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햄릿' 다시 읽기

작성자이민숙|작성시간19.01.02|조회수278 목록 댓글 0

(2018.12월. **신문 인문학 칼럼)

소문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명작 읽기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민숙



명작 읽기는 위험하다. 모든 명작들은 최소한의 오해를 뒤집어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통의 독자들은 그 오해의 비평적 관점을 자신들의 진정한 느낌보다도 훨씬 신뢰하면서 명작을 접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명작을 접하는 행위는 들려오는 소문을 개인적 철학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인내와 자부심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항간으로부터 들려왔던 보편적 진실보다 더 특별한 매력이 발견되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읽다보면 스스로 더 만족스러운 문학적 감동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읽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너무 유명해서 사실 모두가 다 읽었다고 착각할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쩐지 자신없어하는 책 중 하나임엔 틀림없다. 이야기 줄거리야 너무 뻔하다. 한 인간의 비극적 성장기, 한 왕궁의 비극적 피비린내, 한 삶의 피할 수 없는 운명......대립과 갈등, 죽음 속에서 펼쳐지는 클라이막스와 대단원! 얼마나 식상한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서사적 스토리를 읽기 위하여 ‘햄릿’을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왜 햄릿인가?

우선 햄릿을 통하여 오해되는 너무도 유명한 한 구절을 들여다본다. "To be? or not to be?" 독자들은 곧장 대답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은 이 지점에서 가장 어리석은 회의를 하고 우유부단하며 결정적인 죽음 앞으로 걸어가버린 운명에 처해진다고 재단되어 왔다. 성격 창조의 한 캐릭터로서 셰익스피어는 작가 스스로는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햄릿형 인간’을 창조했다는 오해를 뒤집어쓰고 만다.
( 독자여! 그대는 어떠한가? 햄릿에 대하여 그렇게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 호기심의 눈에 환한 등불을 밝히고, 다시 한 번 셰익스피어의 완벽에 가까운 무대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
“살인!”
“흉악한 살인이지, 최선이라 할지라도, 허나 이건 가장 흉악, 해괴, 무도하니라”
“서둘러 알려주면 명상처럼, 아니면 사랑의 상념처럼 빠른 날개로 복수에 돌입할 것입니다.”
“빠르구나.......” -- ‘햄릿 제 1막 5장’ 일부 내용--

햄릿은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면서 사건이 희대의 살인사건임을 알게 되며, 그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감성적 직관과 과학적 예측, 빠른 행동을 독자에게 보여주면서 속도감 있게 대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등장인물들을 손아귀에 넣고 종횡무진 무대를 휘젓는다. 지루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극의 사건들은 독자를 엮어간다. 막과 막이 거듭되면서 비극으로 시작된 서사는 더욱 더 비극적으로 치닫는다. 셰익스피어의 탁월한 구성능력은 전지구적으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그냥 슬픔인가?

비극은 존재의 밑바탕을 흔드는 구조로서의 비극이다. 존재의 밑바탕에 깃들어 있으면서 삶의 가장 극적 요소를 동원하여 느끼게 하고, 그 안에 인간의 혼합적 심리를 함께 깨닫도록 장치한 문학 장르가 바로 셰익스피어가 차용한 비극이다. 물론, 최초의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16세기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 가장 근대적인 요소를 도입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정도로 시대를 앞서 열었던 파격적 문학작품인 것이다. 그 시대의 혁명이란, 인간에게 내재된 보편적 정서인 종교적 복종심리, 다시 말하면 어둠 속에서도 그것을 어둡다고 말하지 못했던 비윤리적이며 억압적 피조물로서의 언어들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어코 한 시대를 뒤집어엎는다. 그 결정적 무대의 정점은, 회의적이면서 실존적인 자기성찰적 언어로 부조리한 삶의 구조를 뒤집어 보여주는 데에 있다고 한다면 ‘햄릿’은 그 시발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대,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데카르트가 과학적이면서 철학적인 방법으로 존재적 삶의 새로운 무대를 열었다고 한다면, 셰익스피어는 희곡형식인 비극을 통하여 존재의 가슴속 울분, 갈등과 부조리한 삶을 성찰하면서 문학적 선두의 역할을 해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햄릿’은 그러한 의미로서 복원되어야 할 문학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그저 유명한 햄릿으로만 읽었다면 그저 그러한 언어적 완벽성과 재미, 어떤 인간형으로서 창조되었기에 이리 흥미진진할 수 있는지....성격창조로서의 전범....대사 대사마다 드러나는 갈등 구조 속의 삶의 고갱이....그렇게 마무리하고 말 것이다.

(그점도 크게 나쁘진 않다. 문학작품이란 우리의 경험을 확장하는 도구로, 우리의 추상적 관념을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문제해결적 도구로서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해 왔다. 어렸을 때 접했던 셰익스피어의 감성적 언어들이 해지는 줄 모르고 도서관에 처박히게 했던 기억만으로도 그는 한 독자인 나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

다시 보는 ‘햄릿’은 등장인물의 배치도 파격적이다. 왕과 왕비, 권력자와 귀족들이 한데 얽혀 숨 막히게 극을 리드한다. 그들은 일순 수직적이지 않고 지극히 평행적이다. 계급적 속성이 이미 파괴된 형식이다. 그들의 대화나 서로에 대한 시선을 가장 인간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가장 문학적이다. 인간과 신, 유령과 현존인물이 완벽하게 횡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삶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 인물들은 우리의 현재적 삶에 초점을 맞추어 놓은 것처럼 ‘현대적’이다. ‘햄릿’은 한순간도 주체적이지 않을 때가 없으며, 논리적이지 않을 때도 없다. 주변의 인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불투명한 심리를 끝없이 밝히며 독특한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독자인 현대인이, 우리가 우리를 성찰하게 해 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가 그 시대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은 모든 고전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한다. 탁월한 작가들은 그 지점에 방점을 찍는다. 고전이라고 하면서도 신선하며 창조적인 감성을 선물해주는 읽기의 정수가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들려주기 어려운, 직접 읽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한 모금 차디찬 옹달샘물의 참맛!

‘햄릿’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그 오해가 오해로 끝날 수는 없다. 직접 읽으면서 서로에게 풀었던 오해의 텃밭이 더 밝고 더 거칠게 파헤쳐지는 시간들, 그것만이 셰익스피어가 펼쳐 보여주려 했던 문학적 다층성에 다가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층의 성 속에서 햄릿은 외친다.

“칼끝에 독이라고! 그럼, 독이여 퍼져라.”

비극은 독 속에서 살아야 하며 독 묻은 칼끝에서 죽어야 하는 인간의 삶이다. 그 독의 실체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정신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에 있다. 우리는 그 독을 극복할 수 있을까? 지금도 여전히 햄릿의 고뇌에 찬 포효는 우리의 귓바퀴를 배회하고 있는 듯하다. “To be or no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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