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화가였으나 그림을 버리고 공예에 몸을 바칠 결심을 하고 그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이론가로 활약을 하였다. 그는 1894-1895년 사이에 우클(Uccle)에다 지은 자기 집을 위하여 가구를 제작하였는데 그 곡선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아르누보이지만 그 곡선은 동시에 오르타가 갖고 있는 사치스럽고 우미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긴장된 힘에 충만되어 있다. 그가 인정받게 된 것은 함브르그에서 온 미술사 빙(Bing)의 덕택이였다. 빙은 1892년에 브로반스가에 근대미술 상점을 냈다. 이 상점을 위한 네개의 방을 반데 벨데에게 디자인 하도록 하였다. 이 상점은 특징적인 디자인의 많은 제품을 취급하는 아르누보의 메이커로서 곧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는 1901년 독일 바이마르 대공에 의해 예술고문으로 초빙 되었고 독일의 디자인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647)는 아르누보의 창시자로서 주택의 덩굴이나 나무잎을 연상케 하는 유동적인 선에 의하여 환상적인 구성을 시도한 스위스 벨기에의 건축가이며, 중요한 디자이너였다. 오르타의 장식은 나오자마자 몇 년 사이에 대륙의 거의 전부를 휩쓰는 열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장식가의 영역에서 머무른 사람이다. 오르타의 타셀 하우스(Tassel House)의 실내장식을 보면, 곡선의 형태가 기둥, 계단, 난간, 벽뿐만이 아니라 바닥의 평면장식에도 전개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일체가 되어 생기있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연대는 1893년 으로 그 내부장식, 특히 유명한 그 계단은 맥머어도, 비어줄리, 토롭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이야르, 드브로, 샬판디에 등이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에 따른 개성있는 작품을 전개했는데, 특히 건축가 엑트르 귀마르(Hector Guimard:1867-1942)는 Paris의 지하철역의 표지판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아르누보(Art Nouveau)에서의 또다른 중심지는 옛도시 낭시(Nancy)로 여기서서는 파리의 도시풍의 세련된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토착적인 자연의 표현을 중시한 양식을 전개 했는데, 유리그릇에서 에밀 갈레(Emile Galle)가 두번에 걸친 독일 유학으로 이곳 낭시(Nancy)를 아르누보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건축에서는 앙드레, 가구공예에서는 바랑이나 마죠레르가 그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가 바로셀로나(Brrcelona)를 중심으로 건축 활동을 하는데, 그는 고딕과 이슬람의 조적건축을 발전시켜 자유로운 가구(架構)와 자연의 유기성에 고취된 곡면과 곡선이 풍부한 독창적이며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도자기 타일에 의한 다채로운 표현의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 하였다.
영국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를 앞장섰다가 나중에는 그의 강한 관능성에 반발하는 풍조가 일반적으로 되어 비어 쥴리(Aubrey Beardsley)의 탐미적인 Graphic Design이 눈에 띠게 두드러 지며, 스코트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는 건축가 맥켄토시(C.R.Mackintosch:1868-1928)을 중심으로 모던하고 우아한 독자의 양식이 발전했다. 그들의 양식은 백색을 기본색으로 하여 곡선과 직선를 훌륭하게 융합 시킨것이 특징이다. 또 미국에서는 티파니(Louis Rennie Tiffany)의 유리용기가 유명하며, Nancy파와는 대조적으로 모던하며 국제적인 style을 보이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초기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은 곡선이 많이 쓰여졌으나 비교적 빨리 탈피하여 기능주의적 방향과 직선 형식에 의한 구성적 작풍으로 각기 진보하여 갔으며, 이밖에도 이태리나 유럽을 제외한 러시아 등에서도 각각의 풍토나 국민성과 결부하여서 특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아르누보(Art Nouveau)의 운동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전후로 하여 정점에 달해 모든 장식들은 기계에 의한 복제품의 범람으로 운동의 본질은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역사는 단명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은 서양의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하게 징행되었던 점은 중요하며, 철과 유리등 새로운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합리주의와 상징주의나 심미주의적인 비합리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점도 특징으로 들수 있으며 이운동 전체가 20세기 건축, 디자인에 미친 의의와 영향은 매우 크다. 종합해 보면 아르누보(Art Nouveau)는 이미 과거의 역사적 양식에 존재하지 않고 자기들의 시대의 표현을 스스로의 손으로 독창적으로 만들어 내었다는데 더 큰 意義가 있다.
아르누보(Art Nouveau) 시대의 회화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더욱 내면적인 표현으로 향하고 있던 시기로서 고갱(Gauguin)이나 고흐(Gogh)는 물론이고 로트랙이나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뭉크(Munch), 호들러, 크림트등의 작품에도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화가 고갱은 인상파의 시정을 초월함 물론 종교적 체험의 추구와 더블어 후기 인상주의의 대화가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갱(Gauguin)은 주식 중개자이자 아마츄어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근대회화를 수집하는 수집가로서 세잔느의 “과일쟁반” “유리잔” “사과”등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1883년 가족을 버리고 회화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로 부터 6년후에 새로운 미술운동을 일으켜 이를 상징주의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 그의 화풍은 반 고흐(Gogh)처럼 개성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인상주의를 뛰어넘는 매우 대담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공업화된 사회가 도시인으로부터 본연의 인간성을 박탈해 버린 것을 느낀 고갱은 프랑 서부의 부르타뉴로 이주하여 농민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존재하는 종교의 역할에 감동하여 이들의 순수한 신앙을 표현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묘사를 떠나 평면 그 자체의 질서를 지양하려는 미학을 가지고 그후 회화에서도 떠나 장식품과 겹치게 되었다. 사실 고갱 주변의 화가들은 포스터, 테페스트리, 공예의 세계를 거닐었다. 장식의 자각성은 소용돌이치는 곡선으로 죽음을 암시한 뭉크를 비롯하여 호들러나 인상주의 회화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세잔느와 더블어 목 표를 같이 했던 쇠라, 그리고 샤반느등의 방법등에 제각기 개성있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르켜 회화의 아르누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당시 디자이너의 미의식에 자극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은 맥머어도의 목판화 표지 디자인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수있다. 그는 렌의 도시교회(Wren's Ctiy Churches:1883) 속표지에서 빅토리아시대의 양식을 탈피하여 가늘게 늘어진 두루미와 엉겅퀴 를 반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판화에 다양한 색을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중 한사람은 툴루즈-로트랙(Toulouse-Lautrec)이었으며, 그는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분야에서도 속묘나 넓은 평면의 coloring 으로 또다른 기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1820년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삽화가 그라쎄(Eugene Grasset)는 최초의 아르누보 활자자면(tape face)을 디자인 하였는데, 이는 종전의 자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굵은선과 가는선이 강한 대조를 이루지 않은 점에서 고체(Old Style)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잡지 판(Pan)과 유켄트(Jugend) 그래픽 디자인을 그래쎄의 뒤를 이어 엑크만(Otto Eckmann)에 의하여 실험 되었는데, 이는 규칙적이 거나 직선적이지 않고 비어쥴리(Aubrey Beardsley)나 반데벨데의 뱀같은 곡선을 닳았다.
