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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소식

도법스님을 위한 변명 (허정스님/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5.12.15|조회수55 목록 댓글 2

화쟁위원장 도법스님, 근래 종단에서 도법스님처럼 비판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사람도 드물다.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래 그 비판은 끝이지 않고 있다.

그런 비판은 어디서 비롯되고 근거한 것일까? 2011년 7월 출범한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의 구성은 종단에서 기획실장, 사회부장, 교육부장, 포교부장이 참여하고 본부장이 추천하는 8인 내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출범당시 자승스님은 “도법스님만이 결사를 성공시킬 수 있으리란 확신한다”며 “기존의 중앙종무기관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내는 ‘작은 총무원’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결사추진본부 산하에 있는 화쟁위원회 화쟁위원장도 도법스님이 맡고 있는등 인원과 재정이 열악한 결사추진본부가 기존의 중앙종무기관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출범당시부터 지금까지 결사업무를 총괄하는 총괄부장도 6번이나 바뀌었다. 이제까지 지내온 결사추진본부는 마치 바짝 마른 당나귀가 엄청난 짐이 실린 마차를 끌고 가는 것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상황이 이러한 결사본부를 두고 어떤 사람은 도법스님이 총무원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도법스님 때문에 오히려 종단이 자성과 쇄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동안 결사본부가 추진해온 생명평화 천일기도, 종교평화선언, 야단법석, 무차대회, 붓다로 살자, 그리고 100인 대중공사등도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도법스님은 이것을 능력부족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고 비판자들은 능력이 없으면 그만 나오시라고 말한다. 내가 나간다고 종단이 더 좋아질 것 같으면 오늘이라도 나가겠다고 도법스님이 반박하자 ‘내가 옳다’는 자기 고집과 측근 몇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다시 비판 받는다. 그 비판은 이제 너무 일상화 되어서 종단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모든 원인을 도법스님 탓으로 돌리기에 이르렀다. 나도 도법스님을 비판해온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종교평화선언’은 바른 불교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고, ‘붓다로 살자’라는 운동도 말이 안되는 관념불교라고 비판했고 도법스님과 공개토론까지 했다. 장님코끼리 만지기 비유를 개시개비(皆是皆非)로 설명하며 그것이 마치 화쟁의 원리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도법스님을 비판해 왔으면서도 도법스님을 좋아한다. 도법스님은 우리 종단에서 몇 안되는 합리성과 열린 태도를 가진 스님이며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자신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도법스님과 실상사에서 6년 동안 함께 살았던 추억이 있다. 내가 실상사로 들어간 그 시절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든 좌절과 방황의 시기였는데 실상사와 지리산은 그런 나를 받아주었다. 그때 도법스님은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토론으로 공부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었는데 나도 그 토론에 뛰어들어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 토론이란 것이 참가자들의 의식을 상향평준화 되게 만든다는 경험을 하였고 어디에서도 내놓치 못했던 가슴속의 울분과 답답함을 해갈 할 수 있었다.

 

도법스님에게 왜 인드라망공동체, 귀농학교, 대안학교등 남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하느냐고 물으니 스님은 내가 잘나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우리종단에는 토론과 대화문화가 없어 언어를 잘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확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화를 하면 편 가르기와 감정싸움이 된다고 말했다. 스님은 당신이 하는 일들이 쉽거나 가능하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법스님과 함께 토론하고 탁발순례도 참여했던 내가 어느 정도 스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란 것을 나는 자연스럽게 인정한다. 그러하기에 도법스님의 사상과 불교관을 비판하면서도 나는 인간으로서의 도법스님 변명하고 싶은 것이다. 도법스님을 평가할 때 그가 하는 일이 단기간에 뚜렷한 성과를 내는 일이 아니란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붓다로 살자는 운동이나 100인 대중공사처럼 대화와 토론 문화를 가꾸는 쇄신결사는 몇 년안에 성과를 낼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이것은 승려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성찰을 하고 승가 전체의 체질변화로 나아가야 하는 일이기에 끈기를 가지고 천천히 진행해야 한다.

 

반면 화쟁위원회는 경우에따라 이번 한상균위원장의 경우처럼 시급한 당면과제를 다루는 일이기에 단기간에 결과를 낼 수도 있다. 신변보호와 노동법개정안에 대한 중재를 요구하며 조계사에 찾아든 한상균위원장을 맞이하여 조계사와 화쟁위는 최선의 노력을 하였다. 화쟁위는 평화로운 시위문화를 일궈내자고 각종교계에 호소하여 2차 총궐기대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고 한상균위원장이 자진출두 하도록 설득 하였다.

