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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띠문양 익산 구 삼산의원건축,동척문양과 유사/구 목영사관과 유사한 진해요항부 사령부

작성자천사의섬|작성시간13.05.23|조회수811 목록 댓글 0

 

전북 익산 / 등록문화재 제180호 /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益山 中央洞 舊 三山醫院)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 문화유적。

2012/02/10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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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를 찾으러 이번엔 익산에 들렀어요. 눈은 멈췄네요. 아주 쌀쌀한 날씨에 눈까지 내리니 자동차가 한번씩 미끄러지더라구요. 미끄러짐을 미

세하게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좁은 골목에서는 위험하지요. 시내에서 등록문화재 찾는것은 참 어렵군요. 특히나 구심에 위치해 있어 길이 좁고 주차하기가 난감하네요. 앞으론 시내에 있는 등록문화재를 찾으러 갈때는 한쪽에 차를 주차하고 골목을 구경하면서 찾아봐야 겠어요.

 

  


 


 

 

 

처음엔 이곳인줄 알고 한참 사진을 찍다가 보니... 이 건물은 아닌듯 합니다.

 

 

 

 

그렇다고 이건물도 아닌듯 하구요. 정읍 화호에서 폐가를 봤으니.. 혹시나 했지만 아니더군요. 빨간벽돌은 괜찮은데 지붕에서 불합격!

 

 

 

 

 

 

위에 보이는 건물이 일식 건물은 맞는것 같은데요... 맞긴 맞는데.. 아닌듯 하군요. 의원건물이라는데... 의원건물이 이렇게 쳐박혀 있을리도 없구요.

 

 

 

 

 

 


 


 

 

그럼 이 건물일까요? 문화재 표시는 없지만 이 건물인듯 싶습니다.. ㅎㅎㅎ

 

 

 

 

 

 

핑크색 담장집이 나란히 있어요. 두집이 사이가 좋은가 봐요.. 나란히 핑크색으로 담장을... ㅎㅎㅎ

 

 

  

생각보다 구심엔 빈집이 많더라구요.. 지금은 모두 신시가지로 옮겨 갔겠지요?

 

 

 

 

 

 


 

이집도 특이하더군요... 남의집을 이리저리 찍고 다니다가 경찰서에 잡혀가면 구해주세요..

 

 

  

 

골목길의 풍경입니다.

 

 

 

 

오래된 구심의 골목길요.. 한땐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겠지요..

 

 

 

 

이런 건물들이 참 많군요...

 

 

 

 

 

 


 


 

 

 

우체국에다 차를 주차했어요... 우체국 건물도 무지 오래되 보여요.

 

 

 

 

 

 


 


 

 

 

차를 타고 지나다.. 헉 이건물이 뭐지 .. 이건물이 맞겠다 싶더군요.. 문화재청의 사진을 보고 확인했습니다..

등록문화재  제180호인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益山 中央洞 舊 三山醫院)건물입니다. 혼자 쇼를 했군요.. 다른 건물에 가서 그 건물이 문화재

인줄 알고... ㅎㅎㅎㅎㅎ 여튼 면적은 2층까지 연면적 289.26㎡이나 됩니다.

 

식당이 영업을 안하고 있는듯 합니다. 영업을 하면 들어가 보는것도 좋을 듯 한데요...

 

 

 

 

독립운동가 김병수의 익산중앙동 구삼산의원(中央洞 舊三山醫院)| 영명중고등학교/사료

주오시리 | 조회 38 |추천 0 | 2010.11.22.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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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중앙동 구삼산의원(益山中央洞 舊三山醫院)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 3가 114-2번지에 양옥의 형태를 가진 일식건물이 있다. 연면적 289.2m²에 건축면적 158.02m²인 2층짜리 벽돌조 건물 1동은 정봉교소유로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당시 삼산의원(三山醫院)으로 1922년 김병수(1898~1951)가 개원하였으며, 해방 후 한국무진회사로 사용되다가 국민은행이 인수하였다. 국민은행은 여기에 33.45m²의 금고를 증축하였었으나, 지금은 신축건물로 이전하였다. 최근에는 음식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그나마 영업을 중지한 상태다.

1931년 조사에서는 익산에 총 8개의 의원이 있었으나, 그 중 절반만 한국 사람이 운영하였다고 한다. 삼산의원은 해방되던 해 화재가 발생하여 내부가 전소되었으며, 외관도 수리한 흔적이 남아있다.

김병수(金炳洙)의 호가 삼산(三山)이며, 김제 백구출신으로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을 1년 앞둔 삼일운동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이리읍이 이리부로 승격하자 초대 부윤으로 취임하였으며, 한국전쟁시에는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삼산의원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팔라죠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작은 부분도 매우 섬세하며, 정면은 대칭인데 출입구 상부에 바로크 양식의 곡선을 채택하였다. 중앙부의 2층은 3개의 작은 창을 합쳐 상부에 위치시키고, 양측에 1개씩 낮은 창을 두었다. 1층은 아치로 된 출입구가 돌출되어 있고, 정면의 좌측과 우측에는 각각 3개의 트레이 서리창을 두었다. 측면에는 각각 4개의 트레이 서리창이 있으며 높게 올린 굴뚝이 남아있다. 처마홈통 밑에 그려진 동그란 부조형 장식은 언뜻 보아도 일장기의 원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 중앙에 벽 없는 돌출 현관인 포치를 두었으며, 좌측의 계단실을 통해 2층으로 출입하도록 되어있다. 2층은 중복도형식이다.

지붕은 우진각형이며 슬레이트로 마감하였고, 지붕의 상부 코니스는 3단의 몰딩으로 처리하였다. 몰딩의 상하부에는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고, 지붕의 하부에는 함석으로 된 물받이와 낙수통이 설치되어 있다.

김병수의 아들 김신기는 산부인과 의사인 그의 아내 손신실과 함께 중앙동에 삼산의원을 개원하기도 하였다. 훗날 그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다.

구삼산의원을 찾는 길은 의외로 쉽다. 중앙동의 국민은행사거리에서 우체국방향으로 난 우체국길 133에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우체국에 간다고 하면서 자주 지나가던 길이었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건물이었다. 형태가 특이하여 눈여겨 볼만도 하였겠지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지나치려 해도 눈에 밟히는 건물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어느 누군가가 말하기를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모든 것은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웃도시 군산에도 일본과 관련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일제의 흔적이 묻어나는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구군산세관, 히로쓰가옥, 구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건물들은 강점기의 지배자들이 사용하던 건물이거나 이와 관련되어있으며 익산의 삼산의원처럼 우리나라 사람의 건물은 따로 있다. 전라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00호인 이영춘가옥(李永春家屋)이 바로 그것이다. 이영춘은 당시 의사였으며, 현재 전북 군산시의 학교법인 경암학원을 연 교육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할 때 군산은 일제의 수탈을 많이 받은 도시로서 여러 종류의 근대문화재가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쌀을 실어가던 역사적 아픔으로 그와 관련된 유적지가 많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지역 보다 많은 여러 잔재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군산과 익산을 비교해볼 때 군산보다 익산의 등록문화재가 더 많은 것을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지고 보면 당시 군산은 항구와 금융가를 중심으로 하는 집약적인 수탈의 현장이었고, 익산은 넓은 지역을 전체로 하여 농업과 수리시설, 그리고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겪었던 현장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더 적합한 해석일지 모르겠다.

강점기의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일상에서, 말하고 듣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못했던 지친 일상에서, 익산에 김병수와 같은 사람이 있었고 군산에 이영춘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청량제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것도 억울한데 몸마저 아프다면 그것은 정말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동포들에게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같은 동포의사가 있어 마음놓고 하소연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나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어떤 혜택을 준 것은 아니지만, 지금 돌아보는 역사에서 과거 그의 행적을 볼 때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익산의 김병수는 군산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예수병원을 거친 후 1922년에 개인병원을 연 의사다. 의사가 병을 고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의술이 곧 인술이라는 말과 같이 의사가 아픈 상처만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픈 마음까지도 보듬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아픈 사람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약을 먹을 때 그 약으로 인하여 다른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의술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인술을 바탕으로 한다.

김병수는 삼일만세운동을 적극 주동한 사람이다. 그때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학생으로,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받아 군산과 익산으로 전달하였다. 익산은 문용기와 다수가, 군산에서는 김병수와 관련된 사람들이 삼일만세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익산중앙동 구 삼산의원. 등록문화재 제180호| ♤ 익 산 시

미키귀희 | 조회 12 |추천 0 | 2009.11.30.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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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중앙동 구 삼산의원(益山中央洞 舊 三山醫院)

등록문화재 제180호


전라북도 익산시 중앙동에 있는 옛 삼산의원 건물이다.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80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김병수(金炳洙)가 1922년 의원을 개원했던 건물이다.

연면적 289.26㎡의 2층 건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코니스 장식을 두르고 건물 입구의

포치는 아치형을이룬다. 8·15광복 뒤에는 한국무진회사와 국민은행으로 사용되었다.

근대 초기 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현재의 건물은 식당으로 변해있어 간판없이는 사진을 찍을수가 없었다. 

 

 

 

 

  

 

 

 

 

 

익산 중앙동 구 삼산의원 등록문화재180호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중앙로 22-253 (중앙동3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인 김병수()가 1922년 의원을 개원했던 건물이다. 연면적 289.26㎡의 2층 건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건축 벽면에 수평의 띠 모양을 돌출시킨 코니스 장식을 두르고 건물 입구의 포치는 아치형을 이룬다. 8·15광복 뒤에는 한국무진회사와 국민은행으로 사용되었다. 근대 초기 건축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군산 개정면 구 일본인농장 창고 등록문화재182호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개정면 바르메길 43 (발산리)

이 건물은 군산 지역의 일본인 대지주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철근 콘크리트조로 견고하게 지었다. 입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철제 금고문이 달려 있고 창문에는 이중 잠금 장치가 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 때문에 한국전쟁 때에는 군산에 주둔한 인민군들이 옥구 지역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금과 서류뿐만 아니라 일본인 대지주가 불법 수집한 수많은 한국의 서화와 도자기 등 골동품을 보관하던 건물로, 일본인이 자행한 수탈의 역사를 잘 간직하고 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가옥 등록문화재183호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구영1길 17 (신흥동)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에서 포목점과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부협의회 회원을 지낸 일본인이 건립한 일본식 2층 목조 가옥이다. ‘ㄱ’자 모양으로 붙은 건물이 두 채 있고 두 건물 사이에 꾸며놓은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있다. 1층에는 온돌방, 부엌, 식당, 화장실 등이 있고 2층에는 일식 다다미방과 도코노마 등이 있어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으며 아울러 이들의 농촌 수탈 역사를 알 수 있다.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김제 신풍동 일본식가옥 등록문화재187호

소 재 지; 전북 김제시 두월로 185 (신풍동)

1928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김제 지역의 일본인 농장을 관리했던 관리인의 집이다. 중복도를 통해 각 실에 연결되는 전형적인 일식 가옥의 평면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3중 창호의 설치, 덧문의 잠금장치, 외부에 설치된 창호의 수납장 등 정교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이곳에 살았던 농장 관리인의 삶을 짐작하게 함과 동시에 일제에 의한 토지 수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등록문화재189호(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 )

 

장수천주교회 수분공소 등록문화재189호

소 재 지; 전북 장수군 장수읍 뜬봉샘길 51-3 (수분리)

이 건물은 병인박해(1866년) 이후 외지에서 피난 온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이 형성된 수분리에서 신앙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정면 3간, 측면 6간 규모로, 내부는 두 개의 열주에 의해 신랑(身廊, Nave)과 측랑베이비무어  주변도시 급성장으로 시공 등 이주 땅 집갑 올라 하우스푸어, (側廊, Aisle)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1920년대 한옥 성당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베이비무어, 하우스푸어 깡통집  주변도시 급성장으로 농촌 등에서 이주 땅,집갑 급상승

 

 

진안 강정리 전영표 가옥 등록문화재191호 

소 재 지; 전북 진안군 마령면 원강정1길 56, 외 2필지 (강정리)

이 가옥은 1924년경에 2층으로 지은 농촌 주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ㄱ’자 모양을 이루며, 사랑채 앞으로는 헛간과 부속 건물이 있다. 안채는 농촌 주택에서 보기 드문 2층 구조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주인이 거주하는 안방과 윗방, 부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층은 누에를 치는 잠실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구 진해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 등록문화재193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32번길 22, 18 (근화동)

1930년대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 해군통제부의 병원장이 살던 사택이었으나, 지금은 대중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ㄱ’자형의 평면에 주 현관이 돌출형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 공간은 양식으로, 가족들의 주거 공간은 전통적인 일식으로 되어 있는 목조주택이다.

 

 

구 진해요항부 사령부 등록문화재194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진해구 현동 23-1

1914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에 자리 잡은 일본 해군 기지인 진해요항부 사령부(鎭海要港部 司令部)로 건립되어 현재 대한민국 해군의 진해기지 사령부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중앙부에 2층 높이의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그 위쪽에 사각 기둥 형태의 필라스터(pilaster)를 세우고 삼각형의 페디먼트(pediment)를 올려 정면성을 강조하였다. 1층 외벽에 화강석을 사용하여 전반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며, 창의 상하 인방 및 좌우에 붉은 벽돌과 흰색의 화강석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꾸몄다. 진해 지역이 일본의 해군 기지로 이용된 침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구 진해방비대 사령부 등록문화재195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진해구 현동 72-4

1912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에 자리 잡은 일본 해군 기지인 진해방비대 사령부(鎭海防備隊 司令部)로 건립되어 최근까지 대한민국해군 진해기지 사령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좌우 대칭형 평면으로 정면 중앙부에 현관 포치(porch)가 돌출되어 있고, 그 위쪽에 사각 기둥 형태의 필라스터(pilaster)를 세워 정면성을 강조하였다. 붉은 벽돌과 함께 정교하게 가공된 흰색의 화강석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 위엄 있는 입면을 갖고 있다

 

 

진해방비대 사령부 별관 등록문화재196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진해구 현동 72-4

1912년에 무렵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에 자리 잡은 일본 해군기지인 진해방비대 사령부 별관(鎭海防備隊 司令部 別館)이다. 좌우 대칭형 평면으로 중앙부와 양쪽 끝 부분이 앞뒤로 돌출되어 그 위쪽을 박공지붕으로 구성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으며, 지붕 용마루에는 3개의 환기탑을 설치하여 지붕 뼈대가 썩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본관의 장엄하고 화려한 구성과 비교하면 별관은 간소한 의장을 취하고 있지만, 1910년대 서양식 건물로서 건물의 의장 요소가 뛰어나다.

 

 

 

구 진해요항부 병원 등록문화재197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진해구 현동 23

1912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해군 진해기지에 건립된 병원 건물로, 최근까지 의료원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ㄷ’자형 평면을 기본 구조로 하여 전면 돌출부에 박공 형태의 페디먼트를 화강석으로 구성하였고, 쌍으로 된 창의 가운데 위쪽에 장식을 넣었다. 현관부는 사각 기둥 및 화강석과 붉은 벽돌이 혼용된 아치로 장식하였고, 붉은 벽돌을 이용하여 벽체를 정교하게 쌓는 등 짜임새 있는 입면을 구성하였다.

 

 

 

구 마산헌병 분견대 등록문화재198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52 (월남동3가)

1926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잔악한 일본의 대명사였던 헌병대가 민중을 억압하고 독립투사들에게 가혹 행위를 자행했던 곳으로 일제 강점기의 뼈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벽면 전체에 돌림띠를 둘러 장식하고 수직의 긴 창을 반복적으로 배치하는 등 관공서 건축물로서의 권위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 등록문화재200호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의창구 의안로44번길 33 (소답동)

이 가옥은 우리나라 현대 조각의 개척자이자 미술교육의 선구자인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1915~1982)의 생가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40년대에 근대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주택이다. 수납공간과 높은 다락, 미서기 유리문과 출입구 상부의 채광을 겸한 환기창 등이 특징이다. 가곡 ‘고향의 봄’에서 ‘울긋불긋 꽃 대궐’이라는 노랫말은 바로 이 집을 묘사한 것이다.

 

 

 

진주역 차량정비고 등록문화재202호

소 재 지; 경남 진주시 강남동 245

이 건물은 1925년경 붉은 벽돌 건물로 지은 경전선과 호남선을 개통하면서 진주역에 설치한 차량정비고이다. 아치형 출입구 2개를 나란히 배치하였으며, 중앙 상부에 솟을지붕을 만들기 위해 왕대공 트러스를 변형하여 구성하였다. 건물 정면 가운데 위쪽에는 둥근 창을 설치하였고, 왼쪽과 오른쪽 벽면에는 지붕 트러스를 받치도록 버팀벽을 설치하였다. 벽면에는 한국전쟁 때의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전해준다.

 

 

구 밀양역 파출소 등록문화재205호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가곡6길 8-8 (가곡동)

1920년대에 건립된 이 파출소는 일제 강점기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국인 억압이 행해졌던 건물이었으며, 1980년 이후에는 부산항운노동조합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장방형의 평면에 중앙 출입구 위에는 박공형 캐노피를 설치하여 정면성을 강조하였고, 내부 공간은 단일 홀 형식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었다. 내·외부 벽체, 내부 바닥, 지붕 등 근대 건축 초기의 일반적인 재료와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밀양 구 비행기 격납고 등록문화재206호

소 재 지; 경남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1358-1, 1378, 연금리 1072 (1358-1번지 제외)

1940년 전후에 건립된 이 시설물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서 연합군의 레이더와 폭격을 피하기 위해 만든 비행기 격납고이다.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전면의 아치형 개구부와 곡면형 일체식 구조가 잘 남아 있으며,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밀양 지역에서의 전투 준비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군산 임피역사 등록문화재208호

소 재 지; 전북 군산시 임피면 서원석곡로 39 (술산리)

임피역사(臨陂驛舍)는 군산선로의 역사로 1936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며, 1920년 12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구조는 목조로 벽체는 시멘트 모르타르 마감되어 있다. 지붕은 맞배집 형태에 박공을 설치하였는데 출입구와 개찰구 위에 직선으로 설치하였고, 철로변 사무실에 모임지붕이 돌출되어 있다. 대합실과 사무실 사이에 벽난로인 난방시설이 있으며, 굴뚝이 지붕위에 설치되어 있다. 임피역사는 군산과 익산 중간에 위치한다. 서측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군산과 전주를 잇는 국도 26번이 지나가고 만경강이 흐른다. 북쪽은 일제강점기에 간척사업을 하기 전까지 선로 바로 옆까지 갯벌이었다. 바닷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둑을 세운 것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본래는 임피읍내에 역사를 세우려고 했으나 지역 유지들에 의해 거부되어 현재의 위치인 술산리로 노선이 바뀌었다. 임피역은 1936년경에 지어진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북도의 농산물을 군산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중요 교통로의 역할을 담당했던 군산선에 만든 역사(驛舍)이었다. 전면과 후면의 출입구 부분은 박공면으로 구성하였고, 철로변 대합실 출입구에 차양 지붕을 덧달아 본채 지붕과 차이를 두어 입체감과 함께 그늘을 제공하는 등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 역사의 전형적 건축양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짝은 춘포역에서도 볼 수 있는 ‘걸어 매달은 레일문’이다. 캐노피 기둥을 따라 빗물홈통이 따라 내려오고 있다. 승강장 측 입면은 개찰구와 열차 조정실로 구성되었다. 개찰구 상부에는 캐노피가 설치되었고 열차 조정실은 시야확보를 위하여 돌출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연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연 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1885
廣 惠 院 장로교·감리교 서울 1902 永興學校 장로교 목포
1885
培材學堂 감리교 1902 永明學校 군산
1886 梨花學堂 1902 메리볼딘
女學校
1886 儆信學校 장로교 1903 崇義女學校 평양
1887 貞信女學校 1903 樓氏女學校 감리교 원산
1894 光成學校 감리교 평양 1904 德明學校
1894 正義女學校 1904 好壽敦女學校 개성
1894 崇德學校 1904 眞誠女學校 장로교 원산
1895 日新女學校 장로교 동래 1904 懿昌學校 감리교 해주
1895 正進學校 감리교 평양 1905 永明學校 공주
1896 攻玉學校 서울 1905 信聖學校 장로교 선천
1897 崇實學校 장로교 평양 1906 啓聖學校 대구
1897 信軍學校 감리교 서울 1906 保聖女學校 선천
1897 永化女學校 인천 1906 韓英書院 감리교 개성
1898 培花女學校 서울 1906 美理欽學校
1898 盲啞學校 평양 1907 信明女學校 장로교 대구
1898 明信學校 장로교 재령 1907 崇一學校 광주
1900 新興學校 전주 1907 須彼亞女學校
1901 平壤神學校 평양 1908 昌信學校 마산
1902 紀全女學校   전주 1909 懿貞學校 감리교 해주
1902 貞明女學校 목포        

 

 

 

 

(1) 병원 설립과 의료 선교 사업 전개

 

1) 군산 구암 병원

  선교사가 전라도로 오기 전 서울 남대문 밖 약현(藥峴)의 전킨 목사의 선교사 공관에 함께 있던 드루 의사는 1894년∼1895년경 그 사랑(舍廊)에 약방(藥房)을 열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1895년에 그는 서울 등지에 괴질(콜레라)이 무섭게 번질 때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치료해 살려낸 일이 있었다. 드루는 1896년 전킨 목사와 더불어 군산으로 와서 초가집에 살면서 방 한 켠에 약방을 꾸미고 3년 동안 환자를 치료했고, 또 전도선을 타고 군산 연안 각지와 각 도서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 전도에 진력했다. 그러던 중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폐병에 걸려 치료차 미국에 돌아갔다. 그후 다시 나오지 못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의료 선교를 펼쳤다.

  그가 군산 궁말에서 시작했던 진료소는 그후 병원으로 발전되었고 1899년에 알렉산더 의사가 왔으나 두 달이 못 되어 본국의 부친 별세 소식을 받고 급히 귀국할 때 청년학도 오긍선(吳兢善)을 데리고 들어가서 학비 등 일체를 담당해 주며 의학 공부를 하게 했다. 오긍선은 의사가 되어 귀국해 목포 병원을 위시해 구암 병원에서도 일했고 미션 기관의 병원에서 봉사하였으며, 후에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의 교수로 봉직해 마침내 교장이 되어 훌륭한 의학도를 양성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1904년에는 다니엘(Thomas Henry Daniel, 丹義烈) 의사가 구암 병원에 와서 병원을 건축하고 시설을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의료 사업을 전개하다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겼고, 그 후임으로 패터슨(Jacob Bruce Patterson, 孫培焞) 의사가 부임해 7년 동안 병원을 확충하고 입원실을 온돌방으로 건·개축하였다. 특히 진찰을 정확하게 잘하므로 그 의술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여 구암 병원은 국내 유명한 병원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다음 1924년에는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 富蘭道) 의사가 내한해 구암 병원에서 농촌 순회 진료를 하는 등 복음 전파에 진력하다가 1930년에 전주 예수병원으로 옮겼다.

2) 전주 병원

  1897년 해리슨 목사는 미국에서 의료 기술을 수련하고 내한했기에 전주 서문밖 은송리 초가집에 약방을 차리고 중하지 않은 일반 환자를 진찰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인심을 얻어 전도를 효과적으로 도왔다. 같은 해 11월에 잉골드(Mattie Barbara Ingold) 여의사가 전주로 파송되어 전주 은송리 작은 초가집에 여자 환자를 진찰하기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다. 그녀가 오자 해리슨 목사는 환자 진료를 점차로 잉골드 의사에게 맡기고 자기는 일반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한편 잉골드는 처음에는 여성 환자 만을 진료했는 데 여자 의사에게 진찰받기를 기피하던 남자들이 자기 아내의 치료를 위해 왔다가 자기 병도 진찰받기를 청원하므로 그들을 똑같이 진료하였다. 차츰 다른 남자들도 찾아와서 치료를 받았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나갔다. 또 병이 나은 사람들 중에 여럿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중 ‘백만’이라는 사람의 할머니는 점치는 복술인으로서 잉골드에게 병 고침을 받고 난 이후로 예수를 믿어 나중에는 전도 부인이 되기도 했다. 또 유경선 부인이 발목에 독종이 나서 위태로웠는 데 남편에게 업혀 와서 한 달 이상 치료하는 중 한글을 배우며 예수 믿고 온 집안 식구를 교회로 인도하는 등 선교에 큰 성과를 가져왔다.




잉골드 선교사가 초기 전주병원(현 예수병원)
에서 진료하는 모습


  잉골드 의사가 일하던 진료소는 점차 확장되어 오늘날의 전주 예수 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전주 선교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테이트 선교사와 8년의 열애 끝에 1905년 9월에 결혼하고 남편과 더불어 농촌 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부녀자 성경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전주 병원은 1904년부터 포사이드(Wiley H. Forsythe, 保衛廉) 의사가 와서 열성적으로 전도와 치료에 전념했다. 1905년 3월 어느날, 포사이드는 전주에서 군산 방면으로 60리 떨어진 완주군 봉동읍 만동(蔓洞)에 사는


부자 전주 이씨가 부자 전주 이씨가 밤에 강도의 습격을 받아 위독하다는 급보를 받고 말을 타고 달려가서 응급 치료를 하고 밤이 되어 그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그 밤에 어제의 강도가 다시 습격했고 양복을 입은 포사이드 의사를 순검(경찰)으로 오인하고 칼을 들고 달려들어 격투하던 중 의사의 한 쪽 귀가 잘리고 여러 곳에 부상을 입었다. 날이 밝자 이 소식이 선교사들에게 알려졌다. 전주의 해리슨과 군산의 다니엘 의사가 달려와서 군산 구암 병원으로 후송해 응급 조치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감동을 받은 전주 이씨는 전주 서문밖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또한 그간 장터 선교 때문에 서민이 중심을 이루었던 교회에 상류층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교회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로써 양반 계급에 대한 선교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포사이드는 상처가 잘 낫지 않으므로 1906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치료를 받은 후 1907년에 다시 한국에 와서 목포 병원에 파송되어 의료와 전도 활동을 계속했다. 1907년부터는 독일인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전주 병원에 와서 1909년까지 진료를 담당하다가 함경도에 있는 미국인 광산 부속병원으로 떠나자 군산에 있던 다니엘 의사가 1910년에 전주 병원으로 옮겨와 병원과 진찰소를 벽돌집으로 확장 건축하고 밀려오는 환자를 수천 명 치료했다. 다니엘 의사는 1916년 3월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로 옮겨 교수로 일하다가 1년 후에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5년 한국에 들어온 로버트슨(Moor Owen Robertson, 羅培孫, 羅彬孫) 의사가 1916년에 전주에 와서 1922년까지 병원 진료와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3) 목포 병원

  1896년 오웬은 한국에 올 때 의사로 와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목사로 전환했다. 그는 벨 목사와 함께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고 진료소를 설립해 환자를 진찰하면서 전도에 열중하던 중 1900년에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인 화이팅(Georgiana Whiting) 여의사와 결혼해 농촌 의료 선교를 열심히 하다가 1904년 12월에 벨 목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설립을 위해 목포를 떠났다. 그는 개인 전도는 물론 많은 교회 개척에 진력하던 중 결국 과로에 폐렴이 겹쳐 고생하다가 1909년 4월 3일에 별세했다. 그의 부인은 그대로 한국에 1923년까지 머물며 이 고장 의료 선교를 담당했다.

  오웬 선교사가 광주로 옮겨간 후 목포 병원에는 놀란(Johseph Wynne Nolan) 의사가 와서 진료를 담당하다가 1904년 광주 선교부로 옮겼고 거기에서 1년 6개월 근무한 후 평안도 운산에 있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그후 버드만(Ferdinand Henry Birdman) 의사가 1년 동안 진료했다. 그는 건강 악화로 치료 차 전주 병원에 갔다가 귀국했다. 다시 그 후임으로 하딩(Harding, Maynard C. 하진) 의사가 왔으나 1년을 근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 치료 차 귀국했던 포사이드 의사가 건강을 회복해 190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목포 병원의 진료를 담당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칭송받던 그는 1905년에 받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1912년에는 아주 귀국해 1918년에 별세했다.

  1912년 리딩햄(Roy Samuel Leadingham, 韓三悅) 의사가 오게 되자 그 때까지 목포 병원을 맡고 있던 오긍선은 서울 세브란스 의학교 교수로 가게 되었다. 1914년 목포 병원은 병원 조수의 실수로 알코올 통에 불이 붙어 화재로 병원이 전소되었다. 리딩햄(한삼열) 의사의 활약으로 미국의 프렌치와 성요셉교회 교인들이 의연금(1만원)을 보내와 2층 석조 건물로 다시 훌륭하게 신축하였고 매일 찾아오는 많은 환자로 병원은 활발하게 운영되었으며 목포 지방의 의료 선교 사업은 날로 발전되어 갔다.

4) 광주 병원

  1904년 선교사 벨 목사와 오웬 의사가 목포에서 광주로 이사와 광주 선교부를 맡게 되었고 목포에 있던 스트레퍼 여선교사도 광주로 옮겨왔다. 목포 병원에서 일하던 놀란 의사는 광주로 와서 1905년 11월 20일부터 벨 선교사의 집에서 진찰소를 열고 진료를 시작하며 진료소 건축을 하며 1년 반 동안 근무하다가 사임하고 평안도의 미국인이 경영하는 운산 금광 진료소로 떠났다. 1908년부터는 윌슨(Robert Manton Wilson, 禹一善, 禹越遜) 의사가 와서 광주 병원을 운영하던 중 1911년에 미국에 있는 그레이엄(Graham) 장로가 자기의 죽은 딸을 기념하며 일만 원을 기부하므로 그녀의 이름을 붙여 ‘엘렌 레빈 그레이엄(Elen Ravine Graham) 기념병원’을 크게 건축하였다. 장기간 성심으로 병원을 경영하던 중 1912년에는 나병원을 설립해 나환자를 치료했고 또 치과를 개설하고 폐결핵 환자 요양소도 설치해 결핵 예방에도 공헌하였다. 순천 지방에까지 순회 진료를 하며 전도 사업을 하다가 여천군 율촌에 애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5) 순천 병원

  1912년에 전주 병원에서 근무하며 우리말 공부를 하고 있던 티몬스(Henry Loyola Timmons, 金로라) 의사는 1913년에 순천 진료소를 열고 환자를 진찰했으나 환자가 많아지므로 1915년에 현대식 건물로 병원을 건축했다. 티몬스 원장이 건강 관계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는 광주병원의 윌슨 원장이 겸무를 하며 의료 선교 사업에 지장이 없게 운영하였다. 티몬스는 1922년에 한국에 다시 와서 전주 예수 병원장으로 수고하다가 1926년에 아주 귀국했다.

  순천 병원에는 1917년부터 로저스(James McLean Rogers, 魯宰世, 노재수) 의사가 부임해 간호실, 전염병실 및 기타 설비를 확충하고 건물도 4층으로 증축했다. 특히 극빈 환자들의 치료에 심혈을 기울여 그의 별명을 ‘노제세(魯濟世)’라고 불러 불신인들에게도 칭송을 들었다. 일제 말기 강제 출국 때까지 순천에서 의료 선교 사역과 전도 사업을 계속했다.

6) 나병원

  1909년 광주의 오웬 선교사가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포사이드(보위렴) 의사가 그를 진찰하기 위해 목포에서 말을 타고 광주로 오는 도중 길에 누워 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기 말에 태우고 광주로 데려왔다. 그러나 수용할 곳이 없으므로 벽돌 굽는 가마에 그녀를 두고 정성껏 돌보며 치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선교사들이 특별 모금을 해 우선 세 칸 집을 짓고 그녀를 수용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나환자들이 모여 들었고 이에 선교사들은 45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나환자 병동을 건축했다. 광주 기독 병원장 윌슨 박사가 이 병원장까지 겸했고 병원을 더 크게 건축해 모여드는 나환자를 수용하고 치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한편 1921년 광주 병원을 거쳐 1927년에 순천 병원으로 옮긴 엉거(James Kelly Unger, 元佳理) 의사가 순천 지방에도 나병원을 설치해 줄 것을 선교부에 청원한 것이 허락되어 1928년 광주 나병원과 합병해 순천 지방 한 곳에 큰 나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엉거(원가리) 의사와 광주의 윌슨(우일선) 원장의 민첩한 활동과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나환자 천국이라 불리는 여수 애양원과 소록도 요양원이 이루어졌다.

(2) 학원을 통한 교육 선교 사업

  한국의 개신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던 선교 초기에, 의식 있는 사람들은 예배당 건물을 세우면서 대개 교육 기관도 함께 세웠다. 당시 신문화에 대한 선각자였던 교회 유지들의 교육 목적을 살펴보면 첫째, 한국인으로 하여금 더 나은 자주 국민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고, 둘째, 한국인이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해 긍지를 가지도록 하며 이를 지킬 때 외부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지 않고 자주적 정신과 자율 행동으로 각각 연보하기를 힘쓰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몸으로라도 나가서 참여함으로써 자신과 사회와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자유인을 양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그 당시 각 선교사회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하며 직·간접으로 학교를 세우는 일과 경영하는 일에 참여했다. 각 지방 교회에서도 교육 시설을 세우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위와 같은 교육 목표 덕분에 이후 일제 침략하에서 기독교 학교는 민족 정신을 보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 기독교회 역사상 1886년(미국 개신교회의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미국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의 배재(培材)학당,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여선교사의 이화(梨花)학당 설립을 위시해 1887년에 서울 새문안의 선교부에서 구세학당(救世學堂)을 설립하고 송순명(宋淳明)·안창석(安昌錫)·김유순(金裕淳) 등 몇 사람의 학도를 모집해 윤치경(尹致景)·목원홍(睦源弘)이 교수한 것이 한국 교회 교육의 창시였다. 또 1887년에 북장로회 선교사회에서 서울 연지동에 여자 교육 기관을 창설해 연동(蓮洞)여학교를 시작했고, 다음해 새문안 교회에는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설립하여 경영했으며, 같은 해 평북 용천군(龍川郡) 신창(新倉) 교회와 정주읍(定州邑) 교회와 박천군(博川郡) 남호(南湖) 교회에서는 사숙(私塾)을 일으켜 교회 교육을 시작한 것이 점차 확장되어 학교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한국 선교 초기에 교회들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경향 각처에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1898년에는 평양 부중 교회와 평북 의주군 남산 교회에서도 학교를 세웠고, 1900년에 평북 의주읍 교회·선천읍 교회·박천읍 교회·황해도 황주군 용연 교회에서도 사숙을 시작하여 교회 교육을 발전시켰다.

  이상의 모든 학교는 각 지방 교회에서 자율적으로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담당했는 데 선교부의 주도로 재정과 교사를 갖추어 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게 된 학교 중 전라노회 산하의 유수한 학교의 설립 내력을 살펴보자.

[표 3] 초기(1885~1909)선교사들의 학원 건립 상황

연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연 대
교 명
교 파
소재지
1885
廣 惠 院 장로교·감리교 서울 1902 永興學校 장로교 목포
1885
培材學堂 감리교 1902 永明學校 군산
1886 梨花學堂 1902 메리볼딘
女學校
1886 儆信學校 장로교 1903 崇義女學校 평양
1887 貞信女學校 1903 樓氏女學校 감리교 원산
1894 光成學校 감리교 평양 1904 德明學校
1894 正義女學校 1904 好壽敦女學校 개성
1894 崇德學校 1904 眞誠女學校 장로교 원산
1895 日新女學校 장로교 동래 1904 懿昌學校 감리교 해주
1895 正進學校 감리교 평양 1905 永明學校 공주
1896 攻玉學校 서울 1905 信聖學校 장로교 선천
1897 崇實學校 장로교 평양 1906 啓聖學校 대구
1897 信軍學校 감리교 서울 1906 保聖女學校 선천
1897 永化女學校 인천 1906 韓英書院 감리교 개성
1898 培花女學校 서울 1906 美理欽學校
1898 盲啞學校 평양 1907 信明女學校 장로교 대구
1898 明信學校 장로교 재령 1907 崇一學校 광주
1900 新興學校 전주 1907 須彼亞女學校
1901 平壤神學校 평양 1908 昌信學校 마산
1902 紀全女學校   전주 1909 懿貞學校 감리교 해주
1902 貞明女學校 목포        





초기의 신흥학교 학생들의 수업모습

1) 신흥 학교

  1899년 해리슨 선교사가 전주 선교 초기 주일에 소년 몇 명을 따로 모아 교회 교육을 시켰고 주중에도 그의 어학 선생과 더불어 8명의 소년을 교육하였다. 1900년부터는 레이널즈 선교사를 설립자로 하여 그 사택에서 그 부인(Patsy Bolling)과 함께 교과 과정을 정해 가르쳐왔다. 1907년 3월에는 교육을 담당할 선교사로 니스벳(John Samuel Nisbet, 柳瑞伯) 부부가 전주로 파송되어 와서 정식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교사로는

해리슨 부인과 최중진(崔重珍)·김명식(金明植)·김필수(金弼秀) 등이 수고했고, 1908년에 교명을 신흥학교로 명명했다. 1909년에 한국 선교 후원자인 그레이엄(C. E. Graham)의 기부금으로 2층 벽돌 건물을 신축했으며 역대 교장으로 니스벳· 레이널즈·해리슨·에베솔·린턴이 시무했다.

2) 기전 여학교

  1902년부터 매티 테이트는 12명의 소녀들을 모아 자기 집에서 주간(週間)에 두 번씩 교회 교육과 일반 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4년 전킨 선교사의 전주 부임 이후, 그 부인(Mary Leyburn)이 교육을 담당하였고, 다시 1907년 2월에는 교육 전문가인 랭킨(Nellie Beekwith Rankin, 엄언라) 여선교사가 파송되어 와서 본격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그녀는 학교를 교육의 본궤도에 올려놓기도 했거니와 서문밖 교회에서 소아회(小兒會)라는 명칭으로 소년·소녀 주일학교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활동하던 중 불행하게 병에 걸려 1911년 8월 13일 이 고장에서 별세했다. 학교의 이름을 기전(紀全)으로 한 것은 학교 설립 초기 힘써 일하던 전킨 선교사가 이곳에서 1908년 1월에 병으로 별세하였으므로 이를 기리어 ‘전킨을 기념한다(紀全)’는 뜻으 정한 것이다. 랭킨 다음으로 바크랜드(S.M.Bakland, 朴世理)와 콜턴(Colton Susanne Avery, 孔貞純) 여사가 역대 교장으로 시무했다.




초기의 기전학교 학생들과 선교사


3) 정명(貞明) 여학교

  목포 선교가 시작될 때 1899년에 내한한 스트레퍼(Fredriea Elizabeth Straeffer, 徐女史) 여선교사가 1902년 5월 10일부터 소녀들을 모아서 윤리적인 기초 훈련과 일반 초등학문 과정을 교육시켰던 것이 정명여학교의 출발이었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목포 지방 여성 교육에 헌신적이었고 목포를 중심으로 무안·함평 등지까지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다가 한때는 혼자 목포에 남게 되기도 했는 데 1908년에 귀국하였다.

4) 영흥(永興) 학교

  목포에서 여성 교육이 시작되자 1902년 9월 1일 양동 교회 이남규는 남학교를 설립하였다. 1903년에 내한해 목포 지방으로 파송되어 온 프레스턴 선교사가 1905년부터 교장으로 취임하고, 1908년에는 그의 활동으로 학교 교사(校舍)를 근대적 석조 건물로 신축하고 기구를 확충했다. 한편 프레스턴 선교사는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강진 지방에 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그후 광주로 이전해 숭일학교 초대 교장이 되어 교육선교에 진력했다.