또한 빅토리아의 혼란된 구성과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역할을 가졌던 포스터 디자인(Posters Design)은 아르누보(Art Nouveau)에 들어서면서 흰공간을 대담하게 사용하며 단순화된 특정한 면을 구성하여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쉬레(Jules Cheret)는 강한 색채와 단순화된 윤곽선, 대담한 레터링으로 아르누보(Art Nouveau) 포스터의 특징을 공식화 하였으며, 아르누보의 요소를 포스터에 도입한 최초의 디자이너 였다. 이러한 쉬레의 포스터는 보나르와 반데벨데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보나르는 1891년 툴루즈-로트랙(Toulouse-Lautrec)에게 포스터 만드는 작업을 소개하였는데, 툴루즈-로트랙은 그 매너리즘을 개발하여 포스터를 최고의 발전단계에 올려놓았다.
이시대의 모든 매체들이 그러하듯이 사진도 아르누보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는데, 서적상이자 아마츄어 사진가인 에반스(Ferderick H. Evans)에 의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극적인 명암의 사용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형식의 강조를 하고 있는데, 영국의 중세기 성당 건축을 찍은 걸작을 남기고 있다. 또다른 아마츄어 사진가 에머슨(P.H. Emerson)은 자연주의적인 사진(Naturalistic Photography:1889)을 출판 하여 회화적 사진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또한 그는 영국의 매독스(Richard Leach Maddox)가 1871sus 발명한 건판기법(dry-plate process)을 사용하였는데, 이기법은 건판의 상업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아트제(Eugene Atget)는 원근과 2중 대칭(biaxial symmetry)에 대한 화가의 관심을 도입하였는데, 그는 이를 파리의 기념물과 거리 그리고 쇼우윈도우의 기록적인 의도로 사용하였다. 또한 윌(E.J.Wall)과 파이버(C.Welborne Piper)는 1907년 붓으로 칠한 어떠한 색의 유채(油彩)도 받아들이는 젤라틴 입체인화의 브로마이드 현상법(bromide process)을 만들어 냈으며, 1904년 로우린스(G.E.H.Rawlins)는 하일라이트를 강조한 젤라틴 릴리프의 유채현상법(oil-pigment process), 드마쉬(Robert Demachy)는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인화에 모방 하였고 또한 고무인화법을 사용 하였는데, 드마쉬는 드가(Degas)의 발레리나 그림들을 사진의 주제 뿐 아니라 효과 까지 모방하였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공예(Craft Design)나 제품디자인(Product Design)은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죤 러스킨(John Ruskin)의 이론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예술가들이 화가에서 공업디자이너로 전향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등의 몇 몇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 대량생산에 의한 작품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 데 벨데와 선의 아르누보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독일의 미하엘 토네트(Michael Thonet)가 그들이다.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는 엄격하고 무장식인 선형 의자는 현대의 기능주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으며, 가구와 포스터로 대표 될 수 있지만 가정용품을 디자인하기도 하여 공업디자이너의 제 1세대를 위한 기초 작업을 마련하였다.
미하엘 토네트는 이미 1860년경에 아르누보의 특징인 선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곡목의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대의 기계기술에 의한 대량생산의 대담한 제작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876년 티파니는 유백광(乳白光)의 장식용 창유리를 생산 하였고 몇 년뒤에 무지개 빛의 금속성 화브릴(favrile)유리를 개발하여 특허 신청을 하기도 했다. 티파니의 유리공예 에서의 특징은 기능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자연의 모방이며, 복고적이라고 보기에는 개성이 있어서 그의 다채로운 수공예 기술과는 따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유리를 불어서 만드는 과정에서 화학약품과 용해된 금속증기에 노출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에밀 갈레(Emile gallè)의 프랑스 유리공예는 착색 유리층에 형태를 자르는 것인데 비하여 티파니는 각기 다른 색의 녹은 유리를 함께 굴려서 추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2차원적인 특징은 건축(Architecture)에서 보다는 인테리어 디자인(Interior Design)에서 더 잘 어울린다고 볼수 있다. 클림트의 모자이크와 티파니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그리고 맥켄토쉬의 벽지 등에서 뚜렸이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은 타셀 하우스(Tassel house)에서 오르타의 타일바닥위의 벽과 천정에 화려한 자연 형태의 장식문양을 되살려 그것을 조명장치, 주철기둥, 단철난간에 적용 하였다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도 오르타(Horta)와 같이 하나로 둘러쌓인 모양의 부분을 이룬 고도로 통일된 실내를 설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구를 보완 하기위하여 아내의 의상을 디자인 하기도 하였으며, 식탁의 배열에도 색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식을 골랐다고 한다.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오르타는 자신의 집과 솔베이 하우스(Solvay house)를 위해 아르누보의 독특한 특성을 발전 시켰지만 벨기에의 사회당 본부인 국민관(Maison du Peupie)에서는 다른 방향의 디자인 작업을 하였다.
가우디(Gaudi)의 자연 생태학적 형태와 색채는 표현과 뛰어난 구조적인 혁신은 당시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있으나, 이것은 아르누보의 모티브를 처음 개발한 사람인 동시에 표현주의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바로셀로나의 카사 비상스(Casa Vicens)를 위해 철제문을 디자인 하였는데, 이는 곡선형(Curvilinear)의 첫 실례 일 것이다. 1878년에 시공된 이문은 오르타의 타셀(Tassel) 저택보다 4년, 그리고 맥머어도의 렌의 도시교회(Wren's City Churches)를 위한 목판 보다는 3년이나 앞선 것이다.
아르누보(Art Nouveau)
아르누보는 영국의 예술 공예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를 널리 전파한 대표적 인물은 화가이자 시인인 윌리암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였다. 예술 공예운동은 새로운 기계화 시대에 대한 반감 때문에 나타났으며 모리스와 맥머도 같은 이의 입장에서 보면, 진정한 예술은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존 러스킨의 철학을 이행하고자 했던 낭만적인 노력이었다. 그들은 산업화에 의해 피폐되어 가는 예술가와 장인들의 세계를 보았으며, 또 지난 세기 특히 중세와 관련된 단순성, 아름다움, 장인정신 같은 몇 가지 기준으로 되돌아가려고 애썼다. 예술 공예운동의 이념은 전 유럽에 급속히 번져 나갔으며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의 예술가들과 문인들의 유사한 이론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다.
William Morris, 벽지디자인
William Morris, 벽지디자인
이러한 현상에 아르누보라는 명칭이 가장 널리 통용되게 된 것은 아마도 파리에 있는 한 상점이 ‘아르누보의 집’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부터인 듯하다. 부연하자면, 함부르크에서 프랑스로 귀화한 빙(Siegfried Bing)은 1875년 일본을 방문하고 난 다음 파리 쇼샤 19번가에 일본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을 설립하고 후에 프로방스 22번가까지 확장하며 그곳에 메종 아르누보(Maison d'Art Nouveau)를 열었다. 또한 아서 래즌비 리버티(Arthur Lasenby Liberty)는 1931년까지 오페라가 지점에 일본 상점을 열어 가정용품보다는 리버티 직물-처음엔 일본에서 수입하였으나 1890년대 초부터는 현대적인 특징으로 디자인 함-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독일에서는 「유켄트」라는 잡지의 이름을 따서 유켄트스틸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미술운동이 유럽전역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면서 나라와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아르누보라는 이름은 주로 외국 비평가들이 파리에 있는 빙의 전시장인 메종 드 아르누보에서 취급하는 가구의 유형을 말할 때 사용하면서 생겨났다.
