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道人이란 흔히 세상의 이치를 추구하지만 세상과 저만치 떨어져 관조할 뿐 속된 세상과 섞이지 않는 인물을 말한다. 지금의 한국불교는 한마디로 ‘도인불교’라고 할 수 있다. 세속을 떠난 가치의 추구가 곧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를 ‘좀 안다고 생각’하는 불자들은 스스로 도인이 되고자 하거나 아니면 도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불자들의 수요에 맞추어 일부 스님들은 스스로 도인이 되거나 문중 전통 가운데서 ‘도인 이야기’를 생산 공급하고 있다. 불교를 쇄신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기획들이 대부분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은 이러한 도인불교가 여전히 한국의 주류불교로서 불자의 다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 본래의 ‘전통’은 무엇인가?
도인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 또한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도인불교의 프레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원조 도인이다. 도道의 완성을 위해 세속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가족마저 버린 분이다. 대웅전의 좌불처럼 늘 명상에 잠겨 눈을 반쯤 감은 채 세상을 관조하고 계신 분, 앉아 있지만 세상의 이치를 꿰뚫고 계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도인불교 안에서 불교 경전의 다양한 가르침은 결국 무상과 고 그리고 공의 가르침으로 요약되고 만다. 동아시아 전통의 선사들의 삶 또한 도인불교의 프레임 안에서 해석되고 확대 재생산 된다.
70년대 ‘낭만’이란 이름의 대학문화가 있었다. 폭음과 고성방가 그리고 노상방뇨는 ‘대학시절의 낭만’이란 이름으로 미화되고 심지어 또래 동료들과 선배들에 의해 ‘장려’되기도 했다. 좌절과 방황은 대학생이 되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다. 나는 낭만과 방황으로 표상 되는 이러한 대학문화가 한국대학의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참 뒤에야 나는 ‘낭만’과 ‘젊음의 특권’으로 포장되었던 70년대의 대학문화가 사실은 일제 식민지 청년문화의 잔재이자 70년대 유신 통치라고 하는 시대적 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식민권력에 의해 거세된 청춘들의 좌절의 표현이었으며 그리고 유신 통치의 폭압에 대한 울분이 부정적 저항과 자학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학시절 ‘전통’이라 생각했던 것은 전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불교가 ‘도인불교’를 불교 고유의 전통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불교는 고려시대 이후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조선조 오백년을 지났다. 사회적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떠한 발언이나 역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새로운 시대를 도모할 현실적 힘도 의지도 없었다. 시절 인연에 순응하면서 다만 바랄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이 변하듯’ 지금의 좌절과 역경의 세월이 쉬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조선이 망하고 반세기 오백년 만에 겨우 불교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열렸지만 이내 그 공간은 처음에는 식민지 권력,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서구로부터의 개화사상과 기독교에 의해 점유되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식민시절과 70년대의 왜곡된 대학문화가 한국 대학의 전통이 될 수 없듯이, 지금 한국의 도인불교는 바람직한 불교의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불교 본래의 전통이 아니다. 지금 한국의 도인불교는 오랜 세월 시대적 좌절과 현실적 한계 속에서 역사와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지 못하고 늘 그 바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부처님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였다
도인불교를 지향해 온 결과, 지금의 한국불교는 지혜만을 추구할 뿐 실천은 없는 불교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서 ‘세계관으로서의 불교’만 있을 뿐 ‘실천으로서의 불교’는 없다. 조계종단 종헌에도 ‘각행원만覺行圓滿’, 즉 지혜와 실천이 함께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 불교의 현장을 보면 실천은 늘 ‘부족’이거나 ‘부재’한 상태이다. 일반 불자들의 의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거나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고 한다. 그러나 왜 깨달음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 불교는 ‘세계관’이자 ‘실천’이다. 실천이 없는 세계관은 몽상이거나 공상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의식을 결한 불교는 늘 ‘과거’이며 오랜 ‘전통’일 뿐이다. 한국불교에서 소위 큰스님의 법문이란 일상적 삶에서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 아니다. 관념적이며 추상적인 세계관을 ‘훌륭한’ 법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도인불교에서 도인의 원조라고 여기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은 ‘도인’이 아니라 행동가였다. 그래서 부처님을 가리켜 ‘명행족明行足’, 즉 지혜[明]와 실천[行]을 두루 갖추신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에게서 지혜란 곧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당시 바라문들이 추구하던 ‘세 가지 지혜[三明]’를 비판하셨던 것은 그 지혜가 실천 행위를 결한 일종의 지식이자 세계관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부처님은 세속을 떠난 분이 아니었다. 한때 출가를 하셨지만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명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세속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세속의 그릇된 가치관과 집착을 떠날 것을 말씀하신 것이지, 세속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 또한 스스로 버린 것은 부귀영화에 대한 세속적 관심을 버리신 것이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선악정사善惡正邪의 판단과 실천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부처님은 세상을 떠난 분이 아니라 늘 세상과 함께 사신 분이었다. 부처님에게 ‘세속’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불교적 가치를 실현해야 할 곳이었다. 그리고 그 가치의 중점과 지향은 바로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었다.
이제 한국불교는 도인불교의 지향과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과 떨어져 세상을 관조하는 불교가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며 세상을 이롭게 바꾸는 불교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이와 함께, 생각하는 불교가 아니라 행동하는 불교, 관념으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불교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를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인식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미 여러 차례 강연과 글을 통해 강조하였듯이,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실천해야 할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에서 ‘내가 곧 부처’라고 하는 자각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팔정도와 바라밀을 실천하는 일이다. 흔히 팔정도와 바라밀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으로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팔정도와 바라밀은 ‘깨달음의 길’이자 동시에 ‘깨달음 이후의 실천’이기도 하다. 불교수행에 있어 깨달음의 추구와 깨달음의 실천 사이에 조금의 내용적 차이도 없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불교수행이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옳은 것’이며 ‘목적’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2015 화쟁문화아카데미 1회 종교포럼에서 조성택 교수가 발표한 <오만과 편견: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가? > 발제문의 첨부 자료다.
(불교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