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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소식

전통종교의 게으름 (박문수/ 삶과 종교) - 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4.04.08|조회수21 목록 댓글 0

작년부터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영성 프로그램들을 체험해왔다. 우선 나 자신이 궁금한 게 많아서였고 마침 책임을 맡은 영성관련 연구 프로젝트도 이행해야 했던 탓이다. 나는 참여할 때 가능하면 종교 배경이 없는 프로그램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였다. 체험 시간이 짧아 그 내용들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의도는 잘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이 프로그램들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사실 가톨릭 시설에 종사하는 사회복지사들을 위한 영성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서였다. 알다시피 사회복지는 휴먼 서비스를 대표하는 직종이다. 게다가 사회복지는 종교 못지않게 봉사 직종이라는 인상이 강해 종사자들의 스트레스가 큰 편이다. 그런데 최근 이들이 소진(burnout)을 호소하고 있다. 사랑(자비)을 나눠주어야 하는데 사랑이 고갈되어 남에 대한 봉사는커녕 자신들이 봉사를 받아야 할 처지라는 것이다. 

 

공감이 업인 이들이 공감피로에 빠져
실제로 이들은 저임금에 높은 투신을 요구받고, 가끔 클라이언트로부터 비인격적 대우도 받고 있었다. 복지에 경쟁논리가 도입되면서 부터 감정노동을 해야 할 상황도 일상적으로 존재하였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공감을 업으로 삼아야 할 이들이 오히려 공감피로(compassion fatigue)에 빠지게 된 것이다.

주변으로 눈을 돌려보니 사회복지사들만 이 문제를 겪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모든 직종의 종사자들이 이 증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당연히 종교인도 예외일 수 없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이 고통의 해결을 위해 힘써야 하는 이들이 도무지 이런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내가 이런 예를 들며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짐작하실 터이다. 그렇다. 사실 난 성직자는 아니지만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 이러한 사태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다들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정작 종교에서 마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서다.
게다가 더 마음이 아픈 일은 탈종교를 표방하는 영성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핵심 내용들을 종교에서 빌어다 쓰고 있어서였다. 사용하는 언어와 기법을 뒷받침하는 논리들은 달랐지만 내용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방법들이 종교인들에게 조차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더욱 안타까웠던 일은 종교인들이 이러한 방법들을 전파하는데 더 열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전통 안에 있는 소중한 정신적 영적 자산들을 계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과학적 외양을 띤 이 방법론들을 전파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던 모습은 이 시대에 종교가 겪는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가만히 이런 사태의 원인을 생각해본다. 분명 주요 종교전통들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소진 · 공감피로를 해결할 수 있는 검증된 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왜 현대인들, 심지어 그 종교에 속한 이들조차 이 방법에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설마 주요 종교전통들은 과거에만 실효성이 있었을 뿐 현대 문제에는 해결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기존 종교전통들에 실망하다 못해 절망에 빠져 더 이상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일까? 다른 종교는 모르겠고 우리 집안을 살펴보면 문제의 원인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최고, 있는 텃밭이면...성장의 과실에 취한 전통종교 
첫째, 종교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교리, 제도, 전통을 수호하는 일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일 터이다. 자신이 최고인데 달리 누구에게 배운단 말인가? 설사 시도해보려 해도 교리에 맞느니 안 맞느니 말을 듣게 된다. 그럼에도 시도를 하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의 뜻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동네북이 되기보다 조용히 사는 쪽을 택한다. 새로운 시도가 이뤄지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 모든 게 한마디로 ‘지키는 일을 능사’로 알아서 생기는 문제다.

 

두 번째는, 지키는 일이 능사가 되다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제도만 보인다. 지키는 일만 해도 따르는 신자들이 넘치니 그 밖의 다른 욕구를 가진 신자들, 더 나아가 종교 밖에 있는 이들의 사정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 있는 텃밭만 잘 관리해도 칭찬을 듣는데,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 굳이 말들을 필요가 있겠는가?

 

세 번째는, 우리만이 아니라 불교도 좀 게으르다. 개신교는 예외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종교를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만큼 개신교는 새로운 시도들을 빨리 많이 하고 또 잘 한다. 아마 이 측면이 욕을 많이 먹으면서도 개신교가 가장 기대를 많이 받는 이유일 터이다. 그런데 천주교와 불교는 전통만 믿고 이를 현대화하는데 더디다. 더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 움직인다. 금고에 어마어마한 보화가 있다고 자랑만 할 뿐 이를 제대로 사용해 불릴 줄 모른다. 하도 사용하지 않다보니 신도들조차 없는 줄 안다. 그러면 없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사실 이런 방법이 있어도 안 해서 또는 안 살아서 알릴 방법을 모른다. 성장의 과실에 취해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성장의 과실을 누리기에 바빠 기둥이 썩는지, 지붕이 새는지 살피지 못한다. 이미 여러 전조들이 오래 전에 나타나기 시작했음에도 심각성을 모른다. 가슴 아픈 말이지만 나를 포함하여 많은 종교인들이 정작 그 종교에서 전하고 싶어 하는 깊은 맛을 못 보았다. 아니면 요즘 사회복지사들이 경험하는 증상처럼 무엇인가 주고 싶어도 다 말라 버려서 혹은 애초에 아무 것도 채운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간의 속성 다이어트 심리기법 넘는 종교의 보화 전파해야
불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을 두 가지 체험했다. 템플스테이와 위빠사나다. 위빠사나는 체험 이후에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기존 가톨릭의 성찰 방법과 비교하고 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놀라게 된다. 왜 진즉 알아보지 못했는지 후회스러울 정도이다. 이렇게 불교에 대하여 알아갈수록 우리가 가진 좋은 것들의 의미도 더욱 새로워진다.

 

이렇게 조금씩 불교를 깊이 알아갈수록 불교도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도 알아보는 이 보화를 정작 자신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다. 불교에서 개최하는 프로그램들에 이웃 종교인과 무종교인이 적지 않게 참여하는데 정작 자신들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진여자성을 찾기보다 기복을 더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영성 프로그램들을 체험하면서 이들의 한계도 보았다. 나름 오랜 노력 끝에 고안한 좋은 것들임에도 한 가지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마치 속성 다이어트 기법 마냥 허황된 기대를 갖게 하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참가자들은 그렇게 느낀다.

 

사실 몸으로 익히는 일이 그리 쉽진 않다. 오랜 시간 반복하며 지속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마치 며칠 만에 다 될 일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방향만 일시적으로 바뀌었을 뿐 곧 출발선에 섰을 뿐 목표지점에 이른 게 아니다. 해서 집에 돌아오면 며칠 지나지 않아 제자리다.

 

그래서 기존 종교들은 수고스럽더라도 자신들이 가진 보화가 본래 이런 기능을 가진 것이었으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을 가지고 있노라 설득해야 한다. 필요하면 요즘의 표현들을 빌어서라도 납득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말재주가 아니라 실제로 가르침대로 사는 이들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성직자들을 제도가 주는 권위에 안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누구나 종교를 가진 이들이라면 그 종교에서 권장하는 수행을 하고, 또 자기가 실천한 만큼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 그래서 종교 간 대화를 선도했던 대화문화아카데미가 내세웠던 표어처럼 우리 앞에는 ‘오래된 새길’이 놓여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간직한 보화를 빛나게 하는 일. 이 일이 현대인들의 심리적 고갈증상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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