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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세상

종교, 생명의 길을 다시 묻다 (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3.06.17|조회수29 목록 댓글 0

종교란 정말, 무엇일까? 종교는 과연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걸까? 또 우리 시대에 종교의 역할은 뭘까? 산업혁명에서 발아해 꽃피운 신자유주의로 세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발전하지 않으면 불행할까, 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무서운 속도를 내던 그 ‘발전’이라는 것이 무한 확장될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잘 가던 길을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이 딱 이러할까. 발전이라는 것, 오늘 우리 사회에서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경쟁 없이 조화로운 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함에도 발전을 좇으며 살고 있는 건 왜 일까? 친구와도 경쟁해야하고, 이웃 간에도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며 사는 우리네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발전이란 것은 어쩌면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하튼 방향을 잃고 길을 잃은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인류가 일정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집단투쟁이란 전쟁이 시작되었고, 문자를 사용하면서 계급이 생겨났다고 한다. 전쟁이란 것이 이유야 어떻든 평화를 깨고 화합을 가르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의하다.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종교전쟁이라는 이름의 전쟁들이 상당하다. 종교개혁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대립으로 벌어진 오랜 전쟁들이 그러했다. 현대에도 여전히 벌어지는 내전을 비롯한 전쟁들의 이면에 종교가 빠지지 않는 걸 보면, 종교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해도 갈등을 부추기는 주요한 요인을 제공한다는 점만은 부인하기 힘들 듯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전쟁을 사주하는 뒷배쯤 된다는 말인가? 오늘 우리들에게 비춰지는 종교의 모습을 살펴보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할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종교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이 애당초부터 각각의 종교를 자신들만의 울타리에 가두라 하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쩌다 자기 울타리에 갇혀버렸을까? 오늘의 지구는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그러하고, 생태계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모습들의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엔 인간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탐욕은 결국 괴로움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자각하도록 가르쳐주는 게 종교의 역할, 아닌가. 그렇다면 종교는 지금껏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종교인들이 모여 생명의 길을 묻는 자리가 있었다.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지고 사는 종교인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 천도교, 이렇게 다섯 종교의 종교인과 환경, 생태 관련 활동을 하는 단체 활동가들이 모인 ‘종교인 대화마당’이 용인에 있는 원불교 ‘은혜의 집’에서 열렸다.

 

“몇 년 전에 제가 어떤 자리에서 ‘당신이 볼 때 한국 기독교의 문제가 뭔가?’ 하는 질문을 받았어요. 저는 예수라고 하는 스승님을 기독교, 한국 교회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만나게 해 준 기독교가 제게는 참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없으면 교회를 만나지 못했을 텐데, 교회에서 예수를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건 역설이에요. 종교의 문제라면 교주를 왕따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예수가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설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지요. 그런 종교에게 길을 물어봤자 어떻게 길을 알까요? 교주에게 길을 묻는다면 알려 주실까요?”

 

‘종교, 생명의 길을 다시 묻다’란 주제로 모인 자리에서 이현주 목사(예수혁명교회)가 바라본 기독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게 어디 기독교에 한정된 모습일까. 종교란 이름 붙여진 그 무엇을 막론하고, 이 역설이 정설로 굳어버린 오늘의 종교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렇지만 생명의 길을 종교가 ‘다시’ 묻는다 했으니, 궁극적으로는 종교 본래의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들이 모여 만난 이 자리에서 종교는 어떻게 생명의 길로 찾아 들 것인지 궁금했다.

   
▲ 봄눈별의 칼림바 연주.

“오늘 이 대화마당의 주제가 길을 다시 묻는다 했는데, 그렇다면 종교가 지금까지 생명의 길을 묻긴 묻고 살았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종교를 생각하면 온 몸이 떨린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거 참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닌가요? 당시 상황은 히틀러가 등장하고 나치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요. 그런 때에 종교를 이렇게 생각하다니 말입니다. 그 당시 아인슈타인은 우주종교를 내세워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위험하다 했습니다. 또 종교가 없는 과학도 위험하다고 했어요. 핵 같은 걸 생각해봐도 정말 그렇습니다. 종교와 과학이 만나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에게 묻다/선출판사>를 이야기 서두에 꺼내며 말문을 연 도법스님(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 실상사 회주)은, 21세기 지구촌 시대, 우주시대에는 부처란 사람이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누구나 부처로 존재하고 또 누구나 부처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불교라고 하는 낡은 지식과 믿음을 버리고, 우리가 직면한 현재를 사실적으로 좀 보고 알고, 사실에 맞춰 일을 해나가야 할 거라 했다.