Art Nouveau Bing Pavilion Paris: Exposition Universelle
아르누보 예술가들은 중세나 동양 또는 원시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18세기 로코코의 장식적인 종합, 켈트족과 색슨족의 장식과 보석에서 볼 수 있는 선의 얽힘, 동양 특히 일본 미술에서 보이는 대담하
고 평면적인 문양,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와 비취 세공의 고급스런 장식성 등이 모두 수용되었다. 대부분의 장식은 자연 특히 식물의 형태가 그 기원이었는데, 때로 상징적 또는 감각적인 느낌과 식물학 동물학에서 새로운 탐구로 친밀해지고 있었던 미생물이 그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전체적인 특징은 구불구불하고 유연한 풍부한 선 즉 꽃무늬나 추상적인 무늬, 강렬한 곡선이 보여 지며 디자인의 접근방식에 있어서 풍부하고 이질적인 요소의 혼합을 이룬다.
*아르누보 건축디자인
건축에 있어서 표면장식과 실내장식을 제외하고는 단일하고 통합된 아르누보 양식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르누보의 뿌리는 프랑스의 건축이론가 비올레 르 뒤크(Viollet le Duc)가 두 권으로 출판한 entretiens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과거의 건축양식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현대적 재료의 사용과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개발을 주창하였다. 벨기에의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는 비올레 르 뒤크의 가장 뛰어난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디자인을 성공적으로 아르누보의 표현방식에 적용시킨 최초의 건축가였다. 오르타는 구조물의 보강재로 19세기말 가장 첨단적인 엔지니어링의 혁신인 강철을 사용하였다. 오르타는 타셀 저택으로 건축의 아르누보 개념을 단숨에 성숙시켰고 아르누보를 장식미술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훨씬 큰 규모로 확대시켰다. 오르타는 층과 층 사이에 휘감기는 듯한 곡선을 사용하여 공간적 연속성과 유동성을 주었으며, 이는 건물의 인테리어와 가구에 통일감을 주었다. 공기처럼 가벼운 느낌을 주면서도 힘과 우아함으로 가득찬 이러한 선은 오르타가 뒤이어 디자인한 아르누보 건물들, 브뤼셀에 디자인한 주택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그의 전매특허가 되었다.
Victor Horta, <Hotel Tassel in Brussels>, 1892-93
Victor Horta, <Van Eetvelde House in Brussels>, 1897-1900
오르타의 타셀 저택에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파리였다. 그 결과 호사스럽고 유기적인 조형 양식으로 표현된 여러 중요한 구조물들이 탄생하였는데, 오늘날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것은 헥터 기마르(Hector Guimar)의 파리 메트로 지하철역 입구이다. 1900년에 세워진 메트로의 지붕이 달린 입구는 아르누보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Hector Guimard, <Metro entrance pavilion in Paris>, 1900
Hector Guimar, <Metro entrance>, 1900

Cahrles Rennie Mackintosh, <Glasgow School of Art>, 1897-1909
Machintosh, <Hillouse chair>
Alphonse Maria Mucha
스페인의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초기 건축물들은 재료를 사용함에 있어서, 특히 질감과 색채를 배열하는 데 있어서 상상력을 가미한다든지 장식적인 철제 세공에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개인적인 양식을 첨가시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고딕시대의 부활이라는 주류적인 경향에 속해 있었다. 가우디의 최초의 주요 작업은 이미 건축가인 프란치스코 드빌라에 의해 신고딕적 구조물로서 설계되었던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가우디는 1883년부터 간헐적으로 그 성당에서 작업을 하였는데, 1926년, 성당의 완성을 못 본 채 숨을 거뒀다. 성당의 내부 장식에는 아직 부분에 불과하긴 하지만, 자연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문양으로 이루어진 생물학적인 장식에서 풍부한 환상이 나타난다. 밝은색의 모자이크가 첨탑의 끝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Antoni Gaudi, <Casa Vicens>, 1878
Antoni Gaudi, <Casa Vicens> 1878
Antoni Gaudi, <Sagrada Familia Cathedral>, 1883~
Antoni Gaudi 성가족교회 탄생파사드
바르셀로나의 <귀엘 공원>에서 가우디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환상적인 면과 공학의 교묘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에 대한 초현실주의적인 해석이라 볼 수 있다.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적인 고딕식 정원의 후예인 이 정원은 구불구불한 곡선형태의 벽, 벤치, 동굴, 그리고 깨진 도자기와 유리로 구성한 휘황찬란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케이드 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혼합물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구엘공원의 정문. 정문의 양측에는 사원과 같은 두 개의 파빌리온(수위실과 사무소)이
세워졌다.
구엘공원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장식-퓨톤
구엘공원 산책로
구엘공원 벤취
*아르누보는 비록 고갱이나 반 고흐 등과 같이 표현에 있어서 천재적인 화가나 가우디, 매킨토시, 반 데 벨데 등과 같은 건축가들을 많이 끌어들였지만, 여전히 주로 장식미술 운동으로서 남아있다. 건축에서 보더라도 그것의 특징적인 면들은 대부분 실내디자인과 관련이 있다. 아마도 아르누보의 가장 큰 기여는 책의 삽화 또는 포스터 등과 같은 그래픽 디자인 분야나 조명등, 섬유, 가구, 세라믹, 유리그릇, 벽지 등의 디자인에 끼친 영향일 것이다.
김광우의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
아르누보에 끼친 영국 디자인의 영향은 앙리 반 데 벨데와 귀스타브 세뤼리에-보비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가장 완벽한 아르누보의 초기 예는 유럽에서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빨리 시작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제작한 벨기에의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1861~1947)의 작품이다.
그의 건물과 실내장식은 영국 디자인 개혁전통의 급진적인 정치이념이 신로코코 양식의 엘리트적 유미주의 그리고 건축에서 철강과 유리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기술적 진보와 결합된 실용적인 예이기도 하다.
13세기 이전에 플랑드르 방직의 중심지로 운하로 북해와 연결되어 있어 외항기선의 출입이 가능한 겐트Gent(플라망어로는 헨트)에서 태어난 오르타는 파리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 부속 건축학교 재학 중에 이미 독보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 뒤 공부를 계속하여 1881년에 브뤼셀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이 학교에서 존경받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알퐁스 발라Alphonse Balat(1818-95)에게 사사했으며 그의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레오폴드 2세Leopold II(1835-1909)의 단골 건축가로 1874-76년에 라에켄Laeken에 지은 왕립 온실Royal Glasshouses의 둥근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의 이용에 뛰어난 발라는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고안하여 강철과 유리를 재료로 혁신적인 구조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에는 모리스, 애슈비, 비어즐리의 영향이 엿보인다.
발라는 반 데 벨데와 마찬가지로 재료와 구조의 성질에 충실한 조립에 의존하는 기능주의를 주창했다.