5) 숭일(崇一) 학교

  광주 선교와 더불어 1907년 벨 선교사는 처음에는 광주 선교부 직원의 자녀와 교인 자녀들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목포에서 학교 교육과 일반 선교를 담당하던 프레스턴 선교사를 광주로 불러와 학생 교육을 담당하게 하며 오웬 선교사와 함께 광주 선교부 일을 맡게 하였다. 그간 배유지 선교사가 임시 교장으로 있던 남학교를 1908년 2월에 학교 이름을 숭일(崇一, ‘하나님 한 분만 섬긴다’는 뜻)로 하고 프레스턴 선교사가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그의 활약으로 1909년에 교사 건물을 기공해 4층 건물을 준공하고 점차 발전했다.

6) 수피아(須彼亞) 여학교

  광주에 옮겨 온 벨 선교사는 교육 선교 사업에 착수해 남학생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한편 자기 집 사랑채에서는 자기 부인(Magaret Bell W.)이 소녀들을 따로 불러모아 교육을 개시하였다. 1907년에 목포에서 옮겨와 광주 선교에 합류한 프레스턴 선교사의 부인(Annie Preston S.)이 또 이를 도왔다. 1908년 봄에는 여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09년에는 교육 전문 선교사인 그레이엄(엄엘라) 여선교사가 교장에 취임했다. 1911년에 그녀의 활동으로 미국 스턴니 스피어(Sternsnee Speer) 여사의 기부금으로 3층의 교사를 짓고 교명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수피아여학교(Jennie Speer memorial Girls School)로 이름하였다.

 

7) 영명(永明) 학교

  

군산에서는 1900년에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때 전킨 선교사의 부인이 주일학교 교육의 연장으로 집에서 아이들 3∼4명에게 성경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일반 기초 교육도 실시했는 데 바로 이것이 학교의 시작이라 하겠다. 학생이 증가되자 1902년에는 전킨 선교사를 설립자 겸 교장으로 해 군산 궁말(구암동) 선교 기지에 5∼6칸의 집을 세우고 소년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했다. 교사로는 전킨 선교사와 다른 선교사들, 장인택 조사, 양종국, 그리고 때 마침 공주에서 이사 온 교인 오인묵 등이었다. 전킨 선교사가 전주로 옮겨 간 이후는 불·해리슨 선교사에 이어 이얼(Alexander Miller Earle, 어아력, 魚목사) 선교사가 학교책임자가 되어 미국 교회의 보조를 받아 학교 건물을 3층으로 신축했다. 지방에서 오는 학생을 위해 기숙사를 건축해 운영하니 많은 학생들이 찾아왔다. 이 학교는 군산과 충청남도 일대에서 건실한 교사들이 청소년을 가르쳤던 곳으로 기독교와 민족 의식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8) 메리 볼딘 여학교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를 전개하면서 먼저 영명학교를 시작하였고 그의 부인(Leyburn Junkin Mary)은 인근 동리 가가호호를 심방해 소녀들을 오게 하여 자기 집에서 따로 가르쳤다. 이것이 여학교의 시작이었다. 1904년 전킨 선교사가 건강 관계로 전주로 가게 되자 1900년에 군산에 와서 불 선교사의 부인이 된 앨비(Libbie Elizabeth Alby) 여선교사가 여학교를 맡아 운영하는 중 자기 모교회(버지니아 렉싱턴 장로교회)와 미국의 메리 볼딘(Mary Baldwin) 대학에 학교의 건축 보조를 호소하자 교회와 그 대학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모금 운동을 펴서 건축 기금을 보내왔다. 이로써 구암동 선교기지 내에 3층 벽돌 건물로 교사를 신축할 수 있었다. 그 때 교사 건축을 위해 미국의 학생들이 끼니를 걸러가며 성심으로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매월 학교 운영비로 1,000달러씩 보내주는 것을 기념해 학교의 이름을 메리 볼딘 여학교라고 하였다. 교사들은 옆에 있는 영명학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민족 교육에 전념했다.

  이외에도 1904년 서울 상동(尙洞)교회에서 전덕기(全德基) 목사의 청년 학원(新民會-安昌浩가 주도한 구국 운동 체의 훈련 기관), 도산 안창호의 대성 학교(大成學校, 평양), 이승훈(李昇薰)의 정주 오산 학교(五山學校)를 비롯, 황해도 안악, 평안도 선천, 충청도 한산에 김인전(金仁全)이 설립한 한영 학교(韓英學校) 등 민족을 깨우치는 사학(私學)교육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일본도 시인하고 있었듯이 기독교야말로 ‘是實로 今日의 新敎育制度의 淵源’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 사학이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과 민족 의식을 배양하여 한국 교회의 외부에 펼치려는 목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호남 지방에서도 1903년에 익산군 고내리(益山郡 高內里) 교회에서 학당을 설립하고 교인 자제를 교육했고 뒷날 학부(學部)의 인가를 받아 정식 학교로 설립해 많은 젊은이들을 양성하였다.

  1905년에는 충남 서천군 구동(九洞) 교회와 부안군 대수리(大水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고, 김제군 월성리(月成里) 교회에서는 남학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는 김제군 두정리(豆亭里) 교회에서 용광(鏞光)학교를 설립해 청소년 교육을 실시했다. 1907년 1월, 한국 기독교 역사에 기억될 대부흥운동이 평양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불붙기 시작해 교세가 요원(遼原)의 불길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그해 9월 17일에는 역시 같은 예배당에서 전국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여 미국 남·북장로회와 캐나다 및 호주 장로회 등 네 교파의 선교사들이 합력해 단일 조선예수교장로회(독노회)를 비로소 조직하게 되었다.

  초창기 독노회 안에 전국 각 지역을 나누어 7개 대리회(平北·平南·咸鏡·黃海·京忠·慶尙·全羅)를 조직하니 남장로회 선교부 지역인 전라 대리회 지방 안에서는 각처에 교회와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광양군(光陽郡) 신황리(新黃里) 교회와 장성군(長城郡) 영신(永信) 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하고 1908년에는 보성군(寶城郡) 이만리(貳萬里) 교회에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순천 경내의 교육 사업 전개에 촉진제가 되기도 했다.

  1909년 전주군 삼례 교회에서 영흥(永興)학교를 세웠고 익산군 동련(東蓮) 교회에서는 계동(啓東)소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나주군 방산리(芳山里)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했다. 서문밖 교회에서는 서문 안에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경영이 확실한 기전여학교에 인계했다. 1910년 전주군 제내리(堤內里) 교회는 함녕(咸寧)소학교를 세웠고, 옥구군 구암리(九岩里) 교회와 군산 개복동 교회가 연합해 안락(安樂) 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구암 영명(永明)학교에 인계했다. 같은 해에 화순 대포리(大浦里) 교회에서는 영창(永昌)학교를 세웠다. 1910년 8월 한일 합방조약에 조인함으로 민족적 비운을 겪게 되는 데 기독 교회에서는 전국적으로 100만명 구령운동을 전개하여 각 교회들이 대대적인 전도 운동을 펼쳤다. 이 기간에도 교회는 민족이 배우고 깨어야 산다고 계도하며 각지에서 학교 설립 운동을 계속했다.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의 지방 대리회에 불과했던 교회 조직이 7개 노회(평북·평남·함경·황해·경충·경상·전라)로 확장 개편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전인 1911년 10월 11일에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전라 노회가 창립되었다(노회장 마로덕, 서기 이승두, 회원 목사 13명, 장로 19명). 이와 같이 교회 조직이 확장되자 각 지교회들은 전도와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전국 각처에서 남녀 학교를 계속 설립하며 인재 양육을 도모했는 데 전라 노회 산하 교회에서도 자발적으로 협력하였다.

  1913년 광주군 송정리(松汀里) 교회에서 남선의숙(南鮮義塾)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고 1915년 전주군 삼례(參禮)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永興)학교는 증축 후 교명을 영신(永新)학교로 변경해 일백 명의 학생을 교육했다. 익산군 고현리(古縣里) 교회에서는 여자 소학교를 설립해 50여 명을 교육했고 대붕리(大鵬里) 교회는 부용(芙蓉) 학교를 설립해 많은 학도들을 교육했다. 1916년 광주군 봉선리(鳳仙里) 교회와 장성군 소룡리(小龍里) 교회에서 각기 소학교를 세우고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7년 나주군 삼도리(三道里) 교회에서는 기독교 광명의숙(光明義塾)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2일, 총회 개최지인 경성 승동 예배당에서 임시 전라 노회를 열고 그 동안 전라도의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노회 분립안을 논의한 후 분립 청원을 하니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전라 노회를 전북 노회와 전남 노회로 양분할 것을 결정해 1917년 9월 20일에는 전남노회가 목포 양동 예배당에서 창립되었다(회장 유서백, 서기 김영국, 회원 목사 10명, 장로 13명). 역시 같은 해 10월 10일 전주 서문밖 예배당에서 전북 노회가 창립되었다(회장 이원필, 서기 홍종필, 회원 목사 15명, 장로 20명). 1918년 임실군 옥정리(玉井里) 교회에서는 남·여 소학교를 세워서 가르쳤고 1919년 전주군 고산읍 교회와 김제군 난산(卵山) 교회는 각기 남녀 소학교를 설립해 신자의 자녀 교육을 맡았다. 1920년 정읍군 천원 교회에서는 은성(恩成)소학교를, 임실군 삼길(三吉) 교회에서는 양춘(陽春)소학교를 세우고 경영하다가 경제난으로 한때 문을 닫았으나 이후 유지들의 찬조로 다시 운영할 수 있었다. 1921년 익산군 남전리(南田里) 교회에서는 신성(信成)소학교를 설립해 70여 명의 어린이를 가르쳤고, 1922년 익산군 장등(長登) 교회와 전주군 밀파리(密波里) 교회와 남원군 신풍리(新豊里) 교회도 각기 소학교를 세워서 많은 어린이들을 교육했다. 1923년 전주군 남문밖(南門外) 교회에서도 소학교를 설립해 남학생들을 가르쳤고, 군산 개복동 교회에서도 영신학원(永信學院)을 세우고 보통과 생도 1·2학년 70여 명을 모아 가르쳤다.

  1904년의 선교 보고서에 의하면, 전주·군산·목포 등 세 선교부 내에 각기 남·여 중학교가 하나씩 설립되었고 그 학생 수는 126명이었다. 그러나 3년이 경과한 1907년에는 인가받은 정식 학교가 44개교였고, 학생 수는 497명이며, 3년이 경과한 1910년에는 64개교에 1,740명의 학생 수를 보이고 있다.

  1910년 한일 합방 당시 그 동안 정부 인가의 사립학교 총수는 2,250여 개교였는데 장로회 계통이 501개교, 감리교 계통이 158개교, 가톨릭 계통이 137개교, 기독교 계통이 796개교였다. 이때 교회가 사회 교육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기울여 투자에 힘썼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15년에 조선 총독부가 사립학교 규칙을 제정·발표하고 기독교 교육을 억제하기 위해 단속을 강화함으로 인해 정식으로 인가받은 학교의 설립이 주춤해졌다

 

 

 

 

조선 소요사건의 개황 (4)

 

 

대정 8년 (자 3월 1일 지 6월 30일) 재외 선인의 독립운동 개황
국외에 거주하는 불령선인 등은 조선병합 이래 항시 그 독립 재흥을 몽상하고 제국의 조선 통치를 저주하고 신문·잡지를 발간하여 불온 문사를 게재하고 또 각종 명칭하에 결사 단체를 조직하여 배일사상 고취에 노력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무지 몽매한 무리를 선동·사주하여 망동을 시도하려 함은 종래 누보한 바와 같고, 가까이 강화가 온다는 소리와 함께 윌슨 대통령이 창도한 민족자결의 소리는 그들 불령선인에게 마치 공곡(空谷)의 굉음같은 느낌을 주어, 재미 선인이 상원 외교위원에게 전개한 청원운동을 선구로 조선독립의 소리는 노령·만주 등에 있는 선인간에 불길같이 고창되어 이 시기를 실로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고 각지에서 다투어 대표자를 불국으로 파견하려는 등 각종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운동은 혹은 통신으로 혹은 신문에 의해 빈번히 보도됨으로 해서 민족자결주의는 조만간 조국 부흥의 광명을 가져온다고 기대를 갖게 하여 점차 조선에 있는 선인 지식 계급, 특히 청년배의 사상에 동요를 가져왔다.
때마침 본건 운동자로서 상해 방면에서 유력한 불령선인이 교묘하게 일본·조선으로 잠입하여 하나는 평소 끊임없이 배일적 불온 행동을 함으로써 득의(得意)를 삼는 동경 유학생 등을 선동하여 드디어 본년 2월 그들을 시켜 조선독립을 선언하게 만들고, 다른 하나는 평소 구미 선교사 등의 훈도로 제국보다는 차라리 구미에 의뢰하려는 사상을 지닌 조선내 예수교도를 선동하여 은밀히 모의를 꾀하고 있을 무렵 마침 동시에 천도교도의 수령들은 차제에 조선독립을 꾀하려고 기획, 이를 예수교도에게 교섭을 했으므로 마침내 예수·천도 양교가 협동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전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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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를 야기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금번 소요는 국외 재주 불령선인이 합병 이래 끊임없이 조국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배일 운동에 그 기원을 발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주장에 의해 고조되고 상해 배일 선인의 선동이 그 도화선이 된 것이나 마침내 조선의 소요가 발발하게 되어서는 또 다시 간도 및 노령 방면에 반대로 전파되어 이들 각지에서 역시 소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소요는 점점 확대됨과 동시에 사태는 점차 악화되어 가는 경향을 보였으므로 최근 일본에서 특별히 군대의 증파가 있어 경무관헌과 협력해서 엄중한 경계를 가하게 되었으므로 근간 진정을 보게 된 것이나 이에 반해 국외에서는 종래에 비해 더욱 치열한 망동을 하려는 정세가 있다.
지난번 중국 관헌은 본건 불령선인의 행동에 대해 지방 군대 및 경무관헌에게 취체해주기를 수차 유고하여 그 경방(警防) 취체에 노력하고 또 노국 관헌에게도 의뢰한 결과 표면상 우리 요구에 응하고 있는 듯하나 그 태도는 명료치 못해 격화소양(隔靴搔痒)의 느낌이 적지 않다.
즉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장래 주의를 요할 점은 다시 소요 발발 이전으로 돌아가 조선 내보다는 도리어 선외(鮮外), 그 중에서도 상해·블라디보스토크, 다음에는 간도·미국 등으로 옮겨야 한다고 사료된다.
다음에 3월 1일 조선 소요 이후 국외에서 불령선인이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한 상황을 개설한다.

 

1. 북간도 및 혼춘(琿春) 방면

 

①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는 3월 8일 이래 주요 불령선인 등이 집회하여 각지에서의 운동에 공명하여 크게 기세를 올릴 것을 기도하고 많은 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준비 중이었으나, 동 13일 이 선언서를 발표하고 동시에 용정촌 동북 약 5정 지점에서 학생·기타 다수가 집합하여 용정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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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해 행동을 개시했다.
그 중에서도 부화뇌동한 자를 합해 약 4천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으로 돌입했으므로 중국 보병 단장 맹부덕(孟富德)은 부하를 인솔하고 출동, 이를 제지했으나 응치 않아 드디어 중국 군대는 발포하여 군중에 사자 14명, 부상자 약 30명을 내고 오후 3시 반에 겨우 해산했다.
② 3월 13일
화룡면(和龍面) 동양상리사(東良上里社) 양무정자(養武亭子) 제3국민(國民)학교에서 동교 교사 2명의 지휘하에 생도 40명과 부근 선인 약 3백명이 집합하여 선언서를 배부하고 주된 자가 연설을 하는 행동이 있었다.
③ 3월 13일
연길현(延吉縣) 이도구(二道溝)에서는 선인 남녀 약 7백 명이 집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 축하회를 개최했다.
당일에는 많은 중국인도 조선독립을 축하하기 위해 참가했다고 한다.
④ 3월 16일
연길현(延吉縣) 두도구(頭道溝)에서는 오후 1시부터 한국독립선언회를 개최했는데 회중이 1천여 명에 달해 이들 군중은 상부지(商埠地) 안으로 돌입하려 했으나 중국 경찰의 제지로 할 수 없이 상부지(商埠地) 북쪽밭에서 선언을 발표하고 주된 자 6명이 연설을 하고 동 4시에 해산했다.
⑤ 3월 17일
연길현(延吉縣) 수신사(守信社) 이도구(二道溝) 시장에서 약 4천 명의 선인이 집합하여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해산했으나 군중 중에 동지 예수교도 부인이 혼입하여, 이도구(二道溝) 순경국장 중국인 왕 모의 첩이 선인 부인을 대표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연설을 하려고 했으나 출동 중인 중국 순경에게 제지되어 그 목적을 달성치 못했다고 한다.
⑥ 3월 17일
동녕현(東寧縣) 삼분구(三盆口)에서는 진학신(秦學新)이 주모가 되어 군중 4천이 독립선언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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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3월 18일
간도(間島) 청산리(靑山里)에서는 예수교도·천도교도가 중심이 되어 학생을 합쳐 약 9백의 군중이 독립운동을 했으나 무장한 중국 순경에게 해산되고 구한국기는 전부 압수되었다.
⑧ 3월 20일
혼춘(琿春)에서는 아침부터 중국 군·경이 상당한 경계를 했으나 다수 군중은 경계선을 돌파하고 수모자 수명은 불온 과격한 연설을 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의 행동이 있었으나 오후 1시에 해산했다.
⑨ 3월 23일
연길현(延吉縣) 수산리(壽山里) 동의합(同義合)에 천 수백 명의 선인이 집합 각자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수모자 현규일(玄圭日)·김하범(金河範)이 3월 15일 세계 각국에서 조선독립을 승인했다는 전보가 있었다고 알리고 오후 7시 경에 해산했다.
⑩ 3월 24일
안도현(安圖縣) 관지(關地)에서는 동지 거주 선인 대종교(大倧敎) 신도 약 2백 명이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대축하회를 개최하였다고 한다.
⑪ 3월 25일
화룡현(和龍縣) 사기동(沙器洞)에서도 약 1백50 명의 선인이 나팔을 불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했으나 바로 해산했다고 한다.
⑫ 3월 26일
간도(間島) 국자가(局子街)에서는 독립축하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전일에 동지 부근에 집합한 자 약 2천에 달했는데 중국 군·경 2백여 명이 출동하여 엄중 경계를 가한 점과 한편 수모자 간에 내분이 생겨 중지했다고 한다.
⑬ 3월 26일
정오 경 왕청현(汪淸縣) 백초구(百草溝) 지방에서 선인 약 1천여 명의 군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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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 모여 각자 태극기를 흔들며 한국의 독립선언축하회를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연호하고 또 3명의 연설이 있었으나 하등 소요없이 오후 3시에 해산했다.
⑭ 3월 27일
안도현(安圖縣)에서는 선인 약 4백 명이 집합하여 독립선언축하회를 거행했다.
⑮ 3월 28일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에서 선인 약 천 명이 집합, 독립선언축하회를 거행했다.

 

⑯ 3월 28일
연길현(延吉縣) 수신사(守信社) 구사평(九沙坪)에서 혼춘(琿春) 이남 장족등(獐足登)·금당촌(金塘村)·초소미(初沼尾)·연화동(蓮花洞)·육도포자(六道泡子)·왕천동(王泉洞)·흑정자(黑頂子) 각 학교 교사·생도 및 동 지방 선인 등 약 4천 명이 집합하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이때 수모자인 혼춘 거주 천도교 주무 이하영(李河英)은,
“우리 2천만 동포가 10년 전에 일본에게 병합을 당하고 오늘까지 굴욕적인 압박에 견딜 수 없어 타국으로 유랑하며 신고 간난을 맛보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번 불국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 씨가 제창한 자결주의에 따라 마침내 보국(保國)된 것은 각자의 애국심이 왕성했기 때문이다. 운운”
하고 연설을 하자 일반 집회자는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이어 수 명이 번갈아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데 대해 역시 군중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끝났다.
이 성대한 선언식을 크게 두만강을 격한 모국 동포에게 보일 필요가 있다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계속 부르며 강안을 행진, 오후 4시에 산회했다.
⑰ 3월 28일
화룡현(和龍縣) 태랍자(太拉子)에서도 선언서를 발표하고 운동을 할 예정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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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헌의 금지로 중지하게 되었다.
⑱ 3월 29일
화룡현(和龍縣) 선화사(善化社) 강장동(江長洞)에서는 동 사장 최석규(崔錫圭)가 수모자가 되어 약 백 명의 부락민을 집합시키고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했다.
⑲ 3월 30일
혼춘현(琿春縣) 한덕자(漢德子)에서 황병길(黃丙吉)은 동지 선인 수십 명을 모아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하고 또 동포는 널리 예수교도가 될 것을 권유한 후 한국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해산했다.
⑳ 3월 30일
왕청현(汪淸縣) 굴륭산(屈窿山) 함북 유원진(柔遠鎭) 대안에서는 선인 약 3백 명이 한국 기를 흔들며 시위운동을 했다.
4월 1일
혼춘현(琿春縣) 타도구(他道溝)에서는 황병길(黃丙吉)이 수모가 되어 그중 약 2천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했다. 또 샤타이진구에서도 같은 운동이 있었다.
4월 4일
연길현(延吉縣) 화전자(樺田子)에서 선인 1천 5백여 명이 집합,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했는데 수 명의 연설이 있은 후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4월 6일
연길현(延吉縣) 평강(平崗) 상리사(上里社) 삼도구(三道溝) 전심호(轉心湖)예수교학교 내에서 부근 각 촌 유력자 30여 명 및 동교 생도 40여명이 모여 독립 문제에 관한 협의회를 열었는데 석상에서 동교 교사 정명수(鄭明洙)는 하기 요령의 연설을 하여 찬성을 얻었다.
㉮ 집합의 유력자는 그 동민을 권유하여 가급적 많은 인원을 독립운동에 진력시킬 것.
㉯ 일본영사관에 수원류의 제출을 엄금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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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사관에서 본 운동에 관해 선인을 체포하려고 할 때는 폭력으로 저항할 것.
㉱ 기부금을 모집할 때 이에 응하지 않으면 안될 것.
㉲ 집회의 유력자는 ≪조선독립신문≫ 기사를 촌민에게 주지시킬 것.
㉳ 각자의 신분을 모르는 여객에 대해서는 본 운동에 관한 비밀을 절대로 엄수할 것.
4월 9일
혼춘현(琿春縣) 구사평(九沙坪) 거주 선인 이갑장(李甲長)의 환갑제에 근향(近鄕)에서 약 2백 명의 불령선인이 집합하여 취기가 돌자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하여 완연 독립제와 같은 느낌을 주었으나 저녁에 해산했다.
4월 12일
간도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서 명동예수교 직원·생도를 중심으로 조직한 충렬 대원(忠烈隊員) 등 2백여 명은 당일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운동을 하려고 약 30명이 용정촌 시장으로 돌입하여 많은 민중에게 시위운동 참가를 권유하고 또 다른 자는 시장에서 약 8정 쯤 떨어진 곳인 토성포(土城浦)에 잠복하여 시장에서 예기한 바와 같이 시위운동을 개시하게 되면 이에 응해 일제히 기세를 올려 시장으로 침입할 계획으로 오후 4시를 기해 일을 거사하려고 했으나 시장을 취체하는 제국영사관 순사 및 중국 순경이 함께 수모자 6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4월 24일
함경북도 방원진(防垣鎭)헌병주재소 헌병보조원 김규환(金奎煥)은 대안 상황 시찰을 겸해 물자 구입차 사복으로 화룡현(和龍縣) 호천가(湖川街)에 출장하였던바 동지 정동학교 생도 10수 명이 일본의 개라고 욕하며 포승으로 포박을 한 후 동교로 인치하여 천장에 매달고 혹은 구타를 가해 일시 인사불성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3일 동안 동교 내에 감금하고 매일 반복해서 폭행을 가하는 것을 부근 선인이 이를 발견하고 중국 순경국에 급보했으므로 순경 수 명이 출장하여 관계자와 함께 동국으로 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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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한 다음 화룡현(和龍縣) 서(署)로 호송했으므로 곧 제국영사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동 29일 피해 보조원을 인수, 용정병원에 입원시켰다.
4월 24일~26일
3일간 혼춘 한탑도구(韓塔道溝)에서 이동휘(李東輝)·이범윤(李範允) 및 진학신(秦學新) 등 불령 도배가 회합하여 하기와 같은 결의를 했다.
㉮ 조선 침입 운동은 불국에 파견한 대표자의 전보를 기다려 만약 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운동은 일부 선인의 망동이라고 상대를 하지 않을 때 곧 결행할 것.
㉯ 위 행동은 집정관인 이동휘(李東輝)의 명령에 의해 각 방면에서 동시에 결행할 것.
㉰ 조선 내지의 동지와 연락하고, 일본측 밀정을 암살할 것.
㉱ 운동비 및 대원 모집에 힘쓸 것.
5월 3일
오후 11시 간도 용정촌 동양척식회사 소유 건물(전 경찰관 관사)에서 불이 나 건물 1동이 전소되고 동 4일 오전 3시 반 제국총영사관 접속 건물(구제회 사무소 및 숙직실·소사실로 사용하는 것)에서 불이 나 동 접속 건물은 전소하고 구제회 서류의 대부분도 오유(烏有)로 돌아갔는데 그 원인은 양자가 다 충렬대원의 방화인 듯하다.
5월 14일
함경북도 회령(會寧)을 출발하여 간도 용정촌으로 향한 천보산 거주 일인 모는 화룡현 권학성(勸鶴城)에서 곤봉을 소지한 약 20명의 선인 학생에게 폭행을 당할 번했으나 도주, 겨우 난을 면했다.
5월 14일
동일 밤, 화룡현 태랍자(太拉子) 남세극(南世極) 방에서 마진(馬晉)·유하천(柳河天) 등 불령선인 10여 명이 회합하여 하기와 같은 결의를 했다.
㉮ 국민의회 간도지부 보조기관으로 간도에 ‘신국민단’을 조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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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국민단에 단장 및 자치위원을 두고 간도 재주 한민족 간의 계쟁사건은 자치위원이 조사한 다음 중재할 것.
단, 중대 사건 혹은 관헌의 재판을 요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는 이를 중국 관헌에게 소송을 제출하고 일체 일본 관헌에게는 소송하지 말 것.
㉰ 자치위원은 간도 각지의 유력자 중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자에게 맡긴다.
㉱ 신국민단장 이하 각 위원에게는 국민의회 간도지부에서 위임장을 교부할 것.
㉲ 자치위원은 언제나 담당 관내를 순시하여 계쟁사건을 일본 관헌에게 제소하는 것을 금하고 공평하게 이를 중재할 것.
이상의 결의를 하고 단장에 마진(馬晉)을 추대했다.
5월 17일
국민의회 간도지부장 구춘선(具春先) 이하 간부 20명은 명동학교에 집합하여 한족 독립의 선전·기부금 모집·일본측 밀정의 암살·선인 관리의 사직 권고 및 선인 거류민회의 해산 권고 방법 등을 결의했다.
5월 18일
함경북도 경성군 행영(行營)에 거주하는 김 모 등 3명은 상용으로 화룡현 학성(鶴城)에 이르렀을 때, 동지 학성학교 생도 8명에게 취조를 받고 구타당했다.
5월 18일
동일 중국령 혼춘에서 주소·성명 미상의 일본인 1명, 선인 2명은 동지 불령선인에게 권총으로 사살되었다.
5월 18일
조선내지침입군선발대라 자칭하는 대장 조응순(趙應順)은 부하 18명을 이끌고 두도구(頭道溝) 방면에서 간도 동량사(東梁社) 이수동(利樹洞)에 내려와 일박 후 19일 하광포(下廣浦) 방면으로 향했다고 한다.
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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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를 휴대한 사냥군 풍의 선인 41명은 간도 덕화사(德化社) 맹가동(孟哥洞)을 거쳐 안도현 방면으로 향했다고 한다.
5월 18일
오후 3시 경 학생 풍의 선인 약 1백50명의 일단이 태극기 세 개를 들고 왕청현 방면에서 함경북도 온성 대안 양수천자(凉水泉子)로 와서 약 2시간 휴계 후 혼춘 방면으로 출발했다.
5월 19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유성에 거주하는 최원일(崔元一)이란 자가 일이 있어 간도 용정촌으로 여행하고 귀도 중 사무사(四茂社) 3둔에서 일본의 밀정으로 몰려 불령선인 8명에게 구타·조사를 받았다.
5월 20일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셍코오사(□□社)에서 다수의 중·선인이 회합하여 산동 문제와 한족 독립운동을 관련시켜 격렬한 연설을 했다.
5월 20일
동일 밤, 간도 용정촌(龍井村) 조선인민회 이희덕(李熙悳)은 용정촌 예수병원 부근에서 독립운동 간부 수명 및 명동학교 생도 약 20명에게 폭행을 당하고 납치되어 동교에 감금 중 협박을 받고 동 인민회 해산 선고문에 날인을 강요당했는데 그들 불령 도배는 그 선고문을 동 지방에 배부했다.
5월 30일
화룡현(和龍縣) 태랍자 명동학교 생도라 자칭하는 청년 약 30명은 합화사(合化社) 남평도 예수교도의 집에 분숙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불온 언동을 하고 있었다.
또 동교 생도 10여 명은 그 후 사무사(四茂社) 대종교교도의 집에 잠복하여 무엇인가를 모의하고 또 그들은 회령·용정촌 간의 전선을 절단하고 일본인 통행자, 특히 우편배달부를 살해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불온문서의 배부
간도 방면의 불령선인은 ≪우리소식≫이라는 다음과 같은 불온문서를 배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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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선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원년 6월 1일
5월 31일 파리발 전보
파리강화회의에서 우리의 외교총장 김규식(金奎植) 씨가 대한민국 전권대사임을 승인한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우리들의 외교총장인 김규식 씨를 완전한 우리 전권대사로서 승인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사정을 회의 석상에서 발표할 발언권을 주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만세!’
도문강 방면에서의 독립선언시위운동과 비밀 결사
㉮ 건국회(建國會)
혼춘에서 황병길(黃丙吉)·박치환(朴致煥) 등 2명이 수모자가 되어 조직한 것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 25만류(留)를 모집하고 무기 3백 정을 모을 것을 기획하고 있다.
㉯ 충렬대(忠烈隊)
화룡현 태랍자 명동학교 및 정동학교 직원·생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대원 1백 20명에 달하고, 현재는 김학수(金學洙)가 수령이다.
동대는 본년 1월 길림에서 중국인의 배일단인 백룡단(白龍團)에게서 기관총 1정을 구입, 은닉하고 있다고 한다.
3월 13일 용정촌에서 일으켰던 시위운동에는 전원이 이에 참가하고 그 과반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3월 31일, 간도제국총령사관경찰서에서는 강진우(姜鎭宇)란 자를 잡아 취조했을 때 다음과 같은 사령을 소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진우
충렬대 제2연대 부단장으로 명함
연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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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운동 충렬대 법무부 사령부

 

㉰ 자위단(自衛團)
재 국자가(局子街) 중국도립중학교 선인 학생 및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단원 1천 1백여 명에 달하고 현재의 단장은 최경호(崔經浩)이다.
동 단은 5연발 총 40여 정을 감추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3월 13일 용정촌에서 있었던 시위운동 때 동 단원 중 권총을 소지하고 있는 자가 30여 명이 있어, 당일 중국군대가 발포하자 이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동 운동 수모자가 이를 제지한 사실이 있다.
㉱ 조선국민의사회(朝鮮國民議事會)
간도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서 전 미국 유학생 김영학(金永學)이란 자가 회장이 되어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며 극력 민심 선동에 활약하고 있다.
㉲ 대한독립기성총회
간도 연길현 국가가 갑만자(甲滿子)에 본부를 두고 장래 분·지회를 각지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총회 아래에 다음과 같은 6부를 두고 역원을 정했다.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마진(馬晉)
의사부원유예균(劉禮均)김병흡(金秉洽)
최원일(崔元一)고용환(高龍煥)
배형식(裵亨湜)강구우(姜九禹)
이태현(李台峴)이봉우(李鳳雨)
김순문(金舜文)김약연(金躍淵)
김명덕(金明德)정재면(鄭載冕)
김신근(金信根)최문익(崔文益)
박정훈(朴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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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원
유찬희(柳讚熙)서성권(徐成權)장협함(張夾咸)
교섭원장
고용환(高容煥)배형식(裵亨湜)
편집부원
유하천(柳河天)최기학(崔起鶴)
김정(金精)
통신부원
이홍준(李弘俊)강백규(姜伯奎)
김상호(金尙浩)
경위부원
박정훈(朴貞勳)최웅렬(崔雄烈)
이춘성(李春成)장우순(張禹純)
㉳ 자유공단(自由公團)
재 국자가 대종교도들의 비밀 결사로 단원이 1만 5천인에 달하고 현재 단장은 대종교 동도 사교직에 있는 서일(徐一)이다.
동단은 금후의 독립 계획에 필요한 비용으로 단원에게 1원 씩 징수하고 있다고 한다.
㉴ 독립운동의사부(獨立運動議事部)
왕청현 나자구(羅子溝) 방면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중앙기관으로서 조직된 것으로 그 역원 중 판명된 것은 다음과 같다.
부장 김종식(金宗植)
재무 겸 총무 박창준(朴昌俊)
간사 남영화(南永化)·김낙여(金洛汝)
평의원 김여운(金汝雲)·최정국(崔正國)·김천보(金天甫)
서기 이성렬(李成烈)
재무원 오백여(吳伯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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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국민의회지부(大韓國民議會支部)
간도 용정촌 카나다예수장로교회에 속하는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혼춘현 춘화경(春化卿) 남별리(南別里)에 있고 그 역원은 다음과 같다.
회장 이명순(李明淳)
부회장 박관일(朴貫一)
총무 서윤묵(徐允黙)
부재무 오현경(吳玄京)
서기 여남섭(呂南燮)
오종환(吳宗煥)
지방연락계장
나정화(羅正化)
교섭계
황병길(黃丙吉)·나정화(羅正化)
(단, 거사를 할 때 단체의 지휘장은 황병길에게 일임하게 되어 있다.)

 

㉶ 맹호단(猛虎團)
명동·정동 양 학교 생도 기타 사립학교 생도 및 노령에서 간도로 온 20세 이상의 과격한 청년으로 조직된 것으로 단장에 소영자(小營子) 광성(光成)학교 교사 김상호(金商鎬)를 추대하고 용정촌 국자가 및 두도구 부근에 그 기관을 설치하고 1개소마다 10수 명의 단원이 있어 각자 권총을 소지하고 있다. 그 목적은 일본측 건물 및 관사에 대해 방화할 것, 일본측 선인 관리의 사직 권고 및 협박, 자산이 있는 선인에 대한 기부금 강요 등이다.
지난 5월 2일, 용정촌 총령사관건물(구제회[救濟會] 관리) 및 5월 4일 총령사관 본관 접속 건물의 발화 소실 및 총령사관 경부 현시운(玄時運)·순사 안인종(安仁鍾)·조복환(趙複煥) 등에 대해 협박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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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고 혹은 권총으로 위협한 것은 다 본 단원의 등의 소행이다.
간도 지방에서 발행된 불온 안쇄물
지난 독립운동에 관해 각지에서 각종 불온 인쇄물을 발행했는데 오늘까지 발견된 것은 연길현 용정촌에서 유하천(柳河天)이 집필한 ≪조선독립신문≫, 동인이 편집한 동청촌(東靑村)의 ≪일민신문(一民新聞)≫, 이홍준(李弘俊)이 만들었다는 ≪우리들의 편지≫, 명동학교의 ≪자유의 종≫ 및 두도구 지방에서 발행된 ≪태극기≫ 등으로 어느 것이나 활발하게 각지에 배부되었다.

 

2. 서간도 지방
① 3월 12일
통화현(通化縣) 김두화락(金斗伙落) 예수교회에서 동 교도 및 기타 선인 약 4백 명이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시위 행동을 했다.
이때 동지 이주 선인 계성주(桂成柱)를 일본 관헌의 밀정이라 칭하고 포박, 3일 후 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지 선인청년회원(동회는 이전부터 조직되어 회원 4백 명이 있다)은 독립운동비라 칭하고 이주 선인에게서 금품을 강징하고 있었으므로 중국 관헌에서는 순경을 각지에 파견하여 태극기를 압수하고 수모자를 취조하고 있다고 한다.
② 3월 12일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는 약 2백 명이 집합, 만세를 고창하고, 선인예수교 목사 등 수 명은 독립에 관한 연설을 했다고 한다.
③ 3월 16일
정오 장백현(長白縣)에서는 선인 천도교도 약 30명이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동지에 주재하는 우리 헌병(상등병 이하 8명)을 습격했으나 미리 중국 관헌과 연락을 취하고 평안북도 혜산진에서 헌병을 부원(赴援)시켜 수모자 3명을 검속하고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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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3월 17일
유하현(柳河縣) 대사탄 보흥학교에 선인 남녀 약 5백 명이 집합하여 한국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했다.
⑤ 3월 17일
오후 7시부터 장백가(長白街) 이창운(李昌云) 방에서 장백현 재주 예수교도 및 각 구 면장 기타 유력 선인 약 30여 명이 집합, 밀의하는 것을 중국 관헌이 해산시켰다.
⑥ 3월 21일
오후 1시경 즙안현(輯安縣) 양자교자(楊子橋子)에 거주하는 선인 이영철(李永哲)·임임풍(林任豊) 등이 주모가 되어 부근 예수교도 약 70명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했다.
⑦ 3월 21일
동현 비채원자(菲菜圓子)에 거주하는 부민단(扶民團)이 수모가 되어 부근 예수교도 및 기타 선인 약 1백 명이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⑧ 3월 21일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 이주 선인 약 4백 명은 의용단이란 것을 조직하고 예수교회당에 집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고창하는 것을 중국 관헌이 해산을 명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발포하여 단원 중 즉사 9명을 내고 겨우 해산했다.
⑨ 3월 22일
유하현 대사탄(大沙灘) 선인 학교에서 다수 선인이 집합하여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했으나 중국 관헌에 의해 해산되었다.
⑩ 3월 23일
환인현(桓仁縣)에서는 병기를 소지한 선인 폭민 약 4백 명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 것을 동현 지사는 병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⑪ 3월 25일
오후 3시 경 즙안현 치화보(致和堡) 대회구(大檜溝)에 거주하는 천도교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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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익(金忠益)이 수모가 되어 천도교도 약 60명을 모아 태극기 및 천도교 궁을기(弓乙旗)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행렬을 지어 시가로 들어오려고 할 때 중국 관헌에게 제지되어 해산했다.
⑫ 임강현(臨江縣) 모아산(帽兒山) 부근에서는 하기와 같은 선언서를 배부하고 극력 선동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독립선언서]
우리는 이에 조선의 독립, 조선인의 자유를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려 인류 평등의 대의를 복명(復命)하고 이로써 자손만대에 전해 민족자존의 정권을 갖게 한다.
발기인 한규설(韓圭卨) 곽종석(郭宗錫) 전우(田愚)
최린(崔麟) 윤용구(尹用求) 손병희(孫秉熙)
오세창(吳世昌)
⑬ 3월 29일
임강현(臨江縣) 팔도구(八道溝)에 2백 명의 한인이 집합하여 시위운동을 시작 하려고 하다가 중국 관헌에게 해산을 명령받았으나 동 30일 오전 11시 재차 동지 선인학교에 약 3백 명이 집합하여 구한국기를 내걸고 만세를 고창하는 등 불온 정세에 있으므로 중국 관헌이 이를 해산시켰다.
⑭ 3월 31일
오전 11시 경 즙안현 충화보(沖和堡) 소양분(小陽岔) 서변(西邊) 하계(下界) 천도교교구장 김여식(金呂植) 및 교도 1백 20여 명은 대양분(大陽岔) 보갑국(保甲局) 부근에 집합,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다시 외분구(外岔溝) 시가로 들어가 오후 2시 경 각자 태극기 및 불온 문자를 기입한 기를 손에 들고 시내를 행진하려고 하는 것을 중국 관헌이 제지하고 해산시켰다.
⑮ 3월 31일
정오, 즙안현 태평구(太平溝) 뇌석분(磊石岔) 예수교회당 앞에 태극기를 교차하여 세우고 동지 예수교 목사 백시완(白時完)이 주모자가 되어 동 교도 및 천도교도 약 4백 명이 집합,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부근을 행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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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을 중국 관헌이 출장 제지하여 오후 5시에 겨우 해산했다.

