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육용사
광주에서 나흘 째는 육용사를 방문했다. 법당에는 법복을 똑같이 차려입은 재가 신도들이 경을 독송하고 있었다. 관음경을 독송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였는데, 비록 음율이 낯설었으나, 듣기에 좋았다. 신도들의 진지한 표정도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육용사는 남조 때인 587년, 양나라 무제가 캄보디아에서 모셔 온 부처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창건했다. 원래의 건물은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어, 989년 중건하면서 정혜사(净慧寺)로 개명했다. 그 후 소동파가 이곳에 들렀다가 6그루의 용수(榕樹), 즉 보리수 나무를 보고 육용(六榕)이란 글씨를 남겼는데, 그때부터 육용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육용사에는 혜능을 모신 법당이 있다. 송나라 선승들은 이 절에서 육조 혜능의 상을 모시고 수행하였다. 혜능 대사를 모신 육조당 앞에는 주련이 붙어 있었다. 두 눈이 먼 사람들의 글이라 여기에 올린다.
새소리와 꽃향기가,
마음에 만나는 것이 곧 도이며,
가는 구름과 탑 그림자가,
눈에 닿는 것이 다 선이다.
鳥語花香 會心卽道(조어화향 회심즉도)
行雲塔影 觸目皆禪(행운탑영 촉목개선)
- 육용사 육조당 주련
5) 대감사
대범사(大梵寺)는 육조단경이 설해진 곳이다. 지금은 황제가 내린 시호를 따라 절 이름이 대감선사(大鑑禪寺)이다. 대감사는 소관(옛 이름은 소주이다) 시내에 위치하고 있는데, 성역화 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 아직 초라하게 건물 속에 둘러싸여 있다. 절 안의 불상과 법구는 모두 근래에 복원하여 옛 멋은 볼 수 없었다.
육조 대사와 법해 스님의 상이 미륵불상 뒷편에 모셔져 있다. 단경은 소주자사 위거가 대사를 대범사에 초청해서 이루어졌으며, 상좌 법해가 법문을 기록하였다. 단경의 첫 머리를 보면 이 법회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혜능 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無相戒)를 주었다. 그 때 법좌 아래에는 비구·비구니·도교인(道敎人)·재가자 등, 일 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韶州)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儒家)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문인 법해(法海) 스님으로 하여금 설법 내용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후대에 이 법문이 널리 전해져 불법을 닦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를 이어받아서 서로서로 전수하게 하고, 의지하여 믿게 하며,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壇經)>을 설하였다.
- <돈황본 육조단경> 서언
[국은사 육조기념당 내벽 조형물]
혜능 대사는 마하반야바라밀의 법을 마하행, 반야행, 바라밀행 등 세 가지 행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마하행은 마음을 안으로 향하는 심행이다. 그러므로 바깥의 선악 시비와 싸우지 않는다. 그래서 큰(마하) 행이다. 반야행은 자성의 지혜로 비추는 관조(觀照)이다. 바라밀행은 관조를 통해 생멸의 경계(망념)에서 벗어나 피안에 이르는 행이다. <마하행 반야행 바라밀행>은 수행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
대사는 반야바라밀법은 입으로 외우는 데 있지 않고, 실제 심행(心行)에서 얻어진다고 강조하였다. 마하반야바라밀을 경전의 논리가 아닌, 수행으로 파악한 대사의 통찰은 참으로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경의 서두는 대사가 설하는 마하반야바라밀법이 단경 법문의 핵심임을 암시하고 있다.
6) 국은사
국은사에는 혜능 대사의 부모의 묘소가 있었다. 만년에 대사께서 생가에 절을 지어 부모의 은덕을 기렸으니, 이가 곧 보은사(報恩寺)이다. 보은사는 나중에 황제의 명으로 절 이름이 국은사(國恩寺) 로 바뀌었다. 단경에는 혜능이 만년에 여기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절 입구에는 신회(神會)와 법해 두 스님의 상이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법해는 단경을 편집한 사람이며, 신회는 대사가 입적한 지 20여 년이 지나 온갖 곤경을 겪으며 스승 혜능이 곧 선종의 여섯 번째 조사임을 천하에 알리고 다닌 사람이다. 신회 스님이 없었으면 혜능 대사가 육조(六祖)라는 사실은 영원히 세상에 묻히게 되었을 것이다. 육조단경 중에서도 가장 고본(古本)인 돈황본 육조단경은 신회 선사의 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혜능 대사는 사람의 본성은 청정하니, 본성을 보면 곧 성불한다(견성성불)고 가르쳤다. 일반 세속 사람들이 대사에게서 받은 인상은 오히려 성선(性善)에 가까웠다. 왕유와 유종원이 혜능 대사에 대해 남긴 글(비문)은 대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보여준다. 왕유는 혜능 대사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인욕행을 먼저 가르쳤다고 했다. 또한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은 이렇게 썼다.
(중략) 대사께서 남해에 숨어 있으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16년을 숨어 지내다 가히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짐작하여 조계에 머물며 사람들의 스승이 되었다. 배우는 사람들이 늘 수천 명이었다. 혜능 대사의 도는 무위(無爲)로써 유(有)를 삼고, 텅 빈 굴(空洞 공동)로 실(實)을 삼고, 넓고 탕탕한 것으로 귀(歸)를 삼았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는 처음에도 성선(性善)으로써 가르쳤고, 마지막에도 성선으로써 가르쳤다. 잡풀을 뽑는 호미를 빌리지 않고, 고요함으로 근본을 삼았다.
遁隱南海上, 人無聞知, 又十六年 度其可行,乃居曹溪,爲人師,會學去來嚐數千人。其道以無爲爲有,以空洞爲實,以廣大不蕩爲歸。其敎人,始以性善(시이성선),終以性善(종이성선),不假耘鋤,本其靜矣
- <유종원의 혜능 비문> 일부 인용
유종원은 대사가 사람을 가르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본성이 착한 도리(性善)로 이끌었다고 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혜능의 가르침을 맹자가 주장한 것과 같은 성선설(性善說)로 이해하였음을 볼 수 있다. 자성(自性) 이 청정한 도리가 인내와 관용을 지닌 선한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