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되는 길
이동아
길은
이미 인화되고 있다
구름의 잔등 위
세월을 업은 그림자 하나
닻을 올린 생이
보이지 않는 약도를 펼친다
심장의 한쪽은
설렘이 가라앉고
다른 한쪽은
떠나려는 숨으로 가볍다
다뉴브 위로
달 하나 떠오르면
나는 그것을
눈이 아니라
길로 본다
찰칵,
소리는 없지만
발자국마다
빛이 눌린다
지상의 시간들이
보이지 않는 필름 위에
천천히
인화된다
풀들은 낮게 웃으며
말보다 먼저 번지고
나무의 손은
묻지 않고도 안부를 건넨다
새들의 화음이
흙처럼 깔린 길 위
나는 한참을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이미 지나온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푸른 초원 위
양떼 하나
순백으로 모여
움직이지 않는 기도가 되고
알프스의 서늘한 늑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간다
나는
그것이
올라가는 것인지
이미 인화된 장면을
다시 밟고 있는 것인지
한참을
구분하지 못하다가
문득
알게 된다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찍혀 있는 빛 속을
지나가고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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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되는 길
길은
이미 인화되고 있다
나는
따라가는 줄 알았는데
발자국마다
빛이 먼저 눌려 있다
이 길이
앞인지
뒤인지
모른 채
서 있다가
문득
알게 된다
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찍혀 있는 빛 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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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공감 (핵심 반전)
길 위에 서 있었다
앞으로 가는 것인지
이미 지나온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발을 떼면
앞이 되는 줄 알았고
멈추면
뒤로 남는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 더 가 보고
다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한참을
같은 자리에서
서성였다
이 길이
나를 데려가는 것인지
내가
이 길을 밟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발밑에서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 눌리는 느낌
나는 그제야
조금 더 천천히
걸어 보았다
발자국마다
무언가 먼저
새겨지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늦게
밟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찍혀 있던 빛이
나를 지나가게 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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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약도, 다뉴브에서 알프스까지
이동아
굽이치는 세월 업고 구름의 잔등에 올라
주안(主安)의 영토에서 맺어진 천생의 인연과
미지의 지평 향해 생의 닻 올린다
심장 한쪽엔 낯선 설렘의 침전물 싣고
남은 한쪽엔 자유로운 방랑의 영혼 태워
다뉴브 강물 위로 차오르는 은빛 달의 눈동자 보러
하늘이 미리 그려둔 비밀한 약도 펼쳐 든다
님이 넘어오실 길목마다, 예비된 은총의 모퉁이마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 대신 존재의 발자국 찍으며
지상의 시간 천상의 필름으로 인화(印畵)한다
풀들의 미소는 낮게 깔린 복음이 되고
나무의 손짓은 안부 묻는 성자(聖者)의 인사가 되는 길
새들의 화음이 옥토(沃土)처럼 깔린 이 고갯길 너머
푸른 초원의 양떼는 순백의 기도문이 되어
알프스의 서늘한 늑골 타고 천국 계단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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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월훨 후월훨
세월을 업고 구름위로
주안동 천생연분끼리
미지의 길을 떠난다.
짐 한짝 설레임싣고
또 하나에 방랑객 싣고
다뉴브 강가에 달님보러
천상에서 그린 약도따라
님오시는 길목 길목에
찰칵 찰칵 발자국 찍는다.
풀들이 미소 짓고
나무는 솟짓 하며
새들이 노래하는 이길은 이길은
님이 넘어올 고갯길
푸른 초원위 양떼들
알프스산 계곡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