왕립 온실 건축이 오르타가 화려하게 디자인한 바론 반 에트벨데 백작Baron van Eetvelde(1852-1925)의 저택(1895-97)에 영감을 준 것으로 보인다.
오르타가 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강과 유리 같은 재료의 건축적 가능성을 이용한 것은 건축물에 금속 요소를 많이 드러내 보인 벨기에 건축가 어네스트 헨드릭스Ernst Hendrickx(1844-92)의 조수로 일한 경력 때문이기도 하다.
오르타는 1890년에는 자신의 사무실을 열고 1893년에 성숙한 아르누보 최초의 건축적 표현으로 유명한 타셀 하우스Tassel House(1893-95)를 설계했다.
브뤼셀의 폴 에밀 얀스 가에 있는 자신의 주택 설계를 오르타에게 의뢰한 에밀 타셀Emile Tassel(1838-79)은 브뤼셀 대학의 도형기하학 교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애호가이자 전문가, 아마추어 사진작가, 일본 미술품 수집가였다.
오르타가 타셀을 만난 건 1893년 ‘자기완성, 관용, 그리고 계몽’을 교의로 프랑스 혁명 후 유럽에서 생긴 비밀결사 프리메이슨Freemason 집회에서였다.
타셀은 아마도 격조 높은 환경을 갖춘 주택을 원했던 것 같다.
타셀이 원한 것은 “학자와 미술가들만으로 구성된 친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독신자”의 집이었다고 오르타는 술회했다.
고객의 지적, 사회적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타셀 하우스에서 노출된 철 구조물의 혁신적인 사용과 개방적 공간은 오르타 양식의 특징이 되었다.
집의 입구는 연철로 만든 곡선의 난간, 요동치듯 비틀린 벽면장식 그리고 선명한 색상의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방과 복도들은 눈에 띄지 않게 서로 통해 있다.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계단이며 철로 제작된 계단기둥은 식물을 모방해 만들어졌는데, 철제 난간은 물결치듯 흐르는 형태이며, 이런 형태는 벽의 덩굴무늬 그림과 바닥 모자이크의 덩굴무늬에서도 나타난다.
이런 나선형과 곡선은 아르누보의 주요 모티프로 영국의 맥머더 그리고 특히 삽화가 헤이우드 섬너Haywood Sumner와 같은 미술공예운동의 다른 화가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오르타가 보여준 선의 형태는 벨기에 특유의 것이다.
그것은 이후 사람들이 ‘벨기에식 선’으로 명명한 긴장감 넘치고 추상화된 장식이다.
그러나 오르타의 장식미술에서 다른 아르누보 화가들처럼 식물의 잎이나 꽃이 아니라 기둥과 줄기였다.
그의 업적은 채찍선 같은 리듬을 지닌 전형적인 아르누보 곡선을 처음으로 공간과 구조로 변형시킨 데 있다.
1890년대 초 영국이 벨기에에 미친 영향은 실내장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응접실 장식에서 오르타는 애초에 구상했던 이집트 양식의 벽지를 버리고 반 데 벨데에게서 구입한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식당에는 찰스 프랜시스 앤슬리 보이지가 만들어 일레인Elaine이라고 명명한 또 다른 영국 벽지를 사용했다.
응접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한 의자 장식에는 리버티상사를 위해 제작된 수선화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했다.
역점을 둔 곳은 서재이고, 1층과 2층 사이에는 타셀의 사진작업을 위한 작업실이 마련되어 있다.
타셀은 집에서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모임에서 사당 안쪽 벽면에 투사된 슬라이드를 이용해 강연을 하곤 했다.
손님용 욕실과 흡연실은 이런 모임을 위해 마련되었다.
타셀은 오르타가 브뤼셀 대학의 종합기술학부에서 조교 자리를 얻을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오르타는 대학에서 프랑스 건축가이자 건축보존위원으로서 건축물에 철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옹호한 외젠 에마뉘엘 비올레-르-뒤크의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오르타는 타셀을 통해서 화학 콘체른Konzern의 대표인 발명가, 화학자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를 알게 되었다.
1895년과 1900년 사이 고급스러운 루이즈 가에 솔베이 저택을 디자인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웠던 타셀 저택의 외관과는 달리 여기서 건물 정면은 활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측면의 돌출 창 부분도 궁형으로 튀어나왔다.
건물 배치부터 사소한 세부에 이르기까지 내부는 다시금 서로 통하는 공간이라는 도식을 따랐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조정되었으며, 홀 안에서는 놀랍게도 부풀어 오른 공간이 캐러멜색, 금색, 살구색과 같은 많은 따스한 색조를 띤 채 방문객을 둘러싸게 된다.
브뤼셀에 있는 일련의 집들이 오르타의 명성을 증명하는데 그는 1894년과 1905년 사이에 자신의 집 외에도 다섯 명의 변호사를 위한 주택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주택은 변호사 외에도 정부 각료들을 위한 것으로 미적으로 진보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호화스럽기 때문에 오르타와 그의 많은 고객들이 속해 있던 벨기에 노동자당에 투표한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브뤼셀의 많은 미술가들처럼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그는 1896년과 1899년 사이에 백화점, 사무실 그리고 벨기에 노동자당을 위해 다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강당을 건립했다.
1895년과 1899년 사이에 세워진 인민의 집Maison du Peuple 정면은 벨기에 최초로 철과 유리를 폭넓게 사용한 구조물이며 내부의 강당 지붕의 철골빔은 구조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장식적이었다.
이 건물은 1960년대에 아르누보를 경시한 택지개발업자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아르누보의 공적 표현은 상점과 백화점의 설계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오르타는 동료 건축가 폴 세인트노이Paul Saintenoy(1862-1952)와 함께 아르누보 양식으로 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서 가장 큰 두 백화점, 즉 폴 세인트노이가 1899년에 세운 올드 잉글랜드 백화점Old England Department Store의 유리 정면과 오르타가 1901년에 건립한 아 리노바시옹A L'Innovation으로 명명된 백화점이 대표적인 예이다.
아 리노바시옹의 정면은 주위의 전통적 건물들에 반항하듯 볼록한 모습이다.
거대한 유리창은 외부에 벽돌의 필요성을 제거했으며, 보행자들이 내부에 진열된 많은 상품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이 백화점들은 구매자들에게 오르타의 인민의 집 디자인을 연상시키는 조명과 넓은 공간을 제공했다. 아 리노바시옹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오르타는 1903년에 다른 상점 그랑 바자 안스파크Grand Bazar Anspach를 설계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상점 양쪽에 늘어선 아파트 건물과의 조화를 위해 유리 정면을 없애고 위층에 벽돌을 올림으로써 어느 정도 소박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면서도 주출입문 위에 날개 모양의 유리덮개를 사용함으로써 현대적 느낌을 보탰다.
근대 재료인 철과 유리로 건축된 이 새로운 거대한 건축물은 쇼핑의 경험을 재규정했으며, 중류층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여가기회를 제공하고, 중하류층과 노동계층 여성들에게는 고용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각 층마다 상품들로 진열된 백화점들에는 화장실, 카페 그리고 심지어 미술화랑까지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랑 바자 안스파크는 여성들이 도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한 새로운 공간이 되었다.
