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여시아사>는 ‘동아시아 불교의 황금유대’라는 화두를 가지고, 중국, 일본을 비롯해서 여러 나라의 현실불교에 대해 이해를 증진하는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현대 중국불교의 사상적 정체성, 발전의 동력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조박초라는 인물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의 글을 싣는다.
➊ 회차 - 조박초(趙朴初: 자오 푸 추 1907~2000)는 누구인가?
중국 사찰 여행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단아한 글씨체, 사찰마다 적혀 있어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글씨의 주인공이 바로 조박초(趙朴初)다. 필자도 항주 영은사를 가서 처음 조박초의 글을 접했다. 강택민 주석의 글과 조박초의 글씨가 함께 있던 영은사에서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으나 20년간 게으름으로 인해 그를 조명하겠다던 초심을 잊고 있었다.
▲ 조박초 서법 - 출처:블로그 <청경우독> |
아무튼 이러한 불교계 활동 때문에 어쩌면 한국에서 조박초는 서예가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조박초가 서예가로서도 이름을 날렸지만, 무엇보다 조박초는 온몸을 던져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 불교가 다시 꽃필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 준 재가불자인 거사(居士)이자 정치가였다.
조박초는 중국불교협회회장이면서, 동시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정치적 거물이었다. 더구나 최근 눈부신 발전 가도에 있는 대륙의 불교 현황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조망하는데 조박초의 역할이 기초가 될 것이다.
격동의 시대, 특히 종교는 아편이라고 외치는 공산당이 통치하던 중국 대륙에서 전전긍긍하던 불교의 불씨를 보존하여 오늘날 화려한 불교의 부활로 이끌어 주었던 인물이 바로 조박초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박초의 서예만 아는 것은 조박초의 편린을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래 그의 <임종게>를 읽으면서 조박초에 한 발 더 다가서 보자.
살아서 진실로 즐거웠으니(生固欣然)
죽어도 아쉬울 것 없네(死亦無憾)
꽃은 지면 다시 피고(花落還開)
물은 흐르고 또 흐르네(水流不斷)
나에게 무엇이 있을까?(我兮何有)
누구와 함께 안식하리? (誰歟安息)
밝은 달, 맑은 바람(明月淸風)
구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네(不勞尋覓)
조박초는 죽기 전 가족에게 자신이 죽으면 안구를 병원인 동인의원(同仁醫院)에 실험용으로 기증하고, 쓸 수 있는 장기는 최대한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나머지 쓸모없는 부분은 화장하되 유골이나 사리를 거두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 장례식의 수의는 본인이 평소에 쓰던 침대보를 말아서 사용하고,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일체의 허례허식을 행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 임종게>에서 노래한 대로 본인이 떠나는 길에는 구하려 애쓰지 않아도 쉽게 구해지는 ‘청풍명월’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니, 작은 물자라도 아껴 어려운 인민에게 베풀라는 뜻이 담겨있다. 임종게를 보면 불교도로서 조박초의 사상과 삶이 강하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그는 1928년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부터 불교에 몸을 담았고, 1980년부터 사망 시까지 20년 동안 중국불교협회회장을 역임하였고, 불교에 몸을 담은 후 평생을 채식과 불교 연구에 매진한 충실한 불자였다.
조박초는 9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니, 중국 역사에 있어 청(淸)나라, 격동의 중화민국, 현재의 중국이라는 격동의 3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1907년 11월 5일 중국 안휘성(安徽省) 안경(安慶)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조는 조백영(趙伯英)으로, 조박초는 그의 18대손이다. 13대손 조문해(趙文楷)는 청나라 가경황제 때 장원급제를 한 사람이며, 조문해 이후 4대가 계속 조정에서 높은 관리를 했다.
이 덕분에 유년기 조박초는 이른바 ‘고대광실’의 귀한 도련님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집 대문을 들어서면 16대손 즉 그의 할아버지에게 청나라 광서제(光緖帝)가 써 준 ‘사대한림(四大翰林)’이라는 편액이 자랑스럽게 걸려있었다. 이에 따라 유년기에 그는 충분한 한학적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비록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의 집안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어린 시절 배운 한학적 소양은 평생 그의 삶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1926년 오늘날 강소성 소주시에 있는 동오대학(東吳大學 : 蘇州大學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상해(上海)에 요양 차 갔다가 불교를 알게 되었고, 1928년부터 상해의 거사불교 단체 ‘정업사(淨業社)’에서 활동하게 된다.
(조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