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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소식

조박초, 상하이거사들과 만나다 (조환기/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04.03|조회수72 목록 댓글 0

1927년 나이 20세 푸른 청춘 조박초는 느닷없이 폐병에 걸려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보왕삼매경론>에서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교만하기 쉽나니”라고 하였지만, 활기찬 청춘이 죽음과 직면하면서 몸과 마음의 고통과 갈등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는 아픔이었다. 그러다가 어머니를 통해 마침내 상하이 조계(租界) 혼합 법정 대법관 관경지(關絅之;1879~1942)에게 의탁한다.

본래 조박초의 어머니는 무한(武漢) 사람으로 결혼 전 이웃에 살았던 관경지의 누나와 의자매를 맺을 만큼 친하게 지냈으며 결혼 후에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조박초는 그녀를 이모라 부르고 관경지를 외삼촌이라 부르며 자랐다. 관경지의 누나는 마침 과부가 되어 상하이로 와서 동생의 살림을 봐주고 있었다.

관경지는 상하이의 대표적인 명사로 정의롭고 명석한 관료였다. 그는 한 때, 중국의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孫文; 1866 ~ 1925)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기지를 써서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을 뿐 아니라, 세계열강의 압박 속에서도 지혜로운 판결로 여러 사람을 위기에서 구했기에 상하이 시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도 나이를 먹으면서 이런 방식으로 애써 보았자 결국 소모적인 노력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회의감이 밀려왔다.

나이 42세 되던 해 마침내 그는 불교를 통해 자신과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남은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고 불교에 귀의한다. 1920년경 관경지는 당시 뜻을 같이 하던 상하이의 명사들과 함께 근대 중국 최초의 거사수행단체 <상하이 불교거사림>을 만들었으며 죽을 때까지 철저한 채식과 수행, 빈민구제 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는 특히 정토종을 신봉했는데 만년에 그가 지인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술회한 다음 내용은 그의 철저한 수행생활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나는 42세에 삼보에 귀의한 이래 오직 정토신앙을 닦았다. 지금까지 20여 년간 바쁜 세상살이로 가끔 불교 공부를 초심만큼 해내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부처님의 명호를 간절히 부르며 기도하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한편 그는 죽기 전 가족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른, 아이 구분 없이 가족 모두가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애의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임종에 이르렀을 때 정업사와 <세계불교거사림> 도우(道友)들을 불러 함께 내 침상 앞에서 염불하여 나의 가는 길을 도와 달라. 이때 가족들도 모두 참석하여 같이 차분히 염불하면서 나의 왕생을 빌어주어 아름다운 인연을 종결짓도록 해 달라. 이렇게 해 주는 것이 울고불고 하여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보다 나의 왕생 길에 더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그가 조박초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가늠해 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조박초의 폐병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관경지는 조박초에게 자신의 거사회 업무를 조금씩 맡기며 불교 공부를 시키고 사무 업무도 가르친다. 특히 문서 작성 등은 냉혹하다 싶을 만큼 철저하게 훈련시켰다고 한다.


   1921년 <상하이거사림> 회원들은, 상하이는 서양의 혼탁한 문화가 몰려오는 곳으로, 내륙보다 더 속세의 시끄러움과 때가 많다고 하여 정업(淨業)을 닦을 별도의 도량을 마련하여 초심을 지켜내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전원의 동의를 얻어  <상하이거사림>을 둘로 나누어 원래 자리에 <상하이불교정업사(上海佛敎淨業社)>를 그대로 운영하고, 조금 더 조용한 곳을 찾아 <세계불교거사림(世界佛敎居士林)>을 세웠다. 이 두 거사 단체는 역사적 동란기에 상하이 시민의 정신적 안식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거사회가 성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관경지는 두 곳 다 관여했지만 특히 <상하이불교정업사> 운영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조박초가 1927년 관경지에게 의탁할 무렵 마침 사업가 형제가 자신의 집 각원(覺園)을 정업사에 기증하여 정업사는 이상적인 환경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된 시기였다. 정업사가 소재한 각원은 실내가 넓고 쾌적했으며 정원 안의 정자와 누각, 연못 등 환경이 매우 좋아서 성대한 법회를 열기에 좋았을 뿐 아니라 국내외 불교 인사들의 왕래와 행사 장소로 활발히 이용되었다. 이때 조박초는 관경지의 비서 노릇을 하며 정업사 일을 돕고 정업사 후원의 한 건물을 본인의 숙소로 사용했다. 