오르타는 1913년에 브뤼셀 미술협회 회장이 되고 후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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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브뤼셀(Brussels)에 위치한 솔베이 주택(Hotel Solvay)은 아르 누보 건축 중에서 매우 존경을 받고 있는 걸작품중 하나입니다. 이 주택은 호르타가 설계한 최초의 위대한 작품이었으며, 그가 설계한 건물들중 상당수가 파괴되었기 때문에(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민중의 집이 있다), 오늘날 현존하는 가장 훌륭한 건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일찍이 튜린(Turin)가에 세워진 타셀 주택(Hotel Tassel)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은 건축가 빅터 호르타(Victor Horta)(1861-1947년)의 위대함을 잘 입증하고 있습니다. 타셀 주택과는 달리, 이 건물은 여전히 그 원래의 상태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몇 해 전 유럽을 다녀오면서 잠시 방문을 하였는데, 이때 기록한 몇가지 이미지와 함께 이 주택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스토클레(Alphonse Stoclet)와 마찬가지로, 어네스트 솔베이(Ernest Solvay)는 19세기 말엽의 산업가로서 건축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가성소다를 발명하여 일약 부유한 대 실업가가 된 인물이다. 그가 호르타에게 의뢰한 작품 중에는 기념비(1896년), 솔베이 실험실(1896년), 브뤼셀 소재 전시관(1901년) 등이 있다. 이 주택은 어네스트 솔베이의 아들인 아르망 솔베이(Armand Solvay)를 위해서 브뤼셀 시내의 새로운 번화가인 루이스 가(Avenue Louise)의 한 귀퉁이에 세운 것으로서 호르타가 설계한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호화스럽다. 아르망 솔베이는 범세계적인 산업가였으며 교양 있는 후원자이자 자선가였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미 독자적으로 몇 채의 훌륭한 건물을 설계한 바 있는 건축가는 31세였다. 반면에 막 결혼한 솔베이는 29세였다. 이들은 함께 아르 누보의 걸작품을 창조하였다. 호르타는 1893년에 이 주택의 설계를 의뢰받았다. 그 공사는 1895년에 시작되어서 1900년에 끝났다. 이것은 브뤼셀의 커다란 가로 중 하나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그 밖의 중요한 근대식 건물들이 또한 발견되고 있다. 대지는 기다랗고 협소하였으며 루이스 가의 파사드는 매우 수수한 것이었다. 솔베이 주택은 3분할된 파사드를 지니고 있다. 2개의 높은 베이는 뒤로 후퇴한 중앙부를 프레임으로 둘러싸기 위하여 돌출해 있다. 베이는 금속제의 작은 기둥(colonnette)과 트랜솜(transom)에 의하여 자체적으로 3개로 분할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엄격하게 대칭적인 외관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전반적인 대칭속에서 호르타의 가장 독창적인 장식적 철세공이 발코니와 창문 주변에 가득 차 있다. 호르타의 최초의 혁신은 파리풍 저택의 전통적인 평면을 90도 회전시켜 인접해 있는 건물의 벽 너머에 주출입구를 배치하는 것이었다. 마차는 출입구를 통과하여 거주자를 내려놓은 후 정원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마굿간으로 계속 진행할 수 있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현관의 포탈(portal)은 좌측에 있다. 출입구 자체는 본래 마차를 위한 것이었는데, 마찬가지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장식적인 철 세공의 실용적인 보강에 의하여 바닥에서 강화된 흐르는 듯한 목조세공을 지니고 있다. 현관은 흡연실과 거대한 부엌 옆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부엌은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정원으로 개방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주요 계단실이 2층으로 솟아 있는데, 1개의 계단이 첫 번째 계단참에서 둘로 나뉘어져서 기념비적인 영접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서 호르타는 중요한 혁신을 도입하고 있다. 즉, 그는 석재와 벽돌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철세공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거대한 중앙의 광정(光井)을 열어 놓고 있다. 이것은 건물에 공기처럼 가벼운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2층과 3층은 양 측면의 외관이 앞으로 돌출함으로써 시각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금속제 기둥이 양 층에 걸쳐서 계속되고 있으며 두 창문의 베이(bay)를 분할하고 있다. 명쾌하게 비례를 이룬 석조 외관(대규모의 유리 창문을 갖고 있다)은 창문 아래의 발코니와 창문 베이 사이의 2층에서 가는 줄 세공과 같은 철제 장식에 의해 활기가 부여되고 있다. 4층의 창문 베이와 발코니 장식의 식물 같은 곡선, 정면외관의 돌출한 형태와 후퇴한 형태는 로코코 양식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외관의 곡선형태는 내부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각 방들은 외관에 있는 것과 유사한 장식적 철 세공에 의해 세분되고 있다. 금속은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장식되어 있는 것이며 이 주택의 전체구성의 곡선적 공간성을 완성시키는 부분이다. 그래서 마치 하나의 형틀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문, 가구, 등, 그 밖의 방 내부의 비품 등은 모두 내부 공간의 리듬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솔베이 주택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산업 브르죠아였던 솔베이 일가의 생활에 대응하여 평면의 중심이 2층의 접객을 위한 영역과 그 곳에 이르는 계단 주변의 공간구성에 있었다. 정면외관 좌측에 붙어있는 현관에서 정원에 있는 마굿간으로 계속되는 마차용 통로가 있는 접근로를 들어서면, 각각 대규모 홀과 반대로 되어있는 계단이 있다. 2층에는 정원을 향한 뒷면에 대식당, 정면외관 쪽에는 15m의 전체 폭을 차지하는 크고 작은 3개의 살롱(salon)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 그 각각은 벽면이 아니라, 상부에 유리를 끼운 칸막이 창호와 병풍과 유사한 이동 가능한 창호로 구획되어 층 전체는 시각적으로 투시효과가 있는 유동적 공간이 되고 있다. 이 유연한 평면의 핵을 이루는 것이 밝은 천장에서 채광되는 건물 중앙의 커다란 계단실이다. 다양한 소재를 생각하는 대로 취급했던 호르타의 장식 감각은 언제나 화려한 색채를 무시할 수 없었지만, 여기에서는 실내의 초점이 되는 테오 반 리셀버러(Theo van Rysselberghe)의 대규모 벽화의 색채와 서로 공명하고 있다. 그는 벨기에의 대표적인 점묘법 화가였다. 이 5층 주택의 주요 방은 2층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로비 주택(Robie House)과 똑같다. 이러한 방들로는 음악실, 당구장, 식당 등이 있다. 이것은 마침내 개방된 테라스와 정원으로까지 인도한다. 3층에는 보다 사적인 방들이 있는데, 도서실, 침실, 욕실 등이 그것이다. 4층은 어린이용 공간인데, 하인용의 지붕 층과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 주택 전체에 걸쳐서, 호르타는 가구와 내부 시설물들은 물론 매우 다양한 장식을 모두 디자인하였다. 예를 들어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2층에 자리잡고 있는 식당에서, 호르타가 디자인한 꽃 모양의 샹들리에가 손님의 머리 위에 활짝 피어 있다. 거리를 내려다보는 거실 중에서, 음악실에는 한때 호르타가 디자인한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되어 있었다. 명쾌하고 경제적인 공간의 사용, 기능적 요구사항에 따라 개방되거나 폐쇄된 채로 남겨놓는 방법 등은 호르타의 재능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일부 로코코 양식의 건물형태에서 볼 수 있는 경제성을 생각나게 한다. 두 가지 형식에서, 장식과 구조가 불가분의 관계로 조합되어 있다. 유기적 전체인 건물은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적, 미학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비록 1가구 독립주택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건축가의 관심을 점점 더 끌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건축경향을 창조하였다. 오늘날 솔베이 주택은 방문객들에게 20세기의 개막 이래로 거대한 저택의 웅장하고 화려한 스펙타클을 제공하고 있다.
