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가 위주의 재가단체와 달리 민초들의 풀뿌리 모임인 ‘바른불교 재가모임’의 출발이 조계종단 총무원 권승들의 타락상에 대한 재가자들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위의 질문은 한국에서 재가 불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또한 한국승가는 재가신도들에게 무엇을 말하며 가르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여기서 재가신도들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이고, 승가는 재가신도들을 이끄는 사표이자 이들의 귀의처이다.
한국불교의 주류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말하면서 언제나 깨달음(悟)을 강조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설법에서 늘 강조되는 것은 망상과 알음알이가 없어지고 시비분별이 떨어진 상태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깨달음이야말로 궁극의 도달점이기에 승속을 떠나 모든 이들은 깨달음을 위해 살아야 할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깨달음이라는 피안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신도들에게 심어 놓았기에 소위 한국불교의 주된 가르침에서 깨달음 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하심이라는 명분 속에 스님 권위에 대한 굴종과 눈먼 신앙생활 외에는 찾을 것이 없는 현실이다.
경전의 독화살 비유에 있듯이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삶이 지닌 고통의 문제로부터 시작하고, 이에 대한 깨어있음(覺)에 근거한다. 연기실상을 깨달은 싯달타는 이제 깨어있는 붓다(覺者)로서 우리에게 깨어있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폈고, 스스로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승가는 재가신도뿐만 아니라 출가자 스스로도 깨어있는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깨달음만으로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 전부인양 가르친다. 승속을 떠나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도 그저 산 속에 들어앉아 방과 할로 세월을 보낸다. 크게 깨달아 깨어있음으로 간다는 대오각성이란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어있음은 사라지고 단지 깨달음이 목표가 된 미완의 한국불교 모습이다.
삶 속 깨어있음이 누락된 채 강조되는 깨달음의 공허함으로 인해 고요한 시비분별이 끊어진 자리에 간 들 그 다음이 없으니 승속을 막론하고 갈 길을 모르고 방황하게 된다. 돈점 논란으로 세월 보내고 깨달음 강조로 스스로 반쪽 불교로 자리 잡은 종단에서 깨달음 이후의 일은 분명 상실되어 있다. 승단의 경직된 체제와 성차별은 물론, 종단 출가자들의 낯부끄러운 파벌 싸움과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그들의 부정부패는 그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진정한 가르침의 부재가 원인으로 보인다. 부처님은 없고 그 자리에 스타 스님이 자리 잡은 것은 물론, 소욕지족의 청정승들은 사라지고 많은 권승들이 재가자들의 흡혈귀가 되어 신도들의 고혈로 주지육림 속에 빠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사회에서 바른 불교의 확산을 막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21세기에 들어선 이 시점에서 한국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바른불교 재가모임’이 처한 상황은 20세기 초 한국불교가 처했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한 세기 세월 속에 불교계 내외의 상황이 다르고 유신의 방법은 다를지언정, 당시 파사현정을 외치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장했던 만해 한용운의 문제의식에 대한 개선이 구태의연한 승가로 인해 여전히 이뤄지지 못한다면 사부대중의 구성원인 재가불자가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이어받아야 한다. 능동적인 재가 실천의 맥은 결코 짧지 않다. 대승불교 역시 종래의 출가교단의 권위주의와 보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일어난 일종의 재가신도 중심의 불교개혁운동이었고, 그에 근거한 유마거사의 불이법문이 한국불교의 기본 교리로까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국내만 거론한다 해도 재가 참선 수행을 강조한 백봉 김기추, 종달 이희익과 더불어 사회와의 관계성에 방점을 둔 박광서의 ‘참여불교 재가연대’ 움직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추태를 거듭하는 조계종단의 행태를 볼 때 이런 움직임의 지향점과 운동성이 승가의 청정함과는 무관하게 분리되어 각자도생의 모습인 것도 부정할 수 없으며, 이런 분열된 모습은 교단이 사부대중에 의해 이뤄진다는 가르침과도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사회라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불교를 보여주고 제시해야 할 재가단체의 모습은 주변에서 더 이상 찾기 힘들다.
20세초 한용운의 문제의식이 100년을 두고 다시 펼쳐져야 할 시점이다. 한용운의 불교유신론과 더불어 당시 활발하게 논의된 것이 포교의 중요성이었음을 상기할 때, 낡은 미완의 한국불교에 대하여 파사현정의 모습을 보여주며 삶의 현장과 분리될 수 없는 동체대비와 자리이타의 바른 가르침을 세워 승가와 재가 모두에게 제시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불교 개혁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구한말 당시에도 파사현정이 선행되지 않는 유신의 무의미과 더불어 ‘조선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았다’고 언급한 한용운의 고백처럼, 명망가나 특별한 이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각 개인들의 풀뿌리 연대를 통한 개혁운동이 필요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가르침과 거리가 먼 한국불교의 가르침과 행태에 좌절하고 실망했던 일반 재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바른 가르침을 세워 한국불교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다.
민초들의 풀뿌리 ‘바른불교 재가모임’이 지향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을 훼손하고 포교를 방해하는 집단에 대한 파사현정이며. 입전수수의 사교입선 사선입속(捨敎入禪 捨禪入俗)의 자세다.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가 그대로 수행이 되는 삶의 불교를 통해 말 많은 삶의 현장에서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 이러한 삶이란 보현행원품에서 이미 잘 언급되어 있듯이 수순중생(隨順衆生)이자, 일체극중고과 아개대수(一切極重苦果 我皆代受)의 실천이며, 이를 통한 상락아정의 바른 길이다. 일상생활 속에 동체대비와 자리이타가 녹아들어 따로 이름하여 불교다, 수행이다 라는 말이 부끄럽게 될 수 있도록 더 이상 권위에 굴종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걷는 자들의 모임이고자 한다.
옛 스님의 짧은 게송으로 정리한다.
붓다의 길은 자신을 아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자신을 잊는 것이며,
자신을 잊는 것은 세상 만물에 의해 깨어나는 것이다.
- 도겐 (道元:1200~1253)
우희종 서울대교수/불교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