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에 누워
천은사에서 화엄사까지는 걸어서 두 시간이면 넉넉합니다.
걷다보면 숲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도 만나고, 소와 닭도 만납니다.
걷는 그것이 즐겁습니다.
젖들마을 삼거리에 나무그늘이 좋습니다.
그늘 아래 놓인 평상은 어디서나 정겹고 평화롭습니다.
한담을 나누던 노인들이 돌아간 빈 평상 위에 몸을 뉘었습니다.
등줄기가 시원합니다. 하늘은 높고 푸릅니다.
흰 구름은 할 일도 없이 오가고, 멈췄던 매미소리는 다시 자지러집니다.
봐주는 이도 없는데 머리 꼭대기엔 나뭇잎이 쉴새없이 하늘거립니다.
일 없는 사람처럼 그 나뭇잎을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졸음이 찾아와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그대로 눈을 감으면 그만입니다.
기다리는 사람 따로 없고, 가서 서두를 일 따로 없으니 비로소 내 세상입니다.
세상사 이렇게 제쳐두면 될 것을 그저 죽는 시늉을 하며
빠득빠득 살아온 날들이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 지인 김재일 (1949-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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