솔베이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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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이 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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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 누보 (Art Nouveau)
(1) 정의 - 프랑스어로 '신미술'의 뜻
19C말~20C초에 걸쳐 유럽 등지에서 유행한 장식적 양식의 일종
공예,가구 건축,실내디자인,포스터 디자인을 통해, 유연하고 유동적인 곡선과 곡면을적극적으로 사용한 장식에술의 한 형식
(2) 아르 누보 디자인의 근원
ㄱ. 아트 앤 크래프트(정직한 디자인과 장인 정신 강조)
ㄴ. 일본 예술의 영향
ㄷ. 바로크의 조형적 개념을 표현하는 형태와 로코코의 비대칭 원리
ㄹ. 그 지역의 문화적 전통(영국 : 갤틱 예술(Galtic Art),
프랑스 : 로코코 예술)
(3) 의장상 특징
ㄱ. 오래된 양식의 질서를 무시
ㄴ. 예술 공예 운동의 영향 받음
ㄷ. 새롭게 산업화된 부를 추구
ㄹ. 새로운 양식의 창조에 그 착상을 자연으로부터 얻고자 함
ㅁ. 자유로운 형태의 곡선, '약속'을 소재로 함
(4) 대표적 작가 (영국, 벨기에, 프랑스, 스페인, 오스트리아, 미국에서 발전)
ㄱ. 벨기에
아르 누보의 진원지 특징으로는 3차원적 처리와 추상적 형태
* 작가-빅터 호르타, 헨리 반 데 벨드 등
ㄴ. 프랑스
a. 파리와 낭시가 중심지
b. 개별 작품들과 아름다운 재료들을 강조
c. 로코코의 영향이 강함
d. 작가 - 에밀 갈레, 유진 겔라드, 헥터 커마드 등
ㄷ. 영국
a. 모리스의 추종자들은 퇴페적 예술과 자체의 목적에 치우치는 퇴페적 엘리트주의자들을 경멸함
b. 찰스 레니 맥킨토시 중심의 글래스고계는 새로운 아르 누보 양식을 탄생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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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Nouveau(아르누보)의 건축가와 작품
1) Victor Horta (1861-1947/ 벨기에)
-아르누보의 선구자
<주요작품>
·「타셀주택(Tassel House)」, 벨기에 브뤼셀, 1892-93년
-최초의 아르누보 건축으로서 철을 구조체로 사용하면서 곡선형 장식을 부가
·「민중의 집(Maison du Peuple)」, 벨기에 브뤼셀, 1896-99년
·「솔베이 저택(Solvay Hotel)」, 벨기에 브뤼셀, 1895-1900년
2) Henri Van de Velde (1863-1957/ 벨기에) - 앙리 반데 벨드
-기계화, 공업화는 인정하되 규격화, 표준화를 거부하고 예술가 개인의
창조적 권리와 자유로운 예술을 주장
-형태의 정리와 전반적인 기복/ 자연을 장식으로 변화시키는 지적인 과정을 고집.
-Morris의 벽지를 처음으로 사용/ 개성 있는 종합예술을 추구.
<주요작품>
*우클레(Uccle) 소재 자택, 브뤼셀 근교, 1895년
*아르누보 화랑(Maison de L'Art Nouveau), 프랑스 파리, 1896년
-아르누보라는 명칭이 유래가 된 작품
*독일 공작연맹 전시회 극장, 독일 쾰른(Cologne), 1914년
3) Hector Guimar (1867-1924/ 프랑스) - 헥터 귀마르
-새로운 재료의 가능성에 대해 가장 예리한 감각을 지닌 건축가.
-프랑스의 건축이론가 비올레 르 딕의 구조합리주의 이론가 빅토르 오르타의
곡선적 장식에 영향을 받음.
<주요작품>
·「파리 지하철역사(Paris Metro)」, 파리 1899-1900년
-철과 유리를 사용한 유기적 곡선의 형태와 풍부한 공간감으로 아르누보 건축을 대표하는 작품
4) Charles Rennie Mackintosh (1888-1928/ 영국) - 앙리 레인 맥킨토시
Glasgow를 중심으로 활동.
곡선보다는 직선적인 취향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색 - 합리적인 방향(현대적인 경향)
5) Antonio Gaudi (1852-1926/ 스페인) - 안토니 가우디
*카탈로니아 언어의 부흥, 토착 예술및 공예의 연구/ 카탈로니아의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활동
*건축에 있어서 구조와 재료의 순수함을 주장한 프랑스의 건축이론가
비올레 르 딕의 구조합리주의 이론의 영향으로 중세 고딕건축의
구조적 문제에 관심
*모형과 Drawing을 통해 표현/ 최상층 추상적으로 표현
- 유동적이고 유기적으로 계획
*단순한 곡면장식에 의한 2차원적인 건축을 초월하여 파동의 곡선과 곡면에 의해
역동적인 형태와 공간을 창조함으로서 3차원적인 아르누보 건축을 독창적으로 전개
*자연의 원초적인 모습을 재해석, 형상화시키는 표현기법 사용
- 나선체(유카리나무의 줄기모양), 쌍곡면체(대퇴골 형태), 원추체(나뭇잎사귀 모양), 쌍곡선의 포물선(손가락 사이의 힘줄 모양)
<주요작품>
·성 가족 교회(Sagrada Familia), 바르셀로나 1883-현재
-가우디 사망후 중단되었다가 설계도에 따라 현재까지 건설중인 고딕양식의 교회
·카사밀라(Casa Mila) 공동주택, 바르셀로나 1905-10년
-외관이 파동의 곡면벽으로 구성된 중정형 평면의 공동주택
·구엘(Gell)공원, 바르셀로나 1900년
신예술을 의미하며 벨기에에서부터 시작되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각지, 또는 미국 등 넓은 지역에 유행을 읽으킨 공예상의 자연주의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운동은 양식미를 특히 강조한 공예 형태로서 신선하고 자유분방한 조형운동으로 식물 모양의 공예양식의 도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식미만을 주체로 하여 창조된 공예 형태였다. 따라서 동식물의 형태를 모티브로 한 유동적인 장식 형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한 형식은 아르누보의 호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뱀장어양식, 국수양식, 촌충양식, 귀마르양식 등 다양하게 불리며 독일에서는 청춘양식(Juge Still), 블란서나 스페인에서는 현대양식 등으로 불리었으며, 이러한 호칭 외에도 각기의 지역에 따라 약 30여개에 달하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
이 운동은 영국의 아아트 앤드 크라프트(Arts and Craft)운동의 이식공예라 하며 다른 점은 어느 시대를 모방하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것을 반대하고 건축외부에 철을 즐겨 사용 했다는 점이다.