 

“한국 종교가 본래의 영성을 잃어버리고 그 조직을 움직이기 위해 더욱더 스스로가 민중을 소외시키는 괴물단지로 전락해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성당에 있지 않고 학교에 있는데, 저희 학교 아이들의 종파는 다 다릅니다. 아이들은 저를 신부라 생각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정도거나 가끔씩 통닭 사주는 사람으로 생각할 거예요. 그 아이들에게 도그마는 필요치 않아요.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란 도그마가 오히려 인간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더 차별하게 만들었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포용심 없는 간격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종교일 수 있나요? 각자가 갖고 있는 틀에서 떠나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북 영천, 한 시골에서 오래 전 폐교된 학교에 성당을 만들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정홍규 신부(산자연학교)의 생각이다. 본당신부로 있다가 본당을 떠나보니까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했다. 마을의 한 주민으로 살아가는 것, 할배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본성의 모습인 것 같다고도 했다.

 

이야기 손님 가운데 한 분인 전희식(천도교한울연대)대표는 ‘할 말은 아니지만’이란 제목의 자작시를 읊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어떤 상태, 어떤 몸일지라도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오늘도 그렇게 기도했다. (중략) 한 생명에 대해 그 누구도 죽을 때가 됐다거나 죽어도 된다고 말 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생명은 그 존재의 형상이 어떠하건 고귀할 뿐더러 무한한 가르침과 깨우침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잠시 젊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직시하지 못할 뿐이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구순의 어머니를 중환자실에서 8일 만에 일반 병실로 옮기자, 문병 온 지인들이 본인을 생각한다며 해 준, ‘할 말은 아니지만 살 만큼 사셨어. 인제 돌아가셔도 돼. 너도 할 만큼 했잖아. 이게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나? 죽을 땐 죽어야지.’하는 말들을 듣고 쓴 시라 했다. 생명을 시로 풀어주었는데, 참석자들에게 이 시는 생명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그렇다면 어떻게 종교가 본래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이현주 목사는 율라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율라는 나이가 몇 살이요 하고 물으면 마흔 한 살이라고 답해요. 다음 해 또 사람들이 율라 몇 살이에요 하고 물어도 또 마흔 한 살이라고 말해요.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는 것을 아주 힘들어해요.’ 이 목사는 작금의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는 이들을 일컬어 변절자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생각이 바뀌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안 바뀌는 게 오히려 문제 아닐까. 다만,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인데 ‘종교를 가진 사람은 그런 점에서 참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왜냐면 본래 종교라는 것이 우리들의 눈을 맑고 거룩하게 키워주는 쪽으로 작용하도록 돕기 때문이에요.’

   
 

도법스님은 이현주 목사의 말을 이어 받으며 임제선사의 말씀을 인용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곧 낡은 생각, 고정된 생각을 바꾸라는 이야기다. 전희식 대표는 지극히 낮은 곳, 지극히 좁은 곳, 지극히 미묘한 곳을 눈여겨보라는 말로 대신 했다. 옹알이하는 아이처럼 모든 기억이 다 부서지고 몸도 망가지지만, 그 역시 한 삶을 구성하는 것이기에 생명의 크고 작음은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는 말로 생명의 길 찾기를 일러줬다. 정홍규 신부는 ‘내가 누구였는지 알려면 과거 내가 누구였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커다란 우주론을 생각해 볼 때 작은 시시비비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한다는 말도 보태줬다.

 

아무리 큰 대의명분이 있고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 가슴에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항상 내 스스로가 기쁘고 즐겁고 흐뭇한가 이것부터 살피는 일은 참 중요하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가 기쁘고 즐겁고 흐뭇한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 나‘만’ 홀로 기쁘고 즐겁고 흐뭇한 상태란 과연 가능할까? 타자들의 삶을 담보한 나‘만’의 온전한 기쁨, 즐거움은 딱 잘라 불가능하다. 만물은 서로가 서로의 그물이 되고 그물코가 되는 이치 안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각자 저마다의 교리로 세상을 해석하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은 그야말로 각자의 목소리를 돋우는 자리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건 그저 기우였다. 오랜 시간 자주 만나온 이들은 돌아오는 8월 영양댐에서 만나, 파괴로 신음하는 모래강과 개발로 인해 생명이 송두리째 거부당하고 있는 우리 산하를 돌아보며 기도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단 한 생명도 고통 없이 모두가 기쁘고 즐겁고 흐뭇한 그 길이 곧 생명의 길이고, 진리의 길일 거라 생각한다.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져 그 전체가 또 하나의 빛깔이 되는 종교인들의 만남과 대화, 그자체가 한 송이 꽃이었다. 인디언 플륫과 칼림바 연주로 시작된 이번 종교간 대화 마당은 원불교가 주관단체로 진행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무릎을 맞대고 가까운 거리에서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준비했다는 정상덕 교무(원불교 영등포교당)의 말처럼, 이런 자리가 종교간 울타리를 허물고 소통의 오솔길을 만들 거라 기대한다.

 

-최원형의 생태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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