 

⑯ 4월 1일
관전현(寬甸縣) 소불태원(小不太遠)에서 부근 재주 선인 약 1백 명이 집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동지 선인조합지부로 쇄도, 지부장 이찬봉(李燦奉)에게,
“너희들은 이미 조선이 독립한 오늘까지 일본 관헌 보호하에서 생긴 조합 사무를 취급하고 있는 것은 극히 괘씸하다. 곧 중지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
고 협박하므로 이찬봉은 그 오해를 타일렀으나 듣지 않고 각자 휴대했던 곤봉을 휘두르며 더욱 폭행을 가해 이찬봉 및 지부 평의원 이봉규(李鳳奎)를 포박, 난타한 후 혼강에 투입하려 했고 또 지부에 비치된 민적보를 꺼내 인민에게 분급하고 있을 때, 중국 관헌이 나타나 극력 이를 제지하고 해산시켰다.
⑰ 4월 2일
해룡현(海龍縣) 대황구(大荒溝) 예수교회당에 약 3백 명의 선인이 집합하여 유하현 삼계포(三係浦) 부민단(扶民團)의 통지로 총기 구입비 지출을 협의하고 각자가 응분의 갹출을 했다고 한다.
⑱ 4월 3일
즙안현(輯安縣) 서취보(西聚堡) 화전자(花甸子)에 거주하는 예수교도 최석준(崔錫俊)·이상근(李尙根) 외 6명은 치화보(致和堡) 쌍분하(双盆河) 전준걸(田俊杰) 방에 이르러,
“이번, 한국은 독립했으므로 우리 이주 선인은 한족회를 조직해서 단결을 꾀할 계획이므로 가입하기 바란다.”
고 하고, 부근 선인 20여 명을 동가로 집합시키고 가입하기를 권유한 다음 독립만세를 연호하고 떠났다고 한다.
⑲ 4월 8일
천도교도 약 2백 명은 즙안현 통구(通溝)에 있는 선인조합총지부를 습격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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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으로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동현 마선구(麻線溝)를 거쳐 통구로 향하려는 것을 중국 관헌이 저지 해산시키고 수모자 5명을 통구로 연행, 영사관경찰주재소 순사가 이를 설유한 다음 석방했다.
⑳ 4월 8일
오후 5시부터 장백현 제1정몽(正蒙)학교생 25명은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장백 시중을 행진하고 있는 것을 중국 관헌이 해산시켰다.
(21) 4월 10일
장백현 거주 유일우(劉一優)·이창운(李昌云)·김병윤(金秉潤) 등이 수모가 되어 천도교도·예수교도 및 학교 생도 등 약 70명은 함경남도 혜산진 상류 보혜면(普惠面) 송봉리(松峰里)에서 조선 내지의 동지와 합세하여 혜산진으로 침입하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안을 왕래했으나 우리 관헌의 경계가 엄중하여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22) 4월 10일
오후 4시 관전현 대소불태원(大小不太遠) 및 하루하(下漏河) 부근 선인 약 3백 명은 석주자(石柱子)에 집합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일시 불온 상태였으나 저녁이 되자 자연 해산했다.
(23) 4월 10일
환인현(桓仁縣) 상루하(上漏河) 이도양분(二道陽盆) 환동(桓東) 학교에서 곽종석(郭鍾錫)이 수모가 되어 부근 동지 백여 명을 모아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24) 4월 12일
즙안현 피조구(皮條溝) 제7구장 김낙구(金珞九)는 선인 2백여 명을 집합시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해산했다.
(25) 4월 17일
동현 제9구장 최석(崔錫), 제8구장 이창덕(李昌德) 등이 발기인이 되어 홍석뢰자(紅石磊子)에서 이주 선인 약 4백 명이 집합하여 한국 독립만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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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하고 해산했다.
(26) 4월 18일
오후 2시 경 즙안현 상화보(祥和堡) 이주 선인 약 2백 명은 추피구(楸皮溝)에 집합하여 구한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강안을 행진하였으나 동 3시 경 중국 관헌에 의해 해산되었다.
(27) 동삼성 한족생계회의 수령 정안립(鄭安立)·여준(呂準) 등은 조선독립의 대계획을 세우고 남만주 선인의 청원서를 만들어 길림성 맹독군(孟督軍)에 청해, 중국 정부의 손을 거쳐 공식으로 만국강화회의에 조선독립승인안을 제출하려고 동삼성 각 현 선인에게 격문을 보냈다고 한다.
(28) 4월 19일
즙안현 입자구(砬子溝) 제6 구장 김길보(金吉甫)는 동지 선인 2백 50여 명을 집합시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해산했다.
(29) 4월 19일
동현 고마령(古馬嶺) 대양분(大陽盆)에서 제10구장 김정준(金廷俊)은 동지 선인 약 3백 명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즉일 해산했다.
(30) 4월 19일
오후 4시 경 즙안현 마제구(馬蹄溝) 부근에서 불령선인 약 7백 명이 집합하여 선내 침입을 협의 중 중국 순경에 의해 해산되었다.
(31) 4월 20일
오전 7시 경 즙안현 외분구(外盆溝) 하류(下流) 5정 거리에 있는 강안 수목에 많은 구한국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을 평안북도 운해천(雲海川)헌병주재소원이 발견하고 중국 관헌에게 통고하여 철거시켰다.
(32) 4월 20일
즙안현 횡부자구(橫浮子溝)에서 제11 구장 김하룡(金河龍)은 선인 3백명을 집합시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동일 해산했다.
(33) 4월 22일
동현 노채지(老菜地) 거주 선인 수 명은 제6 구장 김형진(金亨珍) 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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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러 한국독립단원 중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 자는 독립단의 반대자이므로 암살을 해야 한다고 협박하고 있으므로 당 지방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하며 선인 약 백 명을 집합시켜 함께 태양분으로 향하는 도중 중국 백가장(百家莊)에게 저지당했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수모자로 인정되는 선인 7명을 체포, 중국 관헌에게 압송하려 했으나 구장 김형진(金亨珍)의 애원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34) 관전현 석주자(石柱子)의 불령선인 이만희(李萬熙)·김정록(金貞祿) 등이 수모자가 되어 하기와 같이 맹약을 하고 각자 날인을 하고 다시 날을 기해 다수를 모아 독립운동을 개시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 일본헌병의 밀정은 발견하는대로 살해할 것, 또 이들 밀정을 숙박시킨 자도 같이 살해할 것.
㉯ 금후 여하한 경우를 막론하고 소집 통지를 받았을 때는 신속히 집합하여 누구나 생사를 같이 할 것.
(35) 5월 4일
통화 지방에서 잠입한 불령선인 20명은 즙안현 유수림자 조선인조합지부 사무실을 파괴할 목적으로 동지로 쇄도했으나 중국순경에게 저지당해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고 한다.
(36) 6월 1일
즙안현 충화보(沖和堡) 외분구(外盆溝) 거주 일본인 매약상 신미길차랑(新美吉次郞)은 약간의 약품을 중국인에게 휴대시키고 행상을 위해 통화 방면으로 여행도중, 쌍분하(雙岔河)에서 불령선인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고 중국 관헌의 보호를 받고 있다.
(37) 6월 7일
평안북도 중강진(中江鎭)분대 보조원 김광추(金光秋)는 하기와 같은 협박문을 받았다.
[협박문]
성은 김이요, 이름은 광추라는 인물은 일본인의 개가 되어 각종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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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하고 있다. 너도 한국인이 아닌가. 지금 모든 한국인은 침식을 잃고 너를 원망하고 있다.
다행히 정신이 있다면 중국 두도구의 변창근(邊昌根)에게로 오라. 먹여도 주고 생명도 보호해 주겠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너의 가족은 몰살을 당하고 집은 불타 없어질 것이다. 깊이 고려하라.
원년 6월 2일
조천순(趙川洵)
변창근(邊昌根)
(38) 서간도 방면에서 독립운동기관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를 보면,
㉮ 부민회(扶民會)
관전현 불태원 지방에 거주하는 불령선인이 조직한 것으로 목하 회원 약 4백 명이 있고 하기와 같은 회칙을 설정하고 독립운동비 모집에 분주하고 있다.
[부민회 회칙]
1. 본회는 부민회라 칭하고 사무소를 관전현 불태원 자배구(自背溝) 김우영(金羽英) 방에 둔다.
2. 회원으로서 동 집회에 출석치 않을 경우에는 그 이유를 신고해야 한다.
3. 통상회는 1월 30일 및 8월 30일의 2회로 정한다.
4. 회장 및 기타 역원은 회원의 선거에 의해 이를 정한다.
5. 회비는 상회(常會) 때 지출해야 한다.
6. 회원 중 중죄를 범했을 때는 각 역원은 이를 심사하여 본회에 제출한 다음 합의 처분할 것.
7. 필요 사항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임시회를 연다.
8. 회원 중에 불법한 자가 있을 때는 상당한 처벌을 가하기로 한다.
9. 일본 관리가 침입했을 때는 회원은 일제히 집합, 처분하기로 한다.
10. 우리들 동포는 서로 구조하며 생사를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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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본 관헌의 밀정을 발견하면 본회에 급보하고 또는 급속 처분으로서 살해할 것.

 

 

㉯ 일심회(一心會)(또는 의병단이라고도 함)
무송현(撫松縣) 동강(東崗)에서 배일 선인 이만오(李晩吾) 등이 조직한 비밀단체로서 회원이 약 5백 명에 달하며, 통화 방면의 동지와 호응해서 일거에 선지(鮮地)를 찔러 왜노를 추방하고 목적이 달성되는 날에는 의병 응모자는 현관으로 등용한다는 등 낭설을 유포하여 활발하게 회원을 모집 중이라고 한다.
㉰ 독립단(獨立團)
(일명 ‘남만주대한독립단’이라고도 칭함)
본부를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 두고 각지에 지부를 배치하고 항상 배일행동을 감행하던 부민단이 개칭한 것으로 일본측의 지도하에 설치된 조선인조합 각 지부를 협박하여 단원으로 가입시키고 특히 금번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서간도 지방에서 가장 유력한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 한족회군정부(韓族會軍政府)(부민단의 별칭인 듯)
4월 초순 본회에서는 회원 중 유위한 청년에 대해 군사적 훈련을 시켜 일을 꾸밀 준비를 하는 한편, 유하(柳河)에 있는 삼팔긍자신계(三八亘自新契)와 합병하여 전적으로 군사만을 맡는 군정부를 조직하여 이를 한족회에 예속시키고 그 본부를 유하현 고산자(孤山子)에 두었다고 한다.
㉲ 의군강습소(義軍講習所)
화전현에서 조직된 것으로 선인 농민 중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장정 약 4백 명을 강제 모집하여 매일 병식 훈련을 하고 있다. 교관은 강응호(姜應浩)·김문삼(金文三) 등 2명이고 경비는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 독립단(獨立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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즙안현 융화보(融和堡) 주청구(朱淸溝) 거주 한응창(韓應昌) 방에서 부근 선인 약 80명이 회합하여 독립단을 조직할 것을 협의했는데 단원이 약 2백 명으로 그 역원은 다음과 같다.
총무장 최영섭(崔永涉)
검찰원 김창원(金昌元)
황삼수(黃三守)
이창익(李昌益)
통신원 한응칠(韓應七)
박응제(朴應濟)
허경준(許京俊)
교섭원 최준원(崔俊源)
한국보(韓國寶)
송이봉(宋伊鳳)
감독 최진섭(崔珍涉)
차정집(車正輯)
김창수(金昌洙)

 

3. 포조방면(浦潮方面)

 

① 3월 15일
포조(浦潮)에서는 시위운동을 하려고 각종 준비를 하였으나 계엄령이 시행되고 있는 곳이라 반드시 엄중한 압박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또 최근 노국 관헌이 신한촌민회(新韓村民會)의 폐쇄를 명하고, 또 이번에 그들은 노국 요새 사령관에게 시위운동 및 각 국 영사관에 선언서를 배부할 것을 출원하자 동관은 집회는 전연 이를 허락치 않고, 기타 국교를 해칠 염려가 있는 행동은 일체 이를 엄금한다고 명령했으므로 드디어 그 실행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일 오후 4시 포조영사관에 노문(露文) 및 언문으로 된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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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서 배부한 것과 대동소이)를 제국정부에 전달을 청하는 뜻의 문서와 함께 내놓고 간 2명의 선인이 있었고, 이어 오후 5시 신한촌에서는 각 호 일제히 태극기를 게양하고 국민의회장 문창범(文昌範)은 각 국 영사와 노국 관헌에게 선언서를 배부하고, 오후 6시부터 학생 등이 수대의 자동차에 분승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중을 행진했으므로 노국 관헌은 이들 운동을 금지하고 학생 2명을 구속하고 신한촌의 태극기를 전부 내리게 했다.
② 3월 15일
니콜리스크에서도 동일 아침 선언서를 내고 많은 선인이 집합, 운동을 했다.
③ 3월 18일
스바스코에에서 약 5백 명의 선인이 집합하여 선언서를 배부하고 시위운동을 했으므로 우리 파견 군대는 노국 관헌을 원조하여 이를 해산시켰으나 선인 수 명이 부상을 당했다.
④ 3월 21일
라즈드리노에에서 약 3백 명의 선인이 집합하여 우리 군대를 습격할 정세가 있었으나 노국 민병이 이를 해산시켰다.
⑤ 3월 26일
포조 김치보(金致寶) 방에서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을 조직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46세 이상 70세까지의 노인은 차제에 독립운동에 분주한 청년에게 다대한 성원을 주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단장에 김치보(金致寶) 이사에 홍범도(洪範道)·유상돈(劉尙敦) 등 16명을 선거하고 회원을 모집 중이다.
⑥ 3월 27일
하바로프스크 청년 회장 오성묵(吳成黙)은 라즈드리노에로 와서 동지 한족회 사무실에 선인 청년 30여 명을 모아 놓고 결사대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자 많은 가입자가 있어 약 4백 명에 달해 그들 일령(一令)하에 곧 응소하겠다고 서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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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4월 3일
함경북도 토리(土里) 대안 녹도(鹿島) 노어(露語)학교 생도 및 부형 기타 유력자 약 40명은 동교에 집합하여 연추(煙秋)선인자치단에서 조선독립선언식을 거행할 것을 통지받았으므로 그 실행 방법을 협의했다.
⑧ 4월 7일
도문강 대안 노령 녹도에서는 포조 지방에서 불령선인이 들어와 각 부락의 유력자 및 학교에 선언서를 배부하고 독립운동을 권유하여 동지에 거주하는 선인은 누구나 태극기를 내걸고 크게 기세를 올렸다.
그 중 학생들은 열광적 태도로 분주했고, 중국령 방천동(防川洞) 서당 교사는 약 30명의 생도를 지휘하여 나팔을 불고 만세를 고창하며 집합하여 오후 3시경에 이르러 동소 고지(高地)에 약 천 명이 군집하여 한국 독립만세를 부른 후 해산했다.
⑨ 4월 18일
오전 2시 경 포조 신한촌 강준수(姜俊秀) 집에 10수 명의 불령선인이 난입하여 등화를 꺼 암흑으로 만든 다음 동인을 민회로 납치하여 일본의 밀정이라 책하고 폭행을 가했다.
⑩ 4월 27일
김하석(金夏錫)·지건(池健)·서일범(徐日範)·이영(李營) 등 불령 도배는 신한촌 주점에서 우리 밀정 선인에게 폭행을 가했다.
⑪ 4월 29일
포조 신한촌 한민 학교에서는 김철훈(金喆訓) 의장 밑에 최재형(崔在亨)·문창범(文昌範) 등 21명의 주요 배일 선인이 모여 상해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토의하고 그 결과 가승인할 방침을 취하고 동 정부가 노령으로 이전한 후에는 일치 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 가정부는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후에 노령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⑫ ≪독립신문≫ 발행
4월 29일 포조에서는 등사판 인쇄로 반지(半紙) 크기의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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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를, 발행 5천매를 배부했다.
⑬ 5월 7일
포조 신한촌 강양오(姜良五) 방에서 청년동지회를 개최하고 총기 구입을 결의했다고 한다.
⑭ 5월 7일
포조 신한촌소학교에서 청년회를 열고 일본 상품 비매 결의를 하고 참석자 60여 명은 이에 찬성했다고 한다.
⑮ 노령 방면에서 독립운동기관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 한족독립기성회(韓族獨立期成會)
포조에서 김하석(金夏錫)이 조직한 것으로 포조·니콜리스크 한족회와 서로 연락하여 운동에 분주하고 있는데, 그 계획은 노령 동청 철도 연선 지방·간도·혼춘 및 서간도 지방에 산재하고 있는 동지 중에서 1만 인을 모집하여 선내지(鮮內地)로 침입, 무력 시위운동을 개시할 것, 그리고 본 운동의 최후 수단으로 그 목적하는 바는 한족 자결 운동을 불국에서 개최되고 있는 만국강화회의에서 문제삼게 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실행 방법에는 2설이 있다.
(제1설)
모집한 1만 인의 동지를 둘로 나누어 제1에 5천인은 선발대로 무기를 휴대하지 않고 도문강 국경에서 함경북도로 침입하여 각자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경성으로 진출한다.
도중 일본 관헌에게 제지당해 체포 혹은 인치되는 자는 그대로 남겨두고 잔여는 경성을 향해 매진한다.
한편 후방 제2대 5천인은 무기를 휴대하고 간도 및 혼춘 각 지방에서 함경북도의 국경을 습격하여 한 곳을 점령하여 한족공화정부의 소재지로 하거나 혹은 간도에서 가정부를 조직한다.
(제2설)
동지 1만 인이 일단이 되어 무기를 휴행하고 함경북도를 습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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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을 점령하고 한족공화정부를 설치하고 동시에 조선 각지에서 의병을 봉기시켜 일본 군·경에 대항할 것.
김하석(金夏錫)은 경성에서 노령으로 동행한 수 명의 동지와 함께 한족회와 협력하여 본 계획 수행을 위해 의병의 규합·의금(義金)의 모집·무기류의 수집에 노력하고 있다. 그 상황은,
㉠ 노국 귀화 선인 군인파의 규합은 연추 거주 최재형(崔在亨) 및 하바로프스크 거주 김인수(金仁洙) 등 2명이 오로지 이를 담당한다.
㉡ 노령 재주 선인은 대대적으로 군자금 모집 및 총기 수집에 노력하여 총기는 일호 일총(一戶一銃)을 제증하기로 하고 만약 총기를 얻을 수 없을 때는 대금으로 납입하고 있다.
㉢ 구 폭도파의 집합에는 이범윤(李範允)이 이를 담당하고, 간도·혼춘 및 안도현·무송현 방면에 밀사를 보내어 옛 부하 규합에 힘쓰고 있다.
㉯ 청년회(靑年會)
포조에 있고 그 조직은 아직 미상하나 내무부·군무부·중추부 및 평의부 등 각 부가 있고 그 중 평의 부장은 최봉기(崔鳳基)이고, 회장 및 각 부장의 휘장으로는 상부 삼선(三線)은 금선, 중앙 태극, 좌우 이화(梨花), 아래 삼선은 적포(赤布)로, 보충회원은 상부 금선이 없는 것을 가슴에 달고 있다고 한다.
㉰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주로 노령 재주 북파(北派) 선인이 조직한 단체다. 회장 문창범(文昌範), 부회장 김철훈(金喆訓), 서기 오창환(吳昌煥)으로 앞서 재포조제국영사관에 노문·언문의 선언서를 제국 정부에 전달을 칭하는 뜻의 문서를 놓고 갔다고 한다.
또 동지 주재 11개국 영사관 및 노국 관헌에게 선언서를 배부하고 신한촌에서 시위운동을 한 것도 본회의 행동으로 이동휘(李東輝)의 후원회 같은 감이 있다.
㉱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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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조 재주 불령선인 최병숙(崔秉淑)·김치보(金致寶)·박은식(朴殷植)·이득만(李得萬)·윤여옥(尹余玉) 등 노인들의 발기로 3월 26일 김치보 방에서 발기회를 열고 단장에 김치보, 재무에 주자점(朱子漸), 서기에 서상구(徐相矩), 이사에 홍범도(洪範圖)·유상돈(劉相敦) 등 16명을 선거했다.
회원은 남녀를 불문하고 46세 이상 70세까지의 노인으로 그 목적은 독립운동에 분주하고 있는 청년배에게 성원을 보내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그후 이윤(李崙)·김학영(金學永)·차대유(車大有)·최시종(崔侍從)·유태순(劉泰純) 등을 전국 위원으로 택해 각 지방에 파견하여 단원 모집에 노력하고 있다.
앞서 동단 대표자로서 이발(李發) 등 5명의 일행이 경성으로 와 종로 보신각 앞에서 각자 휴대했던 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고 그 중 1명은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선혈에 물들어 부근을 헤매고 있는 것을 체포 취조하자 그들 중 이발(李發) 및 정치윤(鄭致允) 등 2명은 전혀 불령 도배에게 선동되어 망동한 자로 전비를 뉘우치고 있음을 인정하고 간절히 설유한 끝에 여비를 주어 귀향시켰다.
다른 3명은 목하 취조 중이다.
㉲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기독교(감리교) 신도들이 단결한 것으로 처음에는 혼춘현 초정모자(草頂帽子)를 근거로 했으나 최근 중국 관헌의 취체가 엄중해서 동지의 중국령 거주는 심히 불안하므로 노령에서는 일본 관헌은 선인 체포를 할 권리가 없다는 이유로 본부를 포조로 옮기고 회무를 처리하고 있다. 그 역원은 다음과 같다.
단장 김규면(金圭冕)
경리 국장 이존수(李存洙)
재무 한경서(韓京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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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박재섭(朴在涉)
총찰 이인(李仁)·이문준(李文俊)

 

4. 하르빈(哈爾賓) 및 상해(上海) 방면

 

① 4월 9일
하르빈에서는 동지 발행 ≪요동보(遼東報)≫의 선동적 기사와 북만 지방 불령선인 등의 교사로 종래 자취를 감추었던 불령 도배가 점차 대두해 오는 정세였으나 4월 9일 밤 러시아 호르와트 휘하의 선인 군인 50여 명은 동지 주재 우리 공동대(共同隊)를 향해 돌연 발포했으므로 아병은 곧 무장을 갖추고 이에 대항하자 그들은 퇴각했다. 그 때 그들이 유기한 자동차 2대와 소총 약간을 포획했다.
② 하르빈 재주 노국 호르와트 휘하의 선인 용병의 말에 의하면 조선독립운동 제2회 소요를 야기시키려는 계획하에 최근 조선 내지에서도 도망하는 자가 많아 이미 약 3천에 달하고 그 중에는 일본 유학생 이(李)·최(崔) 외 수십 명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조선 내지에서 길림(吉林) 부근은 기차를 타고, 동지 부근에서 육행(陸行)한 동청 연선(東淸沿線) 액하(掖河) 부근으로 오는 자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의용병이라 칭하고 그 일단은 이부위(李副尉)가 이를 지휘하고 통화현(通化縣)에서 국자가(局子街) 부근을 거쳐 도문강(圖們江)을 건너 조선으로 향할 계획이라고 한다.
③ 5월 10일 경
하르빈에서는 상해 방면에서 온 한 선인이 소지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로서 하기 11명이 서명한 선언서를 입수했다. 그 내용은 경성에서 배부한 것과 대동소이하다.
최팔용(崔八鏞) 윤창석(尹昌錫)
김도연(金度演) 이종근(李琮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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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李光洙) 송계일(宋繼日)
김철수(金喆壽) 최근우(崔謹愚)
백관수(白寬洙) 김상덕(金尙德)
서춘(徐椿)
④ 상해(上海)에는, 표면으로는 선인 간의 친목·융화·간난·상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칭하고 내실은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공제회(共濟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회원 등은 동회를 혁명단, 회원을 당원이라 칭하고 그 수 4, 5백 명이 있어 북경·청진·만주 각지 및 노령 방면에 산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동 단원은 비밀을 엄수하여, 간부는 독일식 탐정법에 의해 당원에 대해 그 인물에 따라 각별한 임무를 주므로 당원 상호간에서는 당원임을 모르고 또 서로 아는 당원 상호간에서도 그 임무를 말하지 않게 되어 있다고 한다. 동지 거주 당원의 중요한 자는 다음과 같다.
혁명당 이사장 신정(申檉)(일명 규식(圭植))
동 이사 김규식(金奎植)
신석우(申錫雨) 여운형(呂運亨)
선우혁(鮮于爀) 서병호(徐丙浩)
조동호(趙東祜) 조용은(趙鏞殷)(일명 소앙(素昻))
⑤ 4월 14일
상해 미국조계에서 각지의 선인이 회합하여 의사회(議事會)를 개최하고 강화회의에 대한 대대적 운동을 개시할 예정으로 이미 선내에서도 약 60명이 축하차 동지로 향해 출발하고 그 비용으로 귀족 부호에게서 수만 원을 지출했다는 설이 있다.
또 조선·북경·청진·봉천·하르빈, 서·북 간도 각지의 선인 약 4, 50명은 4월 26일부터 동 30일까지 간 상해불조계(佛租界) 개자이로(愷自邇路) 장안리(長安里)에서 ‘고려국민공화대회’를 개최한다 하고 기타 이동휘(李東輝)가 철도로 만주를 거쳐 동지로 향하고 이재명(李在明)은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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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서류를 가지고 동지에 도착했다. 혹은 이동녕(李東寧) 기타 불령선인 수 명이 동지를 중심으로 왕래한 것에 비추어 보면 상해는 독립운동의 근원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⑥ 4월 17일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기독교청년회장에서 여운형이란 자는 수모자가 되어 선인 약 1천 명을 모으고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맞이하여 우리는 공동일치 조국 부흥을 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운운’하고 크게 격려적 연설을 했다고 한다.
⑦ 가정부 각원의 추거(推擧)
재 상해 불령선인 등은 가정부 각원으로 아래와 같이 추거했다.
총리 이승만(李承晩)
대리 이동녕(李東寧)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차장 신익희(申翼熙)
외무총장 김규식(金奎植)
차장 현순(玄楯)
사법부총장 이시영(李始榮)
차장 남형우(南亨祐)
군부총장 이동휘(李東輝)
차장 조성환(曺成煥)
교통부총장 문창범(文昌範)
차장 선우혁(鮮于爀)
재무총장 최재형(崔在亨)
차장 이재강(李載崗)
⑧ 4월 29일
정부를 원조하는 의결기관으로서 대한민국의정원법이란 것을 제정하고 동 법에 의해 아래와 같은 각 도 대의원을 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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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신석우(申錫雨)
오의선(吳義善)
이기룡(李起龍)
충청남·북도 홍면희(洪冕熹)
신정(申檉)
이명교(李命敎)
유정근(兪政根)
경상남·북도 김정묵(金正黙)
유경환(柳璟煥)
백남규(白南圭)
김창숙(金昌淑)
김동형(金東瀅)
강원도 이준필(金駿駜)
박용각(朴容珏)
송세호(宋世浩)
함경남·북도 이춘숙(李春塾)
홍도(洪濤)
장도성(張道成)
한위건(韓偉健)
이봉래(李鳳來)
황해도 김보연(金甫淵)
이치준(李致畯)
손두환(孫斗煥)
평안남도 손정도(孫貞道)
김현식(金鉉軾)
이희경(李喜儆)
평안북도 김병조(金秉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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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이광수(李光洙)
중국령 조성환(曹聖煥)(본명 조욱[曹煜])
황공호(黃公浩)
미·노령은 미정이라고 한다.
⑨ 4월 30일
각도 대의원은 상해불조계 개자이로 장안리의 가정부 사무소(표면은 조선민단역소[役所])에서 의장에 손정도(孫貞道), 부의장에 신정(申檉)을 선정했다.
⑩ 5월 1일
각도 대의원회를 가정부 사무소에서 개최, 22명이 집합하여 아래와 같은 안건을 결의했다.
1. 자금 수입 방법으로서 구국 의무금을 모집할 것. 그 수단으로서는 불일 상해 집합자 전원을 모아 연설을 해서 출금을 구하고 또 조선 내지의 자산가에게 부과 명령서를 발하고 사람을 특파해서 징수 할 것.
2. 외국 및 외국인과의 교섭 및 접촉을 한층 확장 밀접하게 할 것.
3. 조선내 각호에 세금을 부과하여 일본정부에게 납세를 시키지말 것.
4. 재정 심사원을 선정해서 아래 3명이 당선되다.
조성환(曹成煥)·유정근(兪政根)·김보연(金甫淵)
5. 법률 및 청원심사위원을 선거해서 하기 3명이 당선되다.
홍면희(洪冕熹)·오의선(吳義善)·손두환(孫斗煥)
⑪ 상해가정부에서 정한 가헌법(영문)의 역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공화국가정부조직의 포고]
수상 이승만(李承晩)
내상 안창호(安昌浩)
외상 김규식(金奎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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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최재형(崔在亨)
육상(陸相) 이동휘(李東輝)

 

[조선공화국 가헌법]

 

1. 조선공화국은 북미합중국을 본받아 민주적 정치(정부)를 채용한다.
2. 조선공화국의 인민은 남녀의 구별, 사회상의 지위 혹은 재산에 따라 구별함이 없이 평등하다.
3. 조선공화국의 인민은 신교·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향유한다.
4. 조선공화국의 인민은 공민인 이상 모든 선거 및 관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5. 조선공화국은 세계 평화와 문명을 기하는 국제 동맹에 가맹한다.
6. 조선공화국은 이에 의해 공화국이 건설된 국민적 이상의 신의(神意)에 일치하는 것을 표명한다.
7. 국민회의 및 가정부는 판도가 완전히 회복된 후 1년내에 의회를 소집한다.
국민회의는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의회를 대행한다.
조선공화국 제1년 4월 10일
⑫ 5월 3일
회의 결과 상해임시정부 각원으로서 결정된 자는 다음과 같다.
․ 국무원 총리
이승만(李承晩) 밑에 조원구(趙院九)·조용은(趙鏞殷)·홍도(洪濤)·이춘숙(李春塾)
․ 내무부
안창호(安昌浩) 밑에 신익희(申翼熙)
윤현진(尹顯振) 서병호(徐丙浩)
한위건(韓偉健) 조동진(趙東珍)
배형식(裵亨湜) 김구(金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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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우(崔謹愚) 김대지(金大地)
박승업(朴承業)
․ 외무부
김규식(金奎植) 밑에 현순(玄楯)
장운상(張運相) 이광수(李光洙)
백남훈(白南勳) 이광(李光)
․ 재무부
최재형(崔在亨) 밑에 김철(金澈)
김응선(金應僐) 송세호(宋世浩)
구영필(具榮弼) 서성권(徐成權)
최완(崔浣) 김홍권(金弘權)
한남수(韓南洙)
․ 법무부
이시영(李始榮) 밑에 남형우(南亨祐)
김응섭(金應燮) 한기악(韓基岳)
․ 군무부
이동휘(李東輝) 밑에 조성환(曹成煥)
김안선(金案璿) 신철(申徹)
김충일(金忠一) 박숭봉(朴崇奉)
․ 교통부
문창범(文昌範) 밑에 선우혁(鮮于爀)
양선명(梁璿明) 이범교(李範敎)
이경한(李京漢) 윤원삼(尹愿三)
김경원(金璟原) 이영찬(李泳贊)
이봉수(李鳳洙) 신국권(申國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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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林玄)

 

⑬ 5월 3일
오후 3시부터 각 도 대의원회를 가정부 사무실에서 개최했는데 출석자는 22명, 의장은 손정도(孫貞道)로 전회의 결의에 따라 각 도 위원에게서 자금 징수 방법에 대해 의견을 듣고 토의 협의한 결과 정부에서 정한
㉮ 인구세의 명목으로 선내 일반민에게 세금 부과
㉯ 의무금으로서 금원(金圓) 징수
㉰ 내채 모집(채권 발행)
㉱ 외채 모집
의 4항에 대해 의무금 모집은 의원 및 각원의 휴대금 중 3개월 간 정도의 생활비를 남기고 전부 제공할 것, 각 도에서 내집한 자를 모아 각별히 모집할 것, 각 도에서 다시 3인을 선정하여 선내지로 파견하거나 또는 그 3인의 명의로서 모집할 것, 인구세 및 내국 채권 모집 문제는 가정부에서 결정 발표할 것을 결의했다.
⑭ 5월 3일
청년 단원 약 25명이 집합했는데 단원 이강희(李康熙)가 도선(渡鮮) 상황을 보고하고, 청년이 길림(吉林)과 노령 방면으로 가는 점에 대해서는 조성환(曹成煥)이 주선하게 되었다는 점 등에 대해 보고했다.
⑮ 5월 4일
재상해선인청년회 내에 다시 ‘청년단’이란 것이 있어 각별한 행동을 하고 있었으나 이를 합병 통일하려고 청년회 사무실에 관계자 약 30명을 집합시키고 협의한 결과 합병하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청년단으로 하고 다음과 같은 역원을 선출하고 가정부 내각을 원조하기로 하고 오후 12시에 해산했다.
단장 김정목(金鼎穆)
부단장 한병기(韓炳基)
서무부장 이규갑(李奎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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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장 오익표(吳益豹)
재무부장 문백규(文白奎)
평의원 노태연(盧泰然)
강병필(康炳弼)
나기호(羅基湖)
배동선(裵東善)
그리고 서무부에 다시 군부(軍部)·경무부(警務部)·비밀부(秘密部)·인쇄부(印刷部)의 네 부를 두었으며 계원은 다음과 같다.
군부 겸 경무부장 강병필(康炳弼)
비밀부 이규갑(李奎甲)
강병필(康炳弼)
오익표(吳益豹)
인쇄부 박진(朴震)
노태연(盧泰然)
이상 군부·경무부·비밀부는 그 목적이 주로 청년단 내의 경보(警保)에 임하고 청년을 길림으로 파견하여 군인을 양성하려는 것이다.
⑯ 5월 4일
재상해청년단 인쇄부에서 등사판 인쇄로 된 ≪청년보≫ 제1호를 발행했다.
⑰ 5월 6일
오후 3시부터 각 도 대의원회를 가정부 사무소에서 개최하여 19명이 출석하였는데, 평북대의원 김병조(金秉祚)는 앞서의 자금 모집자로서 각 도에서 3명의 위원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평북 방면에서는 ‘이 위원은 정부에서 직접 사령을 교부하거나 또는 구두로 전달하지 않으면 위원될 자격이 없는 관습이 있는데 각 의원은 어떠하냐’고 제의하자, 한 의원은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한 의원은 위원 중에 불량분자(관헌의 밀정)가 있어, 현금휴대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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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금을 불응한다고 말하므로 여로 모로 논의를 거듭한 끝에 방청을 금지하고 비밀회의로 들어가 그 불량분자를 전의(詮議)한 끝에 충청도 의원 홍면희(洪冕熹)·이명교(李命敎)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어 그 취조위원으로 유정근(兪政根)·이광수(李光洙)·신석우(申錫雨) 등 3명을 선정하고 6일 밤 이래 조사 중이다.
⑱ 5월 7일
파리의 김규식에게서 요구해 온 금원 모집 방법을 협의하기 위해 가정부 내각회의를 열고 8만 7천 원을 송금하고 동시에 가정부도 완전히 성립되었으므로 극력 운동을 계속하라는 뜻을 타전했다.
또 그 전보의 발송과 전후해서 이승만(李承晩)에게서 정부의 위임장을 발송하면 공채를 모집할 수 있다고 하며 그 위임장을 요구해 왔다.
또 김규식(金奎植)에게서도 ‘조선가정부의 특사라는 위임장을 발송하라. 강화회의는 재차 연기되고 우리 운동도 유효하게 진척되고 있다’는 뜻의 전보가 도착했다.
가정부에서는 재상해 프랑스 변호사에게 의뢰해서 7백 원의 보수로 위 위임장을 제작 중이다.
⑲ 5월 7일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국민대회에 선인 등은 ‘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배일적 불온문서를 보내 배일열을 선동하고 또 조선인 약 30명은 그 대회에 참가했다.
⑳ 상해 재주 조선인은 강화회의에서 독립이 절망되면 결사대는 정크선으로 도항, 조선 각지에 대소요를 일으키는 한편, 일본 내지의 대공장을 파괴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할 결의를 하고 연판장에 기명한 자 많다고 한다.
(21) 상해에서는 한국독립운동비를 모집할 목적으로 ‘신고려공화국상해구국정우회(新高麗共和國上海救國情友會)’라 칭하는 단체를 조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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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장춘·포조·봉천·안동 및 선내 각 요지에 지부를 두고, 모금원을 파견하여 모금을 하는 한편 각지의 제반 내정을 탐지 수집할 목적하에 착착 분주 중이라고 한다.
5. 기타
① 4월 7일 미국 워싱턴에서 조선임시정부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조선은 미국의 제도와 동일한 정신으로 기독교 독립국을 건설한다’라는 선언서를 발표한 자가 있다.
② 미국 및 하와이에 있는 조선인 대표자는 4월 16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조선인회의를 개최했는데, 모인 자는 80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또 파리에서 연합열국대표자에 대해 독립청원서를 냈다고 한다.
③ 최근 프랑스 파리의 조선인 제키 모직 및 S. 김 양인은 조선인 대표자라 칭하고 은밀히 프랑스 정부 및 유력자에 대해 조선은 독립이 되었다고 하고 일본을 중상하는 서류를 분배하고 있다.
④ 재북경 신정(申檉)은 남경(南京)중국혁명당원과 짜고 당원 6명을 대만으로 보냈다.
이상과 같은 정황은 조선에서 소요가 발발된 이래 국외로 파급된 불령 행동의 일반(一班)으로 조선인이 거주하는 지방은 남녀 노유를 불문하고 사사 건건 조선독립 문제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최근 그들의 행동은 날이 감에 따라 험악한 경향을 띠게 되어, 진정, 소위 제1기의 시위운동은 끝나고 제2기의 무력 운동으로 옮긴다고 칭하며 빈번히 조선 국경을 습격하겠다 하고 각처에 결사대의 조직이 끝났다고 하며, 혹은 총기 수집에 노력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으므로 우리 경무관헌에서는 군대와 협력, 국경에서 경비를 엄하게 하여 그들 불령 도배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기하고 있다

 

 

 

 

-선조들의 하나님과 민족사랑의 역사현장 - 

  군산에서 일어난 “군산3.1독립운동”은 한강이남에서 최초로 서울과 동시에 준비되어 호남에서 맨 처음 봉기한 역사적인 민족의 쾌거였으며, 군산구암교회(전화 063-442-1892)성도들이 모의를 하고 군산시민들이 참여를 하여,다른 지역에  파급되게 한 항쟁운동이었기에 그 전개과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당시에 미션학교인 군산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에 재학중인 김병수가 민족대표 33인중에 한분인 이갑성지사로부터 독립선언 200장을 전해받고, 1919년 2월26일 군산에 내려오게 된다.그리고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 교사에게 서울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리고 군산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자 박연세교사는 구암교회성도이며 교사들인 이두열,김수영등과 같이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멜본디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과 같이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3,500장과 태극기를 만들어 서래장날인 3월6일에 시위을 할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3월5일 새벽에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이 주동자인 박연세,이두열,김수영을 연행함으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이에 은밀하게 활동하던 김윤실 교사가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3월5일에 앞당기어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과  멜본디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예수병원 직원을 비롯한 구암교회성도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었다.