아르누보의 가장 주목할 만한 공적은 건축 외부에 철을 즐겨 사용했다는 점이고, 어느 시대를 모방하거나 또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 것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아르누보는 이 점에서 아아트 앤드 크라프트(Arts and Craft)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양식은 전 유럽에서 동일시되고 있었고 전람회에서도 다 같이 진열되었으며 모든 미술잡지에서는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느낌을 가진 직선과 원색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르누보의 특징인 것이다.
자유분방한 곡선은 1883년 영국의 맥머어도(Macmurdo)의 표지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가 있지만 당시 유럽의 공업과 진보적 운동 중심지였던 벨기에에서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 1863-1957)는 태어나 1893년 그가 30세 때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나 러스킨(John Ruskin)의 공예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화가였으나 그림을 버리고 공예에 몸을 바칠 결심을 하고 그들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이론가로 활약을 하였다. 그는 1894-1895년 사이에 우클(Uccle)에다 지은 자기 집을 위하여 가구를 제작하였는데 그 곡선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아르누보이지만 그 곡선은 동시에 오르타가 갖고 있는 사치스럽고 우미한 것과는 전혀 다른 긴장된 힘에 충만되어 있다. 그가 인정받게 된 것은 함브르그에서 온 미술사 빙(Bing)의 덕택이였다. 빙은 1892년에 브로반스가에 근대미술 상점을 냈다. 이 상점을 위한 네개의 방을 반데 벨데에게 디자인 하도록 하였다. 이 상점은 특징적인 디자인의 많은 제품을 취급하는 아르누보의 메이커로서 곧 프랑스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헨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는 1901년 독일 바이마르 대공에 의해 예술고문으로 초빙 되었고 독일의 디자인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647)는 아르누보의 창시자로서 주택의 덩굴이나 나무잎을 연상케 하는 유동적인 선에 의하여 환상적인 구성을 시도한 스위스 벨기에의 건축가이며, 중요한 디자이너였다. 오르타의 장식은 나오자마자 몇 년 사이에 대륙의 거의 전부를 휩쓰는 열광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장식가의 영역에서 머무른 사람이다. 오르타의 타셀 하우스(Tassel House)의 실내장식을 보면, 곡선의 형태가 기둥, 계단, 난간, 벽뿐만이 아니라 바닥의 평면장식에도 전개되어 있으며, 이것들은 서로 일체가 되어 생기있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연대는 1893년 으로 그 내부장식, 특히 유명한 그 계단은 맥머어도, 비어줄리, 토롭의 디자인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이야르, 드브로, 샬판디에 등이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에 따른 개성있는 작품을 전개했는데, 특히 건축가 엑트르 귀마르(Hector Guimard:1867-1942)는 Paris의 지하철역의 표지판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아르누보(Art Nouveau)에서의 또다른 중심지는 옛도시 낭시(Nancy)로 여기서서는 파리의 도시풍의 세련된 양식과는 대조적으로 토착적인 자연의 표현을 중시한 양식을 전개 했는데, 유리그릇에서 에밀 갈레(Emile Galle)가 두번에 걸친 독일 유학으로 이곳 낭시(Nancy)를 아르누보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건축에서는 앙드레, 가구공예에서는 바랑이나 마죠레르가 그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가 바로셀로나(Brrcelona)를 중심으로 건축 활동을 하는데, 그는 고딕과 이슬람의 조적건축을 발전시켜 자유로운 가구(架構)와 자연의 유기성에 고취된 곡면과 곡선이 풍부한 독창적이며 환상적인 작품을 남겼으며, 도자기 타일에 의한 다채로운 표현의 아르누보 양식을 창출 하였다.
영국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를 앞장섰다가 나중에는 그의 강한 관능성에 반발하는 풍조가 일반적으로 되어 비어 쥴리(Aubrey Beardsley)의 탐미적인 Graphic Design이 눈에 띠게 두드러 지며, 스코트랜드의 글래스고우에서는 건축가 맥켄토시(C.R.Mackintosch:1868-1928)을 중심으로 모던하고 우아한 독자의 양식이 발전했다. 그들의 양식은 백색을 기본색으로 하여 곡선과 직선를 훌륭하게 융합 시킨것이 특징이다. 또 미국에서는 티파니(Louis Rennie Tiffany)의 유리용기가 유명하며, Nancy파와는 대조적으로 모던하며 국제적인 style을 보이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초기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은 곡선이 많이 쓰여졌으나 비교적 빨리 탈피하여 기능주의적 방향과 직선 형식에 의한 구성적 작풍으로 각기 진보하여 갔으며, 이밖에도 이태리나 유럽을 제외한 러시아 등에서도 각각의 풍토나 국민성과 결부하여서 특징적인 아르누보(Art Nouveau)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아르누보(Art Nouveau)의 운동은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전후로 하여 정점에 달해 모든 장식들은 기계에 의한 복제품의 범람으로 운동의 본질은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아르누보(Art Nouveau)의 역사는 단명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은 서양의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다양하게 징행되었던 점은 중요하며, 철과 유리등 새로운 재료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합리주의와 상징주의나 심미주의적인 비합리적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점도 특징으로 들수 있으며 이운동 전체가 20세기 건축, 디자인에 미친 의의와 영향은 매우 크다. 종합해 보면 아르누보(Art Nouveau)는 이미 과거의 역사적 양식에 존재하지 않고 자기들의 시대의 표현을 스스로의 손으로 독창적으로 만들어 내었다는데 더 큰 意義가 있다.
아르누보(Art Nouveau) 시대의 회화는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더욱 내면적인 표현으로 향하고 있던 시기로서 고갱(Gauguin)이나 고흐(Gogh)는 물론이고 로트랙이나 표현주의의 선구자인 뭉크(Munch), 호들러, 크림트등의 작품에도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즉, 화가 고갱은 인상파의 시정을 초월함 물론 종교적 체험의 추구와 더블어 후기 인상주의의 대화가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갱(Gauguin)은 주식 중개자이자 아마츄어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근대회화를 수집하는 수집가로서 세잔느의 “과일쟁반” “유리잔” “사과”등을 소유하기도 했으며, 1883년 가족을 버리고 회화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로 부터 6년후에 새로운 미술운동을 일으켜 이를 상징주의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 그의 화풍은 반 고흐(Gogh)처럼 개성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인상주의를 뛰어넘는 매우 대담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공업화된 사회가 도시인으로부터 본연의 인간성을 박탈해 버린 것을 느낀 고갱은 프랑 서부의 부르타뉴로 이주하여 농민들과 함께 생활을 하며,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존재하는 종교의 역할에 감동하여 이들의 순수한 신앙을 표현하려 하였다. 또한 그는 묘사를 떠나 평면 그 자체의 질서를 지양하려는 미학을 가지고 그후 회화에서도 떠나 장식품과 겹치게 되었다. 사실 고갱 주변의 화가들은 포스터, 테페스트리, 공예의 세계를 거닐었다. 장식의 자각성은 소용돌이치는 곡선으로 죽음을 암시한 뭉크를 비롯하여 호들러나 인상주의 회화를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세잔느와 더블어 목 표를 같이 했던 쇠라, 그리고 샤반느등의 방법등에 제각기 개성있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가르켜 회화의 아르누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움직임이 당시 디자이너의 미의식에 자극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은 맥머어도의 목판화 표지 디자인으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볼수있다. 그는 렌의 도시교회(Wren's Ctiy Churches:1883) 속표지에서 빅토리아시대의 양식을 탈피하여 가늘게 늘어진 두루미와 엉겅퀴 를 반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판화에 다양한 색을 사용한 최초의 예술가중 한사람은 툴루즈-로트랙(Toulouse-Lautrec)이었으며, 그는 그래픽 디자인(Graphic Design) 분야에서도 속묘나 넓은 평면의 coloring 으로 또다른 기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1820년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삽화가 그라쎄(Eugene Grasset)는 최초의 아르누보 활자자면(tape face)을 디자인 하였는데, 이는 종전의 자면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굵은선과 가는선이 강한 대조를 이루지 않은 점에서 고체(Old Style)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아르누보(Art Nouveau)잡지 판(Pan)과 유켄트(Jugend) 그래픽 디자인을 그래쎄의 뒤를 이어 엑크만(Otto Eckmann)에 의하여 실험 되었는데, 이는 규칙적이 거나 직선적이지 않고 비어쥴리(Aubrey Beardsley)나 반데벨데의 뱀같은 곡선을 닳았다.
