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일기와 쿠팡맨
이 지영 (약학 89 - 93) 중앙일보 문화팀장 · 본지 논설위원
드라마 ‘전원 일기’ 를 가끔씩 본다.
TV 리모콘을 돌리다 김 혜자 · 최 불암 · 고 두심 등 익숙한 얼굴의 젊은 모습을 보면 반가운 마음에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그런 시청자들이 꽤 많은 모양인지 요즘 ‘전원 일기’ 를 방송하는 케이블 채널이 여럿이다.
1980 년부터 2002 년까지 방송됐던 ‘전원 일기’ 는 한국 방송사에서 전설적인 작품이다.
최 장수 드라마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뿐더러 농촌의 인정과 애환을 잔잔히 풀어낸 수작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 본 ‘전원 일기’ 엔 깜짝 놀랄 장면이 많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공해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기억과 달랐다.
권위주의적 · 가부장적 문화에 성차별적 언행이 거침없이 펼쳐졌다.
이부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이들에게 술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은 차라리 별문제 없어 보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폭력에 너무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1987 년 방송됐던 300 회 특집 ‘곳간 열쇠’ 편만 해도 그랬다.
집안 살림 주도권을 놓고 시어머니 (김 혜자) 와 큰 며느리 (고 두심)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극 중반 큰 아들 (김 용건) 이 갑자기 자기 아내의 뺨을 때렸다.
어머니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게 이유였다.
‘전원 일기’ 에서 가정 폭력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온화하면서도 올곧은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돼온 큰 아들의 폭력은 충격이었다.
아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나, 걱정까지 됐다.
그런데,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 그날 에피소드에서 그 일은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그저 일상으로 처리된 것이다.
당시의 TV 비평 기사는 어땠는지 옛날 신문을 뒤져봤다.
“세대 교체의 아픔, 아름다움으로 승화” (중앙일보), “작품성에 충실한 드라마” (경향신문) 등 호평 일색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최근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로 시작하는 ‘뽀뽀뽀’ 주제가에 “엄마가 출근할 때 뽀뽀뽀” 로 시작하는 2 절이 새로 생겼다.
워킹 맘이 늘어난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쿠팡의 배송 직원을 부르는 명칭은 지난달 ‘쿠팡맨’ 에서 ‘쿠친 (쿠팡 친구)’ 으로 바뀌었다.
여성도 하는 배송 직원이 왜 쿠팡 ‘맨’ 이냐는 여론 때문이다.
가정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부터 쿠팡맨이 불편한 시대까지 30 여 년을 우린 한달음에 달려왔다.
인권 감수성, 성인지 감 수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변화에서 뒤처지는 순간 사고가 터진다.
서울 시장 · 부산 시장이 동시에 공석이 된 현실도 어 쩌면 그 결과가 아 닐까 ?
‘전원 일기’ 시대를 거쳐간 모두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