“군산3.1만세운동”은 처음에는 500여명이 참여를 하였지만, 군산경찰서 앞에 이르자 1,000여명으로 늘어나고 투옥한 교사들의 석방을 주장하면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을 하늘에 사무치게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군산3.1독립운동”은 곧 4월4일에 익산에서 일어나 많은 희생자를 낸 “4,4 솜리만세항쟁”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솜리만세항쟁”을 주도한 남전리 도문학교의 문용기교사가 “군산3.1독립운동”에 참여를 하였고,“군산3.1만세운동”을 주도한 영영학교 박연세교사는 “4.4 솜리만세항쟁”에 같이 참여를 한 것을 보아도 두 만세운동에는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박연세교사는 익산의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후에 군산영명학교의  교사로 재직중에 김병수와 군산3.1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구속되어 대구교도소에서 2년6개월간 복역을 하였다.

그는 감옥생활에서 영적인 도전을 받아 출옥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었으며, 1926년부터는 목포의 유일한 교회인 양동교회를 맡아 1942년 11월11일 다시 투옥되기 까지 16년간 목포지방에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1942년 8월30일 주일예배에서 천황을 예수그리스도 밑에 있다는 설교를 해서 불경죄로 구속되어 대구형무소에 다시 투옥이 되었으며, 1944년 2월15일 유난히 추운 겨울날 독감방에서 62세의 나이에 꽁꽁 얼어죽었으며, 눈썹에는 서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기도하는 자세로 얼어 순교한 박연세 목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군산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신앙교육을 통하여 하나님과 민족사랑을 가르쳤고,양동교회에서는 목회자로서 천황이라는 우상을 타파한 위대한 신앙인을 모습을 보여주었다.

찾아가기:군산 버스터미널에서 구암동행 버스를 이용,구암교회정문에서 산쪽으로 오르면 “호남선교100주년기념비”와 “군산3.1독립운동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주소 : 전북 군산시 구암동 358-6

 

 

 

 

(3) 전북지방의 3·1운동 전개 상황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먼저 서울에서 작성된 독립선언문은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의 계통을 통하여 전북지방에 전달되었다.

 

1) 군산지방의 독립만세운동

 
  기독교측의 전달책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는 서울에서의 전라도 연락 책임인 함태영(咸台永)·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을 통하여 받은 독립선언문 95매를 비밀리에 가지고 2월 26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에 군산에 도착하였다.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에게 전달하니 그는 동료교사로서 평소 애국의 뜻을 같이하던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송정헌(宋正憲) 등과 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선언문 500매를 일차로 복사하여 기독교계 요로에 비밀리에 전달하고 동료 교사 고석주(高錫柱)와 개복동교회 교인 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希淳)과 구암기독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유한중(柳漢重) 등에게 연락하였다. 3월 2일에는 영명학교(박연세·이두열·김수영·송정헌) 교사와 학생들이 협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일에 쓰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3,500매를 김영후·송기옥 등이 비밀리에 기숙사에서 등쇄하였다. 그들은 군산 독립만세운동 대시위운동 거사의 날을 군산 장날인 3월 6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이 탄로나서 3월 4일 경찰 수십 명이 영명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 두 교사를 수갑 채워 군산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정경을 보고 분개한 영명학교 학생들은 김윤실(金允實) 교사의 지도로 군산경찰서로 달려가서 두 교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벌였으나 무위로 그쳤다. 다시 다음날인 3월 5일 이른 새벽에 경찰이 재차 수색하자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 구암기독병원 직원들과 구암교인, 메리 볼딘여학교 학생들이 감연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6일 예정의 거사일을 앞당겨 5일에 군산 시내로 돌입하여 군산교회 교인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부르며 일대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하여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군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일본 경찰과 군인들


  이 시위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월 23일, 28일, 30일, 31일, 4월 5일에도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보통학교 학생들까지도 가담하였고, 3월 23일 밤에는 군산보통학교 건물에 방화하며 시위하였다. 3월 28일에는 일본인 상가인 대화정(大和町)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군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상권(商權)을 장악하고 군산의 경제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어 군산 시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렬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30일 시위 때에는 일본군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므로 애국 청년들의 살상피해가 많았다.14) 4월 5일의 만세운동시위는 1,000여 명이 넘는 큰 시위였다. 군산의 만세운동 선봉에는 기독교계가 나섰으나 서울과 전주에서 연락을 받은 천도교도들도 일어나 일반 시민들과 더불어 격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첫날 기독교도, 남녀 학생, 천도교도, 일반시민이 행진할 때는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그날 주동자로 99명이 잡혔다.

  군산지방에서는 간헐적으로 시위와 유혈충돌이 일어났는데 시위의 횟수는 21회였고 참가 연인원은 25,800여 명에 달하였다. 피검 인원은 145명, 사망 21명, 부상 37명이나 되었다.

 

2) 전주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전주에는 독립선언문을 기독교와 천도교, 두 루트를 통하여 전달받았다. 기독교측은, 서울에서 기독교 계통 연락 책임을 졌던 함태영 장로가, 그 전 해에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천안군 양대리 소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있는 임영신(任永信)을 찾아가 독립선언문 한 뭉치(혹은 200매)를 전달하고 전주에 연락할 것을 부탁하였다. 임영신은 흥분된 가슴으로 그 밤을 지새고 2월 28일 천안을 떠나서 3월 1일 전주에 도착하여 재학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전주서문밖교회 이돈수(李敦壽) 장로댁에 숙소를 정하고, 평소에 애국사상을 지도받던 서문밖교회 김인전(金仁全) 목사를 찾아가 함태영 씨에게서 부탁받은 독립선언문과 만세운동을 일으킬 일에 대한 말을 전달하였다. 그녀는 과거 재학시 애국의 뜻이 통하던 기전여학교의 동창들을 만나서 앞으로의 일도 계획하였다. 한편 김인전 목사는 자기의 동생 김가전(金嘉全)과 서문밖교회 조사 이수현(李守鉉), 교회 청년교인 김종곤(金宗坤)·윤건중(尹建重)·최종삼(崔宗三)·신일용(辛日鎔)을 불러 전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토록 하고 독립선언문 5,000매를 증쇄(增刷)하며 태극기를 다량 제작하였다. 또한 이들은 먼저 교회 청년 김종곤의 집과 신흥학교의 지하실에서 은밀히 작업을 하였고 일이 어느 정도 진척된 후에 신흥의 교사와 학생들을 포섭하고 또 천도교측과도 연락을 취하여 회합을 가졌다. 임영신은 동창모임을 통해 별도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문을 등쇄하는 한편 특히 이른바 13인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서문밖교회의 이수현·최종삼 등은 신흥학생과 지방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앞으로의 만세운동 거사를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때마침 해마다 음력 정월 농한기에는 달성경학원을 실시하는데 전북 일원과 충남 일부 지방의 각 교회의 주요 직원들(장로, 집사, 교사, 청년들)이 약 1개월간 모여서 합숙하면서 성경교육과 교회운영상식 등을 배우고 있었다. 마침 성경학원을 수료하고 방학이 되어 각 교회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당시 학원장인 마로덕 선교사의 양해를 얻어 미구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설명하고 또 거사할 때 쓰일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각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하도록 나눠 주었다. 이 모든 계획은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의 지휘를 받아 서문밖교회 청년들이 진행하였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측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천도교측의 연락 책임을 맡은 인종익(印宗益)이 독립선언문 2,000매를 가지고 2월 28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에 전주에 도착하여 천도교 전북교구장인 김봉득(金鳳得)을 만나 독립선언문 2,000매 중 1,700매를 전달하고, 3월 초순경 민중궐기대회를 전주에서 일으켜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지령만을 전했다. 그러나 서울과 같은 조직적인 거사계획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인종익은 다시 박태련(朴泰鍊)을 만나서 서울의 운동방침 등을 전달하고 전주를 떠나 독립선언문 300매를 가지고 이리를 경유하여 충북 청주로 가서 충북 천도교구 책임자에게 이 문서를 전달하였다. 청주에서는 독립선언문 일부를 충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적발되어 충북의 분송(分送) 책임자가 체포되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는 독립선언문 1,700매를 받은 후 그 일부 200매를 일단 이리 교구장 이유종(李唯鐘)에게 전하고 다시 이중달(李仲達)을 시켜 호남선 철도역이 있는 지방에 은밀히 살포하다가 불행히도 발각되었다. 천도교 전주교구는 나머지 1,500매 독립선언문을 전북 천도교구의 간부 김신극(金信極)에게 맡겨 강경·함열·김제·금마·용안·여산(江景·咸悅·金堤·金馬·龍安·礪山) 등지에 나누어 전달했는데,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박태련의 19세 된 동생 태호(泰鎬) 군이 자진하여 이 책임을 맡았다.

  전주의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은 회합을 가진 후 전주의 독립선언대회를 전주 장날인 3월 13일(음력 2월 12일) 남문광장에서 하기로 하였다. 운동대원들은 비밀 유지에 노력하였다. 기전 동창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 13명(任永信·金仁愛·金恭順·崔金珠·姜貞順·咸練春·金順實·金羅賢·崔要漢奈·鄭福壽·宋順姬·崔愛敬·金信姬, 대개 서문밖교회 교인과 전주남문밖교회 교인)은 비밀유지를 위해 그 전날밤인 3월 12일 밤중 10시에 각자의 집에서 비장한 각오로 어른들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야음을 타서 그 이튿날의 집결장소에 가까운 최요한나(최국현 장로의 딸)의 집에 비밀리에 모였다.15) 이 비밀은 신흥학교 학생들에 의해서도 굳게 지켜졌고 사전에 일체 누설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정오를 기하여 남문광장 이곳저곳에서는 기독교인, 천도교인, 학생들과 시민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기전여학생들의 비밀결사대 자료


  3월 13일 낮 12시 20분경 신흥·기전의 학생들과 시내 기독교회 교인, 천도교 신도, 장에 나왔던 일반시민들 수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남문광장 이곳저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때 천도교측에서 격문을 뿌렸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오호라! 동포는 분기하여 모두 일어나자. 속박에서 사는 것보다 자유 위해 죽는 것이 나으니 동포는 다같이 각성하고 맹연히 분기하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동포는 성심으로 독립의 깃발을 세우고 나가자!1

  짤막하면서도 식민지 설움에 복받친 격문(檄文)이었다.
만세시위 일행은 일단 다리 건너 남쪽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 교정에서 대오를 정리한 후 다시 줄지어 중앙동 우체국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며 행진하였다. 이때 도중에서 경찰과 군인들의 저지를 받았고 또한 인솔자가 체포를 당했다. 그들은 강제해산으로 흩어졌다가 재집결을 하면서 행진을 강행하다가 오후 3시경에는 시장에까지 밀려들었으나 수백 명이 다시 모여 진행 코스를 바꾸어 남계동·다가동17) 길로 우회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저지받아 흩어진 이곳저곳의 작은 집단은 오목대나 다가산에서 만세운동을 산발적으로 벌여 밤중까지 실시하다가 자정이 가까워서야 조용해졌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이날 전주의 독립만세시위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이 모두 434명에 부상이 15명이었다고 하였으나 이 내용은 전북도장관(全北道長官)이 인원수를 축소하여 상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14일에도 전주에서는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전날 참여하지 못한 기전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신흥학교 교사인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 등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아침 일찍 완산동 용머리고개에 집결하여 서학동 전주교를 지나 남문에서 다가동으로 향하여 진행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 인원은 300명 가량이었으나 오후 3시경에 일본 경비대의 저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군중으로는 신흥과 기전 두 학교 학생들과 기독교회 교인들과 천도교 신도들이 가담하였다. 경찰과 지방장관의 보고는 그 인원수를 축소하여 약 300명이라고 하였으나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시위군중은 적어도 1천명 이상이었다고 했다. 전주의 만세시위는 물론 이틀에 끝난 것이 아니었고 각지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군산의 양상과는 달리 매우 온건하였다고 한다.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행동지침이 잘 지켜진 것이다. 그래도 이날 14일 전주에서 검거된 남녀학생과 시민들은 90여 명이었고 주모자로 16명이 구속되었다. 그 당시 양일간의 시위에서 교인과 남녀학생 164명이 검거되었으며 천도교도 박태련·김신극 등이 일단 검속되었다. 전주 시내에서는 3월 13일부터 5월까지 75일간 모두 21회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참여한 연인원은 5만여 명에 달했으며 15명이 부상하고 434명이 체포되었다고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때 교인들로서 옥고를 치른 사람은 신흥학교 교사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조종환(趙鍾煥)·고경진(高敬鎭) 등이었고·신흥학교 학생으로 고형진(高衡鎭)·남궁현(南宮炫)·김병학(金秉學)·김점쇠(金点釗)·이기곤(李起坤)·김경신(金敬信) 등이었다. 이들 중 김경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했고 김병학·이기곤·김점쇠 등은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 일단 출감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후유증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서문밖교회의 최종삼·김가전도 체포되었는데 최종삼은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기전의 13인의 결사대는 대구 복심법원에까지 이송되었다가 6개월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전주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는 모든 정황이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으므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전주를 떠나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전주에서 3·1운동의 기독교측 주체는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였다. 그는 3·1운동의 사전준비를 진두 지휘할 때 몇 분의 교직자와 교회 청년들로 한정하여 일을 준비하였다. 독립선언문·태극기 제작에 비밀유지를 위해 전술한 교회의 몇몇 청년을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마지막에 연락과 행동의 제일선에 뛰어든 청년과 남녀학생들은 평소 김 목사의 예배 인도에 참석하여 성경공부와 특별강의에서 민족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강의받았던 교회 청년들이었다. 각 교회에 두루 알려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사전에 알리지 않은 것은 이 독립만세운동이 단시일에 급하게 계획된 일이었고,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심성으로 거사 이후 검거선풍이 일었을 때, 사전모의자는 비교적 희생이 적었다. 운동을 주도한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만큼 김 목사는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 운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은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두드러지게 두 종교계(기독교와 천도교)에서 주도하였거니와 이 운동이 민족 구국운동이었기에 한국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에게 거의 의존하지 않았고 또 선교사들 역시 표면상 종교의 비정치화노선에 따라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개교회들은 스스로 운동에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거의 없었으나 그 중에는 국제정세를 알려 주고, 한국 교인들의 피해상황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 여론에 알리기도 하고, 교인들을 위험에서 도피시키는 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히 일부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의 지시에 충실한 나머지 친일적 태도를 취함으로 한국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모든 교인들은 꿋꿋하게 이 운동을 구국운동으로 알고 스스로 가담하였으며, 교회의 교우와 학생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특별연보를 모아서 사식을 담당하는 등 훈훈한 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더 귀한 것은 기도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1919년 10월 4일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8회, 평양신학교에서 모임)는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증경총회장 김선두(金善斗)·양전백(梁甸伯) 목사를 위시하여 증경서기 함태영, 전도국 사무국장인 길선주(吉善宙) 등에게 본 총회가 편지로 위문하기로 결의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으로 환난중에 있는 동포를 위하여 한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전 교회가 기도하기로 하였다. 1년 후 1920년 10월 2일에 열린 제9회 총회(서울 안동예배당에서 모임)에서도 역시 서울 서대문 감옥에 3·1운동 관계로 수감중인 목사와 장로들에게 위문편지를 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마다 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기도운동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4) 3·1운동 전개 당시 기독교계의 활동

  1910년대 항일 민족운동에서 기독교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독교인들은 진취적 사고방식과 전국적인 조직력, 변함없는 꾸준한 신앙심과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하여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협회운동, 신민회, 조선국민회 등 기독교 민족운동에서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현세적 실천성과 신앙관을 보였을 뿐 아니라 3·1운동에서도 큰 중추적(中樞的) 역할을 담당하였다.

[표19]전북지방 3/1운동 거사 일람표(1919.3.4)


[표20]기독교 長·監 두 교파와 기타 교하의 교세(1918)

교파/종류
예수교장로회
감리회
성공회 등
기타 각 교파
합 계
북감리회
남감리회
교회수
2,005
652
238
2,895
목사수
169
70
14
253
전도사수
659
263
32
952
교인수
160,919
41,044
10,740
12,000
234,703
주일학교수
2,655
412
138
3,205
주일학교
직원수
13,756
2,133
482
16,371
주일학생수
147,953
26,640
5,911
180,504
남학교수
423
75
26
524
남학생수
15,573
4,070
986
20,629
여학교수
132
58
40
230
여학생수
5,041
3,214
1,145
9,400
신학생수
174
20
194
성경학생수
1,476
1,476
연보액
282,948
75,809
15,995
374,743

[표21]기소된 인원 일람(1919.5.8)

단체
기소
자계
기독교인
불교
유교
천도교
시천교
장로회
감리교
조합교
불명
천주교
기타
인원 6,417 1,154 290 3 96 18 1 1,562 72 11 1,156 2 ㅠ

[표22]3.1운동 관련 자료

만세운동시위 집회수(1919년 3월~5월) 1.542회(대규모는 340회)
시위운동에 동원된 인원 2,020,000명
만세운동 시위 실시 지역(전국218개군 중) 212군
3.1운동 관계 사망자와 상해자 사망자-7,509명,상해자-45,000여 명
피검된 자(충인원190,525명 중) 기독교인 17.6% 3,426명
체포된 인원의 종교별 구분 기독교인-3,426명
천도교인-2,283명
유교인-346여 명
불교인-220여 명
미상-390여 명
무종교인-9,304명
3.1운동에서의 기독교인 역할(총인구 1,600만중 기독교인은 그 15%인 240,000여명) 주동세력이 뚜렷한 지역-311처 중 78~120개 지역
기독교인 동원 인원은 전체 동원 인원의 25%~38%

[표23]3.1운동 당시 기독교계의 손실 상황


파괴된 예배당(반파,완파)수 80여동
교회재산상 손해액 30,000달러
시위 참가로 일단 구금된 교인 3,428명(교역자 244명)

  당초에 독립선언대회(독립만세운동 발발의 날)는 고종황제의 인산(因山)날인 3월 3일을 기하여 벌이기로 예정하였는데 혹시 고종황제에 대한 불경이 될까 하여 거사일을 3월 2일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일요일(주일)인 까닭에 기독교측에서 반대하므로 결국 3월 1일(토요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수현(李守鉉)

 

출신지 전북 옥구

훈격 애족장(1990)

운동계열 만주・노령방면

이 수 현(李守鉉) 1895. 5. 8~1980. 3. 8

 

전북 옥구(沃溝) 사람이다

1913년 군산 영명중학교 재학시부터 애국심과 독립정신의 함양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평양사람 장일환(張日煥)이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당시 그곳에 주재중이던 박용만(朴容萬)의 지도를 받고 그 이듬해 4월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는 평양 숭실대학교 재학중 여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8년 2월 평양경찰서에 장일환・노선경(盧善敬)・강석봉(姜錫奉)・서광조(徐光朝) 등 2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후 기독교 목사가 되어 애국정신 함양을 위하여 계속 진력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음.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第 4卷, 國家報勳處, 1987年, p.807.

註・現代史資料(姜德相) 25卷 36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2卷 358面

 

 

 

김병수(金炳洙, 1898∼1951)

 


의사. 본관은 김해(金海)로 호는 삼산(三山)이다. 김제군 백구면 유강리 출생이나 이리시에서 살았다. 군산 영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1년을 앞두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익산에 전달하여 궐기대회에 선봉이 되어 행진하다가 왜경에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 1921년에 의전을 졸업하고,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 익산에 삼산의원(三山醫院)을 개원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여 여성교육에 공헌하였다. 28세에 익산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 청년회관도 건립하였다.
1945년 수복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동년 9월에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동년 12월에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전북지부 부위원장이 되고, 동년 9월에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피선되었다.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이 되고, 동년 4월 이리읍이 부(府)로 승격되자 초대부윤(初代府尹)에 취임하였고, 4월에는 대한농민총연맹 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 민주국민당의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다.
6·25사변을 당하여 부산에 피난 중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가 UN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救國總力聯盟)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1)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발단

  우리 민족은 1910년 일제의 강점 이후 제1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의 무단 통치 아래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을 품고 있었으나 일본의 무단(武斷)정치 세력과는 직접적인 대결을 삼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신적 위안처가 되는 교회의 발전과 노회·총회의 설립과 전도운동에 열의를 쏟으며 우국의 심사를 달랬다. 1916년에는 데라우치 총독이 물러가고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제2대 총독으로 부임하여 역시 무단정치 수단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2개사단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침략의 기본사업 중 하나로 전국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고 교묘한 신고제도로써 민간 소유의 땅과 농지 및 임야를 빼앗아 1918년에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열국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17년 제정 러시아에서는 10월혁명이 발발하여 과거의 제정(帝政)은 무너지고 소비에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18년 독일이 패망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게 되자 민족자결론에 따라 체코·헝가리·폴란드 등이 독립국이 되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당시 일본 동경에 유학하고 있는 젊은 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일본 동경 YMCA회관에서 독립선언 선포식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백관수(白寬洙)는 독립선언문을 외쳐 읽었고 김도연(金度演)이 결의문을 낭독하여 모두가 우레같은 박수로 채택하였다. 그때 윤창석(尹昌錫)이 감격하여 울먹이는 음성으로 “하나님이시여! 저희 민족을 인도하여 주시옵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기원하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 2·8독립선언대회는 국내의 3·1운동을 폭발시킨 선구적 운동이 되었다. 이에 앞서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전영택(田永澤)·서 춘(徐 椿)·김도연·백관수·윤창석·송계백(宋繼白)·김상덕(金尙德)·최근우(崔謹愚)·이종근(李琮根) 등 10명이 선출되었는데 그들 중 송계백이 독립선언문을 비밀리에 국내로 전달하여 국내 3·1운동의 불을 당겼다.


  3·1운동은 초기에 천도교 계통과 기독교 계통이 달리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남선(崔南善)이 기독교측의 이승훈(李昇薰) 장로와 연락이 닿아 독립선언운동을 함께 도모하게 되었다. 당시 천도교 신도수는 무려 300만이라 하였고 기독교인 수는 234,000여 명이나 되었으나, 동원능력과 조직력 및 의식화 척도가 앞선 기독교가 천도교와 제휴함으로 전민족적인 운동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측에서는 오화영(吳華永)·박희도(朴熙道)·정춘수(鄭春洙)·이필주(李弼柱)·이갑성(李甲成)·김창준(金昌俊)·최성모(崔成模)·함태영(咸台永)·현 순(玄 楯)·오기선(吳基善) 등이 비밀리에 모여 합동운동에 대하여 토론한 결과 이 민족운동이 거족적으로 성사되기 위하여는 양대 종교가 독립운동을 합세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과 독립선언서의 33인의 민족대표 중에 기독교 대표가 16명, 천도교 대표가 15명이나 되었다.



2.8독립선언대회,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2) 3·1독립만세운동

  3·1운동은 당시 68세였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럽게 승하(昇遐)한 것과 관련이 있다. 고종 황제가 ‘독살’을 당했다는 소문이 시중에 퍼지자 조선 민족은 그의 죽음을 비통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슬픔은 평소 일본에 대하여 쌓여 있던 적개심을 분노로 바꾸었고, 국민의 반일감정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일이 대한독립만세운동의 봉기일로 잡혀지게 되었다. 인산에 참예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애국지사들은 일촉즉발의 흥분상태였다. 3월 1일, 서울의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모였고 탑골공원에는 4, 5천 명의 민중이 운집하였다. 정오를 기하여 정재용(鄭在鎔)이 떨리는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수많은 군중들은 하늘에 솟구치는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봇물 터지듯 종로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 외침은 전국에 메아리치며 민족 전체의 함성이 되었다.




고종황제의 장례행렬,1919.3.3


  이 운동은 기독교적 사상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자유사상은 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고 선언문의 공약 삼장에 보이는 무저항 비폭력 정신은 바로 기독교 사상이었다. 원래 천도교 지도자들과 3·1운동의 행동방침을 논의할 때 다수가 살육까지도 불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기독교측 지도자들은 무저항 비폭력으로 나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 운동방침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가 전 운동을 통하여 무저항 비폭력으로 일관하였다. 비록 이 운동이 일제의 무력과 강력한 탄압으로 우리 민족이 바라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대외적으로는 한국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과시하였고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에도 선구적 역할을 담당한, 실로 의의있는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인 운동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할은 매우 컸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국제정세에 밝은 안목을 가진 진보적 지식층이 많았고 교회는 또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때 민족운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획책한 일곱 그룹은 ① 중국 상해의 신한청년단 ② 미국의 대한인 국민회 ③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인회 ④ 일본의 YMCA회관에 모이는 유학생 모임 ⑤ 서울의 모임 ⑥ 평양의 모임 ⑦ 정주(定州)의 모임 등으로 그 지도 인물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다. 독립만세운동 시위사건으로 받은 피해규모에서 기독교가 단연 수위를 점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는 모습,독립선언서


  1919년 10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이 운동으로 인하여 체포된 인원은 3,084명으로 그 중 체포되었던 목사·장로의 수는 134명, 사살된 인원은 41명, 당시 수감 중인 인원은 1,642명이라 하였다. 장로교 외에 기독교 안의 다른 교파의 피해를 이에 합한다면 그 피해인원은 엄청난 것이라고 본다.

  피해가 극심했던 한 예를 들면, 수원 근처의 제암리(堤岩里)예배당 안에 교인들을 몰아넣고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폐쇄하고 방화한 후 아우성치며 나오려는 교인을 전원 총으로 무차별 난사하여 학살했던 일이다. 이러한 만행은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일로서 세계로 하여금 일본인을 재인식하게 하였다. 이때 한꺼번에 희생된 사람은 29명이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1920년 3월 1일까지 전국 피해상황을 집계하니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된 자 49,811명, 가옥 소각 724채, 교회 소각 59개소, 학교 파괴 3개교 등이었는데 그 중 기독교인들이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만큼 일본 군경은 기독교회를 증오하고 핍박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주도세력 중에는 기독교 계통 학교들의 역할이 컸다. 일본인들이 교장으로 있는 공립학교에서는 민족운동을 할 수 없었으나 교회와 교인들이 경영하거나 선교사들이 교장으로 있는 미션학교에서는 교사들 역시 신앙과 민족주의 정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각 지방마다 3·1운동의 선봉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호남지방도 전국 다른 지방의 경우와 같은 상황이었다.

(3) 전북지방의 3·1운동 전개 상황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먼저 서울에서 작성된 독립선언문은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의 계통을 통하여 전북지방에 전달되었다.

1) 군산지방의 독립만세운동
  기독교측의 전달책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병수(金炳洙)는 서울에서의 전라도 연락 책임인 함태영(咸台永)·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을 통하여 받은 독립선언문 95매를 비밀리에 가지고 2월 26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에 군산에 도착하였다.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朴淵世)에게 전달하니 그는 동료교사로서 평소 애국의 뜻을 같이하던 이두열(李斗悅)·김수영(金洙榮)·송정헌(宋正憲) 등과 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선언문 500매를 일차로 복사하여 기독교계 요로에 비밀리에 전달하고 동료 교사 고석주(高錫柱)와 개복동교회 교인 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希淳)과 구암기독병원 사무원 양기준(梁基俊)·유한중(柳漢重) 등에게 연락하였다. 3월 2일에는 영명학교(박연세·이두열·김수영·송정헌) 교사와 학생들이 협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일에 쓰일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3,500매를 김영후·송기옥 등이 비밀리에 기숙사에서 등쇄하였다. 그들은 군산 독립만세운동 대시위운동 거사의 날을 군산 장날인 3월 6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 계획이 탄로나서 3월 4일 경찰 수십 명이 영명학교를 급습하여 박연세와 이두열 두 교사를 수갑 채워 군산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 정경을 보고 분개한 영명학교 학생들은 김윤실(金允實) 교사의 지도로 군산경찰서로 달려가서 두 교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벌였으나 무위로 그쳤다. 다시 다음날인 3월 5일 이른 새벽에 경찰이 재차 수색하자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 구암기독병원 직원들과 구암교인, 메리 볼딘여학교 학생들이 감연히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6일 예정의 거사일을 앞당겨 5일에 군산 시내로 돌입하여 군산교회 교인과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부르며 일대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렇게 하여 전북지방에서는 가장 먼저 군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일본 경찰과 군인들


  이 시위운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3월 23일, 28일, 30일, 31일, 4월 5일에도 일어났으며 심지어는 보통학교 학생들까지도 가담하였고, 3월 23일 밤에는 군산보통학교 건물에 방화하며 시위하였다. 3월 28일에는 일본인 상가인 대화정(大和町)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군산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상권(商權)을 장악하고 군산의 경제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어 군산 시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렬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30일 시위 때에는 일본군 보병부대가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므로 애국 청년들의 살상피해가 많았다.14) 4월 5일의 만세운동시위는 1,000여 명이 넘는 큰 시위였다. 군산의 만세운동 선봉에는 기독교계가 나섰으나 서울과 전주에서 연락을 받은 천도교도들도 일어나 일반 시민들과 더불어 격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첫날 기독교도, 남녀 학생, 천도교도, 일반시민이 행진할 때는 수백 명에 달하였으며 그날 주동자로 99명이 잡혔다.

  군산지방에서는 간헐적으로 시위와 유혈충돌이 일어났는데 시위의 횟수는 21회였고 참가 연인원은 25,800여 명에 달하였다. 피검 인원은 145명, 사망 21명, 부상 37명이나 되었다.

2) 전주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전주에는 독립선언문을 기독교와 천도교, 두 루트를 통하여 전달받았다. 기독교측은, 서울에서 기독교 계통 연락 책임을 졌던 함태영 장로가, 그 전 해에 기전여학교를 졸업하고 충남 천안군 양대리 소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고 있는 임영신(任永信)을 찾아가 독립선언문 한 뭉치(혹은 200매)를 전달하고 전주에 연락할 것을 부탁하였다. 임영신은 흥분된 가슴으로 그 밤을 지새고 2월 28일 천안을 떠나서 3월 1일 전주에 도착하여 재학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전주서문밖교회 이돈수(李敦壽) 장로댁에 숙소를 정하고, 평소에 애국사상을 지도받던 서문밖교회 김인전(金仁全) 목사를 찾아가 함태영 씨에게서 부탁받은 독립선언문과 만세운동을 일으킬 일에 대한 말을 전달하였다. 그녀는 과거 재학시 애국의 뜻이 통하던 기전여학교의 동창들을 만나서 앞으로의 일도 계획하였다. 한편 김인전 목사는 자기의 동생 김가전(金嘉全)과 서문밖교회 조사 이수현(李守鉉), 교회 청년교인 김종곤(金宗坤)·윤건중(尹建重)·최종삼(崔宗三)·신일용(辛日鎔)을 불러 전주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토록 하고 독립선언문 5,000매를 증쇄(增刷)하며 태극기를 다량 제작하였다. 또한 이들은 먼저 교회 청년 김종곤의 집과 신흥학교의 지하실에서 은밀히 작업을 하였고 일이 어느 정도 진척된 후에 신흥의 교사와 학생들을 포섭하고 또 천도교측과도 연락을 취하여 회합을 가졌다. 임영신은 동창모임을 통해 별도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문을 등쇄하는 한편 특히 이른바 13인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서문밖교회의 이수현·최종삼 등은 신흥학생과 지방 교회의 책임자들에게 앞으로의 만세운동 거사를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때마침 해마다 음력 정월 농한기에는 달성경학원을 실시하는데 전북 일원과 충남 일부 지방의 각 교회의 주요 직원들(장로, 집사, 교사, 청년들)이 약 1개월간 모여서 합숙하면서 성경교육과 교회운영상식 등을 배우고 있었다. 마침 성경학원을 수료하고 방학이 되어 각 교회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당시 학원장인 마로덕 선교사의 양해를 얻어 미구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설명하고 또 거사할 때 쓰일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각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하도록 나눠 주었다. 이 모든 계획은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의 지휘를 받아 서문밖교회 청년들이 진행하였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천도교측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서울에서 천도교측의 연락 책임을 맡은 인종익(印宗益)이 독립선언문 2,000매를 가지고 2월 28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에 전주에 도착하여 천도교 전북교구장인 김봉득(金鳳得)을 만나 독립선언문 2,000매 중 1,700매를 전달하고, 3월 초순경 민중궐기대회를 전주에서 일으켜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지령만을 전했다. 그러나 서울과 같은 조직적인 거사계획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인종익은 다시 박태련(朴泰鍊)을 만나서 서울의 운동방침 등을 전달하고 전주를 떠나 독립선언문 300매를 가지고 이리를 경유하여 충북 청주로 가서 충북 천도교구 책임자에게 이 문서를 전달하였다. 청주에서는 독립선언문 일부를 충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적발되어 충북의 분송(分送) 책임자가 체포되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서는 독립선언문 1,700매를 받은 후 그 일부 200매를 일단 이리 교구장 이유종(李唯鐘)에게 전하고 다시 이중달(李仲達)을 시켜 호남선 철도역이 있는 지방에 은밀히 살포하다가 불행히도 발각되었다. 천도교 전주교구는 나머지 1,500매 독립선언문을 전북 천도교구의 간부 김신극(金信極)에게 맡겨 강경·함열·김제·금마·용안·여산(江景·咸悅·金堤·金馬·龍安·礪山) 등지에 나누어 전달했는데,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박태련의 19세 된 동생 태호(泰鎬) 군이 자진하여 이 책임을 맡았다.

  전주의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은 회합을 가진 후 전주의 독립선언대회를 전주 장날인 3월 13일(음력 2월 12일) 남문광장에서 하기로 하였다. 운동대원들은 비밀 유지에 노력하였다. 기전 동창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 13명(任永信·金仁愛·金恭順·崔金珠·姜貞順·咸練春·金順實·金羅賢·崔要漢奈·鄭福壽·宋順姬·崔愛敬·金信姬, 대개 서문밖교회 교인과 전주남문밖교회 교인)은 비밀유지를 위해 그 전날밤인 3월 12일 밤중 10시에 각자의 집에서 비장한 각오로 어른들께 하직인사를 드리고 야음을 타서 그 이튿날의 집결장소에 가까운 최요한나(최국현 장로의 딸)의 집에 비밀리에 모였다.15) 이 비밀은 신흥학교 학생들에 의해서도 굳게 지켜졌고 사전에 일체 누설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정오를 기하여 남문광장 이곳저곳에서는 기독교인, 천도교인, 학생들과 시민들이 일제히 태극기를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기전여학생들의 비밀결사대 자료


  3월 13일 낮 12시 20분경 신흥·기전의 학생들과 시내 기독교회 교인, 천도교 신도, 장에 나왔던 일반시민들 수백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남문광장 이곳저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때 천도교측에서 격문을 뿌렸는데 그 요지는 이러했다.

오호라! 동포는 분기하여 모두 일어나자. 속박에서 사는 것보다 자유 위해 죽는 것이 나으니 동포는 다같이 각성하고 맹연히 분기하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 동포는 성심으로 독립의 깃발을 세우고 나가자!1

  짤막하면서도 식민지 설움에 복받친 격문(檄文)이었다.
만세시위 일행은 일단 다리 건너 남쪽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 교정에서 대오를 정리한 후 다시 줄지어 중앙동 우체국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하며 행진하였다. 이때 도중에서 경찰과 군인들의 저지를 받았고 또한 인솔자가 체포를 당했다. 그들은 강제해산으로 흩어졌다가 재집결을 하면서 행진을 강행하다가 오후 3시경에는 시장에까지 밀려들었으나 수백 명이 다시 모여 진행 코스를 바꾸어 남계동·다가동17) 길로 우회하여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모든 상점은 문을 닫았고 저지받아 흩어진 이곳저곳의 작은 집단은 오목대나 다가산에서 만세운동을 산발적으로 벌여 밤중까지 실시하다가 자정이 가까워서야 조용해졌다.

  한국 독립운동사에는 이날 전주의 독립만세시위로 경찰에 검거된 사람이 모두 434명에 부상이 15명이었다고 하였으나 이 내용은 전북도장관(全北道長官)이 인원수를 축소하여 상부에 보고한 것이었다.

  다음날인 14일에도 전주에서는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전날 참여하지 못한 기전학교 학생들을 비롯하여 신흥학교 교사인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 등이 학생들을 인솔하고 아침 일찍 완산동 용머리고개에 집결하여 서학동 전주교를 지나 남문에서 다가동으로 향하여 진행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 인원은 300명 가량이었으나 오후 3시경에 일본 경비대의 저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군중으로는 신흥과 기전 두 학교 학생들과 기독교회 교인들과 천도교 신도들이 가담하였다. 경찰과 지방장관의 보고는 그 인원수를 축소하여 약 300명이라고 하였으나 그 당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시위군중은 적어도 1천명 이상이었다고 했다. 전주의 만세시위는 물론 이틀에 끝난 것이 아니었고 각지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전주의 만세운동은 군산의 양상과는 달리 매우 온건하였다고 한다. 비폭력 평화적 시위의 행동지침이 잘 지켜진 것이다. 그래도 이날 14일 전주에서 검거된 남녀학생과 시민들은 90여 명이었고 주모자로 16명이 구속되었다. 그 당시 양일간의 시위에서 교인과 남녀학생 164명이 검거되었으며 천도교도 박태련·김신극 등이 일단 검속되었다. 전주 시내에서는 3월 13일부터 5월까지 75일간 모두 21회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이에 참여한 연인원은 5만여 명에 달했으며 15명이 부상하고 434명이 체포되었다고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때 교인들로서 옥고를 치른 사람은 신흥학교 교사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조종환(趙鍾煥)·고경진(高敬鎭) 등이었고·신흥학교 학생으로 고형진(高衡鎭)·남궁현(南宮炫)·김병학(金秉學)·김점쇠(金点釗)·이기곤(李起坤)·김경신(金敬信) 등이었다. 이들 중 김경신은 혹독한 고문으로 전주형무소에서 옥사했고 김병학·이기곤·김점쇠 등은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 일단 출감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후유증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서문밖교회의 최종삼·김가전도 체포되었는데 최종삼은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기전의 13인의 결사대는 대구 복심법원에까지 이송되었다가 6개월 징역에 3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전주 기독교계의 지도자인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는 모든 정황이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없었으므로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전주를 떠나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전주에서 3·1운동의 기독교측 주체는 서문밖교회 김인전 목사였다. 그는 3·1운동의 사전준비를 진두 지휘할 때 몇 분의 교직자와 교회 청년들로 한정하여 일을 준비하였다. 독립선언문·태극기 제작에 비밀유지를 위해 전술한 교회의 몇몇 청년을 조심스럽게 선정하여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마지막에 연락과 행동의 제일선에 뛰어든 청년과 남녀학생들은 평소 김 목사의 예배 인도에 참석하여 성경공부와 특별강의에서 민족과 나라 사랑의 정신을 강의받았던 교회 청년들이었다. 각 교회에 두루 알려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사전에 알리지 않은 것은 이 독립만세운동이 단시일에 급하게 계획된 일이었고,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조심성으로 거사 이후 검거선풍이 일었을 때, 사전모의자는 비교적 희생이 적었다. 운동을 주도한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그만큼 김 목사는 세심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 운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3·1독립운동은 경향 각지를 막론하고 두드러지게 두 종교계(기독교와 천도교)에서 주도하였거니와 이 운동이 민족 구국운동이었기에 한국에 들어와 있는 선교사들에게 거의 의존하지 않았고 또 선교사들 역시 표면상 종교의 비정치화노선에 따라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개교회들은 스스로 운동에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참여는 거의 없었으나 그 중에는 국제정세를 알려 주고, 한국 교인들의 피해상황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 여론에 알리기도 하고, 교인들을 위험에서 도피시키는 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극히 일부 선교사들은 미국 정부의 지시에 충실한 나머지 친일적 태도를 취함으로 한국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했다. 모든 교인들은 꿋꿋하게 이 운동을 구국운동으로 알고 스스로 가담하였으며, 교회의 교우와 학생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을 때 특별연보를 모아서 사식을 담당하는 등 훈훈한 정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더 귀한 것은 기도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1919년 10월 4일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제8회, 평양신학교에서 모임)는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증경총회장 김선두(金善斗)·양전백(梁甸伯) 목사를 위시하여 증경서기 함태영, 전도국 사무국장인 길선주(吉善宙) 등에게 본 총회가 편지로 위문하기로 결의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으로 환난중에 있는 동포를 위하여 한 주간을 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전 교회가 기도하기로 하였다. 1년 후 1920년 10월 2일에 열린 제9회 총회(서울 안동예배당에서 모임)에서도 역시 서울 서대문 감옥에 3·1운동 관계로 수감중인 목사와 장로들에게 위문편지를 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역마다 옥에 갇혀 고생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위해 기도운동을 계속할 것을 결정하였다.