또한 빅토리아의 혼란된 구성과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역할을 가졌던 포스터 디자인(Posters Design)은 아르누보(Art Nouveau)에 들어서면서 흰공간을 대담하게 사용하며 단순화된 특정한 면을 구성하여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쉬레(Jules Cheret)는 강한 색채와 단순화된 윤곽선, 대담한 레터링으로 아르누보(Art Nouveau) 포스터의 특징을 공식화 하였으며, 아르누보의 요소를 포스터에 도입한 최초의 디자이너 였다. 이러한 쉬레의 포스터는 보나르와 반데벨데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보나르는 1891년 툴루즈-로트랙(Toulouse-Lautrec)에게 포스터 만드는 작업을 소개하였는데, 툴루즈-로트랙은 그 매너리즘을 개발하여 포스터를 최고의 발전단계에 올려놓았다.
이시대의 모든 매체들이 그러하듯이 사진도 아르누보의 영향을 많이 받고있는데, 서적상이자 아마츄어 사진가인 에반스(Ferderick H. Evans)에 의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극적인 명암의 사용과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형식의 강조를 하고 있는데, 영국의 중세기 성당 건축을 찍은 걸작을 남기고 있다. 또다른 아마츄어 사진가 에머슨(P.H. Emerson)은 자연주의적인 사진(Naturalistic Photography:1889)을 출판 하여 회화적 사진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또한 그는 영국의 매독스(Richard Leach Maddox)가 1871sus 발명한 건판기법(dry-plate process)을 사용하였는데, 이기법은 건판의 상업적인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아트제(Eugene Atget)는 원근과 2중 대칭(biaxial symmetry)에 대한 화가의 관심을 도입하였는데, 그는 이를 파리의 기념물과 거리 그리고 쇼우윈도우의 기록적인 의도로 사용하였다. 또한 윌(E.J.Wall)과 파이버(C.Welborne Piper)는 1907년 붓으로 칠한 어떠한 색의 유채(油彩)도 받아들이는 젤라틴 입체인화의 브로마이드 현상법(bromide process)을 만들어 냈으며, 1904년 로우린스(G.E.H.Rawlins)는 하일라이트를 강조한 젤라틴 릴리프의 유채현상법(oil-pigment process), 드마쉬(Robert Demachy)는 캔버스의 거친 질감을 인화에 모방 하였고 또한 고무인화법을 사용 하였는데, 드마쉬는 드가(Degas)의 발레리나 그림들을 사진의 주제 뿐 아니라 효과 까지 모방하였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공예(Craft Design)나 제품디자인(Product Design)은 월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죤 러스킨(John Ruskin)의 이론과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많은 예술가들이 화가에서 공업디자이너로 전향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중에 티파니(Louis Comfort Tiffany) 등의 몇 몇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 대량생산에 의한 작품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 데 벨데와 선의 아르누보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독일의 미하엘 토네트(Michael Thonet)가 그들이다.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는 엄격하고 무장식인 선형 의자는 현대의 기능주의 형태를 지향하고 있으며, 가구와 포스터로 대표 될 수 있지만 가정용품을 디자인하기도 하여 공업디자이너의 제 1세대를 위한 기초 작업을 마련하였다.
미하엘 토네트는 이미 1860년경에 아르누보의 특징인 선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곡목의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현대의 기계기술에 의한 대량생산의 대담한 제작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876년 티파니는 유백광(乳白光)의 장식용 창유리를 생산 하였고 몇 년뒤에 무지개 빛의 금속성 화브릴(favrile)유리를 개발하여 특허 신청을 하기도 했다. 티파니의 유리공예 에서의 특징은 기능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자연의 모방이며, 복고적이라고 보기에는 개성이 있어서 그의 다채로운 수공예 기술과는 따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유리를 불어서 만드는 과정에서 화학약품과 용해된 금속증기에 노출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에밀 갈레(Emile gallè)의 프랑스 유리공예는 착색 유리층에 형태를 자르는 것인데 비하여 티파니는 각기 다른 색의 녹은 유리를 함께 굴려서 추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아르누보(Art Nouveau)의 2차원적인 특징은 건축(Architecture)에서 보다는 인테리어 디자인(Interior Design)에서 더 잘 어울린다고 볼수 있다. 클림트의 모자이크와 티파니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 그리고 맥켄토쉬의 벽지 등에서 뚜렸이 나타나는 이러한 특징은 타셀 하우스(Tassel house)에서 오르타의 타일바닥위의 벽과 천정에 화려한 자연 형태의 장식문양을 되살려 그것을 조명장치, 주철기둥, 단철난간에 적용 하였다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도 오르타(Horta)와 같이 하나로 둘러쌓인 모양의 부분을 이룬 고도로 통일된 실내를 설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구를 보완 하기위하여 아내의 의상을 디자인 하기도 하였으며, 식탁의 배열에도 색의 조화를 고려하여 음식을 골랐다고 한다.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오르타는 자신의 집과 솔베이 하우스(Solvay house)를 위해 아르누보의 독특한 특성을 발전 시켰지만 벨기에의 사회당 본부인 국민관(Maison du Peupie)에서는 다른 방향의 디자인 작업을 하였다.
가우디(Gaudi)의 자연 생태학적 형태와 색채는 표현과 뛰어난 구조적인 혁신은 당시의 흐름에서 동떨어진 느낌이 있으나, 이것은 아르누보의 모티브를 처음 개발한 사람인 동시에 표현주의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건축가이기도 했다. 바로셀로나의 카사 비상스(Casa Vicens)를 위해 철제문을 디자인 하였는데, 이는 곡선형(Curvilinear)의 첫 실례 일 것이다. 1878년에 시공된 이문은 오르타의 타셀(Tassel) 저택보다 4년, 그리고 맥머어도의 렌의 도시교회(Wren's City Churches)를 위한 목판 보다는 3년이나 앞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