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성북동 언덕위에 위치한 홍익고등학교를 배정받았다. 삼선교에서 내려서 개천을 따라 한참이나 올라
간 후에, 다시 가파른 언덕길을 비지땀을 흘리며 올라 다녔으니, 나의 두 다리도 어지간히 고단했을 것이다.
지금도 걷는 것을 좋아하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니는 습관이 나의 초. 중. 고 시절에 단련이 된 듯싶다.
성북동도 예전에는 달동네로 유명했던 곳이라 우리학교는 깡패들이 많기로 악명이 높았다했고, 고교평준화가
실시되면서 홍익재단이 학교를 인수하여 새로운 건물을 짓고 학생들을 받았지만, 학교분위기는 살벌하기가 그
지없었다. 선생님들은 이전의 학생들을 다루던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채, 심한 욕설과 체벌로 학생들을 옥죄
었고, 아이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그런 환경에 길들여져 갔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중학교 때 보다는 성적이 많이 향상되었지만, 도무지 학교에 애착이 가질 않았다. 인격적으
로 흠모할만한 선생님도, 본받고 싶은 인생모델로서의 선생님도 찾을 수 없는 탓에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겨울이 되면 새까만 동복에 '불조심'이란 글씨가 새겨진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도 유치하기만 했고, '중앙
고등학교'를 비롯한 몇몇 학교에서는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데모가 일어나 그 소식이 학생들 입에서 입으로 전
해지곤 했는데, '진달래꽃'이니 '국화 옆에서' 따위의 유약(?)한 시만 외우게 하는 교실 수업에 흥미를 느낄수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이었던 교회생활에도 회의가 찾아왔다. 기독교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아니라, 교회지도자들
에 대한 위선의 냄새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기쁨과 감격과 깨달음의 그 오묘한 맛을 시간마다 순간마다 경험
해야 하는데, 단지 몇 년 동안 교회를 다녔다는 '관성'에 의해서 교회를 출석하는 건조한 삶이 계속되었다. 그런
답답한 생활속에서 당시 내가 찾았던 내 삶의 돌파구는 공부밖에 없었고, 그 돌파구를 향해 내 모든 에너지를 드
라이브해 나갔다.
삼양동에서의 세 번째 셋방살이, 그 집에는 작은 다락방이 있었다. 단칸방 옆에 딸린 조그마한 부엌, 그 부엌의
높이를 최대한 낮추고 그 위에 만든 공간이다. 여름이면 찜통이요,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인하여 지독히도 골이
아팠지만, 조그마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밤을 새워 공부를 하고 아침이면 코피를 닦아내고 학교를 가는 생
활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올챙이복(=교련복)'을 입은 채 '삼양동 15단'에서부터 보무도 당당하게 뚜벅뚜벅 언
덕길을 내려 갈때면, 아침햇살이 온몸 가득히 나를 비추며 나를 축복하는 듯했다.
저녁이면 과외하는 아이들로 단칸방은 비좁고 꼬랑내(?)가 진동을 했지만, 어머니는 방 한 구석에 묵묵히 앉아
뜨개질을 하시고, 공주같이 어여쁜 내 여동생은 어머니곁에 바싹 붙어 그림책을 뒤적이며 나름대로 면학분위기
를 맞춰주는듯 했다. 아이들이 가고나면 그런 내 동생이 너무나 이뻐 기타를 들고 동요나 가요를 부르며 동생과
놀아주곤 했다. 삶은 고단했지만 그런 순간 순간의 추억들이 마치 앨범속에 끼어둔 단풍잎처럼 내게 미소를 짓
게 만든다.
당시 삼양동에는 여러 개의 독서실이 있었는데, 개인 공부방을 따로 가진 아이들이 거의 없던 탓에, 호황을 누리
는 업종이었다. 다락방에서의 공부에 조금씩 지쳐가던 나는 어느 날, 독서실을 찾아 나섰다. 삼양극장 옆에 위
치한 2층 건물의 독서실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하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선배들을 만나니
기분전환도 되었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한 여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검정고시를 통과해 대입공부를 하
고 있었는데,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던지 종아리의 혈관이 터져 한동안을 붕대를 감고 다니기도 했다. 결국 그
녀는 그 해에 고대 법대에 입학하여 '삼양동의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 내렸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 얼굴은 지금도 눈에 선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서 솟구쳐 오른다.
1학년 여름, 교회 학생회에서 청평유원지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좌석 칸을 놔두고
일부러 짐칸에 올라 둥글게 모여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며 웃고 떠들다가, 이따금씩은 열차 난간에 서서
온 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전원 풍경을 음미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행복했고, 상큼
했고, 낭만을 배워가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던가?
수련회를 떠나기 전부터 내 마음속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이다. 김보순 친구는 그 당
시 인기절정이었던 영화 속 '타잔'처럼 수영을 잘하는데, 나의 어설픈 개구리헤엄으로 친구들 앞에서, 특히 여학
생들 앞에서 쪽이 팔릴 것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치를 않았다. 그래서 유원지에 도착한 그날 밤, 모두가 잠든
시간을 틈타 혼자 물가로 나갔다. 서너 시간 열심히 연습하면 그까짓 것 웬만큼은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였
다. 한여름이라 해도 밤의 강물은 차가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생각보다 물에 쉽게 뜨는 것이 아닌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가만히 물에 누워있기만 했는데도 두둥실 두리둥실 내 몸이 잘도 움직이는 것이다. 신나부러~
그러다가 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일순간
두려운 생각에 몸을 자유형 폼으로 바꾸자 물속에 꼬르르~ 잠기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허둥지둥, 살기위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마침 강가에서 야영을 하던 해병대 군인 아저씨 몇 명이 소리를 듣고
구조에 나섰다. '죽다가 살아났다'는 말을 절절이 실감한 순간이었다. 아무도 몰래 다시 텐트로 들어와 오뉴월에
학질 걸린 강아지모양 바들바들 떨다가 아침을 맞았다.