 

어떤 이는 도법스님이 부처님 품안에 의탁한 노동단체 대표를 3일 동안 잠도 못자게 괴롭혀서 결국은 쫓아냈다고 비판한다. 어떤 이는 한상균 위원장이 불덩어리였다면 그 불덩어리를 식히지 못하고 조계사 문밖 경찰에게 넘겨준 것은 무자비한 처사라고 분노한다. 민주화의 성지였던 명동성당이 이제 그 역할을 못하고 있듯이 이번에 조계사가 한 위원장을 쫓아냄으로서 앞으로 사회 약자들이 조계사를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화쟁위원회가 그동안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면서도 문제 해결 없이 그를 자진출두 시킨 것은 누가 봐도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이 부분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모두를 패자로 만들지 않은 일”이었다고 답한다. 지난 9일 오전 조계종 대변인은 일감스님은 기자회견을 통해 ‘조계사에 공권력 투입하는 것은 한국불교를 짓밟는 것이며 공권력 투입후에 벌어지는 모든 책임은 정부에 있음을 경고’했지만 경찰은 이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오후 4시 관음전 정문을 지키고 있는 스님들과 종무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며 관음전으로 쳐 들어갔다. 자승스님이 5시쯤 긴급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한상균위원장이 머물고 있는 입구의 문은 강제로 철거되고 한상균은 강제로 끌려나왔을 것이다. 종단 대변인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경찰들이 신성한 관음전으로 쳐들어 왔다는 것은 불교가 힘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고 정부가 무례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급하고 위태로운 순간에 자승스님은 퇴거시간을 확정하는 긴급기자회견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퇴거시간이 확정한 기자회견 탓에 경찰이 철수하자 도법스님은 다음날 정오까지 자진 출두하도록 그를 설득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사회 속에서 불교계의 영향력이 갖는 위상, 불통의 박근혜 정권, 경찰이 무자비하게 들이닥치는 상황과 조건을 감안한다면 도법스님과 자승스님이 무자비하게 약자를 쫓아냈다는 식으로 비판할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아쉬움이 많다. 화쟁위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야당대표 뿐만아니라 여당대표도 찾아오게 하여 대화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을 테고, 그것이 안된다면 노동법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위원이라도 불러내어 대화의 장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총무원 집행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생명평화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웃 종교인들, 농민들, 공무원들,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과 소통 해온 도법스님이 없었다면 자승스님은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그 산하에 있는 화쟁위원회도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화쟁위원회가 없었다면 이번에 한상균이 제시한 문제를 여당과 야당에 중재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번 사건은 능력없는 도법스님이 나서서 약자를 내 팽개친 것이 아니라 조계종에 능력없는 도법스님이라도 있었기에 그나마 불교계가 평화로운 시위를 중재 할 수 있었고 경찰이 강제로 문을 뜯고 한상균을 끌어내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었다.

 

이 같은 결과는 도법스님이 가진 문제의식과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아는 사람들이 그나마 도법스님을 갈등의 중개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온갖 비판을 받으며 갈등의 최전선에 서있는 도법스님에게 불자들은 오히려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비판의 화살은 도법스님같은 열정과 실천이 없으면서 자신들만이 불교를 위해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며 온갖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 자들에게 가야한다.

 

도법스님은 “중생이 겪는 고통의 문제를 외면한다면 종교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고통과 불행이 발생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나서야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법스님을 능력도 없으면서 오지랖이 넓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불교를 위해서 무엇을 해왔는가?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는 왜 도법스님처럼 중생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 뛰어들지 않는가? 그들은 도법스님을 비판하느라 바뻐서 시간이 없는 것인가? 도법스님은 한국불교의 문제는 불교인이 불교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 적극 동의 하지만 현실은 이 말을 하는 도법스님의 불교관 조차도 비판 받고 있다. 실제로 한 위원장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려 시도한 것도 불자들이었고 한 위원장을 끝까지 지키려고 한 분들도 불자들이었다. 각자가 불교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행동하였지만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비난이나 조롱이 아닌 대화를 해야한다. 상대방이 답답하고 고집스럽게 보여도 더 인내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대화를 해야한다. 대화는 존중이며 화쟁이며 사랑이기 때문이다.

(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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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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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반야심권오영 | 작성시간 15.12.16 일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나무보현보살마하살()()()
  • 작성자碧眼 김경숙 | 작성시간 16.01.25 나무석가모니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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