(4) 3·1운동 전개 당시 기독교계의 활동

  1910년대 항일 민족운동에서 기독교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해 왔다. 기독교인들은 진취적 사고방식과 전국적인 조직력, 변함없는 꾸준한 신앙심과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일관하여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협회운동, 신민회, 조선국민회 등 기독교 민족운동에서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현세적 실천성과 신앙관을 보였을 뿐 아니라 3·1운동에서도 큰 중추적(中樞的)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3장
지방학생의 독립운동
제1절 경기도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독도 농학교(農學校), 독도 보통학교
고양군은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만세 정보는 즉각적으로 전해졌다.
당시 독도공립농학교(農學校) 학생 손흥복(孫興福·16)과 조병식(趙炳植·21)은 그 곳 보통학교 학생 김동건(金東健·17)과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3월 12일 간이농학교와 보통학교 학생 약 30명을 규합하여 “조선민족 독립운동에 찬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창하고 선두에 나서서 보통학교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연이어 대열을 정비한 뒤, 군중이 많이 모이는 우편소 앞 거리로 진출하여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러한 만세운동으로 간이농학교 학생 손흥복(본적 : 서울 당주동 72)과 조병식(본적 : 고양군 독도면 독도리 166)은 각각 징역 1년에 처해졌다.1)
2. 인천(仁川) 보통학교
인천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7일부터 시작하였다. 9일에는 약 3백명의 시민이 만세시위를 벌렸다. 특히 인천은 일찍부터 개항장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더러 진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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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 협상판결문 제221호, 판결일자 4월 25일. 원호처,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발행(1972년) ≪독립운동사자료집≫ (5), 3·1운동재판기록. (이하에서는 이 자료집을 ≪3·1운동재판기록≫으로 약기 (略記)하겠음.)
(지방학생의 3·1운동 참여에 관한 자료는 대체로 여기에서 인용하는 ≪3·1운동사≫ 상·하권에 인용되었기 때문에 필자는 자세한 자료 제시를 생략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3·1운동재판기록≫을 인용하였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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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서 한국인의 권익이 여러 형태로 위축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3월 30일부터 철시(撤市)를 하며 항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여기에 앞서 3월 6일, 인천보통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에 들어가니 경찰은 교사들에게 집중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 같은 사태를 당하여 인천 보통학교 3학년 김명진(金明辰)·이만용(李萬用)·박철준(朴喆俊) 등은 학교와 경찰간의 연락망인 전화선을 끊어버렸다.
이러한 행동은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신속히 탄압할 수 있는 시설을 미리 파괴해 버리자는 속셈이었다.2)
3. 수원(水原) 학생의 선전활동
수원지방의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의 노도가 지나간 뒤, 학생들에 의하여 상당히 조직적인 독립운동 선전활동이 전개되었다.
수원군 일형면(日荊面) 하광교리(下光敎里) 342에 살던 학생 이종상(李鍾祥·20)은 1919년 3월말경부터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 요원인 차관호(車寬鎬)와 연락하여 본인(차 관호) 또는 서울 동대문에 거주하던 박성환(朴聖煥)으로부터 보내오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을 동지인 여교사 차인재(車仁載)와 함께 동년 8~9월경 까지 수원군 수원면 내의 각호(各戶)에 투입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이러할 때 9월경, 수원군 동면 남창리(南昌里) 117에 살던 학생, 박선태(朴善泰·21)도 역시 평양학생을 목적으로 상해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중 이종상·이득수(孝得壽) 등과 만나 의기가 투합하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이득수·박선태는 1920년 7월경까지 수원 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 ≪대한민보(大韓民報)≫등, 다수를 반포하였고 동년 6월 20일,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구국민단(救國民團)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박선태는 단장, 이수득은 부단장이 되었으며 한편 수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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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호처,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발행, 제2권, ≪3·1운동사≫ (상)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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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하는 김석호(金錫浩)·김노적(金露積)·윤귀섭(尹龜燮)·김병갑(金秉甲)·이희경(李熙景)·신용준(愼用俊) 등을 상대로 포섭활동을 폈다. 이 구국민단의 2대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한일합병에 반대하여 조선독립국가를 실현할 것.
2.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志士)의 가족 및 유족을 구조할 것.
그들은 이상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하여 수원 서호(西湖) 또는 3·1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고 목표달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의 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3)
4. 여주(麗州) 청년 학생의 궐기
여주 만세운동은 순전히 청년·학생들의 주동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학생 이원기(李元基)와 원필희(元弼喜) 등은 여기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원기·원필희·조경호·이원문 등은 서울지방의 만세운동에 자극되어 여주에서도 대중적인 만세운동을 벌려야 한다는 목적 아래 계획을 추진하였다. 즉 4월 5일에 거사한다는 예정을 잡고 군중 동원을 위하여 이원기의 노력으로 ‘오는 4월 5일 여주 읍내의 장날을 기하여 동 읍내 다락문 앞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할 터이니 그곳으로 모이라’는 요지의 선전문을 작성했다.
한편 주동자들은 이원문의 집에서 42매의 경고문을 만들었으며 이상의 선전문, 경고문을 여러지방에 배부하였다.
그리고 강영조는 4월 2일, 시위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고, 또한 4월 3일에는 북내면 장암리의 원도기(元道基)의 집에서 이원기와 원필희도 태극기를 만들었다.
한편 이들 주동자들은 최영무·강만길·최명용(崔明用)·강영두 등과 더불어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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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377∼378의 판결문, 1921년 4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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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인 현암리(峴岩里) 사람들에게도 참여를 촉구하고 장암리·덕산리(德山里)·와
룡리를 왕복하며 군중동원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거사일을 4월 3일로 앞당겨 만세운동을 벌리니 당일 만세운동 장소인 북내면 당우리(堂隅里) 공북(供北)학교 마당에 모인 군중은 약 8백명이 되었다.
이날 이원기·김학수·원필희·강두영 등은 군중의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그날 시위 군중은 만세를 부르면서 북내면 오학리(五鶴里)까지 시위를 벌렸다.
여주지방 주동자들의 인적상황은 다음과 같다.

성명
년령
직업
본적
최영무(崔永武)
(35)
농업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 114
강두영(姜斗榮)
(21)
농업
동군 북내면 오금리 114
최명용(崔明用)
(27)
농업
동군 북내면 오금리 113
강만길(姜萬吉)
(30)
농업
동군 북내면 오금리 114
이원기(李元基)
(20)
학생
동군 북내면 와룡리 298
이원문(李元文)
(19)
농업
동군 북내면 와룡리 280
강영조(姜永祚)
(26)
농업
동군 북내면 와룡리 289
원필희(元弼喜)
(24)
학생
동군 북내면 장암리 342
김학수(金學洙)
(20)
학생
동군 북내면 신남리 246
조경호(趙經鎬)
(19)
농업
동군 강철면 걸은리 128

이상의 청년 학생들은 일제당국에 구속되어 최영무·이원기는 징역 2년, 강두영·김학수·원필희는 징역 1년 6월, 조경호·이원문은 징역 1년, 그 밖의 사람은 10월의 언도를 받았다.4)
5. 호수돈여학교, 미리흠(美理欽) 여학교, 송도고등 보통학교
개성의 만세운동은 1919월 3월 1일, 충교(忠橋)예배당 내에 있는 유치원 교사 권애라(權愛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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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앞의 ≪3. 1운동재판기록≫ pp.484~487의 판결문 ‘1919년 형상, 제8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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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를 입수하므로서 발단한다.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출신으로서 남부소학교의 교사로 있었다. 개성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33인 중의 한 사람이 개성 북부 예배당의 목사인 강조원(姜助遠) 앞으로 비밀리에 선언서를 밀송하였다. 강목사는 이 사실을 이웃에 살고 있던 권애라에게 의논한 것을 계기로 개성에서의 독립운동이 발달하게 된다.
한편 개성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행동화한 것은 호수돈여학교로부터 출발한다. 호수돈에서의 만세 준비는 당시 동교의 학생회장이던 이경신(李瓊茞) 그리고 그의 언니로서 미리흠(美理欽)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이경지(李瓊芝) 자매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 자매는 서울에서 밀송되어 온 독립선언서가 강목사→권애라를 통하여 어떻게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2월말부터 호수돈여학교 기숙사에게 만세운동 전개에 따르는 문제를 추진하였다.
호수돈 여학생으로서 그 때의 준비추진에 참여한 학생은 이경신·유정희(柳貞熙)·조화벽(趙和璧)·김낸시·이봉근(李鳳根)·조숙경(趙淑卿)·김신렬(金信烈)·최옥순(崔玉順) 등 모두 17명 이었다.
이들은 준비문제에 관하여 깊이 토의한 끝에 선언서 배부를 최옥문·어윤희가 담당해 주도록 하였다. 어윤희는 강목사로 부터 선언서를 받아 50~60매는 호수돈 기숙사에 남겨놓고 일반 민가에 뿌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호수돈 여학생들은 호수돈 소학교의 상급학년 학생들에게도 만세운동에 동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리하여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미리흠여학교, 호수돈소학교의 학생 약 70명이 서명하였다.
그들 사이의 맹약은 만일 배신자가 나오면 살아남은 자가 그 배신자를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여학생들은 7명 또는 10명으로 행동조(行動組)를 짰다. 3월 1일 아침, 이미 약속한 대로 식당에 모였다. 기도가 끝난 뒤, 이경지가 일어나서 전일 밤까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선언서를 읽어 나가는 도중 갑자기 호수돈여학교의 교장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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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와그너(Wagner : 왕래[王來])가 뛰어와서 제지하였다. 이리하여 이경지는 교장실에 연금 당하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이 같은 사태 앞에서 좌절당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앞서 어윤희는 전날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다가 구속되었기 때문에 일본 관헌의 경계는 고조되고 있었다. 호수돈여학교의 정문 앞에는 이미 기마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뒷문으로 빠져 나가 미리 짜놓은 행동조들은 약속한 장소로 향하였다.
이경신·고흥옥(高興玉)·최안라(崔安羅)·박마리아·김복임(金福任)·이아성(李娥星) 등 8명은 개성 헌병대로 달려갔다. 그들은 우체국 앞을 지나 헌병대에 도착하여 예정한대로 찬송가를 불렀다. 그러나 여학생들이 무슨 전도나 하는 줄로 오인하고 일본인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당시만 해도 과년한 처녀들이 길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경신은 이때, 파리 강화회의와 자결주의에 대하여 일장의 연설을 하고 모두는 일제히 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한인 헌병보조원이 만세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의 만세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인 순사부장이 나타나 제지코저 했으므로 학생들은 오후 네시까지만 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니 순사부장은 그렇다면 헌병대 운동장으로 들어와서 만세를 부르라고 했다. 여학생들은 헌병대 운동장에서 울부짖으며 만세를 불렀다. 헌병대 밖에는 시간이 갈수록 군중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 때 동부를 맡았던 조숙경·임덕임 등이 만세를 부르며 들어 왔고 남부를 맡았던 이봉근 등, 일단의 학생들이 합류해 왔다. 그리고 각 요소에서 산발적으로 만세를 부르던 여학생들이 모두 헌병대와 연행되어 왔다. 헌병대 정문 앞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군중, 약 1천명도 흥분하기 시작, 우마차를 동원하여 헌병대 정문을 밀어제치고 운동장으로 몰려와서 여학생들과 합류하였다. 오후 두시가 되었다. 산기(山崎)라는 일본인 군수가 나타나 해산을 강요하였다. 여학생들은 헌병의 안내로 학교까지 도착하였다.
이날 산발적으로 참여한 송도고보(松都高普) 학생들은 고종의 국장 때문에 걸어 두었던 일장기(日章旗)를 보이는 대로 거두어, 그 뒤의 항쟁에서 태극기로 변조하여 사용하였다. 이리하여 개성의 만세운동은 호수돈여학교를 비롯한 여학생들이 맨 먼저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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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로 돌아간 호수돈 여학생들은 한 때, 기숙사에 집단 수용되었다.5)
한편 3월 2일에는 송도고보에서도 구체적으로 만세계획이 추진되었다. 송도고보 4학년이던 김익중(金翊重)은 송영록(宋永錄)·심적룡(沈赤龍)·김정식(金貞植)·안종화(安鍾和)·김수천(金壽千) 등과 더불어 행동을 개시하여 그 전날에 수집해 둔 일장기를 이용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2일 아침의 ‘채플’시간에 일본인 교인 소전(小田)이라는 자가 일본도(日本刀)를 들고 나와 시가로 나가보니 송도고보 학생은 보이지 않았는데 만약 송도고보생이 만세를 불렀다면 이 칼로 목을 쳤을 것이라고 위협한 일이 있었다.
3월 3일 저녁에 송도고보생 2백여 명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돌진해 나갔다. 그 때 천수백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리고 있었다. 일부의 고보생들은 파출소의 창문을 파괴하였다. 이 때 호수돈 여학생들은 기숙사에 갇힌 채 만세를 계속하고 있었다.
3월 4일에는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송도고보생을 비롯한 백여명의 시위 군중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을 지나서 관덕정(觀德亭)을 향하며 행진하였다. 이날 일제의 기마대와 소방대는 전일과 달리 시위군중을 더욱 탄압하였다.
3월 5일에는 개성시내의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이상에서 보더라도 개성의 독립만세운동은 학생의 주도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월 3일, 4일의 만세시위로 징역형을 받은 청년 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한종석(韓宗錫)·김익룡(金益龍)·강부민(姜富民)·신후승(辛厚承)·심영식(沈永植)·송영록(宋永祿)·박종림(朴宗林)·심적룡(沈赤龍)·김정식(金貞植)·김익중(金翊重)·남흥성(南興成)·안덕삼(安德三)·고민룡(高敏龍)·김수천(金壽千).6)
3·1운동이 좌절된 뒤에도 개성에서는 민족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학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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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앞의 3.1운동사 (상) p.196.
6) 1965년 ≪신동아(新東亞)≫ 3월호 pp.74~79. 이경신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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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반일 결사를 조직하였다.
개성에서 서적판매업을 하던 임치대(林致玳)는 3월 3일에도 계속된 서울의 만세운동을 본 뒤, 고향으로 돌아간 다음날, 송도고보의 유흥준(兪興璿), 개성학당(開城學堂)의 임병구(林柄九)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조직체의 결정을 협의하였다. 그 이유는 만세운동에 보다 다수의 군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가지는 요원들이 선전과 동원을 담당해야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송도고보 4년이던 박영배(朴永培) 등도 참여 시켜 조선독립개성회(朝鮮獨立開城會)를 발기하여 활동을 전개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성복심법원에서 박치대·유흥준은 징역 1년, 임병구는 징역 8월이라는 징역형을 받았다.7)
한편 개성군 중면(中面) 대룡리(大龍里)에 살던 보통학교 4학년, 상훈(尙燻)은 3월 31일 부터 4월 2일에 이르기까지 대룡리 부근의 무명산(無名山) 위에 수십명의 마을 사람과 같이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제창하였다. 상훈은 특히 무명산에서 만세를 부를 때, 서울에서 송달되어온 ≪조선독립신문≫, 경고문, 경고 등의 선전문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폈다. 이로 말미암아 상훈(尙燻)은 징역 1년의 형을 받았다.8)
6. 파주(坡州) 보통학교
파주에서는 3월 10일, 구세군의 임명애(林明愛)가 와석면(瓦石面) 교하리 보통학교 운동장에 집합한 그 곳 학생 1백명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학생들도 일제히 여기에 참여하여 기세를 올렸다.
3월 25일 김수덕·김선명·염규호·임명애는 염규호의 집에서 김창실 등과 모의한 끝에 새로운 규모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합의를 보고 ‘3월 28일 이민(里民) 일동은 환산으로 모여 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요지의 선전문을 작성한 후 약 60매를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좌절되어 임명애[32·경기도 파주군 와석면[瓦石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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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3·1운동재판기록 pp.516~518, 판결문, ‘비고’ 참조.
8) 앞의 책 pp.527~529,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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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리[河里] 578)은 징역 1년 6월, 같은 마을의 김수덕(학생·16)·염규호(廉圭浩)·김선명(金善明)은 징역 1년에 처해졌다.9)
제2절 황해도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해주(海州)군 추화면 추화(秋花) 보통학교
3월 12일, 해주군 추화면 악현리(樂晛里) 청단(靑丹) 장터에서 6백여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을 벌렸다.
3월 12일은 청단 장날이었는데 청단 시장의 젊은 상인이던 김택근(金澤根)·김은택(金恩澤)과 연백군(灌白郡) 괘궁면(弓面)의 청년 조인배(趙仁培) 그리고 보통학교 학생이던 서병하(徐丙夏)·엄성대(嚴戒大)·이봉소(李鳳詔)·오교중(吳敎重)·김두남(金斗南) 등은 군중의 선두에서 이날의 만세와 시위를 선도하였다.
특히 김은택 등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일제의 행정은 마땅히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
보통학교 학생인 서병하는 만세시위로 말미암아 구속되어, 해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1년 6월의 징역에 처해졌으므로 상고 했으나 기각되고 말았다. 서병하는 상고 이유서에서 “금번 만국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론이 타국의 속령인 나라는 해방된다고 천명하였으며 조선의 서울에서도 민족 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국민이 모두 만세를 외침에 따라서 본인도 역시 독립만세를 불렀던 것이며 하등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처벌을 당함은 일체 불복하는 까닭에 상고한다”는 의견을 말하고 있다.
학생 이봉소는 상고 이유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나는 본시 조선 사람으로 금번 만국 평화회의가 천명한 민족자결론의 타국의 속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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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동서, pp.555~557, 판결문.
10) 앞의 ≪3. 1운동사≫ (상),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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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을 제창하였음에 대해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른 만세가 무슨 죄가 되겠는가.
학생 오교근·전두남도 이상 두 학생과 비슷한 상고이유서를 제시하고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11)
2. 백천읍(白川邑) 창동학교(彰東學液) 및 기타 학생 활동
백천읍내의 만세운동은 3월 1일의 서울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는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 최은희(崔恩喜)가 이 곳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의 만세 정보를 알려줌으로써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앞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최성모(崔聖模)를 통하여 독립선언서와 함께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락을 백천읍 감리교회 목사이던 임진국(林縝國)에게 취했으나 임 진국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당시 우리 사회에는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는 고을을 무성군(無聲郡)이라 하였다. 때문에 최은희가 서울 소식을 이 고을에 전한 것은 이지방의 행동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곳 창동학교(彰東學校)의 교사인 송흥국(宋興國)·이정식(李廷植) 등,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만세운동 준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송흥극은 최은희의 집에서 금융조합의 등사판을 빌어다가 격문, 경고문 그리고 충고문을 준비하였다.
3월 30일 오전을 거사일시로 정했다. 당일 많은 군중들이 은천면(銀川面) 연남리(南里) 장터로 모이기 시작했다. 창동학교의 교사로서 이 고을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송흥국이 절구통 위에 올라서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연이어 자기가 작성하여 등사한
세계의 대세가 우리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되니 우리 동포들은 다 같이 일어나서 일본 침략자들의 통치와 압제를 벗어나 독립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
는 내용으로 된 충고문을 읽어 내려갔다. 군중들이 더 모여들어 1천명이 넘었다. 이때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조두섭(趙斗燮)·유재현(劉在賢) 그리고 인천상업학교학생 유택선도 크게 활동하였으며 창동학교 학생 다수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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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3·1운동재판기록≫pp.587~589,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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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읍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구속되어 징역에 처해진 주역들의 인적상황은 다음과 같다.
송흥국(宋興國) (19) 교사, 연백군(延白郡) 은천면(銀川面) 연동리(蓮東里)
이정식(李廷植) (27) 교사, 동군 동면 연남리(漣南里)
염천태(廉天太) (22) 잡화상, 동면 동리
오예제(吳禮濟) (22) 물산조합 서기, 동면 동리
조두섭(趙斗燮) (19) 경성고보학생, 동면 동리
유택선(劉澤瑄) (20) 인천상업학생, 동면 영천리
유재현(劉在賢) (21) 경성고보학생, 동면 연남리
이완구(李玩求) (20) 잡화상, 동면 동리
이상의 청년 학생들은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민족이 자주 독립을 희망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킴은 정의의 행위인즉 죄책이 없음에도 처벌되었음은 부당하다’는 요지의 상고이유서를 내고 상고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고 8개월~2년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12)
제3절 평남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평양(平壤)의 각 학교
평양학생의 3·1운동 참여는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지방에는 3·1운동 이전에도 기독교를 비롯한 반일 세력이 강했었고 서북의 세력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평양의 학생독립운동은 기독교를 계통으로 형성된 서울 주도층과의 연락 이외에도 상해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 진영과도 연락을 취하여 거사 조직을 추진하였다.
평양학생의 3·1운동 준비에는 그 배경으로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길선주(吉善宙)·신홍식(申洪植)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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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596~599. 앞의 ≪3·1운동사≫ (상) pp.24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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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되는 장로교파와 감리교파의 중요 인물들을 지도자로 하고 한편으로 천도교측의 동조를 얻었으며, 강규찬(姜奎燦)·안세환(安世桓)·변인서(邊麟瑞)·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김성탁(金聖鐸)·윤성운(尹聖運) 등을 주동으로 하는 예비군적 태세가 형성되었다. 교사측으로는 박인관·황찬영(黃贊永)·함석원(咸錫元)·곽권응(郭權膺)·김제현(金齊絃)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층으로는 이보식(李普植)·박형룡(朴亨龍) 등이 주동이 되어 각급 학교에서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13)
학생측에서는 주로 광성고보생과 숭의여학생 등이 안정석(安貞錫)이라는 독신 여성 집에서 태극기의 작성과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마침 장소가 평양 중심지인 이향리(履鄕里) 60번지에 위치하였고 안씨집이 친일파의 가문이었으므로 일경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 안정석은 그때 자금 40원도 희사하여 주었다.14)
3월 1일의 참가 학교는 숭실대학, 숭실중학, 광성고보, 평양고보, 숭의여학교, 숭덕학교, 숭현학교 등이었는데 각 학교의 대표자들은 3월 1일에 따로 모였다. 그들은 각각 지역을 분담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도 하였다.15)
3월 1일은 닥쳐왔다. 기성인과 학생들은 처음에 일경의 경계를 위장하기 위하여 고종의 봉도식을 빙자한 집회를 열었다. 장로교파의 장태현 교회에 3천명, 감리교파의 남산현 교회에 2천명 정도의 군중이 모였다.16)
이러한 군중의 모임은 당시의 평양 인구가 4만 내외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 8분의 1에 해당하는 수라고 말할 수 있다. 오후 2시에 예배당의 종이 울리면 일제히 만세시위에 들어가기로 미리 연락되어 있었다. 예정된 시간에 교회의 종소리는 울렸다. 봉도식은 갑자기 독립 투쟁의 장소로 돌변하였고 각급 학교의 학생 행동대가 선두에서 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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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당조만식(曺晩植)≫ (1966년판) pp.34~35, 앞의 ‘소요와 학교’ (김정명편 ≪평양학생≫ [1] p.854).
14) 1965년 ≪신동아≫ 3월호, 안정석(安貞錫)의 회고.
15) 1946년 ≪신천지≫ 3월호 홍종인(洪鍾仁)의 ‘평양학생 사건’.
16) 앞의 ≪고당조만식≫ p.39. 일제측의 ≪독립운동에관한건≫ 제2보 (≪현·자≫ (25) 조선 ① p.285)에는 장태현 교회에 1천 명, 남 산현교회에 8백 명 모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제 군경은 축소 보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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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나가 태극기를 흔들고 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위의 전위에서 목이 터지도록 조선독립만세를 호창하였다.17)
장태현 교회 계통의 시위 군중은 종로를 통과하여 남대문 경찰서 광장으로 행진하였고 남산현 교회 계통의 군중은 영창 여관 앞을 지나서 남대문 경찰서를 거처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시가로 들어갔다. 이 두 계통의 시위대 선두는 모두 학생이 담당하고 있었다.
흥분한 군중이 남대문 경찰서를 포위하자 일경은 발포로 탄압을 가했고 시위대와의 사이에 큰 충둘이 일어났다. 군경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궐기 군중에게 물벼락을 퍼부었다.18)
일단 군중은 해산되었으나 학생들은 3월 1일 저녁에 다시 숭실학교에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각급 학교에서 각 백명 이상의 학생이 참가하였다. 야간에 벌여진 학생시위는 악대를 선두로 하여 숭실대학, 평양고보, 광성고보, 숭실대학 등의 순서로 시내로 몰려 나가면서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서문통으로 진출했을 때 또다시 경찰과 충돌하여 해산을 당했으나 계속하여 시내 요소에서 만세를 고창하여 평양 시내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날 밤 학생 시위대가 지나가는 곳마다 연도 민가에서는 불을 밝혀 주면서 환호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19)
그런데 평양의 학생 운동은 3월 1일에 끝난 것이 아니라 각 사립학교, 관 공립학교에서 쉴새없이 계속되었다. 4월에 개학이 된 이후에도 수시로 만세운동은 벌어졌다.20)
2. 평양청년, 학생 계속 투쟁
그리고 주요섭(朱耀燮)을 비롯한 문학 청년들은 [푸른 꽃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뉴우스≫를 발간 배부하였으며 한편 상해에서 들어온 ≪독립신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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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앞의 홍종인의 ‘평양학생 사건’
18) 앞의 ≪고당조만식≫p. 41.
19) 앞의 홍종인의 ‘평양학생 사건’.
20) 숭실대학, 숭실중학, 광성고보, 숭의여학교, 숭덕학교 등의 사립교와 평양고보, 평양여고보 등의 관립교가 평양지방학교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앞의 ≪고당조만식≫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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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사하여 살포하였는데 그 활동 분자는 모두 학생들이었다.21)3월 1일에서 3월 8일까지의 투쟁으로 말미암아 4백 7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중 주모 학생 9명이 송국되었다.22)
평양에서 독립 시위가 시작되자 각급 학교는 장기 휴교로 들어간다. 또한 많은 학생들이 출신지방으로 하향하여지방의 투쟁을 조직, 지도하였다.23)4월 11일에 수업을 개시하였으나 평양고보는 재적 2백 93명 중 1백 76명이 출석하였고, 신입생 1백 49명 중 1백 16명이 출석하였다. 평양여자고보에는 재적 90명 중 47명이 출석하고 신입생 53명 중 38명의 출석이 있었는데24)사립학교는 이보다 더 낮은 출석률이 나타난 것은 물론이다.
당시의 외국인들은 대체로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동정적이었으며 그러한 현상은 평양지방에서도 같은 상태로 나타났다. 외국인들의 대부분은 교회직이나 학교 교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중에서 일제 군경에 쫓기어 수배 중인 학생들과 ≪독립신문≫ 발행에 편의를 제공하다가 발각된 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들어 본다.
4월초 평남경찰부는 평양지방학생의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하며 외국인(주로 미국인)의 가택을 수색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 등이 발각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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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앞의 홍종인의 ‘평양학생 사건’, ≪고당조만식≫p.43.
22) 앞의 ≪신동아≫ (1965) 3월호, 안정석의 회고.
33) ≪고경≫ 제6099호, ≪독립운동에관한건≫ 제9보 (≪현·자≫ (25) ‘조선’ ① pp.297~299의 (2) 평안남도에 관한 보고문에서 평양야소교 경영학교 생도 전부와 관립고등보통학교 생도의 대부분이 향리로 돌아가 전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있는 정황을 보고하고 있다는 점과 서울의 학생들도 각도 향리에 귀향하여 동일한 작용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경계와 주의를 환기 시키고 있다. (≪고경≫ 제5884호 ‘조선 각지의 독립운동에관한건’ 제6호 참조.
24) 1919년 4월 17일≪소요사건보고임시보≫제4보 ‘학교 생도 출석 상황’,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간) ② 자료편 pp. 84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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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직업
국적
체포 학생 명단
학교명
A.W.Gillis
북장로파 숭실 학교 교사
미국
홍인엽(洪仁燁)
숭실중학



김정상(金鼎相)
경성의학 전문학교



오능조(吳能祚)
중화해압면장,장로교회조사
Ele M.Moury
북장로파 선교사
미국
박기복(朴基福)
숭실중학



김태술(金泰述)
숭실학교(대학부)



이인선(李仁善)
숭실중학



김영순(金永淳)
숭실중학 교사
Semuel. A.Moffett
북장로파 선교사
미국
이겸호(李謙浩)
숭실학교(대학부)
William M.Baird
북장로파 선교사
미국