 

각원은 상하이에서 정원과 건물의 배치가 아름다워 호화롭지만 격을 잃지 않은 도시 속 숲 속의 궁전이었다. 꿈의 저택으로 누구나 한 번쯤 구경이라도 해 봤으면 하고 바랐던 곳을 선뜻 거사회에 희사하여 상하이 불교 발전에 힘을 다 바친 사람이 누구였을까? 아름다운 각원을 이야기하자면 사업가 형제 간조남(簡照南), 간옥계(簡玉階) 형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간조남 형제는 처음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에 ‘동성태(東盛泰)’라는 상호를 걸고 중국의 싸구려 물건을 일본에 내다파는 일을 시작으로 홍콩, 동남아 등을 수십 년간 전전하며 갖은 실패를 다하다가 마침내 남양형제연초공사(南洋兄弟煙草公司)를 세워 담배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 형제였다. 민국 4년(1915) 남양형제연초공사는 주식회사로 전환하는데, 이는 중국 기업 중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민국 5년(1916) 본사를 홍콩에서 상하이로 옮겨 온 후 두 형제는 상하이의 명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상하이에 왔을 무렵 남양형제연초공사는 한 때 남녀 직원이 도합 1만 여명이나 될 만큼 큰 회사를 일구었다.

 

형제는 상하이로 옮겨 온 그 해부터 상덕로(常德路)에 최고 일류 저택을 지었고 저택의 이름을 남원(南園)이라 불렀다. 간조남은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독실이 믿었으므로 남원의 서쪽 모퉁이에 불당을 짓고 이름을 ‘보리정사’라 하며 아침, 저녁으로 불경을 읽고 염불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자기 저택을 불교계에 희사할 계획을 세웠으나 민국 12년(1923) 병으로 사망하니 향년 54세였다.
간조남의 별세 후 남양형제연초공사는 그 동생 간옥계가 담당하여 경영했다. 옥계는 형의 유지를 받들어 형이 죽은 다음 해에 저택 ‘남원’을 그 안에 있던 불당, 회당, 정자와 누각, 가산과 연못 등을 포함하여 일체를 상하이정업사에 희사하여 상하이정업사는 그 후 상하이 불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공교롭게 조박초가 폐병에 걸려 상하이로 오게 된 시점에 정업사가 각원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고 폐병이 완치된 조박초는 관경지의 비서가 되어 각원 후원의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본격적으로 불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정업사가 아름다운 남원에 세워진 덕분에 정업사 분위기는 청정하고 장엄했다. 그래서 상하이 불교계 행사 대부분이 이곳에서 열렸음은 물론 국내외 불교계 인사가 상하이에서 행사를 할 때에는 대부분 이곳을 빌려 진행했다. 1929년 정업사에는 근대 중국 최초의 불교 출판기구인 상하이불학서국(上海佛學書局)을 세웠다.


또 1935년에는 ‘불교도서관’을 개관했는데 첫날 이용자가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불교도서관’은 세계불교거사림의 ‘불학도서관’과 함께 불교거사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상하이의 2대 불교도서관이었다. 불교도서관은 이용자가 폭증하여 얼마 후 별도의 건물을 지어 도서관을 운영할 정도로 상하이 시민의 불교 의식 제고에 큰 기여를 하였다.

 

또한 법회 모임인 정업연지해회(淨業蓮池海會)는 회원수가 1천 300여 명이 넘을 정도로 재가자와 출가자들이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고승대덕의 법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포교를 위한 잡지 <정업월간(淨業月刊)>과 영문 잡지 <불교영문잡지(佛教英文雜志)> 등을 발간할 만큼 그 실천력이 대단했다. 특히 영문 잡지는, 당시 중국에 있던 서양인들이 불교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불교를 서양에 포교하겠다는 원대한 뜻을 품고 시도했다고 한다.

 

1927년에는 상하이불교정업사 내에 난민수용소를 하나 마련한다. 전쟁이 그치지 않은 까닭에 당시 머물 곳이 없어 유랑하는 자가 많았다. 강소성과 절강성 일대에서 발생한 난민들이 상하이로 밀려들어왔으므로 난민수용소를 마련하자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수용소를 마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4일 사이에 500여명이 몰려왔다.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절 근처에 건물 두 곳을 빌리고 여자와 아이들 전문 수용소로 운영했는데, 이 두 곳을 모두 정업사에서 운영하였다.


당시 상하이 갑북기차역[閘北火車站] 부근이 전쟁의 피해가 가장 극심했으므로 수용소에서 긴급구조인력을 파견했다. 이들이 총알이 빗발치는 위험 속에서 수많은 난민을 구출해 내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수용소로 인도하여 많은 사람을 구제하자 상하이 각계에서 우호적인 여론이 대단했으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1934년 원영(圓瑛)대사가 상하이에 원명강당(圓明講堂)을 열자 조박초는 원영대사를 통해 정식으로 불문에 귀의하여 불경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원영대사와 관경지를 따라 고아원과 난민수용소 업무를 맡고 승병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조박초가 폐병으로 상하이에 온 이후에 상하이 불교계는 여러 방면으로 엄청난 변화와 발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서, 변화를 일군 주체의 하나로 중국 근대 불교 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대격변의 시기에 조박초가 공산당과 손잡게 된 사연을 집중 소개하고자 한다.

 

(조환기 - 조박초와 중국불교)/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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