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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투 보살님 - 시골절 주지의 귀사일기 (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4.08.28|조회수48 목록 댓글 0

우리 절에 다니셨던 93세의 보살님이 작년에 돌아가시자 이제 87세의 김흥분 보살님이 최고령이시다. 그 보다 2살 적은 최영분 보살님은 자연스레 ‘넘버 투’가 된다. 최영분 보살님은 키가 작은 데다 허리가 직각으로 굽으셨다. 머리카락이 파 뿌리처럼 하얗게 센 보살님의 짧은 머리는 언제나 파마를 한 모습이다.

 

칠석 하루전날, 보살님은 택시비 1만4천원을 주고 절 앞 주차장에 내려서 계단을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오셨다. 
“시님! 내일 손주딸이 제주도 데려간다고 해서 오늘 미리 왔시유. 제가 이제껏 칠석날 한 번도 안 빠졌는디 이번에는 못오게 생겼슈” 
보살님은 절에 오시면 언제나 내손을 꼭 잡고 반가움을 표현 하신다. 내가  보살님이 전화를 주시면 모시러 갈텐데 왜 택시를 타고 오세요라고 물으니 보살님은 “전화거는 방법을 잊어버렸슈”라며 부끄럽게 웃으신다.
 
이 절에 처음 왔을 때도 보살님은 나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우리 손주가 경찰시험을 보는디 잘 좀 기도해주세유. 내가 그 은혜는 잊지 않을뀨” 이어서 낮은 목소리로 “시님이 기도 열심히 하시믄 신도님들한티 귀염 받어유” 내 기도 덕분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르지만 보살님의 손주가 경찰시험에 떡 붙었다. 보살님은 손주를 합격시키는 내가 도력이 높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를 볼 때 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보살님은 구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일과 밭일을 하시고 회사에 다니는 며느리 대신해서 부엌일까지 하신다. 죽으면 흙이 될 몸인데 아껴서 무얼 하느냐는 게 보살님의 생각이다. 어쩌다 보살님댁에 들리면 감자, 무우, 옥수수, 배추 등 농사지은 것들을 조금이라도 차에 실어 보내셔야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다.

  
▲ 기도하는 노보살님-<출처:휴심정>


보살님은 20살 때부터 우리 절에 다녔다하니 벌써 절에 다닌 지도 65년이나 된다. 그동안 주지로 계셨던 스님들 하나하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갖고 계시다. 어떤 주지스님은 신도들에게 귀염 받았다고 환하게 웃으시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주지스님을 떠올릴 때는 “그 스님은 개판이었슈”라며 얼굴이 굳어지신다. 숱한 스님을 모시고 절에 다녔어도 보살님은 아직 법명이 없다. “그 많은 스님들 중에서 누구에게라도 법명하나 달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하고 물으면 보살님은 “나는 그런 거 모르고 살았슈”라고 짧게 대답하신다.

 

슬하에 3남2녀를 두어 모두 시집장가를 보냈고 손녀가 딸을 낳아 증손녀까지 보신 보살님의 단점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져온 양초와 향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이 직접 꼽아야 한다. 법당에서 남의 멀쩡한 초를 촛대에서 빼고 당신의 초를 꼽는 것을 보고 나와 몇 번을 실랑이를 했지만 보살님 고집을 꺾기 어려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살님은 37세에 혼자 되셔서 5남매를 혼자서 키우셨다 한다. 게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바람기까지 있어서 살아있는 동안에 전답을 팔아 탕진하고 여인을 집으로 데려와 같이 살림을 하는 등 보살님을 많이 힘들게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그 원망을 이제는 세월이 데리고 갔는지, 아니면 그것도 지나간 추억이 되었는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보살님의 얼굴에는 원망의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할아버지가 전답을 팔아 집안은 거덜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남 좋은 일을 많이 한 턱이어서 그 복으로 보살님의 자손들이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신다.

 

보살님의 두꺼운 손과 자글자글한 주름과 굽은 허리를 보며 37세에 홀로되어 5남매를 데리고 살아 내어야 했던 고단한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어려운 시절마다 법당을 찾았을 발걸음과 법당에서 엎드려 부처님을 찾았을 보살님의 염불소리는 애절하고 간절했으리라. 그렇게 보살님의 온갖 푸념과 소원을 들어주시고 때로는 보살님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보아 주시던 부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법당에서 희미하게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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