이상의 각 외국인집에서 등사판 휴교 선언서, ≪독립신문≫,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 기록 등을 압수했고 또한 이들과 평소에 학자금 등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해 오던 학생들의 신원도 발각되었다.
평양 방면의 외국인과 관계를 맺고 서울에 유학하여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 청년 학생들은 아래와 같다.
김한영·김원벽·하태흥·김성만·김상복·최평접·서광진(徐光璡)·이병주·김마리아(金馬利亞)·박인복·임충실·어윤희(魚允姬)·이애주(李愛主) 등이다.25)
특히 Moury와 Moffett의 두 선교사는 교회 사업과 교육 사업에 투신한 평양지방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 중 Moury는 3·1운동에 협력하다가 투옥까지 당하였던 선교사이다. 숭실학교 학생 이겸호는 Moffett의 비서를 겸하고 있었고 이보식(李輔植) 이인선 등의 학생은 ≪독립신문≫의 등사와 배부에 헌신적인 활약을 하였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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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919년 4월 8일 ≪고경≫ 제19370호 ‘미국인 가택 수색에 관한 건’ (≪현·자≫ (26) ‘조선’ ② pp. 436~438).
26) 앞의 ≪고당조만식≫ pp. 57~58.
마우리 목사는 1909년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평양에 왔다. 3·1운동 당시에는 숭인학교와 여학교인 숭덕학교라는 두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숭실학교에서도 생물학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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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후에도 학생의 반일 동요는 휴식하지 않았다. 소위 천장절을 맞이하여 평양의 몇 학교 남녀 학생은 당일의 행사를 거부하고 시내 세 군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일장기를 찢어 버리는 운동을 벌였다.27)11월 3일에는 평양고보에서 3·1운동 당시의 강력한 행동 주동자들이던 학생 25명이 한꺼번에 등교하여 수업을 거부하는 선동을 벌이고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교문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내로 시위를 가열화시키다가 드디어 경찰과 충돌하였다. 오후 1시쯤 이날의 학생 시위대는 다시 분산하였으나 수개처에서 만세를 계속 고창하여 시민을 크게 자극하였다.28)
따라서 11월 3일의 시위를 계속 발전시키기 위하여 숭실중학의 이기환은 장태현 교회에서 평양고보생 3명과 회합을 가지고 4일에 대대적 독립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기환 집에서 준비한 태극기 30매도 압수당했다.
11월 7일에는 평양보통학교 4학년 학생 30명이 동맹 퇴교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광성고보생의 권유로 통곡 운동에 참여할 태세를 취하자는데 있었다. 숭실중학생 황용하는 망곡(望哭) 운동 선언문을 뿌리다가 체포되어 1백여 부의 선전문을 압수당하고 말았다.29)
숭실학교 고등과 학생 이기철(李基哲)·임향훈(林向勳)·강서빈(巖瑞彬)은 11월 3일, 숭실여학교 학생의 시위운동 당시의 태극기를 인쇄하여 나누어 준 혐의로 체포 되었다.30)한편 지난 9월 중에는 평양고보 교사 윤종정(尹宗禎), 평양숭덕학교 교감정두현(동경제대 농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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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당시에는 이보식(李輔植) 등의 학생을 마우리 목사 집에 숨겨 주는 등 독립운동에 동정적이라 하여 숭실학교장 사무엘 모페트와 함께 구속되었는데, 마우리는 3번에서 50원의 벌금을 물고 석방되었다. 중일 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마우리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심해졌다. 1941년 마우리는 한국을 떠났으나 1967년 숭실학교 개교 70주년(10월 10일)에 한국에 초청된 바 있고, 1969년 3월(당시 89세)에 미국 오하이오주 컬럼버스시 자택에서 ≪동아일보≫의 진철수(秦哲洙) 특파원과 면담하였다. (1969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참조).
27) ≪조특(朝特)≫ 제266호, 조선 군사령관 발 ‘천장절 축일에 있어서 각 지(地) 평정(平淨)의 건’ (김정명편 ≪평양학생≫ (1) 분책 p. 163).
28) ≪조특≫ 제268호 ‘평양고등보통학교 생도 시위 운동 계획의 건’ (위의 ≪평양학생≫ (1) 분책 p. 167). 앞의 홍종인의 ‘평양학생 사건’ 및 앞의 ‘소요와 학교’ 참조.
29) ≪고경≫ 제32262호 ‘평양지방의 학교 운동 등 보고의 건’ (앞의 ≪평양학생≫(1) 분책 pp. 178~179).
30) ≪고경≫ 제32778호(1919년 11월 18일). ≪민청휘보≫ (≪현·자≫ (25) ‘조선’ ① p.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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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고보 교사 김홍건·평양신학교 학생인 임종은(林鍾恩) 등이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12월초에 검거당하였던 것이다.31)
1920년 3월 1일에는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인 독립운동자 3백여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평양에서도 3·1운동 기념 투쟁을 벌이려 했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기독교 계통의 학생 50여 명만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천에서는 3회에 걸쳐 학생에 의한 만세운동이 있었다.32)
또한 동년 3월 1일 숭덕학교장 한병찬은 최금식 등의 학생에게 3·1운동 기념사를 작성하여 보냈고 학생들은 교정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 한 바 있다.33)
이상과 같이 평양지방의 학생 운동은 그것이 평양 시내에 대한 충격적인 파급으로만 끝나지 않았고 서북지방의 궐기를 촉구하고 고무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선천 신성(信聖)학교 중심의 남녀 학생이 봉기한 것34)과 함께 평양지방학생 운동의 3·1학생독립운동에 던진 영향은 높이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제4절 평북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선천(宣川)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
선천에서 3·1운동의 첫 봉화를 올린 곳은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학생들로부터 시작한다.
이 학교는 평양숭실학교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경영하고 있었다. 당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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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고경≫ 제34850호 ‘대한민국회 급 대한독립청년단 소속 체포의 건’ (앞의 ≪평양학생≫(1) 분책 pp. 227~228).
32) ≪조특≫ 조선군 사령관 발 ‘경성 급 평양의 치안에 관한 보고의 건’ (앞의 ≪평양학생≫(1) 분책 pp. 290~291).
33) ≪고경≫ 제8548호(1920년 3월 25일) ‘숭덕학교 교사의 독립운동 등의 건’(앞의 “평양학생”(1) p. 310).
34) ≪고경≫ 제5410호 ‘독립운동에관한건’ 제2보, 앞의≪평양학생≫ (1) p.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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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은 그 연령이 17~30세 내외의 나이 먹은 학생들이 많았기 매문에 그 지각하는 바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신성중학교 학생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서북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견지에서도 당시 학생독립운동의 중요한 한 사례가 되는 것이다.
33인 중에서도 지도급의 인물이던 이승훈은 당시 신성중학교 성경교사이던 홍성익(洪盛益)에게 신성중학생을 동원하여 독립을 위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홍성익은 학교 근처에 있던 남교회(南敎會)의 목사 김창석(金昌錫) 및 동료 교사이던 김지웅(金志雄)·양준명(梁濬明) 등과 연락하여 몇 차례의 모임을 가지고 준비를 추진하였다. 특히 교내에서의 준비는 김지웅에게 일임하였다. 김지웅은 2월 26일경에 당시 4학년 학생이던 장일현(張日炫)·고병간(高秉幹), 3학년 박찬빈(朴贊彬)·김봉성(金鳳性) 등을 불러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 한장을 건네주며 많이 등사할 것을 일렀다.
한편 학생들에게 3월 1일에 사용할 태극기도 많이 만들 것을 동시에 지시하여 교내에서 준비 작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준비 작업에는 앞에서 적은 4학년 장일현 등 4명이외에 3학년생이던 김선량(金善亮)·김하현(金夏鉉)·임창모(林昌模)·이정화(李楨華)·김용수(金龍洙)·독고선(獨孤璇)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그들은 신성중학교 기숙사 케롤린 홀 4층 지붕밑에 숨어 등사판으로 2·8독립선언서를 찍어내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그리고 ‘대호, 조선청년’이라는 큰 글씨로 깃발도 여러 개 만들었다.
홍성익 등은 거사일시를 3월 1일 하오 두시 신성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일제히 시위 투쟁에 돌입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김지웅은 준비 작업에 참여하였던 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당일 정오의 기도시간에 전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 때 홍성익 교사는 예배를 주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학생 일동에게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학생들은 알고 있는 가”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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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홍성익은 종이 한장을 펴서 흑판에 붙이고 자기의 손가락을 깨물은 피로 ‘조선 독립’이라는 혈서를 썼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심전심으로 대체로 알고 있던 일이라 일제히 “선생님 알았읍니다”하고 외쳤다. 동료 교사들은 홍성익 교사의 손가락을 싸매어 주었다. 장내에 일시에 비장한 감격이 감돌았다.
신성중학교의 전교 학생과 교직원들은 일제히 만세시위 투쟁에 돌입하였다.
주동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두의 민중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목적으로 여러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주었다.
이 때 신성중학교의 종소리는 크게 울려퍼졌다.
한편 미리 연락해 두었던 자매학교인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학생 60여명도 함께 달려나와 합류하였다. 이리하여 신성학교 학생 150여명과 보성여학교 학생들은 대열을 지어 남 교회앞을 지나 북 교회를 거쳐 달려서 거리를 진출하였다. 이러할 때 집집마다 나누어 준 태극기를 흔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의 시위 대열에 가담해 주었다.
양교 학생들과 일반 민중들이 천남동(川南洞) 시장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 수가 1천명이 넘는 군중세력이 되었다. 그때 신성중학교 교사 김지웅은 고무신 파는 손수레 위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 선언서는 천도교측의 김상설(金商說)이 서울에서 받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전날 신성중학교 학생들이 준비한 2·8선언서는 낭독하지 않았다.
드디어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만세시위가 시작하였다.
신성중학 교사이던 정상인(鄭尙仁)은 선두에 나서서 시위를 선도하였고 학생들은 준비하였던 ‘대호 ! 조선 청년’이라고 쓴 깃발과 긴 장대에 단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우고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위세를 떨쳤다. 태극기의 기수는 강신혁(姜信赫)이었다.
학생들은 독립가를 고창하며 행진하였다.
이 같은 시위대열은 군청과 경찰서 앞을 지나면서 시위를 벌렸다. 군중의 시위가 한시간 쯤 계속되었을 때 선천 수비대와 기마경찰대가 출동하여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일제 군경에 대항하여 충돌하니 일본군은 군중을 향하여 발사하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만세 대열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태극기 기수 강신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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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절명하였으며 만세 대열을 선두에서 주도하던 정상인 교사와 학생 김하현은 부상을 당했다.
일제 군경은 흩어지고 있던 군중을 체포하였는데 현장에서 50~60명이 검거되었다.
시위대열이 대체로 진압이 되자 군경은 신성중학교, 그리고 기숙사, 교회목사관, 학교교직원의 사택 등을 철저히 수색하여 검거인원은 증가하였다.
이날의 피검거자 총수는 1백명이 넘었는데 그 대부분의 신성중학 학생과 교직원들이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국장일이었다. 3월 1일의 시위 교사, 학생 중심의 시위 투쟁이었다고 하면 3월 3일에는 천도교인과 예수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린 성격을 지니고 있다.
3월 1일 선친의 학생 중심 시위로 말미암아 징역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김지웅(金志雄)·박찬빈(朴贊彬)·김봉성(金鳳性)·장일현(張日炫)·장동근(張東根)·양시홍(楊始弘)·김우문(金字文)·독고선(獨孤璇)·김석창(金錫昌)·김득학(金得學)·김진수(金珍洙)·정치화(鄧致和)·김승광(金承光)·고병간(高秉幹)·김병규(金炳奎)·김봉준(金鳳俊)·김상옥(金尙沃)·계시항(桂時恒)·백시찬(白時瓚)·문봉순(文鳳淳)·한준겸(韓俊謙)·이병준(李炳俊)·오택렬(吳宅烈)·유동만(柳東萬)·김종욱(金宗昱)·허군청(許君淸)·이기동(李起東)·최중옥(崔重玉)·박찬빈(朴贊彬)·이정화(李楨華)·김득영(金得榮)·김병옥(金秉玉)·김용수(金龍守)·길경춘(吉景春)·계창업(桂昌業)·임창모(林昌模)·김두필(皇斗泌)·이문선(李文善).
1919년의 만세시위가 지나간 뒤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보성여학교측에서 주동이 되어 3·1독립만세 기념만세를 불렀다.
당시 신성중학교 주변의 독립사상을 알아보기 위하여 동교 교사이던 김지웅(金志雄)의 상고취지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조선민족은 고대문명을 가진 한종족으로서 4천 3백년 역사 이래 일시 중국에 정삭(正朔)을 보낸 것은 양국 황실의 교의를 돈독히 하는 예의에 지나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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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 문명의 일치한 제도에 기인한 것이고, 실제로 중국의 기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일체 타 민족의 기만 압제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 일본은 3국이래 교통이 빈번하여 백제, 신라로부터 각종의 문명을 받아들여 그 후의에 감사하여 종종 삼국을 방문하였던 것이며, 명치 초년(明治初年)부터 세계의 문명사조에 접촉한 일본황실은 덕천 막부(德川幕府)로 부터 대정(大政)의 봉환을 받은 뒤, 국서를 조선 정부에 제출하였으나, 대원군(大院君) 섭정 (攝政)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신임이 되지 못하여 특사는 배척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서향융성(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이 대두 하였으나, 세계 평화와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는 일본 정치가는 한일의 관계는 순치의 관계에 있는 입장으로서, 동양이 서로 반복함은 남에게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주기 쉬운 방휼(蚌鷸)의 다툼이 되므로, 서로 질시하지 말고 자기 나라의 야욕만 채우려는 일이 없이 서로 화친하고, 서로 돕고 문명의 세계로 전진하도록 하여, 이때 정한론은 서향융성과 함께 성산(城山 : 서남전쟁)의 전역 (戰役)에서 종식되어 버렸다.
그 뒤 병자년간에, 천진(天津)으로부터 돌아온 일본 함대(艦隊) 운양호(雲揚號) 포격사건에 의해서 국제상의 갈등을 발생케 하였으나, 일본은 이것으로 감정상의 문제에 붙인 이래 국책(國策)으로 배상을 요구치 않고, 도리혀 수호조약을 체결하는 계기로 삼았었는데, 이것으로 보면 당시 일본 정치가의 확고한 국책은 한국, 청국에 대해서 강권 또는 침략주의를 채용치 않고 서로 돕고 서로 화의(和議)하여, 동양 전국(東洋全局)의 대세를 평화로 유지시키려는 것이 명확하여 조선 역시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혁신 개화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청국에는 소위 이홍장(李鴻章)·원세개(袁世凱) 같은 정치가가 있어서 침략 야심으로서 조선을 정복하려 하여 갑오년 가을, 무명 의사를 일으키므로 부터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고 또 동양 평화를 유지하려고 많은 생령을 희생하고 방대한 재산을 낭비했다.
결과 승리는 일본에 돌려져서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체결하고 일본은 이에 의해서 약간의 배상과 수개의 섬을 얻었었는데 외면상으로는 큰 이익이 없는 듯하지만 내부적으로 생각하면 조선의 독립은 이에서 완성되었고, 청일 양국관계는 이에서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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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동양 전국의 평화는 여기에 기초가 되었다. 일본의 실질적 이익은 이 얼마나 정의와 명예상 실로 얻기 어려운 기회를 만나 일본 정치가의 공명적 성공이었으며 이 전쟁은 즉 우리 민족이 문명의 지역으로 전진하려는 일대 복음으로 세계대세를 통찰 할 일대 목탁이었다. 우리 조야의 관민은 먼저 일본의 후의에 감사하고 이어 자국의 개혁을 도모하며 착착 전진하려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의 세력이 남하하여 만주 및 조선에 대한 야심이 만만하여져서 동양의 선진국인 일본은 만약 러시아의 그와 같은 행동을 방관해 버린다면, 동양의 평화는 유지하기 어렵고 조선의 독립도 보존하기 어려워 자국의 안위에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러시아와 교전을 결심하고 한국과는 공수 동맹을 체결하였다.
우리조선의 관민은 큰 동정과 환심을 표하여 교통, 운반 등에 다대한 노력을 하고 이에 찬성하였다. 정의의 총검을 든 일본은 그와 같은 협조와 성원이 있는 이상, 반드시 하늘의 가호도 있을 것이므로 이 전쟁도 승리는 일본으로 돌아갔었는데, 농(朧)을 얻고 촉(蜀)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청일, 노일 양전쟁에서 승리를 얻은 일본은 이후 강국으로 자처하고 강권주의, 침략주의의 18~19세기적 유물인 낡은 사상, 사조에 접촉해서 동양 평화를 자국의 침략정책 밑에 감추고 국제 맹약을 자가의 사기술 밑에 묻어버리는 것을 꺼리지도 않게 되어서 인도주의니 공평 정직이니 하는 관념은 지금이야말로 소멸되고, 루즈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쓰에서 열린 강화 회의에도 동맹국인 한국의 참가를 허락하지 아니한 채 노·일 양국의 협의에 의해서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러시아로부터 양수하여서 한국에 대한 정책을 일변하고 공조동진(共助同進)으로 목적을 한 국책을 식민지 평탄주의로 바꾸어 독립을 보존하는 것을 목적하는 조약이 보호 합병의 정책으로 변하였다. 을사 가을에 이등박문(伊藤博文)·장곡천(長谷川)·임권조(林權助) 등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소위 보호조약이라는 것을 우리 정부로 하여금 강제로 체결케 하였는데, 국가의 대원수, 정부의 모든 관료 및 인민은 모두 반대하여 이 조약을 배척하므로 부터 당시의 조약은 성립되지 못하였으나 결국 강권주의의 억압 밑에서 우리 한국은 마침내 통감정치 밑에 고통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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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경찰권이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을 당하고 국왕은 자리를 빼앗기어 최종으로 소위 합병 주구(走狗)의 내각이 성립하므로 망국의 비운을 당하게 되었다.
그 뒤, 경술 합병이 있은 뒤, 10년간 국권회복을 위해서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지금까지 수십만의 생명을 희생하여 왔었는데 황천의 명명과 인류의 양심으로 세계를 개조하려는 정의, 인도, 생존이 승리를 얻은 만국 강화회의에서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자기가 원치 않는 통치하에 요구치 않음에 관해 무력을 쓰지 않고 광명정대하게 위원을 강화회의에 파견하도록 노력하라는 1월 24일, 5대국회의 결의안에 의해 세계 민족의 자결주의를 천하에 통고한 이래, 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발칸 등지에서 다수 국가의 신건설이 있고, 또 전날 타 민족의 통치하에 지배를 받던 민족 중, 문명의 정도가 충분히 자결을 주장할 만한 경우에 있어서 독립국가를 건설한 폴란드·체코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이 합의적인 연방 또는 타의 영토였던 것 까지도 자결할 수 있는 오늘에 있어서 원래 부자연 불합리한 강제병합에 해당하는 우리민족이 자주독립해야 할 것은 하늘이 명하는 것이며 시대의 대세, 인류의 공생공존에 기인하는 것으로 누가 이를 저지 하랴, 그래서 강화회의 벽두 우리나라는 독립국이 되고 우리민족은 자주민임을 자결하고 위원을 파리 강화 준비회의에 파견하여 제의케하고 3월 1일을 기해서 조선 독립을 천하에 공포하였다.
당시 본인은 본부의 명령을 받들어 선천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1백수십명의 학생 및 수백명의 시민이 회집하여서 선언식을 행한 뒤에 선언서를 배부하고 시내 각 동을 순회하여 기쁘게 축하하였을 뿐, 관청을 위협하거나 관리에게 저항하는 것 같은 기타 일체의 폭행을 한 사실이 없으므로 소요 또는 보안에 저촉한 사실이 없는데 무식한지방 관리는 상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도처에서 양민, 학생을 압송하고 경찰서를 거쳐 신의주 지청에 이르러 본인은 보안법을 적용, 징역 3년의 처분을 받았으므로 공소를 신립하였었는데 복심법원에서는 죄목을 변경하여 출판법을 적용하여 징역 3년에 처하였으므로 이를 불복하고 상고를 한다.
원래 조선 독립안은 강화회의에 제출한 것이므로 이에 대한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문제 해결 전에는 본인은 누구의 제제도 받을 이유가 없고, 누구도 본인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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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장일현(張日炫)의 상고 취지는 다음과 같다.
본인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당당한 조선민족으로서 어렸을 때, 일본의 불합리한 강제 합병을 받고 우리 민족의 생활, 정신, 문명, 기타 등 여러 방면에서 참혹하게도 좀 먹어져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온 것을 온 생애를 통해서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천운이 순환하여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어서, 작년까지 온 세계를 흔들리게한 독일 카이저의 군주국가가 패하고 윌슨씨의 신선한 민족주의는 국제동맹이 용납하는바 되어 세계에 편판하여 각 민족은 이를 환영하고 이 재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난 우지가 압제의 생활과 식민지 대우를 받아온 조선민족된 자, 어찌 방관만 할 수 있으리오.
이것이야 말로 실로 자연적이고 본능적이므로 본인은 지난 2월 27일 동경의 조선 유학생이 저작하여 출판한 ‘조선 독립선언서’ 및 ≪매일신보≫ 번역문, 행보가, 태극기 등에 근거하여 본교 김지웅 선생의 소개로 동창 학우회 3인과 함께 이를 등사판으로 등사하기로 하여 선언서 및 국기는 각 5매, 기타는 각 1백매를 등사하고 또 3월 1일 상오 12시 기도회 때에 홍성익 선생의 열렬한 독립 연설을 듣고 즉시 김지웅의 지휘로 등사한 서류를 3인이 각 나누어 가지고 학생 일동과 함께 본정으로 갔었는데 김지웅이 조선 독립으로 정당하게 선언한 뒤, 시민 약 5~6백명이 각각 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므로 본인도 열심히 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외쳤는데, 무리하게도 군인 무리들이 군중에게 무기를 함부로 써서 이들을 체포할 때에, 본인 역시 체포되어 지청 및 복심법원의 법율 오해의 결과로, 법율상 문제도 아니되는 등사를 가지고 마치 활자인쇄인양 간주하고 출판법을 적용할 뿐만 아니라 양 법원은 똑같이 일언반구의 변론도 허락하지 않는 엄중한 형벌을 과한다는 것은 어찌 능히 문명제국의 재판법으로 신성한 헌법 적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릇 등사라는 것은 손으로 쓴 수서와 같아 헌법은 차치하고 세계 야만국의 법제라 할지라도 인쇄와 같은 법율상의 책임을 과하는 일이 없고 또 문자상의 뜻으로 보아도 인쇄와는 전연 다른 것이며, 그리고 위 등사의 원본은 타인의 자작물로서 그 저작자인 동경 유학생 최팔용(崔八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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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7인은 이미 저작출판법 위반으로서 금고 9월에 처해졌으므로 지금 본인이 이것을 등사하였다고 해서 같은 시대, 같은 민족, 같은 법율로 징역 2년이라는 혹독한 벌을 처할 수 있겠는가.35)
2. 정주(定州) 오산학교(五山學被)
정주지방도 선천에 뒤떨어지지 않게 항일 독립 세력이 성장하고 있던 곳이다. 이지방에서도 일찌기 천도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이 같은 종교의 영향은 개화와 근대 민족을 발전시키는 발판을 넓혀 주었던 것이다.
정주의 3·1독립 시위는 3월 5일 1시반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기성인들의 만세시위 경과를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해야할 필요까지는 없으나 그 저항 정신의 격렬성은 다른지방과 비교될만치 철저했다는 사실만을 적어 두는 것이 좋겠다.
정주읍의 만세시위에는 2만 5천명이 넘는 군중이 참여하였다. 정주 주변의 각 면에서 수 많은 군중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만세를 외치던 군중의 선두에는 최석일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선도하고 있었다. 시위가 열광적으로 가열해지고 있을 때,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탄압에 나섰다. 일본 헌병은 태극기를 든 최석일의 팔을 일본도로 내리쳤다. 그 광경은 실로 무참했다. 최 석일은 이런 만행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팔과 함께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주어들어, 다시 흔들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그 때 일본 헌병은 다시 최의 왼팔을 내리쳤다. 최석일은 양팔을 삽시간에 잃었으나 이젠 입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광경이야 말로 침략자에 대한민족의 처참한 투쟁을 그대로 웅변해 주는 장면이었다. 마귀와 다름없이 날뛰는 헌병은 다시 최석일의 목을 쳤다. 최석일은 현장에서 장열한 순사를 하였다. 이리하여 3월 5일 정주읍내의 독립 시위에서는 일제군경이 퍼붓는 총탄에 92명이 쓰러졌고 70여명이 검거되는 막대한 희생을 냈다. 정주의 만세시위는 결사적인 민족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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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앞의 ≪3·1운동사≫(상) pp. 442~448,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852~859, ‘1919년, 형상, 제384호’, 1965년 ≪신동아≫ 3월호, pp. 131~132, 전달빈(全達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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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과정에서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 행위로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강서 모락장 학살 행위를 들며, 인명피해가 가장 많았던 곳은 이 정주읍 만세시위에 대한 학살사건이었다.
이상과 같은 주변 환경 속에서 오산학교의 만세시위가 전개된 것이다.
오산학교는 정주군 갈산면(葛山面) 익성리(益城里)에 있었다. 이 곳은 남강 이승훈의 거주지였고 경의선 고읍역(古邑驛)에서 약 5리쯤 떨어진 농촌이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이 온 정력을 기울여 설립 경영하던 신교육기관이었고 고당조만식(曺晩植)은 당시의 교장이었다.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만세시위는 용동교회와 오산학교 교직원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3월 31일 정주읍에서 있을 대대적인 시위운동과 때를 같이 하가로 했다. 이 지역은 학원도시였다. 때문에 오산학교의 거취는 이지방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오산학교 학생들이 당일 행동은 개시하자 주변 촌락에서 시위군중은 자꾸 불어 나갔다. 시위대열이 고읍역에 이르렀을 때 군경이 출동하여 관련자를 검거하였다. 일제는 이날의 시위에 보복하여 4월 2일, 이승훈이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던 오산학교 교사, 기숙사, 그리고 용동교회에 방화하여 전소시키고 말았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서 휴직중에 있던 조철호(趙喆鎬)가 체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그 뒤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애국자요 선각자였다.
오산학교의 만세시위로 상고했으나 기각당하고 징역에 처해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조만식(교장)·박기준(朴基濬[교사])·심재덕(沈在德[교사])·이기칙(李基則[학생])·이위춘(李位春[의생])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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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859~861. ‘1919년, ≪형상≫제268호, 312호’, 앞의 ≪3·1운동사≫(상) pp. 449~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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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강원도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철원(鐵原) 농업학교, 보통학교
철원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2일과 3일에 걸쳐 군내 여러 곳에 독립선언서가 뿌려지므로서 분위기는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철원지방에는 본래 유교적 전통이 강했으나 기독교가 빨리 전파되었고 천도교의 기반도 확대되었다. 거기에다 배영학교(倍英學校), 봉명학교(鳳鳴學校)가 일찌기 설립되어 신문화를 받아 들였고 배영학교가 폐교된 뒤에는 정의학교 그리고 감리교회에서 세운 전정의숙(專政義塾) 등의 교육기관은 항일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틀이 되고 있었다.
한편 철원농업학교와 보통학교는 비록 공립이었으나 이지방의 신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특히 3·1운동 당시 철원농업학교와 보통학교는 철원의 만세시위를 실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농업학교는 서북쪽, 봉명학교는 서쪽, 배영학교 자리에 있던 전정의숙은 중리(中里)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중리에는 감리교회와 노동야학(勞動夜學)이 있었다.
특히 이 노동야학은 철원의 젊은 청년층들이 시세(時勢)를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된 것이다.
철원의 만세운동 준비과정을 살펴보면 구체적으로는 청년층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되었다. 다른지방의 궐기정보를 철원으로 옮기는데 감리교회 박연서 목사의 힘이 컸다.
그는 표면상의 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교회의 학생, 교사, 전도사를 상대로 시국의 동향을 설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만세시위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철원의 만세시위 준비는 두 갈래로 추진되었다. 하나는 농업학교의 박용철(朴容喆)·이해종(李海鍾) 등과 보통학교의 임응렴(林應簾)·이규정(李圭貞)의 계통이었고, 하나는 교회와지방 청년이 합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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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하는 계통이었다. 학생계통은 농업학교의 박용철이 교회의 목사와 연결되어 있었고 이 규정은 철원청년회에 가입하고 있었기 때문에지방 청년들과 기맥을 통하고 있었다. 3월 10일 농업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은 옥양목으로 미리 만들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북간산(北看山)에 모였다. 그 때의 학생 수는 약 2백 5십명이었다.
이들 학생들은 서문거리로 뛰쳐나오면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헌병 분견소를 돌아 뛰면서 북간산을 돌았다.
한편 일반 군중들은 전도사 곽진근(郭鎭根), 정의학교 교사 엄재형(嚴載亨)과 김경순(金敬順), 그리고 김경순과 개성 호수돈여학교 동창이던 이각경(李珏卿) 등이 기독교계의 선봉으로 활약하였고 일반 청년층은 이배근(李培根)·이학수(李學洙)·박창근(朴昌根)·윤상식(尹尙植) 그리고 의병 출신인 송희선(宋羲善) 등이 지도하였다. 이들은 참여한 군중을 철원군청으로 집결시켰는데 그때의 군중수는 5백명이 넘었다. 일반 군중 보다 학생은 시위를 먼저 시작하였다.
철원군청은 북간산 밑에 있었다. 이 배근과 이학수는 군청 안으로 돌입하여 일본 깃대를 빼앗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달아 놓고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 때 학생들이 달려와 군중과 합류한 것이다. 이학수는 철원 면장을 지낸 이석형의 아들이다. 이들 시위 군중은 군수 오태환의 집으로 달려갔다. 군수 집으로 군중이 몰려갈 때 군중은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군수 오태환도 군청에서 숙직을 하던 김규환의 연락을 받고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으나 군중은 그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수는 그 때 군중에게 발길로 차이고 구타를 당했으며 군청으로 끌려가 군수를 선창시키고 군중은 다시 만세를 불렀다.
한편 학생을 비롯한 일부 군중은 분을 참지 못하여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몰려갔다. 왕년의 의병이던 송희선은 박의병을 죽일 것을 주장하였다. 군중은 박의병의 집에 이완용(李完用)이 숨어 있다는 말을 퍼뜨리고 이완용을 내놓으라고 박의병에게 다그치며 갖은 곤욕을 주었다.
3월 11일에 철원역을 향하며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날의 시위에도 농업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이 참가하였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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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앞의 ≪3·1운동사≫ (상) pp. 530~536.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916~912,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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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주(原州) 노림학교(魯林學校), 안양의숙(安養義塾)
원주군 부론면 노림리에 노림학교(魯林學校)가 있었다. 3·1운동 당시 이 학교에는 홍남표·어수갑(魚秀甲)·한진충(韓鎭忠) 등의 항일 사상가들이 교원으로 있었다.
홍남표와 어수갑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노림학교 졸업생 40여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홍·어 양 선생은 선언서를 나누어준 이후 곧 서울로 올라갔다. 3월 27일에 부론면에 원주 군수 오유영(吳惟泳)이 소위 민심 수습을 위하여 소위 순시를 나왔다. 군수는 면소재지인 흥호리(與湖里)에서 강연을 했다. 노림학교 졸업생들은 그 즉석에서 항거를 시도 했으나 면서기 유필준의 제지로 밀려나왔다. 그 때 노림리로 온 노림학교 졸업생은 한범우(韓範愚)·한돈우(韓敦愚)·한태우(韓泰愚)·한민우(韓民愚)·정현기(鄭鉉基)·김성수(金聖洙)·김일수(金一壽) 등 7명이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대한독립만세’의 깃발을 만들어 군수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당나귀를 탄 군수가 나타나자 노림 학교 졸업생들은 군수를 보고 “철원 군수도 만세를 불렀으니 원주 군수도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편 뒤 다시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한범우와 정현기가 체포되었다.38)
그리고 건등면(建登面) 반계리(磻溪里)에서도 곽한선(郭漢璇), 마을 구장이던 이도순(李道淳)·채홍묵(蔡鴻黙)이 주동이 되고 홍승복(洪承復)이 선생으로 있던 안양의숙(安養義塾)의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군중 동원에 관여하여 4월 8일 1백여명이 모여 구은평(九銀坪)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뒷산에 올라가 다시 만세를 불렀다.39)
3. 기타지방의 각 학교
당시 영월 보통학교는 향교에 있었다. 이 학교 2학년 장준영(張俊永)의 집에서 엄정훈(嚴廷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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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앞의 ≪3·1운동사≫ (상) pp. 582~584.
39) 앞의 ≪3·1운동사≫ (상) p.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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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만세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4월 15일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엄정훈은 당시 4학년 학생으로 연령이 20여세나 되는 청년이었다.40)
통천군(通川郡) 순령면(順嶺面) 고저(庫底)에서는 4월 5일~7일까지 연 사흘 동안이나 만세운동이 계속되었는데 노동자와 함께 서당의 생도들이 이곳의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장전과 고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보통학교 학생들은 궐기 하였다. 흡곡보통학교 학생이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통천 보통학교에서는 기숙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4월 8일 태극기를 준비하여 4월 9일 아침부터 통천읍내를 순회하며 만세시위를 벌리던 중 군청 앞에서 모두 체포되었다.
김용계(金龍桂)·최학령(崔鶴翎)·유용호(劉龍好)·김종현(金宗鉉) 등은 이때 이 주동 학생들로서 재판에 회부되었다.41)
간성(干城) 보동학교에 당시 약 1백 50명의 학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간성 보통학교 학생의 만세시위 경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당시 개성 한영서원(韓英書院)에 다니던 이동진(李東振)이라는 학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함기석(咸基錫)이라는 친구와 밀모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선전문을 만들어 간성 보통학교 4학년 교실 입구에 붙여 놓았다. 학생들은 이 선전문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
3월 17일은 간성 읍내의 장날이었다. 이 날을 기하여 학생들은 일제히 궐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꼭 거사로 말미암아 그 곳 헌병 분견소에서 1주일 동안 갇혀 있다가 일본인 교장의 교섭으로 석방된 주동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종구(鄭鍾龜)·남기일(南基一)·이응규(李應奎)·최화길(崔和吉)·김영집(金永集)·서병택 (徐炳澤)·남기봉(南基鳳)42)
삼척(三陟)에서의 3·1운동은 그 곳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4월 14일 김달하(金達河)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고 심부윤(沈富潤)·오원모(吳元模) 등 모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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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앞의 ≪3·1운동사≫ (상) p. 594.
41) 앞의 ≪3·1운동사≫ (상) p. 605.
42) 앞의 ≪3·1운동사≫ (상) p.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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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인 15일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만세를 불렀다. 이날 보통학교 교사이던 김기덕(金基德)은 학생의 만세시위를 지원하였으나 일본인 교장인 산전(山田)은 소위 천황(天皇)의 칙어(勅語)를 옷에 감추어 뒷산으로 도망쳤다. 삼척 보통 학생의 만세운동은 북삼면(北三面) 송정보통학교에도 영향이 미쳤다는 것이다. 3월 17일 송정 보통학생 주하영(朱夏英)·김진수(金振壽)·홍학현(洪學鉉) 등이 주동이 되어 50여명이 만세를 불렀는데 주동자는 직원실에서 일본 헌병으로부터 모진매를 맞았다.43)
제6절 함남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함흥 각 학교
함흥지방에 독립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2월 26일 평양숭실중학교 교사 강봉우(姜鳳羽)가 함흥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될 것이다. 강붕우는 특히 교회계통의 인사를 상대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교회의 간부이던 한영호(韓泳鎬)·이순기(李舜基)·이근재(李根裁)·이영화(李榮華) 등이 기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였고 홍기진(洪基鎭)·조영신(趙永信)·조동훈(趙東薰)·이규몽(李圭蒙)·허헌(許憲) 등 40여명이 회합하여 다시 협의를 확대하였다.
그들은 거사일을 함흥의 장날인 3월 3일이 적당하다는 합의를 보았고 투쟁을 위한 사전, 사후 대책, 즉 생활비·변호인·태극기·선언서 등 준비를 착실히 준비시키기로 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대책이 마련된 뒤로 허헌은 사후의 변론을 담당하기 위하여 만세운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학생측에서도 독립운동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학생독립운동을 추진시키는 주체는 함흥 고등보통학교, 함흥농업학교, 영생중학교의 3, 4학년 학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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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앞의 ≪3·1운동사≫(상) pp. 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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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되어 결성된 학생 결사체였다.
2월 28일 함산학우회의 주동 학생들인 한태연(韓泰然)·한림(韓林)·박정걸(朴定杰) 등은 보성전문학교의 학생 대표인 강기덕(康基德)이 곽선죽(郭善竹)을 통하여 함흥으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이들은 만세시위를 위한 주체적인 모의에 착수하였다.
학생측은 3월 1일에 12인으로 확대된 모임을 열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최후에 이르기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였다. 학생측은 3월 2일에 중리에 있던 권영주(權永周)의 집에서 세부계획을 모의한 결과 3월 3일 새벽 4시 30분에 서함흥 역전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각 학교의 주동자들에 연락하였다.
그런데 3월 2일 함흥시내에는 산발적으로 일반인의 시위가 진행되었다.
이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하여 함흥의 경찰, 헌병, 의용소방대, 재향군인들의 동원되어 시위군중 3백여명을 체포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날의 만세시위 규모가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일에 앞서 조영신은 3월 1일 자전거로 원산으로 내려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왔다. 그때 원산에서는 또 이순영을 함흥으로 보냈으니 두 사람은 길이 엇갈린 것이다. 3월 2일 당일로 조영신은 함흥으로 돌아오자 즉시 영생중학교에 들어가 등사판을 꺼내와서 상리(上里)의 모 학생집 골방에서 몇 학생 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등사작업에 참여한 학생은 대부분 영생학교 학생들이었다. 태극기는 여러 갈래에서 준비 되었는데 영생여학교 기숙사 학생들도 수백장을 만들었고 한편 영생중학교 기숙사 학생들도 수천장을 만들었다. 이러할 때 이규몽은 이조재의 집에서 별도로 4천매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이 여러 계통에서 추진된 만세시위 일시는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3월 3일로 정해져 있었다. 당일 최명학(崔明鶴)이 낙민루(樂民樓)재에 올라가 나팔을 불면 일제히 궐기하기로 약속되었다. 그러나 3월 2일 예기치 못한 군중의 시위가 있었기 때문에 3월 3일 새벽부터, 함흥의 일제 군경은 행동을 개시하여 만세시위를 주동할 만한 주동급 인물들에 대한 예비 검속에 착수하였다. 이 검거선풍으로 말미암아 교회측과 함산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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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통의 주동인물 다수가 구속되었다.
함흥경찰서에 구속된 조영신·이근재·한태연 등은 일본 경찰에 무참히 매를 맞아가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쳐댔다. 경찰서에서 제일 먼저 만세를 부른 사람은 조영신이었다. 순사가 칼을 뽑아들고 위협했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불렀다. 결국 순사는 만세를 계속해서 부르는 조영신의 입을 찢었다.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만세를 불렀다. 경찰서에 함께 갇힌 동지들은 분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함께 만세를 불렀다. 함흥 시민들은 이 광경을 전해 듣고 더욱 흥분하였다.
이 때 이명봉은 시문거리 모퉁이 집의 지름 위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고 김치선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만세시위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열화 되어나갔다. 영생중학교, 함흥농업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영생여학교의 학생 등 1천여명의 군중이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일제의 군경은 총칼과 갈구리를 휘둘러 이들을 진압하니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경찰은 현장에서 학생 88명과 일반인 46명을 검거하였다.
이날의 시위에서 구속된 학생들은 함경남도 장관 이규완(李圭完)의 요청으로 대부분 가석방 되었으나 김치선(金致善)과 곽선죽(郭善竹)은 학생 주모자로서 끝내 징역형을 받았고 조영신은 함흥 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으로 조막염이 생겼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주일만에 사망하였다.
함흥 만세운동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던 학생은 다음과 같다.
성명 년령 학교 학년
한명환(韓明桓) (25) 영생중학교 3년생
이봉선(李鳳善) (24) 영생중학교 4년생
김치선(金致善) (21) 영생중학교 2년생
박희성(朴希聖) (19) 영생중학교 3년생
도상록(都相錄) (18) 영생중학교 4년생
곽선죽(郭善竹) (24) 영생중학교 4년생
김성구(金聲球) (22) 함흥고등보통학교 2년생
서성모(徐成模) (19) 동교 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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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헌(申泰憲) (23) 동교 4년생
박의환(朴義煥) (23) 동교 4년생
한림(韓 林) (19) 동교 3년생
한덕연(韓德淵) (26) 함흥농업학교 2년생
임의식(林義植) (21) 동교 1년생
조현원(趙鉉元) (21) 동교 2년생
이재백(李在白) (22) 함흥고등보통학교 4년생
강흥락(姜興洛) (26) 함흥농업학교 2년생
이규몽(李圭蒙) (22) 학생
그리고 교사로서는 영생중학교의 이근재와 김중석(金仲錫)이 학생 일반인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44)
2. 길명의숙(吉明義塾), 신흥(新興)보통학교
함남 신흥군에도 함흥으로부터 독립운동의 소식이 전해졌다. 신흥군 서고천면(西古川面)에 길명의숙이 있었고 거기에 정재각(鄭在珏)이 있었다. 정재각은 이지방의 선각자로서 신문화 보급에 열중하고 있었다. 3·1운동기를 맞이하여 정재각은 유춘갑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는 유춘갑에게 동고천의 신흥보통학교 학생을 동원하도록 하고 정학련(鄭學練)에게는 태극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3월 9일 군중들은 새벽부터 우편국 앞으로 모여들어 만세시위를 벌렸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폭력으로 일단 이들을 해산시켰으나 군중은 보통학교 주변으로 이동하여 만세를 부르니 약 1백 5십명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여기에 가담하여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벌리니 저항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 때 헌병은 총을 난사하여 7~8명이 피살되었고 정재각의 아들 정충진(鄭忠鎭)은 아버지의 행방을 대라고 무참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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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965년 ≪신동아≫ 3월호, 김중석(金仲錫)의 ‘낙민루(樂民樓)재의 나팔소리’.
앞의 ≪3·1운동사≫ (상) pp. 692~695.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009∼1015의 형공(刑控) 제379호, 380호, 744호, 745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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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는데 헌병대는 그의 시체를 남대문 누상에 버려두었다. 보통학교의 주모자였던 유춘갑도 한 때 피신했었으나 그는 다음날 결심한 바 있어 떳떳이 등교하였다. 그는 다시 선배 정학련과 함께 시위 계획을 추진하여 신흥보통학교 학생 1백 70명을 이끌고 신흥리를 중심으로 동고천 일대를 휩쓸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일반 군중 5백여명도 학생의 시위 대열에 가담하였다. 모두들 사기도 충천하였다. 학생과 군중은 합세하여 잔학한 방법으로 동포를 학살한 헌병대를 분쇄하기 위하여 두번이나 습격했지만 실패했다. 오히려 헌병대는 행동파로 보이는 4명을 체포하여 군중이 보는 현장에서 총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이 잔인무도한 장면을 보고 유춘갑과 정학련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학교로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학생들이 교실 안에 들어가자 정학련은 흑판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쓰고 학생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귀가케 하였다. 유춘갑과 정학련은 귀가 도중에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정학련은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병 적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1919. 4. 18), 공소하였으나 복심법원에서도 유죄선고를 받았다. (1919. 5. 10) 유춘갑도지방법원(1919, 4. 28)과 복심법원에서도 유죄언도(1919. 5. 28, 1919. 7. 3)되어 옥고를 치루었다.46)
3. 기타 각 학교
신흥읍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는 소식은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주변의 면소재지로 퍼졌다. 원평(元平)사립학교의 교사로 있던 박효준(朴孝濬)은 평소 열렬한 민족의식을 소유한 사람인데 학생들에게도 틈만 있으면 이를 주입시켰던 것이다.