컨디션은 별로였지만 점심 식사 후에 아이들과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노는데, 갑자기 물 위에 이상한 물체가 둥둥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배순희 친구의 브라자 속의 '뽕'이 빠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순희의 하얀 젖가슴
까지 그.만 우리는 보.고.말.았.다! 다행히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이 나와 김보순 두 사람에 불과했
지만, 그날의 일은 잊지 못할 그 시절의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날, 유난히도 구슬프게 비가 내렸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우리는 모두 '비 맞은 생쥐 꼴'
이 되어 서울에 도착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각자 집으로
해산하기 전에 교회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질 수가 없었고, 집으로 돌
아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며칠동안 TV와 라디오에서는 육영수 여사가
좋아했다던 가곡 '목련화'와 함께 추모음악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나왔다.
답답하고 착찹한 마음을 겨우 다스리고 다시 공부에 전념하던 중, 삼양동 독서실에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내 옆자리에 앉아 공부를 하던 '세광고등학교'학생 한명이 독서실에서 죽은 것이다. 당시 공부하다가 휴식이 필
요하다 싶으면 아이들은 독서실 옥상에 올라가 간단한 운동도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삐딱한 친구들은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기도 하는 그야말로 '자유공간'이 있었다. 공부를 핑계삼아 합법적(?)으로 외박을 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고, 그래서 일부 부모님들은 독서실을 '탈선의 온상지'로 여기기도 했다.
어느 날, 공부를 하다가 옆자리의 친구에게 사인을 보냈다. 잠시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옥상에 올라갔는데, 이미
여러 아이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이야기를 하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갑자기 '펑!'하는 소
리와 함께 친구는 쓰러졌고, 살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옥상에 나뒹굴던 굵은 철사 줄을 들고 휘휘 돌리다가
건물 옆의 고압선을 건드린 것이다. 친구는 바로 숨이 끊겼고, 그것을 지켜본 친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삶
과 죽음의 경계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생생하게 목격한 것이다. 매스컴은 그날의 사건을 크게 다루기
시작했고, 친구의 부모님은 독서실로 관을 옮겨 농성에 들어갔다. 삼대독자를 잃은 부모님의 슬픔도 말할 수 없
이 컸겠지만, 나 역시 괴로움에 잠을 못 이루었다. "내가 옥상으로 가자는 말만 안했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자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더 이상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도 없었기에, 다시 다락방에서의 외롭고 힘든 공부
가 시작되었다.
1학년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한해가 저무는 시기에 나는 '위문단'을 조직하여 군부대 공연에 나섰다. 뭔가 보람이
있고, 뜻깊은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들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당시 휴전선 부근에서 발견된 북괴땅굴로 인해 국민
들의 '반공의식'이 더욱 고조되어 있는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서라벌고 밴드부에서 드럼을 치던 김상호, 전당포집 아들 권정환은 기타를 치고, 천화상과 쌍둥이 자매 은경이와
진경이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사회를 보며 약장수멘트와 만담 몇 가지를 준비하고, 김보순이와 그 밖의 친구들은
단막극같은 것을 준비하여, 강원도 화천 사창리의 어느 포병부대를 섭외하여 위문을 떠났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산 비탈길과 계곡들을 지나 깊은 산속에 위치한 부대에 당도하니 대대장과 몇몇 간부들이 우
리를 반겨주었다. 군인들이 산에서 직접 잡은 '산토끼'를 넣은 떡국을 맛있게 먹고, 커다란 식당에서 본격적인 공
연에 들어갔다. "두두두두두...빠라바밤...쾅쾅!..." 근사한 드럼소리와 함께 막은 오르고 거의 '광란수준'의 뜨거운
밤을 보내고, 적막한 내무반 침상에서 취침을 알리는 조용하며 구슬픈 취침나팔소리와 함께 우리는 잠을 청했다.
1974년, 한 해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박상욱(12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7.07 안녕하세요? 건설현장에서는 그런 일들이 다반사죠? 늘 긍정적이며 밝게 사시는 듯한 선배님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홧팅!
-
작성자유창렬(7회,총동문회장) 작성시간 09.07.10 한편의 드라마 같은 영상을 보는 듯 하네요. 위문공연때 진경이가 박진경 후배... 어전지 그때 실력이 지금까지도 나타나는구먼...그리고 수영코치까지 아무튼 즐거운 추억입니다. 감동적이고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상욱(12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7.10 회장님, 무더운 날씨에 건강하시죠? 동문을 위해 늘 열심히 일하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진경친구하고는 공유하는 추억이 많이 있지요. ..늘 행복하시길...
-
작성자김경숙(13회) 작성시간 09.07.10 와우~ 역시 선배님은 남들 전 인생을 통해 겪기 어려운 일들은 어린 나이에 참 많이 겪으셨네요~~ 채숙후배와 비슷한 환경이었던 것 같은 제게는 모두가 신기한 이야기~~ 그렇지만 어딘가에서 늘 있어왔던 일들이겠죠?? 가슴아픈 일이든 행복한 추억꺼리든~~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상욱(12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7.10 <삼양동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밝혔지요. 인생 전반을 통해 겪을 일들을 삼양동의 짧은 시절을 통해 거반 다 경험했노라고..."신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함은 감사할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