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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인간적이기 위한 여유 공간 - 박병기의 법연한담 (불교포커스)

작성자여운 김광하|작성시간14.10.21|조회수89 목록 댓글 0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지속적으로 남기면서 우리 모두를 비인간적인 삶의 국면으로 몰아간다.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 마음 속에 여유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그 여유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일상 속 명상이다" _ 본문 중에서

우리 시대의 명상은 다양한 위상과 의미를 지닌다. 불교적 뿌리를 갖고 있는 이 명상은 논리적 추론을 통한 지식의 확대라는 현대 학문의 대표적인 방법론과 대비되면서 마음의 눈을 통한 내면적 시야의 확장이라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앞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을 볼 수 있는 육신의 눈과 함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함께 주어져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명상인 셈이다.

 

빠름, 바쁨, 불편함으로 가득 찬 시대
우리 시대는 명상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인터넷 망을 매개로 삼아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통해 쏟아지는 다양한 정보들이 대부분 신뢰할 만한 지식으로 정착하지 못한 채 떠다니고 있고, 어느 누구와도 진정성 있는 시선들을 오랫동안 나누지 못하게 하는 일상의 빠름과 바쁨이 나의 하루를 장식하고 있다. 그렇게 떠밀리듯 전철에 오르고 버스를 타거나 극심한 정체를 짜증으로 감내하면서 자가용 운전석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런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대체로 라디오 볼륨을 올리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담고 있는 시디(CD)를 꽂는 일 정도이다. 그러다 수다스럽기 짝이 없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목소리마저 귀에 거슬리면 거칠게 버튼을 불러버리곤 한다. 차는 더디게 조금씩 움직이고 깜박이도 켜지 않은 채 끼어드는 다른 차 운전자를 향해 욕설 같은 말을 작게 내뱉으면서 겨우 집에 도착한다.

그럴 때 집이 온전한 휴식의 공간이 되어주면 참 좋겠지만,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성화와 만족스럽지 않은 경제 여건, 또는 시댁이나 처가와의 갈등 같은 것들이 그런 온전한 휴식을 방해하면서 마음이 불편해지는 때가 더 많다. 우리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고타마 붓다의 말씀이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일 테지만, 그 고통을 직시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그저 억지로 잠을 청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명상은 그런 불편한 마음을 직시하는 일이고, 그 명상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상이 절집 같은 특별한 공간에서 따로 시간을 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휴가나 방학을 맞으면 꼭 그런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해보아야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상이 바로 그 증거이다.

물론 휴가를 내서 마음이 끌리는 절의 템플스테이 같은 프로그램을 찾는 일은 권장할 만한 방법임에 틀림없다. 명상을 하는 데 필요한 외적인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런 특별한 시간을 내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는 데서 생긴다.


휴가를 받으면 가족들과 함께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한다는 현실적 압박을 떨치기가 쉽지 않고, 휴가를 얻는 일 자체도 동료들과 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이 스밀 때가 있지만, 그 순간마저 애써 눈 감으며 충혈 된 눈으로 또 하루를 마감하곤 한다.

 

 

일상생활 속의 명상, 최소한의 여유 공간
어머니가 하나 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 같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위하여 자비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합니다. (중략) 살아있는 생명이건 아니건, 동물이거나 식물이거나, 기다랗거나 커다란 것이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행복하라.(『숫타니파타』, ‘자비의 경’)

 

법정스님의 유려한 번역을 통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행복과 그 행복을 향하는 자비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는 우리들은 나와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행복은 물론 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서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시간에 관한 관념을 체계적으로 정착시킨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다만 기억과 회상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기대와 기다림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이 순간뿐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시간관에 따르면, 이 현재의 순간마저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고정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찰나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흐름을 똑바로 바라보는 직시(直視)의 명상뿐이다.

이런 명상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서 우리는 원론적으로 그런 방법들이 충분히 있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서 실천에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답을 할 수 있다. 그 방법들 중에서 내가 주로 활용하는 몇 가지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산책 명상’이다. 산책은 일상 속 걷기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굳이 시골에 살지 않더라도 아파트 주변에 조성된 길을 걷거나, 일이 있어 광화문에 나왔을 때 시간을 내어 덕수궁 돌담길에서 교보문고 이르는 길을 걷기도 한다. 또 가능하면 한 정거장 정도 먼저 내려서 조금 먼 길을 일부러 택할 때도 있다. 화창한 날씨 속에서 걸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 걷을 때도 그 나름의 운치와 여유가 동반해주곤 한다.

걷기와 산책은 같은 말이 아니다. 누구나 걸을 수 있지만, 운동을 위해 빠르게 걷는 데만 치중하거나 목표 지점까지 가는 데만 집중하는 걷기는 진정한 의미의 산책이 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산책명상이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산책명상이 그 걷기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걷기에 마음의 여유와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집중을 조금 더할 수 있으면 바로 명상의 차원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호흡 명상’이다. 번잡한 전철 안에서 주로 활용하는 방법인데, 숨을 최대한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숫자를 헤아려가는 방법이다. 대체로는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까지 세는 것을 목표로 삼곤 한다. 실제로 해보면 108까지 끊이지 않고 세는 일이 쉽지 않을 때가 많다. 중간 중간 어느새 끼어든 이런저런 상념들이 그 과정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오늘 만났던 사람에게 들었던 불쾌한 말이나 시선이 떠올라 갑작스럽게 분노하기도 하고, 거꾸로 아부 섞인 칭찬에 괜스레 으쓱해지면서 순간적으로 헤아리고 있는 숫자를 잊어버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여러 번 반복하다가 드디어 끝까지 숫자를 셀 수 있게 되면 그 과정 자체가 좋은 명상이 되었음을 새삼 깨닫곤 한다.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명상에 잠기는 방법도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 시간이나 아니면 혼자서 앉아 있는 시간에 따뜻한 차를 한 잔 시켜 놓고 향을 음미하면서 하루의 일정을 살피거나 성찰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명상이 된다. 그러다 옆자리에 떠드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잠시 흐트러지지만, 그럴 때 커피 잔을 들어 코앞에 대면서 향과 맛을 다시 음미하는데 몰입하다보면 어느 순간 다시 나만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인간적이기 위한, 우리 삶과 공존하는 명상
어찌 보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은 경쟁에 기반한 외적인 풍요를 추구해온 우리 자신이 불러온 업보인지 모른다. 어떤 지점에서 그런 경쟁과 풍요가 필요하지만, 그것 또한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들일 뿐이다. 그 통제의 방법은 물론 각자가 자신의 환경 속에서 스스로 찾아가야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조와 성찰의 대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관조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일상 속 명상을 생각해보고자 했다. 바쁘다는 말과 정신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여유 공간을 내주지 않는 각박한 일상은 오래 견딜 수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치명적인 결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다보면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추락을 맞게 될 수도 있음을 우리 주변의 사례를 통해 확인하곤 한다. 그러면서도 조금 지나면 애써 잊어버리고 일상의 파고 속에 다시 몸을 맡기는 것이 우리 자화상이다.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은 재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어깨를 스친 사람을 향해 적대적인 눈길을 보내거나 받는 일은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지속적으로 남기면서 우리 모두를 비인간적인 삶의 국면으로 몰아간다.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 마음 속에 여유 공간을 만들어야 하고, 그 여유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 바로 일상 속 명상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잠시 육체의 눈을 감는 대신 내 안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음의 눈을 뜨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 삶과 명상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동이고, 그 공간이 바로 모두가 바라는 행복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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