3월초순 그는 오후의 체조시간에 학생들을 이끌고 풍서리(豊西里)의 광장으로 달려갔다. 교사 박효준은 학생을 광장에 정열시키고 고종의 승하와 시국의 중대성을 지적하고 학생의 행동을 바라는 설유를 했다. 이 때 학생들은 감명을 받았다.
4학년생이란 이항국(李恒國)과 이수연(李壽淵)은 3월 11일 학교 교정에서 만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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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앞의 ≪3·1운동사≫ (상) pp. 73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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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작정으로 몇몇 학생들과 모의를 진행하였다. 예정한 날, 교직원들은 모두 결근하였고 학생 45명이 등교하여 태극기 등을 준비했다. 이 때 지방유지 한진우(韓鎭愚)가 나타나서 학생들의 행동을 고무, 격려하였다. 학생들은 만세를 부르고 박산(朴山)으로 달렸다. 박산은 여러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 동원이 쉬웠다.
그리하여 1백 70명의 군중이 산정에 모여 만세를 불렀고 그 뒤에도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있었다.46)
그리고 3월 14일에는 북청(北靑) 농업학교 학생들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47)북청군 속후면(俗厚面), 속후학교 학생들이 3월 17일 궐기하였다.48)
3월 17일에는 명천군(明川郡) 상고면(上古面) 보촌리(寶村里)의 보촌학교 학생 50여명이 군중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다.49)
제7절 충북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청주농업학교
청주출신으로서 서울중앙학교에 다니던 신영호(申榮浩·18)는 서울지방에서 ‘아(我)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독립 선전문서를 입수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신영호는 3월 9일 아침에 청주 농업학교 기숙사로 찾아가서 오석영 등에게 서울에서 가져온 경고문을 전해 주고 “서울에서는 중학 정도 이상의 학교는 남녀를 불문코 휴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여 열광하고 있으니 청주에서도 서울에 못지않는 열성을 가지고 그와 같은 독립 시위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다. 여기에서 청주농업학교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위하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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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앞의 ≪3·1운동사≫ (상) PP. 735~737.
47) 앞의 ≪3·1운동사≫ (상) p. 711.
48) 앞의 ≪3·1운동사≫ (상) p. 712.
49) 앞의 ≪3·1운동사≫ (상) p. 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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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농업학교의 오석영·이수천·이요섭·서상경·양재성 등 5명은 신영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3월 9일, 청주면 청수정(淸水町) 김현구(金顯九)의 방에서 등사판으로 경고문을 인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동교 학생, 임창수·이철우·박승하·신태동 등 4명이 찾아와서 이 작업에 가담해 주었다.
재판에 회부된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인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신영호(申榮浩·18) 서울중앙학교 학생, 청주군(淸州郡) 가덕면(加德面) 인차리(仁次里)
오석영(吳錫永·18) 청주농업학교 학생, 괴산군(槐山郡) 청안면(淸安面) 읍내리(邑內里)
이수천(李壽千·21) 동교 학생, 옥천군(沃川郡) 옥천면(沃川面) 상계리(上桂里)
이요습(李要習·19) 동교 학생, 진천군(鎭川郡) 진천면(鎭川面) 성암리(聖岩里)
임창수(林昌洙·19) 동교 학생, 동군 동면 읍내리
이철우(李喆雨·25) 동교 학생, 음성군(陰城郡) 대소면(大所面) 미곡리(美谷星)
박승하(朴勝夏·20) 동교 학생, 진천군(鎭川郡) 초평면(草坪面) 영구리(永九里)
서상경(徐相庚·20) 동교 학생, 충주군(忠州郡) 충주면(忠州面) 읍내리(邑內里)
신태동(申泰東·18) 동교 학생, 충주군(忠州郡) 노은면(老隱面) 보련리(賚蓮里)
양재성 (湯在城·20) 동교 학생, 청주군(淸州郡) 왕산면(王山面) 덕촌리(德村里)
이상의 학생들은 징역 10월~3월의 언도를 받았다.50)
한편 이들 학생들이 어떤 규모의 만세시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조사되지 않았으나 3월 10일 2학년 학생들이 시험 연기 청원서를 학교에 제출했다는 것과 15명의 1학년 학생들이 이날 밤, 서울의 소식을 기다리며 약간 동요했다는 사실은 일제측 보고기록을 통하여 확인되고 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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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앞의 3·1운동재판기록.
51) 앞의 ≪3·1운동사≫ (하) p.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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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타 각 학교
충북 괴산군에는 홍씨 문중에 많은 재사(才士)가 배출되어지방 여론의 향방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고종의 인산에 참열한 뒤 귀향한 홍명희는 이지방의 청년 유지와 만세시위를 목적으로 접촉하였는데 이재성·윤용식(尹用植)·윤명구(尹命求) 등과 협의하여 선언서, 태극기 등을 준비하고 만세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3월 19일은 괴산읍의 장날이었다. 이날을 기하여 이지방의 군중과 학생은 궐기하였다. 이날의 궐기에는 청주농업학교에 재학중이던 홍태식(洪台植)이 맹열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괴산 보통학교 4학년의 급장은 곽용순(郭容淳)이었는데 이병석(李炳錫) 등 학생 35명을 이끌고 학교를 튀어 나와 군중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전단(傳單)을 뿌리며 맹열한 만세시위를 벌렸다. 이 때 홍규호·이덕호 등 8명인 경찰에서 심한 매를 맞아야 했다.
검거인원 20명 중 학생 15명은 석방되었으나 청년층 주모자는 모두 송치되었다.52)
충주(忠州)의 만세시위는 3월 12일에 시작하였다. 12일에도 수천명의 군중이 충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충주간이농업학교에서는 3월 10일, 졸업기념 야유회가 호암리(虎岩里)에서 있었는데 여기에 참석했던 교사 유흥식(柳興植)과 학생 오언영(吳彦泳)·장천석(張千石)·유석보(劉錫寶) 등이 3월 15일 충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계획 내용은 농업학교, 보통학교 학생들이 기독교측과 공동으로 거사하기로 하고 부서까지 정했으나 이 비밀이 헌병 보조원으로 채용해준다고 밀약 받은 정모의 밀고로 말미암아 좌절되고 말았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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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앞의 ≪3·1운동사≫ (하) pp. 55~56.
53) 앞의 ≪3·1운동사≫ (하)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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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절 충남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공주의 만세시위에는 기독교 계몽에서 설립한 영명학교의 역할이 크다. 영명학교를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3월 24일 영명학교의 교사이던 김관회(金寬會)는 공주면 대화정에 있던 사립 영명학교에서 현석칠(玄錫七)·안창호(安昌鎬)·오익표(吳翼杓)·이규상(李圭商)·안성호(安星鎬)·현언동(玄彦東)·김사현(金士賢) 등과 회합하여 전국 각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의 정세를 분석, 협의한 결과 공주의 만세시위를 장날인 4월 1일로 잡아 결행하기로 합의하였다. 따라서 영명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이 만세시위의 주역이 되도록 설득시키는 책임을 김관회가 맡았다. 김관회는 영명학교 학생 김수철을 자택으로 불러 학생의 참여문제를 부탁하였고 아울러 김수철과 함께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약 1천매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김관회는 학생 김수철에게 그 비용으로서 일금 10원을 주었다.
김수철은 맡은 바 서명을 빨리 완수하기 위하여 3월 30일 자택에서 영명학교 학생 유준석·노명우·강윤·윤봉균 등에게 만세시위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고 모두의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그들은 선언서의 인쇄방법을 협의하였는데 이튿날인 31일 하오 5시경에 앞의 다섯 학생은 영명학교 기숙사에 모여 동교의 등사판을 사용하여 조선독립선언서에 기초를 둔 독립사상 고취의 선전문 약 1천매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4월 1일 하오 2시경, 노명우·윤봉균·김수철 등은 김수철의 지시로 이규남이 제작한 태극기 하나씩을 들고 공주시장으로 나아가 장터에 모여든 군중 속에서 선언서를 살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 같은 영명학교 학생들의 공주 시장에서의 만세시위는 그날의 군중과 일반인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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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명학교 학생 만세시위로 재판에 회부된 학생 등의 인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현석칠(玄錫七·39) 목사, 공주군(公州郡) 공주면(公州面) 대화정(大和町)
김사현(金士賢·32) 무직, 상동
오익표(吳翼杓·26) 학생, 동군 주외면(州外面) 옥룡리(玉龍里)
김관회(金寬會·33) 영명학교 교사, 동군 공주면 상반정(常盤町)
이규상(李圭尙·26) 영명학교 교사, 동군 주외면 금학리(金鶴里)
현언동(玄彦東·24) 영명학교 교사, 동군 동면 용당리(龍堂里)
안성호(安聖鎬·24) 학생, 동군 정안면(正安面) 운궁리(雲弓里)
안창호(安昌鎬·36) 목사, 천안군(天安郡) 천안면(天安面) 읍내리(邑內里)
김수철(金洙喆·25) 영명학교 조수, 공주군 공주면 대화정
유준석(柳俊錫·20) 학생, 상동
노명우(盧明愚·20) 학생, 부여군 규암면(窺岩面) 합송리(合松里)
강윤(姜 沇·21) 학생, 논산군(論山郡) 양촌면(陽村面) 인천리(仁川里)
윤봉균(尹鳳均·20) 학생, 공주군 주외면 옥륭리
양재순(梁載淳·19) 학생, 공주군 주외면 상반정
이규남(李圭南·23) 농업, 동군 주외면 금학리
박루이사(朴樓以士·19) 학생, 상동
이활란(李活蘭·21) 무직, 동군 옥룡리
김현경(金賢敬·22) 무직, 동군 공주면 본정
이상의 관계자들은 1년~4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으나 그 집행이 2년간 유예되었다.54)
2. 기타 학교
3월 14일 4시경에 천안군 목천면(木川面) 목천보통학교 학생 1백 2십명이 교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그 근처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벌렸다. 3월 20일 10시경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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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137~1141, ‘1919, 공, 제258호, 제2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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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군 입장면(笠場面) 양대리(良岱里) 시장에서 광명학교(光明學校)-기독교 계통의 여숙(女塾), 교사, 학생 수십명이 직산금광(稷山金鑛)의 광부와 부근 주민이 약 70명과 모여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를 벌렸다. 이들은 다시 3㎞ 떨어진 입장 시장으로 시위를 확대하기 위하여 행진 중, 천안에서 달려온 헌병대와 충돌하여 남자 40명, 여자 10명이 체포되었으나 일부는 저지선을 돌파하고 입장 시장으로 진출하여 약 7백 명의 군중과 합세, 대대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다.54)
그리고 4월 1일, 천안군 갈전면(葛田面) 병천(並川) 시장에서 약 3천명의 군중 속에서 활약한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유관순(柳寬順)의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3월 5일의 제2차 학생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휴교로 말미암아 귀향하였으나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과지방 유지들에게 적극적인 조직 홍보 활동을 전개하고 시위 당일에는 목숨을 건 항쟁을 폈다.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유관순의 오빠로서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던 유준석도 공주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니 유씨 일가는 온 집안이 궐기한 것이다.56)
4월 17일 보령군(保寧郡) 주산면(珠山面) 증산리(甑山里)의 2개처에서 산 위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이 태극기 게양의 주동자는 서울 배제학당에 다니던 이종연(李鍾淵)으로서 5명의 동지와 함께 거사하였는데 모두 체포되었다.57)
아산군(牙山郡) 온양면(溫陽面)에서는 3월 11일 온양보통학교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시위를 벌렸다. 그리고 다음날(3월 12일) 장날을 기하여 다시 궐기하기로 했으나 당시 헌병대에 그 비밀이 누설되어 몇 명의 주동 학생이 구타를 당했고 학교 근처에 헌병 병력을 별도로 파견하여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3월 12일 온양 장날에 있었던 약 2백 명의 만세시위 군중 속에는 상당수의 보통학교 학생들이 참가하였다.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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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앞의 ≪3·1운동사≫ (하) pp. 116~117.
56) 앞의 ≪3·1운동사≫ (하) pp. 120~126.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61~164, “1919년, ‘형공(刑控)’제53호”.
57) 앞의 ≪3·1운동사≫ (하) pp. 131~132.
58) 앞의 ≪3·1운동사≫ (하)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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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서산군(瑞山郡) 해미면(海美面)의 해미보통학교 학생들이 야간 시위를 벌렸다.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3월 24일 오후 7시경에 그 곳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송별회가 있었다. 송별의 모임이 끝난 이후, 졸업생과 재학생 수십명은 밤 11시경 읍내리의 면사무소 앞과 우시장(牛市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해미보통학교 학생 만세시위의 주모자로서 재판에 회부된 김관용의 재판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관용은 3월 24일, 이계성(李啓聖)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읍내리 박관석(朴寬錫)의 집에서 송별회가 있을 때, 이봉이(李鳳伊)·유한종(劉漢鍾)·최흥량(催興良) [이상 졸업생], 장기남(張基南)·양태준(梁泰準)·이기신(李起信) 등에 대하여 고별연이 끝난 후, 궐기하자고 권유하여 앞에서와 같은 장소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것으로 되어있다.59)
3월 13일 하오 2시에 예산군(禮山郡) 대흥면(大興面) 동서리(東西里) 소재의 대흥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전교생)이 대흥시장으로 뛰어나가 만세시위를 벌렸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주동 학생 3명이 체포되었다.60)
제9절 경남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3·1운동기에 경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행동화한 것은 일신여학교의 학생들이라 할 수 있다. 서울에서 3·1운동을 시작한 이후, 3월 2~3일경에 이르러 기독교계의 인사들에 의하여 독립선언서가 부산으로 전달되었다. 한편 서울에서 학생대표가 내려와 경성학생단(京城學生團)이라는 명의로 부산상업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대표들에게 선언서가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같은 학생들의 움직임은 각급 학교로 확대되어 만세시위의 분위기가 성숙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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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앞의≪3·1운동사≫ (하) p.153.
60) 앞의≪3·1운동사≫ (하)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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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신여학교의 이명시(李明施)라는 여학생은 부지런히 연락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3월 11일 새벽, 일신여학교의 기숙사 주변에 애국 학도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이 뿌려졌다. 이날 아침 고등과 4년생, 김응수(金應守)는 비라를 주워 교사인 주경애(朱敬愛)에게 보였다.
일신여학교의 교사인 주경애와 박시연(朴時淵)은 학생들에게 틈나는대로 애국애족의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주경애는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비밀리에 궐기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여교사들을 동지로 포섭하는 활동을 폈다. 교사 주경애와 고등과의 몇 학생들은 사제간에 동지가 되어 만세시위를 추진했다. 3월 10일 밤, 기숙사에 있던 11명의 고등과 여학생들은 사명감을 지니고 밤새 태극기 50매를 제작하였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고등과 학생 11명과 교사 주경애·박시연은 밤 9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고 좌천동(佐川洞)거리를 누비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일반인의 호응이 증가해 나갔다.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참여하는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과 주민들은 합세하여 2시간 이상 열띤 만세시위를 전개하니 탄압을 위한 일제 군경이 나타났다.
군경은 16~7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닥치는대로 구타를 하였다.
학생 11명과 두 교사는 부산 형무소에 수감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학생 11명은 징역 6개월, 주경애·박시연 등 교사에게는 1년 6개월의 징역이 언도되었다. 일신여학교의 만세시위 준비 과정에 대한 비밀은 같이 동조하여 만세까지 부른 동교 여교사 임말이(林末伊)·임망이(林望伊) 양인이 형사 노릇을 하던 형부에게 모두 말하고 그들만 석방되었다. 뒷날 출옥한 학생들은 이 사실을 분하게 여기고 동맹휴학 등의 투쟁을 통하여 기어코 배신한 두 교사를 추방하고 말았다.
일신여학교 학생, 교사에 의한 궐기는 경남지방에서 제일 먼저 만세운동을 결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되고 있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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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앞의 ≪3·1운동사≫(하) pp. 179~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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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래고등보통학교
3월 2~3일 경에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단이 경성학생단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를 부산상업학교 학생 대표에게 전달하였다. 이 같은 접촉을 가진 부산상업학교 학생대표는 궐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부산상업학교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 대표는 3월 7일 동래고보(東萊高普)의 학생 대표인 김귀룡(金貴龍)·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建) 등을 찾아가 서울에서 온 선언서를 전달하고 부산지방의 학생들이 동일 동시에 봉기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동래고보에서는 4학년 졸업반 학생을 중심으로 궐기 준비가 진행되어 나갔다.
여기 참여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建)·김귀룡(金貴龍)·김인호(金仁浩)·이상덕(李相德)·윤삼동(尹三東)·박득룡(朴得龍)·이병심(李炳芯)·손정줄(孫廷茁)·배대효(裵大孝)·박임갑(朴壬甲)·김철규(金哲圭) [이상 4학년], 추규영(秋圭暎)·김원룡(金元龍)·김기삼(金璂三)·손영수(孫永壽)·정호종(鄭浩宗)·박종관(朴鍾寬)·서진랭(徐鎭冷) [이상 3학년], 이수열(李守烈)·임명조(林命祚)
[이상 2학년]
위의 학생들은 구체성을 띄고 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동래고보를 졸업하고 당시 경성고등공업학교(京城高等工業學校)에 다니고 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동래로 내려왔다. 곽상훈은 선언서의 원본을 그대로 가지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창호지에 복사한 후, 노끈을 만들어 숨겨온 것이다. 곽상훈은 당시 동래고보의 수학교사로 있던 이환(李環)을 만나 동래에서의 학생 궐기문제를 모의하였다. 이환은 학생의 배후에서 참모역할을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한편 당시 동래고보에서는 김병규(金秉圭)가 지리(地理)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틈이 나는대로 학생들에게 조선사(朝鮮史)를 가르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있었다.
동래고보의 만세궐기를 주동하던 학생들은 학수대(鶴首臺)화 복천동(福泉洞)에 있던 엄진영(嚴進永)의 사랑채와 복천동의 오종식(吳宗植)의 집, 그리고 수안동(壽安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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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정호종(鄭浩宗)·백정기(白正基)·고영건(高永健) 등의 하숙방을 거점으로 하여 모의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선언서를 준비하는 한편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고 거사일시를 3월 13일(음 2월 12일) 동래읍 장날이 오후 2시에 실행한다는 작정을 했다.
3월 11일~13일 사이에 고영건·이한주(李漢周) 등의 하숙방에서 준비는 급진전하였다. 주모 학생들은 학교의 등사판을 이 곳으로 옮겨놓고 서진랭·엄진영·김인호 등이 참여하여 선언서 5백매를 인쇄하였고 같은 장소에서 다른 주모자들이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쓴 깃발 두개와 태극기 수백매, 그리고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고 쓴 비라 수백매도 준비했다.
3월 13일 약속한 동래군청 앞으로 학생과 일반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옮길 때는 부인네들이 숨겨서 가져다주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嚴進永)은 군청 앞에 있던 망미루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주위에 모여 있던 학생과 군중은 일제히 엄 진영의 선창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대 두개가 세워졌다. ‘오왕약살’이라고 쓴 비라는 뿌려졌다. 군중은 흥분하기 시작하였고 이 같은 학생, 군중의 동태를 주시하던 경찰들도 별달리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조선인 헌병 보조원 1인과 순사 1인은 제복, 제모를 벗어버리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기마경찰 20~30명과 수비대 50명이 출동하여 총을 발포하면서 학생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피검되어 재판에 회부된 후, 징역 1년 6월~4개월의 언도를 받은 학생은 다음과 같다.
엄진영(嚴進永)·고영건(高永健)·서진랭(徐鎭冷)·김귀룡(金貴龍)·김인호(金仁浩)·정호종(鄭浩宗)·손영수(孫永壽)·이상덕(李相德)·김원룡(金元龍)·엄병영(嚴秉永)·이수열(李守烈)·김성조(金聖祖)·추규영(秋圭映)·박득룡(朴得龍)·김기삼(金璂三) 등 모두 22명이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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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앞의 ≪3·1운동사≫(하)pp. 18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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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범어사(梵魚寺), 사립학림(私立學林),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 명정학교(明正學校)
당시 범어사에는 불교문화뿐만 아니라지방문화의 근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있었다. 중등정도의 과정으로서지방학림(地方學林)이 있었고 보통학교 정도의 명정학교(明正學校)가 있었으며 불교관계만을 전수(傳修)시키는 불교전문강원이 있었다.
범어사의 젊은 학인(學人), 학생에 의한 독립운동 참가는 불교 지도층의 지도력에서 발단되고 있다. 불교의 현대화를 외치던 한용운(韓龍雲)은 2월 하순 경에 갑자기 범어사로 주지 오성월(吳惺月)을 찾아왔다. 그는 동사에서 영향력이 있던 이담해(李湛海)·오이산(吳梨山) 등도 맞아 시국에 관한 중대사를 협의하고 돌아갔다.
오성월·오이산·이담해는 김영규(金永奎)·김법린(金法麟)·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 등 7명에게 3·1운동에 관한 얘기를 했다.
3월 4일 김법린·김상헌은 한용운의 지시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에 잠입하였다. 이리하여 김법린·김상헌(서울 중앙학림 [中央學林])·차상명·김영규·김봉한(金奉漢[범어사 불교전문강원(梵魚寺佛敎專門講院)])·김상기(범어사지방학림)·김한기(명정학교)가 중심이 된 준비의 모체(母體)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범어사의 학생을 주체로 하여 3월 18일 동래읍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작정하였다.
3월 17일 저녁에는 범어사 경내에서 명정학교,지방학림 졸업생을 위한 송별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주동 학생들인 김영규·차상명·김봉한·김상기·김한기 등이 차례로 일어나서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거사내용을 설명한 바 그 자리에 모였던 30~40명의 학생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호응한다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독립선언서의 준비는 허영호(許永鎬)가 담당하여 1천매를 준비하였고, 대형(大型) 태극기 한 개와 작은 태극기 1천개가 주동 학생들의 작업으로 준비되었다. 당시 허영호의 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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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약사(釜山略史)≫ pp.284~285, 추규영(秋圭映)의 동래고보사건(東萊高普事件) “1965년 3월호,≪신동아≫” pp. 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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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장터에 있었기 때문에 범어사 학생들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미리 가지고가 집에 대기하고 있었다. 3월 17일 밤에 있었던 송별회가 끝난 약 40명의 학생들은 어둠을 이용하여 선리(仙里) 뒷산, 향교(鄕校) 뒷산 길을 이용하여 동래읍 복천동에 있던 불교 포교당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거기에서 대열을 다시 정비하여 거사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3월 18일 새벽 1시쯤 포교당에 도착한 학생들이 곶감 5접을 시장에서 구하여 간식을 하고 있는데 일제군경 20여명이 들이닥쳐 김영규·차상명·김상기·김봉한 등을 호명하여 연행하면서 다른 학생들은 강제 해산을 시켰다. 범어사 학생의 비밀이 누설된 것이다.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이 일본인 교사, 중촌(中村)이라는 자에게 밀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월 17일 강제 해산 당한 학생의 일부는 18일 밤, 동래읍 서문 근처에서 행동을 개시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남문(南門)에 이르기까지 만세시위를 감행하였다. 이 시위에는 이근우(李根雨)·김해관(金海管)·김재호(金在浩)·박재삼(朴在森)·신종기(申鍾驥)·윤상은(尹相殷)·박영환(朴永煥) 등 40여명의 명정학교,지방학림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19일 아침에도 윤상은·허영호·이영호·황학동 등은 허영호가 작성한 “일사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 “一死莫如得自由”라는 비라를 동래시장에 뿌리며 이날 저녁의 만세운동을 알렸다. 19일 오후 5시경, 이근우·김영식(金永植)·양수근(梁壽根)·오시권(吳時勸)·황만우(黃滿宇) 등 수십명의 양교 학생이 다시 동래시장, 남문에서 시작하여 만세를 고창하고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한편 김해관·김재호·최응권(崔應勸)을 비롯한 수십명의 학생 행동대도 동래시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때부터 일제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범어사 학생 만세운동으로 말미암아 재판에 회부된 주동 학생은 다음과 같다.
김한기(金漢琦)·차상명(車相明)·김상기(金相琦)·김해관(金海管)·양수근(梁壽根)·정성은 (鄭聖恩)·이근우(李根雨)·박재삼(朴在森)·허영호(許永鎬)·최응권(崔應勸)·김태준(金泰俊)·박창두(朴昌斗)·이달실(李達實)·박정국(朴楨國)·윤상은(尹相殷)·김상헌(金祥憲)·김충념(金忠念)·황학동(黃鶴東)·신종기(申鍾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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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준(吳炳俊)·오점술(吳點述)·이영우(李永雨)·김영규(金永奎)·박영주(朴永珠)·손군호(孫君浩)·양춘도(楊春到)·지용준(池龍俊)·황만우(黃滿宇)·김영식(金永植)·오긍상(吳亘祥)·김재호(金在浩)·오시권(吳時勸)·박영환(朴永煥) 등 34명이다.
이들 중에서 김영식·박재삼 2인은 6년 집행유예로 석방 되었으나 그 밖의 학생들은 6개월~2개년의 징역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63)
4. 해인보통학교(海印普通學校), 해인사지방학림(海印寺地方學林)
당시 해인사에는 친일승(親日僧)으로 유명한 이회광(李晦光)이 이었다. 그래서 이지방의 지식계층은 그의 행적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3·1운동 당시 해인보통학교, 해인사지방학림을 비롯한 청년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배경으로서 일본의 침략은 물론이거니와 이회광의 친일행적도 빠뜨릴 수 없는 요인이 된 것이다. 일제는 해인사주변을 감도는 평소의 반일적인 분위기를 감안하여 해인사 경내에 경찰 주재소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해인사 쪽으로 연락이 왔다.
서울에 유학중이던 도진호(都鎭鎬)는 송복만(宋福晩)에게, 김봉신(金奉信)은 김봉률(金奉律)에게, 김용기(金龍基)는 박근섭(朴根燮)에게, 최항형(崔恒亨)은 최범술(崔凡述)에게 각각 독립선언서를 보내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해인사 학생의 독립만세운동은 활기를 띄게 된다. 강재호(姜在鎬)와 송 복만은 대구를 드나들며 선언서 인쇄용 종이 3만여매를 사모았다. 이들은 해인사의 등사판과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1만여매를 인쇄하였다. 한편 학생 대표 30여명은 절 뒷산에 모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활동 범위를 넓히기로 하고 3인으로 1개조(組)를 짰다. 제1조의 참가자는 강재호·김봉률·기상섭(奇尙燮) 등인데 이들은 양산, 통도사, 동래, 부산, 범어사 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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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앞의 ≪3·1운동사≫ (하) pp. 186~190, 김한기(金漢琦)의 ‘범어사 사건(梵魚寺事件)’ (1965년, ≪신동아≫3월호 pp. 108~109),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1204~1207, 범어사 학생관계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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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지역에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활동했다. 송복만·송복룡·최범술로 된 조(組)는 합천, 삼가, 초계, 의령, 진주, 사천, 곤양(昆陽), 하동 등지를 다니며지방의 동지이던 박운표(朴運杓)·이석순(李石淳)·이승기(李昇基)·조우제(趙佑濟)·강달영(姜達永)·송지환(宋芝煥)·임응주(林應周) 등과 접촉하여 크게 활동하였다.
또한 박달준(朴達俊)·박덕윤(朴德潤)·이덕진(李德進)·김장윤(金章允) 등은 거창, 안의, 함양, 산청, 남원 등지로 가던 도중 헌병 수비대에 검거되었으나 이덕진은 그들에게 고춧가루를 뿌리고 격투하여 총기를 빼앗아 도주하였고 그 뒤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주로 사찰을 대상으로 연고지 등을 찾아 활동한 사람의 명단과 담당 지역은 다음과 같다.
우경조(寓敬祚)·나경화 (羅慶華)―충남 공주(公州)일대의 사찰
박윤성(朴允成)―충북 법주사(法住寺) 일대
김경환(金景煥)―상주(尙州), 서산(瑞山)
남광옥(南光玉)·신경재(愼慶宰)·김명수(金明洙)―거창(居昌)
신철휴(申喆休)·신란휴(申蘭休)·이종직(李從直)―고령(高靈), 현풍(玄風),대구
권청학(權淸學)―달성, 영천
박근섭(朴根燮), 박응천(朴應天)·신문수(申文守)·정봉윤(丁鳳允)―쌍계사, 화엄사, 송광사, 선암사
이상의 학생들은 대부분 활약 끝에 옥고를 치루었다. 그리고 해인사의 지방학림 학생인 홍태현(洪泰賢)·백성원(白聖元)·김경환(金景煥)·김성구(金聖九) 등이 주동이 되어 3월31일 밤 11시경에 봉기하였다. 앞서 이날 낮 11시경에 해인사 홍하문(紅霞門) 밖에 약 2백명의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낮 1시, 밤 11시에도 궐기하여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으나 홍태현 등 주동자는 체포되어 6개월의 형을 받았다.
그 뒤, 강재호·송복만·김봉률·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명은 만주 독립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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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였고, 김봉률·박덕윤·김장윤 등은 문경 금룡사(金龍寺)로 잠입하였는데 주지의 배반으로 점거되어 2년 징역을 언도받았다.64)
5. 기타학교
3·1운동 당시 서울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으로 있던 오택언(吳澤彦)은 한용운(韓龍雲)의 지시로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통도사(通度寺)의 젊은 승려와 학생들에게 전달하였다. 당시 통도사는 통도사 부속 보통학교와지방학림이 있었다. 양교의 학생대표 김상문(金祥文)을 비롯한 40~50명, 불교전문 강원생 10여명, 승려 10여명은 하북면(下北面) 신평리(新坪里) 장터에서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진오(金鎭五)는 이 운동으로 2년형을 받았다.65)
3월 30일 김해읍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 주역은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배동석(裵東奭)이라 할 수 있다. 배동석은 서울 학생의 궐기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김해지방의 만세시위 추진을 목적으로 하향하였던 것이다.66)
김해군(金海郡) 명지면(鳴智面)에서는 학생의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다. 명지면의 사립 동명학교(東鳴學校) 교사로 있던 이진석(李鎭奭)은 경성약학교 학생 김연복(金淵福)의 연락으로 독립선언서를 받고 이지방에서의 궐기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동지로서 학교 동창생인 양왕석(梁旺錫)·김영두(金榮斗)·이규회(李圭恢)·지봉구(池鳳九) 등을 규합한 뒤, 4월 9일 밤, 이진석과 양왕석은 철야작업을 통하여 선언서와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4월 10일 이들은 동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명호시장으로 몰려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를 벌렸다. 다음 날 밤 10시에도 다시 궐기하였다.67)
마산(馬山)의 만세시위는 3월 21일 결행되었다. 3월 23일, 이갑성(李甲成)이 마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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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앞의 ≪3·1운동사≫(하) pp. 336~339.
65) 앞의 ≪3·1운동사≫(하) p. 214.
66) 앞의 ≪3·1운동사≫(하) p. 215.
67) 앞의 ≪3·1운동사≫(하) p.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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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와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있던 임학찬(任學瓚)을 만나 마산에서의 만세시위 문제를 협의한 바 있다. 그리하여 마산에서의 3·1운동 준비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무렵 의신학교(義信學校) 교사로 있던 박순천(朴順天) 에게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배동석(裵東奭)이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마산의 궐기는 교회에서 경영하던 창신, 의신양학교 교사, 학생, 교회 인사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창신학교에서는 이승규(李承奎)의 아들, 이은상(李殷相)의 공부방에서 한태익(韓泰益)·이정기(李廷紀)·이일래(李一來) 등이 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한편 의신학교에서는 박순천(朴順天)·김필애(金弼愛) 양 교사가 상급반 여학생들과 더불어 최봉선(崔鳳仙)의 집에서 궐기에 필요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3월 21일 드디어 양학교 학생, 교사, 교회 인사들이 선도하는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그 날은 장날이었다. 지게꾼, 장사꾼도 참여하고 3천명의 군중에 의한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일제군경의 탄압이 시작하였다. 50명이 검거되었다. 그 때 마산의 손꼽는 유지이던 이승규 장로는 검거된 주동자들의 신원을 보증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석방시켰다.
창신학교 고등과 학생 최동락·최영조 등은 마산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4월 22,23,24일의 3일간에 걸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학생들은 교내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학생들은 학교장의 만류도 듣지 않았다. 4월 24일 학교 당국은 이 같은 학생들의 궐기를 봉쇄하기 위하여 휴교 조치를 취했다.68)
4월 29일 오후 1시경에 창원군 파사정(巴沙丁)의 큰 길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약 50명이 독립만세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69)
3월 21일에 일어난 사천 공립보통학교(泗川公立普通學校)의 의거는지방 청년 유지들의 지도에 의하여 결행되었다. 3월 21일은 동교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졸업식이 있는 날, 학생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등교하였다.
학생들은 졸업식이 시작하기 전에 축구놀이를 했는데 이긴 편의 이윤조(李允祚)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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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앞의≪3·1운동사≫(하) p. 235.
69) 앞의≪3·1운동사≫(하) p.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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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별안간에 일어나 사태에 대해 크게 당황하였으나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학생 이윤조는 검거되었다.70)
3월 21일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의 제1회 졸업식이었다. 이날을 기하여지방의 유지, 청년, 학생이 모두 궐기하기로 되어있었다. 당일 학생들은 졸업식 전에 행동을 개시 하였다. 미리 준비하였던 태극기를 흔들며 박상윤(朴相潤)·박종대(朴鍾大)를 선두로 하여 일제히 노산(魯山)에서 읍내를 향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며 돌진해 나갔다. 이 때 군경과의 출동으로 박상윤과 박종대는 검거되었다. 그러나 청년층의 지도로 항거는 계속되어 시장에서 5백명이 참가한 시위를 전개하였다.71)
진주(晋州)의 3·1운동은 3월 18일부터 시작한다. 며칠간 몇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항쟁이 되풀이 되었다. 3월 21일에는 학생 강민호(姜玟鎬)와 김경택(金景澤)외 수명이 학생의 궐기를 위해 모의 하던 중, 발각되어 검거되니 이번에는 학부형들이 들고 일어났다.
1919년 항쟁이 지나간 뒤, 1920년 8월 30일, 31일 이틀에 걸쳐 진주농업학교(晋州農業學校)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펴기 위한 모의가 진행되었다. 그 주동자들은 2학년에 재학중이던 문위동(文渭東)·신영안(申英安)·김익조(金益祚) 등이 있다. 이들은 세 곳을 옮겨가며 태극기 3백매를 준비하였다.
그들은 진주시내의 학생, 청년층을 상대로 궐기선전을 폈다. 그러나 8월 30일 밤 11시에 준비물 모두를 몰수당하고 관련자 72명이 체포되었다. (72명 중 진주농업학교학생 50명)
주동 학생이던 문위동·신영안·김익조는 재판에 회부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72)
3월 20일 군북면(郡北面) 동촌리(東村里)에 있던 사립신창학교(新昌學校) 교정에서 약 50명의 학생과 군중이 만세시위를 감행하였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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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앞의 ≪3·1운동사≫(하) pp. 267~268.
71) 앞의 ≪3·1운동사≫(하) pp. 269~271.
72) 앞의 ≪3·1운동사≫(하) pp. 296~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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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절 경북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대구(大邱)의 각 학교
대구학생의 궐기도 기성인들의 분위기조성이 크게 작용하였다.
서울의 이갑성(李甲成)은 경상도지방의 궐기추진을 위하여 파견 되었다.
그는 2월 24일 대구에 도착하여 교회계통의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2월 26일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김문진(金文珍)을 대구로 특파하였고 3월 1일에는 다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李容祥)에게 독립 선언문 2백매를 이만집(李萬集)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이만집은 3월 2일에 선언서를 접수하고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와 더불어 거사를 위한 준비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을 동지로 받아들이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계성학교(啓星學校)의 교사이던 백남채(白南採)·최상원·권의윤·최경학(崔敬學) 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기독교 계통과 학생 계통을 상대로 포섭활동을 벌렸다.
계성학교 교사들은 학생 대표들인 심문태(沈文泰)·김삼도(金三道)·정원조(鄭元祚)·박태현(朴泰鉉)·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이영식(李永植)·이성용(李聖容)·박재곤(朴在坤) 등을 소집하여 학생참여문제를 지지하니 이들 학생은 전교생 규합에 나섰다.
한편 대구고보(大邱高普)에서도 서울의 궐기소식을 전해 듣고 허범(許範)·백기만(白基萬) 양인은 동교 학생 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김재소(金在炘)·신현욱(申鉉旭)·박노일(朴魯一) 등과 더불어 독자적인 준비를 추진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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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앞의 ≪3·1운동사≫ (하) 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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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이상화(李相和)는 계성학교 쪽에 연락을 취하는 사명을 담당하였다. 이상과 같이 대구지방학생들의 동향이 궐기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이 대구로 내려와서 학생계통의 추진모의에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 즉 김무생은 계성학교 교사 최상원, 대구고보 학생 신현욱·허범과 접촉하여 서울과 평양의 궐기상황을 전달하고 대구 학생의 적극적인 참여를 종용한 바 있다. 대구고보의 이상화·백기만은 계성학교의 정원조·이차돌(李次乭)과 이상화 집에서 밀의를 거듭하여 양교의 공동참가 문제가 타결되었다. 또한 김무생은 박재원(朴齋元)과 함께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 교사 임봉선(林鳳善)을 찾아 여학생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대구고보 학생 허범은 신명여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과 협의한 뒤, 임봉선과 학생 이선애(李善愛)를 찾아가 학생 동원을 부탁했다.
한편 앞의 주동인물들에 의하여 성경학교(聖經學校)와도 제휴하기로 되었다.
이 같이 하여 대구학생들의 공동궐기가 일단 다짐된 셈이다.
김태현은 이갑성으로 부터 내려온 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인쇄하고 태극기 40매,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쓴 크고 작은 깃발도 준비하였다. 이 작업은 3월 6일, 남산정(南山町)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백남채는 이를 계성학교 급사 손상우(孫相佑)에게 맡기면서 거사당일 학생과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는 부탁을 했다.
거사의 일시 장소는 3월 8일 오후 1시 서문외 시장(큰 장터)으로 정해졌다. 3월 3일에 홍주일(洪宙一), 3월 7일 백남채에 대한 예비검속이 있었기 때문에 궐기 추진 세력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8일은 닥쳐왔다.
이날 아침 대한독립만세 또는 태극기에 독립만세라고 쓴 비라가 도청 정문을 비롯한 여러 곳에 첨부 되거나 뿌려졌다. 교회측 인사 수십명은 하나씩 장터로 잠입하여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성학교 학생 1백명은 귀가를 가장하고 시장 근처로 집결하였다. 성경학교 학생 20명도 박장호(朴章浩)가 통솔하여 시장에 도착하였다. 또한 신명여학교 학생 50명도 머리와 허리를 수건으로 졸라매고 시장 근처에 잠복하여 궐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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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오후 3시 조금전) 대구고보학생 2백명은 진로를 차단하는 헌병 기마대와 격투를 벌리면서 돌진해 왔다. 잠복하고 있던 계성학교 학생들이 일제히 달려가 탄압하는 기마 헌병들을 격퇴하고 시장으로 몰려 들어왔다. 이만집과 김태련은 임시로 만든 단위로 올라갔다. 김태련이 선언서를 낭독하던 중, 사태가 급박하여 중단하고 학생들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시위대열의 선두에는 안경수(安敬秀)가 큰 태극기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남학생의 시위행렬이 가두로 나서자 신명여학교 학생들도 합세하였다. 학생과 군경은 가두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 날은 마침 비가 오는 날이었다. 군중도 참여하여 시위대열은 약 1천명으로 늘어났다. 흥분과 눈물 속에서 만세시위는 전개 되었다.
시위가 종로통을 지나 달성 군청이 있는 지점까지 진출하였을 때, 대구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기로 탄압하였다. 부상자가 속출하므로 학생 시위대는 뒷날 다시 궐기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당일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1백 57명이 검거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백남채(白南採)·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경학(崔敬學)·김무생(金武生)·박재원(朴齋元)·이태학(李泰鶴)·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善)·신현욱(申鉉旭)·허범(許範)·백기만(白基萬)·하윤실(河允實)·김수천(金洙千)·심문태(沈文泰)·정원조(鄭元祚)·이승욱(李陞旭)·손석봉(孫石鳳)·최영학(崔永學)·김재범(金在範)·박재곤(朴在坤)·박몽포(朴夢圃)·이이석(李利錫)·손치봉(孫致奉)·나상기(羅相基)·정인화(鄭寅華)·안영두(安泳枓)·허방(許枋)·장해동(張海東)·이석도(李碩道)·장봉수(張奉守)·이성해(李聲海)·박장호(朴章鎬)·박만준(朴萬俊)·허담(許澹)·이복건(李福健)·신태근(申泰根)·이선희(李善希)·이남숙(李南淑)·최경성(崔景成)·임용한(林容漢)·안의중(安懿仲)·박문영(朴文瑛)·김봉안(金鳳安)·안경수(安敬秀)·이재춘(李載春)·강학봉(姜學鳳)·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허성도(許聖徒)·이만이(李萬伊)·권중윤(權重潤)·이기명(李基明)·권성우(權聖佑)·박상동(朴尙東)·김수길(金壽吉)·김달윤(金達潤)·이창순(李昌淳)·신창식(申昌植)·권영화(權永和)·서복이(徐福伊)·이규환(李圭煥)·이영식(李永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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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제1차 대구학생궐기가 있은 후, 학생·군중에 의한 새로운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군경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3월 9일 새로운 만세시위를 위하여 계성학교 학생을 비롯한 약 1백 50명의 학생들이 달성공원(達城公園)으로 모여 들었으나 군경의 강제 해산에 부딪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대구 학생들의 재궐기를 위한 모임은 중단되지 않았다.
대구고보의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炘)와 계성학교의 박태현(朴泰鉉)·박성용(朴聖容) 등 학생들은 이지방의 청년 유지인 김재병(金在柄)·이덕주(李德周)·김치운(金致雲)·김윤덕(金潤德)·서상철(徐相喆) 등과 협력하여 3월 10일 남문외시장(南門外市場)에서 재궐기한다는 예정으로 거기에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3월 10일 오후, 학생들은 변장을 하고 약속된 장소로 몰려갔으나 군중 보다 더 많은 군경이 경계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4시 30분경, 주동 인물들은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수백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일제 군경의 탄압은 철저하여 현장에서 주동 인물들이 검거되었다. 이 거사로 말미암아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박남준(朴南俊)·김재소(金在炘)·박태현(朴泰鉉)·박성용(朴聖容)·김재병(金在柄)·이덕주(李德周)·김치운(金致雲)·김윤덕(金潤德)·서상철(徐相喆)·이영호(李齡鎬) 등이다.
3월 10일부터 대구고보와 계성학교, 신명여학교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의 반일운동은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말미암아 지하적인 방법으로 활동하였다.
이같은 지하활동에 참여한 학생은 계성학교의 김수길(金壽吉)·권성우(權聖佑)·이종식(李鍾植)·이영식(李永植)·이영옥(李榮玉)·이명건(李命健)·최재화(崔載華)·허성도(許聖徒)·이기명(李基明)·박제원(朴齊元)·이종헌(李鍾憲)·이덕생(李德生)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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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길은 3월 8일 학생의거가 끝난 뒤 3월 9일, 그곳의 교회 목사인 김충한(金忠漢)을 만나 3월 31일 김천에서 궐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수길과 김충한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2백매를 등사하였다.
“지금 조선 독립의 기운(機運)에 제회(際會)하여 여기에 조선인 민중에게 경고한다. 민중은 모두 분개하여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어나 자유의 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경고문을 준비하여 추진하던 김천에서 궐기는 비밀누설로 실패하였다.
김수길이 다시 대구로 돌아와 신정(新町)의 하숙집에서 이영식(李永植)·허성도(許聖徒)·이기명(李基明)·이종식(李鍾植)과 자주 밀의하여 조선상인들에게 폐점철시(閉店撤市)를 종용하며 일본인과의 거래를 끊어버리도록 하기 위하여 4월 2일, 남산정(南山町) 박준이(朴俊伊)의 방에서 동정 표시 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를 작성 등사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당한 것은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인은 죽음으로서 조선 독립의 목적을 관철해야 한다. 벌써 이를 위해 생명을 버리고 옥사(獄舍)에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 모름지기 우리는 동정을 표시하고 일본인과 상거래를 휴지(休止)해 주기 바란다. 불응자에게는 좋지 못한 결과가 따를 것이다.”
이상의 경고문을 시내 요소에 붙이고 서문외(西門外)의 김응수(金應壽), 경정(京町)의 김경부(金敬夫)에게 우송하였다. 이 같은 경고문 발송으로 80여호의 상인들이 호응하였다.
이들은 또 4월 6일, 대구경찰서장 앞으로 “너는 왜 3월 8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하였는가? 너희들과 같은 자는 암살당할 때가 있을 것이니 각오 하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보내어 당사자를 위협하였다.
이들은 또한 남산정(南山町)의 이종식(李鍾植) 방에서 다음과 같은 “동정경고문(同情警告文)” 제2호 약 4백매를 작성,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부하고 민중의 참여와 협력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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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吾人)이 대한 독립을 회복하려고 하자 일본 관리는 그들 지사(志士)를 살륙하여 그 행동이 금수만도 못하나 독립 청원서는 불국(佛國) 파리의 열국회의에 수리 되어 쾌보가 머지않아 있을 것이니, 조선인은 더욱 협심(協心)하고 동정을 표시하여 ≪태서신문(泰西新聞)≫ 기자가 내조(來朝)하는 차기(此機)에 일반은 폐점(閉店)을 감행하기 바란다. 여기에 응하지 않는 자는 좋지 못한 위난이 따를 것이다.”
4월 7일 “동정경고문” 제3호를 3백매 만들어 시내 요소에 배부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양의 신문 기자들이 내구(來邱)하여 시내를 순시하므로 조선인은 독립 자유를 바라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명 8일(明 8 日) 조조(早朝)부터 철시 폐점하라. 또 상인은 일본 상인과 금전, 물품의 거래를 하지 말라. 신문지에 전해지고 있는 총독부의 유고(諭告) 기타 경찰관의 전달은 모두 허위이므로 믿지 말라. 폐점하지 않는 자에게는 강제 수단을 쓸 것이다.”
4월 13일 김 수길 등은 일제가 친일파를 동원하여 자제회(自制會)를 만들게 하여 독립운동을 저지하려는 교활한 방법을 규탄하기 위하여
“시세(時勢)에 맞지 않는 자제회(自制會)를 설립하고 다수를 강제 권유하여 입회시키는 것은 조선민족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노배(奴輩)이므로 암살할 것이다.” 라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친일 거두로서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로 있던 박정양(朴定陽) 등에게 발송하였다.
한편 일부의 청년, 학생 등은 평양학생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을 조직했다.
1919년 4월 17일의 일이다.
이종식(李鍾植)·이영옥(李榮玉)·이명건(李命健)·최재화(崔載華)·이종헌(李鍾憲)·이덕생(李德生) 등이 한세동(韓世東)의 거처에서 밀회하여 조직하였다.
그들은 이 비밀 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각종의 출판물을 발간하여 민중의 각성을 도모하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만주방면에 구성원을 특파하여 국내외의 유기적 연락에 참여한다는 목적을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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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단(慧星團)의 부서는 다음과 같다.
(1) 인쇄책임자-최재화·김수길
(2) 인쇄물, 기타 배달책임자-허성덕·이덕성·이종식·이종헌·이기명
(3) 출납책임자-이수건
(4) 만주출장책임자-이영옥
(5) 연락책임자-이명건
이들이 4월 18일 이후 작성,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부한 대표적인 경고문은 다음과 같다.
근고동포(謹告同胞)
구주(歐洲)의 대전란도 미국의 출병에 의해, 드디어 평화의 결과를 가져와 그 대통령의 제창에 의해 제 약소국은 국권을 회복하게 되어 있다. 조선인 동포는 모름지기 분기하여 횡포한 일본의 기반을 벗어나 다년 학정하에 노예적 대우를 받아온 치욕을 씻고 자유의 천지를 개척해야 할 이호기(好機)를 틈타 국가의 재건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4월 18)
경아동포(警我同胞)
세계의 대전은 자유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였다. 아조선민족(我朝鮮民族)은 궐기 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비록 일본의 강압이 있을지라도 육탄으로 싸워 굴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니 먼저 상점을 폐점하여 일본인과의 거래를 휴지하고 일화를 배척해야 한다. (4월 27)
경고관리동포(警告官吏同胞)
‘조선인 동포는 지금 각지에서 봉기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너희들 조선인 관공리들은 호구(糊口)를 위해 동족의 원수가 되는 것이니 속히 각성 시작하여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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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격문은 도내의 각 군수, 군서기, 면장, 면서기에게 우송하여 민족적 자각심을 환기시키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4월 17일~5월 6일에 걸쳐 민족자산가들에게는 독립운동 자금을 내라는 호소를 하였다.
이상의 경고문들을 살펴볼 때, 대구 학생들의 3·1운동에 참여하는 의식수준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수준 높은 계속 운동으로 재판에 회부된 학생, 청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수길(金壽吉)·이명건(李命健[또는 李如星])·이종식(李鍾植)·이영옥(李榮玉)·방명원(方明園)·최재화(催載華)·이수건(李壽健)·이덕생(李德生)·이영식(李永植)·허성덕(許聖德)·이기명 (李基明)·이종헌(李鍾憲)·권성우(權聖佑).이들은 모두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74)
2. 동화사지방 학림(桐華寺 地方學林)
서울의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학생이던 윤학조(尹學祚)는 3월1일의 서울궐기에 참여한 후, 동화사롤 찾아가 그 곳지방학림 학생과 접촉하여 만세지위 방안을 추진하였다. 윤학조가 만난 동화사지방학림의 학생은 권청학(權淸學)·김문옥(金文玉) 등이 있는데 이들은 첫 계획으로는 달성군(達城郡) 공사면(公山面) 백안시장(百安市場)에서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윤학조는 시위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대구 남문의 시장에서 궐기하는 것이 파급 효과가 크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3월 28일 동화사 학생들은 심검당(尋劍堂)에서 모여 3월 30일 대구로 진출하여 궐기하는 문제를 토의한 끝에 결정을 보았다.
3월 29일 동화사 9명은 대구로 잠입하여 대구에 있던 도화사 포교당(布敎堂)에서
_______________
74) 앞의 ≪3·1운동사≫ (하) pp. 347~360.
앞의 3·1 재판기록 pp. 1264~1274의 판결문, 상동서, pp.1274~1278의 형공, 제390,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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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 김문옥 등은 큰 태극기를 만드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약정한 3월 30일 오후 2시 대구 남문의 시장군중은 약 3천명이나 되었다. 이 때 동화사 학생들은 시장 중앙지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학생과 군중은 시장을 누비면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때 군경이 출동하여 총검으로 동화사지방학림 학생들을 검거하였다. 현장에서 검거되어 복역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이성근(李成根)·김문옥(金文玉)·이보식(李普湜)·김종만(金鍾萬)·박창호(朴昌鎬)·김윤섭(金潤燮)·허선일(許善一)·이기윤(李起胤)·권청학(權淸學)75)
3. 비안보통학교(比安普通學校)
서울과 대구 학생의 궐기는 쉽사리지방학생들의 애국심을 고무시킬 수 있었다.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의 미아보통학교 학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안보통학교의 급장들인 우희원(寓熙元)·박기근(朴基根)·박만녕(朴萬寧)·정인성(鄭寅成) 등은 그들의 궐기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최초에는 박만녕과 박기근이 접촉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경에 박만녕은 비안보통학교 전교생을 교정에 모아놓고 오늘 비안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있다는 사실을 예보하고 학생전원의 참가를 호소하였다. 한편 졸업생들에게는 태극기를 만들어 참여하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그러나 우희원·박기근·정인성·박만녕 등은 일본인 교장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다음날 학교 뒷산에서 거사하기로 작정했다. 3월 12일 9시에 수업 개시의 종이 울렸을 때, 앞의 주동 학생들은 전교생이 뒷산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를 것을 호소하였다. 일본인 교장은 주동 학생들을 붙들고 설교를 하고 있을 때, 학생 1백50명은 책보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 연창했다. 주동자들도 이 때 교장을 뿌리치고 뒷산으로 뛰어가서 만세를 불렀다. 교사들은 달려와 강제해산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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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앞의 ≪3·1운동사≫(하)pp. 360~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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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보통학교의 만세시위를 지휘한 우희원·박기근·정인성 3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경찰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대구 형무소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루었고, 주동자 중, 박만녕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비안보통학교의 일부 학생들은 비안면 쌍계동(雙溪洞)으로 달려가 그날 오후 1시에 기독교 계통을 중심으로 궐기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에는 대구계성학교의 학생 박상동(朴尙東)도 크게 활약하였다.76)
4. 기타 각 학교
영천군(永川郡) 신녕보통학교(新寧普通學校)에는 박필환(朴弼煥)이라는 부훈도(副訓導)가 있었다. 그는 평소에 학생들에게 애국 사상을 주지시켰다. 이 영향으로 3·1운동이라는 거족적인 항쟁기를 맞이하여 이 곳 학생들은 사태를 좌시하지 않았다. 신녕보통학교 학생이던 황정수(黃正秀)·김호용(金浩溶)·박칠성(朴七星)·구위준(具渭俊) 등 4명은 4월 6일 6시 30분경에 완전동(莞田洞) 노영수(盧永秀)의 뒤뜰에서 황정수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구한국 독립만세”를 불렀다.
뒤이어 윤율이(尹律伊)를 비롯한 학생 15명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밤 11시 30분 읍내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해 가던 중, 경찰의 저지로 현장에서 관련자 18명이 검거되었다. 한편 이들은 이곳 청년들과 협의하여 4월 8일 신녕 장날에 거사한다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부훈도 박필환도 검거되었다.
황정수는 징역 10개월, 김호용·박칠성·김해오는 각각 6개월, 윤율이·구위준도 각각 4개월의 언도를 받았고 김중운·박필환은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8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겼었다.77)
3월 18일 봉화군(奉化郡) 내성면(乃城面) 내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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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앞의≪3·1운동사≫(하) pp. 368~369.
77) 앞의≪3·1운동사≫(하) pp. 366~367.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235~1236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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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보통학교의 학생 이귀락(李龜洛)은 대구 고등보통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기 위하여 대구로 갔을 때, 대구 학생들의 만세시위 광경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귀락은 그들도 궐기한다는 결의를 하고 3학년 권인환(權麟煥)과 더불어 협의한 끝에 주로 기숙사 학생을 대상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준비를 추진하였다. 3월 18일은 내성읍내의 장날이었다. 3월 17일 밤, 주동자들은 기숙사에서 태극기 66개를 만들고 독립선언서 약 50장을 준비하였다.
예정한 3월 18일 이육상(李陸相)은 학생 12명과 함께 읍내 시장으로 들어가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많은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많은 군중들이 여기에 호응하려고 했으나 헌병의 저지로 좌절되고 현장에서 이육상(李陸相) 이하 12명이 검거되었다.
검거된 학생 중, 이육상은 징역 2년, 그 밖의 학생은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육상(李陸相)·권인환(權麟煥)·이귀락(李龜洛)·박주동(朴柱東)·권태영(權泰英)·안성모(安聖模)·박규준(朴奎俊)·권준(權埻)·권괴응(權槐鷹)·권호기(權鎬基)·권덕창(權德昌)·이종황(李鍾黃)·안삼선(安三先)78)
3월 28일에는 예천군(醴泉郡) 호명면(虎鳴面) 원곡동(原谷洞)에 있던 한문서당(漢文書堂)의 학생들은 태극기 5개를 만들어 그곳의 농민 6명과 합세하여 등암산(藤岩山)에 올라가 3시부터 6시까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은 4월 9일 헌병들에 의하여 모두 구속되었다.79)
4월 13일 오후 3시경, 금룡사지방학림의 학생 18명은 태극기 4개를 만들어 들고 대하(大下) 경찰관 주재소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하기 위하여 행진 중, 헌병에 탐지되어 검거되고 말았다.80)
3월 23일에는 상주(尙州)읍내의 시장에서 5백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렸다.
_______________
78) 앞의≪3·1운동사≫(하) pp. 414~416.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366~1367의 판결문.
79) 앞의≪3·1운동사≫(하) p. 418.
80) 앞의≪3·1운동사≫(하) p.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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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세시위의 추진에는 상주 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姜龍錫)·성필환(成必煥), 경성중동학교 학생 한암회(韓岩回), 경성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石盛基), 보통학교 재학생 조월연(趙月衍) 등의 활동이 컸었다.81)
그리고 대구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김종식(金鍾軾)은 청도군(淸道郡) 운문면(雲門面)의 만세시위(3월 18일)와 선전활동에 가담하여 징역 6월에 처분되었다.82)
제11절 전북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신흥학교(新興學校),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 전주고등보통학교(全州高等普通學校)
전주지방에서도 천도교, 기독교 계통에 의해서 만세시위 준비가 진행되었다. 여기에서는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가 참여한 부분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양교의 운동참여를 위하여 신흥학교의 교사 유병민(劉秉敏)·문병무(文秉武)와 기전여학교의 교사 함의선(咸義善)·김지순(金漬淳) 등의 활동이 다대하였고 한편 전주(全州) 부호의 아들로서 당시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박태련(朴泰鍊)이 귀국하여 활동한 것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양교의 교사들과 박태련 등은 방학으로 말미암아 양교의 학생들이 귀향할 것을 우려하여 뜻있는 학생의 귀향을 만류하기로 했다.
기독교, 천도교인들에 의하여 태극기의 제작을 비롯한 시위준비가 진행되었다. 거사는 3월 13일에 감행하기로 예정했다. 일제의 군경은 예민한 경계태세를 펴고 있었다. 그러나 채소 가마니에 태극기를 넣어 남문시장까지 옮기는 작업을 진행되었다. 신흥, 기전 양교학생들도 거사준비에 참여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기전여학교-최경애(崔敬愛)·최금수(崔金洙)·함연춘(咸然春)·정복수(鄭福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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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앞의≪3·1운동사≫(하) p. 454.
82)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432~1443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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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이(宋順怡)·김신희(金信熙)·최요한나(崔堯漢羅)·임영신(任永信)·강정순(姜貞順)·김순실(金淳實)·김나현(金羅賢)·김공순(金恭順)
신흥학교-고형진(高衡鎭)·남궁현(南宮鉉)·김병학(金柄學)
이상은 3월 13일의 거사시에 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같이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선언서를 뿌렸다. 만세시위 대열은 남문에서 시작하여 제2보통학교 우편국 앞까지 진출하였다. 전주읍내의 유지들과 일부의 지방유지도 적극 참여하였다. 시위대열이 우편국 앞까지 왔을 때 군경의 탄압이 시작하여 현장에서 선봉에 섰던 주동자 10여명이 검거되었다. 오후 3시경 약 1백명의 군중은 다시 남문시장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본정(本町)쪽으로 행진하였다. 우편국 앞에 도착했을 때, 군중 수는 5백명으로 증가했다. 군경은 소방도구를 준비해 두었다가 이를 이용하여 강제 해산을 시켰으나 사방으로 흩어진 군중은 여기저기에서 만세를 불렀다.
당일 밤 9시~새벽 2시까지 만세를 부른 약 2백 30명의 군중 속에는 기전여학교의 김순실(金淳實)·김나현(金羅賢) 등이 끼어 맹활약을 했다. 검속자가 늘어났다. 전주의 뜻있는 청년들은 “애국지사”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또 시위를 벌렸다. 3월 13일에 전개된 전주의 제1차 궐기에서 구속된 사람 중에 임영신·정복수·김공순·최경애·김인애(金仁愛)·최요한나·강정순·함연순·최금수·송순의·길순실(吉順實)·김신희·정월초(鄭月初) 등의 여학생은 4일간의 단식 투쟁을 하면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저항하였다.
여학생들은 법정 투쟁에서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판결에 복종할 사람이냐?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강탈하였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3천리 이 강산에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이라 하니 이는 비법의 판결이다”
라고 대항하였다.
그 때 일제 관헌은 한 여학생의 귀를 베어서 위협하고 여러 여학생들을 모두 옷을 벗기고 모욕적인 욕설은 퍼부었다. 그러나 여학생들은 그들 자신들이 선택한 행동의 정당성과 하느님을 믿고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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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의 만세시위에도 앞장섰던 김경신(金敬信)은 신흥학교 학생 10여명과 함께 교회당을 순회하면서 독립의 성취와 검속된 애국 인사들의 석방을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권유하는 선전활동을 폈다.
한편 재판에 회부된 고형진·박태연·남궁현 등의 남학생도 과감한 법정 저항을 폈다.
그 중에서 신흥학교의 고형진(高衡鎭)은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금번 평양학생은 조선민족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노일 전쟁을 동양의 영구 평화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한국의 역적(逆賊) 이완용(李完用)과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맺고, 일진회(一進會) 송병준(宋秉畯)이가 한국 민족이 일본과 합방을 원한다고 기만적 활동을 하여 경술치욕(庚戌恥辱)을 당한 후, 신성한 우리 민족은 울분을 참지 못하던 중, 의병 운동이 일어나서 항일투쟁을 전개 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일호 반성 없이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도 저열하게 하고 교육도 차별하였다. 또 관청에서도 조선 사람이라고 탄압이 심하고, 일본 사람은 이민(移民)으로 나올 적에는 빈손으로 와서 지금 부호가 되었는데, 이것은 갖은 방법으로 순결한 우리 민족을 착취한 것으로서 그 증거가 충분하다. 장곡천(長谷川妤道), 사내(寺內正毅) 등 역대 총독으로 와서 말로는 일시동인(一神同仁)이라고 하지만 압박은 더욱 심하다. 평양학생은 조선 사람으로서 정당한 운동인데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운운하면서 구속 감금하고, 무죄한 백성을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하여 헌병과 경찰이 살해하니, 이러고서도 조선민족의 감정을 안 살 수 있느냐?
그리고 3월 23일에도 정주 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20여명이 검속 되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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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앞의≪3·1운동사≫(하) pp. 495~501.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483~1485 [1919년, 형공, 제3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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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산 영명중학교(群山永明中學校)
군산의 영명중학교는 기독교계의 학교이다. 군산 만세시위의 주체는 이 영명중학교학생, 교사들로 이루어졌다.
당시 영명중학교 교사로 있던 박연세(朴淵世)·이두열(李斗悅) 등에게 서울에서 3·1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1일의 일이다.
교사였던 박연세·이두열·김수영(金洙榮) 등은 서울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수시로 연락이 있었다. 군산에서의 궐기가 구체적으로 발전하게 된 동기는 서울의 학생 김병수(金炳洙)가 내려와서 이들과 접촉함으로써 시작한다. 이들은지방의 기독교 인사들인 김성은(金聖恩)·유희순(兪熙淳)·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양성도(楊成道) 등과 의논하여 3월 6일 군산 장날을 기하여 궐기하기로 예정하였다.
이두열·이준명·김승은 등은 영명중학교 학생 김영후(金永厚)·송기옥(宋基玉) 등에게 지시하여 기숙사 2층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도록 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날 무렵이었다. 3월 5일 영명중학교의 오전 수업이 끝날 때 쯤, 군산 경찰서에서 수명의 경찰이 나타나서 이두열·김수영·박연세 등 교사를 연행해 갔다. 만세시위 계획은 각박하고 위험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 때 예비적인 요원으로서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던 김윤실(金潤實)은 지금까지의 준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는 판단을 하고 학생들과 긴급협의를 진행하여 즉각적으로 궐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바로 행동에 돌입하였다.
학생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김영후·송기옥·이도준(李道俊)·홍천경(洪天敬)·고준명(高俊明)·유복섭(劉複燮)·오한길(吳漢吉)·강인성(姜仁聲)·강규언(姜圭彦) 등이 앞장으로 나섰다. 이 시위에는 기독교계통의 여학생들도 합세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중도에서 보통학교 학생과 많은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대열은 5백명으로 증가 하였다. 시위대는 평화동(平和洞)·영동(榮洞)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로 밀려가서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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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시위사태에 당황한 일제 군경은 재향군인(在鄕軍人)과 이리(裡里)에 주재하던 헌병 병력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열을 강제 해산시키면서 주동자들을 구속하였다. 이어서 영명중학교와 교회당을 수색하였는데 영명중학교에서 독립선언서 2천여매를 압수하였다. 이 때 90여명이 구속되었고 학생 유복섭·고준상·홍천경 등 30여명은 6개월~1년 반의 징역언도를 받았다.84)
3. 군산 보통학교
영명중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참가에 이어서 이번에는 군산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보통학교 상급학년의 연령은 18~19세 정도였다.
문종묵(文鍾黙)·김학구(金學求)·김종련(金鍾鍊)·나명조(羅明祚)·신형식(申亨植) 등 뜻있는 학생들은 비슷한 연령의 청년들인 권재길(權在吉)·이남율(李南律)·김수남(金壽男)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가며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학교 당국은 이런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 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문종묵·김종련 등 학생은 교외의 권재길·이남율과 연락하여 선언문을 등사하여 군산 시내와 옥구군내에 살포하기도 하고 부두의 노동자를 찾아 독립운동을 선전하는 한편 영명중학교 학생들과 접촉하여 재궐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3월 14일에는 김학구·나명조·신형식 등이 주동이 되어 70여명이 동맹 퇴학원을 학교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 무렵, 3월 12일 군산경찰서 창고에 불이나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어린 청소년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원, 그리고 친일파 교원들이 학생의 민족적 의지를 번번히 탄압한다는 생각을 하던 끝에 군산 보통학교에 불을 지르기로 작정했다.
3월 23일 밤 11시경에 군산 보통학교에 방화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수남은 징역 10년, 이남율은 7년, 권재길·문종묵·김학구·나명조·김종련·신형식 등은 징역 1년의 언도를 받았다. 이 방화사건 이후에도 3월 30일 군산에서는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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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앞의≪3·1운동사≫(하) pp. 52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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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각 학교
이리(裡里)는 호남교통의 중심지이다. 여기서에도 3월 26일 목표행 열차의 승객들과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만세를 불렀고 4월 4일 본격적인 궐기를 했다. 이리에서의 만세시위는 문용기(文鏞棋)·박도현(朴道賢)·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 계통의 젊은 인사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 문용기는 기골이 장대하고 신·구학문에 상당한 실력을 보유하여 옥구(沃溝)의 영명하교, 목포영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지방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상의 유지들은 4월 4일 이리의 장날을 기하여 궐기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예정된 4월 4일 정오경부터 이리 시장에는 약 3백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만세시위에는 이지방 출신으로서 서울 등지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귀향하여 고향의 시위조직과 실천에 크게 기여했는데 다음과 같은 학생들이 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김병수(金炳洙)
중동학교(中東學校)-김종현(金宗鉉)·김철환(金鐵煥)·이시웅(李時雄)·박영문(朴泳文)86)
4월 4일에는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만경 보통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궐기 하였다. 만경보통학교의 교사이던 임창무(任昌茂)·오연길(吳淵吉)·장태석(張泰錫)·이석재(李錫在) 등은 평소에 익산군(益山郡) 오산면(五山面)의 애국지사인 문용기(文鏞祺) 등과 비밀연락을 취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3월 1일 이후 거족적인 저항기를 맞이하여 이들 뜻있는 교사들은 좌시할 수 없었다. 4월 4일 정오경에 교사 임창무는 3,4학년 학생들을 교정에 모아 놓고 만세시위에 참가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학생 1백여명이 대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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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앞의≪3·1운동사≫(하) pp. 525~529.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503~1505, [1919년, 영공제 238, 제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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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여 만경 시장으로 진출하였다. 학생, 교사에 의한 감격적인 만세시위를 본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였다. 이 같은 만세시위로 임창무 등 주동자는 구속되었다.87)
4월 18일 부안군(扶安郡) 줄포면(茁浦面)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에 앞서 줄포 보통학교에서는 4월 7~8일 경에도 학생들이 교정에서 만세를 부른다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좌절된 일이 있다. 그 뒤 줄포 보통학교의 뜻있는 학생이던 김태순(金泰順)·박기봉(朴基鳳)·김동섭(金東燮) 등은 다시 4월 18일의 줄포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한다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준비하여 보안면(保安面) 사무소 게시판과 큰 길가의 소나무에 달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교사의 간섭을 뿌리치고 오전 11시경 수업을 끝낸 뒤, 학교를 벗어나 시장으로 갔다. 일부 학생들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만세시위에 들어갔으나 경찰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주동학생 김태순·김동섭·서용순(徐龍順)·이병근(李秉根)·박병섭(朴柄燮)·이병갑(李柄甲) 등이 체포되었으나 학교장과 학부형의 교섭으로 석방되었다.88)
4월 3일 진안군(鎭安郡) 주천면(朱川面) 주양리(朱陽里)에 있던 화동학교(華東學校) 학생들과지방 유지들에 의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날 밤 10시경에도 학생과 주민 60여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이 때의 주동자는지방유지 김주한(金周漢)과 오해관(吳海寬) 이었다.89)
3월 10일 정읍군(井邑郡) 성내면(星內面) 월산리(月山里)에 거주하는 이종철과 학생 이종수(李鍾洙)·이대성(李大成)·유판술(劉判述) 등이 주동이 되어 선전활동을 했다. 다수의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이 잘 보이는 장소에 붙이거나 “대한 독립(大韓獨立)” “독립(獨立)”이라고 써서 장대에 붙여 성내면 사무소의 빈터에 세웠다. 한편 13일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비라를 뿌렸으나 경찰에 발각되어 행동을 옮기지 못하였다.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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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앞의≪3·1운동사≫(하) pp. 520~523.
87) 앞의≪3·1운동사≫(하) pp. 530~531.
88) 앞의≪3·1운동사≫(하) pp. 532~533.
89) 앞의≪3·1운동사≫(하) p.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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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절 전남지방의 학생독립운동
1. 광주(光州) 수피아(須彼亞)여학교,
숭일(崇一)학교, 광주농업학교
전남 광주지방에서 근대성에 입각한 새 풍조가 일기 시작한 것은 교회(1903년, 금동[錦洞] 교회의 설립), 학교(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병원(제중의원[濟衆醫院]) 등이 설립되므로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리하여 광주는 호남의 교육·문화 도시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지방에서 최초로 3·1운동의 동기가 형성 되는 것은 동경 2·8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광주 출신의 정광호(鄭光好)·최원순(崔元淳) 등이 광주로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의 2·8독립선언문을 우송해 줄 때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자극된 이지방의 청년 최한영(崔漢泳)·김복수(金福洙) 등은 광주에서도 독립운동을 펴기로 작정하였다.
한편 교회계통과 일반 청년들도 궐기의 뜻을 굳히고 계획을 추진한다. 즉 기성인들에 의하여 광주 궐기의 조직 주체가 성립되는데 거기에 참여한 최초의 중요한 주동인물 및 부서는 다음과 같다.
최흥종(崔興琮)·김철(金鐵)·최정두(崔正斗)·남궁혁(南宮赫)·김강(金剛)·최병준(崔炳俊)·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峰)·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圭)·서정희(徐廷禧)·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 등이다.
군중 동원 부서
선언서, 태극기 준비-최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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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앞의≪3·1운동사≫(하) pp. 53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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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시민 동원-서정희
기독교인 동원-김강
수피아, 영락교회 학생 동원-홍성애
숭일학교 학생 동원-최병준
기타 학교 학생 동원-김태열·최영균·김규
그리고 대부분의 준비자금은 이기호(李基鎬)가 담당하였다.
이상의 인사들은 거사일을 3월 10일의 장날로 정하고 만반의 준비를 추진하였다.91)
한편 광주 각 학교 학생들의 참가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숭일학교 학생 동원문제는 최병준이 교섭하였고 이들 학생들의 힘으로 독립선언서, 기타 인쇄물을 배포하도록 하였다. 김강은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박애순을 만나 학생의 참가와 선언서의 배포를 교섭하고 3월 9일에 다시 만나 3월 10일 3시반에 거사한다는 연락을 취했다.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매일신보≫의 기사를 읽어주고 “만국 강화 회의에서 조선도 독립을 승인 받았기 때문에 각처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므로 우리도 그 운동을 개시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야 한다는 설득을 폈다. 최병준은 학생들에게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희생하여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자유를 위해 애쓰셨다. 기독교도인 우리는 어떠한 장애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의 수행을 위하여 노력을 해야한다”는 설교를 했다. 또한 송흥진 등은 숭일학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한편 최영균은 3월 9일 광주농업학교 기숙사를 방문하여 농업학교 학생의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리하여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약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양림동 방면에서는 기독교인,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光州川)을 따라 내려 왔고 서문거리로 많은 시민들이 몰려오고 농업학교 학생들과 군중은 북문방면서 모여들었다. 또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명의 농민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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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앞의≪3·1운동사≫(하) pp. 55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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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여드는 군중을 상대로 숭일·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앞의 주동자들은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이르기까지 광주 시내의 중요한 거리를 누비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침내 군중들은 경찰서 마당으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남녀 학생들은 시위대 열에 끼어 종횡무진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날 시위 현장에서 구속된 사람은 1백명이 넘었다.
3월 10일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재판에 회부된 교사 학생은 다음과 같다.
수피아여학교
교사-박애순 (23)·진신애 (20)
학생-홍성애 (18)·홍순남 (18)·박영자 (19)·최경애 (17)·양태원 (16)
김필호 (17)·임진실 (20)·고연홍 (17)·박성순(19)·이태옥(18)
김양순 (17)·양순희 (19)·윤혈녀 (20)·김덕순(18)·조옥희(20)
이봉금 (17)·하영자 (18)·강화선 (16)·이나혈(17)·최수향(16)
광주농업학교
학생-이동운 (24)·송기호 (20)·김정수 (21)·정병소 (22)·황오봉(19)
최연순 (24)
숭일학교 교사-강대년 (26)·신의구 (24)
재판기록에 학교명이 밝혀두지 않는 학생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정두범 (21)·김성민 (20)·김정수 (21)·이병환 (22)·김판철 (20)·주형옥 (21)·김학선 (24)·원창권 (22)·주장암 (20)·황맹석 (18)·박오기(19)92)
광주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 끝난 것이 아니고 다음날 오후 5시, 숭일학교·농업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약 3백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렸고, 13일 장날에는 또 1천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를 감행하였다.
4월 8일에는 광주 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하여 만세시위가 시도되었다. 4학년 급장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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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1919년 형(刑) 제558호, 판결문 [이 판결문은 광주 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김오봉(金五奉) 교장이 보관 중인 것을 참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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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섭(崔泳燮)은 유봉식(柳鳳植) 등 청년들과 연락하여 4월 8일 11시를 기하여 광주 자혜의원(慈惠醫院)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최영섭은 4월 7일 4학년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만세 계획을 알려주고 4월 8일 학교는 쉬고 자혜병원 앞으로 나올 것을 설명하여 일동의 찬성을 얻었다.
당일 예정한 시간에 최종하(崔鍾夏)·김봉수(金鳳洙)·김길선(金吉善) 등이 약속된 장소로 나갔으나 경찰에 만세계획이 누설되어 좌절되었고 최영섭은 구속되었다.93)
2. 해남(海南) 보통학교
해남에서의 만세시위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먼저 시작하였다.
해남보통학교 학생 김규수(金圭秀)는 평소 일제의 강제병합에 저항 의식을 지니고 있던 중, 3·1항쟁기를 맞이하여 좌시할 수 없다하여 궐기할 것을 다짐하고 거사준비에 나섰다. 그는 4월 1일 해남 보통학교의 기숙사로 김한식(金漢植)·임영식(林永植)·신건희(申健熙)·윤옥하(尹玉夏) 등의 학우를 찾아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만세시위를 제의하여 일동의 찬성을 얻었다. 거사일은 4월 6일의 해남 장날로 정했다.
4월 5일 김규수·김현태·신건희·임영식·윤옥하·윤준하·김명곤·박동렬·윤백인·박복구·이재실·양동훈·박천홍·김성암 등이 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4월 6일의 해남 장날에 만세시위를 단행한다는 결의를 다시 다짐하고 준비를 급속도록 진행하였다.
이들은 천으로 만든 큰 태극기 80개, 작은 태극기 8개, 그리고 종이로 만든 태극기 80개를 만들었다. 한편 신건희는 독립선언 광고문을 기초하고 김규수·김현태·윤옥하·임영식 등은 이를 등사하였다.
4월 6일 오후 1시경, 해남 보통학교 학생 김규수·김한식·양동훈 등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 광고문 등을 감추어 가지고 시장으로 먼저 나가 동지 학생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광고문을 뿌리고 만세시위를 벌리니 다른 소년들도 여기에 참가하였고 시장의 군중도 모두 함께 호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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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앞의≪3·1운동사≫(하) p.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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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훈·김한식·곽경토(郭京土)·이병춘(李秉春)·문병춘(文秉春)·김이주(金伊住)등 어린 소년들은 군중을 향하여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외쳐댔다. 마침내 시위에 참여한 군중의 수는 1천여명을 넘었다. 특히 해남(海南)에서는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니 군중과 일반 소년의 동조도 빨랐고 그 폭도 매우 넓었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약 2시간 계속 되었으나 경찰은 강제 해산을 시켰다. 그러나 보통학교 학생들의 궐기를 계승하여 4월 11일에는 해남 읍내에서 김동훈(金東勳)을 비롯한지방 청년 안정석(安正錫)·안유석(安儒錫)·안창석(安昌錫)·손태옥(孫太玉)·남상권(南相權)·손승옥(孫升玉)·조종운(曺鍾運)·김흥봉(金興鳳)·김흥룡(金興龍) 등과 읍내의 유지인 김경두(金璟斗)·한창수(韓昌洙)·김영배(金永培)·천석균(千錫均) 등에 의한 별도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주동 학생의 명단이다.
김규수(金圭秀)·김한식(金漢植)·임영식(任永植)·신건희(申健熙)·윤옥하(尹玉夏)·윤준하(尹俊夏)·이사국(李士國)·박천홍(朴天洪)·양동훈(梁東勳)·김명곤(金明坤)·김현태(金鉉泰)·이재실(李在實)·이준탁(李俊鐸)·박복구(朴福九)·김성암(金成岩)·윤백인(尹伯仁)·김영휘(金永輝)·황인복(黃仁卜)·김봉두(金奉斗)·정순민(鄭順民)·송주봉(宋住奉)·김삼암(金三岩)·민오옥(閔五玉)·김명곤(金明坤)·진홍수(陳洪洙)94)
이들 중에서 김규수는 징역 1년, 김한식·임영식·박동렬은 각각 징역 8개월, 신건희·윤옥하·박천홍은 각각 6개월, 김명곤·윤준하·이재실 각각 징역 4개월, 이준탁·박복구·김성암·윤백인·양동훈은 각각 태(笞) 90에 처분되었다.95)
3. 기타 각 학교
영암읍내(靈岩邑內)의 궐기는 조극환(曺克煥) 등의 지방 유지들에 의하여 보통학교 학생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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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앞의≪3·1운동사≫(하) pp. 616~620.
95)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548~1549,[1919년 형 제466호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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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합동으로 3월 11일 결행하려 했으나 행동개시와 함께 경찰의 제지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군내의 여러 곳에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영암읍내에서는 4월 10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때 영암보통학교 학생으로서 태극기의 제작, 독립신문 등 인쇄물의 반포 및 시위에 적극적 활동한 학생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秦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96)강진군(康津郡)의 만세시위에서 그 동기를 조성한 사람은 동경 유학생인 김안식(金安植)의 귀향이었다. 그는 3월 20일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3월 25일 거사한다는 예정을 잡고 준비를 추진하던 중지방 청년 다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4월 4일 교회 계통의 주동으로 만세시위는 실천되었는데 이때 강진 보통학교 학생 60여명이 참여하여 시위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 같은 보통학교 학생의 참여로 말미암아 학생 오승남(吳承男·21), 박일춘(朴一春·18)·이은표(李殷杓·22) 등은 재판에 회부되어 오승남은 징역 1년 2월, 박일춘·이은표는 태(笞) 90대에 처분되었다.97)
3월 15일 화순(和順)에서는 서당생도 조경환(曺庚煥)·조기현(曺基賢) 등의 기성인의 대열에 끼어 경미산(更美山)에 올라가서 산위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는데 참여하였다.98)
나주군(羅州郡) 반남면(潘南面)에지방유지, 정복현(鄭茯鉉)·안영태(安永泰) 등이 창설한 남화학교(南華學校)가 있었다. 이 남화학교의 학생 정순규(鄭淳圭)·나하집(羅夏集)·나준집(羅駿集) 등은 광주숭일학교의 학생 김성민(金聖珉) 과 연락을 취하여 3월 25일, 반남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김성민이 광주에서 체포되므로서 3월 23일 이 계획이 드러나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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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앞의≪3·1운동사≫(하) pp. 605~666.
97) 앞의≪3·1운동사≫(하) pp. 615~616.
앞의 3·1운동재판기록 pp 1548~1549.[1919년 형 제466호 판결문].
98) 앞의≪3·1운동사≫(하) p. 569.
99) 앞의≪3·1운동사≫(하) p. 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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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에는 곡성보통학교의 부훈도(副訓導) 신태윤(申泰允)과 동교학생 수십명이 곡성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신태윤은 학생의 선두에서 만세를 불렀다.100)
3월 26일 함평(咸平)에서 그 곳 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 시민에 의한 만세가 있었고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여러 면(面)으로 번져 나갔다.101)
목포(木浦)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준비가 진행 되었다. 목포의 만세시위는 4월 8일에 전개하였는데 당일 영흥학교, 정명학교, 보통학교, 상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기성인의 대열에 끼어 만세를 고창하였다. 특히 목포 상업학교는 약 1백 50명의 학생의 참가하였다.102)
4월 21일 우수영(右水營) 보통학교에서 운동회가 있었는데 이 날을 기회로 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하여 이곳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계획에 참여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윤인섭(尹仁燮)·전서봉(全西峰)·박기술(朴奇述)·박동수(朴東秀)·최이규(崔伊奎)·주봉옥(朱奉玉)·박규성(朴圭星)·박용문(朴用文)·이준섭(李俊燮)103)
4월 초에는 완도군(莞島郡) 완도 보통학교의 학생이 궐기한다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4월 7일 오후 9시경에 “대한독립만세 시작”이라는 벽보가 읍내 요소에 붙게 되므로서 군경은 긴장하여 완도 보통학교 학생 50여명을 검속하였기 때문에 학교는 일시 휴교상태에 들어갔다. 완도 보통학교의 만세 계획에 참여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김우진(金宇鎭)·차종화(車鍾和)·문종열(文鍾烈)·이철암(李鐵岩)·김기찬(金基贊)104)
3월 21일 제주도(濟州道)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理)에서 서당생도 등 약 5백~6백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운동의 계획추진에는 당시 서울의 휘문학교(徽文學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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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앞의≪3·1운동사≫(하) pp. 581~582.
101) 앞의≪3·1운동사≫(하) pp. 603~604.
102) 앞의≪3·1운동사≫(하) pp. 609~611.
103) 앞의≪3·1운동사≫(하) p. 620.
104) 앞의≪3·1운동사≫(하) p.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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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중이던 김시학(金時學)의 아들 김장환(金章煥)의 활동이 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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